소설리스트

20. (20/43)

20.

바다를 불러냈을 때 대가로 가져온 자수정 목걸이를 벗었다. ‘마르지 않는 갈증의 선물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눈앞에 둔 사람은 공포를 느낀다.

투이나는 한때 그녀가 샨과 시드룬을 그토록 두려워하게 만들었던 이유가 성큼 다가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신과 마법은 더 이상 내게 모르는 것이 아냐.’

게다가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일로 달라져 버린 사람을 무서워하다니.

투이나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웠다.

“대체 영혼의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걸 잃어버린 거예요?”

생각에 잠긴 시드룬이 멀대같이 큰 키를 기울였다. 적어도 키는 잃지 않은 모양이다.

시드룬이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보여 줄 수 있습니다.”

투이나는 입을 도로 다물었다.

‘호위가 있을 때는 안 된다는 소리겠지.’

그녀는 호위들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나 혼자 시드룬을 만나겠다고 하면 분명 반대할 거야.’

하지만 시드룬이 자신의 일을 밝히고 싶어 하는 대상을 명확히 한 이상 호위들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투이나는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기로 했다.

“레이벡처럼 시드룬도 마법의 부작용을 겪고 있다고 생각할게요. 언젠가는 낫겠죠?”

“그래서 당신과 연구 중입니다.”

“결국 모든 답은 영혼의 세계에 있다는 얘기네요.”

투이나가 아랫입술을 눌렀다.

“아르힘 님이 영혼의 세계에서 시드룬의 심장을 가져왔을까요? 그때 잃어버렸어요?”

“모릅니다. 심장이 없는 것도 지금 알았으니.”

마법사와 투이나의 바보 같은 대화를 듣고 있던 호루니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루가 님. 하지만 심장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 있단 소리죠? 설마 저자가 죽은 채 움직이는 괴물이라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시드룬이 투이나를 보았다.

투이나는 똑같이 대답해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원래 육체는 분리되면 죽습니다. 다만 분리된 곳이 영혼의 세계라면 여전히 영혼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혼이 상처를 낫게 해 준다고요?”

“아닙니다.”

시드룬은 적절한 말을 찾느라 꽤 헤맸다.

“영혼은 육체를 잘라내도 아직 끊어지지 않은 핏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내 영혼엔 마법이 있고, 그래서 꽤 질긴 핏줄이 된 모양입니다.”

“비유가 좀 징그럽네요.”

투이나가 무심코 말했다.

옆에서는 호루니가 진저리를 쳤다.

‘영혼의 세계에서 시드룬이 변했던 것도 그때의 영향인가?’

영혼의 세계에 갔을 때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던 이상한 물체가 아직도 생생했다.

회색으로 변하던 심장도.

투이나는 제 손에서 딱딱하게 굳어 갔던 심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만지면 까맣게 변하던 비늘처럼, 한때는 시드룬의 몸이었던 것들이 손만 닿으면 변해 버린다는 게 꺼림칙했다.

‘꼭 내가 죽음 같잖아.’

투이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아니라 얼룩병이 문제겠지만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과 병을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일 년 치 밥맛이 날아간 스카차가 중얼거렸다.

“마법이든 영혼이든…… 어쨌든 그게 복잡하게 섞였다는 얘기네요.”

“사라진 사람들 중에서는 사제님도 있었어요. 시드룬의 말대로라면 사제님의 영혼도 질길…… 가능성이 있으니 그분을 중심으로 찾을 수는 없나요?”

“영혼의 세계는 망망대해와 같습니다.”

위치를 모르면 못 찾는다는 소리다.

시드룬이 망충망실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낚을 만한 미끼가 있다면 구출할 수도 있습니다.”

“으음…….”

투이나는 난감해졌다.

“이름을 부르면 들릴까요?”

“그들이 살아 있다고 가정할 때, 영혼의 세계로 갔다면 자기의식을 유지하긴 어려울 겁니다. 육체를 노리는 편이 낫습니다.”

시드룬이 아무렇지 않게 무서운 가정을 곁들였다.

“영혼에 눌려 잊힌 육체가 강한 생존 본능을 느낄 때, 혹은 기억이나 돌아가고 싶은 욕망, 그리고 영혼의 세계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또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그들은 돌아오게 될 겁니다.”

투이나의 안색이 나빠졌다.

처음부터 준비를 했다면 모를까. 전부 타인보다 스스로에게 달려 있는 조건들이다.

“돌아오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가장 확실히 영혼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이로써 마법사에게도 부정을 받고 말았다.

‘신이시여…….’

투이나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기도보다는 훨씬 더 힘이 들어간 동작이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죠.”

시드룬이 물끄러미 투이나를 응시했다.

“왜 아르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투이나가 말끝을 흐렸다.

‘아르힘 님이 이미 그들을 포기하라고 말했다고 전할 수는 없어.’

모두 다 그녀의 고집일 뿐이다.

“그분께는 요구할 수가 없어요. 이미 주고 계신 분에게 더 달라 욕심을 부리는 짓이라서…….”

“나는 당신이 신보다 내게서 도움을 구하는 게 좋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이 빠진 투이나가 시드룬을 쳐다보았다.

그는 능글맞아야 정상일 것 같은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당신에게 줄수록 받을 게 많아질 테니.”

시드룬이 무언가 계산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재 보는 눈빛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무가치함이 서려 있어서 소름이 끼쳤다.

투이나가 다급히 대화를 끊었다.

“제 볼일은 이게 다예요.”

“돌아가겠습니까.”

“네.”

시드룬은 순순히 마법진을 열어 주었다. 순순하지 않으면 어떨까 생각하기 꺼려질 만큼.

‘시드룬은 다음에 내게 뭘 요구하려고 저러는 걸까?’

또 영혼의 세계를 다녀오는 것 정도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그것보다 힘겨운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이미 남들은 한 번 겪기도 힘든 일에 무뎌졌다는 반증도 되었다.

말이 영혼의 세계지 실은 유사 사망 체험 아닌가.

‘아아, 안 되겠어. 정말로 쉬어야지.’

투이나가 피로가 쌓인 목덜미를 눌렀다.

쉬어야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무심코 툭툭 넘겨 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일에 버거워하다가 사람들을 놓쳐 버릴까 봐 겁났다.

‘그리고…… 아르힘 님도.’

문득 그녀는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인 게 아닐까, 하고 서늘해졌다.

* * *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다른 사람의 집에 앉아 있었다.

지나치게 큰 집은 오백 년은 가뿐히 넘는 세월을 감당한 것처럼 보였다.

회색 수의를 입은 그녀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는 탁자에 두 손을 올리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손님이 도착하면 그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녀는 그걸 알았다.

도망치고 싶은데도 그녀의 발과 다리는 꽉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까만 호수가 그녀의 발목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떨고 있는 동안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비명은 지를 수가 없었다.

입 안에 수많은 알갱이가 버석거려서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라고 강요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입을 꼭 다물었다.

입 속에 문 이걸 지켜야만 한다는 의지만 강력하게 솟구쳤다.

호수로 계속 가라앉으면서도 투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로 입을 열지 않으리라.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때 뜨거우리만큼 강한 열기가 턱을 타고 전해졌다.

그녀는 흠뻑 젖은 눈을 들었다.

눈부신 빛과 앞을 가린 눈물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나타나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투이나에게 입 맞췄다.

자신이 품고 있던 알갱이가 그에게 전해지면서 투이나는 타오르듯이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대로 사라질 듯이.

* * *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

호루니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스카차가 그녀를 따라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투이나는 작게 신음하고 있었다. 파리한 눈두덩 밑으로 감긴 눈동자가 계속 움직이는 게 보였다.

“더워서 그런가.”

스카차가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들어왔지만 예전처럼 시원한 느낌은 없었다.

이미 그들의 계절은 여름이 되어 있었다.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잖아.”

호루니가 초조하게 깍지를 꼈다.

마법사를 따라갈수록 그와 투이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그 영향이 점점 아르힘까지 뻗어 오는 것 같았다.

‘구혼자들과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거예요, 루가 님.’

호루니는 한없이 슬픈 눈으로 기도를 올렸다.

‘부디 아르힘 님이 루가 님께 헤쳐 나갈 힘을 주시기를.’

라카인은 묵묵히 흰 수건에 찬물을 적시기만 했다.

감히 투이나를 직접 건드릴 순 없어도 어떤 더러움도 없어 보이는 깨끗한 천이라면 괜찮을 듯싶었다.

라카인은 자신이 수건을 쥔 쪽이 투이나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이중적인 태도인가 하는 버릇은 버렸다.

버렸지만,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사람은 두 명의 신을 섬길 수 없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투이나는 신이 아니다.

라카인은 자신이 투이나가 샨과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충실하게 그녀를 주군으로 섬겼다.

샨과 투이나가 결혼하면 어차피 둘 다 주군으로 모셔야 할 테니 아주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비록 샨이 아르힘을 죽여 버릴 생각으로 왔다고 해도.

「마음에 들면 데려가지.」

아르힘에 오기 전에 샨이 투이나에 대해 품평한 건 그것뿐이다.

그리고 그는 아주 많이 투이나가 마음에 드는 것처럼 굴었다.

그 장면들은 라카인에게 투이나가 주군이 될 거란 확신을 주었다.

옆에서 지켜본 투이나가 왕의 짝이 될 만큼 훌륭하다는 사실도 확인했기에, 라카인은 성심을 다해 둘의 성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투이나는 베인을 사랑했다.

갑자기 가슴에 격통이 느껴져서 라카인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는 가슴에 그득 차오른 답답함을 억지로 눌렀다.

사랑은 너무 큰 말이니까 그냥 연인이라고만 해 두자.

아주 약간이지만 흉통이 줄어들었다. 그런다고 나아지는 건 없었지만.

투이나가 베인과 연인이 되었기에 샨은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여럿을 사랑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사랑은 유일무이하지 않다.

모두 다 똑같은 애정은 아니지만 그녀는 주변에게 돌아가는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당신 또한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카인은 결국 투이나가 샨과 결혼할 거라고, 그러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왕이 허락만 한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그였다면 아무리 투이나가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표현한다고 해도 자신 또한 아껴 준다는 작은 신호에 만족했을 것이다.

더없이 행복할 텐데.

“…….”

라카인은 미지근해진 수건을 찬물로 내렸다.

그는 분에 넘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 소박한 행복은 투이나가 살아 있어야만 가능했고, 그건 이제 주군과 신을 향한 반역이 되었다.

왕이 명령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결코 바라서는 안 되는 마음이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라카인은 인정했다.

인정했으니 행동으로 나서야 했다.

* * *

태양이 내리쬐는 날들이 며칠 지나갔다.

그동안 투이나는 추모회를 지낸 뒤 설득을 거쳐 가며 진짜 무기를 사용하는 사냥을 준비했다.

원치 않게도 주로 설득하는 대상은 샨이었다.

“사람이 다치는 순간 그대로 끝이에요. 생채기 하나, 핏방울 하나도 안 돼요.”

“다칠 걸 감수하지 않고서 무슨 사냥을 한단 말이냐?”

“샨.”

“알겠다!”

더위 때문에 시원하게 드러낸 목덜미로 샨이 대답했다.

거만한 자세로 무릎을 세운 샨이 재우쳤다.

“사냥감은 제대로 준비해 뒀겠지.”

“시드룬에게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여기 사는 짐승들과 똑같을 거래요.”

“좋다.”

샨이 털썩 뒤로 등을 기댔다. 강력한 주장치고는 열의가 없는 동작이긴 했다.

고대하던 사냥이 준비되어 가는데도 샨의 기분은 썩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왜 심술이 났지?’

요 며칠간 샨의 기분은 조금씩 아래를 향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투이나를 볼 때마다 악화되는 것 같았다.

‘내가 뭐 잘못했나?’

하지만 그녀가 샨에게 무슨 짓을 했다기엔 얼굴 잠깐 보고 대화한 일밖에 없었다.

‘아, 그래선가 봐.’

철석같이 샨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믿는 투이나가 화제를 바꿔 보았다.

“음,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선물을 받고도 아직 답례를 못 줬네요. 샨이 준 것처럼 비싼 물건은 어렵겠지만 원하는 게 따로 있다면 준비할게요.”

샨이 뚱하게 턱을 괴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시큰둥한 대답이다.

샨은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빠르게 라카인을 쳐다보았다.

“일이 빨리 진행되길 바랄 뿐이지.”

투이나는 그가 여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줄로만 이해했다.

“거의 다 끝났어요. 내일이면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좋아.”

샨이 대번에 일어서더니 으름장을 놓았다.

“내일.”

그를 향해서 라카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뒤따라 일어난 투이나가 짧게 예를 취했다.

샨과 함께 몰려왔던 하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휴우!”

그제야 숨 막혔던 공기에서 풀려난 자들이 소리를 토해냈다.

투이나가 가볍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자리에는 옹기종기 사제들이 앉아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정말이지 루가 님은 어떻게 저자를 여기다 앉혀 놓을 수가 있으십니까.”

사제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투이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샨에게 말하고 다시 사제님들을 찾아가서 얘기하면 번거롭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왕이 아니라고 열 번 말하는 것보다 아르힘에선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여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투이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샨에게 아르힘의 결정 방식은 어떤지 보여 주고 싶다고 사제들을 설득해 왔다.

샨은 왕이지만, 혹시 다른 선택지에 흥미를 가질지도 모르니까.

결국 자리가 마련되긴 했지만 이번 면담에서 사제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위축되어 있었다.

사자 앞의 생쥐처럼.

“뭐, 생각보다는 얌전하더군요.”

“루가 님과 만날 때마다 온갖 깽판을 다 쳐놓더니.”

“그럼요. 샨이 그렇게까지 무서운 사람은 아니에요.”

투이나가 기꺼이 편을 들어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겁을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샨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의 신이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일 뿐이지만.’

투이나의 발언에 눈치 빠른 사제들이 다른 의미로 눈을 굴렸다.

미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그녀도 알아차렸다.

‘으음, 지금 내기 판 계산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방금 얘기로 의도치 않게 구혼자 내기에서 샨의 지분율을 올려 버린 셈이다.

오해를 정정하려던 투이나가 주저했다.

‘내기하시는 건 사제님들 자유니까.’

정답을 알려 주는 것도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이 될 테니 투이나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사제들이 곧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헛기침을 해댔다.

“크흠! 하긴 하다못해 자기를 위한 일에서까지 성질을 부리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요.”

“이제는 존중할 줄도 아는 모양입니다.”

“저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에요.”

* * *

일을 끝낸 그녀는 바람처럼 가볍게 연인에게 달려갔다.

베인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루가 님.”

“보고 싶었어요!”

투이나가 와락 그를 껴안았다.

베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투이나가 그의 목을 끌어안기엔 충분했다.

베인은 품 안으로 고개를 파묻는 그녀를 향해서 그대로 무너질 뻔했다.

“이러다 땅에 끌리시겠습니다.”

그녀를 다시 안아 올리는 베인의 목소리는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투이나가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챘다.

“하지만 붙잡았잖아요?”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얘기하자 더는 참지 못한 베인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장난기가 증발했다.

‘어떻게 매번……!’

가슴이 뛰었다.

익숙해지기엔 아직 만난 시간이 짧고 베인이 너무 아름다운 탓이다.

투이나가 다시 긴장하자 베인이 살며시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오는 길에 들키진 않으셨습니까?”

“특별히 조심했어요. 샨이랑 있었거든요.”

내키지 않는 이름에 베인의 미색이 약간 흐려졌다.

하지만 투이나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그가 화제를 돌렸다.

“사냥 때 루가 님께 가장 좋은 짐승을 잡아다 드리겠습니다.”

“베인도 사냥할 거예요?”

투이나가 놀라자 베인이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가 님이 계신 자리니까요. 이곳과 같은 짐승이 아닐 수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물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베인이 사냥복을 입은 것만 봐도 선물일걸요? 기대하고 있어요.”

베인의 얼굴이 순간 뜨거워졌다.

투이나는 별생각 없었지만, 요즘 유행하는 사냥복은 딱 달라붙는 가죽 바지와 쇄골 아래까지 드러내는 셔츠였다.

잘 유지되는 치안 덕분에 위험한 짐승을 사냥하러 가는 일이 점점 줄었던 것이다.

괜히 민망해진 베인이 고개를 푹 파묻었다.

“……루가 님의 취향에 맞는 옷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으음? 그래요.”

투이나가 아무것도 모르고 활짝 웃었다.

베인도 따라 웃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짓궂은 마음이 슬쩍 따라왔다.

베인이 두건 끝을 지분거렸다.

“저는 루가 님이 두건을 벗은 모습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천으로 가려지지 않은 투이나는 훨씬 더 자유로워 보였다. 천을 쓰고 있기엔 더운 날씨이기도 했으니.

내심 기대에 차 있던 베인에게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투이나가 살짝 그의 손을 잡아 내렸던 것이다.

“그건…… 어려워요.”

투이나에게 어쩔 수 없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순간 당황한 베인이 서둘러 입술을 말았다.

“네. 물론이지요. 루가 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기분이 상한 게 아닌데.’

얼룩을 드러내지 않고 머리카락을 보이려면 정말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역시 비밀은 싫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안고 끙끙거리는 건 그녀와 태생부터 안 맞았다.

“대신 다른 걸 해요. 베인이 원하는 걸로.”

“저는 루가 님만 계신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요.”

“그러하시면…… 내일 그를 멀리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사냥에 휘말려 다치실까 겁이 납니다.”

“사냥이 시작되면 샨은 어차피 멀리 가 버릴 텐데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베인은 샨을 친근하게 말하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루가가 왕을 위해 연 사냥이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을 누르며 베인이 당부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베인이 그녀의 손으로 제 뺨을 눌렀다. 그건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와 자신은 아직 연인이다.

아직.

베인은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아르힘에는 비가 왔다.

‘사냥하기로 한 날인데.’

투이나가 팔을 짚고 창틀에 올라갔다.

하늘은 우중충하고, 짙게 낀 구름은 땅에 배를 깔고 기어가는 뱀처럼 꾸물거렸다.

‘여기에서 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쿠르릉.

번개를 예고하는 소리가 투이나의 마음에 답하듯 울려 퍼졌다.

때문에 원래 위풍당당하게 이동했을 사냥 행렬은 분위기가 축 처지고 말았다.

준비가 끝난 투이나는 비옷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나갔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맞고 선 사람들의 표정은 전부 다 딱딱했다.

그중에서도 샨이 최고치를 찍었다.

혼자 사냥을 다 끝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경직된 얼굴에선 빗물 대신 핏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의 붉은 머리에 반사된 색인 걸 알면서도 오싹해지는 점이 있었다.

긴장한 투이나가 찰박찰박 비가 들이치는 통로를 가로질렀다.

“왜 비를 그대로 맞고 있어요.”

샨이 고개를 돌렸다.

묘한 표정이었다.

“그대가 내 걱정을 할 때도 다 있군.”

“언제나 하죠.”

“…….”

그가 어금니를 지그시 누른 듯 뺨이 실룩였다.

한참 못미더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샨이 들고 있던 화살 묶음을 던졌다.

“그대도 사냥감을 하나 잡지 않는 이상 돌려보내지 않을 거다.”

가뜩이나 샨이 화살을 빼낼까 봐 노심초사하던 사제들이 기겁했다.

다행히 화살 혼자서는 무기 노릇을 하지 못하도록 중간에 라카인이 낚아챘다.

“그러니 잘 써 보도록.”

샨이 목덜미에 달린 두건을 뒤집어썼다.

말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는 그를 보며 라카인은 왕이 무엇을 지시했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쏘아 죽일 것.

샨이 원하는 대로 투이나도 사냥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작은 거 한 마리만 잡아도 괜찮겠죠?”

“원래 사냥은 큰 짐승을 사냥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사냥개나 덫을 준비한 것도 아니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지난번에 샨의 하인들은 무기 없이도 산양을 한 마리 통째로 잡아 오길래……. 그 정도가 아니면 인정을 안 해 줄까 걱정이네요.”

“그자의 인정이 굳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걸 다 준비한 게 루가 님이시잖아요.”

“그래도 함께 하는 일이니까요.”

호위들과 대화를 나누던 투이나가 문득 주의를 돌렸다.

“라카인도 사냥을 잘하나요?”

그녀의 시선을 받자 라카인은 갑자기 품에 넘치도록 든 화살 뭉치가 무겁게 느껴졌다.

샨을 따라다닐 때 이것보다 네 배는 많은 짐을 손가락으로 들고 다녔으면서.

무수한 화살촉이 가슴을 향한 기분을 느끼며 라카인이 대답했다.

“예. 오늘 제가 아는 가장 큰 사냥감을 잡아다 드리겠습니다.”

언제나처럼 허공에서 나타난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었다.

어둑어둑해진 비구름 아래로 긴 원형의 보랏빛이 떠올랐다.

마법진 안은 주변과 대비될 만큼 밝고 건조해 보였다.

제일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샨이 박차를 가했다.

이번에는 샨과 나란히 말에 올라가 있던 투이나와 베인도 같이 출발했다.

‘각자 데려가는 사람은 여섯 명.’

투이나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쏟았다.

투이나가 호위 셋과 사제 셋, 베인이 무사제 셋과 상단에 고용된 이들을 데려왔다.

여차하면 곧장 투이나를 돕겠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샨은 별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그를 수행하는 하인들 중에서 아무렇게나 여섯을 지목했다.

시드룬은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을 때는 세 번 같은 소리를 내십시오. 나타나겠습니다.”

마법진 너머로 달려온 사람들에게 시드룬이 말했다.

투이나는 어렴풋이 그의 옷 아래에서 보라색이 아닌 다른 빛이 새어나오는 걸 보았다.

‘약속의 마법을 쓰는 중이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드룬의 안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마법진을 넘어온 이상 그들의 목숨은 마법사에게 달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마법사를 믿도록 만드는 건 그들이 따르는 신의 추종자였다.

“같이 갈 텐가?”

샨이 먼저 말을 건넸다.

젖은 두건을 내린 샨이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물기를 털었다.

그는 확실히 태양 아래에서 두드러지는 사내다.

투이나는 빠르게 무기를 챙기는 하인들을 보며 대답했다.

“샨은 분명히 큰 사냥감을 노릴 테니 다른 사냥감에도 관심을 나눠 주려고요.”

조소를 머금고 있던 샨이 얼핏 진짜 웃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곧 자신이 그런 표정을 보였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난 듯이 도로 얼굴을 굳혀 버렸다.

“마음대로 해라.”

샨이 고삐를 잡아챘다.

사제 하나가 불안하게 멀어지는 그를 흘긋거렸다.

“저렇게 보내도 괜찮을까요?”

“나온 김에 풀고 가는 게 좋죠.”

투이나가 비옷을 벗었다.

오래 달릴 걸 예상해서 그녀의 머리카락은 천으로 길게 감싸 한 뼘마다 묶은 형태였다.

귀에 고정된 핀을 확인해 보던 투이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베인의 시선이 이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도 어울리십니다.”

“고마워요. 베인이 더 근사한걸요?”

곧게 편 그의 허리에서 이어지는 라인이 위든 아래든 완벽했다.

차마 쇄골 밑까지 드러내는 복장은 할 수 없었던 베인이 겸연쩍게 미소 지었다.

“가실까요.”

“아, 잠깐만요.”

투이나가 위태위태하게 허리를 기울였다.

‘아무리 그래도 맨손으로 갈 순 없겠지.’

무기 하나를 집으려는 투이나를 보던 베인이 서둘러 말을 몰고 왔다.

“조심……!”

“앗!”

휘청거리는 투이나의 등을 베인보다 먼저 도착한 자가 붙잡아 세웠다.

“무기는 가져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살 통을 멘 라카인이 투이나의 자세를 다시 고쳐 주었다.

“사제님들이 무엇을 만날지 모르니 못 쓰는 무기라도 가져가라고 했잖아요.”

“저희들이 호위할 것입니다.”

라카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물건에 신경 쓰느라 오히려 주의력을 잃으실 겁니다.”

“하긴 저도 자신 없긴 했어요.”

투이나가 친근하게 답했다.

베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쩐지 투이나와 저 이방인 호위가 같이 있는 모습이 평소보다 더 불편했다.

샨과 투이나가 같이 있을 때보다 훨씬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위화감에 베인은 말을 몰아 그들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저희 먼저 출발하도록 하죠.”

“네? 으아!”

베인이 투이나의 말이 따라오도록 유도했다.

놀라 삐거덕거리던 투이나가 부드럽게 조정하는 베인의 움직임에 곧 박자를 맞췄다.

베인은 옆으로 도착한 투이나보다 뒤를 따라오는 호위들을 계속 돌아보았다.

걱정한 것과는 반대로 라카인은 곧장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차례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베인이 바짝 말을 붙였다.

“몰래 도망갈까요?”

“지금요?”

“여긴 숨어 있을 만한 장소가 많이 보이는군요.”

베인이 짐짓 장난스럽게 말했다.

“피에 굶주린 이들은 사냥하게 두고 저희끼리만 있는 겁니다.”

“아아……. 하지만 시드룬에게 들킬 거예요.”

투이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속닥거렸다.

그녀도 그의 제안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그럼 잠깐만이라도 좋습니다.”

나긋한 그의 목소리가 유혹했다.

“이곳은 날씨가 너무 좋군요.”

투이나가 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람쥐라도 잡은 다음에요.”

“좋습니다.”

베인이 싱긋 웃었다.

“다람쥐보다는 루가 님께 어울리는 짐승이 있겠지요.”

라카인은 투이나와 베인의 뒷모습을 보며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따라 붙었다.

호위들은 서로 투이나에게 제일 큰 짐승을 잡아가겠다며 투닥거리고 있었다. 사제들도 한담을 나누느라 평화로웠다.

라카인은 천천히 행렬의 끝과 중앙을 가로지르며 이탈하는 자가 없도록 무리를 관리했다.

호루니가 몇 번 그를 흘끔거리긴 했지만 호위 임무에 매진한다고 여겼는지 곧 관심을 끊었다.

그녀의 생각대로 라카인은 착실하게 주변을 정찰했다.

낯선 세계이기는 했으나 숲에 짐승이 사는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루터기에 난 제법 큰 잇자국을 보았다.

엄니의 크기를 가늠해 본 라카인은 일행에게 이 사실을 전한 뒤, 사냥을 해 본 자들을 뽑아 정찰에 나서겠다고 투이나에게 요청했다.

“그렇게 해요.”

투이나는 선뜻 허락했다.

베인은 신경 쓰이던 자가 알아서 떨어진다니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멀리 나가지 말아요.”

“부르시면 달려올 자리에 있겠습니다.”

라카인은 목례하고 물러났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 루가 님을 잘 부탁한다는 소리를 할까봐 긴장했다.

호루니는 그러면 한 소리를 되게 쏘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이 없어도 루가 님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라카인은 언제나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았다.

조용히 무리에서 떨어진 그가 익숙하게 고용꾼들에게 지시했다.

곧 세 사람이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투이나가 그들을 배웅하듯 잠시 말을 멈췄다.

“많이 위험할까요?”

“자기 입으로 능숙하다 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루가 님. 상단에서 특별히 뛰어난 자들로 데려왔습니다.”

베인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무모한 짓은 안 하겠지.’

큰 짐승을 잡아와 봤자 상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을 위한 사냥이니까.

“아앗! 모하세스를 만나러 간 거면 어떡합니까? 막아야 합니다!”

스카차가 뒤늦게 소리치자 베인이 힐긋 그를 돌아보았다.

“같이 간 자들이 감시할 겁니다.”

“엇…….”

스카차가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놀랐다.

베인에게 샨과 라카인의 관계를 설명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단을 꾸려 나가던 실력으로 미리 위험을 차단하는 능력을 발휘한 걸까?

스카차는 조만간 호루니와 얘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한편, 라카인은 추적을 지시했던 이들이 멀리 가지 않고 계속 근처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말에서 내려 길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있던 라카인이 허리를 펴자 은근히 눈을 번득이는 자들이 보였다.

짐승이 아니라 그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다를 게 없군.’

라카인은 그들에게 다시 존재를 드러냈다.

어차피 몸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중요한 건 유도하는 거니까.

예민한 라카인의 귀가 곧 기다렸던 소리를 잡아냈다.

샨은 직감에 맡긴 양동 작전을 자주 펼쳤다.

샨은 아르파였고, 아르파는 피를 건 문제에서 틀린 적이 없었다.

두두두두.

“……무슨 소리지?”

주변을 정찰하던 자들이 두리번거렸다.

라카인은 말없이 활을 들었다.

이곳의 짐승도 더운 피가 흐른다면.

“온다.”

라카인이 나무뿌리를 박살내며 다가오는 짐승을 감지해냈다.

단숨에 그의 팔이 단단해지고 가슴에 힘이 들어갔다.

부러질 것처럼 삐걱거리던 활시위가 매섭게 날았다.

“끼이이이익!”

비명과 함께 피가 확 튀었다.

멧돼지를 닮은 짐승이 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허리에 그가 쏜 화살 한 대가 박혀 있었지만 고작 그걸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성이 나 있었다.

“이런!”

“빨리 쏴!”

그들이 뒤늦게 준비하는 걸 본 라카인이 활을 내렸다. 따라온 감시자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내가 유도하겠다.”

“뭐라고요?”

“저걸 혼자 끌고 갔다간 죽습니다!”

라카인은 설명하지 않고 말을 달렸다.

뒤늦게 뒤쪽에서 몇 발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라카인과 짐승 모두 손쉽게 피해냈다.

‘피를 흘렸으니 모하세스 님이 위치를 아실 것이다.’

겁에 질린 라카인의 말이 죽을힘을 다해 뛰는 게 느껴졌다.

라카인은 그 위를 타고 앉아 있다가 적당한 나뭇가지가 나타나자 단숨에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빠지직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가 체중을 지탱했다.

속도와 상체 힘으로 몸을 끌어올린 그가 나무 위에 안착했다.

훨씬 몸이 가벼워진 말은 이제 안장도 돌보지 않고 마구 달려갔다.

그러나 뜨거운 김을 토해내며 쫓아오던 짐승은 생각보다 영리한지 자신을 다치게 만든 쪽을 정확히 구분해냈다.

쿵!

짐승이 방향을 바꿔 나무를 들이박았다. 그가 타고 있던 가지 전체가 흔들렸다.

라카인은 침착하게 버텼다.

오래 지나지 않아 화살이 날아왔다.

“꽤애애액!”

정확하게 세 발 날아와 꽂힌 공격에 짐승이 포효했다.

“그만.”

낮은 목소리에 뻑뻑하게 시위를 당기던 움직임이 멈췄다.

라카인은 옆에서 씩씩거리는 짐승이 뒹굴든 말든 곧장 나무 아래로 착지했다.

왕의 위에 있을 순 없었으니까.

피를 흘리던 짐승이 곧장 그를 향해 몸을 뒤틀었지만 라카인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샨이 수풀 너머로 나타났다.

그는 여기까지 짐승을 유인한 라카인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이건 라카인의 임무도 아니었다. 그저 투이나를 죽이려고 사용한 방법일 뿐.

라카인은 땅에 이마를 찧었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샨은 그를 무시한 채 칼을 들어 올렸다.

“아르파에게 신, 복수를 올립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라카인을 으깨어 버리기 직전인 짐승의 숨을 끊어놓았다.

“……!”

소리 대신 열기가 터져 나왔다. 머리를 조아린 라카인의 정수리 위로 뜨거운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아르파의 권능은 무력이 아니다.

피에 따르는 복수.

짐승의 피를 받은 아르파는 곧 더 많은 피를 원하게 된다. 그들의 복수심을 자극해서라도.

이제 죽은 짐승과 같은 피를 가진 것들은 모두 샨을 죽일 때까지 몰려나올 것이다.

샨의 눈이 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재빨리 일어난 라카인은 투이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피를 뒤집어쓴 라카인이 뛰쳐나왔을 때 세 사람 정도가 그를 괴물로 오인하고 공격할 뻔했다.

“우아악!”

“잠깐! 라카인이에요!”

투이나가 서둘러 팔을 휘저었다.

라카인이 말라붙은 얼굴로 멈춰 섰다.

놀란 눈의 투이나가 말을 재촉했다.

“어딜 다친 거예요?”

“짐승 떼가 달려올 겁니다. 대피하십시오.”

“짐승 떼라뇨?”

설명 대신 지반이 뒤흔들렸다.

여러 개의 바위가 굴러 떨어지듯이 연달아 땅을 치는 소리에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뭘 잘못 건드렸기에!”

“어디로! 어디로 피하셔야 하죠?”

“왕께서 사냥하실 겁니다.”

라카인이 침착하게 방향을 가리켰다.

“그분의 곁에 숨어 계시는 편이 가장 안전합니다.”

“알겠어요.”

투이나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동할 테니 빨리 올라타요!”

라카인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로 인해.

양심으로 목이 졸려 가던 라카인이 간신히 대답했다.

“……먼저 가시면 뒤따르겠습니다.”

“말도 없이 어떻게 피하려고요!”

“논쟁하실 시간이 없습니다!”

베인이 재촉했다.

완전히 핏기가 빠져나간 그는 당장이라도 짐승들이 투이나를 덮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발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투이나가 등자에서 발을 홱 빼냈다.

“베인! 절 좀 받아 줘요!”

“예?”

투이나가 딱 한 번 보았던 샨의 묘기를 흉내 냈다.

물론 기술이 몹시 부족했다.

안장을 짚고 일어난 그녀에게 기겁한 베인이 위험천만하게 기우는 몸을 붙잡았다.

“루가 님!”

“받아 줄 줄 알았어요!”

투이나의 다리가 미끄러지듯이 반대편 안장에 걸쳐졌다.

섬뜩해진 베인이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는 동안 투이나가 소리쳤다.

“제 말을 타고 따라오세요!”

라카인이 굳어 있는 사이 베인이 고삐를 휘둘렀다. 튕겨 나가듯이 두 사람이 탄 말이 뛰어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라카인을 지나쳐 달려갔다.

투이나가 탔던 말은 어서 올라타라는 듯 제자리에서 맴을 돌았다.

머리를 직접 두들기는 소란이 쫓아오는데도 라카인은 도저히 그 자리로 올라탈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런 자 때문에 목숨을 걸지 마십시오!”

허리를 굽힌 베인이 분통을 터트렸다.

안장이 좁아 간신히 그를 붙든 투이나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냥 두면 다쳤을 거예요!”

“루가 님이 다치시는 건 괜찮단 말씀이십니까?”

“베인을 믿었던 거죠! 게다가 떨어진다고 죽진 않잖아요.”

투이나의 항변에 베인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가끔은 당신이 루가 님이 아니셨더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억눌린 속삭임에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때 투이나와 베인을 태운 말이 기수를 날려 버릴 듯이 급하게 멈춰 서지만 않았어도 직접 물어봤을 것이다.

갑자기 허파가 꽉 눌리는 기분에 투이나는 숨이나 제대로 쉬려고 노력해야 했다.

“헉……!”

베인이 투이나를 보호하듯이 붙잡는 동안 샨은 그들에게 고스란히 광기를 드러내 보였다.

“……!”

핏줄기가 튀었다.

잠시 공중을 떠돌던 줄기는 금세 바닥에 흐르는 붉은 강으로 합류했다.

그 단어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샨이 두건이 달린 옷을 입고 온 이유가 밝혀졌다. 왜 비를 그대로 맞은 상태로 두건을 썼는지도.

피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짐승들은 미친 듯이 분노한 상태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본인조차 주체할 수 없는 광기로 그들이 지르는 비명은 공격에 가까운 날카로운 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샨의 칼은 여지없이 그들을 갈라 놓았다.

무참한 도살의 장면에 투이나는 턱을 가렸다.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움직임이 왜 저렇지?’

샨도 물론 이상했지만 투이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붉은 액체였다.

일반적으로 칼에 찔렸을 때 튀어나가야 할 방향이 아닌 쪽으로 자꾸만 움직였다.

마치 피가 된 상태로도 샨을 공격하고 싶은 것처럼.

그들을 해치울수록 샨의 얼굴은 무감각하게 변해 갔다.

“우욱!”

“웨엑!”

그들을 따라 도착한 사제들이 구역질을 했다.

아르힘의 수도에서는 도축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정결한 사제들이 버틸만한 장면이 아니었다.

피를 뒤집어쓸수록 샨은 점점 아르파의 모습을 닮아 갔다. 그녀가 죽기 전에 너무도 많이 보았던 표정과 비슷해졌다.

육체를 머리가 아니라 영혼에 맡긴 사람처럼 그가 어깨를 휘둘렀다.

“하하하!”

샨의 입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는 정확하고 우렁우렁하게 퍼져 나갔다.

아무리 공포심이 없는 자라도 뱃속이 졸아드는 장면이었다.

그때 갑자기 꽃향기가 파고들었다.

“주기적으로 피를 본다는 게 이런 거라니.”

베인이 그녀의 입에 손수건을 물려 주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천은 안온한 향이 풍기고 있었다.

“보고 계실 필요 없습니다, 루가 님. 그가 자초한 사냥이 이런 거라면 정말 상대하기도 싫군요.”

투이나가 무심코 손수건을 받았지만 코를 가리는 데 쓰지는 않았다. 분수처럼 솟아나는 냄새를 막기에는 은은한 향수 정도론 부족했다.

대신 투이나는 문제 해결에 나섰다.

“시드룬! 빨리 나와요!”

곧 마법진과 함께 시드룬이 나타났다.

그는 참혹한 광경을 보고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사냥 중이군요.”

“저건 사냥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투이나가 슬슬 어지러워지는 이마를 눌렀다.

“샨을 멈춰야겠어요.”

“요구를 전달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그가 거부하고 있는 겁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거예요. 아르파 신이 그에게 깃들고 있어요.”

그러자 갑자기 시드룬이 샨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뚫어져라 샨을 쳐다보던 시드룬이 평했다.

“뭔가 나오는 것 같긴 하군요.”

“나온다고요?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방향은 바깥쪽입니다.”

여상스럽게 대답한 시드룬이 손을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랄 만큼 강렬한 보랏빛이 번쩍였다.

투이나와 베인이 동시에 마법을 쓴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무언가가 달려온 것처럼 바닥에 길게 패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짐승을 사라지게 한 건가?’

없어지기 전까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했는지 추측해 본 투이나의 등골에 한기가 치밀었다.

시드룬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이어 나갔지만 두 사람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내게 바라는 걸 말하십시오.”

“여기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점점 더 많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호위들이 조급하게 소리쳤다.

시드룬은 여전히 신처럼 둥둥 떠 있기만 했다.

‘샨이 나랑 같은 방식의 사냥을 할 생각이 아닐 거라고 미리 예상했어야 했어.’

누굴 해칠 생각이 없어도 문제다. 시드룬의 마법처럼 샨의 사냥에는 신이 동반되었다.

주변을 휘말리게 만드는 거대한 힘.

‘어떻게 멈추지?’

당장이라도 피에 젖은 소매에서 아르파 신이 일어날 것 같았다.

투이나는 약간의 기시감을 느끼며 요구했다.

“지금까지 흘린 피를 모조리 치워 주세요. 그리고 아르파 신에게 홀린 짐승들도 가능하면 제자리로 돌려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언제나 시드룬과 함께 했던 마법진이 가로 방향으로 움직였다.

숲을 다 덮고도 남을 거대한 보라색 빛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시드룬의 머리카락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열리는 마법진으로 바람이 빨려들듯이 올라갔다.

거침없이 불어 닥치는 낯선 기운에 처음으로 샨이 눈길이 짐승을 떠나 움직였다.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빛 속에서 샨이 마법에 집중하는 시드룬을 알아차렸다.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초조하게 투이나가 생각한 순간 샨의 목이 비틀렸다.

투이나가 움찔했다. 샨의 눈이 붉었다.

어느 때보다도 새빨간 눈동자는 잔뜩 일그러진 채로 그에게서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핏줄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법사가 그에게서 힘을 강탈하고 있었다.

바닥에 고인 피뿐만 아니라 샨을 향해서 돌진하고 있던 짐승들마저 헛발질을 하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샨의 전신에서 노여움이 피어올랐다.

“역시 네가 문제였다.”

신과 뒤섞인 선명한 광기를 맞받은 투이나가 주춤했다.

그녀가 주춤한 순간, 라카인은 활시위를 당겼다.

그는 인기척을 완전히 죽이고 있었다.

투이나의 말을 버려두고 올 수가 없어서 같이 끌고 왔지만, 차마 그녀가 보일 거리까지 데려오지는 못했다.

라카인은 원한다면 보아도 보지 못한 것처럼 사람의 기척을 죽일 수 있었다.

숲처럼 은폐물이 많은 곳에서는 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가뜩이나 짐승과 마법사와 왕의 광기로 혼란스러운 저곳에서 라카인의 화살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곳에는 그녀를 지켜 줄 아르힘조차 없었다.

“…….”

팽팽해진 활시위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나머지 찢어질 듯한 소리를 흘렸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놓아 달라고 시위를 하는 듯했다.

투이나에게 초점을 맞춘 화살촉은 반듯했지만 라카인의 숨은 조금 떨려나왔다.

그의 신은 언제나 잔혹했다. 또한 단호했다.

루가를 죽여라.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당장이라도 활시위를 놓을 것처럼 구부러진 손가락과 팔뚝에서 핏대가 불거졌다.

불로 지져 놓은 것처럼 손가락이 화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안간힘을 다했다.

죽여라.

‘예.’

죽여라.

‘그리하겠습니다.’

죽여라.

‘그런데 왜 저는 괴로운 겁니까? 이 고통은 왜 함께 주신 겁니까?’

그의 심장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죽음을 원하셨다면 제게서 이 고통을 가져가 주십시오. 당신께 죽음을 바치겠습니다.’

죽여라.

그녀를 섬긴 건 나의 명령에 의해서다.

복종하라.

이미 분노한 그의 신은 반쯤 현세에 강림해 있었다.

결코 착각할 수 없는 선명한 색채가 불타오르듯이 라카인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대로 화살을 놓기만 하면 모든 고난이 끝날 것이다.

그럼에도 라카인은 어금니를 산산조각 낼 만큼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피잉!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기어이 튕겨나갔다.

화살에 그의 영혼을 묶어 둔 것처럼 그의 마음도 같이 끌려나왔다.

무자비하게.

가슴이 뜯겨 나온 라카인이 그대로 활을 내팽개치고 달려 나갔다.

그가 절규했다.

“루가 님! 피하십시오!”

정적 속에서 투이나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라카인은 제발 자신을 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소리는 화살보다 빨랐지만.

마음은…….

둔탁한 충격이 그녀를 꿰뚫었다.

라카인은 두 눈을 뜨고 그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투이나의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울어졌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법진을 통과한 검은 어디에서라도 나타날 수 있다.

마지막 밤에 그들이 모이기로 한 장소도 잘 알려져 있었으니.

시드룬이 원했다면 그 장소에 오지 않고도 투이나를 찌를 수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시험에서 이미 샨과 대결하며 증명한 사실이다.

도망칠 때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빨리 은밀하게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 있는데 굳이 달리기를 할까?

그러니 그녀가 죽어 가며 들었던 발소리는 보다 땅과 가까운 자이다.

저렇게 아름다운 마법진 아래에서 떠 있는 남자는 결단코 범인이 아닐 것이다.

‘왜 이렇게 늦게 깨달았을까?’

시드룬의 주변에 나타난 모든 풍경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온통 붉은 가운데 푸른색 동공이 돌아온 샨도, 비명처럼 울리는 낭랑한 베인의 목소리도.

짐승이 엉겨 붙은 마법진의 모습까지 어느 것 하나 진짜처럼 보이지 않았다.

영혼의 세계에서 느끼던 것처럼.

‘깨달아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라서?’

아르힘은 이미 과거의 살인자가 현재와 같지 않을 것임을 경고했다.

과연 그러했다.

시드룬의 마법진으로 올라가던 짐승들의 반항은 격렬했다.

거세게 서로에게 몸을 부딪치던 짐승들의 엄니가 부러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정확하게 투이나를 향해 떨어질 줄은.

누구도 준비하고 있던 방향이 아니었던 터라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습격이었다.

투이나는 작살을 만난 물고기처럼 꿰뚫렸다.

“아아아아악!”

호루니가 폐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투이나는 그럴 수조차 없었다. 피가 목구멍에 가득 차서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루가 님! 루가 니이임!”

“안 돼……. 이럴, 이럴 수는…….”

베인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온 그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투이나를 붙잡았다.

표정 변화가 없는 시드룬마저 놀란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투이나의 상태를 살폈다.

짐승의 이빨이 갈비뼈 아래쪽에 박혀 있었다.

게다가 뾰족한 이빨 끝의 반대편이 더 무거웠던 탓에 역방향으로 다시 움직인 게 치명적이었다.

속수무책으로 투이나가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베인이 소리를 질렀다.

“빨리……! 당장 치료하지 않고 뭘 합니까!”

파랗게 질린 사제들이 한꺼번에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애타는 기도에도 그들의 몸에 흰 빛이 깃들지 않았다.

당황한 그들이 덜덜 떨었다.

“왜…… 안 되는 거지?”

“멍청하긴. 여긴 아르힘이 있는 세계가 아니다.”

날이 서린 목소리가 그들을 갈라놓았다. 아직도 절반쯤 피를 뒤집어 쓴 샨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베인이 태어나서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분노를 토해냈다.

“당신이 감히……!”

“내가 없으면 그 피는 못 멈춘다.”

샨은 평소처럼 비아냥거리지 않았다.

아직 다 돌아오지 않은 그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감정에 금이 갈 만큼 충격을 준 건 확실했다.

또 다른 피를 본 아르파가 여전히 꿈틀거렸지만 샨은 이상하게 극도로 차가워지는 마음으로 신을 억눌렀다.

무참하게 흘러나오던 피가 꾸륵 하는 소리를 내더니 원래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일을 잠시 중단했다.

샨은 지독하게 쓴 맛이 혀끝으로 퍼져 나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았다. 조금만 다른 곳에 박혔다면 심장이나 내장을 상해 절명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너희들이 비참해할 여유조차 없었겠지.”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아직은 살려 두고 있으니까.”

샨은 그조차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리한 그의 눈은 엄니에 난 작은 화살 자국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연한 순간에 튀어나온 화살이 그걸 맞히지 않았더라면 투이나는 그가 지적했던 방식대로 죽었을 것이다.

‘과연 우연인가? 아니면 아르힘도 너의 몸을 타고 같이 온 것이냐.’

샨은 우연을 불러낸 자신의 하인이 완전히 굳어 버린 채 서 있는 걸 보았다.

투이나를 죽이고자 했던 그가 결과적으로는 그녀를 살리게 된 꼴이 되었다.

샨은 아직 그의 처분을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엔 샨의 신경이 너무나 자주 투이나에게 쏠렸다.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해야 한다는 의무감처럼.

그녀가 살아 있는 증거로 가슴이 오르내리고 다시 오르내렸다.

시드룬이 물었다.

“이대로 신전에 보내도 괜찮습니까?”

“나와 떨어지면 즉각 부상이 다시 진행될 거다. 그렇다고 내가 같이 아르힘의 신전으로 돌아가도 아르파의 힘이 억눌려 제 기능을 못하겠지.”

“빠른 치유가 관건이군요.”

시드룬이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신전으로 돌아가자마자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미리 기도를 하면…….”

“안 돼요!”

갑자기 호루니가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런 방해에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평소의 수줍음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성소로 보내세요! 아르힘 님께 가야 합니다!”

“무슨 소리냐.”

순식간에 샨의 목소리에 한기가 깃들었다.

피를 식게 만드는 음성에 호루니가 덜덜 떨며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만은 완고했다. 사제들은 투이나를 치료할 수 없다.

그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르힘…… 님께…… 보내…… 주세요…….”

“루가 님!”

동시에 터져 나온 소리에 투이나의 약한 숨소리가 금세 막혀 버리고 말았다.

베인이 엉망이 된 얼굴로 바짝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그녀의 뺨으로 뚝뚝 떨어졌다.

“말씀하십시오, 루가 님. 듣고 있습니다. 제가, 제가 옆에 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죠……?”

투이나가 힘겹게 식식거렸다.

베인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그러나 간절한 투이나의 목소리는 그를 향하지 않았다.

“시드룬…….”

까맣게 타들어 가던 베인의 심장이 그 순간 파랗게 뒤집혔다. 전신을 찌르는 서리가 단숨에 핏줄을 타고 번져나갔다.

자신의 연인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 갈 때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독보다 차갑고 늪보다 깊은 감정이 모든 신경을 타고 뇌수 끝까지 절여 버렸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투이나는 간신히 그 말을 꺼낸 다음 극심한 고통에 다시 정신을 놓았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시드룬은 듣지 못할 상대에게 계속 설명했다.

“성소로 바로 통로를 열겠지만, 지난번에도 실패했듯이 정확한 장소로 가지는 못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베인의 눈이 시퍼렇게 타올랐다. 아무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아르힘을 믿지도 않는 자들에게 루가 님을 맡길 순 없습니다.”

베인이 바짝 그녀를 끌어안았다.

쉬지 않고 떨리던 그의 팔은 투이나를 감싸 안을수록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드룬은 반대하지 않았다.

“바로 열겠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저도 아르힘을 믿는…….”

완전히 눌려 있던 스카차가 간신히 주장했으나 서슬 퍼런 베인의 눈빛이 돌아오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늘 곱상한 도련님이라 생각했던 자에게 압도당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크로퍼드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베인은 어떻게 떨어져도 절대로 투이나와 떨어지지 않도록 바짝 힘을 주었다.

“루가 님은 저와 함께 성소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건 명명백백한 선언이었다.

투이나의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도 샨은 갑자기 투이나를 끌어안고 주장하는 베인이 못 견디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불쾌감이 불쑥 치밀어서 하마터면 피를 통제하고 있는 아르파를 밀어낼 뻔 했다.

샨이 짓씹듯이 내뱉었다.

“빨리 꺼져라.”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었다.

준비하고 있던 베인이 등부터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의 아래로 흰 탑이 보였다.

“……!”

시드룬의 눈이 약간 커졌다.

약속의 마법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언제나 신전 안에서 정확한 장소로 나타날 수 없었는데.

특히나 지금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한 적도 없었던 장소가 이렇게 위급한 순간에 맞춰 열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르힘이 보고 있었나.’

그러나 시드룬은 그들을 데려오면서 아르힘의 흔적은 느낄 수 없었다. 샨의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까지는 알아차렸지만.

그도 모르게 마법 속으로 따라올 수 있는 신이라니. 어딘가 남아 있던 인간적인 부분이 흥분으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역시 하고 많은 수호신 중에서 아르힘을 고른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모두가 성소를 향해 떨어지는 투이나와 베인을 보고 있을 때, 시드룬은 투이나가 온 사방에 흘려 놓았던 막대한 피를 회수했다.

‘이 정도 양이라면 수리시에게 그 마법을 부탁할 수 있다.’

그녀의 피가 이번 사냥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였다.

베인은 마법진을 통과하자마자 투이나의 몸이 빠르게 식어 가는 걸 깨달았다.

핏방울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베인이 절망 속에서 기도했다.

“아르힘 님, 제발…….”

그는 추락하면서 투이나만 붙잡고 있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자꾸만 액체가 얼굴로 튀어 올랐다.

베인이 흐느꼈다.

이렇게 보내려고 그녀에게 온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참아 왔는데.

“당신만…… 당신만 살아 있어 준다면 나는……!”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

얼굴에 부딪친 액체는 붉은 색이 아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베인이 자신에게 번진 액체를 손으로 문질러 보았다.

“……회색?”

투이나의 몸에서 회색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베인은 어둠과 함께 부드러운 막을 통과했다.

“……!”

본능적으로 투이나를 끌어안으며 숨을 참았던 베인은 두 사람을 감싼 공간이 따듯하다는 걸 깨달았다.

성소의 천장을 통과한 것이다.

베인은 눈부신 흰색과 처음 보는 황금빛 종에 몹시 놀랐다.

‘신전의 성소에 흰색 탑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투이나 말고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와 본 자가 없었다.

베인은 점점 커지는 종의 윗부분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격렬한 충돌을 예상했다.

그러나 금속성 금빛은 그를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그들이 종 안을 통과하고 있는데도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음파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황금빛 종을 지나 물결이 흐르는 곳까지…….

“도달하였구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인은 뒷덜미가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의심할 수가 없는 성스러운 음성이었지만 정말로 자신이 보고 있는 자가 아르힘인지 곧장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의 힘은 분명하게 그들을 허공에 멈춰 세우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투이나를 자꾸만 붙잡으며 베인은 검은 머리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르힘…… 님……?”

베인이 되묻는 순간 그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아이야, 아직 너의 차례가 아니다.”

동정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극심한 통증에 베인이 몸부림쳤다.

아무래도 좋았다.

눈앞에 있는 자가 신이고, 그의 품에 있는 게 투이나라면.

베인의 입이 가냘프게 움직였다.

“제발……. 루가…… 님을…… 살려 주십시오…….”

“네 소망은 이루어질 것이다.”

베인은 안도하며 정신을 잃었다.

* * *

두근.

누군가의 맥박이 귓가에서 고동쳤다.

자신도 같은 맥박으로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까지 투이나는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귀에 닿아 있는 건 소리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매끈한 천의 질감과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온기, 그리고 히아신스 향기가 났다.

투이나의 눈이 열렸다.

“깨어나셨습니까.”

길게 누운 몸이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그녀가 움찔하자 발끝에서 찰랑이는 느낌이 났다.

‘물?’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투이나의 이마를 부드러운 손가락이 쓸어 넘겼다.

천장을 가득 메운 황금빛에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초점을 잡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녀를 안은 자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베인?”

그는 환희했다.

“예, 저입니다.”

투이나가 발을 끌어당겼다.

여전히 찰랑이는 감각이 튀었다. 바닥이 온통 적셔져 있는 감각은 익숙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가 베인을 올려다보았다.

“여긴 성소잖아요.”

“기억 안 나십니까?”

베인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하셨습니다.”

투이나는 대답하는 대신 뒤통수를 베인의 팔에 기대었다.

‘그랬었지.’

자신에게 달려오던 라카인이 생각났다.

너무도 깊게 절망한 자의 얼굴은 그때 처음 본 것 같아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드러내나 싶어서.

라카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머리 위로 무엇이 떨어졌는지는 조금 늦게 보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을 줄 알았는데.’

더 이상 놀랄 마음도 들지 않았다. 후회나 미련도 없었다.

지금 그녀를 안고 있는 베인이 알았더라면 더없이 슬퍼하겠지만, 차라리 홀가분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살아 있는 건 기쁘지만, 그 순간에는 조금 지쳤던 모양이다.

‘더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아르힘조차 구할 수 없는 세계여서 그랬을까.

혹은…….

투이나가 멍해 보였는지 베인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미 투이나를 찔렀던 모든 부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조심하게 되었다.

“영원히 루가 님을 잃는 줄 알았습니다.”

투이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에 가득한 눈물자국을 보았다.

정신보다 먼저 당황이 물씬 올라왔다.

“울었어요?”

투이나가 얼른 양손으로 그를 당겼다. 무심코 자국을 지워 주려고 한 것이다.

베인은 평소와 똑같은 그녀의 행동에 깊이 안심했다.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왜 미안해하십니까. 루가 님을 지키지 못한 건 바로 저입니다.”

베인이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다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투이나는 등에 닿은 그의 팔이 떨리고 있어서 놀랐다.

“누구의 탓도 하지 말아요.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아니요. 저의 잘못입니다. 루가 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으면서 지키지 못한 죄를 잊을 수는 없습니다.”

베인은 말 한 마디마다 힘을 주었다.

“그러니 평생 갚게 해 주십시오.”

절절히 말을 맺은 베인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떨어지는 줄 알고 올려다보던 투이나가 가까워지는 거리에 기절할 만큼 놀랐다.

“베인, 여기 성소예요!”

“아르힘 님은 가셨습니다.”

베인이 여전히 슬프게 내려간 눈매로 답했다.

투이나가 영문을 모를 정도로 담담해서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성소에서 이러면 안 되잖아?’

아무리 연인이라고 해도 신이 사는 곳이면 마음을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그런가?’

베인이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라 투이나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외모가 신에 견줄 만큼 성스럽기도 했지만, 아르힘은 사랑을 반대하는 신이 아니지 않던가.

‘그런데 어떻게 베인도 여기서 같이 깨어 있는 거지?’

아르힘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낯설었다.

베인은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다른 데 관심이 쏠려 있었다.

“신전에서는 단둘이 있을 기회가 없었지요.”

투이나가 반대했기에 그는 대신 눈가에 입 맞췄다. 열꽃이 피어나는 감각에 그녀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베인, 잠깐, 진정, 잠시만요. 아르힘 님이 가셨다고요? 저희만 여기에 두고요?”

“예.”

베인이 순하게 답했다.

그는 투이나가 정신을 잃은 동안 성소 내부에 완벽하게 적응했는지 물 위에 앉고서도 태연했다.

“제가 얼마나 오래 기절해 있었죠?”

“천년처럼 길게 느껴질 시간 동안입니다.”

베인이 저절로 한숨이 나올 만큼 애틋하고 도움은 안 되는 대답을 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투이나가 움찔했다.

“윽……!”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큰 부상이라 몸은 나았어도 충격이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대화를 나누셨어요?”

“기억에 가깝습니다.”

그제야 베인이 약간 물러났다.

“사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도 아르힘 님이 계신 동안 정신을 잃었기에…….”

그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투이나에게 기대었다.

“깨어나니 루가 님의 상처가 다 나아 있었고, 기절한 채로 아르힘 님의 음성을 들었는지 희미한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불확실한 얘기 속에서 베인은 유일하고 확실한 마음을 담아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직 꿈만 같습니다.”

둘만이 있는 세계.

투이나는 그의 꿈이 그녀에게도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있고 싶어.’

그건 진심이었다.

상황과 장소가 얼마나 어울리지 않든 베인만 있어 준다면 전부 괜찮을 것 같았다.

자신이 루가만 아니었다면.

투이나는 바깥에 두고 온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으로 베인을 감싸 안았다.

“그래도 깨어날 시간이에요.”

“…….”

베인은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언제나 투이나는 그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다. 

사랑하고 있음에도.

그래서 다른 세상보다 오직 저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베인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욕심을 부렸다.

“저를 깨워 주십시오.”

투이나는 기꺼이 잠든 자를 깨우는 이야기 속의 영웅이 되어 주었다.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베인은 끝까지 아쉬워하다가 기어코 떨어진 입술 대신 투이나를 안아 들었다.

“와앗! 들고 가려고요?”

“아직 거동이 불편하시잖습니까.”

가볍게 투이나를 안아 올린 베인이 떨어지지 않도록 꾹 힘을 주었다. 웃음 같은 악력이었다.

‘어, 어쩐지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네.’

이 모습을 지켜볼 자가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베인의 행동은 평소의 자제력을 잃고 대담했다.

그가 일어난 사이를 못 참고 이마에 또 입을 눌러댔다.

좋긴 한데 당황이 사라지질 않았다. 품속에서 올려다보는 시야가 좁기 때문일까.

얕게 숨을 내쉰 그의 눈빛이 한순간 남달라 보였다.

‘물 위를 걸어야 해서 그럴까?’

잠깐 주저하며 한 걸음을 내디딘 베인이 곧 거침없이 벽으로 걸어 나갔다.

따듯한 벽이 감쌌을 때 투이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쿠르릉!

그리고 천둥이 내리쳤다.

“헉! 비가……?”

바깥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당장 젖기 시작한 머리보다 더 차갑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돼! 화장!’

긴장한 투이나가 베인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비가 너무 거세서 몸을 칠했던 분칠이 지워질지도 모른다.

‘여기서 얼룩이 드러날 순 없어!’

적어도 베인에게 먼저 비밀을 말한 다음에 보여야 했다.

최소한 그에겐 그래야 한다.

그때 베인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돌려 품속으로 파묻었다. 비로부터 그녀를 감추는 것처럼.

실은 바깥에 비보다 먼저 감추고 싶은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왔군.”

사냥터에 있던 자들이 모조리 그곳에 모여 있었다.

사제의 필사적인 만류로 샨은 성소 언덕이 있는 복도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성소를 똑똑히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베인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도 서 있었다.

영문을 모르고 자신을 붙잡는 투이나가 엄청나게 사랑스러웠기에, 베인은 절대로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베인의 눈이 차가워졌다.

방관했던 샨과 시드룬도, 그녀를 지키지 못한 호위들이 안달복달 달려오려는 꼴도,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데다 성소에서 다른 자들을 쫓아내지도 못한 무력한 사제들까지.

모조리 용납할 수 없었다.

베인은 오로지 아직 몸이 성치 않은 투이나에게 비를 맞힐 수 없어서 움직였다.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불안하게 머리를 드는 투이나에게 베인이 속삭였다.

그는 그녀의 작은 부분까지 철저하게 사람들에게서 숨겼다.

그 노력은 성공을 거둬 어떻게든 투이나의 안부를 확인하려는 자들까지 미치게 만들었다.

“루가 님!”

“조용히 하고 비키십시오.”

베인이 단호하게 그들을 물렸다.

호위들은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적이 아니라는 장점을 활용해 사제들을 밀쳐댔다.

다만 라카인은 가장 가까이 다가왔으면서도 손 하나, 발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부릅뜬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검게 빛을 빨아들였다.

호루니의 목이 메었다.

“살아, 살아는 계신 거죠?”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루가 님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베인이 팔에 힘을 주었다.

투이나가 그들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싫습니다.’

베인은 목 끝까지 올라온 그 말을 삼켰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루가 님.”

“정말 고마워요, 베인. 하지만 저 괜찮아요.”

투이나가 쏟아지는 비를 조심스럽게 손등으로 가렸다.

아직 물방울이 피부를 따라 굴러떨어지는 걸 보니 문지르지만 않으면 얼룩이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와락 걱정이 섞인 눈빛들이 달려들었다.

“아르힘 님이 오셔서 치료해 주셨어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호루니가 벅찬 소리를 터트렸다. 스카차도 희색이 만연해졌다.

라카인은 투이나의 목소리에 심장이 한번 크게 뛰었을 뿐, 여전히 극심한 고통이 가슴을 죄고 있었다.

“……두 분 다 아르힘이 다녀가신 성소에서 멀쩡하셨단 말입니까?”

사제 하나가 눈치 없이 호기심을 드러냈다가 베인의 소리 없는 질타를 받았다.

환멸이 났는지 베인이 호위들에게도 비키라는 몸짓을 했다.

“루가 님은 제가 모실 것입니다.”

반박하려던 호루니가 움찔했다.

그러고도 너희가 호위라고 할 수 있냐는 베인의 표정이 아픈 데를 찔렀다.

그때 라카인이 무슨 정신인지 모를 입으로 말했다.

“따라가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베인은 단칼에 거절했다.

“다시는 루가 님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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