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해한 구혼자 5권
18.
태양을 잡아왔을 때 선물로 받은 루비 장식을 머리에서 떼어냈다. ‘사그라들지 않는…’
시드룬은 하나로 땋아 주고 싶을 만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용케 밟지 않고 일어섰다.
“어쨌든 성과가 크군요. 지금 다시 해 봐도 되겠습니까?”
“네? 바로요?”
“빠른 결과는 빠른 실천이 낳습니다.”
시드룬이 다시 비늘을 꺼내 들자 질겁한 투이나가 후다닥 물러났다.
“오늘은 도저히 더 할 기력이 없어요.”
꽤나 아쉬워 보였지만 시드룬의 손에서 비늘이 사라졌다.
라카인이 잔잔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앞으로 계속 하기엔 루가 님이 너무 힘드십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였어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볼 수가 없었어요.”
“그때와 똑같았습니다.”
라카인이 침통하게 말했다.
그는 불에 탔던 기억보다 투이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게 더 한스러웠다.
“당신의 병이 나았기에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얼룩병자들이 비늘을 만졌을 때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멍하니 있던 시드룬이 말했다.
“아르힘이 당신에게 준 건 그 이상일 겁니다.”
새 생명.
투이나는 깍지를 꼈다.
시드룬이 물었다.
“아르힘에게 왜 당신만 얼룩병을 치료했는지 물어본 적 없습니까?”
“……있긴 있어요.”
투이나가 애매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그저 제가 희망이라고만 하셨습니다.”
“…….”
부담스러울 만큼 강한 시선이 도착했다.
“더 정확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으음, 노력해 볼게요.”
신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는 건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아르힘이 그녀에게 너그러운 편이긴 해도 말하지 않는 부분은 분명했으니까.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수리시는 신의 이야기를 듣자 대화로 돌아왔다.
“그래. 꼭 알아 오도록 해. 아르힘이 널 아낀다니 잘됐지.”
수리시가 어깨를 돌렸다. 일부러 가벼운 동작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믿음 잘 간수해 둬. 영혼을 지켜 주는 건 그거밖에 없거든.”
“수리시가 조언을 해 줄 줄은 몰랐네요.”
“어차피 저 녀석이 다 까발린 마당에 더 숨길 게 뭐가 있겠어?”
수리시가 시드룬 쪽으로 박살난 창문 쪼가리를 던지자 시드룬이 무심하게 마법으로 받아 넘겼다.
또다시 부서진 잔해를 주워 굴리던 그녀가 이번에는 호위들 쪽으로 던졌다.
라카인과 호루니가 한 손으로 잡아냈다.
“구경하느라 고생했다, 호위들. 가서 평생 자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길 바란다. 가능하면 다시는 여기 오고 싶지 않을 만큼 악몽을 꾸는 것도 추천하겠어.”
수리시가 심술궂게 말했다.
“물론 어딜 가서 떠벌리면 악몽 꿀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 전에 머리와 목을 분리해 주겠다는 협박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떨떠름해진 호루니가 손안에 든 잔해를 부서트렸다.
라카인은 수리시의 도발에도 그저 여기서 투이나를 데리고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돌아가자고 온몸으로 말하는 라카인과 호루니를 본 투이나가 어깨를 내렸다.
“다음에 봐요, 시드룬. 일단은 신전에서요.”
“알겠습니다.”
신전으로 돌아가는 마법진은 라카인과 투이나가 먼저 건너갔다.
밤을 꼬박 새운 스카차가 황급히 일어서는 게 제일 먼저 보였다.
“다녀오셨습니까!”
“쉬잇……. 목소리 낮춰야죠.”
스카차는 무사히 돌아온 세 사람을 보고 적잖이 안심했다.
안달복달하던 그는 호루니가 빠져나오며 마법진이 사라지자마자 살짝 다가가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땠어?”
“……끔찍했어.”
호루니가 치를 떨었다.
* * *
다행히 호위들은 충격에서 빨리 회복했다. 다량의 의문이 남은 자리를 남몰래 긁어대긴 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으려는 스카차에게도 입을 다물었다.
“다음에 너도 가면 알게 될 거야.”
“마법사들이 신전까지 염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번에도 모하세스에게 비밀을 말했다간 정말 죽을 겁니다.”
호루니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라카인이 샨에게 정보를 전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그녀는 라카인과 말도 잘 하지 않았다.
스카차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태도를 고수했지만, 내심 입맛이 써 보였다.
그들을 지켜보는 투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라카인이 변명하려는 태도조차 보이질 않아서 분위기는 계속 악화되었다.
지금도 똑같았다.
“모하세스 님이 물으시면 답해야 한다.”
“하!”
호루니는 기가 막힌지 땅을 노려보았다.
투이나가 안타깝게 그들을 보았다.
“당신의 뜻은 알겠어요, 라카인. 하지만 앞으로 샨을 만나러 갈 때는 따라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
라카인이 고개를 숙였다. 설득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도 당신을 지키는 건 어렵네요.”
투이나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도 당분간 숨어 있는 게 나을 거예요. 첫 번째 시험 때문에 샨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짐작조차 안 가니까.”
라카인은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타당한 제한이 아닌가.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는 반복적으로 그 생각에 몰두했다.
복종하라.
신에게 바칠 목숨으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건 그것뿐이다.
‘조용해서 더 걱정돼.’
투이나는 그림자처럼 서 있는 호위들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다.
마법사들을 만나느라 밤을 새웠으니 누구 한 명이라도 쉬었으면 좋으련만.
마법사의 마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괴감인지, 벌을 받는 것처럼 주눅이 들어 있는 호위들에게 돌아가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미 아침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루가 님.”
세숫물을 든 시종이 들뜬 표정으로 들어왔다.
마냥 쾌활하던 시종은 한숨도 못 잔 네 사람을 보고 퀭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일어나계셨네요?”
“네에. 음…….”
투이나가 불이 다 꺼진 등불을 내려놓았다.
“잠을 좀 설쳤거든요. 오늘 집중해야 하는 일이 많은가요?”
“어머나, 그러셨어요?”
호기심을 드러낸 시종은 곧 알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많지는 않아요. 후후. 루가 님이 왜 잠을 못 이루셨는지 알겠네요.”
“정말요?”
“저희도 크로퍼드 님이 첫 번째 시험에서 승리하셨단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하, 그 얘기구나.’
제 발 저렸던 투이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베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시종들이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설마 왕과 마법사를 그렇게 이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다들 온통 그 얘기뿐이에요!”
“내기 판에서도 지금 판돈을 바꾸느라 정신이 없어요. 걸었던 돈을 바꾸지는 못하니까 다들 여기저기서 새로 빌린 다음에 크로퍼드 님한테…….”
킬킬거리던 시종들이 합, 입을 다물었다. 투이나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 있던 것이다.
‘맞아. 그런 일들이 있었지.’
내기와 시험에 대해서 얘기했던 일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에 했던 결심들이 희미하게 가슴속을 떠돌았다.
아주 멀리까지 나온 느낌이 들었다.
원한다면 아직 돌아갈 순 있겠지만 조금만 더 가면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멀어질 거라는 예감.
그래서 투이나는 베인을 반드시 보러 가야만 했다.
* * *
샨의 하인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샨의 거처로 와 달라는 요청을 가진 채였다.
투이나는 그에게 줄 것이 거절밖에 없었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샨의 선물을 내밀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있었던 일은 개의치 않으니 방문해 달라 하셨습니다.”
아기 머리통만큼 크고 둥근 보옥이 내밀어졌다.
피처럼 붉은 홍옥이었다.
쉽사리 보기 힘든 보물에 모든 이가 턱이 빠지도록 놀랐다.
홍옥의 겉면에서 흐르는 금빛 무늬를 보고 있던 투이나만이 입을 다물었다.
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의 배포를 시험하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걸맞은 짝은 너밖에 없다.
샨의 위협과 과시가 섞인 보물을 보아도 아무런 탐욕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샨이 화를 감추려는 듯했다.
피가 들끓을수록 그는 차가워진다.
어울리지 않게 비위를 맞추는 하인의 모습까지 더해져 확신은 굳어만 갔다.
“루가 님께서 보석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압니다. 허나 이것은 나라에서 대대로 전해져 오던 귀물이니 보석이라 생각 말고 가납해 주십시오.”
“……피난민을 받아들인 것처럼 말인가요?”
처음으로 투이나의 입술이 열렸다.
태연하게 베인이 그녀에게 뭘 줬는지, 어떻게 거절했는지까지 꿰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뻔뻔함이 참으로 샨다웠다.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보석을 신처럼 섬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전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인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다른 나라를 약탈해서 빼앗은 물건에 거부감을 가질 걸 정확히 알고 있다는 표시였다.
‘뭐가 문제인지 그가 알까?’
신상, 보물, 신전, 무엇이든 그걸 부수고 빼앗는다고 신을 모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뺨을 후려치고 침을 뱉는 짓이나 다름없다.
그런 주제에 네가 믿는 신은 지켜 주었다고 말하는 노릇이 얼마나 뻔뻔한지.
없느니 못한 존중이다.
신전 사람들은 차츰 보물에 대한 감탄을 접고 투이나가 샨의 선물을 거절하기를 기다렸다.
내심 아까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신전에 조금이라도 몸을 담았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투이나는 그들을 배신했다.
“받겠습니다.”
“……!”
움찔하는 시종들과 반대로 하인은 더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주군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기뻐한다면 놀라겠네요.”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샨이 좋은 뜻에서 보물을 줬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인은 그 말을 단순한 치하의 표현으로 생각했다.
투이나를 대신해 호루니가 홍옥을 받아 갔다. 그녀는 이미 투이나에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 여기는 눈치였다.
호루니가 옳았다.
‘어떤 나라의 물건인진 모르겠지만 뿔뿔이 흩어진 피난민 중에 누군가는 아르힘에도 왔을 거야.’
그들 중에서 사라진 신을 믿는 단 한 사람에게만 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르힘 님, 믿는 일은 너무나 어려워요.’
믿으면서도 또 알고, 그 사람을 아는 대로 믿어 버리는 순환이 몹시 버거웠다.
아끼지 않으면 도저히 못 할 짓이다.
투이나는 피로해진 눈두덩을 누르고는 베인을 향해 다시 한 발짝을 떼었다.
그 모습이 순간 어찌나 신묘하게 느껴졌는지, 하인은 명령도 아닌데 투이나가 떠나는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무심코 그녀를 따라 하듯 눈두덩을 눌러 보던 하인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군에게 지금 일을 빠짐없이 전하기 위해 달려갔다.
* * *
베인은 빛의 사랑을 받는 남자였다.
흰 셔츠에 진녹색 조끼를 입고 창가에 서 있을 뿐인데도 그에게는 타고난 기품이 흘렀다.
햇빛을 받아 흐르는 금빛 머리카락 아래로 세상의 온기를 짜내어 떨어트린 듯 완벽한 모양의 호수가 있었다.
그 한 쌍의 호수에는 지성이 있었고, 온화함이 있었으며, 영원히 빠져들고 싶게 만드는 갈망이 있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홀리지 않도록 이따금씩 가려 버리는 눈꺼풀마저 매혹적이었다.
투이나는 가끔씩 베인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잊고는 했다.
그가 잊기 쉬울 만한 외모를 지녔다는 게 아니라, 직접 봐야만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이 난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웃는다고 상상해 보라.
“돌아오셨군요.”
베인은 정확히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답게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까지 그가 몇 번씩 웃은 적이 있었지만 절대로 지금처럼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평소랑 달라 보여.’
어렴풋이 그가 입은 옷이 훨씬 화려하고 우아해진 것 같긴 했다.
그런 쪽으로는 감을 잘 못 잡는 투이나가 보기에도 그랬으니, 시종들은 눈을 새로 갈아 끼울 지경이었다.
“세상에, 미모로 사람 잡겠네.”
“작정하신 거야.”
시종들은 거의 침을 흘려댔다.
‘그동안 정말로 단정하게 입었던 거구나.’
투이나가 사락거리며 다가오는 베인을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화려함에 눌려 버렸을 복장마저도 그에게는 완벽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가 님.”
한쪽 팔을 뒷짐 진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머뭇거리던 투이나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안착했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베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그 한 번의 동작으로 힘없이 풀렸다.
“……실망하셨던 거라 생각했습니다.”
되살아난 뒤로 벌써 두 번이나 그를 피했으니,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눈치 챘을 것이다.
투이나는 차마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바라보는 베인의 어깨를 살그머니 쥐었다.
“그렇다고 옷장을 뒤집어엎을 필요는 없었잖아요.”
“……조금 과하긴 했습니다.”
베인이 주름진 목 부분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가 쑥스러워하자 어쩔 수 없이 투이나는 웃음이 나왔다.
“잘 어울리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루가 님이 실망하신 건 사실이잖습니까.”
베인이 살짝 시선을 내렸다.
촉촉한 눈가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저절로 몸이 긴장했다.
‘히아신스 냄새가 나.’
베인은 자신이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이 루가에게만은 통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은 투이나도 엄청나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녀의 체온이 점점 올라갔다.
“그게, 음……. 일단 앉아서 얘기할까요?”
“루가 님이 원하시는 대로.”
베인이 얌전히 무릎을 굽혔다. 그게 또 얼마나 근사한지.
투이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으며, 베인은 그 모습에 여러 번 안심했다.
여전히 그녀는 맞잡은 손을 함께 쥐어 주었다.
베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있었던 일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베인이 말했다.
“루가 님의 뜻을 헤아리지도 못한 제 잘못입니다.”
“……뭘 질책하려는 줄 알고요?”
“무엇이든 루가 님을 실망시킨 죄는 뼈아프게 느끼고 있습니다.”
베인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투이나의 가슴까지 저려 왔다.
원래 그녀는 누군가가 괴로워하면 곧장 걱정을 덜어 줘야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려 베인이 괴로워한다고 해도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믿고 싶으니까.’
투이나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베인은 제가 왜 구혼자들을 시험하려는지 짐작한 적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베인이 잠깐 고민에 빠져들었다.
“……구혼자들이 다치지 않는 방식으로 돌려보낼 방법을 찾아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베인은 한 마디씩 조심스럽게 건너갔다. 한때나마 자리를 떠났던 투이나의 모습이 그를 신중해지도록 만들었다.
“루가 님이 이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던 이유도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걱정 대신 영광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말하는 내내 베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는 분명 그런 마음으로 움직였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너무 오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감정적인 동요를 감추듯 베인의 손이 자꾸만 입가를 매만졌다.
남들은 집중하는 모습까지 그저 아름답다고 여겼을 테지만.
투이나는 그가 치부를 들킨 것처럼 행동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주저하던 그녀가 단숨에 말을 털어 넣었다.
“저는 지금 목숨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어요.”
“……예?”
베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누군가가 루가 님을 살해하려 한단 말입니까?”
“자잘한 사고가 있었어요. 다행히 훌륭한 호위분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계속 위험을 간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투이나의 칭찬에 호위들의 안색이 약간 밝아졌다.
투이나가 죽을 뻔한 이야기만 아니었으면 좋아서 어깨까지 으쓱거렸을 것이다.
반면에 베인은 호되게 충격을 받았는지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어떻게 감히 아르힘 님의 신전에서 그럴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제 말이요, 베인. 제 마음도 그랬다니까요.’
투이나는 처음 살해당했을 때의 자신처럼 반응하는 베인에게 깊이 공감했다.
‘게다가 이젠 한 번도 아니야.’
검에 찔리고, 활줄에 베이고, 마법에 다치고, 독까지 먹었다.
정리하고 보니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다쳤다.
심지어 이러는 와중에 주변 사람은 기절하고, 불에 타 죽을 뻔하고, 피가 뽑히고, 노골적인 살해 위협을 몇 번씩이나 받았다.
정확히는 주로 라카인이 그렇게 당했으니, 투이나는 라카인을 돌려보내야 하나 다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돌이켜보니 정말 못할 짓만 했어.’
라카인 덕에 살았지만 의문은 커져만 갔다.
사고가 많아질수록 왜 자신을 노리는지는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구혼 기간 마지막 날에 살해당한 건 원한이나 계획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살해 시도는 혼란을 부채질하기만 했다.
딱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막무가내인 공격 덕분에 구혼자들을 파악하려는 진짜 이유를 덮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살인 미수랑 살해는 하늘과 땅 차이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인은 당장이라도 눈앞에 앉아 있는 투이나가 사라질 것처럼 굴었다.
“지금은 무사하신 겁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맙소사…….”
“전 아주 멀쩡해요.”
투이나가 그를 얼른 안심시켰다.
그러나 베인은 무릎을 부서져라 쥐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투이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제게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루가 님. 정말로 괜찮으신지 보고 싶습니다. 제가, 제 눈으로.”
억눌린 그의 목소리에서 어금니가 눌리는 듯했다.
투이나는 가슴이 저미는 걸 느끼며 깊게 눌러썼던 두건을 살짝 뒤로 밀었다.
말가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베인은 떨리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몰랐다. 전혀 몰랐다.
그에 대한 분풀이인지 사죄인지 모를 감정이 아주 작은 상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움직였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녀 가까이에 다가간 반작용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베인의 머릿속이 순간 제멋대로 움직였다.
“만져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분칠이 지워질 위험이 있었지만 투이나는 기꺼이 허락했다.
베인이라면 분이 벗겨질 만큼 험악하게 다루진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예상대로 베인은 깃털보다도 섬세하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작게 박동하는 맥박이 손 아래로 느껴지자 간신히 뭉쳐 있던 호흡이 풀려 나갔다.
베인은 얌전히 눈을 감고 얼굴을 맡긴 투이나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히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예의 바르게 떨어질 순간에 짐승처럼 굴려는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루가 님이 먼저다.’
그래서 베인은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처럼 재빨리 손을 뗐다.
투이나가 약간 이상하게 바라본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실망하는 게 더 두려웠다.
“신전에서도 알고 있습니까?”
“모두에게 공지할 만큼 알려진 사실은 아니에요. 그래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다 알고 계실 거예요.”
“그래서 호위를 뽑으셨군요.”
베인이 중얼거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늘 붙어 다니는 호위를 질투한 시간이 부끄러웠다.
그는 얼른 그 자리를 열성적인 노력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 인원으로는 부족합니다. 제게 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이름난 무사와 마법사를 찾아오겠습니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보상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저희 상단과 오래 거래한 자들이 많습니다.”
“말은 정말 고마워요, 베인.”
“부디 이번에도 거절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루가 님이 몇 번이나 목숨이 위험하셨다고 하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괴로워하셨습니까.”
“길지 않았어요.”
투이나가 그의 고통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말했다.
“제겐 아르힘 님이 계시잖아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베인의 초조함이 누그러졌다.
“이번 시험도 아르힘 님의 뜻에 따른 것인가요? 역시 그분께서 지켜 주시는 겁니까?”
“아르힘 님은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시죠.”
투이나는 그리고 베인이 있어서 훨씬 더 쉽게 극복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베인은 지금 당장 투이나가 쓰러져 죽을 위험이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 모든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연인을 신이 지켜 준다는 기쁨은 누구나 누리기 힘든 것이 아닌가.
베인은 아르힘에게 찬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저 또한 모든 힘을 다해 루가 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베인은 투이나를 향해 기꺼이 내민 팔에 충분한 보답을 되돌려 받았다.
베인은 한참이나 투이나를 안은 채 놓아 주질 않았다.
연인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으나 계속 지켜보기엔 민망한 광경이기도 했다.
방 안에서 같이 기다리던 시종들과 호위들은 유난히 애정이 넘칠 때마다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라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리 호위하려고 주의를 기울인다지만 평소보다 집요했다.
그는 투이나가 웃고 어루만지고 행복에 겨운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종종 투이나에게서 발견했던 즐거운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라카인은 새삼스럽게 깨달으면서, 왜 전에는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그게 궁금했다.
가슴이 저렸다. 저리다면 아픈 걸 텐데, 이상하게도 그 고통을 끊고 싶지가 않았다.
“크흠!”
스카차가 내키지 않는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투이나와 베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라카인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
라카인이 왜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기에 스카차는 눈을 굴렸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는 원래 호루니가 설명했지만, 비밀 누설 사건 이후로 그녀는 라카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호위들 중에서 제일 라카인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사람이 사이를 중재해야 하다니.
부조리하지만 어쩌겠는가.
스카차가 잇몸을 꽉 눌러 가며 설명했다.
“민망해하실 겁니다.”
“…….”
라카인이 그런가 하는 의아함을 미약하게 드러냈다.
만약 자신이 저 상황이라면 민망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였다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가정이다.
그래도 절대로 민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순간 등줄기를 타고 뺨까지 소름이 돋는 듯해 라카인은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때맞춰 다른 시종이 도착했다.
똑똑똑.
열려 있는 방문을 세 번 두드린 시종에 놀란 연인이 떨어졌다.
“무슨 일인가요?”
“루가 님께 방문객이 찾아왔습니다.”
시종이 담담하게 말했다.
투이나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가 봐야겠어요.”
“약속도 없이 온 자입니다.”
베인이 허리를 감은 팔을 놓기가 싫어 속삭였다. 투이나도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떼어냈다.
“급하게 오신 만큼 중요한 볼일이겠지요.”
바르작거리던 베인이 천천히 물러났다.
한참 투이나를 바라보던 그가 두건을 정리해 주듯 그녀의 이마를 매만졌다.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베인은 그 외의 말은 꾹 삼켰다. 이제 더 이상 그를 피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면 모욕이 될 것이다.
그는 투이나의 믿음을 확인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토록, 이렇게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의심했다가 사이가 벌어지고 싶지 않았다.
“또 찾아올게요.”
투이나가 이마 근처를 맴도는 베인의 손바닥을 가져와 입 맞췄다.
그의 초조함이 얼마간 사라졌다.
“부디 안전하시기를.”
그가 뺨을 쓸며 떨어졌다.
서로 아쉬움을 삼키며 두 사람이 일어났다. 파장 분위기에 호위들과 시종이 조용히 뒤따랐다.
“하아…….”
베인의 거처에서 나오자마자 투이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괜찮아.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어.’
비록 첫 번째 시험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연인처럼 지낼 수 있었다.
투이나와 베인 모두 부단한 노력 끝에 다시 만날 결심을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그냥 좋았다.
어색함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여운에 잠겨 있던 투이나는 곧 원래 할 일로 돌아갔다.
“어떤 분이 찾아오신 거죠?”
“마디악 말라루크를 아십니까?”
시종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투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는걸요.”
“지금은 은퇴한 전 의장입니다.”
“아아, 그런 분이 저를 왜……?”
“만나 보시면 아실 겁니다.”
시종이 허리를 숙였다.
옳은 말이라 투이나는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건물로 이동했다.
마디악은 일반적인 응접실이 아니라 보다 개인적인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창문에 주렴을 드리운 아늑한 방 안에 담요를 덮은 지긋한 나이의 노인이 있었던 것이다.
투이나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마디악은 몹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백태가 낀 눈을 본 투이나가 서둘러 무릎을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투이나입니다.”
“마디악 말라루크입니다.”
스러져 가는 외모와 달리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거동이 불편한지 투이나에게 가려고 시종 둘을 부르는 걸 본 그녀가 황급히 말했다.
“앉은 자리에 계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그래 주면 감사하겠군요.”
마디악은 사양하지 않았다.
투이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시험에 베인 크로퍼드가 통과한 걸 축하드리겠습니다, 루가 님.”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축하는 끝냈으니 이제 저희 쪽에서 축하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고 마디악이 단숨에 대화를 휘둘러 쳤다.
투이나는 당황했다.
“저, 바로 본론을 말씀하시게요?”
“본론에 필요한 사항을 전달하는 중입니다. 저는 의회에 있을 때도 은퇴한 지금도 강경한 의회파라는 점을 알아 두셨으면 하니.”
투이나가 살짝 침을 삼켰다.
“지금 의장님에게 있었던 일을 들으셨군요.”
“물론 들었습니다만 그건 오늘의 주제와 상관없습니다. 그는 이미 받아야 할 벌을 받았고, 이제 더 이상 의장도 아니지요.”
‘헉, 결국 잘리셨구나.’
몰랐던 소식이라 투이나가 뒤늦게 놀랐다.
마디악의 말이 이어졌다.
“의회의 수장은 언제나 의회파가 뽑혀야만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대표하는 자는 언제나 자신이 소속한 곳을 알아야 하니까요.”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마디악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렇습니다.”
마디악이 또렷하게 눈을 굴렸다. 흰자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였다.
“루가 님이 신전의 수장으로 오셨을 때 놀라기는 하였으나 반대하는 마음도 아니었습니다. 은퇴한 자의 마음이 무슨 상관이냐 하시겠지만 그런 사소한 질책은 대화 후에 듣겠습니다.”
“질책하지 않아요.”
“그런 말씀도 대화가 끝난 뒤에 듣겠다는 소리입니다.”
찔끔한 투이나가 손을 모았다.
시종들과 호위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그들이 대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아르힘은 의회와 신전이 나뉘어 백성들을 보살펴 왔습니다. 그것이 아르힘 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임무이지요.”
“네.”
“신전에서 직접 아르힘 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시중든다고 해서 의회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투이나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마디악은 잠깐 미심쩍게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저는 의회가 신전의 뜻을 절대로 따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요?”
“예, 절대로.”
마디악이 주름진 손으로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오해하진 말아 주십시오. 합의조차 보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신전의 뜻을 자신의 것처럼 떠드는 의원들을 제가 참아 줄 수 없다는 뜻이니까.”
투이나는 한때 의회를 주름잡았던 의장을 보며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끌었던 사람은 이래야만 하는 걸까?’
마디악 또한 눈앞에 앉은 신전의 수장을 남몰래 관찰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제들 같았으면 벌써 언성이 높아졌을 소리다.
그럼에도 침착하게 앉아 있는 이유가 대범함인지 무지함인지 궁금했다.
“루가 님은 아르힘 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오해와 오독과 탐욕에서 벗어나신 분이란 뜻입니다. 허나 저희들은 루가 님처럼 신의 뜻대로만 살 수가 없습니다.”
마디악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기에 같은 인간끼리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해야만 합니다. 어쩔 수 없는 굴레이지요.”
“…….”
“하지만 동시에 아르힘 님께 감사드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른 나라들은 저희처럼 의심해 보지 않아도 되지요.”
“왕이 있으니까요.”
투이나가 선선히 대답했다.
다소 걱정하던 마디악은 그녀가 대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 저는 의회를 사랑하고, 의회의 적인 신전의 존재를 사랑합니다.”
마디악이 거침없이 말했다.
“그렇기에 저는 이 나라에서 왕이 나오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마디악이 던진 말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사방으로 튀었다.
‘왕이라고?’
아무리 투이나라도 그 말은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어,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대관식이 열렸나요?”
“루가 님이 그 대관식의 주최자십니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디악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첫 번째 시험의 우승자가 어떤 식으로 왕과 마법사를 물리쳤는지 모두가 압니다. 대단한 승리였지요. 백성들이 찬사를 바치고 있습니다.”
마디악의 목에 뻣뻣함이 서렸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은 신에게만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대체 무슨…….”
“베인과 결혼하시겠다면 아무도 말릴 권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루가 님이 시험을 내리고 구혼자가 통과하는 모양새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디악이 힘을 주었다.
“레오나 크로퍼드가 의회에 있는 한 베인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남자로서 결혼해야 합니다. 아리따운 미모와 부유함. 딱 거기까지만 허락하십시오.”
아연실색한 투이나의 표정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마디악이 경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루가 님은 왕을 낳으시게 될 겁니다.”
바늘 송곳 같은 침묵이 대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건 이제 투이나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마디악이 데려온 시종들마저 미치지 않았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흘끔거리고 있었으니.
‘왕을 낳게 된다고?’
충격으로 질린 머릿속이 느리게 연산을 시작했다.
마디악이 질 나쁜 농담을 하려고 이렇게 길게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게다가 그녀는 더없이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유가 뭘까?’
투이나는 우선 이해했다.
‘의회와 신전이 다른 곳이라는 점을 그렇게 강조를 해 놓고 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조금씩 변해 가는 투이나의 표정을 마디악이 뚫어져라 응시했다.
‘둘이 합쳐지면 더 이상 왕과 다를 게 없어지기 때문이라서.’
서서히 투이나의 입이 벌어졌다.
‘내가 아르힘 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이상, 시험마저도 그분의 뜻이 되어 버리는 거야.’
루가의 권위가 이양된다.
‘그리고 의회에선 절대로 둘 이상의 가족이 같이 일할 수 없지. 혈육은 서로의 의견을 반영할 테니까.’
베인의 가족인 레오나는 이미 의회에 있다.
‘만약…… 루가의 직위와 의회의 직위를 모두 한 사람에게 물려주게 된다면?’
하나 더하기 하나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는 투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마디악은 투이나가 이해했음을 알아차렸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약한 안도가 스쳤다.
“그것이 제가 루가 님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할 말을 마친 마디악이 몸을 깊숙이 담요 속으로 파묻었다.
방 안에 가득 찼던 온화한 공기가 저무는 해를 따라 점점 식어 가고 있었다.
“……너무 섣부른 걱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투이나가 신중하게 입을 떼었다.
“의회도 루가도 세습되는 직위가 아니에요.”
“물론 시험을 치르지요. 하지만 한번 의원이 나온 집안에서 다음 통과자가 나오는 게 얼마나 쉬운지 아시잖습니까. 루가의 직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제 귀에는 루가 님의 시험이 들어왔고요.”
투이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오해될 수도 있구나…….’
구혼자들과 결혼만 고려해 봤지, 아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투이나는 베인을 닮은 아이를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너무 막연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저 베인의 어린 시절은 무척이나 작고 사랑스러웠겠구나 하는 짐작이 잠깐 스쳐 갔을 뿐이다.
그를 떠올리던 투이나가 가지런히 깍지를 꼈다.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아요. 저 또한 아르힘에서 왕이 나오길 바라지 않습니다.”
“…….”
“제가 지금이라도 시험을 중단하면 괜찮을까요?”
솔직한 투이나의 질문에 긴장이 풀렸는지 마디악도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아주 약간은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최대한 그의 무력함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루가 님이 사랑해 주지 않았다면 결코 결혼하지 못했을 거라고.”
투이나의 속이 뜨거워졌다.
‘베인이 그토록 시험에서 이기고자 했는데…….’
승리를 인정받고 기뻐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지금 마디악의 말을 들으니 왜 그때만이라도 같이 기뻐해 주지 못했는지 후회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한 일이 무슨 죄라고.
투이나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비밀은 버겁다.
신전에서 그녀에게 매번 분칠을 할 때도 느껴졌던 아릿한 답답함이 잠시 속을 두드렸다.
하지만 여기서 시험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제가 언제까지 루가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말로 왕이 태어날까요?”
“루가 님이 결혼한 뒤에도 루가 님입니까?”
마디악이 질문을 질문으로 답했다.
감히 누구도 대놓고 묻지 못했던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 마디악이 어깨를 구부렸다.
“알 수 없는 부분은 추측으로 두고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르힘 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잖아요.”
“그분께 직접 확인하셨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루가 님, 저희는 신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짐작만 할 뿐이지요.”
마디악의 목소리가 지친 듯이 목을 긁었다.
“유일하게 아르힘 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루가 님도 그분께서 왕을 원하신다면 따르시지 않겠습니까.”
“…….”
“따르시겠죠. 그러지 않으신다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낼 테니.”
투이나가 눈을 깜박였다.
마디악의 말은 아무리 그녀에게 공감할지라도 결국은 신의 뜻에 따른다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왜 마디악이 신전과 의회가 대립하길 바라는지 알겠어.’
그녀에게는 반대할 권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르힘이 의심과 자유를 허락했으니까.
“이해해요.”
투이나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뭘 원하는지 이해했어요.”
또렷한 눈동자를 마디악은 하염없이 응시했다.
“감사합니다, 루가 님.”
마디악이 늘어진 볼을 빳빳하게 움직여 보조개를 드러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 마음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그만큼 아르힘을 아끼니까요. 마디악 님이 의회에 계셨을 때 분명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을 거예요.”
“예. 많은 자들이 오고갔지요. 하지만 오늘 이렇게 뵈니 루가 님을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싶군요.”
마디악이 연륜을 섞어 뻔뻔하게 슬쩍 말했다.
“아르힘 님이 채 가시기 전에 알았다면 제가 직접 가르쳐 의회로 들였을 텐데요. 단단히 끼고 돌았을 겁니다.”
“말씀만 들어도 기뻐요.”
눈이 동그래진 투이나가 수줍게 대답했다.
“가족 중에서 의원이 나왔으면 다들 정말 좋아했을 거예요.”
“대신 루가 님이 되셨잖습니까.”
“아아! 그러네요.”
어느새 투이나와 마디악은 여느 노인과 손주처럼 정다워 보였다.
지켜보던 자들은 언제 분위기가 이렇게 부드러워졌는지 어리둥절했다.
일단 이해가 통하고 나자 한때 누군가를 이끌었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시야가 공감대가 되어 주었다.
무엇이든 애정을 갖고 돌본 사람들은 다른 분야에도 너그러워지기가 쉬웠다.
투이나가 담요 위에 놓인 마디악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주름 사이로 검버섯이 핀 피부가 보였다.
‘아주 작고 까만 얼룩병 같아.’
투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신전에 방문해 주셨으니 사제님께 치료를 받고 가세요.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불편하셨을 텐데.”
“괜찮습니다, 루가 님.”
마디악은 여전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얼룩병이 아닙니다. 그저 노화이지요.”
마디악이 마른 손을 들어 흔들었다.
“모든 고통을 덜어 주는 신께서도 죽음을 피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으시지요.”
투이나는 잠시 대답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왜…….’
끼익.
볼일을 마친 마디악이 의자를 짚었다.
힘겹게 일어나려는 마디악에게 시종들이 얼른 달라붙었다.
“루가 님께 올릴 말씀이 모두 끝났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더 있다 가셔도 괜찮아요.”
“배웅은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마디악은 찾아온 것만큼이나 떠나는 것도 단호했다.
“억지로 찾아온 늙은이의 말을 이만큼이나 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정말로 감사드려요.”
투이나도 일어나 마디악의 팔뚝을 부축했다.
“어렵게 빌려주신 지혜 잘 쓰겠습니다.”
“루가 님께 아르힘 님의 은총이 언제나 함께하시길.”
마디악은 문까지만 투이나의 부축을 허락한 뒤 떠나갔다.
마디악은 배웅을 사양했지만 그래도 투이나는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러분.”
투이나가 살짝 방문을 닫았다.
“방금 들었던 얘기 어떻게 생각하세요?”
멀뚱히 선 사람들에게 투이나는 얘기가 길어질 테니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엉거주춤 선 시종이 물었다.
“가서 사제님을 불러올까요?”
“그분들은 면담 때 얘기하려고요.”
투이나가 소파를 끽 당겼다.
담요를 정리하던 시종이 눈치를 보았다.
투이나는 자연스럽게 호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던 호루니가 제일 먼저 용기를 냈다.
“뭐든 루가 님이 바라시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솔직히 가능성 있는 얘기 아닙니까.”
호루니와 스카차가 차례로 말하자 비로소 시종들의 입이 트였다.
“그거 말고 다른 이상한 내용은 없었나요?”
“결국 결론은 크로퍼드 님과 결혼하지 말라는 얘기 아닌가요?”
“하긴 원래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내심 아르힘에서 왕이 나오기를 바랄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분께 직접 확인하셨습니까?」
투이나는 마디악이 했던 문장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그녀와 나눴던 대화는 좋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분명했다.
투이나가 아랫입술을 눌렀다.
“저와 베인이 결혼하리란 얘기가 왜 벌써 기정사실처럼 들리죠?”
“크로퍼드 님과 결혼하실 겁니까?”
희색 어린 반응이 먼저 터졌다.
“아니요. 대답 못 해요. 구혼 기간이 끝나는 날 밝혀야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미 대답하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시종들이 음흉하게 웃었다.
“솔직히 루가 님이 크로퍼드 님과 연인이신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죠. 게다가 첫 번째 시험까지 통과하셨는데 더 이상 누가 자격을 논하겠습니까?”
투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이들도 대화를 듣기는 들었는데 원하는 부분만 남겨 둔 모양이다.
투이나는 그들의 확신이 두려웠다.
‘모르는 사람이 없으면 샨도 당연히 알 텐데.’
투이나는 보란 듯이 선물한 거대한 홍옥이 마음에 걸렸다. 분풀이로 주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이다.
‘무슨 생각일까? 하필이면 샨이 또 왕이야.’
이래저래 그가 떠오르고 말았다.
결혼과 왕과 베인이 뒤죽박죽 섞였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만든 반죽을 라카인에게 던져 보았다.
“아르파에선 왕을 어떻게 결정하나요?”
“아르파님의 강림이 성공하는 순간 왕위가 이양됩니다.”
라카인이 빠르게 대답했다.
어쩐지 대답하는 모습이 바짝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갸웃하던 투이나가 물었다.
“아르파 신을 모시는 사람은 언제나 피로 이어진다고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아르파 님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에게만 힘을 빌려주십니다. 왕의 핏줄은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을 부를 수 있도록 축복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샨과 결혼한다면 아르파 신을 부를 수 있을까요?”
“루가 님!”
“불가능합니다.”
경악한 숨소리 사이로 라카인이 빠르게 답했다.
“축복은 피로만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샨과 결혼해도 아이가 왕이 될 가능성이 있네요.”
“세상에, 루가 님!”
시종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투이나가 되물었다.
“그렇다면 전 마법사와 결혼해야 할까요?”
시드룬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을 사람 같았다.
‘아니, 연구에 쓰겠다고 하려나?’
생각해 보니 찜찜하다.
투이나가 부르르 머리를 흔들었다.
“저도 당연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투이나였다면 쉽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루가다.
“구혼 기간은 일 년이에요. 아르힘 님이 허투루 쓰라고 주신 기간이 아니니 결정하기 전까지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시종들이 선선히 동의했다.
스카차가 흘끔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루가 님, 어차피 아이가 자라서 무엇이 될지는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왕이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시종들이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았다.
라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투이나가 왕이었다면 하는 상상에 골몰해 있었다.
지금처럼 두 명의 주군을 섬기지 않아도 되는 완전무결한 어떤 왕이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글쎄요.”
투이나가 의도치 않게 상념을 잘랐다. 그녀는 한 번도 왕이 좋은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들어 보러 가야겠네요.”
샨은 그동안 내내 투이나가 왕답게 행동하기를 강요했다.
그러니 왕이 무엇인지 물어봤을 때 거절하지는 않겠지.
‘미친 듯이 화를 내면서 설명할지라도 말이야.’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슨 반응이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행히 샨은 그가 가질 수 있는 열여섯 가지 감정 중에서 가장 무난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왔군.”
무관심이 툭 던져졌다.
투이나는 예의 바른 자세를 취하며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첫 번째 시험이 끝난 다음 샨의 거처엔 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냄비를 닦고 불씨를 나르는 하인들의 움직임에는 소리가 제거되어 있었다.
그들의 주인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려는 몸짓들이다.
그런데 정작 샨은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가만히 손에서 호두를 굴리는 소리만 따그락따그락 났을 뿐이다.
단조로움이 귀를 자극하자 투이나의 머릿속에 샨에게 유리관이 박살나던 장면이 떠올랐다.
“손은 좀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수로, 하는 말이 앞니까지 튀어나왔다가 도로 튕겼다.
샨이 불가사의한 적이 한두 번이던가.
투이나는 다시 천막으로 돌아온 장소를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천장을 가로지른 살대가 모두 닫혀 있었다.
“밤엔 비가 올 거다.”
샨이 불쑥 말했다.
“그게 궁금해서 바라보고 있었다면 말이지.”
달각.
샨이 손동작을 멈췄다.
투이나는 느긋하게 내린 그의 팔이 돌변하진 않는지 눈여겨보았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호두 껍데기가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비가 온 뒤에는 더워지겠어요.”
“그거 무슨 암호인가?”
“곧 여름이잖아요. 그냥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겁니다.”
샨의 눈이 천천히 투이나를 따라 움직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
역시 샨은 눈치가 빠르면서도 자기 좋을 때만 알은척하는 게 맞았다.
투이나는 날씨 이야기 따위를 접어두었다.
“라카인에게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데려오지 않았군.”
처음 샨의 거처에 올 때 라카인은 반드시 따라오겠다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반대도 없이 명령에 따랐다.
격한 반대를 예상했던 투이나와 호위들은 그 모습에 오히려 기분이 뒤숭숭해지고 말았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투이나는 이미 라카인을 곁에 두기로 결정했는데도.
“쉬어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투이나는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아르파 신의 의식도 보았고, 정복한 나라들도 들었지만, 정작 모하세스에 대해선 아는 게 없네요.”
샨은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모하세스도 아르힘처럼 산 위에 수도가 있다.”
생각에 잠긴 그의 손이 다시 호두를 굴렸다.
“아르힘처럼 오래된 신들은 좋은 땅을 차지할 기회가 많았겠지. 평원과 소금이 가득한 땅이라니.”
샨이 피식 웃었다.
“운이 좋지 않은 자들은 신에게 대가를 바쳐 살아남았다. 그리고 생각했지. 어차피 피를 바쳐야 한다면 다른 자의 것이 더 낫지 않나?”
“…….”
“그들은 자신을 죽이던 도살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대가로 다른 자를 바칠 권리를 얻었지.”
“……도살자가 아르파였나요?”
“도살자는 왕이다.”
샨의 손에서 빠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엄지와 검지만으로 호두 껍데기를 부숴 버린 것이다.
조각난 호두에서 쪼글쪼글한 알갱이가 굴러 나왔다.
“그래서 왕은 원하는 대로 다른 자들의 목숨을 다루는 거군요.”
“그들이 내게 바친 권리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목숨을 옮기지. 나는 신에게 바칠 목숨을 결정할 뿐이다. 기준도 필요 없어. 관대하신 아르파는 피를 가리지 않으시니.”
“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두려워해요.”
“백성들은 어리석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르파지. 하지만 스스로 피를 바칠 수는 없으니 그들은 왕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잊어버렸다. 그러니 내게 반항할 수 없는 거다. 감히 그럴 수는 없지.”
샨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을 끝냈다.
투이나는 거리낌 없이 말하는 샨이 처음으로 진심을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가 평소에 거짓을 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샨은 언제나 사실에만 관심이 있다는 뜻에 가까웠다.
그를 속이지 않을 진실.
하지만 그것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샨은 거침없이 파헤쳤고, 결과가 어떻든 반드시 해소했다.
재판에만 관심이 있는 처형인의 자세다.
그리고 언제나 피가 슨 칼을 든 처형인은 기분에 따라 관대한 사형과 잔인한 도살을 결정할 수 있었다.
‘오직 그뿐.’
샨의 진심을 알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먹을 텐가?”
샨이 손을 내밀었다.
넓은 손바닥은 흘러넘치는 피 대신 부서진 잔해처럼 호두 알갱이와 부스러기로 가득했다.
‘그가 떠난 전쟁터는 언제나 이런 모습이겠지.’
투이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왕이 정말 샨이 말한 대로라면 왜 사람들은 왕을 원하는 걸까.’
사람은 무엇을 필요로 하기에.
그녀는 왕의 손바닥에서 호두를 집어 갔다.
작은 조각을 입에 넣고 씹어 보자 떫은맛이 먼저 혀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끝은 담백하고 달기까지 했다.
샨은 호두를 삼킨 투이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대는 겁이 없는 것 같아.”
그는 마치 그녀를 쓰다듬고 싶은 것처럼 손등을 올렸다가 천천히 내렸다. 그러자 모든 호두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이나가 흘긋 그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샨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게도 당연히 두려움이 있어요.”
“글쎄. 그건 보여 주지만 않으면 상관없어.”
“샨, 전 왜 왕이 그럴 필요 없는 사람을 죽이는지 묻고 싶어요. 아무리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애꿎은 죽음까지 허락하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걸 누가 결정하지?”
샨은 단숨에 손가락을 끌어당겼다.
“죽음에는 차이가 없다. 단 하나의 죽음이 수천 명의 죽음을 부르든, 수천 명을 죽여서라도 단 한 명을 살리든.”
단단한 바위처럼 굳은 주먹이 그의 허벅지 위에 놓였다.
샨의 눈이 혜성처럼 번득였다.
“그건 내 기분에 달렸어.”
* * *
라카인은 허락을 받고 투이나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시종들은 꺼림칙해했지만 청소를 대신 하겠다는 말에 좋아라 문을 열었다.
“어차피 루가 님이 계신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라카인은 쉽게 혼자 남겨졌다.
언제나 투이나가 떠들썩한 인원과 함께 있었던 장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 신전의 수장치고 투이나의 물건은 많지 않았다.
옷과 귀중품은 신전에서 따로 관리했으며, 간간히 선물로 들어온 꽃도 금세 시들었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소중하게 보관한 말린 꽃을 보다가 청소를 시작했다.
그가 호위 일을 한 것보다 하인 일을 한 시간이 훨씬 길었다.
단 하나의 먼지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맹렬하게 방을 치웠다.
크게 더럽지 않아서 할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를 힘들게 했다.
천 개가 넘는 그녀의 금은보화를 전부 닦는 일이라도 기꺼이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투이나에게는 금은보화가 없었다.
서랍을 정리하던 라카인은 두툼한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투이나는 작은 쪽지 하나 버리지 않았다.
닳은 종이의 겉면에서 특별히 애정을 담은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라카인은 자신도 모르게 끝을 만져 보고는 황급히 손을 떼었다.
소리 나게 서랍을 닫고는 다시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보안을 위해서인지 투이나의 방은 창문이 작고 높았지만 한낮이 되면 반드시 햇볕이 들어왔다.
라카인은 빛에 반짝이는 먼지들을 잡아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헛손질을 해도 아주 작은 먼지들은 계속 그의 주변을 떠돌았다.
그에게 붙어 온 먼지들이니까.
더는 치울 구석이 없을 만큼 깨끗해지자 라카인은 포기하고 방을 나왔다.
“잠깐 실례하겠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사제가 가볍게 몸수색을 했다.
어차피 가지고 나올 물건이 없었다.
감히, 그가 그럴 수 있겠는가.
“루가 님이 곧 돌아오실 거요. 무기는 그때 돌려주지.”
“…….”
라카인은 묵묵히 서 있었다.
무사제가 그를 흘깃거리더니 무기 없이도 위협적인 사내와 오래 있고 싶지 않았는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라카인은 자리를 옮길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피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려고 버둥거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목숨을 바치기가 정말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토막 낸다고 해도 누구에게 바쳐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절반으로 나눠 두 주군이 모두 기뻐하신다면.
복도에 길게 늘어진 거미줄처럼 교차된 그림자를 보니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나란히 늘어선 복도의 기둥 사이로 세워진 나뭇가지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으니까.
빛과 그림자를 엮어 만들어낸 암호가 써 있었다. 아르파인만이 보내고 읽을 수 있는 지시가.
루가를 죽여라.
절대적인 명령이 라카인의 발목을 조였다.
* * *
샨은 그 후로 오랫동안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비웃는 듯한 미소를 걸친 채 투이나의 말에 아무 대꾸나 지껄였다.
“사냥을 열지.”
대화가 또 뚝 끊겼다.
투이나는 한숨처럼 나온 호흡을 도로 들이마셨다.
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번처럼은 안 돼. 괴상한 마법이 드글거리는 곳 말고, 피가 끓어 뛰어다니는 사냥감과 무기다운 무기가 있어야 한다.”
“지금도 활을 쏘며 수련하고 있잖아요?”
“그건 어린애 장난감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봉과 화살들은 진짜 쇠를 만나면 순식간에 박살나지.”
그럼 지금까지 어린애 장난감에 투이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다쳤단 말인가.
‘하긴 그랬으니까 사제님들이 신전에 반입하도록 허락하셨겠지.’
상처를 통째로 치유하는 사제들의 힘 때문에 아르힘에서는 치명적인 무기의 범위가 좀 좁았다.
즉사하거나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들만 금지했던 것이다.
샨은 사냥을 할 생각에 들뜨는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무기가 없다면 얼마든지 돈을 내주겠다. 옮기는 건 이번에도 마법사를 시키면 되겠지.”
“아무리 마법으로 나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편법이에요. 아르힘께서는 구혼자들이 신전에 머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나가야 한다는 거다.”
샨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르힘이 듣고 있는 곳에서는 말 못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
순간 투이나의 눈살이 찌그러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요?”
“글쎄.”
샨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궁금하면 사냥을 하는 수밖에 없겠지.”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불길했다.
투이나가 암시에 집중하기도 전에 샨이 툭툭 떨궈 렸다.
“슬슬 그대가 내게 소원을 빌 때도 되었지. 그곳에서라면 아르힘을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소원이라도 말할 수 있다.”
샨이 선심을 쓰듯 말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첫 번째 시험에서 나를 농락한 대가로 이 정도는 치러야지.”
확실히 농락했다는 단어는 신경 쓰였다.
‘나라도 당연히 샨이 우승할 줄 알았으니까.’
투이나는 사제 면담에 샨의 요청을 이야기하며 꼭 이뤄지길 바란다는 부탁도 덧붙였다.
“시드룬에게도 부탁하겠지만 사냥에서 쓸 무기는 신전에서 가져갔으면 해요.”
“……그래야 아르파인들이 중간에 무기를 빼돌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네.”
투이나가 충분히 상황을 고려했다는 사실을 알자 사제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가능하면 투이나는 아무런 문제 없이 일을 진행하고 싶었다.
‘한 번의 사냥으로 샨의 기분이 풀린다면 차라리 다행이야.’
그녀는 솔직히 더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에 있던 시종들을 모두 죽여 달라거나 사제를 그에게 한 명 바치라는 등 말이다.
모두 과거에 실제로 들어 보았던 요구들이다.
‘절대로 자기 손으로는 아르힘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지. 그러면 아르힘 님이 샨을 쫓아낼 테니까.’
생각만 해도 골치가 욱신거렸다.
“만약 사냥터에서 모하세스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그런 일은 없길 바라지만, 인원수를 제한해야죠. 제 호위분들보다 적은 숫자라면 괜찮을 거예요. 또 시드룬은 절 지켜 준다고 약속했고, 베인도 사냥꾼을 데려올 수 있으니까요.”
“하긴 크로퍼드가 첫 번째 시험에서 이겼었지요.”
“모하세스도 그 높은 콧대가 좀 얼얼했을 겁니다.”
사제들이 피식거리며 종이를 넘겼다.
첫 번째 시험에서 베인이 우승한 뒤로 대놓고 고소해하는 사람들이 신전 안에서도 적지 않았다.
“그럼 이 안건은 승인하도록 하죠.”
“다음은 뭐였죠?”
“소금 호수에서 실종 사건이 일어났다는 보고입니다.”
투이나가 살짝 아미를 찡그렸다.
“지난번에 사제님들의 순환이 늦어진다고 했던 곳 아닌가요?”
“예. 아무래도 이 사건 때문에 붙잡혀 있던 모양입니다.”
사제가 서류를 팔랑거렸다.
잠시 후 내용을 확인한 그의 동공이 커졌다.
“한두 명이 아닌데요?”
덩달아 놀란 투이나가 빠르게 글씨를 훑었다.
호수 물을 나르는 일꾼이 사라진 것을 시작으로 수색 작업을 펼쳤으나 곧 수색하던 무사제 한 명과 일꾼 셋이 추가로 없어졌습니다.
호수가 저주받았다며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호수에 들어갔던 사제 하나도 사라졌습니다.
사제들이 모여 아르힘 님께 간절히 기도했으나 아직 그분의 현신이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이 다른 수호신이나 마법사가 개입한 것인지, 혹은 아르힘 님이 다른 방식으로 보호하고 계신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최대한 호수에 접근하지 않는 방식으로 남은 소금을 만들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곧 생산이 멈출 겁니다.
빠른 조사와 도움을 바랍니다.
투이나가 놀란 눈으로 종이를 내렸다.
“의회에서도 압니까?”
“같은 투서를 받았을 테니 알 테지요.”
당황한 사제들이 끙 하는 신음을 흘렸다.
투이나는 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놀랐다.
‘……이런 일은 과거에 없었어.’
투이나의 낯빛이 달라졌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소금 호수에서 실종된 사건은 처음 듣는다.
‘원인이 뭐지? 과거와 달라진 건 내가 되살아났다는 사실 하나뿐이잖아?’
투이나가 뻣뻣하게 굳었다.
사제들은 루가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열띠게 말했다.
“바로 조사단을 꾸려야겠군요.”
“나 원,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정말로 실종일까요?”
“모르지요. 집 떠나 일하다 눈 맞고 도망가는 건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던 일인데.”
“적힌 얘기를 보면 그런 일은 아닌 듯하니.”
“도대체가, 사제가 있는 곳에서 저주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런 일로 아르힘 님을 부를 생각을 하는 것도 영…….”
“제가 갈게요.”
투이나가 불쑥 말했다.
단번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벽에 눌려 있던 호위들까지 말이다.
“루가 님이요?”
“네.”
단호해진 투이나가 입술을 눌렀다.
얼핏 반대하려는 기색이 떠돌자 다시 선언했다.
“반드시 제가 가겠습니다.”
* * *
빠르게 신전에서 마차가 끌려나왔다.
급하게 짐을 꾸려 나온 시종을 보며 투이나가 마차 문을 열었다.
“아이고,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랍니까.”
“갑자기 들었을 텐데, 고마워요.”
투이나가 짐을 받으려고 손을 뻗자 금세 라카인이 대신 나타났다.
의자 밑에 단단히 짐을 넣어 준 그가 마차를 짚었다.
“들어가십시오, 루가 님.”
“같이 안 타요?”
“저는 마부석에 있겠습니다.”
라카인이 대답하느라 무심코 손에 힘을 준 탓에 자그마한 마차가 휘청거렸다.
무식하리만큼 강한 힘에 호루니가 얼굴을 찌푸렸다.
스카차가 그녀의 마음을 대신하듯 말했다.
“어차피 당신은 길도 모르잖습니까.”
“습격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바깥쪽에서 호위할 생각이다.”
“그렇게 먼 곳 아닙니다.”
스카차가 한숨을 쉬며 고삐를 잡았다.
호루니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투이나에게 팔을 내밀었다.
투이나가 그녀를 붙잡고 마차에 올랐다.
갑자기 떠나는 투이나가 불안해 보였는지 시종이 발을 동동 굴렀다.
“딱 하룻밤만입니다, 루가 님. 넣어 둔 분가루도 딱 그만한 분량이에요!”
“명심할게요!”
끼익.
문이 닫히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곧장 세차게 불어 닥친 바람이 투이나의 두건을 흐트러트렸다.
“조심하세요, 루가 님.”
호루니가 얼른 날아가려는 천을 붙잡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까지 침울할 수 없었다. 투이나와 마주 앉아 떠나고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투이나가 고개를 까딱하며 얼른 두건의 밑 부분을 목에 휘감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호루니가 고개를 푹 숙였다.
빠르게 신전을 벗어난 마차는 금세 북쪽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투이나를 알아본 듯이 흘긋거렸지만 굳이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투이나가 신전 밖에 자주 나오니 그냥 무슨 일이 있으려니 짐작하고 말겠지.
투이나는 흔들리는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등받이를 꽉 잡았다.
“마차로는 얼마나 걸릴까요?”
“한 시간이면 될 겁니다, 루가 님!”
스카차가 소리쳐 대답했다.
마차가 흔들리느라 그의 등이 계속 등받이에 부딪치는 게 보였다.
그와 반대로 라카인이 있는 자리는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잠잠했다.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듯이 그의 눈은 바깥에 고정되었다.
‘……정말 그것 때문인가?’
투이나는 갸우뚱했다. 어쩐지 라카인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행동이야 평소랑 똑같아도 가까운 사이라 알아차릴 수 있는 미묘함이 보였다.
‘그렇구나. 벌써 함께 있는 게 당연할 만큼 시간이 지났어.’
투이나가 라카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내심 친하다고 생각한 그녀가 민망할 정도로 라카인은 흠칫 놀랐다.
크게 요동치는 마차에 스카차가 기겁을 했다.
“우왓!”
“헉, 그렇게 놀랐어요?”
“……아닙니다.”
라카인이 다시 무게중심을 옮기자 마차가 잠잠해졌다.
약간 불안해진 투이나가 난간처럼 굳은 라카인의 팔을 붙잡았다.
“가서 별일 없을 거예요. 잃어버린 사람들만 찾으면 위험할 일도 없는 걸요.”
“…….”
라카인의 입술은 더욱 굳게 다물렸다.
그는 투이나의 손이 올라온 팔을 꿈틀거리지 않기 위해서 온 정신을 다 쏟고 있었다.
대신 호루니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루가 님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네?”
“맞습니다. 위험해요. 루가 님이 꼭 그곳에서 하룻밤을 다 보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스카차마저 한쪽 어깨를 틀고 말했다.
그가 고삐를 잡은 모습이 불안해 보였는지 라카인이 뻣뻣한 자세로 고삐 중간을 거머쥐었다.
호루니는 그 장면을 못 본 체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정말 호수에서 사라지고 있다면 하루 만에 해결될 일은 아닐 거예요.”
“그래도 가 봐야죠.”
투이나가 가볍게 대답했다.
“제가 간다고 해결되는 일이 없을지라도 시간을 쓸 수는 있잖아요.”
거침없이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투이나가 최대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곁에 있어 줄 거예요.”
“루가 님…….”
“그리고 어쩌면 딱 한 사람이 부족해서 해내지 못한 일을 기적같이 해결할 수도 있잖아요?”
투이나가 싱긋 웃었다.
“심지어 우린 네 명이기까지 하잖아요. 도움이 네 배.”
“와…….”
호루니가 울상을 지으며 감탄했다.
때때로 무모하리만큼 결단이 빠른 투이나를 볼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벅찼다.
라카인도 투이나의 말을 듣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평소처럼 가슴 깊숙한 곳에다가 투이나의 말을 담아둘 수가 없었다.
그 바닥은 쓰리고 다 타고 눌어붙은 질척한 재와도 같았으니, 희망을 부어 봤자 진창을 튀기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투이나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다음 절호의 기회처럼 그녀가 신전 바깥으로 외출하는 상황은 대체 어떤 신의 장난일까.
라카인은 터지면 검은 내장을 쏟아 놓을 것 같은 배를 억누르며 계속 말만 몰았다.
생각을 끊어야만 했다. 고민은 없어야만 한다.
덕분에 마차는 예상보다 빨리 소금 호수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루가 님!”
바퀴 소리를 들은 사제는 거의 맨발로 달려 나왔다.
투이나는 그의 목소리가 환영이 아니라 거의 비명에 가깝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소금 호수는 신전보다 더 높고 험한 곳에 위치했다.
기분 탓일까.
내려다보면 주변에 그보다 높은 봉우리가 없다는 장소가 오늘따라 무척 어둡게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호수는 여전히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음에도.
투이나는 사제의 뺨이 핼쑥해진 것을 눈여겨보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일단 들어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사제가 무작정 투이나를 잡아끌려다가 라카인을 보고 멈칫했다.
험악한 인상으로 그를 노려보는 라카인에 기가 눌린 것이다.
신전이었다면 아르파인을 봐도 오만하게 코웃음을 쳤을 사제가 그를 두려워했다.
“사제님, 괜찮으세요?”
“잘…… 잘 모르겠습니다.”
사제가 쥐죽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들어가시지요, 루가 님. 호수가 보이는 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습니다.”
투이나의 눈썹이 둥글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일단 사제를 안심시키려고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소금 호수에는 신전을 세우지 않았다. 수도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만 소금 장수들이 창고 겸 일꾼들의 숙소로 지어 놓은 건물은 꽤 있었다.
사제는 그중에서 신전 사람들이 빌린 건물로 투이나를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