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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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신이 말하길, ‘더 무거운 것을 바쳐라.’ 여자가 가진 것은 지혜와 보석뿐이었으니…

투이나와 라카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루니와 스카차가 침통한 신음을 흘렸다.

“루가 님.”

“저도 알아요.”

투이나가 빙그레 웃었다.

그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스카차가 설득력 없는 설득을 다시 시도해 보았다.

“곁에 두시면 계속 모하세스에게 정보를 보낼 자입니다.”

“하지만 도망쳤잖아요.”

라카인이 움찔했다.

그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정작 투이나는 호루니와 스카차에게 대답하느라 동요하는 라카인을 보지 못했다.

“전 샨이 라카인을 죽이려 했을 때 달아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겨우 그것만으로 믿으시겠다구요?”

호루니는 질책이 아니라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

“샨이 그의 신이잖아요.”

“그러다 감당 못 할 만큼 배신당하면 어쩌시려구요.”

“내가 그를 감당 못 할 만큼 믿는구나 깨닫게 되겠죠.”

“루가 니임…….”

투이나가 살짝 웃더니 살며시 손짓했다.

“잠깐 이쪽으로 와 보실래요?”

그녀는 얇은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제일 꼭대기까지 올라온 투이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 어떻게 하더라……. 아!”

허리를 숙인 투이나가 벽면에 연결된 손잡이를 당겼다. 교반기처럼 생긴 막대가 드륵드륵 돌아갔다.

호위들이 영문을 모르고 손을 뻗었다.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거의 다 됐어요.”

스카차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장에 연결된 장치가 조금씩 움직였다. 벽면에 끼워져 있던 유리가 돔에 난 창문 아래로 맞춰졌다.

교묘하게 설치된 렌즈를 통과하자 여러 개로 분산된 햇빛이 바닥 위로 아른아른 떨어졌다.

신기루 같은 광경에 호위들이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밤에는 훨씬 더 근사해요.”

투이나가 손잡이에 팔을 걸쳤다.

“달이 뜨면 이 넓은 바닥에 별이 깔린대요. 그러면 천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돌아다니면서 위치를 기록하죠. 하늘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다니, 신기하지 않아요?”

그들은 별이 뜨는 밤에 종이 하나씩을 쥐고 가만가만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 낮이었지만 어리어리한 빛 속에서 별을 기록하는 모습은 고요한 신비가 있었다.

스카차가 뺨을 긁었다.

“예.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헌데 루가 님이 왜 지금 이걸 보여 주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상한 습관이 들어서 가끔 도망을 칠 때가 있어요.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다른 곳에 있으려고 말이에요.”

드물게도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투이나의 모습에 호위들의 귀가 쫑긋 섰다.

“대부분 기억은 안 나지만 뭔가에 실망하거나 화가 났었겠죠? 하지만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 아름답거나 좋은 걸 보면 금세 잊어버렸어요.”

투이나는 일렁이는 빛의 안개를 내려다보았다.

“사랑하는 편이 더 견디기 쉬웠거든요.”

그녀가 뱃머리에 오른 선장처럼 난간을 잡았다.

호위들은 난처해했지만 투이나는 바람을 맞은 돛과도 같이 개운했다.

얼마나 멀리까지 가든, 언제나 사람을 향해 방향을 바꾸게 된다.

사람이 얼마나 약하고 못나든 상관없었다.

마치 그것이 루가의 책임인 것처럼.

“제게 선택권이 있다면 언제나 믿는 쪽을 고르게 돼요.”

투이나가 등을 돌렸다.

조금만 힘을 주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에 라카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지만, 그녀의 손은 굳건히 난간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 계속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 *

그날 밤 투이나는 마법사의 마을로 갈 준비를 했다.

“부탁해요, 스카차.”

제비뽑기에서 진 스카차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루가 님.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호루니는 심각한 얼굴로 무기를 고르고 있었고, 라카인은 평소처럼 검 한 자루만 등에 매었다.

둘 사이는 아직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투이나의 부탁에도 곧장 예전처럼 돌아갈 순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투이나는 호위들을 둘러보며 등불을 들어 올렸다.

긴장한 호루니와 라카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어요?”

“네!”

“준비됐습니다.”

“갈게요.”

투이나가 협탁 위로 빛을 내려놓았다.

곧 작은 등불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평소보다 커다란 마법진을 올려다본 투이나가 시드룬을 맞았다.

“어서 와요, 시드룬.”

“빨리 불렀군요.”

시드룬이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첫 번째 시험이 끝난 뒤에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잔뜩 굳은 호루니가 뻣뻣하게 나섰다.

“오늘 루가 님을 지킬 호위입니다.”

“당신뿐입니까?”

“이쪽 라카인도요.”

투이나가 가리켰다.

시드룬이 고개를 끄덕했다.

“이동하겠습니다.”

“다녀올게요, 스카차.”

“몸조심하십시오, 루가 님.”

“이따가 봐.”

빠르게 인사한 호루니가 제일 먼저 마법진을 넘었다. 

투이나가 그 뒤를 따라가고 라카인이 마법사를 경계하며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스카차는 사라지는 마법진을 엄청난 불안 속에서 지켜보았다. 자신의 운 나쁨도 얼마쯤 저주하면서.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마법이 보라색 꼬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와!”

제일 먼저 마법진을 통과한 호루니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 어두운 방 안에 있다가 밝은 숲으로 나오면 어느 누구라도 그럴 만했다.

라카인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수상한 공간이 너무 많았는지 그의 경계심이 올라갔다.

“일찍 와서 잘됐습니다. 할 얘기가 많습니다.”

“시험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전에 했던 부탁 때문입니다.”

시드룬이 근처를 얼쩡거리는 호위를 잠깐 바라보았다.

“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곧 다른 마법사들이 일어날 시간입니다.”

“다, 다른 마법사요?”

호루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카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겁먹을 건 없어요. 아직 아무도 안 만났잖아요.”

“아직……이요?”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던 호루니가 찌르레기처럼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창을 빼 들려는 낌새라 투이나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마법사라고 다 위험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시드룬이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투이나의 말에도 두 호위는 전혀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는 수 없이 투이나는 일단 앞장서서 시드룬의 집으로 들어갔다.

시드룬의 집도 지난번에 왔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라카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책 없이 쌓여 있는 종이뭉치들을 훑어보았다.

“아무거나 만지면 안 됩니다. 만지면 발동하는 마법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법사의 함정!”

호루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앗, 맞다. 호루니는 이런 얘기를 좋아했었지.’

호루니가 흥분하던 독이며 마법사의 수법들을 떠올린 투이나가 양손으로 호루니와 라카인을 한 팔씩 붙잡았다.

“정말 긴장할 거 없다니까요.”

열심히 호위들을 안심시키려는 투이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시드룬이 문을 닫자마자 이런 소리를 해댔다.

“그럼 이제 당신의 몸을 빌리겠습니다.”

“……!”

이번에는 라카인까지 거칠게 검을 빼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밀어진 검 날에 시드룬이 둔하게 눈을 깜박였다.

“공격할 겁니까?”

“루가 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라카인의 가슴이 들썩였다. 마치 따귀라도 얻어맞은 사람 같았다.

투이나의 머리로 두통이 엄습했다.

“시드룬, 제발.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마세요.”

“정확한 표현입니다.”

“오해를 부르는 표현이잖아요.”

투이나의 말에도 라카인의 굳은 턱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투이나는 간략하게 지금까지 있었던 사정을 설명했다.

다만 시드룬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는 빼야 했다.

비밀을 알았다고 평생 동안 마법사의 추적을 받을 사람은 한 명으로도 충분하니까.

시드룬은 중간이 빈 이야기를 듣자 투이나를 한번 쳐다보았을 뿐 어떤 참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호위들은 대충 투이나가 마법사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협조하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마법사들에게도 드디어 신이 생기겠네요!”

“앗, 음…….”

투이나가 난감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확신할 순 없죠.”

‘어쩌면……? 나도 궁금해지네. 영혼의 세계에서 뭘 발견할지 모르잖아.’

호루니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다채롭게 변화하던 호루니와 비교될 만큼 라카인은 잠잠했다.

시드룬이 구혼자 자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연구를 도와주고 협조하기로 한 부분에 이르러서도 그는 딱 한 가지 질문만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루가 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게 필요합니까?”

시드룬이 멀뚱히 되물었다.

라카인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아닙니다.”

라카인은 빼 든 검을 바닥에 짚었다. 그러나 아까보다 미묘하게 불만에 찬 표정이었다.

라카인이 신전을 지키는 석상처럼 굳어 버리자 호루니가 대신 앞으로 나섰다.

“그, 그런데 정말 안전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알죠?”

“아르파 신의 의식 때 확인했어요.”

투이나가 대신 대답했다.

라카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잘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검게 번득거렸다.

“그때 루가 님은 다치셨습니다.”

“마법은 완벽했습니다.”

시드룬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문제가 생겼던 건 나였지…….’

투이나가 무심코 팔뚝을 문질렀다.

꼼꼼한 분칠 아래로도 여전히 얼룩을 만질 수 있었다.

‘그때는 누구의 목소리가 팔을 잡아당긴 걸까?’

투이나는 절대 자신이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귀에 익은 아르힘의 음성도 아니었다.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몸까지, 자신의 피부 위로 솟아오르는 핏방울도 남의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투이나가 입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호루니가 냉큼 그녀를 걱정했다.

“괜찮으세요, 루가 님? 신전으로 돌아갈까요?”

“전 괜찮아요. 다만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설명을 더 듣는 게 좋겠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시드룬이 요구했던 일이요. 사제님이 당신을 치료하는 건 왜 필요했던 거죠?”

시드룬이 호위들을 힐끗 보고는 중요한 단어를 삭제했다.

“연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실마리가 되는 얼룩병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유일하게 아르힘의 사제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라고 하더군요.”

“네, 맞아요.”

“그래서 아르힘의 사제들을 확인해 봤는데…….”

시드룬이 아무렇지도 않게 청천벽력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그자들은 사제가 아니라 마법사 같습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사제님들이 마법사라구요……?”

“그렇습니다.”

시드룬이 너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서 충격까지 느릿느릿 전달되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예요? 도무지 말이 안 되잖아요. 사제님들이 사실은 마법사라니.”

“마법사의 힘과 신의 힘이 충돌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시드룬이 뒷짐을 지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후 신전의 힘으로 치료되지 않는 병이 있다면 마법의 일종일 거라 가정하고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투이나의 추측과 비슷했다.

“하지만 아르힘의 사제들이 치료하지 못하고 오로지 신만이 치유할 수 있는 병이라면, 마법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가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영혼이라면…….”

투이나는 손가락으로 작게 비늘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시드룬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냈다.

‘얼룩병이 영혼의 세계에서 온 병이란 말이야?’

투이나가 손톱으로 입술을 눌렀다.

애초에 아무도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알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죽으면 신의 곁으로 가면 그만이니까.

얼룩병이 영혼의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신을 더 믿게 될까, 아니면 반대로 신이 없어도 돌아갈 장소는 있다고 생각할까.

잠시 생각하던 투이나가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많은 사제님들이 모두 마법사일 리가 없어요. 시드룬이 제게 설명했었잖아요.”

마법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마법사로 만들어 줄 수도 없다.

마법사들조차 어떤 이유로 마법사가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시드룬은 투이나가 던진 질문의 덫을 인정함으로써 빠져나갔다.

“저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제님에게 치료를 받은 거예요?”

시드룬이 긴 손가락을 펼쳤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마디가 천천히 벌어졌다.

“예. 말끔하게 낫더군요.”

투이나가 매끈한 손가락을 따라 훑었다.

“마법사인 내게도 치료하는 힘이 통한다면 신이 아니라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

‘사제님이 마법사라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치고 올라왔다.

다른 호위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호루니는 새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고, 라카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걸 보니 결국 혼자 힘으로 반박해야 할 것 같다.

투이나가 말했다.

“사제님들은 시드룬이 준 비늘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건 마법이잖아요.”

“비늘에는 내 마법이 들어 있지만 당신도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비늘은 영혼의 세계에서 왔다.

투이나의 입술이 닫혔다.

‘그럼 사제님 손에서 저항하며 타올랐던 것도 마법에 반응한 거란 말이야? 사제님이 쓴 게 마법이라서?’

머릿속이 바닥에 떨어트린 털실 뭉치처럼 굴러갔다.

“그게 정말 영혼과 마법이 만났기 때문에 발생한 일일까요? 다른 이유일 수도 있잖아요. 모든 힘이 항상 부딪치기만 하는 건 아니니까.”

“옳습니다. 나는 신전 안을 돌아다닐 수도 있고 마법을 쓰기도 합니다. 운이 좋다면 신을 만나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내게 간섭하는 존재를 느낍니다.”

시드룬은 담담히 짚었다.

“서로 반발하더라도 같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허나 한쪽의 힘이 커지면 반드시 다른 한쪽을 이기려고 듭니다. 타오르는 불처럼.”

문득 투이나는 아르힘이 행사하는 신의 힘을 떠올렸다.

그는 적들을 산채로 불태운다.

‘아르힘 님이 설마 원래는 마법사들의 신이었나? 그럴 리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리해 볼게요. 마법끼리는 통하고, 마법과 신의 힘은 반발하고, 아르힘의 사제님들이 쓰는 힘은 아무래도 마법 같으며, 얼룩병은 영혼의 세계에서 왔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 모든 추측이 단지 시드룬에게 사제님들의 치료가 통해서 그렇다는 거구요.”

“맞습니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 안 해요?”

“반론을 기다리겠습니다.”

“음, 좋아요. 마법사들 중에서 같은 마법을 쓰는 사람이 있나요?”

“지금까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봐요!”

투이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같은 마법을 쓰는 사람이 지금까지 없다가 갑자기 사제님들이 한꺼번에 똑같은 마법을 쓴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던 규칙이 변했다는 것보다 예외적인 변수가 끼어들었다는 쪽이 납득하기 쉽습니다.”

시드룬이 담담하게 받아쳤다.

“그리고 나는 그 변수를 아르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르힘 님이 마법사들을 만들었다고요?”

“적어도 아르힘의 사제들을 만든 건 아르힘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투이나가 끙 하고 이마를 짚었다.

‘큰일이네. 설득력 있게 들리기 시작했어.’

아르힘이 마법사를 만들어내는 신이라면 왜 아르힘의 힘이 적을 불태우는지도 이해가 갔다.

신이 마법까지 다룰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닌가.

문제는 두 힘을 함께 쓰는 게 정말 실현 가능한지 모른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러면 마법사에게도 신이 있다는 뜻이 되잖아.’

“제가 마법사들에게 신이 없다고 했을 때 화가 났겠네요.”

“화나지 않았습니다. 사실인지 조사는 했습니다만.”

평소처럼 무던하게 대답하는 시드룬을 보자 그만 기운이 빠져 버렸다.

“못 찾았어요?”

“못 찾았습니다.”

“안됐네요. 그때 얘기는 사과할게요.”

“괜찮습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투이나가 위로했다.

신을 마치 분실물처럼 얘기하는 대화를 듣고 나서야 호루니가 정신을 차렸다.

“저어……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떻게 하다니요?”

“사제님들이 마법사란 이야기를 들으면 신전은 난리가 날 겁니다. 물론 확실한 얘기는 아니지만…….”

“당신은 여기서 있었던 일을 밝힐 수 없습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시드룬의 눈빛을 받은 호루니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게 진실이라면 마법사들만의 비밀로 남겨 둘 수는 없습니다.”

“왜 비밀을 밝혀야 합니까?”

시드룬의 말에 투이나까지 눈썹을 찡그렸다.

‘비밀은 밝혀지지 말라고 만드는 거지만…….’

비밀이 알려졌을 때 나타날 결과까지 감당할 자신이 있어야 비밀을 만들 수 있다.

그건 언제나 한 묶음이다.

창문이 박살나는 소리와 유리 파편이 한 묶음인 것처럼.

“앗!”

투이나가 놀라 손을 치켜들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진짜 창문을 부수며 안으로 침입했던 것이다. 

거대하고 긴 가시가 달린 것이 라카인을 덮쳤다.

시드룬은 투이나에게 튀는 파편을 막아내느라 생겨난 마법진 때문에 처음엔 뭐가 들어왔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라카인은 낯선 공격에도 재빨리 턱을 올려쳤다.

“끅!”

튕겨나간 것이 가시를 세우며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벽에 닿기도 전에 짐승처럼 생긴 갈퀴발톱으로 벽에 걸린 등 걸이를 휘어 감더니 다시 라카인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상대하면서도 계속 투이나에게 주의를 할애하던 라카인은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공격에 마음을 놓았는지 검을 빼 들었다.

발톱과 검이 부딪치며 귀에 거슬리는 까드득 소리를 냈다.

살기로 활활 불타는 옆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얼굴?’

투이나는 가시처럼 생긴 털에 휩싸인 게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아는 사람.

“레이벡?”

그는 투이나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레이벡은 짐승처럼 변해 있었다.

구레나룻과 수염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뻣뻣한 털로 곤두서 있었고, 눈 한 쪽이 금빛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약간 말랐던 팔은 터질 듯이 부풀었다.

전에 봤을 때는 사람의 몸에 털이 달려 있었다면 지금은 짐승과 사람이 한데 섞여있는 것 같았다.

‘레이벡의 마법이야!’

무게로 찍어 누르는 레이벡을 라카인이 무릎으로 차올렸다. 

사납기만 했지 싸우는 법은 잘 모르는지 레이벡이 가까스로 몸을 굴려 피했다.

“그만하세요!”

투이나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듣는 자가 없었다.

아니, 라카인은 들으려고 했지만 레이벡이 그를 놔 주질 않았다.

다급해진 투이나는 팔짱을 낀 시드룬과 창을 쥔 채 굳은 호루니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표정에서 속마음을 읽은 투이나가 호루니의 손에서 창을 빼앗았다.

“루가 님!”

“물러나요!”

창의 무게 때문에 팔이 확 내려앉았다.

간신히 놓치기 전에 레이벡의 배 밑으로 창대가 휙 하니 들어갔다.

놀란 레이벡이 주춤하는 사이 라카인이 그를 밀어냈다.

더 달려들지 못하게 투이나가 있는 힘껏 레이벡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라카인이 바로 힘을 보탰다.

레이벡이 발광했다.

“뭐 하는 짓이냐!”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레이벡이 당장이라도 라카인의 얼굴 가죽을 뜯어내고 싶은 것처럼 팔을 버둥거렸다.

입에 안 맞게 커진 송곳니 사이로 침이 튀었다.

“저자! 아르파 인간이지?”

라카인이 눈썹을 올렸다.

투이나도 멈칫했다.

사람의 모습은 다 비슷비슷하다지만 그래도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아르피기아 출신인 베인과 레오나도 아르힘에서 뚜렷하게 눈에 띌 정도였으니.

라카인도 당연히 아르파인의 특징적인 몇 가지 외모를 갖추고 있었지만 저렇게 격렬하게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가깝게 지내던 사이가 아니고서야.’

그리고 가깝다는 건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았다.

레이벡의 눈은 모든 노여움을 불사를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봅니다.”

“그러시겠지. 더러운 아르파의 개 같으니!”

“대체 무슨 소란이야?”

투이나가 홱 고개를 돌렸다.

수리시가 부서진 창문 너머로 보였다. 근처에 있다가 소란을 듣고 온 모양이다.

황당하다는 시선이 짐승이 된 레이벡과 창대로 그를 누르고 있는 투이나와 라카인을 오갔다.

봐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싸우는 거야?”

“침입자다! 마법사! 저자를 죽여 버려! 빨리!”

레이벡이 소리치자 수리시가 인상을 썼다.

“뭐야? 어디서 명령이야. 좀 조용히 해 봐. 이러다 다른 마법사들까지 오면 더 정신없으니까.”

“여기 온 자들을 죽인다는 건 당신들 방침이었잖아!”

“그렇지. 그런데 손님이 데려온 사람은 보통 같은 손님 취급을 해 주거든?”

수리시가 부서진 잔해를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 약혼녀. 설명을 해 보시지.”

“저도 아직 무슨 일인지 못 들었어요.”

투이나가 바르르 떨었다.

약혼녀라는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진 라카인이 힘을 잠깐 풀었던 것이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창대가 휙 젖혀지며 레이벡이 튕겨 나왔다.

다행히 마법사의 숫자가 늘어나서 안심했는지 아까처럼 라카인을 찢어 버리려고 들진 않았다.

수리시가 팔짱을 꼈다.

“보아하니 원인이 당신인 것 같은데. 설명부터 듣고 죽이자고.”

“아니, 죽이면 안 되죠.”

투이나가 더 말릴 새도 없이 레이벡이 벌컥 고함을 질렀다.

“저자는 내 원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원수라고요?”

“그래!”

레이벡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이따위 비참한 꼴이 된 것도, 도망쳐 다니는 것도, 가족을 잃어버린 것도 다 아르파의 군대 때문이니까!”

헉하는 침묵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물론 마법사들은 회복이 빨랐다.

“당신 세르뭄 출신이었구나?”

레이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체하지 못하는 송곳니가 보기 흉하게 씰룩였다.

“그래. 빌어먹을.”

“어쩐지. 아직도 마법이 서투르다 했어.”

수리시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투이나 일행의 의아한 시선을 느꼈는지 덧붙였다.

“마법사가 된다고 곧장 자기 마법에 능숙해지는 건 아니야. 무슨 마법인지부터 정확히 아는 게 힘들거든. 게다가 레이벡 마법이 좀 특이해야지.”

“지금 그딴 걸 설명할 때야? 저놈이 내 원수라니까!”

“누구는 원수 없는 줄 알아? 게다가 아르파인이라고 다 죽였다간 늙어 죽을 때까지 잠도 못 자고 쫓아다녀야 할걸.”

“상관없어! 저놈들이 멀쩡히 숨 쉬고 돌아다닌다는 생각만 하면 내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살수가 없다!”

레이벡이 또다시 손아귀를 비틀었다. 길게 자라난 짐승의 두꺼운 손톱이 번뜩였다.

깊은 원한의 당사자인 라카인은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루가 님을 노린 게 아니군요.”

“이 자식이! 그래. 널 죽일 거다. 너만!”

“안 돼요.”

투이나가 더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죽음을 죽음으로 갚을 수는 없어요.”

“네가 뭔데 끼어들어?”

“그녀를 위협하는 겁니까?”

그제야 시드룬이 침묵을 깨고 나섰다.

“날 가로막는다면 네가 얼마나 잘났든 가만두지 않겠다. 알아들어?”

따지고 보면 침입자는 레이벡이었지만 그의 분노는 정당한 듯이 타올랐다.

“어이구, 배은망덕하네. 죽어 가던 마법사를 주워다 가르쳐 줬더니.”

“댁이 주웠다고? 내가 여기 떨어진 걸 보고 가장 먼저 죽이려 했던 게 당신이야!”

“그러니까 운 좋은 줄 알아야지. 그렇게 눈에 띄는 마법으로 살아남는 경험은 앞으로 다신 없을 테니까.”

말싸움으로 번지는 레이벡과 수리시의 대화에 투이나가 또다시 중재에 나섰다.

“사정을 알겠어요, 레이벡. 화가 날 만도 해요. 당신의 신과 나라를 없애 버린 게 아르파 신이니까.”

레이벡이 사납게 돌아보았다.

“그래서?”

“하지만 죽음은 돌이킬 수 없어요.”

투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한 번 되살아났기에 더더욱 확신에 차서.

“서로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한 다음에 결론을 내려도 늦지 않아요.”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게지!”

“굳이 어렵게 말할 필요도 없잖아? 저 애의 말이 맞아. 일단 들어나 보자고.”

수리시가 턱을 까딱였다.

레이벡이 씨근덕거렸지만 수리시의 제안까지 거절하지는 못했다.

모두가 라카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천천히 그가 말했다.

“저는 그 전쟁에 하인으로 따라갔었습니다.”

라카인의 덩치와 실력을 보고 당연히 병사로 싸웠을 줄 알았던 레이벡이 잠깐 코를 씰룩거렸다.

“……상관없어! 너도 그 전쟁에서 얻은 물건으로 입고 마시고 했겠지? 왕이 떨궈 주는 금에 눈이 먼 개 같으니!”

“모하세스 님은 금으로 사람을 사지 않습니다.”

라카인이 반박했다.

투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레이벡이 격분했다.

“모하세스 님이라고? 역시 여전히 아르파를 섬기는 놈이었어!”

“아르파는 신을 잃은 작자들도 믿기를 무서워한다더군. 그런데도 그놈의 왕이 정복한 다음엔 신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게 신기하단 말이야.”

문득 그들이 말하는 왕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샨이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코웃음을 치면서 원한이 있다면 직접 싸워 보자고 하겠지.’

아르힘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샨이 저지른 죄를 다른 사람들끼리 심판하려는 게 무척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라카인, 레이벡이 원하는 건 세르뭄에서 있었던 일을 당신이 이해하는 거예요.”

“아니. 나는 복수를 원한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가 아무것도 몰라도 좋단 말이에요?”

“그럼 내 가족들은? 그들이 전쟁을 알고서 당했나? 그런 일을 겪을 것까지 알고서 땅을 일구고 집을 지었단 말이야?”

레이벡의 짐승 같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르파는 나약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난 그들과 반대로 할 거다. 나약한 자들만 남겨 놓고 모조리 다 죽여 버릴 테니까.”

라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을 믿는 건 신의 죄까지 함께 이고 간다는 말과 같았다.

신이 인간을 돌보면서 시작된 죄는 수호신이 사라지기 전까지 신도들과 함께했다.

신이 주는 죄가 싫다면 그의 힘도 거부해야 한다. 혹은 사람을 돌보지 않는 신을 믿거나.

‘하지만 누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신을 믿겠어?’

투이나는 지금 신이 여기에 없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꼈다.

라카인을 이곳에 데려온 건 그녀였으니까.

“미안해요, 레이벡. 그래도 난 누굴 죽여서 복수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요.”

“다른 사람의 의견 같은 건 필요 없다!”

“……정말로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죽일 필요도 없잖아요?”

모든 것이 자기만의 문제라면 얼마나 편할까.

레이벡이 움찔한 틈을 타 수리시가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생각해, 시드룬? 여긴 네 집이잖아.”

“마법사들과 루가의 요청이 상충되는군요.”

시드룬이 말했다.

무미건조한 그의 얼굴이 심판관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마법사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건 그들이 내 연구에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레이벡은 그 후에 도착했습니다.”

“뭐야? 내가 널 안 도와줬다고 지금 저쪽 편을 들겠다는 거냐!”

화를 토해내던 레이벡은 그래도 시드룬의 마법은 신경 쓰이는지 성질을 부리며 덧붙였다.

“까짓 거 연구든 뭐든 나도 도와주면 되잖아!”

“마법사들을 연구하는 건 끝났습니다.”

시드룬이 칼같이 잘랐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신과 투이나였다.

그 대답을 기다렸는지 수리시가 레이벡의 어깨를 툭 쳤다.

“안됐지만 포기해. 나도 웬만하면 저 애의 기분을 맞춰 주고 싶지 목을 날리기 전에 찡찡거리는 작자를 달래 주고 싶지 않거든? 복수는 시간 있을 때 알아서 하시지.”

“뭐라고?”

불쾌한 대답에 레이벡의 분노가 곧장 수리시에게 돌려졌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당신도 끼어들 자격이 없는 건 마찬가지야!”

“글쎄. 남의 집에 쳐들어온 건 댁이거든.”

“마법사는 피도 감정도 없나!”

레이벡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수리시는 완고했다.

벽이나 다름없는 시드룬에게 말할 수도 없던 그는 원망스럽게 라카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카인은 이미 공격에 대비 중이었다. 

그르륵 하는 소리를 낸 레이벡이 휙 뛰쳐나갔다.

가시 같은 섬광이 사라지자 간신히 긴장이 풀렸다.

다만 투이나는 여전히 그에게 마음이 쓰였다.

‘죽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다른 해결책이 있으면 좋겠어.’

신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은 베인을 연상시켰다.

수리시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마법사들한텐 다 저런 시기가 있는 법이지. 자, 그럼 우리 일로 돌아가 볼까?”

그녀가 손바닥을 부딪쳐 가볍게 짝 소리를 냈다.

“원래 손님은 다른 사람을 잘 초대하지 않는 법인데 말이야.”

“루, 루가 님의 안전을 위해서 저희가 온 겁니다!”

“댁들이 와서 더 위험해진 거 같은데? 당신들 죽이는 김에 겸사겸사 루가까지 말려들게 생겼잖아.”

찔끔한 호루니의 어깨가 곤두섰다.

긴장하는 그녀에게 수리시가 픽 소리를 냈다.

“됐어, 이제 와서. 방금 내가 저쪽 목숨을 살려 줬거든?”

“……도와줘서 고마워요, 수리시.”

“응, 그래. 댁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

그녀가 주먹으로 턱을 받쳤다.

“당신이 오기 전에 시드룬에게 대강 설명을 들었지. 그 얼룩병이라는 것도 영혼의 세계에서 왔다면서?”

“아마도…… 그래요.”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긍정했다.

호루니와 라카인이 영혼의 세계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흠, 신중하게 굴지 마. 그러지 말라고 이쪽에서 먼저 얼룩병자들을 잡아왔거든.”

“누굴 잡아와요?”

투이나의 입이 벌어졌다.

“시드룬! 분명히 막무가내로 사람을 납치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하지 않았습니다.”

시드룬이 멀뚱히 대답했다.

수리시가 싱글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이 녀석은 잘못한 게 없지. 우리가 했거든.”

“수리시 당신은 제가 무슨 뜻으로 얘기한지 알잖아요?”

“아니까 이용해 먹었다. 넌 계약 같은 걸 할 때 더 신중해져야겠어.”

“으, 세상에…….”

‘마법사들이 저러니까 당연히 약속의 마법도 조건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겠어!’

투이나는 때 아닌 납득에 괴로워했다.

“그 문제는 일단 다음에 얘기해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죠? 다친 건 아니에요?”

“원래 있던 병만 빼면 무사해. 뭐, 좀 겁을 먹긴 했는데 병에 관심이 있는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치료해 준다고 공갈을 쳤거든.”

“그들은 자발적으로 남기로 했습니다.”

시드룬이 덧붙였다.

말만 들으면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발화자 때문에 전혀 효과가 없었다.

“거짓말이잖아요. 아르힘께서도 완전히 치료하지 못하는 병인데. 게다가 데려와서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냥 마법 몇 개만 시험해 봤어. 몸에 해롭지 않은 걸로.”

수리시가 부루퉁하게 볼을 눌렀다.

시드룬이 뒷목을 잡으려는 투이나를 원래 화제로 되돌렸다.

“루가, 그들에게도 마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투이나가 멈칫했다. 흘려 넘길 수 없던 이야기였던 것이다.

‘정말 얼룩병에 걸리면 마법이 통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 얘기는 사제들이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직통으로 뒷받침했다.

투이나는 애써 보았다.

“이곳으로 얼룩병에 걸린 사람들을 데려왔다면 이미 마법이 통한 거잖아요?”

“사람에게 직접 마법을 쓰는 것과 마법을 이용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시드룬이 대답했다.

“아르파의 의식 때 당신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도 신에게 직접 마법을 쓰는 방식이 아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더 설명하면 괴짜 같으니까 관둬. 중요한 건 우리가 드디어 신이 아닌 천적도 발견했다는 거야.”

수리시가 눈을 빛냈다.

“마법으로 열리지 않는 영혼의 세계에 쓸 좋은 패를 찾아낸 거지.”

“그때처럼 죽인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한 가지만 더 확인해 보고 결정할 겁니다.”

시드룬이 대꾸했다.

투이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게 무엇일지 짐작했다.

“바로 너야.”

예상된 결말이다.

투이나는 자신을 잘 자란 송아지처럼 보는 마법사들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병에서 나은 사람도 같을지 확인해 보고 싶은 거군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당신이 걸린 병이 사람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입히는지, 신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당신만을 선택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투이나는 유혹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게 없네.’

그녀가 정말로 지금 완치된 상황이라면 기꺼이 몸을 맡겼을 것이다.

‘초반보단 좀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병에 걸린 상태인데…… 어쩌지?’

마법사들에게 사실을 밝혀도 좋을지 모르겠다.

고민하던 투이나가 살짝 운을 떼었다.

“시험해 보는 건 좋지만,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려고요?”

“그건 우리한테 맡겨 봐. 댁은 몸만 빌려주면 돼.”

수리시가 싱글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얄미웠다. 자기 좋을 대로 남을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

‘약간 샨을 닮았어.’

잠자코 입 안에서 혀를 굴려 보던 투이나가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일단 결과가 나온 다음에 생각하자. 해석은 따로 할 수도 있으니까.’

“잘 생각했어.”

수리시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시드룬에게 눈짓하자 시드룬이 마법진을 만들었다.

“들어가십시오.”

“저, 저희 말인가요?”

지목당한 호루니와 라카인이 당혹스러워했다. 투이나에게 마법을 쓸 줄 알았던 것이다.

“지금부터 다른 마법사를 데려올 건데 또 레이벡처럼 당하고 싶진 않겠지?”

“루가 님에게 마법을 시험해 볼 거라면 두 사람이나 있지 않습니까.”

라카인이 말했다.

방금 전까지 짐승의 모습을 한 마법사에게 목이 졸렸다고는 믿기지 않는 침착함이었다.

“그건 안 돼. 내 마법이나 시드룬의 마법이나 사람에게 직접 쓰기엔 부적절하거든. 저 애가 온전한 몸으로 돌아가길 바랄 거 아냐.”

사람의 몸에 공간이 생기는 걸 상상해 본 투이나가 창백해졌다.

라카인이 불안하게 그녀를 곁눈질했다.

“루가 님께 무슨 마법을 쓸 겁니까?”

“안 해로워. 걱정되면 마법진 안에서 지켜보든지. 신전이 아니니까 시드룬도 그 정도 마법은 가뿐할 거야.”

“그렇습니다.”

시드룬이 동의했다.

호루니는 가기 싫은 곳에 가야 하는 아이처럼 잠깐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루가 님 옆에서 지키려고 온 거예요.”

수리시는 지금까지 뭘 봤느냐, 너희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시드룬에게 시켰다.

“집어넣어 놔.”

시드룬은 그렇게 했다.

사태를 눈치 챈 라카인이 입을 벌렸지만, 커다란 마법진이 바닥에 나타나 그들을 떨어트렸다.

순식간에 호위 두 사람을 삼켜 버리고도 시드룬은 고요했다.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하진 않은 거죠?”

“예.”

단조롭게 말한 그가 다시 마법진을 열었다.

혹시나 호위들이 다시 나타날 줄 알았던 기대가 무색하게 까만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은 그 마법사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시드룬이 이런 식으로 소환한 적이 별로 없는 듯했다.

“이쪽은 환영의 마법사 수입니다.”

시드룬이 소개했다.

수라는 마법사는 체구가 작고 푹 눌러쓴 로브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길게 기른 까만 머리카락이 살짝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우리 중에서 제일 얌전한 마법을 가진 마법사야. 수, 이번에는 이 애한테 마법을 쓰면 돼.”

“……멀쩡해 보이는데.”

수가 중얼거렸다.

투이나는 깜짝 놀랐다. 로브 밑에서 나온 목소리가 생각보다 앳되었던 것이다.

‘내 또래 같아.’

호기심이 올라왔지만 수는 더 말하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마법이 통한다면 가벼운 환각을 볼 겁니다.”

“뭐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시드룬과 수리시가 번갈아 말했다.

기대감에 찬 시선을 받으며 투이나가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마법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자코 기다리던 투이나는 곧 사람에게 직접 마법을 쓰면 마법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투이나는 마법진이 아닌 뭐라도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시선을 같이 따라가는 마법사들이 느껴졌다.

한참이나 지켜보았지만 새까만 언덕 같은 로브 윗부분 너머로 환각 같은 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

수리시가 약간 실망한 소리를 냈다.

그때 투이나가 다른 기척에 홱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창문 바깥에 거대한 지느러미가 있었다.

‘환상은 보이기만 하는 거잖아?’

두건에 눌린 머리카락이 한기로 곤두섰다.

지금 저 생물에게서는 강한 소금기가 밴 냄새가 맡아졌고, 또렷한 시선도 느껴졌다.

푸르죽죽한 짐승의 피부에서 뜨뜻한 숨이 푸우우 뿜어져 나왔다.

신께 맹세코 투이나는 그것의 숨결이 자신의 피부를 간질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놀란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대체 뭘 불러온 거죠?”

“큰고래.”

수가 손을 뗐다.

고래도 함께 사라졌다.

“이 사람은 마법이 통해.”

시드룬의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투이나는 큰고래가 사라졌다는 걸 믿지 못해서 바깥만 보고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수.”

그가 다시 마법진을 열어 수를 돌려보냈다.

비슷한 속도로 호위들이 다시 나타났다.

“루가 님! 괜찮으세요?”

와당탕 나뒹군 호루니가 덥석 투이나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의 안색이 아까 보았던 고래와 비슷할 정도였다.

라카인도 만만치 않았다. 회색빛으로 질린 그가 무례를 무릅쓰고 투이나의 손목을 직접 만졌다.

불규칙하게 뛰는 맥박에 그의 몸이 점점 더 굳어 갔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그의 손이 작게 떨렸다.

“루가 님,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수리시가 날카롭게 그들의 재회를 갈라놓았다.

“이제야 제대로 시작하게 됐잖아.”

투이나는 자신에게 닿은 더운 체온에 조금씩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어쨌든 그녀에게 마법을 주고 간 마법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녀를 원하는 마법사는 남아있었다.

“이제 설명할 차례가 된 것 같네요, 시드룬.”

투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에 겪었던 마법 때문에 시드룬도 환상처럼 느껴졌다.

‘너무 길고 보라색이잖아.’

시드룬은 한참 동안 투이나를 내려다보았다.

호위에게 둘러싸여 온기를 되찾는 그녀를 오래도록 보다가 말했다.

“아르힘이 병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네, 그래요.”

“병이 나으면 마법에 걸리지 않는 힘도 사라지는군요. 신이 영혼을 치유합니까?”

‘어쩌지? 그건 아닌데.’

투이나는 자신이 아직 병에 걸린 상태라는 걸 말하지 않은 게 켕기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간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될 거야.’

투이나는 시드룬의 연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시드룬의 연구가 끝나려면 성공해야 한다. 베인과 결혼한 다음에도 마법사의 마을에 드나들 수는 없으니까.

‘일단 구혼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

투이나는 연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비밀을 밝히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약간의 사실은 희생해서.

“시드룬, 전 사제님들의 기도가 듣지 않아요.”

“사제들에게 치료를 받을 수가 없다고?”

그 얘기에 수리시가 반응했다.

“네가 분명 아르힘의 사제들도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여겼다.”

“저도 영혼과 마법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겠어요.”

투이나가 말했다.

언젠가 시드룬이 그런 식으로 말했었다.

“이젠 저도 궁금해지기 시작했거든요. 마법사들을 연구하는 건 끝났다는 게 무슨 뜻이죠?”

시드룬은 수리시가 말리려고 팔을 펼치기도 전에 마법사들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모든 영혼을 가진 자들은 마법사가 될 수 있습니다.”

“시드룬, 너 거기까지만……!”

“그리고 사람은 큰 충격을 받았을 때 확률에 따라 마법이 깨어납니다.”

고함보다 더한 침묵이 터졌다.

수리시는 꽉 다물린 덫처럼 입을 닫더니 이어지는 설명을 듣는 세 사람을 차갑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시드룬은 투이나의 요청에 충실했다.

“신을 믿는 자들은 마법사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충격은 신을 향한 믿음으로 상쇄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믿는 신을 저 버릴 만큼 강한 충격이 아니면 마법사가 되기 힘들지.”

수리시가 말을 받았다.

설명을 도우려는 선한 뜻이 아니라 비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는 듯했다.

“고통, 전쟁, 배신, 뭐든 뒤통수를 얼얼하게 때려서 눈으로 쏟아내지 않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어.”

투이나는 자신의 마법을 밝히는 걸 극도로 꺼리던 수리시를 떠올렸다.

그녀가 토해내는 부정적인 감정에 마음이 먼저 아파 왔다.

“무슨 일을 겪었던 거죠?”

“말하고 싶지 않아.”

섣불리 다가오는 투이나를 수리시가 단호하게 끊어냈다.

“어느 마법사에게 물어도 대답을 못 들을 거다. 레이벡 그 멍청이만 빼고 말이야.”

또 다른 마법사인 시드룬은 수리시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는 잊어버렸습니다.”

투이나는 감정이 억지로 벗겨진 듯한 시드룬을 보자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다.

오랫동안 얼룩병을 앓는 자는 미쳐버린다.

그것이 정말로 영혼의 세계에서 왔다면 반대로도 작용하지 않을까.

사람이 가진 일말의 광기마저 가져가 버린다면.

투이나가 시드룬의 무기질적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당신도 영혼의 세계에 갔을 때 병을 얻었나요?”

“그렇습니다.”

투이나는 시드룬의 옷 아래를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이 보라색 얼룩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수리시는 양 주먹으로 그녀의 눈을 짓눌렀다.

“우리는 피곤해, 루가. 아주 오랫동안 피곤하게 살았어. 여긴 유일한 피난처고, 그걸 유지하려면 시드룬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해.”

투이나는 장대처럼 서 있는 시드룬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가 가진 기묘한 느낌이 이해되었다.

‘언제라도 떠나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원인은 마법이 아니라 투이나에게도 익숙한 죽음이었다.

“그를 살려 줘.”

수리시가 주먹 끝을 턱까지 내렸다.

애원과 거리가 먼 부탁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눈물 없이도 심장을 찔렀다.

처절하고 몰린 사람은 언제나.

그리고 부탁마저 할 줄 모르는 보랏빛 마법사를 보았을 때 투이나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다.

“지금도 비늘을 갖고 있나요?”

수리시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물론이지!”

시드룬이 잘그락거리며 비늘을 꺼냈다. 아주 약간은 그도 기뻐 보였다.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 더 컸겠지만.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생각하지 말자. 그냥 하는 거야.’

투이나는 이해관계를 떠나 그들을 돕고 싶었다.

나아가려는 투이나를 라카인이 붙잡았다.

“루가 님.”

그의 목선을 따라 불안함이 흘러내렸다.

“지난번에 비늘을 만졌다 죽을 뻔하셨습니다.”

투이나가 움찔했다.

라카인이 ‘차마 안 하시면 안 됩니까’를 말할 수 없어서 주저하고 있었다.

주제넘은 짓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죽을 뻔한 건 라카인이잖아요.’

그 원인이 비늘이 아니라 아르힘이라서 문제였을 뿐이지.

투이나는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이번에는 다칠 일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시작하겠습니다.”

시드룬이 투이나 옆으로 다가왔다.

라카인은 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마법사들이 한 짓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왕이 한 짓도.

그는 투이나를 말릴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말리면 간신히 그를 잡아 주던 손도 날려 버리는 셈이므로.

아무리 충성을 바친다고 해도, 그의 일부가 사슬로 연결된 신에게 있는 이상.

말을 잃어버린 그를 밀어버리듯 호루니가 나섰다.

“루가 님이 하신다면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며 대답했다. 투이나를 보호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투이나가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제 사람들에게도 다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주세요.”

제 사람들이라는 말이 파도처럼 라카인을 때렸다. 물가에 나온 사람처럼 호루니의 눈시울도 떨렸다.

시드룬은 가만히 소매를 되짚어 투이나의 손끝을 만졌다.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투이나의 손에 비늘이 떨어졌다.

솨아아.

투이나에게 낯익은 감각이 밀려들었다.

세상은 느리게 정지하고,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

그러나 이번에는 시드룬이 살며시 그녀의 손끝을 쥐고 있었다. 뼈가 느껴지는 단단한 손가락이 투이나를 톡톡 두드렸다.

“나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네?”

그가 말하는 ‘나’가 투이나인지 시드룬인지 알 수 없었다. 곧 귀에서 허물이 떨어져나가듯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숨 쉬고 말리고 조이는 그 저녁 언덕에 떨어지던 후에도 새야.”

“저것 좀 봐.”

“또 왔네?”

목덜미에 누군가 속삭였다.

확 소름이 끼친 투이나의 몸이 뻣뻣해졌다.

‘또 못 움직일까?’

촛농처럼 굳어 버린 몸이 아주 희미하게 까딱였다.

시드룬을 잡고 있는 부분이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투이나는 자신을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호위들의 시선과 일렁이는 문을 다시 보는 건 두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몸에 자리한 얼룩이 불타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드룬의 마법 덕분인 것 같았다.

‘효과가 있나?’

투이나는 바로 옆에 선 시드룬을 보려고 애썼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러나 시드룬은 더 이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살이 있어야 할 자리가 결정화된 채 굳어 있었다.

투이나는 또 환각을 보나 싶어 움찔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살짝 살갗을 쓸어 보자 가루가 작게 부서지며 날리고는 매끈한 보라색이 안쪽에서 번뜩였다.

시드룬의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려고 했다.

‘길고 보라색인…….’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시드룬의 몸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무척 느리고 진한 보랏빛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틀림없이 시드룬이었다.

‘설마…….’

투이나가 숨을 들이켰다.

‘저거 영혼이야?’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오래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투이나가 처음 비늘을 만지고 보았던 그것.

시드룬이 있던 곳이다.

투이나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시드룬!”

투이나가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는 거품처럼 한참 뒤에나 바깥으로 나와 터졌다.

그녀를 잡고 있던 시드룬의 손가락이 점점 더 딱딱해졌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산산조각 나 가루로 흩어질 것이다.

“가지 말아요!”

투이나가 소리쳤다.

일렁이는 세상이 그녀의 목소리를 자꾸 삼켰다.

‘가면 죽어.’

확신할 수 있었다.

“돌아오세요!”

가슴까지 나온 시드룬의 영혼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는 뭐가 자꾸 붙잡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소금.”

그때 계속 투이나를 괴롭히던 목소리들이 몸에 달라붙었다.

“소금.”

“소금.”

“저리 가요!”

“소금.”

갑자기 모든 목소리들이 같은 말을 떠들기 시작했다.

“소금!”

투이나의 얼룩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그녀가 절박하게 되뇌었다.

“내가 뭘 알아야 하는 거예요?”

“소금!”

비명들이 합창했다.

기적처럼 직감 하나가 투이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힘으로 투이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텅 빈 허공과 눈이 마주쳤다.

“헉!”

“루가 님!”

쿠당탕.

시드룬과 투이나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이봐! 정신 차려!”

“콜록콜록!”

투이나가 격하게 기침했다.

그녀는 손에 꽉 쥔 감각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살아 있어.’

시드룬의 손은 다시 사람다워졌다.

비늘을 만졌을 때 그게 얼마나 끔찍하게 변했었는지 아직도 생생했다.

“시드룬, 당신 괜찮아요?”

투이나 밑에 깔려 있던 시드룬이 고개를 들었다.

투이나는 아직도 그의 눈이 멍해 보여서 턱을 잡고 이쪽저쪽으로 돌려 보기까지 했다.

“……멀쩡합니다.”

시드룬의 턱이 움직였다.

그는 방금 전에 겪었던 초현실적인 경험보다 투이나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방금 어떻게 알았습니까?”

“뭘요?”

“돌아오는 방법 말입니다.”

시드룬이 말했다.

그는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에 휩쓸린 사람 같았다. 걱정으로 휘둥그레진 투이나 밑에서 그가 계속 중얼거렸다.

“영혼의 세계에 갈 때는 항상 두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나아갈 사람과 뒤를 돌아봐 줄 사람. 뒤를 봐 줄 사람이 없다면 영원히 나아갈 테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잔뜩 혼란을 집어먹은 수리시가 되물었다. 그러나 시드룬은 여전히 생각을 언어화하기 바빴다.

“전에는 그래서 실패했었던 거야. 나 혼자 갔었으니까. 하지만 최초의 시도에선 어떻게 돌아왔지? 어떻게 나 혼자…….”

말이 느려지던 시드룬이 갑자기 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유리알처럼 맑은 눈에 그녀가 비쳤다.

“투이나.”

시드룬의 손이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지금까지 무심하게 다루던 행동과는 전혀 달리, 아주 느리고 애달픈 동작이었다.

갑자기 이래서는 안 될 기분이 들어 투이나가 손을 떼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투이나는 자신이 시드룬을 깔고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내려갔다.

시드룬은 천천히 투이나가 멈출 때까지 지켜본 뒤에야 대답했다.

“예.”

그때까지 경악을 감추지 못하던 수리시가 물었다.

“너, 설마 기억이 돌아왔어?”

“아주 약간.”

시드룬이 상체를 일으켰다. 소란으로 산산이 흩어져있던 보랏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역시 영혼의 세계에 두고 온 게 맞았어.”

한순간 수리시의 눈이 가늠할 수 없는 희망으로 빛났다.

“그렇군.”

그녀의 입꼬리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실룩였다.

“그랬어.”

“저기 죄송하지만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호루니가 소리쳤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마법사와 떨어지자마자 최대한 멀리 떨어트리기 바빴다.

시드룬은 느른하게 앉아 정신을 차린 것만으로도 용해 보였으므로 자연스레 호위들은 수리시를 쳐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수리시도 알 수 없는 기쁨에 젖어 있느라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투이나는 묘하게 개운해 보이는 시드룬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당신 정말 이상하게 보여요.”

“…….”

시드룬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보입니다.”

투이나의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시드룬이 웃는 건 처음 봐. 웃으니까 마치…….

시드룬은 마치 사람 같았다.

진짜 사람.

‘지금까지 없던 부분을 돌려받은 것처럼 보여.’

그게 기억이라면, 지금 시드룬의 사람다운 부분이 약간 돌아온 걸까?

시드룬은 부드럽게 입을 다시 열었다.

“어떻게 돌아오는 방법을 알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 아직 시드룬이네.

약간 회복되긴 했지만 시드룬은 평소처럼 고집스럽게 목표를 파고들었다.

투이나는 벌써 잊고 싶어지는 기억을 더듬었다.

“또 말소리를 들었어요. 영혼의 세계엔 목소리가 많던데요.”

“어떤 말입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가, 또 왔냐는 소리였다가…….”

‘얼룩은 얘기하면 안 돼.’

“……몸이 아파 올 때쯤에 갑자기 모든 목소리가 소금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소금?”

수리시가 얼굴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무슨 소금?”

“그 세계에선 시드룬이 소금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투이나가 깨닫는 동시에 덧붙였다.

‘그래. 그건 소금이었어.’

그녀는 한순간이나마 보석처럼 빛나던 시드룬의 결정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왜 뒤를 돌아보았는지도.

“계속 소금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소금 기둥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뒤를 돌아본 거예요.”

호루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저주받은 마을에서 도망치려는 연인이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린 이야기 말씀이세요?”

“맞아요.”

“돌아보면 무조건 죽는다는 경고를 들었는데도 기어코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는 얘기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루니는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루, 루가 님……. 설마 죽고 싶으셨던 건 아니시죠?”

“설마요.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호루니는 그 얘기를 알면서도 왜 돌아보았는지 간절히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

실제로 두 사람 다 현실로 돌아왔으니 결국 잘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투이나를 라카인이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간절하게.

시드룬이 말했다.

“당신이 겪은 건 어쩌면 아르힘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네?”

“신은 영혼의 세계에 드나들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존재를 감지하고 도움을 준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들은 목소리 중에 아르힘 님의 건 없었어요.”

투이나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아르힘이 여러 모습으로 변한 걸 보았고, 그때마다 신의 음성도 달라졌지만 성스러운 그 느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시드룬은 부정적인 대답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신만 당신을 돕는 건 아닐 수도 있을 테니까.”

투이나는 약간 당황했다.

영혼의 세계에서도 자신을 돕는 존재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이미 그런 영혼을 만난 듯했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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