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만족하지는 못했다. 가여운 목이 쉬어 갔다. ‘신이시여, 괴롭습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런 요청에 샨과 베인이 시드룬에 집중했다.
시드룬이 나설 줄은 몰랐는지 둘 다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마법사가 무슨 볼일로?”
“루가 님께 무슨 볼일로?”
동시에 말하던 샨과 베인이 강한 불쾌감으로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잠깐 남아서 얘기하는 정도라면 좋아요.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기 같네요.”
“잠깐, 루가. 정말 마법사와 따로 만나겠다고?”
“시드룬도 내 구혼자예요.”
투이나가 간단히 말했다.
샨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보지 않았다는 듯 새삼스레 시드룬을 뜯어보았다.
“마음대로 해라. 루가의 멍청한 짓까지 말릴 순 없지.”
샨이 홱 돌아서 갔다.
베인도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치료가 끝나지 않아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물러 주십시오.”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잠시만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투이나가 호위와 함께 돌아왔다.
“이들은 왜 데려왔습니까?”
“지난번에 함께 갈 사람이 있다고 했던 얘기를 기억하나요?”
잔뜩 긴장하면서도 흥분한 호루니와 스카차, 그리고 라카인이 시드룬을 올려다보았다.
시드룬은 기억했다.
“이들이 데려갈 자입니까?”
“네. 실제로 시드룬과 함께 갈 때는 두 명씩만 같이 갈 거예요. 혹시 다른 사람이 찾을 때를 대비해서 한 명이 남기로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증언할 자를 남긴다는 뜻도 되었다.
투이나가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전했음에도 끝내 호위 셋 모두 그녀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심지어 한차례 떠났다 돌아온 라카인까지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말려도 소용이 없을 기세라 투이나는 결국 시드룬에게 모두를 소개했다.
“제 호위분들이에요. 만약의 일이지만,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이 사람들부터 신전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시드룬이 선선히 동의했다.
“구혼 기간 동안 내 마법은 루가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동행하는 동안 발생한 일을 남에게 언급하면 동의 없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그것이 다른 자들의 요구입니다. 약속을 어기면 죽일 것.”
호위들이 침을 삼켰다. 담담한 말투라 더 살벌했다.
“그것과 별개로 다른 자들은 원래 방문자를 원치 않습니다. 따라서 공격에 대비하되, 그들에게 부상을 입히면 마찬가지로 죽습니다.”
“네?”
“아니, 방어도 못 한다는 말입니까?”
무심코 중얼거린 스카차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무시무시한 마법사인 시드룬의 심기는 멀쩡했다.
시드룬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것은 다른 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 시드룬의 의견은요?”
덩달아 낯빛을 잃어 가던 투이나가 무심코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시드룬이 대답했다.
“굳이 죽고 싶지 않다면 영원히 그곳에 남는 방법도 있습니다.”
“으윽…….”
라카인을 제외한 호위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호루니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래도 루가 님을 따라갈 겁니다!”
“맞아요.”
“알겠습니다.”
시드룬은 비장함을 한 마디로 치워 버린 다음 투이나에게 몸을 돌렸다.
“소개가 끝났다면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내가 이 시험을 이겨도 좋습니까?”
샨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달리기 전에 목표를 확인해두려는 것 같았다.
‘이번 시험으로 시드룬이 범인인지 가려 볼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보면 시험해 볼 가치는 있었다. 시드룬이 승리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판단에 도움이 될 테니까.
“네. 마법도 시드룬의 능력이니 써야겠죠. 이겨도 되니 최선을 다해 보세요.”
투이나가 덧붙였다.
“참, 그리고 이번 시험으로 자연스럽게 사제님에게 치료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전에 제게 요청했던 대로 말이에요.”
“한 번은 져야겠군요.”
시드룬은 쉽게 이해했다.
명쾌한 대화에 투이나는 만족했지만 시드룬은 대화를 더 하고 싶은 눈치였다.
“당신이 일을 할 때 한 가지만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은 알았습니다. 이번 시험은 어떤 목적으로 시작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네? 글쎄요.”
투이나가 난감하게 뺨을 감쌌다.
“그렇게 말하니 제가 엄청나게 계획을 짠 것처럼 들리네요. 물론 이번 기회에 시드룬이 부탁했던 일도 겸사겸사 해결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런 건 우연이죠.”
“우연히 당신이 하는 일마다 의미가 겹친다는 말입니까?”
“음……. 설마요. 의미는 돌이켜볼 때 생기는 거잖아요. 그냥 뭘 하고 있는 중에는 잘 모르겠어요.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나중에 아, 그때는 그랬구나, 하고 이해하는 게 다예요. 마음이 얼마나 단순한지.”
“…….”
“사람에게 부족한 자리를 신께서 채우시다 보니 뒤늦게 의미가 각별해지나 봐요.”
투이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신을 믿지 않는 시드룬은 대답을 정리하듯 묵묵히 그녀를 관찰하기만 했다.
* * *
다음 싸움은 샨의 거처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시험에서 1승을 거둬 여유로워진 샨이 연회를 열기로 했던 것이다.
원래 일정상 샨을 먼저 찾아가는 순서긴 했지만.
신의 거처에 구혼자들까지 모인다는 걸 신경 썼는지 샨은 대대적인 연회를 준비했다.
“아마 기를 죽일 심산이겠죠.”
투이나를 따라오던 시종이 재잘거렸다.
“나라 빼앗기를 숨 쉬듯이 했으니 재산이 아니 많겠습니까?”
“온 신전 사람들이 다 달려들었어도 모하세스가 가져온 짐을 확인하는 데만 열흘이 넘게 걸렸다니.”
“과장하지 말게. 아흐레밖에 걸리지 않았어.”
따라오던 두르발이 점잖게 정정했다.
“자네들은 루가 님이 옆에 계신데 항상 이렇게 떠드나?”
“거의요?”
“휴우……. 시종들부터가 이러니.”
“너무 뭐라고 말씀 마세요. 전 얘기 듣는 게 좋은걸요.”
투이나의 말에 두르발은 얼른 얌전해졌지만 시종들을 향한 불만을 다 삼킬 순 없었다.
“허나 손님도 와 계시잖습니까.”
“저도 괜찮습니다.”
투이나와 나란히 걷던 베인이 빙긋 웃었다.
그가 선사한 미모의 파괴력에 시종들이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을 위해서 호위들은 살짝 떨어지는 배려를 보여 주었다.
덕분에 투이나는 베인의 거처 밖에서도 마음껏 그의 곁을 거닐었다.
‘아직 우리의 사정을 잘 모르시는 사제님이 계시니까 더 욕심내면 안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 때마다 베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도 흔들렸다.
베인은 샨에게 패배한 뒤에도 딱히 달라진 모습 없이 상냥했다.
투이나는 많이 안심했다.
이대로 첫 번째 시험만 잘 지나가면 두 번째 시험에서 굳이 베인을 힘들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샨 아니면 시드룬일 테니까.’
그래도 베인은 샨의 거처로 갈 때 검을 잊지 않았다.
“베인은 상단에 있었으니 손님맞이도 자주 했겠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만났나요?”
“예. 그 덕에 남에게 무례하지 않을 만큼은 예법을 배웠습니다.”
베인이 투이나와 보폭을 맞췄다.
“제가 알기로는 아르파의 연회에서는 권하는 음식을 거절하면 큰 무례라고 하더군요.”
“정말요? 그렇다면 술도 마찬가지겠네요.”
“네. 혹여 만약의 일이라도 루가 님이 아르파의 낯선 술에 정신을 잃으실까 염려됩니다.”
“아, 그건 괜찮아요. 베인. 저는 샨과 함께 마셔 보았으니 조절할 수 있거든요.”
“……그러셨습니까?”
“네. 전 오히려 베인을 걱정하고 있었는걸요?”
투이나가 방긋 웃었다.
베인이 반사적으로 다시 미소를 머금었지만 아까처럼 시종들을 녹여 버릴 듯한 기운은 나오지 못했다.
곧 샨의 거처에 도착한 투이나 일행이 예상치 못한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하인들이 군무를 추고 있었다.
정확히는 춤과 군대 사열을 섞어 놓은 듯했다.
다수가 만들어낸 규칙적인 움직임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모두가 정확한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은 어딘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바람의 비명 같은 현악기 소리가 들리는 사이로 샨이 나타났다.
“어서 오라.”
샨이 움직이자 군무의 중심도 이동했다. 마치 군대가 함께 전진하는 것 같았다.
긴장한 시종들이 침을 삼켰다.
느긋하게 앞에 선 샨이 반응을 기다리는 듯하자 투이나가 주저하며 손을 내밀었다.
“다들 연회 때마다 이렇게 하나요?”
“물론이지.”
자연스럽게 투이나의 손을 잡아 든 샨이 그녀를 이끌었다.
“좀 더 보고 싶나?”
악수로 끝낼 생각이었던 투이나가 당황한 나머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뇨. 괜찮아요.”
“사양할 거 없다.”
그가 가볍게 당기자 너무도 쉽게 투이나가 끌려갔다.
‘으앗!’
투이나가 급히 샨에게서 손을 빼내려던 찰나, 베인의 살짝 따듯한 손바닥이 등에 와 닿았다.
그는 투이나에게 괜찮다는 시늉을 보내며 반대쪽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옆에 있겠다는 뜻이다.
쿵쿵거리던 가슴이 베인을 보자 곧 진정됐다.
‘그래. 오늘은 베인이 함께 있잖아.’
“가지.”
샨이 망설임 없이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양쪽으로 구혼자의 호위를 받게 된 투이나가 붙들린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쩐지 우리도 무리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아.’
하인들은 그들을 흡수하듯이 일사분란하게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마치 아르파의 의식을 다시 한번 치르는 것 같았다.
피도 없고, 음악도 있고, 샨의 기분까지 좋아 보인다는 점이 다르지만.
투이나의 손가락이 감기는 동작에 샨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이상하네.’
오늘따라 샨의 아량이 넓었다.
승리의 예감 때문일까?
샨을 더 쳐다보면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아 투이나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카인을 뺀 나머지 인원이 힘겹게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하인들의 흐름을 억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샨이 원한 손님은 투이나 하나였던 것처럼.
그를 따라가자 거대한 야외 침상처럼 생긴 연회장이 나타났다. 벽에 걸어 두기도 아까운 고급 양탄자가 거침없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투이나가 주변을 살폈다.
“여긴 원래 샨의 천막이 있던 곳이네요.”
“잠깐 해체했지. 아르힘은 갑갑한 방 안에 갇혀서 노는 걸 연회라고 부르겠지만, 숨도 트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소꿉장난은 싫어하거든.”
말을 끝내며 샨이 드디어 손을 놓았다. 그가 돌아보는 것에 맞춰 베인도 자연스레 떨어졌다.
“신에게 백 마리의 피를 바쳤으니 축하도 백 마리는 되어야지.”
샨의 말과 함께 하인들의 손에 음식이 나타났다.
‘……저걸 음식이라고 불러도 되나?’
접시가 아니라 꼬챙이에 꿰인 고기들은 잘 요리된 다음에도 무시무시한 풍채를 자랑했다.
하나만 있어도 오늘 초대받은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을 텐데, 하나가 아니었다.
줄줄이 나타나는 대형 음식에 기가 질린 투이나에게 샨이 씩 웃었다.
“연회를 시작하지.”
어마어마한 음식을 눈앞에 뒀는데도 식욕이 돌지 않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권하는 음식을 거절하면 무례한 짓이 된다니.’
혹시 샨이 이번 생에는 그녀를 검이 아니라 배 터져 죽게 만들려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푹신한 쿠션 사이로 자리를 잡으며 투이나가 물었다.
“시드룬은 아직 안 왔나요?”
“그래. 어차피 마법사는 잘 먹지도 않더군.”
시드룬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적어도 먹다가 칼부림 날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투이나는 열심히 주변을 확인했지만 이 연회가 마법사를 잡을 만한 덫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샨의 검은 전시하듯 양탄자에 곧게 꽂혀 있었다. 샨이 곧장 검을 집어 들기엔 꽤 먼 거리였다.
‘안심시키려는 건가.’
알 수 없었다.
샨이 투이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왕과 루가가 가까워질 때마다 호위들의 신경이 닳아 갔지만 차마 드러내 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제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하던 호위들에게 벼락같이 샨의 음성이 떨어졌다.
“무기를 놓아라.”
투이나를 따라 앉으려던 베인이 멈칫했다.
그는 아직 허리에 찬 검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샨은 그가 아니라 호위에만 온전히 관심을 두었다.
“호의로써 준비한 자리니 긴장할 것 없다.”
“…….”
믿을 수 없는 호의에 호위들이 입술을 다물었다.
‘무슨 의도지?’
샨은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게다가 저 배려하는 말투라니.
호루니가 어렵사리 말했다.
“……무기는 놓을 수 없습니다.”
“내 신변을 지켜야 하는 자들도 물러나 있다. 고집을 부리다 화를 돋우는 편이 더 위험할 텐데.”
협박을 저렇게 나른하게 할 수 있다니.
호루니는 당신이 호위들보다 더 강하지 않냐는 반박을 간신히 참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호위들의 안색이 나빠지자 라카인이 나섰다.
“무기를 지닌 자는 바깥에 있겠습니다.”
“…….”
“두 사람은 루가 님 곁에 남아라.”
라카인이 호루니와 스카차에게서 무기를 받아 갔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투이나의 뒤 쪽에 빈손으로 앉았다.
샨은 만족했다.
그리고 투이나는 기묘함을 느꼈다.
‘뭔가 달라졌어.’
라카인은 샨이 죽이려 했기에 그녀에게 돌아왔다.
투이나에게 거리낌 없이 몸을 던지는 걸로 보아 그는 목숨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과하게 강한 충성심이 있을 뿐.
아르파의 의식을 겪어 본 그녀는 그들의 충성과 신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르파는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큰 공포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투이나는 라카인을 보내면서도 다른 걱정을 했다. 라카인이라면 샨이 죽여 버린다고 해도 순순히 받아들일까 봐.
다행히 그는 죽음을 피해 투이나에게 돌아왔다.
다행인 일이지만.
‘그런데 왜 둘 다 그대로지?’
신앙이 변하지 않았다면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죽음이 무섭다면 신앙이 변한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본 두 사람은 변함이 없었다.
‘달라지지 않아서 다르게 보여.’
투이나는 석연찮았다.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라카인의 행동이 보다 중요한 질문과 맞닿아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도 필요한 어떤 대답이…….
“뭐하나, 루가.”
투이나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있던 투이나에게 샨의 여유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배가 고프지 않나?”
“아…….”
‘참, 아직 연회 중이었지.’
꼬챙이를 든 샨이 간단하게 뼈와 살을 분리했다. 고기를 어떻게 익혔는지 저절로 분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접시 위로 털퍽 떨어진 고기를 직접 찔러 보니 생각보다 단단했다.
‘힘으로 자른 거구나.’
오묘한 기술을 간단하게 납득한 투이나가 고기를 잘랐다. 단단한 살에 갇힌 육즙이 듬뿍 흘러나왔다.
어쨌든 맛있게 먹는 투이나를 본 샨이 씩 웃었다.
고스란히 그 시선을 받은 투이나는 체할 것 같았다. 정말 적응하기 어렵게 샨이 자꾸만 미소를 보여 주었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을까.
‘뭔가 오해라도 하지 않고서야.’
죽기 전에도 본 적 없는 모습에 투이나가 찜찜하게 그를 곁눈질했다.
그럴수록 샨은 더 득의양양해졌다.
“……샨도 좀 먹어요.”
투이나가 슬쩍 샨에게 접시를 밀었다.
까만 소시지였다.
피를 먹는 것도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피가 필요하다니 먹어 둬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자신에게 돌아온 음식을 본 샨이 피식거림을 흘렸다.
“이게 루가의 배려심이로군?”
그녀의 의중을 알아들었다는 소리다.
좀 진정하라는 마음의 소리를 알아들을 줄 몰랐던 투이나는 민망해졌다.
샨은 더는 놀리지 않고 투이나의 표정을 감상하다가 음식을 삼켰다.
‘혹시 갑자기 아량이 넓어지는 광기도 있나?’
평소와 다른 샨의 모습에 투이나는 그의 정신 건강이 매우 걱정스러워졌다.
사람이 평소답게 굴어야지. 안 하던 짓을 하면 무섭다.
베인은 투이나가 난감하게 샨을 상대하는 동안 계속해서 쌓이는 음식을 천천히 분류했다.
원래 독을 검사하던 라카인은 양탄자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마음껏 투이나를 따라다니는 주제에 노골적으로 모하세스의 수하임을 드러내는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베인은 그의 자리를 앗아 갔다. 가능하면 계속 투이나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그녀에게 필요한 일은 자신이 다 할 테니까.
베인은 약간씩 음식을 덜었다.
사제가 있으니 크게 위험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줄 음식을 직접 고르고 싶었다.
그때 투이나가 불쑥 다가왔다.
“베인, 이것 좀 봐요. 이렇게 생겼는데 생선이래요.”
투이나가 든 접시엔 꽤 흉포한 이빨을 가진 늘씬한 짐승이 늘어져 있었다.
“……상어로군요. 바다에서 잡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먹어 본 적 있어요?”
“가난한 상인이 그럴 리가 없지.”
샨이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머리부터 지느러미까지 각기 다른 열 가지의 조리법을 거치지 않으면 제대로 맛볼 수조차 없는 것이다.”
샨이 오만하게 말했다.
투이나는 미끌거리는 표면을 미심쩍게 내려다보았다.
“음, 먹어 보죠.”
투이나가 가볍게 상어를 갈랐다.
샨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베인에게 음식을 덜어 주고 제게도 똑같이 주는 투이나에게 오래 화난 척할 수가 없었다.
‘신기한 맛이야.’
차마 맛있다고는 표현하지 못한 투이나가 우물거렸다.
얌전히 상어를 입에 가져가는 베인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샨이 버티고 선 자리에서 베인을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신경 쓰는 일도 골치가 아팠다.
지금처럼 샨이 막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때, 투이나가 이제 됐으니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처음 얘기했던 기간은 맞춰서 결정을 발표한다면 그도 거부할 명분이 없겠지.’
암살자를 찾아내기 위한 시험도 샨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어쨌든 신전에서 구애 활동 말고 집중할 일이 생겼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드룬이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어?”
인기척을 느낀 한 시종이 손가락질을 했다.
하인들도 나타난 시드룬을 보았지만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기에, 거기 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드는 건 시종이 가리킨 다음이었다.
나풀거리는 천과 머리카락이 머리 위에 드리운 구름처럼 흩날렸다.
시드룬은 번개를 품은 구름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투이나와 구혼자들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걸 확인한 시드룬이 입을 열었다.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시드룬이 허공에서 마법진을 연달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법진에서 검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왔다.
“……!”
꼬챙이를 치켜든 샨이 곧장 검을 튕겨냈다.
쐐애액 날아간 검은 다시 마법진 속으로 사라졌고 그대로 다른 마법진으로 연결되었다.
온 사방에서 검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루가 님!”
“꺄아악!”
“다들 엎드려!”
베인이 다급히 투이나를 당기듯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호위들도 당장 이쪽으로 달려왔지만 온 몸으로 투이나를 보호하듯이 가린 베인을 보고는 바깥으로 주의를 돌렸다.
라카인은 두 번째 공격이 있기 전에 호위들에게 무기를 던졌고, 세 사람은 날아다니는 검이 투이나를 향할 때에만 무기를 휘둘러 쳐냈다.
“시드룬!”
투이나가 힘겹게 소리쳤다.
베인이 어찌나 꽉 누르고 있던지 몸을 빼내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몸을 비튼 투이나가 위쪽으로 눈을 굴렸다.
시드룬은 처음 나타난 자리에서 계속해서 마법을 썼다.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는 검에도 샨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반응했다.
심지어 검을 받아내는 짧은 순간에 마법진이 나타나는 간격을 알아차리곤 몸을 옆으로 굴리기까지 했다.
몸을 던진 샨이 검을 뽑아 들며 민첩하게 일어났다.
검을 든 샨은 폭풍을 만난 해일이 되었다.
날아드는 검을 모조리 쳐내며 샨이 매섭게 눈을 번득였다. 당장이라도 시드룬에게 달려들 것처럼 보였다.
그의 호승심에도 불구하고 시드룬은 무표정하게 마법을 이어나갔다.
“도대체, 읏!”
부웅.
머리 위를 날아간 검에 투이나가 몸을 들썩였다.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공격에 다른 사람까지 휘말리고 있었다.
그들을 말리려고 투이나가 일어나려 하자 당장 베인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가지 마십시오, 루가 님.”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얼결에 고개를 돌린 투이나가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차마 외면하기 힘든 거리에서 베인이 속삭였다.
“마법사의 말대로 시험을 치르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지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매혹적인 말이다.
살벌하게 싸우는 샨과 시드룬은 당장 해가 떨어져도 멀쩡할 것 같았고, 부상을 대비한 사제까지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책임감을 느끼시는 겁니까?”
“지금 싸움이 다른 사람이 낸 시험이었더라도 나섰을 거예요.”
투이나는 베인에게 가려져 있다는 장점을 잠깐 이용했다. 한 팔로 그를 껴안은 것이다.
“말릴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베인이 얕게 목울대를 움직였다.
그가 움찔한 사이 투이나가 살짝 빠져나왔다.
“거기까지!”
챙그랑.
날아가던 검이 처음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투이나의 목소리를 들은 시드룬과 샨이 곧장 반응했던 것이다.
정말로 쉽게 멈춘 싸움에 그녀는 허탈해지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통제가 안 될 때를 상상하게 된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시드룬이 말했다.
“아직 기준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알아요.”
투이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놀라기만 하고 멀쩡해 보였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시험이라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면 없던 일이 될 겁니다.”
투이나가 경고했다.
“일단 공격을 멈추고 다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다.”
샨이 지적했다.
“마법사는 이미 승리했으니까.”
샨의 단호한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아무리 샨이라도 마법사의 공격은 모두 막지 못한 것일까?
샨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아니다. 이 멍청한 것들.”
“…….”
시드룬이 말없이 검을 다시 소환했다.
마법진에서 나타난 시드룬의 검은 거의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칼날이 보이는 쪽으로 돌리자 빛이 반사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피가 묻은 것이다.
“세상에.”
“제대로 본 자가 아무도 없다니 실망스럽군.”
“샨이 다친 게 아니면…….”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베인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흰 장갑에 옅은 피가 묻어 나왔다.
“미처 몰랐군요.”
베인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한 줄기 실처럼 가는 상처가 뒤늦게 아릿해졌다.
‘날 잡고 쓰러질 때 스친 건가?’
투이나 또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베인이 이번 시험에서 이기길 바라지 않았어도 패배는 정식으로 이뤄질 줄 알았다.
샨이 만족스럽게 팔짱을 꼈다.
“시시하게 됐지만 승부는 났군.”
우두커니 선 베인이 손가락 끝에 묻은 피를 문질렀다.
이미 샨에게 한 번, 시드룬에게 한 번 졌으니 이제 베인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베인의 표정이 복잡한 만큼 투이나의 마음도 어지러웠다.
분명 그가 져야 좋은 시험인데.
게다가 샨까지 불에 기름을 부어댔다.
“마법사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루가를 붙잡은 주제에 결국 자기 몸 하나 지키지 못했단 말이냐?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투이나 앞이라 꾹꾹 속내를 누르던 베인이 결국 참지 못했다.
“내가 루가 님을 방패막이로 삼았다는 겁니까?”
“호오, 알아들었나? 생각보다는 덜 멍청하군? 하긴 주판이나 굴릴 줄 아는 몸인데 그거라도 못하면 쓰나.”
“루가 님의 말이 맞군요.”
베인이 차갑게 대꾸했다.
“승리한 뒤에도 상대를 깎아내리는 걸 보니 마법사를 이길 자신은 없나 봅니다.”
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까지 여유가 없겠습니까?”
베인 앞에 서 있던 투이나는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간 은근한 과시를 보지 못했다.
샨의 속에 불길이 확 치밀었다.
하찮은 버러지 주제에 내게 이기지 못할 거라는 오만함을 보이다니.
그동안 저 상인 놈이 유약한 척하며 내내 저런 눈으로 투이나를 지켜봤던 건가?
속이 드글드글 끓었다. 두 번이나 패배한 주제에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본능적인 직감이 샨에게 신호했다.
루가의 시험이 아니라 다른 쪽에 저놈의 자신감이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아무래도 그게 투이나에게서 나오는 것 같았다.
“둘 다 그만하세요.”
투이나가 둘 사이로 끼어들자 샨은 가뜩이나 뒤집어진 속을 목구멍 밖으로 꺼낼 뻔했다.
누가 보아도 투이나가 샨을 막아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샨이 욕설을 털어놓기 전에 베인이 순식간에 얼굴색을 바꿨다.
“죄송합니다, 루가 님.”
“도저히 저 가증 떠는 소리는 못 들어 주겠군.”
“샨!”
투이나가 외마디 소리를 냈지만 샨의 심기는 더욱 불쾌해지기만 했다.
“패배자로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전에도 말했지만 아직 첫 번째 시험에 승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투이나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게다가 베인에게 먼저 시비를 건건 샨이잖아요. 이번 싸움은 시드룬이 이겼는데 왜 그가 아니라 베인에게 그러는 거예요?”
샨은 자신이 투이나를 신경 쓴다는 것도 말하기 싫었고, 베인이 은근히 과시한 감정도 설명하기 불쾌했다.
그리고 그는 왕이다.
누가 왕에게 감히 설명을 요구하는가?
따라서 샨의 말은 익숙한 방식대로 튀어나왔다.
“내 아내 주변에 꼬이는 파리를 쫓는데 승패가 중요한가?”
곧바로 투이나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바뀌었다.
평소였다면 그 표정을 보는 게 즐거웠겠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호칭이 예전보다 더 앞서나갔네요.”
“당연한 일을 돌려서 표현하는 것도 이젠 귀찮군.”
샨이 웃음기 하나 없이 말했다.
농담으로 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황당하다는 투이나의 시선이 향해 오자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태연한 척하던 상인 놈도 아내라는 단어에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미끼를 당기는 기분으로 샨이 말했다.
“난 그대가 당연히 나를 위해 첫 번째 시험을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까지 찌그러져 있던 투이나의 눈이 본래대로 크게 떠졌다.
“어……째서요?”
“당연한 걸 묻는군. 누가 보아도 시험의 내용이 나를 겨냥했으니.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까지 들더군.”
투이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 그녀의 모습에 샨은 어쩐지 뱃속이 근질거리며 기분이 좋아졌다.
연회를 하는 내내 샨이 너그럽게 굴었던 이유도 사실 시험 때문이었다.
도저히 그가 질 수가 없는 승부였으니.
루가가 구혼자를 시험해서 남편을 찾아내는 이야기는 꽤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어 줄 것이다.
‘두 신의 결합 설화로 충분하지.’
샨은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난 그녀가 드디어 지도자답게 직접 구혼자들을 시험하려는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백성들의 신앙을 올리기에도 적합했으니.
아르힘이 헛것을 뽑아다 놓진 않았구나 싶었다.
정작 투이나의 귀로는 한 마디도 그런 칭찬이 들어가지 못했다.
“아직 첫 번째 시험이니까요.”
“세 번 중의 처음이지.”
샨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다른 구혼자들을 신경 쓴답시고 공평한 척하려는 대답이 귀엽게만 보였다.
끙, 소리만 안 냈지 눈동자를 굴린 투이나가 말을 돌렸다.
“……어쨌든 오늘의 싸움은 승부가 났으니 더 이어 가진 않겠습니다.”
“일대일이군요.”
내내 방관하던 시드룬이 그제야 한마디 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다들 화들짝 놀랐다.
샨과 시드룬이 각각 1승을 거뒀지만 샨은 시드룬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법과 공격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마법진 때문에 보기에만 화려하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투이나가 공격을 알리라고 권고했지만 기습하기 전에 공격 선언을 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애초에 마법이 선보일 수 있는 한계는 그 정도겠지.
샨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다음 싸움으로 결판이 나겠군.”
“다음엔 질 것 같군요.”
시드룬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패기 없는 모습에 샨의 흥이 식었다.
“시작도 전에 꼬리를 내리는 건가?”
“…….”
시드룬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시드룬이 패배해야 하는 이유를 아는 투이나가 화제를 바꿔 주었다.
“그나저나 방금 소동으로 샨이 어렵게 준비한 연회가 망쳐졌군요. 준비된 음식까지 다 휘말려 버렸으니 너무 아깝네요.”
투이나가 아쉬워했다.
시드룬의 마법이 난무하는 바람에 양탄자며 음식이 담긴 접시까지 온통 난도질이 되어 있었다.
‘접시만 깨지지 않았어도 다시 먹을 수 있는 건데.’
투이나가 아무리 미련을 가져도 음식에 깨진 조각이 섞였을 게 분명하니 다 버려야만 했다.
그녀의 시선이 나뒹구는 고기에 꽂혀 있자 구혼자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계속 볼 필요 없다. 저 정도는 금방 다시 가져올 수 있으니.”
“음식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십시오.”
“상심하지 마십시오, 루가 님. 이번 일을 보상하고도 남을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투이나의 관심을 끈 건 마지막 제안이었다.
“베인도 연회를 열 생각이에요?”
“예, 허락하신다면.”
베인이 공손한 자세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제가 만든 자리에서는 돌발적인 싸움으로 방해받을 일이 없을 겁니다.”
꽤 미묘한 발언이다.
샨의 연회는 결국 망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자신은 이제 싸울 일이 없다는 패배 선언이기도 했으니.
샨이 경멸스럽게 품평했다.
“마법사가 한심한 소리를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더 한심한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군.”
“루가 님, 어떠십니까?”
이제는 베인도 능숙하게 샨을 무시했다.
차단막이라도 세웠는지 완전히 상대방의 말이 안 들리는 것처럼 구는 두 사람을 투이나가 난감하게 응시했다.
“전 좋아요.”
샨과 베인의 반응이 상반되었다.
두 사람의 온도 차를 보던 투이나가 마음 편한 중간 지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는 지금보다 주의해 줄 수 있죠?”
시드룬이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자 샨이 버럭 소리쳤다.
“치워라!”
손님이 있는 자리라 먼저 움직이지 못했던 하인들이 차례로 움직였다.
찢어지고 구겨진 자리를 말고 두껍게 짠 고급 양탄자를 몇 개나 꺼내왔다.
한 달에 하나 보기도 힘든 귀중품들이었다.
금은보화로 싸움의 흔적을 치운 샨은 그 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베인도 굳이 샨이 주최한 연회를 즐겁게 만들고 싶지 않은지 투이나에게만 미소 지었다.
시드룬은 원래 말이 없었고.
조용히 먹고 마시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조용해…….’
투이나는 거대한 침묵 속에서도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푹신한 양탄자가 작은 소음들을 다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게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그래서 연회가 끝날 때까지 더는 대화가 없었어요.”
투이나가 무릎을 모은 채 이야기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아르힘이 가볍게 끄덕거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즐거웠겠구나.”
신의 허락하에 저잣거리에서처럼 편안하게 앉아 있던 투이나가 허리를 세웠다.
“아르힘 님께선 고요를 좋아하시나요?”
“왕이 자랑하는 연회의 미덕이 과시이니 감상하려면 조용한 편이 낫겠지.”
아르힘이 소년의 얼굴로 웃었다.
“무엇보다 네가 원했던 대로 시험이 치러지고 있지 않느냐.”
“이번에는 크게 다치지 않아서 좋았어요.”
투이나가 대답했다.
목덜미로 손을 가져다 대던 베인의 얼굴이 생각났다.
정적인 동작에도 그의 아름다움이 서려 있어서, 깃털이 목을 간질거리는 듯해 그녀가 숨을 내쉬었다.
“얼른 첫 시험이 끝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아르힘은 사랑에 빠진 어린 루가를 그저 웃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가만히 질문을 떠올리던 아르힘의 작은 손가락에 앳된 뺨이 눌렸다.
“아이야, 어찌하여 세 번이었느냐?”
“시험 말씀이신가요?”
“그래.”
“살인자를 찾으려면 적어도 세 가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투이나는 천천히 말을 정리했다.
“첫 번째 시험은 순전히 실력을 보는 거였죠. 제가 검에 찔려 죽었으니 그럴 수 있는 자를 찾고 싶었어요.”
그러면 베인은 확실히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테니까.
“두 번째 시험에서는 살해 동기를 찾을 생각이에요. 아무리 가능하다고 해도, 왜 사람을 죽이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마지막은?”
“세 번째 시험은…….”
그녀는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답했다.
“그럴 수 있고, 그러고 싶다고 해도 정말로 살인에 이르는 이유를 물어볼 겁니다.”
* * *
햇빛은 나날이 강해졌다.
따듯해지는 공기에 봄꽃이 저물고 이파리가 자라났다.
신전이 자랑하는 수직 정원도 이때부터가 절정이다.
흰 골목 사이로 갑자기 나타나는 푸른 식물로 뒤덮인 벽은 상쾌한 시각적 환기를 가져다주었다.
베인이 준비한 장소였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진 것일지도 몰랐다.
“와…….”
투이나는 감탄했다.
담쟁이 너머로 물씬 피어난 이파리 아래 예식용 탁자가 비례적으로 완벽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다른 곳보다 은밀한 곳에 있는 정원이라 방문자들은 신전이 아니라 그의 집에 개인적으로 초대받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온화한 바람에 완벽하게 차려진 식탁보가 살짝 흔들렸다.
결혼 피로연처럼 꾸며진 자리에 선 베인은 아직 예복을 갈아입지 못한 신랑처럼 보였다.
완연한 봄 날씨에 겉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친 베인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다른 사람보다 투이나가 제일 먼저 도착했기에 베인은 마음껏 입을 맞추었다.
“어서 오십시오, 루가 님.”
뺨에 닿았다 떨어진 그가 살짝 웃었다. 눈가에 부서지는 빛이 바다처럼 일렁거렸다.
“안쪽에 가장 좋은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함께 가실까요.”
“좋아요.”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떻게 내가 베인과 연인이지?’
가끔씩 믿기지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껴안은 듯 벅찼다. 그런데 그 대상이 똑같은 감정을 돌려주다니.
‘정말 기적 같아.’
투이나는 살며시 베인과 잡은 손을 당겼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곧장 돌아보는 옆얼굴이 좋았다.
투이나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금세 베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루가 님…….”
“아직 다른 사람들 안 왔어요.”
투이나가 속삭였다.
그러자 베인이 바로 꽉 맞잡아 왔다.
맞잡은 손에서 닿아 오는 맥박이 쿵쿵 같이 뛰기 시작했다.
두건이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히 그가 귓가를 매만졌다.
“온다고 해도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안 될 일이겠지요.”
베인이 조용히 화답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에 투이나는 어딘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는 과시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베인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데 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불안해해 본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
“루가 님이 옆에 계심에도 다른 이들에게 확실히 알리고 싶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루가 님을 가까이 여길 때마다 저도 놀랄 만큼…….”
베인이 그녀의 손등을 꽉 잡았다.
투이나는 놀랐다.
투이나가 죽기 전에는 둘의 관계를 숨기자고 먼저 제안했던 사람이 베인이었다.
그녀는 적극 찬성했다.
다른 구혼자들은 필요하다면 신부가 아니라 신랑을 죽이고 빼앗을 인물이니까.
‘지키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지금 베인은 둘의 관계를 밝히지 못해서 아쉬운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절절한 시선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베인, 저 옆에 있어요.”
어디 안 가요, 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었지만 구혼자가 도착하는 대로 떨어져야 할 몸이라 차마 그것까진 말하지 못했다.
“딱 일 년만이에요. 이제 봄이고, 금방 여름이 오면 곧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어질 거예요.”
베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기간을 앞당기고 싶은 제 욕심만 버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베인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 듯 입술을 열었지만, 바깥에서 들려온 소란에 다시 다물었다.
“길을 빙빙 돌려 놓았군.”
성질 더러운 목소리가 벽을 넘었다.
샨이 왔다는 소리다.
하인 몇을 대동하고 정원으로 들어서는 샨을 본 베인이 천천히 투이나를 의자에 앉혔다.
“먼저 와 있었군, 루가.”
“일찍 왔네요.”
“흥. 일찍 와서 불만인가?”
꼬아 듣는 걸 보니 지난번처럼 여유롭게 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샨이 투이나를 향해서 대뜸 팔을 뻗었다.
“일찍 와서 좋다고 말해 봐.”
“왜 그러는 거예요?”
투이나가 표정으로 질색하고 말았다.
아직 베인이 있는 여운에 잠겨 있고 싶었는데 샨이 단박에 깨트려버렸다.
‘그래도 너무 나갔나?’
무례했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는 큭큭거리며 넘어갔다.
샨이 심술궂게 투이나의 두건 앞부분을 푹 눌렀다.
“농담이었다.”
투이나가 찡그렸다.
샨은 투이나가 양 손으로 다시 두건을 정리하는 걸 느긋하게 감상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루가.”
“뭔가요?”
“머리카락도 가죽인가?”
“네?”
“형벌에 머리 가죽을 벗긴다는 말이 있지. 그러니 따지고 보면 머리카락도 가죽에 속하잖은가?”
잔혹한 얘기에 솜털이 곤두섰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나는 가죽에 병이 든다면 머리카락도 같은 병일지 궁금해졌을 뿐이다.”
투이나의 호흡이 멈췄다.
크게 동요하는 그녀를 보며 샨이 싱긋 웃었다.
“아니지. 사람은 가죽이 아니라 피부라고 부르던가?”
“잔인한 이야기는 그만하십시오.”
투이나가 잔혹한 얘기에 경악한 줄 알았지 베인이 그를 제지했다.
그러나 투이나는 다른 이유 때문에 숨을 빼앗길 만큼 놀랐다.
그녀가 아무리 바보 천치라도 직접적으로 날아온 떠보기까지 못 알아들을 수준은 아닐 것이다.
‘내 병을 알고 있는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투이나는 망연히 돌아가려는 시선을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애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심은 시선이 되어 라카인을 향했다.
바른 자세로 서 있던 라카인이 아무런 의심 없이 눈을 맞춰 왔다.
죄책감이 터져 나왔다.
투이나가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섣불리 생각하지 말자.’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살인자가 있다는 신의 말에도 필사적으로 사람을 믿으려고 애쓰지 않았나.
그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비밀이다.
그러니 이토록 당황스러운 까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라카인에게 많은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베인이 걱정스레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루가 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럼요.”
투이나가 서둘러 말했다.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샨의 말을 상상하니 힘들어져서 그래요.”
베인의 눈초리에 투이나는 일단 겉으로 보이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샨이 의미심장하게 턱을 괴었다.
“겨우 그런 얘기에 힘들어하다니. 지금 내가 보는 게 피를 뽑으라 지시했던 여자가 맞나?”
“……샨이 말한 방법으로 누군가의 머릿속을 고칠 수 있다면 고려는 해 볼게요.”
예상한 대로 샨이 피식 웃었다.
투이나가 더 농담을 받아 주기 버겁다고 생각할 때쯤 베인이 입을 열었다.
“저기 마법사가 오는군요.”
긴 보랏빛이 정원 입구에 나타났다.
정원이 아니라 세상을 헤매다 온 사람처럼 시드룬이 벽을 짚었다.
“여기 있었군요.”
“웬일로 걸어서 나타났지? 또 머리 위에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시드룬은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도 없이 그냥 걸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투이나가 대신 말해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투이나와 샨의 대화에 신경이 쏠려 있던 베인이 주의를 돌렸다.
“세 사람이 모였으니 무기를 한자리에 두고 싶습니다.”
그가 정원 한쪽에 놓여 있는 유리관을 가리켰다.
창문에 쓰려고 해도 대단히 비싼 물건을 통째로 관으로 만들다니.
시종들이 감탄해서 웅성거렸다.
“제작하는 시간 때문에 연회를 여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편이 안심할 수 있겠죠.”
베인의 검은 이미 유리관 가장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무게가 있는 검에 깨지지 않도록 바닥은 푹신한 벨벳이 깔려 있었다.
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우린 관을 시체를 담을 때만 쓴다.”
“원하지 않아도 관에는 시체를 만든 원인이 들어가는 법이죠.”
베인이 답했다.
시드룬은 별말 없이 검을 소환했다.
달가닥 쇠가 부딪치며 두 번째 검이 담겼다.
남은 건 샨의 검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투이나까지 지긋이 샨을 바라보자 그가 한번 봐준다는 시늉을 했다.
“가져가라.”
그가 하인에게 검을 넘겼다.
샨의 검이 유리관에 닿자마자 베인의 관심은 도로 투이나에게 돌아갔다.
“루가 님, 차를 내오겠습니다.”
“네, 그래요.”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베인은 걱정스럽게 그녀를 한번 보더니 움직였다.
시드룬이 투이나가 있는 긴 탁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른 것에는 완전히 관심을 끊은 채 그녀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웠다.
‘아까 한 얘기는 대체 뭐였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시드룬이 얽히면 곤란했다.
‘시드룬한테는 얼룩병에 걸렸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 샨은 지금 내가 병에 걸렸는지 의심 중이고. 잘못하다 한꺼번에 두 사람한테 사실을 들켜 버릴 거야.’
묻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샨은 한번 떠보기만 했을 뿐 잠잠했다. 투이나가 보았던 과거에 비하면 거의 얌전한 수준이다.
그녀가 바작거리며 과자를 씹어 먹는 샨을 훔쳐보았다.
‘정말 아르파 신의 의식 덕분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머리가 욱신거린다.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다행히 이 자리에는 모든 근심을 날려 버릴 그녀의 연인이 있었다.
베인은 은쟁반에 올린 다구를 직접 날랐다.
금박을 입힌 도자기로 만든 물건으로, 찻잔부터 향로, 찻주전자까지 어우러지지 않는 게 없었다.
잠시 상념을 잊은 투이나가 베인이 정갈하게 찻물을 옮기는 장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깨끗한 동작마다 묻어 나오는 우아함은 이 자리에 있는 어떤 사람도 흉내 낼 수 없었다.
“차는 물을 따르기 전에 향을 따르고, 향을 비우기 전에 물을 비워 하나의 빈 잔을 남겨야 한다 배웠습니다.”
차가 우러나는 동안 베인이 말했다.
“본래 루가 님께 돌아가야 할 귀한 물건이나, 이 자리에 모인 것으로 대가를 대신 치른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개의 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베인이 가장 먼저 투이나에게 잔을 내려놓았다.
“루가 님의 잔은 미리 식혀 두었습니다.”
“고마워요, 베인.”
투이나가 양 손으로 찻잔을 감아쥐었다. 따듯한 차의 온기가 꼭 그의 체온 같았다.
베인은 다른 구혼자들에게도 차를 돌렸는데, 물이 완전히 펄펄 끓고 있었다.
작은 심술을 비웃은 샨과 투이나의 동작을 따라한 시드룬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리는 베인을 보며 투이나는 어떻게든 이 자리는 즐겁게 끝마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샨이 찻잔을 집어 던졌다.
와장창!
뜨거운 찻물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튀었다.
샨이 근처에 앉아 있는 사람을 모조리 일어나게 만드는 위업을 달성했다.
“뭐 하는 거예요!”
투이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샨은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박살난 찻잔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엄청나게 놀란 와중에도 덜컥 걱정이 들었다.
“다쳤어요?”
투이나가 벌렁거리는 가슴을 약간 누그러트렸다.
샨은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딱딱한 표정이었다.
죽기 전까지 포함해서도.
서서히 붉은 그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일어서듯 힘이 실렸다.
샨이 표범처럼 몸을 폈다.
“암살이냐?”
둥글던 투이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번엔 차에 독이 들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아직 마시지도 않았잖아.’
샨은 냄새만 맡아도 독이 든 지 알 수 있는 것인지.
투이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우선 지시했다.
“사제님, 샨을 확인해 주실래요?”
“아니, 필요 없다.”
샨이 우득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꺾었다. 살기를 뿜어내는 모습이 멀쩡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일 듯이 베인을 노려보는 건 안심할 수 없었다.
“설명해 봐라.”
쿵.
그가 다가오자 탁자가 한 번 흔들렸다.
평소와 똑같은 걸음이었는데 어떻게 무게가 그렇게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틀어쥘 것 같은 샨의 모습에도 베인은 차분했다.
“암살이 아닙니다.”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시험을 치렀을 뿐이죠.”
“……!”
투이나가 흠칫했다.
그녀는 핏대가 선 샨의 이마를 한번 쳐다보고는 찻잔이 깨진 자리로 다가갔다.
하얗게 조각을 드러낸 찻잔 사이로 회색빛 금속이 보였다.
그녀가 길쭉한 사다리꼴 금속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자 언제 왔는지 라카인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투이나는 황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라카인은 다른 걸 해 주세요.”
그는 명령에 따랐다.
투이나가 금속을 들고 다시 식탁으로 다가갔다.
샨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시험이라니.”
베인은 말없이 시드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따라갔다.
샨이 벌인 소동에도 가만히 찻잔을 들고 있던 그가 손을 올렸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시드룬의 손가락에서도 한 줄기 피가 흘렀다.
무딘 얼굴로 상처를 확인한 시드룬이 말했다.
“손잡이에 날붙이가 있군요.”
그가 찻물을 옆쪽으로 버렸다.
찻잔 쪽으로 바꿔 든 그가 손목을 비틀자 손잡이 안쪽 새하얀 부분에 회색 금이 가 있는 게 보였다.
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내게 장난을 치는 건가?”
“…….”
베인은 머리 위로 드리운 살인적인 위협에도 꼿꼿했다.
그에게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투이나만이 중요했다.
분명히 놀랐겠지만 그녀의 호위에게 시킨 일을 보면 역시 그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한 게 틀림없었다.
그것이 기뻐 베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라카인이 탁자가 있는 곳에 유리관을 내려놓았다.
샨은 갑자기 나타난 그를 짜증스럽게 노려보았지만 할 일을 마친 라카인은 말없이 물러났다.
그제야 베인이 일어나 유리관에서 검을 한 자루씩 꺼내기 시작했다.
샨의 검이 놓이고, 시드룬의 검이 놓이고, 마지막으로 베인의 검이 꺼내졌다.
떨어지지 않는 투이나의 시선에 그는 자신의 검을 집어 들면서 가슴이 터질 듯이 설렜다.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루가 님이 말씀하신 조건대로 따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베인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검을 탁자 위에 올렸다.
유려하게 만들어진 검의 선이 끝으로 가자 갑자기 뚝 끊어졌다.
검날의 양 끝이 조각난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투이나는 내내 쥐고 있던 쇳조각을 검끝으로 가져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조각난 부분이 정확하게 맞물렸다.
“……베인의 검이네요.”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느리게 인지하듯이 그녀가 검 끝을 눌렀다.
분노는 샨에게서 터져 나왔다.
“웃기지 마라!”
샨의 이가 빠득거리며 갈렸다.
“감히 이딴 속임수로 시험을 통과하겠단 말이냐!”
“조건을 어긴 것이 있습니까?”
베인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제 검을 사용했고, 피를 보았으며, 공격하기 전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당신들에게서 대가를 받아가겠다고.”
가뜩이나 핏대가 서 있던 샨의 눈이 불타올랐다.
아주 교묘한 술책이었다.
유리관은 시선을 끄는 속임수였다.
유리관을 보여 줌으로써 검 날을 쪼개 찻잔을 새로 만드는 동안 걸린 시간을 가리고, 훤히 보이는 장소에 검을 보관해 방심을 유도했다.
모두가 속아 넘어갔다.
“루가!”
분노한 샨이 성큼성큼 투이나의 어깨를 잡아챘다.
“뭐라고 말을 해 봐라! 정말 이따위 헛짓거리를 인정할 셈이냐? 그대가 원했던 게 이거냔 말이다!”
“루가 님한테서 손 떼십시오!”
“……틀린 말이 없어요.”
투이나가 그를 올려다보자 샨은 가시에 찔린 듯이 손아귀를 오므렸다.
정작 투이나는 어떤 식으로도 그를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샨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꺼림칙했다.
분명히 그녀도 예상치 못했던 게 틀림없는데, 기묘하리만큼 단호해 보였다.
투이나는 잔뜩 찌푸린 샨을 잠깐 쳐다보고는 베인에게 돌아갔다.
“베인의 말이 맞아요.”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투이나는 자신을 설득시키듯 반복적으로 말했다.
“베인이 다른 두 사람에게서 피를 보았으니 첫 번째 시험의 우승자는 베인 크로퍼드입니다.”
투이나가 선언했다.
지켜보던 신전 사람들 사이로 숨죽인 소란이 퍼져 나왔다.
아무도 베인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다.
투이나가 그와 결혼할 것이라 내기한 작자들까지 말이다.
딱 하나의 기쁨을 제외하면 오로지 혼란과 분노만 가득한 시선에 투이나는 발밑이 꺼지는 듯 했다.
* * *
다정한 품이 와락 투이나를 끌어안았다.
“이겼습니다!”
기쁨에 찬 나머지 베인은 평소의 수줍음도 잊어버렸다.
물론 지켜볼 사람이 없기도 했다.
시험 결과를 들은 샨은 미친 듯이 화를 내다 돌아갔고, 시드룬은 사제에게 치료받은 뒤 사라졌던 것이다.
투이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베인의 팔에 안긴 채 난장판으로 박살난 자리를 응시했다.
산산조각 난 유리관은 피를 흘리듯 붉은 벨벳 조각과 얽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죠?”
“루가 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했을 뿐입니다.”
베인이 아직도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투이나를 바짝 당겼다.
“검술로 이겼더라면 좋았겠지만 몸에 신을 담은 괴물과 마법을 부리는 술사를 당해내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베인에겐 적절한 환경과 계기가 있었다.
우선 시험에 쓰인 검을 제작할 수도 있을 만큼 규모가 있는 공방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다들 베인이 가진 장점에는 외모와 재산밖에 없다고 간과했지만, 그에게는 같은 아르힘에 산다는 위치적 이점이 있다.
왕과 마법사와 달리 유일하게 아르힘에 있는 시설물을 꿰고 있고, 이용까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시드룬의 검에 스쳐서 패배했을 때 베인은 검술이 아닌 방법으로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장 오늘의 계획을 만들어낸 것이다.
“불안한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루가 님, 이 영광된 승리는 모두 루가 님의 것입니다.”
베인은 기뻤다.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쓰는 게 아닌데도 가슴이 벅찼다.
상단을 위해서 일할 때도 미미한 성취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의 승리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저는 이기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는걸요.”
투이나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아직 기쁨의 여운에 잠겨 있던 베인은 그녀도 너무 놀랐나 싶어 두건 위로 깊게 입을 맞췄다.
“물론 기억합니다, 루가 님. 제게 부담을 덜어 주려 하신 말씀이지요. 상냥하신 분.”
베인이 감미롭게 중얼거렸다.
“허나 루가 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그녀가 반응이 없자 베인이 조심스럽게 몸을 떼었다.
그가 주저하며 무릎을 굽혔다.
“제가 이긴 게 싫으신가요?”
“어떻게 싫겠어요.”
그러나 투이나의 표정은 슬픈 쪽으로 일그러졌다.
“루가 님.”
베인은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혹여 어디 아프신 건가요?”
“아니요.”
투이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애써 기쁜 표정을 지어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평범한 시험이었다면 그의 승리를 축하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대로 남편감을 찾기 위한 결과였다면 베인의 승리에 축배까지 들 수 있었다.
다만 투이나가 원한 시험은 달랐다.
“잠시만……. 잠시만요, 베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투이나가 천천히 베인의 품에서 떨어졌다.
때리거나 밀친 게 아닌데도 베인은 그 순간 가슴을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당황해서 크게 떠진 베인의 눈이 투이나의 얼굴을 방황했다. 그러나 두건에 가린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낯선 사람처럼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났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곁에 있습니다.”
베인이 금방이라도 다시 껴안을 것처럼 다가갔다.
그러나 투이나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다시 껴안길 자신이 없었다. 그를 또다시 의심으로 엮어 넣을 자신이 없었다.
베인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생각을 정리하실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투이나가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베인이 옆에 있으면 당신을 빼고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러지 마십시오.”
베인이 울컥 대답했다.
“저를 빼지 않고 생각하시면 되잖습니까. 혹시 제가 뭐라도 잘못한 겁니까? 고치겠습니다, 루가 님. 뭐든.”
다급하게 말하던 베인이 번뜩 떠오른 생각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혹…… 제가 승리하길 바라지 않으셨던 겁니까?”
“…….”
투이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베인은 순간 심장이 불타는 듯했으나 억지로 짓밟았다.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계셨어도 괜찮습니다.”
베인이 타는 속을 감추며 억지로 웃었다.
“루가 님의 계획을 망쳤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충분히 자격이 있는 자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이 조금씩 격해졌다.
“저도 압니다. 왕이나 마법사는 강하지요. 하지만 보십시오. 제가 이겼습니다.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게, 그런 게 아니에요.”
투이나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는 베인을 진정시키듯 그의 뺨을 감쌌으나, 그녀의 손가락은 차가웠다.
“베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문제입니다.”
베인은 인형처럼 굳어 버렸다.
“모든 건 루가 님을 위해 한 일입니다.”
베인이 황금이 녹아내리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오직 당신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더는 견디기 힘들어진 투이나가 눈을 감았다.
“시험을 통과한 건 축하해요, 베인.”
투이나가 꺼질 듯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에 다시 봐요. 다음에. 다른 식으로…….”
그리고 투이나는 멀어졌다.
베인은 망연하게 서 있었다.
뿌리가 뽑힌 꽃처럼 내팽겨 쳐진 그가 단말마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는 원하지 않습니다.”
* * *
투이나는 정원을 나오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시종들이 무어라 소리쳤지만 투이나는 다리에 감기는 옷자락을 양 손으로 붙잡기 바빴다.
“제가 업고 달리면 더 빠릅니다.”
어느새 라카인이 옆에 와 있었다.
호위들이 바로 따라온 것이다.
투이나가 헐떡였다.
“혼자 있고 싶어요.”
“안전한 곳에 도달할 때까지 호위하겠습니다.”
라카인이 대답했다.
투이나는 복잡한 얼굴로 끄덕이고 말았다.
신전은 넓었다.
투이나는 이 시간에 비어 있을 만한 곳을 딱 하나 알고 있었다.
“하아……. 하…….”
투이나는 외진 곳에 지어진 관측소에서 전력 질주를 멈췄다.
검게 칠해진 목재 건물은 지붕이 둥글었고, 문과 벽은 궤짝처럼 조립된 형태였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제가 오래전에 지었지만, 그가 죽자 곧 쓸모를 다한 장소다.
성소에 있는 종탑과 비슷하게 좁고 높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곳.
투이나는 호흡을 고르며 적막한 고요 속에 잠긴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찰랑이는 액체가 그녀에게 내밀어졌다.
“드십시오.”
라카인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투이나는 굳이 어디서 났냐고 묻지 않았다. 혹사당한 목이 달게 물을 받아마셨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가볍게 투이나의 주변을 맴돌았다.
“신전에서 오래 지냈는데도 여긴 처음 와 봅니다.”
“저도요.”
투이나는 말없이 젖은 입술을 닦았다.
원래는 진정될 때까지 혼자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다.
다행히 달리는 동안 무겁게 덩치를 불려나가던 감정이 어느 정도 떨어져나갔다.
그걸 원해서 달렸으니 잘된 일이다.
정신이 한풀 가라앉자 호위들과 함께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혼란에 삼켜지지 않을 테니.
‘게다가 물어볼 것도 있잖아.’
투이나는 허리를 폈다.
“여긴 원래 별을 보기 위해 만들어졌대요.”
그녀가 오래된 문을 삐걱거리며 열었다.
“가끔 학생들이 밤에 찾아오지만 낮에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이런 곳이 있는 줄 전혀 몰랐어요.”
“저도 루가가 되던 해에 신전을 돌아보면서 처음 알았어요.”
“혼자 계시고 싶으시다면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괜찮아요.”
투이나가 문을 잡고 손짓했다.
“구경시켜 줄게요.”
호위들은 사양하지 않았다.
먼지와 함께 갇혀 있던 공기가 솨아아 쏟아져 나왔다.
관측소는 3층짜리 바닥을 약간만 남기고 전부 뚫어 버린 형태였다.
그 덕에 돔 중앙에 난 십자형 둥근 창문에서 바닥까지 곧장 빛이 내리쬐었다.
호루니가 반짝이며 떠다니는 먼지를 신기한 듯 손가락으로 따라갔고, 스카차는 벽면을 따라 오르는 서가를 둘러보았다.
라카인은 이곳에 누군가가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다.
“꼭 도서관 같군요.”
투이나는 신기하게 구경하는 호위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걱정만 없다면 평온한 풍경이다.
호위들이 그러는 동안 투이나는 오로지 베인만을 떠올렸다.
‘이기려고 할 줄 몰랐어.’
베인에게 시험을 이길 필요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얌전히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의 자존심이 자극받았던 걸까?
샨이 그를 비웃고, 무시하고, 얼굴만 예쁜 천한 상인 취급을 했기에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야말로 루가와 결혼할 자격이 있다고.
투이나가 얼굴을 파묻었다.
‘내 말만으로는 부족했던 거야.’
불안한 위치가 증명에 목마르게 했다.
샨이 오해하는 대로 루가가 정말 권위가 있었더라면, 베인이 바라는 대로 그에게 권위가 있었더라면.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그랬더라면 베인이 살인자를 찾는 시험에서 승리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
투이나가 손바닥에 숨을 내쉬었다.
다시 뛰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베인의 얼굴이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검술로 이긴 것도 아니잖아.’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정해 보았다.
‘베인은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아무것도 증명된 게 없어. 내가 찾으려 했던 건 그때처럼 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잖아.’
문제는 지혜도 능력이라는 점이다.
베인이 검술로 이기지 않은 건 아주 작은 위안일 뿐이다. 속임수를 써 가며 승리를 거머쥔 그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뿐,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루가 님.”
나직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투이나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라카인이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지셨습니다.”
“…….”
투이나는 멍하니 그를 보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라카인.”
“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하명하십시오.”
“제가 병에 걸렸다고 샨에게 말했나요?”
까만 풍뎅이처럼 매끄러운 라카인의 눈동자가 가만히 투이나를 응시했다.
그는 이미 확신하면서도 불안하게 믿으려 하는 주군을 향해 답했다.
“예.”
긴장이 탁 풀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투이나가 주춤하자 그가 팔뚝을 붙들었다. 그래도 되는지 약간은 의심하면서.
다행히 투이나는 그의 부축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냥 몹시 지쳐 보였다.
“왜요?”
“그것이 제게 주어진 명령이었습니다.”
투이나는 한참 동안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는 누가 쳐다보든 아무렇지도 않았던 라카인은 조금 속이 불편해졌다.
그 탓일까.
그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어렵사리 꺼냈다.
“저는 루가 님도 따릅니다. 루가 님께 바친 맹세도 진실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있군요. 샨에게는 신이 있으니까.”
“……예.”
라카인은 이상하게 엉키던 속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의 대답을 들은 투이나가 다시 생각에 잠겼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 한다는 작은 외침이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그는 이미 진실을 다 써 버려서 꺼내올 거짓말이 없었다.
관측소를 구경하던 호위들이 두 사람을 보고는 다시 돌아왔다.
“루가 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셨다.”
라카인은 자기도 모르게 답했다.
“내가 모하세스 님에게 루가 님의 비밀을 전했다는 사실을 아셨다.”
“뭐라고요?”
호루니와 스카차가 경악했다.
“그, 그런 신전의 비밀을……!”
“당신이 감히!”
스카차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배신자! 루가 님은 당신을 믿었는데!”
“당장 루가 님 옆에서 떨어져!”
라카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투이나가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 말아요.”
“루가 님!”
“그것 때문에 이렇게 충격받은 게 아니에요.”
투이나가 침착해 보이자 두 호위들이 주춤했다.
라카인은 투이나의 말에 온 신경이 쏠렸다.
“사람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서요. 그걸 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아서…….”
뭉개지던 투이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전 정말 베인이 그럴 줄은 몰랐어요!”
“……예?”
“크로퍼드요?”
당황한 호위들이 되물었다.
투이나는 울상이 된 얼굴을 주억거렸다.
당장 비밀을 넘긴 라카인을 족칠 준비를 하고 있던 호위들이 완전히 넋을 잃었다.
“어, 그, 라카인 문제는 넘어가시는 겁니까?”
“어차피 저도 샨을 의심하고 있었는걸요! 게다가 라카인이 샨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건 알잖아요.”
투이나가 양쪽 머리를 눌렀다.
“알면서도 믿으려고 했는데, 왜 새삼스럽게 배신감이 드는 건지. 샨을 거절하고 제 편이 되어 달라고 바란 것도 아니잖아요. 불가능하니까.”
“그으……. 그렇죠.”
“베인도 그래요. 그를 믿는데, 왜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의심스러워지는 거죠?”
투이나가 정신없이 주변을 서성였다.
엉거주춤 서 있던 호위들은 일단 투이나가 말을 다 쏟아낼 때까지 기다렸다.
“내 생각과 다르게 움직인다고 믿음이 변하다니. 아니,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행동했다고 의심스럽다니. 이게 뭐예요.”
투이나가 내내 짓누르던 머리에서 양손을 뗐다.
“그냥 믿고 싶은데……. 제가 불가능한 걸 바라는 걸까요?”
질문을 받은 호위들이 입을 벌렸다.
하지만 “어…….” 하는 소리만 간신히 새어나왔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자신에게 화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느라 그녀의 질문은 조금 늦게 이해했다.
물론 그녀가 실망하긴 했지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라카인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혹시 자신을 내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라카인의 입을 움직였다.
“기대를 하셨군요.”
“……맞아요. 기대했어요.”
투이나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믿음이 아니라 기대를 가진 것뿐일지도 몰라요.”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믿음은 대체 뭘까요? 어디까지 알아야 기대가 아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의심 없이?”
투이나가 조용해졌다.
라카인은 초조해졌다. 사붓이 젖어 가는 그녀의 눈이 금방이라도 모든 걸 포기할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게 자신의 잘못 같았다.
천 년이 흐른 것 같은 시간 후에 투이나가 속삭였다.
“……그래도 믿고 마는걸요.”
붉어진 눈이 라카인을 향하자 그는 가슴에서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은 어리석기 때문에 서로를 믿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가진 게 믿음이 아니라 기대라고 해도,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투이나는 그리움 앞에 눈을 감았다.
“사랑하니까요.”
그 순간 라카인은 전신의 피가 빠져나갔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피부를 찌르는 바늘이 신경을 따라 목구멍부터 심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기분이었다.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간신히 사람의 형상으로 서 있었지만 그는 죽음을 겪는 중이었다.
완전한 존재의 부정을 겪은 다음에야 그녀가 다시 그를 불렀다.
“당신은요?”
라카인은 아직 다 빠져나가지 않은 지독한 감정을 목구멍으로 통과시키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라카인은 다른 신을 믿잖아요. 단 한 번도 믿음을 의심한 적이 없었나요?”
“……의심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카인은 간신히 그 말만 뱉었다. 그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투이나는 가만히 손을 모았다.
“아르힘 님은 그분을 믿는다면 의심하라 하셨습니다.”
그녀는 기도하듯 꼭 잡은 두 손에 입술을 눌렀다.
“신께서는 사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은 사람의 것이죠. 부족하고 나약하고 질투해도 결국은 신을 사랑하기에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실패일까요?”
투이나는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닐 거예요. 그건 기대가 실패한 거죠. 그러니까 앞으로 더 많이 알아야 해요.”
투이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렸다.
“더 많이 알수록 믿음이 꺾이는 일은 사라지겠죠.”
기대하지 않기 위해서 당신을 아는 일은 슬프지만, 사랑한다면 믿음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리라.
“그러니까 당신도 괜찮아요, 라카인. 정말로요.”
“…….”
“내게 알려 주기만 해요.”
라카인은 가슴이 터질 듯이 먹먹해졌다.
이건……. 이 모든 게 정말 신이 선택한 자의 말이라고?
신은 단 한 번도 그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도저히 의심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라, 아르힘이 아니라 직접 찾아낸 빛처럼 느껴졌다.
꼭 당신이 전하는 복음 같다고.
그러나 그가 섬기는 자는 신이 아니었기에 라카인은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