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15/43)

15.

‘…그를 믿었다. 사랑하였다.’ 노래가 끝나고 신이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였으나…

“그대가 내가 했던 경고를 어겼다.”

샨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투이나가 한 행동에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왜 그랬나?”

“…….”

투이나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르파를 만났을 때 투이나의 몸은 한순간 다른 것에 지배당했다.

‘그게 아르파 신이었나? 말도 안 돼. 난 아르파 신을 믿지도 않는 데다가 시드룬의 마법도 있었잖아. 그렇다면 내 팔을 움직이던 그건 뭐였지?’

혼란스러웠다.

작은 벌레가 머리카락 사이에 끼어서 마구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

“좀 더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묻는 게 낫겠습니다.”

시드룬이 끼어들었다.

투이나는 그제야 이 자리에 시드룬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아직 붉은 하늘 아래 있었다.

아르파의 의식을 치렀던 들판은 부서진 통의 잔해만 남았고, 피는 사라지고 없었다.

투이나의 시선을 따라간 샨이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지평선이 그의 상체 너머로 사라졌다.

“의식은 끝났다.”

“왜 신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죠?”

“내가 붙잡았으니까.”

샨이 확 그녀의 몸을 잡아 틀었다.

“그대는 거의 죽을 뻔했어.”

투이나가 휙 흔들렸다.

‘또?’

투이나는 커진 눈을 힘겹게 감았다 떴다.

“……죽지 않았다니 다행이에요.”

“대신 목숨을 바친 자가 있었거든.”

샨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는 투이나의 얼굴이 급변하는 게 싫었다. 누구의 목숨인지 정확히 아는 반응이었으니.

“라카인!”

투이나가 샨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안 돼, 안 돼…….’

마지막에 손을 붙잡은 자가 누구인지 기억났다.

피가 차오르는 손가락을 붙잡고 대신 입을 벌렸던 자도.

투이나는 피가 역류하는 장면을 보았다.

“어디 있어요!”

투이나가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정물처럼 서 있는 시드룬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인들도, 메마른 땅에 울리는 기기괴괴한 바람도 그녀를 스쳐만 지나갔다.

라카인의 모습은 없었다.

‘여긴 몸을 숨길 곳도 없는데…….’

투이나는 숨이 턱 막혔다.

호위가 되어 달라 했지만 대신 죽어 달라고 부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반드시 날 살려 달라고 애원한 적도 없었다.

다만 원하는 것을 말하면 무엇이든 충실하게 따르는 그가…….

‘라카인이 불에 탔을 때 돌려보냈어야 했어.’

투이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옆에 남겠다는 이야기가 아무리 기뻤어도 억지로 돌려보냈어야 했어.’

샨이 아무리 잔인하게 굴어 걱정되었더라도, 고작 자신의 비밀 하나를 지켜달라고 붙들지 말아야 했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투이나는 곧 루가였다.

아무리 스스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해도 왕을 섬기던 자의 귀에는 루가의 말이 단순한 부탁으로 들렸을 리가 없다.

라카인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다.

투이나가 정신없이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샨이 뒤를 쫓아왔다.

그가 혀를 차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진정해라, 루가.”

“그럴 수 없어요!”

샨은 그녀가 차마 흘러내리지도 못하는 눈물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걸 보자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샨에게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제길, 장난이었단 말이다.”

“……네?”

샨이 시드룬에게 턱짓했다.

설마 그가 공범일 줄 몰랐던 투이나가 입을 딱 벌렸다.

마법진이 열리며 공중에서 라카인이 뚝 떨어졌다.

“…….”

몹시 곤혹스런 표정으로 한쪽 얼굴을 가린 라카인이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투이나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라카인!”

그녀가 달려오는 걸 본 라카인이 엉거주춤 일어나려다 풀썩 주저앉았다.

“루가 님.”

“괜찮아요?”

투이나가 다급히 붙들자마자 라카인은 소스라쳤다.

“보시면 아니 됩니다.”

“네?”

투이나는 그가 필사적으로 몸 한쪽을 감추려는 걸 알아차렸다.

커다란 왼쪽 손이 자꾸만 오른쪽 얼굴을 덮으려 들었다.

“……!”

투이나는 경악했다.

그토록 굳건하고 다부졌던 라카인의 몸 반쪽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굵은 뼈에 달라붙은 피부가 괴이했다.

말라비틀어진 팔에서 너무 큰 소매가 펄럭이는 걸 본 투이나는 세게 입 안쪽을 깨물었다.

“피를 좀 빨린 것뿐이야.”

성큼성큼 다가온 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아르힘에 돌아가면 낫게 만들 수 있잖나. 그대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눈앞이 아찔했다.

투이나는 계속 눈치를 보는 라카인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샨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투이나가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어떻게…… 이런 일로 장난을…….”

“저것이 먼저 요청한 일이다.”

샨이 어쩐지 변명하는 어조로 말했다.

“놀라 쓰러진 사람에게 저 꼴을 보이면 다시 기절할 게 빤하니. 마법사가 숨겨 달라는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다.”

시드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투이나는 그에게서도 배신감을 느꼈다.

기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배신감을 피해 갈 수 있는 건 라카인밖에 없었다.

투이나는 심지어 자기 자신한테마저도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모하세스 님의 말이 맞습니다.”

라카인이 조심스럽게 변호했다.

그는 이렇게 화제의 중심에 놓인 것이 몹시 불편해 보였다.

“생각이 짧았던 저의 요청으로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루가 님.”

그가 초조하게 사과했다.

투이나는 가닥가닥 신경이 끊긴 느낌이었지만 간신히 이성을 이었다.

“사과하지 말아요, 라카인.”

그녀가 억지로 표정을 다듬었다.

“우선 돌아가요. 사제님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잠깐만, 루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샨이 그녀를 제지했다.

“내게 더 설명할 일이 있을 텐데.”

“없어요.”

투이나가 차게 말했다.

그녀가 샨에게 이토록 매몰차게 대한 건 처음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계속 그녀를 조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투이나가 냉기가 흐르는 눈을 시드룬에게 돌렸다.

“마법진을 열어요, 시드룬.”

시드룬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더니 마법진을 열었다.

샨이 벌컥 화를 냈다.

“내가 그대에게 설명할 게 있다고 해도 갈 건가?”

샨은 해명하려는 순간마저도 성질을 부렸다.

예의를 벗어던진 모습에 기시감을 느낀 투이나가 멈춰 섰다.

‘내가 여기서 샨을 외면하면 그는 다시 전처럼 돌아갈까?’

샨에겐 여전히 검이 있었다.

투이나는 검이 배를 가로질러 가슴을 찌르던 장면을 생각하고 라카인을 보았다.

투이나는 라카인을 부축했다.

“걸을 수 있겠어요?”

“……예.”

라카인은 감히 샨을 바로 보지 못했다.

이미 두 주군 사이에서 시달린 그를 위해 투이나가 곧장 마법진을 빠져나갔다.

시드룬은 따라오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안에 남은 사람들 때문에 넘어오지 못했다.

스르륵 마법진이 닫혔다.

신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제가 다가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왜 루가 님만……. 허억!”

흉측한 라카인의 모습에 사제가 비명을 삼켰다.

투이나가 얼른 양손으로 그를 감쌌다.

“사제님!”

“예? 아, 네!”

있는 힘껏 그를 부축하던 투이나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정신을 차린 사제들이 그를 떠맡았다.

사제들이 기도를 읊는 사이 투이나는 바짝 오그라든 그의 뺨이 조용히 숨을 죽이는 걸 알아차렸다.

한참 만에 라카인의 살갗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시 부푸는 살에 안도한 투이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아……. 다행이에요.”

“의식이 뭔가 잘못된 겁니까?”

“루가 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사제들이 두 사람을 힐끗거렸다.

“전 무사해요.”

투이나의 목이 잠겼다.

저 때문에 다친 사람을 옆에 두고 괜찮다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라카인은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이제 괜찮습니다.”

“더 치료받아요.”

투이나가 그를 말렸다.

라카인은 즉각 명령에 따랐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계속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투이나가 한숨을 삼켰다.

“치료 정말 감사합니다. 허나 아직 상태가 걱정스러워서 그러는데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둘이서만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잠깐이면 돼요.”

이 와중에도 라카인을 의심하는 그들이 피곤해진 투이나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녀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사제들이 멀리까지 물러났다.

라카인은 자른 자세로 앉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모하세스 님을 원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샨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투이나는 이 와중에 그를 변호하려는 라카인의 태도가 더욱 가슴 아팠다.

“신에게 피가 필요한 건 이해해요. 그의 나라이니 방식이 다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가끔은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

“모하세스 님이 과격하신 점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라카인이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허나 아르파 님은 강하고 잔혹하신 터라 강대한 힘에 걸맞은 피를 요구하십니다. 사람의 몸으로 신을 담기는 어려운 터라, 주기적으로 피를 보지 않으면 점점 더 충동이 강해져 결국은 이성을 잃어버리시게 되지요.”

“그게…… 정말인가요?”

“예.”

‘그럼 샨이 과거에 점점 미쳐 가던 것도, 난동을 부리며 피를 보다가 죽이기까지 했던 일이 다…….’

샨이 광기를 보이던 시절, 그의 거처에서 몰래 시체가 실려 나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가 그렇게 하인을 많이 데려온 것도 사실은 주기적으로 아르파에게 인간을 바치는 걸 감추려 그랬다는 얘기까지 돌 정도였다.

샨은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뒤섞여 투이나의 머리를 때렸다.

잔물결에 무너진 모래성처럼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저는, 신전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잔인하다 하여 제사를 금했다니.”

“허나 루가 님이 의식을 허가해 주셨습니다.”

라카인이 얼른 투이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투이나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이 했던 잘못이기 때문이다.

“오늘 의식을 치르셨으니 한동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멈출 수는 없겠죠?”

“예.”

라카인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투이나는 자괴감이 들었다.

“아까 의식을 치를 때 아르파 신께서 자신은 강림하는 신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군요. 항상 샨의 안에서 피를 기다리는 신이라니.”

충격을 가라앉히느라 투이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라카인을 조금 늦게 발견했다.

감정 표현을 아끼는 편인 그가 거의 경악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가 님?”

“샨이 아르파 신과 함께 왔을 때요. 그때 들렸던 이야기 말이에요.”

“신과 대화하셨단 말씀입니까?”

투이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네. 라카인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라카인이 벅찬 숨을 눌렀다.

“아무도 듣지 못합니다.”

“네?”

투이나는 반문했다.

“그럴 리가요. 샨이 바로 앞에 있었잖아요. 심지어 아르파 신의 목소리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들리겠던걸요.”

“역사상 단 한 번도 아르파 님께서 말씀하는 걸 들은 자가 없습니다. 아르파 님의 몸은 모하세스 님이 대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카인이 대담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르파 님에겐 말할 입이 없습니다. 들을 귀가 없습니다. 다만 왕에게 내린 기적으로써 임하시니 신이 깃들지 못한 피는 존재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라카인의 목소리에서 성급한 선망이 번져 나왔다.

“루가 님이 대화할 수 있는 신은 아르힘만이 아니셨던 겁니까?”

“모르겠어요.”

당황한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나타난 신을 본 건 아르힘 님 말고 처음이야.’

공식적인 행사에서 다른 나라의 신관이나 대리인들은 만난 적이 있지만 실제로 신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를 만난 적은 없었다.

루가가 된 기간이 아직 짧았기 때문이다.

“과연 루가 님은 신의 짝이 되실 만한 분이군요.”

라카인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눈높이를 맞춰 앉은 투이나가 새삼스럽게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곳보다 훨씬 고귀한 장소에 자리가 마련된 사람이 틀림없었다.

“아니, 그렇게까진…….”

투이나가 이마를 쓸어내렸다.

이러다가 괜히 샨과 결혼할 거란 기대감만 커질 판이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당분간 이 얘기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요.”

무심코 말하던 투이나가 흠칫 입을 가렸다.

“아니, 아니에요. 더 이상 라카인에게 비밀을 맡기는 일은 그만둬야죠.”

“루가 님의 비밀은 지켜질 것입니다.”

라카인이 재빨리 대답하자 투이나가 쓰게 웃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라카인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다른 거예요.”

투이나는 라카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방금 전에 자신이 믿는 신에게 죽을 뻔하고도 신성한 사건에 눈을 빛내는 그를 보니 더더욱 결심이 굳어졌다.

라카인은 처음부터 투이나를 보호할 존재가 아니었다.

“당신에게 받았던 자유를 이제 되돌려주고자 합니다.”

투이나가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 * *

베인은 마법진이 닫힌 자리에서 투이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아르파의 의식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데다 부산스럽게 오가는 사제들이 그를 은근히 신경 썼기 때문이다.

“저어……. 루가 님을 기다리시는 거라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 이만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베인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

사제는 기다림을 구실로 그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지 근처에서 얼쩡거렸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부유한 자산.

누이는 그가 잊을 만하면 미모와 재산이 편리한 만큼 영리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녀가 귀띔해 주지 않아도 베인은 자신이 가진 장점을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정직하기만 해도 사람들이 저절로 호감을 가졌으니까.

그저 사랑하기만 하면 사랑이 돌아오는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긴장한 건 루가의 신랑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였다.

아르힘에게 감사 기도를 올린 뒤 신전으로 가져갈 짐을 꾸릴 때 베인은 막막했다.

「루가 님은 뭘 좋아하지?」

신전으로 들어가서 자신과 판이하게 다른 구혼자들을 보았을 때도 그는 긴장했다.

알고 보니 그가 가진 장점은 얼마든지 더 큰 힘에 밀려날 수 있는 거였다.

일국의 왕과 전쟁을 쥐락펴락할 만한 힘을 가진 마법사 옆에서 미모와 금붙이 몇 개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베인은 자신을 맞아 주는 투이나 앞에서 어떤 희망적인 가능성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았다.

베인은 기대를 버리려고 애쓰면서도 은근히 가슴이 설레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눈이 부신 흰 베일을 걸친 투이나는 너무도 쉽게 웃어 주었다.

기뻤다.

순간 안심했기에 더더욱 베인은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걸 놓칠 수가 없었다.

베인은 구혼 기간 내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만남을 거듭할수록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분명히 호감이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녀가 루가이기에 아르힘을 믿는 신도에게 주는 일반적인 호감일지도 몰랐다.

결혼하기엔 한참 부족한 애정이다.

고민하던 그는 급한 나머지 레오나에게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다.

「동생아, 내가 늘 말하지만 네 미모에 넘어오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좀 적극적으로 써먹어 봐라.」

그 조언이 일생일대의 실수라는 게 곧 밝혀지긴 했지만.

「루가 님이 다른 놈들처럼 가만히 있어도 널 침대로 끌어당길 분이시니? 쯧쯧. 유혹을 받을 줄만 알았지 할 줄을 모르면 무슨 소용이냐.」

베인은 낯이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받았던 요구들을 투이나에게도 똑같이 하란 말인가?

그가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보이자 누이는 억지로 단추까지 뜯어 가며 설득했다.

「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내가 장담하는데, 네가 이렇게 나오는데도 루가 님이 반응하지 않으면 바로 구혼자 자리 때려치워. 가망 없다는 소리다.」

그 말에 괜히 가슴 깊숙한 곳부터 울컥하고 말았다.

베인은 목에 잠긴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투이나가 놀란 얼굴로 그 부근을 움켜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다음에 이어진 장면들도.

베인이 뺨을 옅게 붉혔다.

갑자기 그의 주위만 해사하게 밝아지는 듯해 지나가던 사제들의 가슴이 괜히 벌렁거렸다.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들은 지금 연인이다.

베인은 뜨거운 액체를 삼킨 듯이 전신에 열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비밀스러운 기쁨이 그를 채웠다.

이렇게 빨리 다가갈 수 있다니.

평생이라도 그녀를 기다려도 좋았는데.

사실 마냥 좋지는 않았겠지.

“…….”

바람이 그를 부풀리고 지나갔다. 베인은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단정하게 소매를 누르면서도 그는 바람이 남기고 간 걱정을 잊지 못했다.

이제 겨우 봄이다.

투이나의 마음은 겨울에 결정된다.

한 계절 동안 머무른다고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 되려면 일 년 동안 마음이 식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보여야만 했다.

그러니 구혼자도 아닌 상대에게까지 질투하는 이 마음은 영원히 밝히지 않겠다.

베인은 마법진 안으로 투이나와 함께 사라지던 사람들의 잔상을 지우기 위해서 등을 돌렸다.

계속 이곳에 있으면 자꾸만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이 떠올랐다. 추하게 일그러지려는 마음도.

베인은 거처로 돌아갔다.

자신에게 제일 먼저 돌아오겠다는 투이나의 말을 믿었으니까.

믿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자주 편지와 선물을 보내면 부담스러워 하시니…….”

의자 등받이에 길게 목을 기댄 베인이 눈을 감았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상단에서는 계속 편지가 날아왔다.

귀금속이나 비단 등 귀한 물건이면 무조건 먼저 그에게 보여 주기로 되어 있었다.

베인은 물건을 하나씩 고르면서 그걸 받은 투이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뭘 걸쳐도 어울리지 않는 게 없어서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누이는 베인이 상단에서 일하는 몫이 있으니 얼마든지 주문하라고 했지만 그는 까다롭게 물건을 골랐다.

시간을 들여 투이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강한 인상을 주고 싶었다.

“……?”

그때 베인이 서류더미에 섞인 봉투를 발견했다. 상단에서 쓰는 것과 다른 재질이었다.

베인은 무엇인지 짐작하면서도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겉면에 적힌 이름을 읽기도 전에 확신했다.

연서였다.

그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보내는 사람이 있다니.”

연애편지야 예전에도 많이 받았지만 설마 신전에 들어오고 난 뒤에도 보낼 줄은 몰랐다.

자신은 이미 루가의 사람이건만.

불쾌해진 베인이 편지를 찢었다.

정확하게 절반으로 나뉜 종이를 구기려던 그가 멈칫했다.

연서라면 분명 구구절절한 표현과 시로 가득할 것이다. 어쩌면 몇 개는 마음을 울릴 만큼 좋은 게 들어 있을 지도 모르고.

투이나에게 보낼 편지를 꾸밀 때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베인은 몹시 갈등했다.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을 그대로 가져다가 투이나에게 보내고 싶진 않았지만, 확실히 그는 연서를 보내 본 경험이 적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또 서투른 문장을 보내긴 싫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편지를 노려보던 베인이 머뭇거리며 반으로 찢긴 종이를 펼쳤다.

“베인!”

“……!”

머리칼이 쭈뼛 설 만큼 놀란 베인이 벌떡 일어섰다.

투이나의 목소리였다.

설마 아르파의 의식이 끝난 날 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던 베인이 허둥거렸다.

베인이 다급하게 서류 틈으로 찢긴 연서를 쑤셔 넣었다.

꼭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사람 같았다.

베인이 서둘러 투이나를 향해 돌아섰지만 이미 그녀의 눈엔 약간의 의아함이 생겨나 있었다.

“일하고 있었는데 제가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루가 님!”

베인이 얼른 부정했다.

서류를 움켜쥔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발 그녀가 정확한 이유는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라며 베인이 종이 뭉치를 한쪽으로 밀어 버렸다.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투이나가 선뜻 말한 내용이 또 너무 좋아서 그는 바보처럼 웃으려는 입술을 억눌렀다.

평소처럼 보기 좋은 미소라는 확신이 든 뒤에야 그는 투이나를 향해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정말로 제게 돌아오셔서 너무나 기쁩니다. 가신 일은 잘 끝내셨습니까.”

“…….”

투이나는 애매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환대에 기뻐하면서도 어딘가 지쳐 보였다.

“잘……이라고는 못 하겠네요.”

투이나의 말을 듣자마자 베인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투이나가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댔다.

그게 또 좋아서, 베인은 가만가만히 그녀를 소파로 이끌었다.

그녀가 얌전히 따라오며 눈을 감았다.

“실은 힘들어서 위로해 달라고 찾아온 거예요. 베인이 자꾸만 생각이 났어요. 힘들 때가 아니라 좋은 일로 만나러 왔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루가 님.”

오히려 당신이 힘들 때 찾아오는 게 더 좋다고 말하면 이상해 보일까.

베인은 살짝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뭐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뭐든…….”

투이나가 입 속으로 작은 단어를 굴렸다.

하찮게 넘길 수 있는 말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인지.

투이나가 말할 결심을 내리는 동안 베인은 차분히 기다렸다.

마침내 투이나가 그를 향해 눈을 맞춰 왔다.

“오늘 제가 살아남는 길 하나를 포기했어요.”

* * *

“여기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돌려보내 줄게요. 곧장 샨에게 돌아가도 좋아요. 어디든 라카인이 원하는 쪽으로 보내 주고 싶어요.”

라카인은 자유를 돌려주겠다는 말에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격을 받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투이나에게 그저 알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할 만큼.

“……알겠습니다.”

투이나는 그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라카인을 내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 말에 라카인의 고개가 곧장 들렸다.

“고작 제 비밀을 지키자고 다른 사람을 붙잡아 놓는 게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깨달았을 뿐이에요. 그리고 라카인이 목숨을 바치기도 원하지 않아요.”

이미 한번 죽었던 몸이다.

쉽게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대신 죽는 건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한 목숨으로 다른 한 목숨의 대가를 치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른 호위들은 라카인처럼 쉽게 자기 목숨을 내놓진 않을 것이다.

라카인만이 자신보다 더 귀한 사람의 존재를 믿었다.

스스로를 낮게 보도록.

라카인이 가만히 쥔 손을 바르작거렸다.

“제가 미덥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지금까지 라카인이 몇 번이나 제 목숨을 살려 줬는지 신전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진 라카인이 샨의 거처에 있는 것보다 제 곁에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투이나가 쓸쓸하게 말했다.

“샨은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니 적어도 저와 있으면 안전할 거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제 옆에서 라카인은 계속 위험해지기만 했네요.”

“주군을 지키는 것은 호위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호위를 뽑아서는 안 됐던 겁니다.”

투이나가 단호해지자 라카인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안색을 살피는 게 느껴져서 투이나는 어쩐지 힘이 풀렸다.

“……호위는 스스로와 저를 지킬 수 있는 분들이면 충분해요.”

“충분하지 못합니다.”

잠깐 멈칫했던 라카인이 강경하게 말했다.

“자신을 위하는 순간 남을 위하는 마음에는 부족함이 생기고, 이는 방심이 되어 결국 목적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목숨은 수단일 뿐. 제 삶에 주어진 목적을 수행하게 해 주십시오.”

투이나는 한참 동안 라카인을 응시했다.

그는 진심이었고, 아마 정말로 그런 삶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제 목숨이 또 다른 사람의 목적에 쓰이기로 되어 있다면요?”

“……!”

그가 동요하는 걸 알면서도 투이나는 거듭 속삭였다.

“그게 신이면 어떡하죠?”

당신의 신 아르파면?

투이나는 단단하던 라카인의 껍질에 금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동요가 유독 컸기에, 투이나도 무심히 짐작했다.

‘라카인도 샨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샨이 홧김에 죽이든 미리 어떤 계획을 세웠든, 그가 투이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주변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높게 쳤다.

당연히 라카인도 의심해 보았겠지.

새삼스럽게 확인받은 투이나는 아르파의 의식에서 샨이 노려보던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다.

깨진 암석 사이로 시퍼렇게 흐르던 광물 같은 눈빛.

샨의 잔상을 떨치기 위해 투이나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언제나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린다면 너무 아깝지 않겠어요?”

“…….”

“그러니까 원하는 곳으로 돌아가요. 아르힘이나 아르파가 아닌 다른 나라라도 좋으니까. 명령이 아니라…… 그냥 생각만이라도요.”

긴 이야기를 마친 투이나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녀가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전부였다.

대화가 끝나자 라카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말했다.

“저는 계속 루가 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카인이 대답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무리 봐도 제대로 고민하고 대답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쉽게 바뀔 수는 없겠지.’

어쨌든 라카인이 직접 밝힌 뜻이니 무작정 반대할 수도 없었다. 투이나는 더 강요하지 않았다.

“돌아간 다음에도 샨이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땐 더 이상 말리지 않을게요. 그때는 누구보다도 빨리 도망쳐서 제게 오셔야 합니다.”

라카인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서 그가 안 보였군요.”

이야기를 전해들은 베인이 말했다.

한자리에 앉아 있던 베인과 투이나가 호위를 서던 호루니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다시 혼자 호위를 맡게 된 그녀는 많이 어색해 보였다.

라카인을 보내겠다는 결정을 전하자 호루니는 안타까워했고, 스카차는 좋은 결정을 내리셨다고 말했다.

스카차가 종종 그가 떠나온 아르파 신과 왕을 그리워하는 티가 났다고 말해 투이나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은근히 라카인과 정이 들었는지 세 사람은 많이 아쉬워했다.

베인이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잘하신 겁니다. 그도 바뀔 수도 없는 신앙으로 다른 신을 섬기느라 고생이 많았겠지요.”

“그랬겠죠?”

투이나가 의도한 것보다 쓸쓸하게 말했는지 베인이 살짝 그녀를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그를 많이 의지하셨군요.”

“훨씬 많이요. 그래서 더 미안해요.”

투이나가 그의 품에 안긴 채 중얼거렸다.

라카인이 아무 짐도 없이 인사하던 장면에 아직도 마음이 쓰였다.

‘무사하겠지.’

샨이 아무렇게나 살육을 즐기는 인간이 아니라고 라카인이 직접 말해 주었다.

투이나는 두 사람 다 믿기로 했다.

“루가 님이 불안해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베인이 듣기 좋은 미려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루가 님을 모시던 자였으니 신전의 내밀한 일이 새어나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투이나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음, 라카인이 말했다면 다른 사람이 알아도 괜찮은 이야기겠죠. 라카인은 왠지 항상 그런 느낌이었어요. 잘 이야기도 하질 않아서. 게다가 스스로 원한 일도 아니었잖아요.”

베인이 묘한 눈으로 투이나를 응시했다.

“부럽습니다. 루가 님이 그렇게 믿어 주는 자라니.”

투이나가 까르륵 웃었다.

“전 베인도 믿는걸요?”

“하지만 저는 지켜 드릴 루가 님의 비밀이 없으니…….”

베인이 아쉬운 티를 내며 은근히 목을 울렸다.

투이나가 키득거리며 이마를 맞댔다.

“제 비밀을 원하시나요?”

“남들이 모르는 루가 님을 알고 싶습니다.”

“이미 알고 있잖아요.”

투이나가 그의 목에 팔을 걸고 살짝 입 맞췄다. 베인은 얼른 그녀를 따라 입술을 돌리면서도 갈증이 나는 듯했다.

선연하게 다가오는 눈으로 그가 속삭였다.

“그래도 욕심이 나는군요.”

투이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살해당했다는 것, 되살아났다는 것.

사실은 병에 걸린 피부를 나을 때까지 계속 감추고 있다는 것. 지금까지도.

솔직해지고 싶은 욕망과 그에게만큼은 가장 마지막에 알리고 싶은 욕망이 거세게 부딪쳤다.

‘조금만 더…….’

투이나는 얼룩을 가진 자신이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모르진 않았다.

흉측한 것.

그녀는 베인이 경악하며 자신을 미워할 거라 여기진 않았다. 그를 믿었다. 상냥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반드시 놀라긴 할 것이다.

‘비밀이 밝혀지면 언제나 사람들이 따라오잖아.’

샨이 거세게 화낼 거라는 것도, 시드룬은 신경 쓰지 않으리란 것도, 베인이 당황하리라는 것도 그저 비밀이 알려진 뒤의 반응일 뿐이다.

‘다만 반응을 보기 전에 조금만 더 애정에 집중하고 싶어. 그럼 버티기가 더 쉬울 테니까.’

투이나는 따듯한 베인의 체온을 껴안았다.

그가 있기에 라카인도 쉽게 보낼 수 있었다.

애정을 확인받으면 마음이 단단해졌다.

“비밀은 만든 사람이 감당해야죠.”

투이나는 이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 한 발짝 두려워만 하는 자신에서 멀어진 것 같았다.

베인도 정말 코앞에서 부드럽게 눈을 감는 투이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루가 님.”

“네?”

베인이 조심스럽게 투이나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대신 얇은 천이 그의 손가락에 감겼다.

“그렇다면 제가 대신 목숨을 바치는 것도 싫으십니까?”

투이나의 머리가 곧장 떨어졌다.

서로 놀란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싫어요.”

베인은 뜻밖에도 단호한 그녀의 표정에 살짝 당황했다.

“농담이었습니다……만…… 루가 님께 싫다는 말을 직접 들으니 생각보다 충격이 크군요.”

“베인은 살아 줬으면 해요.”

투이나는 더없이 진지했다.

베인은 평소보다 깊어진 그녀의 눈동자에 바로 자세를 바꾸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잘못했습니다.”

베인이 무작정 말하자 투이나는 금세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그게 무슨 잘못이에요.”

“웃을 수 없는 농담을 했으니까요?”

베인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저렇게 빙그레하며 예의 바르게 농담을 하는 모습이 그리웠다.

마음이 가벼워진 투이나가 말했다.

“아까 제가 살아남는 길 하나를 포기했다고 말했었죠.”

“기억합니다.”

베인이 곧장 염려하는 표정이 되자 투이나가 그를 안심시키듯 머리를 기댔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이제 살아남는 길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겠다는 뜻이었어요. 삶을 남겨 두는 것보다…… 가고 싶어서요.”

살아 주길 바라는 베인이 미약하게 눈썹을 모았다.

투이나는 호루니에게 부탁해 바깥에 두었던 상자를 가져왔다.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베인은 낯선 궤짝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저건 모하세스에게 주셨던 것이로군요.”

“맞아요.”

투이나는 다소 놀랐다.

‘그때 거리가 꽤 있었는데 자세히 보고 있었구나.’

베인이 궤짝을 열자 똑같이 만들어진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쯤 시드룬에게도 검이 도착했을 것이다. 마법진이 열리는 곳에서 사제들에게 전달을 부탁했으니까.

투이나는 앞으로 시작할 일을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는 구혼자와 함께 작은 시험을 치르고자 합니다.”

유려한 빛이 흐르는 칼날에 베인이 반사되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단정했지만 검을 누르는 손길이 불안정하게 비쳤다.

투이나도 그처럼 불안했다.

베인과 일찍 연인이 되었다는 행복은 살인자가 나타날 미래에 그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눌려 버렸다.

‘라카인을 보내는 일도 어려웠는데 베인은 상상할 수도 없어.’

자꾸만 터지는 사고에 베인까지 위험해지리라는 생각이 들자 위기감에 불이 붙었다.

‘완전히 안심하려면 과거의 살인자만큼은 반드시 찾아내야 해.’

그걸 위한 시험이다.

투이나는 말없이 검을 만지작거리는 그를 응시했다.

“베인에게는 꼭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말해 주고 싶었어요.”

“……기쁩니다.”

베인이 희게 웃었다.

눈이 부셨다.

“시험이 시작되더라도 딱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베인.”

투이나는 그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말을 매듭지었다.

“우리는 이미 연인이라는 것을.”

* * *

뾰족한 천막의 끝이 하늘을 찌를 듯이 튀어나왔다.

미적지근한 공기에 반항이라도 하듯 넓게 펼친 천이 약간의 바람도 탐욕스럽게 갈취해대며 펄럭거렸다.

샨의 거처로 돌아간 라카인은 아르파의 의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하인들이 돌아와 있던 것이다.

“…….”

“…….”

하인들은 혼자서 걸어가는 라카인을 잠깐 흘긋거리고는 원래 할 일로 돌아갔다.

아마 투이나가 보내서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라카인 또한 자신이 복귀한다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샨을 찾던 라카인이 지나가던 이를 붙잡았다.

“모하세스 님은 어디 계시지.”

“……주군은 옥중 거처에 계신다.”

하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자 라카인이 짧게 인사하고 이동했다.

샨의 거처에는 죄인을 처벌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아르힘의 신전 안이지만 미로 같은 천막으로 둘러싸 섣부른 접근을 막았다.

샨이 몸소 그곳까지 간 것은 처음이었다.

라카인이 도착했을 때 샨은 텅 빈 감옥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샨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루가가 무슨 일이지.”

“저 혼자입니다.”

라카인이 무릎을 꿇었다.

샨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잘됐군. 지금 루가를 봤다간 곧장 저곳에 처넣고 말테니까.”

라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것 같은 감옥을 보던 라카인은 샨이 다시 말을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서.”

“제 신변을 주군께 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덤덤한 말투에 비로소 샨의 고개가 돌아갔다.

화산처럼 굳은 미간이 폭발하듯 씰룩거렸다.

“루가가 이젠 하인조차도 받기 싫다더냐? 내가 준 건 곁에 두기도 꺼림칙하다?”

끝으로 갈수록 짓씹듯이 단어가 터져 나왔다.

이미 그의 노여움을 받고 있던 감옥의 자물쇠가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

라카인은 신중하게 투이나를 변호했다.

“다른 이유입니다.”

투이나가 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샨이 코웃음을 쳤다.

“말만 번지르르하군. 결국 제 손에 굴러들어온 목숨 하나도 건사하지 못하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풋내기가 따로 없어.”

샨이 딱 잘라 말했다.

라카인은 그 말에 반박이 움트는 머릿속에 놀랐다.

투이나의 입으로 들었을 때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가 주려던 건 왕의 보호와 분명히 달랐지만.

라카인은 그저 자신이 말재주가 없어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탓이라고 판단했다.

다행히 샨은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확실히 충분하게 피를 본 효과가 있었다.

“새로 가져온 정보는 있나?”

“…….”

라카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그동안 감시를 피해 샨에게 투이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왕이 원하는 건 간추린 정보였다.

예를 들면 그녀의 인간관계, 약점, 주목할 부분, 그리고 신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등등이다.

심지어 보고할 때 샨과 만날 필요도 없었다.

하인들은 아르힘에 오기 전에 약속된 기호를 나눴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해독하는 법이 다른 암호였다.

신전에서 투이나를 호위하는 동안 라카인은 흔적을 남겼고, 그걸 취합한 왕의 그림자들이 샨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샨은 신전에 있는 성소의 위치와 투이나가 신과 만나는 주기, 구혼자를 만난 횟수, 매수가 가능한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그러니 라카인은 준비된 첩자가 아니었다.

만약 투이나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면 죽게 되어 있었다.

모든 일은 아르힘에 오기 전에 내려진 명령일 뿐.

주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하인의 의무였다.

라카인이 원칙대로 답했다.

“의식이 끝난 후 이뤄진 대화는 이것뿐입니다.”

“…….”

진실 된 대답에도 샨은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심통이 난 턱으로 중얼거렸다.

“나가자마자 날 잊어버렸군.”

라카인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라카인을 치료한 뒤에도 투이나는 몇 번이나 샨을 언급했다.

비록 설득하려는 목적이긴 했지만.

아무튼.

‘보고를 정확하게 드리지 않았나?’

라카인이 기억을 돌이켰다. 별 소용은 없었지만.

라카인은 왕이 그녀를 원하는 방식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샨 스스로도 파악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만약 샨이 투이나에게 바라는 마음을 라카인이 정확하게 알았다면 투이나가 베인과 입을 맞추며 했던 온갖 다정한 일도 보고했을 것이다.

왕의 핏줄은 보다 완전한 신의 강림을 위해 강한 상대를 만날 것을 권장했다.

때문에 아르파인들은 연애를 얼마나 하든지 흠이 되지 않았다.

상대를 파악해야 하니.

물론 라카인은 샨보다 먼저 베인을 택한 투이나가 신경 쓰이긴 했다.

하지만 구혼 기간이 아직 한참이나 남은 데다 마지막엔 당연히 샨을 택할 것이니 자잘한 연애 놀음은 보고를 생략했다.

샨이 손바닥으로 손잡이 끝에 무게추가 달린 부분을 굴렸다.

투이나가 준 선물을 그는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루가가 내게 시험이 있을 거라 알려 왔다.”

샨이 여전히 감옥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야 탐색이 끝났는지 본격적으로 구혼자들을 시험해 남편감을 정하겠다는군. 심지어 검을 지참해서 말이야.”

처음 듣는 얘기였다.

라카인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자 샨이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몰랐나?”

“송구합니다.”

“쓸모없는 것.”

왕의 일갈에 라카인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분명 투이나가 검을 주문하는 것도, 무언가 쓰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그는 이유 모를 상실감을 느꼈다.

주군이 내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자책보다는 다시 투이나에게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에 가까웠다.

그녀에 대해서 더 잘 알 수도 있었을 텐데. 원하기만 했다면 투이나는 들어주었을 것이다.

뒤늦은 미련이 라카인을 혼란스럽게 했다.

“루가에게 병이 있다고 했었지.”

불쑥 샨이 말했다.

라카인은 즉시 정신을 차렸다.

“그렇습니다.”

“보고만으로는 무슨 병인지 제대로 알 수 없더군. 치명적인가?”

“그렇다고 들었으나 신전은 루가 님에 한해 곧 나을 거라고 여깁니다. 평소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없으며,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도 아르힘의 힘으로 금세 상태가 호전되었습니다.”

“하긴 고작해야 피부병이니.”

불치병이라는 어감이 찜찜하긴 했지만 신이 붙어서 관리하는 인간이 쉽게 죽을 성싶진 않았다.

라카인은 샨이 투이나를 평범한 환자 취급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화장을 지운 투이나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괴함이 서려 있었다.

온갖 고통과 상처를 본 그가 고작 회색 얼룩 하나에 놀란 이유도 순간 오싹하리만큼 낯설었기 때문이다.

죽어 있어야 할 목숨이 살아서 숨 쉬는 듯했다.

하지만 샨은 신에 가까운 존재이자 무수한 죽음을 밟아 온 자였다.

라카인은 되살아난 산양의 시체에도 놀라지 않았던 왕의 모습을 믿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병에 걸린 투이나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샨이 불만스럽게 뇌까렸다.

“내게만 감춘 비밀도 아니니 모른 척해 줄 수도 있다. 대가는 따로 치러야겠지만.”

샨은 감옥을 곁눈질했다.

“……굳이 신전에 반대해 가며 내 기분을 맞춰 주려고 하는 성의를 무시하기엔 아깝군.”

이상하게 화가 나면서도 은근히 마음이 느긋했다.

껍질의 양면처럼 감정의 한쪽이 갈라지면 다른 쪽이 드러났다.

투이나가 손 안의 새처럼 얌전히 굴지 않고 멋대로 하는 게 짜증스럽긴 해도 어쨌든 자신에게 매인 꼴이 나쁘지 않았다.

일부러 능글맞은 척 굴 때마다 넘어가 주겠다, 하고 외치는 그녀의 태도도 흥미로웠고 말이다.

샨은 짐승 같은 예민함으로 투이나가 무언가 중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음을 감지해냈다.

지금까지 선심을 쓰듯 드러냈던 비밀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약점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람은 행동으로 말하는 법이지.”

그녀가 설명한 루가라는 위치로 볼 때 투이나는 아직 신전과 직접적인 마찰을 벌여 가며 일을 벌일 위치가 아니었다.

샨은 원래 침략할 때 남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 쓰지 않았다. 다 죽인 다음 정복하면 그만이니까.

다만 아르힘에는 장기간 체류해야 하니 미리 정보를 좀 습득해 두었다.

아르힘은 자신처럼 뛰어난 통치자가 없는 까닭인지 성가시게 서로를 견제하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그래서 루가라는 지고한 직위가 나타난 뒤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반발이 들어오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투이나가 권위를 휘두르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 컸다.

그 점은 차차 고쳐 주면 될 것이니.

샨은 투이나가 왕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저절로 마음을 열고 배움을 청하리라 확신했다.

“보상을 하나 준비해야겠군.”

마음에 썩 들진 않지만 어쨌든 투이나가 제사 준비도 도왔고, 장난이 과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물론 반성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투이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볼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약점을 드러낼 때까지 꿀과 식초를 번갈아 줘 보리라.

마음 같아선 감옥에나 던져 놓고 가둬 두고 싶지만.

샨이 결국 사납게 입꼬리를 올렸다.

“루가에게 시험을 기대한다고 전해라. 선물은 내가 알아서 전달하겠다.”

샨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명령했기에 라카인이 주저하며 정정했다.

“……저는 주군께 돌아왔습니다.”

“아, 그래. 루가가 널 내쳤지.”

샨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에 라카인이 움찔했다.

투이나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비밀을 생각해 보면 저 같은 하인들이 캐오는 병 같은 자잘한 정보는 하찮기만 했다.

샨이 무심히 명령했다.

“알아서 원래 임무로 복귀하라.”

“알겠습니다.”

라카인이 일어섰다.

어쩐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뼈가 절단 나는 부상을 입었을 때도 저리지 않던 무릎이었다.

이제 다시는 주군의 얼굴을 볼 수 없겠지.

라카인은 자꾸만 무거워지는 몸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분명 샨에게 돌아와 기뻤지만 라카인이 투이나에게 충성을 바친 것도 사실이었다.

샨의 명령에 위배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녀의 마지막 명령도 따라야 하지 않나?

가슴 깊은 곳까지 바짝 마르는 기분으로 라카인이 소리를 냈다.

“주군.”

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인이 허락 없이 말하는 건 투이나 옆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라카인은 위험을 무릅썼다.

“제가 임무에 실패한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샨이 당연한 질문을 하는 라카인에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니면 알량한 목숨을 보전할 정보라도 캐내었나?”

“아닙니다.”

한결같은 샨의 반응에 라카인은 그동안 쌓아 두고 있던 둑 하나를 무너트렸다.

확신하면서도 일부러 의심하여 얻어낸 믿음이 터져 나왔다.

라카인은 충실하게 답했다.

“저는 주군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 * *

라카인이 돌아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반가움을 숨기지 못한 투이나가 그를 보고 뛰어나왔다.

헐레벌떡 쫓아온 건 호루니와 스카차도 마찬가지였다.

라카인은 열렬한 반응에 놀란 눈치였지만 곧 여느 때처럼 침착하게 말했다.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마냥 기뻐하던 투이나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라카인에게 말한 건 부탁이었지만, 요점은 같았다.

샨이 라카인을 죽이려고 들 때만 돌아오라고 했으니.

“결국 그렇게 되었나요…….”

투이나는 서글퍼지는 감정을 갈무리했다.

라카인은 말없이 투이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로 보내 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라카인이 돌아와서 기쁜 것도 사실이다.

고작 하루를 비웠어도 사람의 빈자리는 티가 났다.

“잘 돌아왔어요.”

투이나는 그냥 라카인을 한번 안아 주었다. 목석처럼 서 있던 라카인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하고 말았다.

“그동안 별 탈 없으셨습니까.”

“문제없었어요.”

라카인이 호루니와 스카차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들이 얼결에 목례로 답했다.

투이나가 호위들을 잡아끌었다.

“모처럼 돌아왔는데 바깥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요! 뭐라도 좀 마실까요?”

“루가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호루니랑 스카차는요?”

“예? 네에.”

“좋습니다.”

투이나가 빙그레 웃으며 들어갔다.

얌전히 따라가는 라카인을 본 스카차의 표정이 묘했다.

호루니가 그를 불렀다.

“안 들어가?”

“나 사실 라카인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문턱에 발을 올리던 호루니가 그를 돌아보았다. 스카차는 괜한 얘기를 꺼냈나 싶었는지 말이 길어졌다.

“루가 님의 뜻이랑 다른 거 알아.”

“지금 얘기하는 걸 보니까 이젠 아닌 모양이네.”

“돌아왔잖아.”

스카차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쨌든 같이 지낸 시간이 있으니. 더 이상 루가 님 옆에 있어서 알아낼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여기서 다치기만 죽어라 다쳤는데 돌아온 걸 보면 정말 루가 님에게 진심인 거겠지.”

“…….”

아랫입술을 물어 당기던 호루니가 말했다.

“……그렇게 의심했으면서 지금 라카인이 돌아온 것도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어?”

“예전에는 첩자였다면 이젠 루가 님의 신뢰를 얻었으니 더 위험한 일을 맡겼을지도 모르잖아.”

“그건…….”

선뜻 대답하지 못한 스카차가 우물거렸다.

호루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난 루가 님이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아.”

호루니가 열성적으로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무조건 믿어.”

“…….”

호루니가 투이나를 얼마나 따르는지 아는 터라 스카차는 그저 목덜미를 긁적였다.

“나라고 좋아서 그러겠냐.”

“알아.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자.”

호루니는 표정을 풀었다.

“루가 님이 기다리고 계셔.”

* * *

라카인의 깜짝 귀환은 물이 스미듯 자연스럽게 복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일이 얼마나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했는지 라카인이 샨의 거처에 갔다 온 걸 모르는 자들도 많았다.

“분부하신 대로 세 사람 모두에게 검이 전달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제에게서 일정표를 받아 들며 투이나가 인사했다.

사제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라카인을 힐긋 바라보았다.

“저, 그런데 호위 하나를 내보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보시다시피.”

투이나가 빙긋 웃으며 라카인을 팔로 가리켰다.

부드러운 동작에 라카인이 고개를 들자 사제가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아, 제가 뭘 착각했나 보군요.”

“흠, 흠, 집중하세요.”

헛기침을 한 다른 사제가 다시 오늘의 의제로 돌아왔다.

“내일 의회를 통해서 루가 님이 구혼자들에게 시험을 내린다는 사실이 온 나라에 전달될 겁니다.”

“시험의 내용은 정말 저희에게도 밝히지 않으실 겁니까?”

“네.”

투이나가 비스듬히 종이를 넘겼다.

그녀의 요청으로 다시 짜인 일정표였다.

개인 만남이 줄어들고 세 사람을 한자리에서 보는 일정이 늘었다.

공식적으로 베인과 단둘이 만날 기회가 줄어드는 건 아쉬웠지만, 그녀는 결혼하면 평생 볼 거란 생각으로 달랬다.

게다가 시드룬의 연구를 도우러 밤에 움직일 시간도 필요하니 수면 시간 확보를 위해서라도 줄여야 했다.

샨은 어찌 됐든 피 문제로 자주 볼 수밖에 없을 것 같고.

꼼꼼하게 과거의 기억과 대조해 보던 투이나는 새 일정에 만족했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어요.”

밝게 말하며 일정표를 내리던 투이나가 갸웃했다.

사제들이 하나같이 그녀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던 것이다.

“왜들 그러세요?”

“정말 아르힘 님이 루가 님을 통해서 저희를 시험하고 계신 게 아닌가요?”

“아르힘 님께 더 큰 목적이 있어서 구혼자를 불러 모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갑자기 시험이라면……. 아르힘 님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왁왁 질문이 터져 나왔다.

그들 치고는 오래 참은 거다.

‘갑자기 미안해지네.’

아르힘 얘기만 나왔다 하면 사제들은 안달을 냈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아 투이나가 아르힘과 대화한 모든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을 때도 사제들의 실망은 대단했다.

신의 전달자 역할은 나름대로 편리하긴 했지만, 지금 같은 오해는 정정해야 마땅했다.

“아르힘 님은 이번 일이랑 아무 상관이 없으십니다. 제가 혼자 구혼자들을 시험해 보려는 것뿐이에요.”

“루가 님이요?”

사제의 말꼬리가 미심쩍게 올라갔다.

그녀를 의심할 셈이 아니라, 투이나의 성격을 알기에 하는 소리였다.

“저희는 시간을 들여서 남편감을 고르실 줄 알았습니다.”

“개인적인 과정도 중요하지만 시험처럼 공개된 일로 다른 분들의 판단을 모아 보려고 해요.”

“그렇다면 더더욱 저희가 도와야지요.”

“다들 바쁘시잖아요. 도와주시면 감사히 받겠지만요.”

투이나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녀는 순수한 의도였지만 지난번의 피를 뽑는 일로 사제들이 괜히 찔려 했다.

“뭐어……. 사소한 일들이야 당연히 많지만, 이런 중차대한 일마저 저희가 빠질 수는 없지요.”

“설마 의회에 자문을 구하시진 않으셨죠?”

“그러진 않을 거예요.”

투이나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번 일은 저 혼자 결정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책임으로만 돌아올 테니까.”

그녀의 말에 담긴 비장함에 사제들이 긴장했다.

* * *

긴장의 이유는 금세 밝혀졌다.

투이나는 구혼자를 모아두고 말했다.

“시험은 세 번 치러질 겁니다.”

구혼자 세 사람은 예식 때 사용하는 둥근 신전 안에서 저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가져오라고 부탁했던 검을 두 사람은 적당히 옆에 두었는데, 베인만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투이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는 신중하게 검을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첫 번째 시험은 무예입니다.”

샨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투이나는 그가 사고치기 전에 재빨리 준비했던 조건을 달았다.

“당연히 상대방을 죽이면 추방이겠죠? 승리 조건은 다른 두 사람 모두를 검으로만 이길 것. 승리의 원칙은 상대방에게서 피를 보거나 졌다는 선언을 받아내면 됩니다.”

투이나가 옆에서 꼿꼿한 자세로 기다리던 사제를 소개했다.

“시험을 치르는 동안 두르발 사제님이 일정마다 동행하여 혹시 모를 부상을 치료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영광된 시험의 자리에 동참하게 되어 기쁩니다.”

두르발이 짧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투이나가 치를 시험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나서 준 사제였다.

“바꿔 말하면 사제님이 없는 자리에서 공격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투이나는 이미 사제들에게 한번 강조했던 내용을 다시금 불러왔다.

“이 시험은 어디까지나 제 독단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오해는 말아 주세요. 구혼이 시작되고 여러분을 만나는 동안 즐거웠어요.”

투이나의 시선이 베인에게 잠깐 머물렀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분이 보여 주신 일을 보니, 보다 명징한 증거를 갖고 싶어졌습니다.”

투이나는 하고많은 말들 중 택한 단어를 고요히 퍼지도록 두었다.

“여러분이 치를 시험은 제가 남편감을 결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칠 거예요.”

곧장 분위기가 바뀌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본인이 의도한 일이었지만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들이 진정한 시험의 목적을 모르기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랐다.

남편감이 아니라 살인자를 찾는 시험.

‘우선은 확인부터 하자.’

투이나는 가장 마음에 걸리던 베인의 검술 실력부터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의심으로 얼룩진 미래를 이번 한 번으로 시원하게 빨아 버릴 셈이다.

물론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면 이런 일로는 부족할 터라 일부러 시험의 횟수를 넉넉하게 두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시험으로 만들면 되겠지.’

투이나는 옛날이야기를 좋아했다.

결혼하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려운 시험을 내고, 아무도 풀지 못하는 문제에 답을 찾아낸 자가 승리하는 이야기는 천 일 밤 동안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또한 미래의 일을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투이나에게 좋은 해결책까지 되어 주었다.

‘아르힘 님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위험한 일은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투이나는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신전에 피를 뿌리는 일에 대한 죄책감도 함께 기도에 동봉했다.

‘죄송해요, 아르힘 님……. 그들의 아픔을 제 것처럼 여기고 감내하겠습니다.’

비록 시험이라고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부상을 입을 구혼자들이 걱정스러웠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송곳니를 드러내는 샨을 보니 더더욱.

“과연. 직접 시험해 보겠다는 결정이 훨씬 내 성미에 맞는군.”

“그래요?”

투이나의 안색이 약간 나아졌다.

사실 샨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장 걱정했다.

다행스럽게도 샨은 이 시험을 투이나가 건네는 일종의 선물처럼 여기는 듯했다.

하긴 무예야말로 샨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이니.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샨의 입 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생각보다 너무…… 좋아하는걸?’

불길한 예감은 은빛 섬광이 되었다.

“아앗!”

“꺄아악!”

갑자기 움직인 샨에 놀란 시종들이 비명을 질렀다.

저도 모르게 소리친 투이나가 혀를 깨물었다.

“베인!”

챙!

간발의 차이로 샨의 검을 막아낸 베인이 이를 악물었다.

카가가각.

짓눌린 쇠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흐음?”

한 손으로 그를 누르고 있던 샨이 버겁게 검을 움켜쥔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베인이 장갑을 끼고 있었음에도 악력에 눌린 날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비죽거린 샨이 소리쳤다.

“이봐, 루가, 꼭 내 검에 피를 묻혀야 승리를 인정하는 건가?”

오만한 질문에 베인이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눈빛이 변한 그가 양쪽으로 잡고 있던 검의 방향을 틀었다.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베인에게 시험의 내용을 미리 알려 주면서도 투이나는 그가 공격에 성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믿지 못한 게 아니라 바라지 않은 것에 가깝다.

시험의 목적을 생각하면 최소한으로 빨리 다치고 끝냈으면 했다.

그랬기에 투이나는 검을 쥔 베인이 긴장하는 걸 보고서도 싸울 결심을 했으리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이길 필요가 없는 시험이에요.」

그녀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베인에게 먼저 알려 주는 것도 걱정이 되어서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사제님이 계신다지만, 크게 다치지는 말아요.」

그때 베인이 어떻게 반응했더라?

온화한 얼굴로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대답했었지.

지금 베인은 피를 흘리며 검을 세우고 있었다.

‘어째서?’

투이나는 결과가 뻔한 싸움에 뱃속이 졸아들었다.

“루가!”

샨이 다그쳤다.

샨은 베인이 검을 그쪽으로 향하든 말든 하나도 신경 쓰질 않았다. 언제 공격하든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베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

샨이 소리쳤다.

피를 본 이상 샨의 승리를 인정하려던 투이나가 머뭇거렸다.

멀리서 베인이 작게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그가 원하기에.

“……자신의 무기에 묻은 상대의 피만 인정할게요.”

“좋다!”

호탕하게 소리친 샨이 곧장 어깨를 비틀었다.

그러나 베인이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남의 일처럼 앉아 있던 시드룬이 펄쩍 뒤로 물러났다.

세차게 떨어진 검이 바닥에 부딪쳐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친 검은 미처 따라가지 못한 옷자락을 길게 찢었다.

“호오! 반사 신경은 있군, 마법사!”

“…….”

검을 응시한 시드룬은 다시 느릿한 모양으로 말했다.

“시험을 치를 때는 마법을 써도 됩니까?”

“쓰세요!”

투이나가 얼른 소리쳤다.

바로 코앞에 있는 검에도 태평하니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했다.

눈썹을 으쓱한 시드룬이 곧장 마법진을 열었다.

관대하게도 기다려 준 샨이 그가 사라지자마자 곧장 달려들었다.

“하하하!”

광소하며 달려드는 샨을 본 시드룬이 번쩍 하고 사라졌다. 그러고는 신전 기둥에 다시 나타났다.

천장에 발을 걸친 시드룬을 본 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던졌다.

“꺄악!”

두 번째 비명이 터졌다.

시드룬이 정확하게 배에 꽂힌 검을 내려다보았다.

두르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 당장 치료하게 내려오십시오!”

“어떡해!”

“소란 떨지 마라.”

샨이 이죽거렸다.

“이미 본 적 있는 마법이니까.”

맞는 말이지만 천장에서 검에 찔린 마법사의 모습은 상당히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피가 안 나서 다행이야. 그럼 보기에 더 무서웠을 텐데.’

시드룬이 무감한 표정으로 배에 꽂혀 있던 검을 도로 바닥에 떨어트렸다.

손을 대지 않아도 검이 저절로 미끄러져 나왔다.

샨은 떨어진 검이 바닥에 닿기 전에 다리를 뻗어 걷어냈다.

가벼운 발동작으로 검이 다시 그의 손에 쥐어졌다.

“자아, 저건 반칙 아닌가?”

샨이 씩 웃으며 투이나를 돌아보았다.

난감해진 투이나가 그를 불렀다.

“시드룬?”

“말하십시오.”

“음……. 모든 공격이 그런 식으로 통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팔과 다리 정도라면 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시드룬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거기에 머리도 들어갈 테지?”

“그렇습니다.”

‘저런 얘기까지 받아 줄 필요는 없는데.’

능청스럽게 말하는 샨이 위험해 보여서 투이나가 급히 덧붙였다.

“잊지 않았죠? 치명적인 공격은 안 됩니다.”

“알겠다. 알았어.”

샨이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어차피 쉽게 죽을 것 같지도 않군.”

시드룬은 가만히 매달린 자세로 천천히 마법진을 열었다. 여차하면 바로 들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샨은 어느 쪽 팔다리를 노릴지 가늠하는 것처럼 어깨를 돌렸다.

지켜보던 투이나가 긴장한 찰나, 이번에도 지켜보는 이의 예상이 빗나갔다.

“읏!”

샨의 공격이 옆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도 베인이 받아쳤지만 좀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샨이 멈추질 않았던 것이다.

검을 던지는 속도로 달려간 그가 한 번 후려치자 베인의 몸이 통째로 밀려났다.

“형편없군!”

샨이 소리쳤다.

그는 먹이를 문 짐승처럼 눈을 빛냈다.

베인이 간신히 몇 번 받아쳤지만 곧 힘에 부치기 시작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제발…….’

투이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베인은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실력이나 힘이 너무 부족했다.

즉,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투이나의 몸을 단숨에 꿰뚫는 게 가능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랬다면 한 번은 반격했을 거야.’

보면 볼수록 베인의 결백함은 확실해졌다. 그것이야말로 투이나가 원하던 시험의 결말이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베인의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제발, 제발……. 빨리 끝나라.’

오랫동안 검을 놓았던 베인의 검 끝이 금세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더 샨의 공격을 받아내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샨이 빨리 피를 봤으면 좋겠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샨은 베인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마치 베인이 한심하게 검을 놓칠 때까지 몰아붙이려는 것 같았다. 여유롭게 투이나를 바라보며 검을 휘둘렀으니까.

베인도 그걸 아는지 절대로 검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안절부절못하던 투이나에게 보여 주듯이 드디어 베인에게 상처가 핏, 아로새겨졌다.

“샨!”

다급히 승자를 외치며 싸움을 끝내려던 투이나에게 라카인이 살짝 앞으로 나섰다.

“아직 아닙니다.”

“네?”

“모하세스 님의 검은 깨끗합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투이나가 정신없이 날뛰는 검을 좇았다.

그의 말대로 샨의 검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럼 베인이 흘린 피는?’

샨의 검이 교묘하게 베인의 검을 비틀었다.

방향을 바꾼 검 날은 원망스럽게도 주인을 배신하고 상처를 남겼다.

자신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베인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

“계속할 텐가?”

샨이 비릿하게 말했다.

이미 자잘한 상처를 입은 베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샨이 투이나를 향해 비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지겹군.”

그때까지 장난을 치듯 움직이던 그의 팔에서 근육이 불거졌다. 단숨에 힘에 눌린 베인의 검이 꺾였다.

‘끝이다.’

투이나가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베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손잡이에서 떨어진 그의 손이 재빨리 크로스가드 쪽으로 돌아갔다. 쥐는 방법을 바꾼 그가 넝쿨 모양 크로스가드를 붙잡고 샨을 찔렀다.

“……!”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베인의 공격은 성공했다.

“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샨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투이나는 자리에서 거의 뛰쳐나오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샨은 다 이긴 싸움이 불쾌해졌다.

처음으로 베인이 공격에 성공했으나 샨은 옆구리에 검을 끼워 누르는 동작 하나로 간단하게 막아냈다.

마지막 수까지 막혀 버린 베인이 땀에 젖은 얼굴로 내뱉었다.

“……졌습니다.”

샨은 당연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미 베인의 팔뚝에 그의 검이 들어가 있었으니.

다급하게 달려오는 투이나를 본 샨은 은은하던 불쾌함이 더 강해지는 걸 느꼈다.

냉담해진 샨이 근육까지 상하도록 검을 찔러 넣자 베인이 이를 악물었다.

고결하던 쇠 칼날에 녹슨 냄새가 비릿하게 퍼져 나갔다.

“그만하세요! 승부는 이미 났습니다.”

투이나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험악한 분위기에 사제가 빠르게 입 속으로 기도를 중얼거렸다.

“윽…….”

“검 뽑으세요, 샨.”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걸 참으며 투이나가 말했다.

샨은 삐딱한 얼굴로 그녀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내가 이겼다, 루가.”

“네?”

“승리자에겐 대가를 줘야지?”

검을 놓은 샨이 투이나의 두건 끝을 매만졌다. 그는 단순히 금전적 보상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보다 내밀한 샨의 눈빛에 투이나가 흠칫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손에서 두건을 탁 빼 버린 투이나가 몇 걸음 떨어졌다.

“샨이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건 아닙니다. 시드룬이 남았어요.”

샨이 천장에 붙은 시드룬을 돌아보았다.

샨과 베인이 싸울 동안 내내 완벽하게 구경만 하던 시드룬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한심한 작태에 샨이 콧방귀를 뀌었다.

“저건 놔둬도 이기게 생겼군.”

“아직은 아니잖아요.”

투이나가 베인을 흘긋거렸다.

사제가 기도하기 바쁜 사이에 베인은 제 손으로 팔에 박힌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저절로 투이나의 음성에 질책이 섞였다.

“제 입으로 시험을 치른다고는 하였지만 정말 이렇게 대책 없이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검도 가져왔고 설명도 끝났는데 뭘 더 기다리지?”

“상대방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죠.”

투이나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말했다.

“신께서 그러하듯이 스스로가 강할수록 여유가 있지 않겠어요?”

샨의 미간에 금이 갔다.

짜증은 나는데 강하다고 해 주니 마음에는 들어서 곧장 반박하기가 싫었다.

그 틈을 타 치료가 끝난 베인이 입을 열었다.

“보기 힘든 꼴을 보여 드렸군요.”

“아니에요. 오늘 정말로 고생했어요, 베인.”

더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삼키며 투이나가 그를 꼭 잡았다.

베인도 비슷하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보란 듯이 패배한 자신이 민망하기도 하고, 땀에 젖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겐 언제나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투이나가 활짝 격려하는 웃음을 보내자 베인은 검에 찔리지도 않은 뱃속이 욱신거렸다.

두 사람의 사이가 비밀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낯선 사람들처럼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될 텐데.

왕과도 같은 힘이 있었다면 굳이 다른 구혼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연인이라 선언할 텐데.

패배와 뒤섞인 불만족이 그의 뱃속에 질척하게 엉겨 붙었다.

“그럼 다음 승부는 언제입니까?”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말해 주세요, 시드룬.”

놀란 투이나가 베인을 놓았다.

두 사람의 싸움이 끝나자 시드룬이 천장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베인은 말없이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인기척은 어떻게 냅니까?”

“음……. 보통은 기침을 하거나 그냥 발소리라도 내죠.”

“뭘 그걸 설명하고 있나.”

“아무튼 새로운 일정표가 준비되었습니다. 시험이 치러지는 동안은 만날 때마다 평가할 수 있겠죠.”

투이나가 흘깃 샨을 돌아보았다.

“물론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공격하기 전에 미리 경고한다면 더 좋겠네요.”

“대비하는 것도 무예의 일부다.”

위풍당당한 샨의 대답에 투이나는 권고를 포기했다.

때마침 시드룬이 말했다.

“싸움이 끝났다면 상담할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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