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살해한 구혼자 4권 14. (14/43)

나를 살해한 구혼자 4권

14.

‘그는 영광을 줍기만 하면 되었노라. 다시 해가 뜰 때 남은 자는 모두…’

황금을 약속하는 수호신은 항상 인기가 많다.

사람들의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금빛을 그대로 닮은 베인이 옛 수호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르힘에 소금 호수가 있는 것처럼 아르피기아에는 다섯 개의 강이 만나는 위치가 있었습니다.”

대륙을 관통하여 흐르는 다섯 개의 큰 강은 유일하게 수호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다.

수호신의 땅을 통하면 일일이 나라의 관습을 따져야 해서 무척이나 번거로웠다.

“아르피기아는 탐내는 자가 많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땅이 좁아 많은 군대를 양성할 수 없었던 아르피기아는 문을 걸어 잠그는 대신 적극적으로 외부인을 받아들였습니다.”

베인은 각국에서 화려한 배를 타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그들은 도망자가 아니었다. 피난민도 아니었다.

평화와 휴식을 찾아 돈주머니를 싸들고 온 그들은 마음껏 일상을 사 들였다.

“수호신 아르피기아는 재물과 번영을 축복하는 신입니다. 워낙 유명하기에 아르피기아를 믿지 않는 사람도 축복을 받으러 몰려들었죠.”

“아르힘 님에게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 같네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아르힘 님과 달리 아르피기아는 기도를 제물로 받지 않았습니다.”

돈.

오로지 돈만이 아르피기아의 신앙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집안은 제법 신실한 편이었습니다.”

베인이 멋쩍게 말했다.

제법 돈을 퍼부었다는 소리다.

‘레오나가 왜 이렇게 신전에 재산을 쏟아붓는지 드디어 알겠다.’

고향에서부터 지닌 습관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수완이 좋았기에 상단은 번창했습니다. 게다가 다른 아르피기아 사람들처럼 나쁜 습관도 없었죠.”

“나쁜 습관이라면?”

“도박입니다.”

베인의 눈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르피기아는 재물만 많이 바친다면 자신의 나라 안에서 어떤 죄악을 저지르든 용서해 주곤 했습니다.”

베인이 씁쓸하게 말했다.

“수호신은 원래 눈 먼 새와도 같아 불러 주는 이가 없으면 아무리 높은 하늘을 날아도 내려앉지 못한다고들 말합니다.”

“너희들은 나의 앞잡이이며 등에 진 짐이 이미 무거우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지 않는다면 짐이 죄 많은 네 머리 위로 쏟아지리라.”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성서의 구절을 읊었다.

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간을 통해서만 존재를 증명하는 수호신이 신도들에게 성실할 것을 맹세시키는 문구이지요.”

“유일하게 아르힘 님만이 그러한 제약에서 벗어나 있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축복을 받지 못한 아르피기아는 자신의 눈을 부패한 제사장에게 맡기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끔찍했겠군요.”

“아르피기아가 주는 축복이 몹시 유명했기에 그 끝은 더욱 곪아 버렸습니다.”

베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제사장은 사람들에게 독특한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두고 도박을 할 권리였지요.”

“도박을 할 권리라니…….”

“죄인들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받거나, 도박으로 무죄를 따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승부를 걸었다가 지면 원래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가벼운 벌을 받는 것보다 도박을 하는 걸 더 좋아했습니다.”

“정말요? 하지만 죄를 지었다면 왜 벌을 받는 걸 피하죠? 더더군다나 지면 훨씬 힘든 벌을 받을지도 모르잖아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베인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올곧은 투이나의 목소리를 갈구하는 듯했다.

“잘못을 했어도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싶었던 겁니다.”

“…….”

“가끔씩 생각해 봅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꼭 그래야만 했는지. 제사장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보다 신께 정직했더라면…… 어쩌면 멸망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베인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져서 투이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꽉 붙잡았다.

베인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꾹 마주 잡았다.

‘그는 나라를 판돈으로 건 제사장을 아직도 원망하고 있을까?’

안타까운 나머지 투이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르피기아가 멸망했을 때 베인이 몇 살이었죠?”

“열다섯이었습니다.”

베인이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르힘에는 그전부터 방문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다섯 살 때부터였지요.”

“가족 중에 누가 자주 아팠나요?”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셨습니다. 치료를 받으면 좋아지곤 했지만, 이상하게도 또 바로 병에 걸리는 체질이셨습니다. 제가 열 살이 될 무렵부터는 아예 아르힘에 집을 구해 살다시피 하셨지요.”

“그게 지금의 크로퍼드 상단이 머무는 자리군요.”

“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베인이 기쁜지 희미하게 입술을 들어 올렸다.

“아르피기아가 멸망할 때도 저희 가족은 아르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더는 미룰 수 없어 돌아가려 할 때쯤 돌아갈 나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투이나의 가슴이 둔탁하게 내려앉았다.

한순간에 나라를 잃어버린 그가 너무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했기에.

투이나는 그만 그를 당겨 안았다.

원래라면 투이나의 힘에 끌려올 리가 없지만, 그는 즉시 소파를 짚고 있던 팔에 힘을 풀고 그녀의 품으로 쓰러졌다.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연약한 어깨를 보며 베인은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대신 투이나의 어깨만 애끓는 마음으로 그러쥐었다.

베인은 두건 사이로 표정을 감췄다.

투이나가 부드럽게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이 소름 끼치도록 좋았기 때문이다.

“……위로해 주시는 겁니까?”

귀에 울리는 베인의 음성이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잠깐 손을 멈췄던 투이나가 그를 다독였다.

“힘들면 더 얘기할 필요 없어요, 베인. 충분히 들었어요.”

“이미 제겐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을 염려해 주시는 루가 님이 기쁘다고 한다면…… 화를 내실 겁니까?”

은근히 물어보는 말에 그를 껴안은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투이나가 속삭였다.

“전 베인한테는 영영 화를 못 낼 거예요.”

투이나가 농담처럼 들리도록 말했다. 진심이었으니까.

베인이 쿡쿡 작게 웃었다. 그의 숨이 귓가에서 흩어졌다.

“루가 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화를 내셔도 좋습니다.”

“좀, 베인. 좋은 일만 좋아해 봐요.”

“루가 님의 일인데 제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베인이 방긋 웃었다.

투이나가 못 말리겠다는 듯 떨어졌다. 베인은 아쉬워했다.

“아무튼 아르피기아의 멸망은 다른 나라에서도 상당한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신앙심을 걸고 도박을 한 곳은 없었으니까요.”

투이나도 들어 본 적 있었다.

“믿음을 돈으로 살 수 있느냐는 그 유명한 사건이군요. 신전에도 관련된 책이 있습니다.”

“사제님들이 연구할 만한 일이지요. 신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신전에서는 아르피기아가 동의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놓고도 싸우곤 해요. 사라진 수호신이니 이젠 알 수 없게 됐지만요.”

“확실한 건 그 제사장이 아니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점입니다. 제사장은 홀린 것처럼 도박을 승낙했고, 결국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패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한 나라의 파멸이었다.

“제사장이 패배한 직후 아르피기아에 있던 자들은 모두 신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땅을 축복하던 힘이 사라지고, 갑자기 강이 범람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물이 모두 쓸려가 버렸습니다. ……사람마저도.”

베인은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옛 이야기를 말하는 듯했다.

그는 그때의 파멸을 생생하게 전달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있었고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중얼거렸다.

“저는 가끔씩 아르힘 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살아서 루가 님을 만날 수 없었다는 걸 몇 번이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베인이 투이나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몇 번이나요.”

투이나는 울고 싶어졌다.

‘나도 그래요. 나 또한…….’

불현듯 베인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더 없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다시 그를 보고, 만지고, 느끼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뻔한 시간을 반복할 수 있다니.

죽음은 영원히 나뉘는 것.

누가 단 한 번의 삶이 죽음에 꿰뚫려 영영 둘로 나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되살아난 뒤로 투이나의 삶은 둘이 되었다.

삶을 사랑하는 부분.

죽음을 두려워하는 부분.

그녀는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죽음을 두려워 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두려워하게 되자 사랑은 더욱 격렬해졌다.

베인은 투이나의 얼굴에 떠오른 강렬한 감정의 일렁임을 보고 몹시 동요했다.

“왜……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당신을 사랑해서요.’

“……좋아서요.”

‘지난 생에 받은 애정을 또 한번 주려는 당신이 사랑스러워서요.’

투이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연인이 되었다고 무작정 감정을 쏟아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으니.

투이나가 다시 다정한 목소리를 불러왔다.

“분명 힘든 이야기일 텐데 제게 직접 이야기해 줘서 기뻐요, 베인. 저 또한 당신이 아르힘에 같이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투이나는 죽기 전에는 듣지 못했던 베인의 이야기에 깊이 감동했다.

베인은 그녀의 말에 들뜨면서도 한순간 드러난 투이나의 표정에 마음 한구석을 빼앗기고 말았다.

“무슨 이야기라도 털어놓을 것입니다. 루가 님만 들어주신다면…….”

“비밀을 원하는 게 아닌걸요.”

투이나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베인은 그냥 옆에만 있어도 좋아요.”

투이나는 진심이었지만 베인은 이유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진 것을 쏟아붓는 나쁜 버릇은 그의 누이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직 그 스스로 깨닫지는 못했지만.

“참! 오늘은 저도 꽃을 가져왔어요!”

투이나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넘겨 베인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활짝 웃으며 직접 따 온 꽃무리를 건네는 투이나가 너무도 빛이 났기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꽃을 받아 들었다.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베인의 목소리가 반쯤 잠겨들었다.

그가 순전히 선물에 감탄했다고 생각한 투이나가 쑥스러워했다.

“그동안 매일 지나가다 조금씩 열리는 꽃봉오리를 보고 베인 생각이 났어요.”

“저를 생각해 주셨습니까?”

산뜻한 향에 잠겨 있던 베인이 고개를 들었다.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늘 베인 생각만 한다니까요.”

같은 농담을 반복하면 진심이나 마찬가지다.

투이나는 이제 베인을 눈앞에 뒀다고 굳이 진심이 아닌 척도 하지 않았다.

‘너무 좋아.’

투이나가 온 마음을 뿜어내며 웃어 버리자 베인도 덩달아 화사해졌다.

“감사합니다, 루가 님.”

해사한 얼굴이 어찌나 완벽한지 영원히 그림으로 남겨 두고 싶을 정도였다.

‘역시 미남에게는 꽃이 어울려.’

베인을 보고 있으면 그에게 검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곧 그를 시험해야 한다는 사실도.

잠깐의 휴식은 꿈결처럼 사라져 버렸다.

베인의 거처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게 방금 전 같은데, 어느새 투이나는 끝없는 서류와 시종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사르트 의원이 보낸 항의서입니다.”

“줌비아 의원이 보낸 알현 신청서입니다.”

“단체 성명서도 도착했습니다.”

“실레느 의원이 보낸 편지입니다.”

“다음 신전 회의의 날짜를 당겨 달라는 요청입니다.”

“사제님들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투이나는 막대하게 쌓인 서류를 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부 이번 의식은 아르힘 님의 허락을 받았다는 답신을 보내고, 그래도 절 만나겠다는 분만 다시 알려 주세요.”

물론 아르힘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그 많던 항의가 싹 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한 분쯤은 정식으로 얘기하자고 할 줄 알았더니.’

신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알아서 몸을 사렸다.

투이나는 새삼스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아르힘의 말을 떠올렸다.

미묘한 기분이 된 투이나가 같은 방법으로 의식에 참관하겠다는 사제들을 물리쳤다.

“아르힘 님이 나타나시면 이교도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시죠? 의식에 성공하면 그 자리에 아르파 신이 강림합니다.”

아르파의 이름을 두려워한 사제들도 알아서 물러났다.

다만 호위들은 걱정스러워했다.

“아르파가 나타나면 루가 님이야말로 크게 다치시는 거 아니에요? 아르힘 님의 믿음이 가장 강하신 분이잖아요.”

“의식은 신전 밖에서 진행하니 아르힘 님의 보호도 받을 수 없습니다.”

“라카인이 보호해 주기로 했어요.”

호루니와 스카차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라카인을 돌아보았다.

라카인은 필요하다면 왕이나 신이라도 무찌를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이번에 라카인이 물리쳐야 할지도 모르는 상대는 라카인의 왕이자 라카인의 신이다.

과연 라카인이 투이나를 위해 조국과 신앙에 반기를 들까?

신전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사제들처럼 아르파의 의식에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마 라카인이 호위로 따라갈 수 있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루가 님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겁니까?”

“루가 님을 지킬 방법이 있다면 저희까지 같이 해 줄 순 없나요? 따라가고 싶어요.”

“불가능하다.”

“우리의 수호신이 아니잖아요. 저를 의식에 끌어들이는 것만 해도 큰 결심을 한 거죠.”

라카인과 투이나가 번갈아서 답하자 두 호위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투이나를 혼자 아르파 소굴로 보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만나는 사람마다 불안해했다.

투이나는 그때마다 효과적이었던 말을 꺼냈다.

“그리고 시드룬도 함께 가잖아요.”

그 말에 호위들의 안색이 약간 나아졌다.

“아아, 다행입니다. 신전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니 모하세스도 마법사를 쫓아내지 못할 겁니다.”

“마법사니까 분명 수호신에 대한 대책도 있을 거고요.”

“그럼요, 그럼요.”

투이나도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사실 투이나에게 시드룬은 누굴 지켜 줄 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투이나가 그에게 기대하는 건 딱 하나였다.

‘시드룬은 자기 몸 하나만 잘 지키면 돼.’

* * *

투이나가 협조를 위해 시드룬을 불러내자 다행히 그에게선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의식이 시작되면 공간을 겹쳐 아르파가 강림할 자리와 분리시킬 수 있습니다. 그럼 수호신에게 간섭받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두 개의 차원을 한자리에 부르겠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당신이 겪었던 일이 통제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으음……. 다시 연구 얘기로 돌아오다니.”

투이나가 고민했다.

“그래요. 차라리 비슷한 거라도 겪어보면 안심하기 쉽겠어요. 마법으로 아르파 신을 감당할 수 있다면 영혼의 세계도 당연히 가능할 테니까요.”

“옳습니다.”

시원시원한 대답에 시드룬이 만족했다.

그는 오늘 웬일인지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나타났다. 사방으로 뻗치던 머리가 곧은 폭포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지난번에 했던 말을 기억한 건가?’

투이나가 싱긋 웃으며 칭찬했다.

“그리고 머리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시드룬은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무심히 높게 묶은 머리가 한번 흔들렸다.

“필요한 공간의 크기는 확인했으니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준비만 끝나면 바로 부를게요. 마법진을 열 장소는 전과 같아요. 음, 아르힘 님께도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테니 기한은 사흘 정도로 예상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볼일이 끝나 침대 옆에 켜 둔 등불을 내리려던 투이나가 문득 물었다.

“참,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지금처럼 등불로 시드룬을 부를 수 있다면 왜 처음에 굳이 비늘을 준 거죠?”

“내가 언제나 당신을 감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소리를 한 시드룬이 제대로 된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으로는 통로를 연결할 수 있을 뿐. 장소를 이동하려면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합니다.”

“비늘은 그럼 어디에 있든 시드룬에게 알려 준다는 말인가요?”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나는 비늘을 세 번째 눈이나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시드룬이 담담하게 말았다.

가뜩이나 나쁘던 비늘의 인상이 한층 더 악화되고 말았다.

“꼭 몸의 일부 같네요.”

“…….”

시드룬은 그저 미미하게 눈동자를 움직이기만 했다.

투이나가 찝찝한 인상을 떨쳐 버리려고 화제를 돌렸다.

“그럼 굳이 등불을 쓴 건요?”

“빛이 가장 빠르기 때문입니다.”

시드룬이 차분히 답했다.

“연구를 하지 않거나 당신을 만나지 않을 때 나는 대부분 여러 차원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기억해요. 그래서 다른 마법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죠.”

“나는 약속의 마법을 빌려 왔습니다. 당신에게 약속을 주었을 때 그것은 이미 마법이었으며, 약속이 이행될 때마다 이루어집니다.”

투이나가 흥미로운 눈이 되었다.

“처음부터 시드룬이 약속의 마법을 쓰지 않은 건 복잡한 마법이라서 그랬겠네요?”

“그렇습니다.”

시드룬은 빠르게 요점을 이해하는 투이나의 모습에 약간 만족스러워 보였다.

“예를 들면 아르힘의 신전에서 루가의 직위를 가진 투이나라는 이름의 사람이 침대 위에서 등불을 켰을 때 빛이 닿는 장소에 다른 사람이 없어야 하며, 근처에 마법의 이동을 알아차릴 사제가 있어선 안 된다는 조건을 만족하면 약속의 마법이 반응합니다.”

“어마어마하네요.”

“가장 간단하게 줄인 설명입니다.”

“간단하지 않은 부분은 생략하라고 있는 거죠.”

투이나가 가벼운 종소리처럼 웃었다.

시드룬이 희귀한 것을 발견한 듯이 그녀의 웃음에 귀를 기울였다.

‘마법도 생각보다 까다롭구나.’

시드룬이 쓰는 공간의 마법이나 마탄타가 쓰던 조종의 마법은 마력만 있으면 재깍재깍 나타났다.

그런데 실은 마법에 따라서 조건이 달라진다니.

마치 각기 다른 방법으로 존재하는 수호신과 비슷했다.

‘서로 너무 달라도 비슷하게 느껴지나 봐.’

시드룬은 대화가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용건을 꺼냈다.

“다음 요청입니다.”

“어, 요청을 가져왔어요?”

“사제들에게 부상을 치료받고 싶습니다.”

놀란 투이나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디 다쳤어요, 시드룬?”

투이나가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사람을 놀라게 해 놓고 시드룬이 멀뚱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그럼 왜 치료해 달라는 말을 한 거예요?”

“당신이 준 피를 연구하다 보니 사제들이 쓰는 힘을 시험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투이나가 살짝 찡그렸다.

“정말 몸은 괜찮은 거구요?”

“그렇습니다.”

투이나는 멀쩡해 보이는 시드룬의 겉모습을 불안하게 훑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심장이 없는 걸 모르니 더욱 걱정스러웠다.

“사제를 마을로 끌어들일 수 없으니 신전에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접촉할 기회를 마련해 주십시오. 아르힘의 기도로 낫는 과정을 직접 관찰해야겠습니다.”

투이나가 다시금 깜짝 놀랐다.

“누군가를 일부러 다치게 하라구요?”

“반드시 내가 다쳐야 합니다. 상처가 없다면 그들은 마법사를 보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슬프게도 맞는 말이네요.”

사제들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고집스러웠다.

“하지만 시드룬은 칼에 찔려도 다치지 않잖아요.”

“특정한 부위만 아니라면 조절할 수 있습니다. 피가 흐르는 편이 다쳤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편하겠군요.”

시드룬의 말에 투이나는 꺼림칙해졌다.

‘역시 누굴 다치게 하는 건 내키지 않아.’

그래도 죽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상처를 낫게 만드는 기적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고민에 빠진 투이나가 이마를 쓸었다.

“……생각은 해 볼게요.”

“다음에 만날 때 진척 여부를 알려 주십시오.”

간단하게 답한 시드룬이 떠날 준비를 했다.

마법진이 열리는 걸 지켜보던 투이나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 참! 한 가지만 더요.”

마법진에 발을 걸치려던 시드룬이 멈췄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마법사의 마을에 데려갈 수 없나요?”

“안 됩니다.”

“똑같이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안 됩니다.”

잠깐 고민하던 투이나가 다른 말로 설득했다.

“지난번에 손을 다친 일로 신전에서 의심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시드룬을 돕다 보면 또 다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요.”

“…….”

“반복되는 사고로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와 차라리 말을 맞추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바로 부정적인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시드룬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신 외에는 안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다면 가능합니다.”

“음…….”

투이나는 머뭇거렸다.

마법사들이 보였던 적대적인 분위기를 떠올리자 선뜻 다른 사람도 따라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마법사들에겐 딱 하나뿐인 도피처니까.’

투이나가 한발 물러섰다.

이 정도라면 라카인에게 들려줄 만한 거절은 될 것 같았다.

“알겠어요.”

시드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길게 꼬리를 남기며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투이나가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그녀가 마법사를 만나는 동안 방문에 바짝 붙어 있던 호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앞다투어 우당탕 뛰어들었는데도, 라카인은 신묘한 솜씨로 제일 먼저 투이나에게 도달했다.

“끝나셨습니까?”

“네.”

처음으로 마법사의 존재를 알면서도 밖에서 기다린 그들의 눈빛이 초조한 흥분으로 빛났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결과를 알고 있는 투이나가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살랑.

바람이 불어와 꼬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둔중한 엉덩이를 지닌 짐승이 파리를 쫓듯이 가볍게 꼬리를 휘둘러 지나가던 호위의 애꿎은 허리를 툭 쳤다.

“꺄악!”

“뭐, 뭐야!”

앞서가던 스카차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그러나 호루니가 울상으로 성질을 내는 대상을 확인하고는 바로 심드렁해졌다.

저도 모르게 창을 빼 든 호루니가 안도한 나머지 발을 굴렀다.

“꼬리를! 왜 그래! 난 이런 일에 원래 안 놀라는 사람이란 말이야.”

“살살 해라.”

애꿎은 화풀이를 들은 소가 시큰둥하게 뒤를 돌아보더니 꼬리를 탁탁 쳤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창을 쥐고 있던 호루니가 부르르 떨며 다시 무기를 내렸다.

“마법사였으면 안 놀랐어.”

“그래.”

“……됐어.”

호루니가 돌아섰다.

창피함 때문에 얼굴이 울긋불긋했지만 스카차는 차마 그녀를 놀릴 수가 없었다.

그도 투이나가 전한 시드룬의 제안을 곧장 승낙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법사가 가진 힘은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시드룬이 유독 유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딱 한 번 전쟁터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샨이 전쟁터에 나서면 요란하게 피가 튀기고 비명이 난무한다고 했다.

그것도 끔찍하기는 하지만, 시드룬이 전쟁터에 나타났을 때는 정반대의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완벽한 정적.

가르데아 대평원에서 네 개의 나라가 동시에 부딪쳤던 적이 있다.

연합군이었으며, 심지어 그 자리에는 수호신이 둘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연보라색 빛이 한번 번쩍인 다음에 대평원 위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고작해야 마법사 한 명이 그 많은 사람들과 신을 없애 버릴 수는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아마 수호신끼리 무언가 잘못되었을 것이며, 마법사가 나타난 건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가르데아 대평원 근처에 사는 모든 자가 보았던 연보랏빛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았든가 받아야만 한다는 의미가 덧씌워지게 되었다.

자, 여기서 저주받은 마법사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만한 위험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투이나의 안전을 걱정하던 호위들마저 주춤할 만한 질문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화가 났다.

자신을 향한 화였다.

호루니 주변에서 슬금슬금 흩어지는 소를 본 스카차가 말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위험한 곳일지라도 어쨌든 마법사가 루가 님을 지켜 준다는 거잖아.”

“넌 마법사를 믿어?”

할 말이 없어진 스카차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차라리 사제님들처럼 치료하는 힘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루가 님에게는 기도가 안 듣잖아.”

호루니가 스카차를 바라보았다.

“문제는 우리야.”

“……대놓고 말하면 아프다.”

“돌려 말하면 지금 아픈 대신 자기 전에 생각날걸.”

“그도 그렇지.”

스카차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제 그만해. 평소처럼 내가 아니라 네가 그러니까 기분이 이상하다고.”

“…….”

“네가 왜 화났는지 나만큼 이해하는 사람 없잖아.”

그 말에 잔뜩 얼굴이 일그러진 호루니가 성큼성큼 그를 지나쳐 갔다. 스카차는 벅벅 머리를 헝클였다.

호루니가 향하는 방향에 투이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완벽하게 그녀의 뒤에 녹아든 라카인의 모습도 함께였다.

그날 곧장 투이나를 따라가겠다고 대답한 건 라카인뿐이었다.

호위들은 아주 잠깐 주저했을 뿐이지만, 그의 망설임 없는 모습에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라카인이 얼마나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든 루가를 섬기는 마음에서는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르파 사람에게 밀리다니.

아르힘을 믿는 자들이 아르파를 섬기던 자의 충성심에 밀리다니!

가뜩이나 신전에서 라카인을 의심하느라 눈을 흘기는데.

호위들이 느낀 순간적인 압박은 대단했다.

뒤늦게 호루니를 따라 그들을 쫓아가며 스카차는 몇 번이나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투이나와 라카인, 두 사람이 영영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잔잔하게 이는 바람에 투이나의 두건이 흩날리자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다시 붙잡아 여며 주는 라카인을 보자 그런 격차는 더욱 크게 느껴졌다.

“정말 더는 안 오신다구요?”

투이나의 언성이 높아지자 앞에 있던 사제가 쪼그라들었다.

“예에, 루가 님.”

“분명히 하루만 부탁드린다고 말씀 드렸는걸요! 오늘은 사고도 없었고 전염병도 예전에 다 처리했잖아요.”

“다른 사제들은 원래 맡은 일이 바쁘다고…….”

사제가 흘끔 눈치를 보았다.

입을 딱 벌린 투이나보다도 그 뒤에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카인이 더 신경 쓰이는 얼굴이었다.

‘어딜 보는 거지?’

무심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빠르게 머리가 식었다.

“사제님, 저보다 라카인이 신경 쓰이세요?”

“죄송합니다, 루가 님.”

“저도 화를 낼 줄 알아요.”

“압니다, 알지요. 다만 저자는 정도를 모르는 아르파인이 아닙니까. 거의 죽일 것처럼 절 쳐다보았다고요. 으으…….”

‘쳐다보긴 어떻게 쳐다봐요. 라카인은 머리카락 때문에 눈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투이나가 눈을 굴렸다.

라카인은 투이나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언제 싸늘한 눈동자였냐는 듯 얼른 시치미를 뗐다.

그녀가 덥수룩하게 자라난 라카인의 앞머리를 슥슥 손가락으로 헤쳤다.

“라카인, 하지 마요.”

“알겠습니다.”

대답하자마자 라카인은 세상 차분해졌다.

사제가 눈을 굴리며 저 수상쩍은 아르파인 어쩌고 하고 중얼거렸다.

투이나가 허리를 짚었다.

“사제님, 분명 지난 면담 때 아르파 신의 제사에 쓰일 피는 오래 보관할 수 없으니 모든 사제들이 와야 한다고 동의하지 않았나요?”

“예. 한꺼번에 피를 빼내고 다음 날 새벽에 바로 의식을 시작하자는 말씀이셨죠.”

“그런데 왜 피를 담을 통만 도착하고 사람은 덜 왔을까요.”

“피를 받고 옮길 일꾼들은 다 왔습니다만…….”

자꾸 핵심을 피하려는 사제의 말에 투이나의 인내심이 꺾였다.

그녀가 다그쳤다.

“왜 사제님들은 다 안 오신 거죠?”

사제의 목이 쑥 들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루가 님, 다른 사제들은 아르힘 님께 받은 고귀한 힘을 이런 가축에게 쓰는 게 옳지 않다고 해석했습니다.”

“뭐라구요?”

투이나는 기가 막혔다.

“한 번에 피를 뽑지 않으면 절대로 제때 피를 다 모을 수가 없다는 걸 들었잖아요?”

“루가 님과 면담이 끝난 뒤에 계산해 보니 짐승을 낫게 하는 일에 굳이 많은 사제가 필요하진 않을 거라는 결과가 나와서요.”

사제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저희 정도면 충분히 필요한 피를 받고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던데요.”

“불가능하지야 않겠죠!”

투이나가 외쳤다.

“하지만 여러분이 백 마리의 짐승을 치료하다가 쓰러지는 건 바라지 않아요. 신전에서 가장 뛰어나신 사제님도 하루에 스무 명의 환자까지만 치료할 수 있었잖아요.”

투이나의 말에 간신히 사제가 희미하게 미소를 그렸다.

“걱정해 주시는 건 너무나 감사합니다, 루가 님. 하지만 다들 아르파의 제사를 돕는 것만으로 아르힘 님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요.”

“분명히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도…….”

투이나는 크게 상심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사제가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저희는 루가 님의 뜻이 완벽하게 아르힘 님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자들은 아직 확실하게 아르힘 님의 이름이 나와야만 한다고 그러지만요.”

“…….”

투이나가 입술을 눌렀다.

그녀도 알았다.

어떤 사제들은 아직도 신전에 음식을 받으러 다니던 과거 투이나의 모습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걸 뭐라고 할 생각은 아냐. 그저 지난 전염병 때 너무 신의 이름을 남발한 것 같아서 일부러 아르힘 님의 이름을 쓰지 않은 건데.’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아무도 루가가 되면 과거를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조차 받아들여 준 과거의 시간들이 사제들에게는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일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던 아르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신이시여, 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나 봐요.’

소 떼가 울고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을 돌아본 투이나가 길게 호흡했다.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화내서 죄송해요, 사제님.”

“괜찮습니다. 루가 님 입장에선 당연히 하실 만한 말씀이었으니까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쓸 때가 된 것 같네요.”

투이나의 눈이 반짝였다.

사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맞장구를 쳤다.

“오오, 그새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그럼요. 길이 막히면 돌아가야 하잖아요?”

투이나가 유쾌하게 말했다.

상큼한 그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홀린 사제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 * *

“으아아아!”

“와아아악!”

두두두두.

엄청난 소리로 땅을 달리는 소 떼의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몰아, 몰아!”

“한 마리라도 놓치면 네가 물어내야 된다!”

“루가 니임! 아직 안 떨어지셨죠!”

“네에!”

투이나가 힘껏 소리쳤다.

뒤에서 허리를 붙잡은 라카인의 팔은 혹시라도 그녀를 놓칠까 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세상에, 엄청나잖아!’

소의 등에 올라탄 투이나가 허리를 똑바로 펴려고 애썼다.

집채만 한 짐승들이 한꺼번에 달려 나가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다.

말을 가져온 일꾼들이 달리는 소 떼를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원래 피를 옮겨야 할 수레에 올라탄 사제들은 벌벌 떨며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하긴 소 떼를 끌고 산길을 타고 올라갈 때마다 산사태처럼 요란한 소리가 났으니 겁을 먹을 만도 했다.

우르릉.

굴러떨어지는 소리에 투이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똑같이 용케도 소 등에 올라탄 호루니와 스카차가 바짝 그녀를 쫓아오는 게 보였다.

“아직 떨어진 사람 없죠!”

“예! 괜찮습니다!”

“좋아요! 이대로 동쪽 광장까지 가는 거예요!”

투이나가 소리쳤다.

그녀의 방법은 단순명쾌했다.

‘사제님이 오기 싫으면 우리가 가면 되지!’

그녀는 일꾼 한 명을 먼저 보내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문을 열어 두라고 지시했다.

지금쯤이면 황당무계한 소식을 들은 무사제들이 다급히 길을 정리하느라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어!’

투이나는 오랜만에 신이 났다.

가축으로 길러진 소 떼는 아주 순했고,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덕분에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이 시원했다.

귀는 좀 아팠지만.

투이나가 정신없이 날리는 두건을 붙잡으며 활짝 웃었다.

“라카인! 어때요? 탈 만해요?”

“말보다는 느린 것 같습니다.”

진지한 그의 대답에 투이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라카인은 난생처음 겪는 황당한 상황보다 투이나가 웃을 때마다 떨림이 전해지는 팔에 신경이 쏠리기만 했다.

라카인은 말없이 잡은 팔을 웅크렸다.

* * *

투이나가 소 떼를 몰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샨은 한참 동안이나 파안대소했다.

그녀가 먼지와 바람으로 쭈뼛 선 차림으로 소에서 내렸을 때는 아예 웃느라 허리가 꺾일 지경이었다.

“그대는 정말 감탄스럽군!”

투이나가 멋쩍게 두건을 내렸다.

‘샨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봐.’

원래부터 성량이 좋았던 샨이 크게 웃자 계곡을 돌아 나오는 메아리처럼 크게 울려나왔다.

생각보다 듣기 좋았다.

샨의 모습에 놀란 투이나의 걸음이 더뎌지자 샨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턱을 매만졌다.

“어서 오라.”

샨이 씩 웃으며 한 팔을 벌렸다.

송곳니 위로 올라간 그의 입술이 파들 떨렸다.

참으려 해도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는 소 떼에 놀란 사람들이 도망 다니던 장면이 계속 그를 웃겼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소 떼를 끌고 오면서 투이나는 사제들이 놀랄 것만 기대하고 샨의 반응은 하나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호감을 얻을 줄이야.

‘취향이 독특한가?’

머뭇거리며 투이나가 신전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샨이 그녀를 낚아챘다.

그는 제 품에 들어온 여자가 얼마나 많은 먼지를 날리든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익숙했다.

그는 바람과 흙냄새가 나는 투이나의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다음에 그대와 꼭 한번 경주를 해야겠군.”

샨이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투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드물게도 그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산짐승 같은 붉은 갈기 머리도 순해 보일 정도였으니.

눈이 휘둥그레진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제사 준비는 다 끝났나요?”

“피만 기다리고 있었지.”

샨이 싱글거렸다.

그가 자연스럽게 투이나를 옆구리에 낀 채 움직였다.

얼떨결에 그의 팔에 꽉 눌린 투이나가 종종 걸음으로 돌아섰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샨의 하인들과 베인이 보였다.

“베인?!”

깜짝 놀란 투이나가 얼굴을 매만졌다.

‘헉……. 지금 보여 줄 만한 몰골이 아닌데!’

투이나가 뒤늦게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소 떼와 구덩이에서 구르다 나왔으니 베인의 눈이 커질 만도 했다.

두건 끝을 마구 툭툭 치느라 투이나는 정작 옆에 선 샨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보지 못하였다.

베인의 눈빛이 일순 차갑게 식는 장면도.

노려보는 두 시선이 부딪쳤다.

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할 거면 아까 했어야지. 날 보았을 때.”

“샨은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요.”

“나도 눈이 있다.”

샨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베인에게 정신이 팔린 투이나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둘이 대화하는 걸 본 베인은 서둘러 동요한 기색을 감췄다.

“돌아오셨군요, 루가 님.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베인! 좋은 아침이에요. 소식 듣고 온 거예요?”

“신전이 소란스러워 소식을 물어보았습니다. 루가 님께서 이런 일을 준비하고 계신 줄 알았다면 저도 진작 도우러 나왔을 텐데요.”

“아아…….”

투이나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숨기려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베인을 빼 놓고 진행하게 된 셈이다.

하다못해 시드룬마저 공간을 빌려주느라 이번 일을 알고 있었건만.

‘안이했어. 당연히 레오나가 말해 줄 거라 생각하지 말고 직접 말했어야 했는데.’

커져 가는 미안함과 반대로 베인은 서운한 기색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게나마 알았으니 되었습니다. 루가 님이 의식을 치르는 동안 내내 기도드리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제게 돌아오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고마워요, 베인.”

깨끗한 베인의 눈에 감동한 투이나가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눈살이 찌그러진 샨이 그들의 손을 탁 쳐냈다.

“전쟁터에 보내는 것도 아닌데 웬 요란인가?”

“샨!”

투이나의 질책 어린 소리에도 샨은 심드렁하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대로 바로 시작하지.”

“아직 준비도 다 안 끝났습니다! 게다가 아직 씻지도 못했는걸요.”

샨의 눈이 한번 투이나를 훑었다.

무슨 기준을 통과했는지 그가 대꾸했다.

“아르파께선 개의치 않을 거다.”

“네? 무슨 소리예요?”

“어차피 피 냄새가 진동을 할 텐데 이깟 먼지를 좀 묻힌들 어떤가.”

“아무리 그래도 신이 오시는 자리입니다. 저는 예의를 갖출 겁니다.”

투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피를 뽑을 때까지 시작할 수 없으니 잠깐 다녀올게요. 시드룬도 불러야 하니…….”

“그자야 알아서 나타나는 거 아니었나?”

샨이 의심스럽게 눈썹을 올리자 찔끔 놀란 투이나가 둘러댔다.

“아무리 마법사가 멋대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해도 이곳은 아르힘 님의 신전입니다. 언질은 해야지요.”

“흐음…….”

‘깜짝이야. 좀 더 조심해야겠다.’

큰 말실수는 아니지만 시드룬과 몰래 만나는 걸 들킬 뻔했다.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시드룬은 멋대로 나타나는 저주받은 마법사였다.

혹시나 아르힘과 모종의 협의를 했을 거라고 추측해도 정확히 어떤 계약을 했는지는 비밀이었다.

그녀가 마법사의 비밀을 지켜 주는 처지인지라.

괜히 파고들지 않고 다른 구혼자들과 같은 언약이라고 생각하게 두는 게 나았다.

구혼자들에게 인사한 투이나가 종종걸음으로 신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곧장 경악해서 달려 나오던 사제와 마주쳤다.

“루가 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 두르발 사제님! 잘됐네요. 지금 그대로 나가시면 돼요.”

투이나가 친절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 떼라뇨! 지금 동쪽 광장에 있던 자들이 한꺼번에 쳐들어와서 떠들고 있습니다!”

“맞아요! 사제님들이 도와주기로 한 목장까지 내려오실 수 없다 하여 데려왔습니다. 기다리는 자가 많으니 빨리 피를 뽑고 치료해 주셔야겠어요!”

“예? 이, 이 무슨……!”

털끝만 한 동요 없이 깔끔하게 대답하는 투이나의 모습에 되레 당황한 사제가 말을 더듬거렸다.

“어찌 이리도 막무가내로 구십니까! 절차에 맞게 진행하셔야지요! 분명히 아르힘 님께서는……!”

“제게 찬성하셨지요.”

달리던 걸음을 멈춘 투이나가 흐트러진 두건을 쓸어 올렸다.

“구혼자를 맞이할 때 제가 분명 손님에게 어떤 불편함이나 해로움 없이 돌보겠다고 약속한 걸 잊으셨나요? 손님의 수호신을 존중하는 것도 당연히 그에 속합니다.”

사제의 말문이 막혔다.

설마 투이나가 아직도 정확하게 축사를 외우고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과거에 샨을 두려워하며 무작정 사제들의 말에 찬성했던 그녀의 자취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두려움보다 앎과 기쁨의 손을 들어 준 투이나가 경쾌하게 말했다.

“그러니 서둘러 주셔야겠어요. 소들을 오래 방치하면 분명 사람들에게서 항의가 들어올 테니 사제님들이 고생할 테죠.”

“하지만…….”

“신전에 피를 제공하기로 한 줌비아 의원님의 선의를 한 마리의 소라도 죽이지 않는 것으로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요?”

사제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늘 사제들의 말을 경청하던 투이나가 언제 이만큼 주관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일 년의 시간을 아껴 두었더니 사제님이 놀라는 얼굴도 다 보네요.’

투이나는 그저 즐거웠다.

한 학년 아래의 시험을 풀게 된 아이처럼 그녀가 마지막 정답을 명쾌하게 휘갈겼다.

“저는 지금 마법사를 부르러 갈 거예요, 사제님. 맡은 일이 끝나시면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었던 장소로 모두를 모아 주시면 됩니다. 제가 제안하는 절차는 이래요.”

“그…….”

사제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꽉 다물었다.

일단 상황이 눈에 들어오자 사제는 투이나가 더 이상 그가 교육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루가 님.”

다시 루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일말의 존경심이 깃들었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자.

사제는 간단하게 그녀의 위로 아르힘의 모습을 덧씌웠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투이나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묘한 얼굴로 그냥 웃어 주었다.

“믿을게요.”

투이나가 그를 지나 쳐갔다.

얼마 가지 않아 그녀를 따라왔던 호위들이 자연스럽게 뒤에 나타났다.

이제는 호루니와 스카차도 제법 라카인만큼이나 능숙하게 인기척을 숨길 줄 알았다.

투이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방문을 열었다.

“다른 분들을 부르기엔 또 시간이 걸릴 테니 여러분이 외출 준비를 도와줄래요? 시드룬도 불러야 하니 시간이 걸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제가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스카차가 빠르게 무리에서 갈라졌다.

라카인과 호루니가 방에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투이나는 거침없이 두건을 벗어던졌다.

풍성한 머리 타래가 풀썩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사이에 묻은 먼지를 대강 풀어낸 투이나가 재빨리 분칠을 다시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제님들이 생각해서 해 주신 일이지만 바쁠 땐 정말이지 시간만 잡아먹는 괴물이에요.”

투이나가 투덜거렸다.

얼룩에 칠한 분칠은 물이나 땀에 지워지지 않아 기름으로 씻어야 했다.

전신을 분으로 덮은 투이나에겐 향유로 한 번, 물로 다시 한 번 씻고 분칠을 하는 과정이 너무나 번거로웠다.

빠르게 투이나의 소매를 걷어 올린 호루니가 흘끗거렸다.

“정말 시종들을 부르지 않아도 되시겠어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샨을 생각하면 갔다 오다가 걸릴 위험이 더 크겠네요.”

모시던 주인의 성질머리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라카인이 묵묵히 향유를 부었다.

“괜찮아요. 요령이 있거든요.”

머리끈을 입에 문 투이나가 팔을 들어 올렸다.

곧 스카차가 물을 갖고 돌아오자 그녀는 빠르게 분장했다.

평소였다면 거리낌 없이 맨살을 드러내며 아르힘의 위엄을 자랑했을 테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얇은 비단으로 온몸을 감쌌다.

‘갑자기 꽁꽁 싸매도 수상하겠지.’

투명하게 보이는 재질은 사실상 속임수로, 겹치면 겹칠수록 실제 살갗은 보이지 않을 터였다.

신전에서 좋아하는 성스러운 인상과는 멀어졌지만.

그녀는 이제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이끄는 새벽의 인도자처럼 보였다.

시종들이 없어 머리만 섬세하게 틀어올리지 못한 투이나가 길게 땋은 머리를 얇은 베일로 말아 감쌌다.

당장 드러난 얼굴에만 빠르게 분칠을 끝낸 투이나가 호위들을 돌아보았다.

“안 이상해요?”

말을 잃어버린 호위들이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투이나는 물과 기름에서 피어난 무지갯빛 거품 같았다.

“아름다우십니다.”

드물게도 라카인이 칭찬했다.

머리카락 아래로 감춰진 그의 눈은 아무도 모르게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안심한 투이나가 다리에 감기는 천 자락을 들어 올리고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이제 마법사를 부르겠어요!”

투이나가 등불을 짚었다.

시드룬은 머리부터 튀어나왔다.

‘으아악!’

투이나가 황급히 등불을 들고 물러났다.

하마터면 비명을 질러서 바깥에 내보낸 호위들을 다시 부를 뻔했다.

“제발 평범하게 나올 수 없어요?”

“위치를 착각했습니다.”

누운 채 머리만 내민 시드룬이 무표정한 눈을 깜박거렸다.

투이나는 고스란히 드러난 시드룬의 목젖을 내려다보다가 얼른 그의 어깨를 당겼다.

“아르파 신의 의식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장소는 지난번과 같아요. 시작할 수 있나요?”

“바로 당신을 데려가면 됩니까?”

“아뇨. 전 확인할 게 있어서 늦게 합류할 거예요. 사람들이 제가 시드룬과 다른 방법으로 만나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지도 모르니 나타나는 건 따로 부탁해요.”

“그럼 그 장소에서 다시 보지요.”

“네.”

시드룬이 사라졌다.

등불을 훅 불어서 끈 투이나가 방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가지런히 놓인 세 상자를 본 투이나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초조하게 투이나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호위들이 벌컥 열리는 문에 펄쩍 뛰었다.

“루가 님!”

“읏……. 도와줄래요?”

등으로 문을 연 투이나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궤짝을 옮기고 있었다.

라카인이 당장 한 손으로 궤짝을 들어 올리자 끙끙거리며 옮기던 투이나는 약간 허탈해졌다.

라카인이 반대쪽 손으로는 투이나를 부축했다.

“저희를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문 밖에 내놓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투이나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레오나가 왔을 때 호위를 섰던 호루니가 상자의 장식을 알아보았다.

“루가 님, 저건…….”

“네. 샨에게 줄 선물이에요.”

투이나가 허리를 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좀 일찍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궤짝을 들고 있던 라카인의 자세가 달라졌다.

그가 좀 더 공손하게 받든 손을 바꾸는 걸 스카차가 힐끔거렸다.

“……그럼 루가 님, 바로 모하세스에게 가실 겁니까?”

“그래야죠.”

투이나가 덧붙였다.

“피만 확인하면요.”

* * *

소시지를 좋아해도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르는 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아르파의 제사를 반강제적으로 돕게 된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욱.”

“난 다시는 검은 소시지 못 먹을 거야.”

콸콸 쏟아지는 핏줄기에 사제들은 시키지 않아도 기도를 올렸다.

그나마 연륜이 있는 사제가 혀를 찼다.

“이보다 더 심하게 다친 환자들을 매일 봐 놓고 무슨 엄살이야?”

“그거랑 통에 넘치도록 담긴 건 느낌이 다르다고요.”

“게다가 짐승이라 냄새가 더…….”

사제들이 죽겠다는 시늉을 했다.

와인이 담겨 있어야 정상일 통에 다른 액체가 있는 장면이 끔찍했다.

“자네들보다 피 뽑는 사람들이 더 힘드네. 잔말 말고 죽지 않게 잘 보살펴.”

나이 든 사제가 맑은 액체가 고인 소의 커다란 눈망울을 보며 기도를 올렸다.

종알거리던 사제들도 별수 없이 상처에 손을 올렸다.

신전 앞에 나타난 소 떼들에 놀란 사람들이 소문을 퍼트려서 일손을 구하는 게 쉬웠다.

가끔 아르파의 의식을 돕는다고 꺼림칙해하는 자도 있었으나 사제들이 앞장서서 일하는 걸 보고 누그러졌다.

덕분에 짐승 백 마리 분량의 피를 금방 모을 수 있었다.

투이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절반 이상 모인 뒤였다.

“바로 신전 안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나르는 동안 절대로 흘리지 않도록 단단히 밀봉했고요.”

“잘하셨어요.”

투이나가 치하했다.

피가 가득 담긴 통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기다리고 있던 샨의 하인들이 들고 이동했다.

“끝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사제님.”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루가 님.”

사제가 짧게 손을 맞잡았다.

“아르파의 의식을 본 자는 매료되기 쉽다고 합니다. 그들이 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데에는 주기적인 의식이 하는 역할이 크다고 하더군요.”

사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한 번의 의식에 홀려 결정을 내리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부디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명심할게요.”

투이나가 사제의 손을 다독였다.

그들은 투이나가 샨과 결혼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기 때문에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염려하는 목소리라 마음이 쓰였다.

“아르힘 님의 축복이 보호하시기를.”

투이나가 사제와 마주 인사했다.

이내 그녀는 마법진이 나타날 장소로 옮겨 갔다.

익숙한 배경에 보랏빛이 새어들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샨이 투이나의 등장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왔는가.”

샨이 비죽 웃었다.

샨의 뒤로 긴 머리를 휘날리는 시드룬도 보였다.

그는 이미 마법진을 열어 둔 상태였다.

하인들이 마법진 안으로 피를 옮기는 동안, 베인은 갈 수 없는 장소를 확인하듯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마법진 너머로 사라질 것만 같아 투이나의 걸음이 빨라졌다.

“의식을 치르는 동안 사고를 겪은 적은 없었나요?”

“제물로 바쳐진 자들은 있었지.”

샨이 대답했다.

그의 옆에서 걷던 투이나가 실망한 눈빛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렸다.

“시드룬에게 미리 부탁했습니다. 의식이 시작되면 그가 저를 보호할 거예요.”

“마법사가 신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샨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는 놀라거나 비꼬는 어투가 아니었다.

“마법사를 믿고 안심하고 있다간 위험해질지도 몰라. 일부러 써먹으라고 사람을 붙여 줬건만.”

샨이 라카인을 향해 턱짓했다.

라카인이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저것이 들고 있는 게 뭐지?”

“라카인.”

투이나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라카인을 불렀다.

그가 공손히 궤짝을 받친 채 무릎을 꿇었다.

“샨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이번 제사에 쓸 수 있도록 미리 드리는 것이니 확인해 보세요.”

“그대가?”

샨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날렵한 은빛의 검을 본 샨은 한층 더 감탄했다.

“이거 놀라운데.”

샨이 능숙하게 검을 집어 들었다.

투이나가 두 손으로 잡아야 했던 손잡이는 그에게 딱 맞았고, 장대해 보였던 길이마저 적당했다.

“제법 쓸 만해.”

샨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후웅 소리가 났다.

그의 표정이 장난스럽지만 않았어도 쉽게 누군가의 손목을 잘라 버릴 기세였다.

예리하게 검을 시험해 보던 샨이 비스듬히 칼날을 눕혔다.

“정말로 그대가 준비했단 말인가?”

“마음에 드나 보군요.”

“들다마다.”

샨이 검을 잡은 어깨 너머로 투이나를 넘겨다보았다.

“나를 위해 아르힘의 뜻을 거역했으니 어찌 예뻐하지 않겠나?”

“거역하다뇨?”

투이나가 기함했다.

물론 뒤의 말도 경악스럽긴 했지만 일단 루가로서 앞의 말부터 반박하기 바빴다.

“아르힘 님은 신전에 있는 동안 살상을 금하신 겁니다. 무기를 가져간 것도 쉽게 휘두를 유혹을 멀리하란 뜻입니다. 검을 받자마자 마음대로 쓰란 얘기로 오해하면 안 되죠.”

“도구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법이다. 그대가 검을 선물한 순간부터 이미 신전에서 피를 볼 각오를 했어야지.”

“피는 이미 보았어요.”

투이나는 짧게 대꾸했다.

“당신에게 각오가 아니라 믿음을 주겠다는 게 그렇게 싫나요?”

비단에 감싸인 연약한 자의 말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들렸다.

갑자기 불쾌해진 샨이 미간을 좁혔다.

“그대는 자주 믿음을 말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샨이 투이나의 머리에 감긴 천을 검 끝으로 눌렀다.

“믿음보다 강한 힘만이 신을 지탱하고 적을 부수는 것이다.”

샨이 검을 내렸다.

“보고 나면 이해할 수 있겠지.”

그가 갑자기 냉랭하게 말했다.

미동도 않는 투이나가 재미없어진 것일까. 돌아선 샨이 하인들 쪽으로 돌아갔다.

“…….”

투이나는 그제야 자신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알아차렸다.

라카인이 뒤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검이 닿았던 자리에 못박혀있었다.

라카인은 손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차마 왕의 칼을 붙잡을 수 없어 손가락이 열려 있었다.

야속한 신이시여.

투이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그의 손등을 짧게 다독였다.

신은 거역할 수가 없다.

‘우리가 같은 신을 믿었다면 좋았을 텐데.’

“괜찮아요, 라카인.”

투이나가 그를 안심시켰다.

본능적으로 라카인이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켜야 할 주인을 가로막는 것이 그의 신이었으니.

“저도 신을 믿는걸요. 이해합니다.”

라카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목울대가 딱 한 번 꿈틀거렸다.

투이나는 잠깐 흐트러졌던 비단을 단단히 다시 눌러 매었다.

다시 샨을 바라보니 그는 말 한 마리를 끌고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움직였다면 투이나도 따라가야만 했다.

시드룬이 기다리는 걸 본 투이나가 다리를 움직였다.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베인이 그녀를 보았다.

바람이 미려한 그의 살갗을 할퀴며 지나갔다.

베인은 전쟁터로 연인을 떠나보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혼자들을 의식해 그를 모른 척하려던 투이나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결국 투이나는 너무 연인답게 보이지 않으려고 손만 잡았다.

“베인, 의식이 끝나고 나오자마자 찾아갈게요. 약속해요.”

“저는 언제나 여기서 루가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인이 말했다. 어쩐지 처연하게 보이는 미소였다.

가슴이 욱신거린 투이나는 그의 손을 더 잡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샨의 하인까지 마법진으로 들어가자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투이나가 빠르게 속삭였다.

“약속할게요.”

“믿겠습니다.”

끝끝내 떨어지기 싫어하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베인은 웃는 낯으로 투이나를 보냈다. 많이 돌아볼 수도 없는 연인을 위해서.

그러나 마법진이 닫히자마자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이 사라지자 거대한 허공만이 남았다.

베인이 음울한 눈으로 손바닥 안에 남아 있던 온기를 어루만졌다.

“……그러니 꼭 제게 돌아오셔야 합니다.”

* * *

베인이 신경 쓰였지만 투이나는 등 뒤에서 닫히는 마법진을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마법으로 건너온 세상이 온통 붉었기 때문이다.

타는 듯이 붉은 노을이 하늘을 움켜쥐고 있었다.

태양이 너무도 커서 당장이라도 대지와 부딪칠 것만 같았다.

색이 진해서 검게 보이는 들판에 말 한 마리와 서 있는 샨의 모습은 끔찍하게 잘 어울렸고, 몸서리치게 오싹했다.

투이나가 마법진을 닫는 시드룬에게 급히 물었다.

“왜 하필 이런 세계로 데려온 거예요?”

“수호신을 부르는 의식이니 다른 차원이 아니라 신이 존재했던 세계여야만 했습니다. 여긴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땅입니다.”

시드룬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투이나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까맣게 죽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한 가뭄과 달리 썩어 들어간 자리가 신이 죽었음을 명징하게 드러냈다.

“마음에 드는군.”

샨이 함께 서 있는 시드룬을 돌아보았다.

“마법사, 와서 짐을 날라라.”

하인처럼 부려먹는 소리에도 시드룬이 따라 움직였다.

역시 샨은 마법사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샨이 무서워하는 게 있긴 할까?’

투이나는 한쪽에 쌓아 둔 백 개의 통을 시드룬이 마법으로 옮기는 걸 지켜보았다.

죽어 버린 평원 위로 마법진이 연달아 나타나 쿵, 소리와 함께 통을 내려놓았다.

그때 라카인이 뒤에서 다가왔다.

“루가 님.”

라카인은 악몽에서 볼까 무서운 풍경에도 평소처럼 말했다.

“의식이 시작되면 제게서 멀리 가지 마십시오.”

“음, 사실 시드룬이 아르파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내내 마법을 써 주기로 했어요. 이 세계를 열어 준 게 그이니 분명히 괜찮지 않을까요?”

라카인은 투이나가 희망적으로 얘기할 동안 묵묵히 기다렸다가 말했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겠습니다.”

“그래요.”

투이나가 믿음직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의지가 되네요.”

라카인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곧 모든 피를 옮겼는지 시드룬과 샨이 함께 돌아왔다.

그는 라카인과 같이 서 있는 투이나를 보고 짧게 눈가를 찡그렸다.

“의식이 시작되는 동안 절대로 방해하지 마라.”

“그러지 않…….”

“의식을 하는 동안 절대로 피를 밟지 마라.”

샨이 말을 끊었다.

그에게 서려 있는 기운이 낯설었다.

샨은 평소처럼 놀리거나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엄중하게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차가운 그의 푸른 눈이 투이나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의식이 끝나는 동안은 절대로 입을 열지 마라.”

샨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투이나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

대답을 들은 샨이 홱 돌아섰다.

그가 다시 말로 걸어가는 동안 물러나 있던 하인들이 천천히 몰려왔다.

일순 투이나가 긴장했으나 하인들은 그녀와 거리를 유지한 채 샨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려고 얼굴이 굳은 것 같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었다.

투이나는 움찔했으나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시드룬은 별 어려움도 없이 말했다.

“마법은 준비되었습니다. 당신은 이대로 기다리면 됩니다.”

투이나는 등 뒤에 나타난 마법진이 어른어른 보랏빛을 뿜어내는 걸 느끼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샨은 이미 말에 올라탄 뒤였다.

안장에 앉은 그가 가슴 위로 검을 올렸다.

붉은 그림자 너머로 입술이 무어라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거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짧은 중얼거림을 마친 그가 이마까지 검을 들어올렸다.

이번에도 읽을 수 없는 말이 경건한 자세로 이어졌다.

투이나는 샨이 말 위에서 신을 부르는 동안 하인들이 점차 바닥에 머리를 찧는 걸 보았다.

“……!”

곧장 투이나가 라카인을 확인했다.

천만 다행으로 그의 이마는 무사했다. 투이나 때문에 라카인은 의식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다만 그도 하인들처럼 긴장해 있긴 마찬가지였다.

라카인의 시선은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리는 샨에게 꽂혀 있었다.

“……그리하여 내게 약속된 것을 받아 가리라.”

갑자기 샨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투이나가 놀라는 것과 동시에 샨이 박차를 가했다.

그건 일생에 다시 보기 어려운 기묘한 광경이었다.

샨이 말을 몰아 평원으로 달려 들어가자마자 퍽 하고 피가 담겨 있던 통이 터졌다.

“흡!”

투이나가 놀란 신음을 삼켰다.

검붉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샨은 여전히 검을 들고 있을 뿐 휘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말을 타고 옆을 지나치기만 하면 쌓여 있던 통이 저절로 터져 나갔다.

투이나는 드넓은 평원을 따라 통이 불규칙적으로 놓인 걸 알아차렸다.

일부러 말을 달리기 위해서 사이를 벌린 모양이다.

샨은 바짝 몸을 낮추고 믿기지 않는 속도로 말을 몰았다. 사방에서 터지는 통은 그에게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터진 통의 개수가 많아지자 바닥에 고여 있던 액체가 이쪽까지 흘러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한꺼번에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

투이나는 기절할 뻔했다.

하인들이 어떻게든 그 피를 얻으려고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목숨이 거기에 달린 듯이.

경악한 투이나는 그녀도 모르게 라카인의 모습을 찾았다.

어쩐지 그가 침착하다면 자신도 침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라카인은 다른 하인들처럼 정신을 놓진 않았다.

하인들이 다시 흩어지는 동안 라카인은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조용히 바닥에 고인 액체를 손바닥으로 펴 발랐다.

‘그래. 이건 아르파의 의식이지.’

투이나는 검붉은 얼굴이 되어 돌아오는 라카인을 응시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천천히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투이나는 이제야 신전 사람들이 경고하고 꺼려하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샨은 불안해하는 투이나를 남겨 둔 채 계속해서 달렸다.

투이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남은 과정을 지켜보았다.

백 개의 통이 모두 터졌는데도 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네 개의 다리가 날뛰느라 더운 기운이 피어오르는데도 샨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재촉했다.

꼭 말이 지칠 때까지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숨을 조여 오는 정적 속에서 말은 기어이 크게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한 팔로 고삐를 잡아당긴 샨이 한 순간 말의 등에서 떨어졌다.

“……!”

경악한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부를 뻔했다.

그러나 시드룬의 손이 뛰어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빠르게 붙잡았다.

시드룬이 눈짓했다.

샨은 떨어진 게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뛰어오른 것이다.

새파란 불길 같은 시선이 우레와 같이 번쩍였다.

뛰어오른 그가 체중을 실어 말의 목덜미를 누르자 반항하던 말의 다리가 꺾이며 앞으로 쓰러졌다.

샨은 그대로 추락하면서 마지막 제물의 목을 베어 버렸다.

모든 소음이 멎었다.

투이나는 잠시 샨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크고 둔중한 물체가 둘로 떨어져 나왔는데, 어느 것이 샨이지?’

그녀는 곧 자신이 왜 샨을 찾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격한 움직임에 분출해야 할 뜨거운 액체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제물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짓말처럼 굳어 있던 말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두 개의 거대한 형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이나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샨을 볼 수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누가 샨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명의 샨이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칼을 든 한 명과 붉은 머리카락부터 검 장식까지 온통 피로 이루어진 다른 한 사람.

‘그다.’

투이나가 눈을 부릅떴다.

샨에게서 느껴지던 진짜 그.

그는 아르파였다.

두 명의 모습을 한 샨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땅에 흥건하던 피가 사라졌다.

투이나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샨이 걸어올 때마다 자신의 몸도 그만큼씩 앞으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투이나의 뒤에서 빛나던 마법진이 더욱 커졌다.

시드룬이 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놓고 마법에 집중하는데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라카인이 투이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붉은 피가 입을 가로지른 라카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손이 연거푸 입을 막았다가 떨어졌다.

‘말하지…… 말라고?’

투이나의 앞에서 정신없이 입을 덮는 동작을 반복하는 라카인을 하인들이 미친 자를 보듯이 훔쳐보았다.

그러는 사이 샨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동시에 라카인의 무릎이 억지로 땅에 처박혔다.

두 명의 샨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투이나는 처음으로 시드룬의 마법의 위력을 실감했다.

마법 덕분에 제정신을 유지한 채 샨을 관찰할 수가 있었다.

그만큼 질척한 검붉은 눈동자를 굴리는 또 다른 샨의 몰골은 끔찍했다.

샨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붉은 피로 이루어진 샨도 똑같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들은 거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샨이 입을 열었다.

“나는 강림하는 신이 아니다.”

너무도 짙어서 새까맣게 보이는 입 안이 말했다.

투이나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르파의 음성은 아르힘과 달리 인간을 배려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신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샨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투이나는 심장이 멎어 버릴 듯한 공포 속에서도 그의 푸른 눈보다 새빨간 동공이 좀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내게는 피가 있다.”

샨이 그녀에게 건네듯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투이나가 움직이지 않자 그는 긴 혀를 내밀어 제 손바닥을 핥았다.

살로 이루어진 샨과 달리, 피로 이루어진 그는 자신의 피를 핥는 것처럼 보였다.

투이나는 홀린 듯이 그의 혀가 피로 이루어진 손바닥을 가르고 들어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샨이 히죽 웃었다.

“너의 신은 무엇이 있느냐?”

그때 발작이 일어났다.

투이나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뜨거운 충동이 불룩 살갗을 뚫고 나오는 걸 느꼈다.

‘안 돼.’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누구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시야에 들어찬 붉은빛이 더욱 강해졌다.

그녀의 팔이 강제로 튀어나갔다.

마법을 벗어나자마자 즉시 손가락부터 손목까지 붉은 점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고통은 없었다.

투이나가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엎드려 있던 라카인이 억지로 일어났다.

“아아아아!”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투이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샨의 품 안이었다.

투이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개의 새파란 눈동자를 보자마자 경련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흐으……!”

“이제 말해도 된다.”

샨이 그녀의 상체를 붙들었다.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투이나는 헐떡이며 그의 웃옷을 움켜쥐었다.

샨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일어날 수 있도록 붙잡혀 주었다.

투이나는 한참 동안 호흡을 하느라 샨이 다시 원래 목소리로 돌아왔다는 것도, 어디에도 피가 보이지 않는 것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끝났나?’

샨의 옷을 움켜쥔 투이나가 움찔했다.

투이나가 어리둥절하게 자신의 손을 펼치는 걸 본 샨이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대의 손은 멀쩡하다.”

“……아니었어요.”

투이나는 어떤 흔적도 없이 깨끗한 자신의 손을 멍하니 응시했다.

새빨간 점도, 얼룩도 없는 흰 손등이었다.

“안심해. 그대는 내 보호 아래 있다.”

샨은 무릎에 앉힌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연약한 어깨가 너무도 쉽게 안쪽으로 굽었다.

그러나 샨은 이번에는 왜 이렇게 허약한 자인지 그녀를 비웃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투이나가 턱 밑에서 웅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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