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허락되지 않은 것을 맛본 자들이 스스로 파멸을 맞았기에…’
역병을 수습하고 신전으로 돌아오자마자 투이나는 협박 편지를 받았다.
군주의 기상에 수치란 없으며 두려워할 일 또한 없다. 기록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부끄러워 나를 찾지 않는가?
이번에도 내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면 그때를 여상히 여기도록 만날 때마다 입 맞춰 버리겠다.
읽으면서 투이나의 낯이 뜨거워졌다. 창피해져서.
‘참 꾸준한 사람이야.’
샨의 편지를 받은 투이나는 답장을 기다리는 하인 앞에서 표정부터 수습해야 했다.
만나러 와 달라는 소리를 험악하게도 했다.
샨의 편지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이 떠오른 투이나가 머리를 휘휘 흔들었다.
“제가 무엇 때문에 바쁜지 분명히 전했죠?”
“예. 이제 루가 님이 신전으로 돌아오셨으니 주군께서 보길 원합니다.”
‘그런데 왜 말끝마다 입 맞춘 얘기를 쓰는 거야?’
샨은 찾아가려다가도 망설이게 만드는 데 천재다. 분명히 지난번에 질색하는 걸 봤으면서.
샨이 이런 식으로 협박을 날린 편지가 열 통은 쌓였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꾸준하다 싶었으나 편지도 하인을 시켜 쓰게 한다는 라카인의 설명에 그마저도 날아갔다.
원래 차례라면 샨을 방문하는 게 일정상 맞지만…….
‘이대로 만났다가 진짜로 추방해 버릴 수는 없잖아.’
투이나가 반듯하게 편지를 접었다.
“내일 찾아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일부러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하인이 미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내일 말씀이십니까?”
“네, 내일.”
투이나가 단호하게 반복했다.
하인은 깊게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났다.
시종이 그가 멀어진 걸 확인하고서야 속닥거렸다.
“오늘 구혼자를 보러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투이나가 접은 편지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시답잖은 편지는 받는 대로 쑤셔 박고 있던 터라 곧 아래 서랍 하나가 꽉 찰 예정이다.
‘더는 못 참겠어.’
투이나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오늘은 베인을 만날 겁니다.”
보고 싶어서 꿈에 나올 지경이니까.
원래 투이나는 이렇게까지 팔불출인 성격이 아니―라고 본인은 생각했―다.
평범하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아낄 뿐이었다.
하지만 베인의 얼굴만 보아도 가슴이 떨리고 생각만 해도 그리워지는 사람인 걸 어떡해.
솔직히 그녀는 베인 얘기를 마구 떠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정신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식으로 남편이 되어 달라 말하려던 때에 죽어서 과거로 돌아와 버려 말할 수 없는 애정 때문에 바짝바짝 목이 탔다.
‘게다가…… 요즘 베인이 좀 달라진 것 같아.’
투이나가 기억하는 베인은 언제나 여유로웠다.
그런데 되살아난 뒤로 자잘한 사고가 생기다 보니 어쩐지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초조해보이기도 하고, 주저함이 늘었다.
봄맞이 축제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이 자꾸만 불쑥불쑥 생각났다.
새벽빛에 파르스름하던 그의 옆얼굴이 떠오르자 다시 가슴이 아렸다.
샨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아직도 한가하게 편지에 입 맞췄던 얘기나 쓰고 있는 걸 보니 진짜로 화가 나려면 멀었다.
그가 보낸 편지 덕분에 찾아가지 않을 결심을 굳힌 투이나가 위쪽 서랍을 열었다.
아래쪽과 다르게 정갈하게 포개진 손수건과 떨어진 단추가 몇 개의 편지와 함께 정리되어 있었다.
투이나는 조심스레 물건을 꺼냈다.
단추를 손수건으로 싼 그녀가 그제야 허리를 폈다.
“이제 만나러 가요.”
* * *
베인의 거처로 가는 동안 투이나는 내내 첫 인사말을 고민했다.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해요. 일이 바빴어요? 아니야. 보고 싶었어요? 너무 나갔나. 사실은 당신 생각을 하면 무작정 달려갈까 봐……. 아, 아냐, 아냐!’
투이나가 앞서나가는 마음을 붙잡았다.
처음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자꾸 버릇처럼 긴장해 버린다.
‘잘 보이고 싶어.’
다시 전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투이나는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없는지 두건을 매만졌다.
두건을 쓰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려 머리카락으로 연출할 게 없었다.
아쉬운 대로 반듯하게 천을 편 투이나가 베인의 방문 앞에 섰다.
“베인, 있나요?”
“루가 님.”
인기척을 느낀 사내가 일어났다.
투이나의 방문이 정말 뜻밖이었는지 단숨에 일어난 그의 동작에 당혹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축제 이후로 한 번도 못 봤죠?”
“바쁘셨단 이야기 들었습니다. 어제 돌아오셨다고. 아…….”
일하고 있던 모양인지 베인이 어지러운 책상을 급히 치웠다.
서두르느라 그의 손에 치인 서류가 와르르 쏟아졌다.
베인이 몹시 당황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루가 님. 바로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도와줄게요.”
투이나가 선뜻 손을 뻗었다.
떨어지는 서류를 붙잡으려던 베인이 급히 움츠렸다. 하마터면 그녀와 팔을 교차할 뻔했던 것이다.
복잡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곧 투이나와 조금 거리를 둔 채 나머지 종이를 주웠다.
깔끔하게 서류를 모은 투이나가 베인에게 건넸다.
“미안해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 미리 얘기하고 오는 건데.”
“아닙니다.”
베인이 얼른 투이나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 머뭇거리며 그가 품에 안은 서류를 꾹 쥐었다.
“루가 님이 신전에 돌아오신 건 알고 있었습니다.”
무릎을 굽힌 투이나와 똑같이 몸을 낮춘 채 베인이 말했다.
“실은 이미 다른 구혼자를 만나러 가셨을 줄 알았습니다.”
뜨끔.
가슴이 괜히 찔렸다.
“아니에요.”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베인이 가장 보고 싶어서 제일 먼저 찾아온걸요.”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겠지?’
안절부절못하는 투이나를 달래 주듯 베인이 숨죽인 미소를 지었다.
마치 비밀을 공유한 사람에게 보내는 신호 같았다.
“누구보다도 제게 먼저 오셨군요.”
청록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어찌나 아름다운 표정이었는지 투이나는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렸다. 아직도 서류를 들고 있었다면 다시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을 것이다.
베인이 먼저 살짝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앉으실까요.”
녹진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투이나는 이미 얌전히 소파에 앉아 베인이 차를 준비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언제 앉았지?’
그를 만나면 언제나 단단히 홀려 버렸다.
오히려 그녀를 뺀 다른 사람은 자연스러웠다.
투이나가 멍하게 있는 동안 라카인은 찻주전자를 확인했다.
다소 차가운 눈으로 라카인을 지나친 베인이 투이나의 앞에 다과를 쌓았다.
“전염병을 다스리러 내려가셨다는 소식에 혹시나 몸이 상하셨을까 밤낮을 걱정하였습니다.”
베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투이나가 섬세한 세공이 된 찻잔을 조심스레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잠깐이었는걸요. 잘 해결되었습니다. 오히려 베인이 걱정스러웠죠.”
“저를 말씀이십니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어딘가 불편해 보였거든요.”
“아…….”
베인이 길게 말끝을 뺐다.
잠시 수려한 얼굴에 고민이 드리웠다.
대답을 기다리며 투이나가 계속 바라보자 그가 움찔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저 그날 일에 잠깐 놀랐을 뿐입니다.”
‘그날 일?’
잠깐 기억을 되살린 투이나가 금세 화드득 볼을 붉혔다. 샨과 입 맞췄던 일을 얘기하는 게 분명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왜 둘 다 자꾸!’
투이나가 험하게 굴러가려는 눈동자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건 저도 놀랐어요.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요.”
“죄송합니다, 루가 님. 제가 괜히 불편한 얘기를 꺼냈군요.”
베인이 곧장 사과했다. 그런데 사과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아까보다 즐거워 보였다.
묘한 기분이 된 투이나가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그때 준 손수건도 얼마나 잘 썼는지 직접 봤잖아요. 다시 돌려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루가 님께 드린 물건은 무엇이든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받아요.”
말은 기쁘지만 투이나는 단호했다.
베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손수건을 돌려받았다.
손수건을 받자마자 그는 볼록한 감촉을 알아차렸다.
“이건……?”
베인이 살며시 손수건을 열어 보았다. 거기엔 깨끗하게 닦인 은 단추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곧장 알아보는 베인을 바라보며 투이나가 뿌듯하게 대답했다.
“왜 떨어졌는지 꼭 물어보라던 부탁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투이나는 그가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러나 단추를 내려다보고 있던 베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살짝 드러난 귀 끝과 목까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아닌가.
“베, 베인? 괜찮아요?”
당황한 투이나가 그를 불렀다.
‘내가 무슨 실수했나?’
베인은 입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새하얀 천과 대비되어 길고 얇은 손가락 마디가 붉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을 잠깐만 물러 주시겠습니까?”
“네?”
“남이 엿듣게 할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베인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새빨갛게 볼을 붉힌 것치고는 눈이 침착했다.
투이나가 돌아보자 시종들이 먼저 잽싸게 뒷걸음질을 쳤다. 라카인은 썩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얌전히 물러났다.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물러난 걸 확인한 베인이 일어나 투이나의 옆에 앉았다.
투이나가 한 손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이러면 작게 말해도 들릴 거예요.”
“감사합니다, 루가 님.”
베인이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때 누이가 저와 함께 있던 걸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네, 기억해요.”
“그날 실은 누이에게 상담할 게 있어 신전에 들라 부탁했었습니다.”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이야기인지 그가 자꾸만 입 주변을 매만졌다.
“같은 여자니까 혹 아는 게 있을까 싶어서…….”
투이나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베인은 자꾸만 오르내리는 목을 가리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루가 님의 호감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투이나의 입술이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베인이 나를 꼬시려고?!’
그녀의 낯이 화르륵 뜨거워졌다.
베인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빨갰다.
민망해하면서도 베인은 투이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하든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가 살짝 아랫입술을 핥았다.
“……대답을 듣긴 하였으나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방법이었길래요?”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눈 밑이 완전히 붉어진 베인이 목을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가슴팍으로 내렸다.
몸과는 달리 머릿속으로 한참 치열한 갈등을 벌이던 베인은 제게 못 박힌 그녀의 시선에 결국 허물어졌다.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베인의 손가락이 단추로 꿰인 천 사이를 파고들었다.
툭.
단추 하나가 풀려 나갔다.
얼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투이나는 그의 맨살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베, 베인!”
투이나가 다급히 양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흡사 멱살을 잡은 모습이지만 그걸 신경 쓸 정신은 둘 다 없었다.
“안 돼요!”
동그랗게 떠진 베인의 눈이 투이나를 고스란히 담았다.
투이나는 옷깃을 말아 쥔 손 아래로 만져지는 뜨뜻한 살갗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정신 차려! 우린 아직 연인이 아니잖아!’
“레오나가 이러라고 했나요?”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베인이 울컥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잠시 투이나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레오나! 대체 베인한테 무슨 말을 하고 간 거예요!’
어떻게 호감을 사냐고 했더니 이런 방법을 추천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심지어 자기 동생한테!
레오나라면 따져 봤자 마음껏 즐기라고 윙크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투이나는 베인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애정을 받고 싶진 않아요.”
“……이런 식이 아니라면 어느 방식을 원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베인이 옷을 붙잡은 투이나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왔다. 그녀를 떼어내려는 건 아니었지만 꽤 강한 힘이었다.
“모하세스의 방식을 원하신다면 그렇게 바뀌도록 애쓰겠습니다.”
“뭐라구요?”
기가 막힌 투이나가 짤짤 베인의 상체를 흔들었다.
“누가 그런 걸 좋아한다고 그래요! 베인은 하나도 바꿀 거 없어요. 아니, 제발 부탁이니까 바꾸지 말아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진심이 잇새로 줄줄 새어나왔다.
베인이 얼빠진 표정이 된 걸 보고 나서야 투이나가 화들짝 손을 놓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베인이 와락 잡은 손에 매달렸다.
투이나가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을 움츠렸다.
그녀의 손에서 풀려난 베인의 앞섶이 스르륵 내려갔다.
투이나의 시선이 하늘을 찔렀다.
“베, 베인! 옷, 옷부터…….”
열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올려다보던 베인이 그제야 움찔했다.
팔뚝으로 급하게 쇄골을 가리면서도 그는 잡은 손을 놓기 싫은지 머뭇거렸다.
“부디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를…… 저를 좋아하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절절하게 귀를 내리긋는지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도 이젠 못 멈춰.’
투이나가 질끈 눈을 감았다.
닿은 부분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아릿한 감정을 외면하기엔 그녀는 너무 오래 모른 척해 왔다.
“……네.”
간신히 투이나의 입술이 속삭였다.
그녀가 살그머니 눈을 다시 떴다. 투명한 보석 같은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 듯이 확장되어 있었다.
한번 입 밖으로 뱉자 그다음을 이어 가기는 훨씬 쉬웠다.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투이나가 힘이 풀리는 그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만을…….”
좋아했다고 말하려던 투이나가 잠깐 멈췄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베인의 심장이 그대로 멈춰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베인은 넋이 완전히 나가 버렸다.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한 투이나가 깍지를 꼈던 손을 풀려고 했다.
“베인?”
그녀가 움직이자마자 화급히 정신을 차린 베인이 다시 손가락 마디를 얽어왔다.
“한 번만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다 기절하겠어요.”
걱정스러운 눈이 된 투이나가 진지하게 말렸다.
베인은 더 진지했다.
“기절해도 좋습니다. 그럼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네? 설마요. 그리고 이거 꿈 아니에요.”
투이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눈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투이나가 선뜻 속삭였다.
“좋아해요, 베인.”
여지없이 베인이 얼굴이 환해졌다.
지금 당장 축포를 터트려도 화려한 불꽃보다 베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원하던 대답을 들은 베인은 그만큼 눈이 부셨다.
‘와, 부끄러워라.’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모습에 투이나가 괜히 베인의 귓불을 살짝 꼬집었다.
“자아, 아프죠?”
“……정말 꿈이 아니군요.”
베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렸는지 깍지 낀 투이나의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손등부터 입 맞춘 그가 오목한 뼈마다 쉴 새 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투이나가 파르릇 떨었다.
여전히 입술을 그녀의 손에 댄 채로 베인이 속삭였다.
“그럼 저는 이제 루가 님의 연인입니까?”
성급한 질문에다가 복잡한 상황까지 겹쳐졌지만 투이나는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비밀…… 연인이에요.”
투이나가 아쉬운 듯이 강조했다.
“아직 아르힘 님이 말씀하신 공식적인 구혼 기간이 끝나지 않아 다른 구혼자들을 돌려보낼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베인. 이런 식으로 숨기고 싶진 않을 텐데.”
“참을 수 있습니다.”
베인이 차분하게 답했다.
죄다 잃어버렸던 여유가 그녀의 고백으로 좀 돌아왔는지 그가 자상하게 투이나의 손등을 매만졌다.
“이 세상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루가 님이 알고 계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베인의 눈이 곱게 휘었다.
“1년만 기다리면 루가 님의 남편이 될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쪽 소리를 낸 그가 살며시 투이나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무겁게 눌려 있던 가슴이 겨우 가벼워지는 것 같다.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딱 한 가지만 더 욕심을 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루가 님께 증표를 받고 싶습니다.”
베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아직도 루가 님이 주신 말들이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이 모든 게 착각이 아니라는 확인만 받을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네, 네! 그럼요. 아, 그런데 당장은 준비해 놓은 물건이 없어서……. 뭐가 좋을까요?”
베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미 가지고 계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투이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차렸다.
‘아하.’
그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한 투이나의 입매가 올라갔다.
가볍게 턱을 든 그녀가 베인에게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베인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평생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들처럼 투이나와 베인의 연한 곡선이 꼭 맞물렸다.
‘과거에도 이만큼 깊이 입 맞춘 적이 없었어.’
투이나가 부드럽게 베인의 목을 쓸어내렸다.
분명히 같은 사람과 하는데도 죽기 전에 몇 번인가 나누었던 것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몰입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투이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그가 자꾸만 바르작거렸다.
완전히 서로에게 빠져 있던 두 사람의 정신이 돌아온 건 헛기침 소리 때문이었다.
그 자리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크흠!”
투이나의 숨이 흡, 들이켜지는 것과 동시에 베인이 떨어졌다.
짙은 그의 눈동자가 진한 아쉬움을 말했다.
몇 걸음 뒤에서 각양각색으로 질려 있던 시종들이 어렵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그들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새삼스레 부끄러워진 투이나가 터져버릴 듯한 분위기를 톡톡 두드렸다.
“비밀로 해 주셔야 돼요.”
투이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시종들이 새빨갛거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움직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참 애매했다.
유일하게 라카인만 원래의 얼굴색을 유지한 채 그들을 응시했다.
‘이 일도 샨에게 비밀로 해 주겠지?’
이미 얼룩병이나 마법사 얘기도 비밀로 지켜 준 사람이니 믿을 수 있었다.
다만 무덤덤한 라카인을 보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투이나가 다른 사람보다 약간 오래 라카인을 쳐다보고 있자 베인이 조급하게 말을 돌렸다.
“루가 님, 오늘 일을 비밀로 할 거라면 누이에게도 말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레오나한테도요?”
“오늘 일이 자기 조언으로 잘 풀렸다고 생각하는 게 싫습니다.”
베인이 드물게 새초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자기가 했던 짓이 못 견디게 민망했던 것이다.
“누구든 속살만 조금 보여 줘도 넘어올 거라더니…….”
‘레오나아!’
상상보다 너무 적나라한 권유였다.
기겁한 투이나를 본 베인이 창피함을 감추려는 듯 빠르게 단추를 잠갔다.
“죄송합니다, 루가 님.”
“그래서 단추가 뜯어진 거예요? 제가 오는 줄 알고 레오나가 억지로 잡아 뜯었어요?”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달려드는 걸 떼어 놓다가 떨어졌습니다. 누이가 손톱이 길어서요.”
베인이 정정했다.
남다른 남매의 모습에 적응하기 힘든 투이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베인은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는 줄 알았는지 다급히 변명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았던 건 아무데서나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가 님. 저…… 보기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왜 그걸 변명해요!’
베인이 정말로 불안해 보였기에 투이나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베인, 세상에서 베인만큼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베인의 외모는 옷 안쪽에 괴물이 살고 있어도 용납될 미모였다.
저렇게 잘난 얼굴로 자신감이 없다니. 문제가 있다.
“베인은 숨만 쉬어도 아름다운걸요.”
‘너무 막 말했나?’
다행히 베인에겐 효과가 좋았다.
칭찬을 들은 눈이 일렁이더니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네요.”
투이나가 활짝 웃었다.
베인이 따라 웃는데 어찌나 황홀하던지. 내내 주저하고 있던 투이나는 그가 연인이라는 걸 되새겼다.
‘괜찮아. 이젠 해도 돼.’
투이나가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손에 감겼다.
그리웠던 감각에 투이나가 싱긋 웃었다.
베인은 누군가 가슴을 후려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인이 되기 무섭게 서슴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투이나에게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가 화악 달아오른 얼굴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누이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에이, 그건 아니에요.”
투이나가 쿡쿡 웃었다.
“레오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결국 고백하는 건 우리 몫이었잖아요? 게다가 좋은 방법도 아닌데 감사를 받기엔 과하죠.”
“그렇다면 똑같이 골려 줘야겠군요.”
베인이 즉각 답했다.
그 대답은 투이나의 마음에 꼭 들었다.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베인을 보자 지금까지 해 온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로 연인이 되다니.
‘죽기 전보다 더 빨리 해낸 거야.’
그래서 투이나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이 그녀를 감쌌다.
* * *
베인과 연애를 시작한 여운은 꽤 길게 갔다.
떠나는 순간까지 떨어지기 아쉬워하던 그의 얼굴이 눈꺼풀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가 않았다.
‘벌써 그리워.’
얇은 금테 같은 속눈썹이 옅게 상기된 볼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가. 루가!”
투이나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초점이 맞자마자 잔뜩 좁혀진 샨의 미간과 딱 마주쳤다.
“어디다 정신을 빼놓고 있는 거지.”
“미안해요.”
투이나가 서둘러 이성을 깨웠다. 샨의 거처에 들어온 뒤에도 마음에 휘둘리면 곤란했다.
‘게다가 오늘처럼 중요한 얘기를 하는 날에.’
투이나는 약속대로 다음 날 곧장 샨의 거처를 찾았다.
설마 편지에 썼던 협박대로 행동할까 약간 긴장하긴 했지만, 다행히 샨은 투이나가 나타난 걸로 만족했는지 심술궂게 굴지 않았다.
둘 다 같은 왕이니 바쁜 건 너그럽게 이해해 준다고 말했던 것이다.
가끔은 오해도 편리하다.
샨이 길게 입술을 비죽였다.
“이제 내가 많이 편해졌나 보지?”
“글쎄요…….”
말끝을 흐린 투이나가 얼른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실은 지난번에 샨이 했던 제안을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기억은 하고 있었군?”
샨이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오늘 그는 가죽을 덧댄 튜닉 차림에 커다란 황금 걸쇠를 차고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칼 한 자루만 쥐여 주면 당장이라도 사자 한 마리를 잡아올 듯했다.
그런 기상을 지닌 자가 온전히 저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니 저절로 오금이 저렸다.
“라카인에게 제사에 대한 자세한 절차를 전달받았습니다.”
“…….”
샨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침묵했다.
“아르파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마다 백 마리의 살아 있는 제물의 피가 필요하며, 왕에게는 예리한 한 자루의 칼과 마지막에 목이 베일 산짐승이 있어야 한다지요.”
“그렇다.”
“또 제사를 올리는 동안 아무도 접근해서는 안 되며, 먼발치에서 바라봐야 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샨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준비해 줄 수 있겠지?”
투이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처음 사제들 앞에서 라카인이 제사 내용을 설명했을 때, 그들의 얼굴이 얼마나 희게 질렸는지 모른다.
‘산 제물을 바치는 건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다니.’
솔직한 심정으론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힘의 신전은 장구한 세월 동안 적들의 피조차 뿌려지지 않았다. 오직 바람과 비만이 위대한 돌 벽에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아, 되살아나기 전에 내 피가 뿌려지긴 했었지.’
투이나가 찜찜하게 떠올렸다.
되살아났으니 그건 빼도 괜찮겠지.
어차피 아르힘의 신전에서는 아르파가 강림할 수 없으니 굳이 무고한 피를 뿌릴 필요가 없었다.
과거까지는.
“장소는 마법사가 준비할 테지.”
샨이 이미 짐작하고 있던 내용을 말로 꺼냈다.
투이나는 곧장 심란해졌다.
시드룬의 도움을 받아 내기에 이긴 건 좋았지만, 이제 공식적으로 신전 밖으로 나갈 방법이 생기고 말았다.
더 이상 아르힘을 핑계로 샨을 말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꼭 백 마리여야만 하나요?”
“하나도 모자랄 수 없다.”
“그렇게 많으면 어차피 제사가 끝나도 다 먹지 못할 텐데…….”
“먹어?”
샨이 재미있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대는 언제나 먹을 생각으로 죽을 것들을 바라보나?”
“무고한 죽음은 당연히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의미가 있어야지요.”
투이나가 쓸쓸하게 말했다.
“그래야 사라진 목숨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식탁에서라도 말이지.”
가만히 눈썹을 들어 올린 샨이 대꾸했다.
무슨 말이든 꼬아듣는 그를 투이나가 진절머리를 내며 쏘아보았다.
샨은 그녀의 반응에 만족스럽게 의자에 어깨를 기댔다.
‘말을 말자.’
“어쨌든 백 마리의 짐승들을 풀어 놓고 하나씩 죽이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대가 그걸 안다고?”
“네.”
투이나가 명민한 눈을 빛냈다.
“자세히 이야기를 들으니 꼭 필요한 산 제물은 마지막에 목을 벨 것만 있으면 되겠더군요. 제사에 그게 정말 필요하다면 말입니다.”
당연한 조건이라 샨이 뒷말은 무시했다.
“나머지 피는.”
“살아 있을 때 뽑으면 됩니다.”
샨의 눈이 가늘어졌다.
투이나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때야말로 사제들의 힘이 빛날 차례였다.
짐승들이 살아 있을 때 일부러 칼로 상처를 내서 피를 받고, 너무 심해지기 전에 사제의 기도로 낫게 하면 죽지 않고도 백 마리 분량의 피를 모을 수 있다.
‘시드룬이랑 있었던 일 덕분에 생각해냈어.’
그가 연구에 쓰겠다며 피를 요구했을 때 투이나를 죽이지 않은 게 실마리가 되었다.
피는 죽음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모아 둘 수도 있는 물건이라고.
‘나도 사제님의 기도가 듣는 몸이었으면 시드룬에게 더 많이 피를 줬을 텐데.’
투이나의 설명을 들은 샨이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치료사들이 거머리로 피를 뽑던 방식과 비슷하군. 열이 높다고 할 때마다 피를 뽑으면 좋아진다고 헛소리를 하던 작자들이 많이 맞아 죽었지.”
“그……건 모르는 이야기지만, 이러는 편이 훨씬 낫지 않나요? 죽이지 않고도 모을 수 있으니까.”
투이나가 꿋꿋하게 설득하자 샨이 묘한 눈길로 맞받았다.
“정말로 그대의 말이 가능하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단순히 백 마리라는 숫자만 채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충분히 땅을 적실 만한 양이어야 하지.”
샨이 어떻게 나오나 보자는 듯이 팔짱을 꼈다.
투이나는 은근히 승부욕이 피어올랐다.
“한 번에 뽑아낼 순 없겠지만 시간을 들이면 제사에 필요한 만큼 채울 수 있어요.”
“피는 오래되면 굳는다, 루가.”
샨이 대꾸했다.
몹시 즐거워 보이는 말투였다.
“아무리 뽑을 때는 살아 있었다 해도 백 마리를 채울 때쯤이면 새까맣게 굳어 시체의 피와 다를 게 없어지겠지.”
“……제사 전에 한꺼번에 뽑아내야겠군요.”
샨의 시비에도 투이나는 끄떡없이 대답했다. 제법 그를 대하는 데 담이 붙었다.
샨이 슬쩍 웃었다.
“아르힘의 신전에서 그걸 감당할 만큼 가축을 기르던가? 재산이 제법 있다고는 들었다만.”
“물론 백 마리 짐승의 값은 치러야지요, 샨. 당신이요.”
샨이 피식 웃었다. 투이나가 얄궂게 구는 모양이 싫지 않아 보였다.
“그런 푼돈쯤이야 얼마든지 치르지.”
샨이 옆에 놓여 있던 잔을 들어 마셨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워 보였다.
‘휴우…….’
어려운 고비를 넘긴 투이나가 한 모금 따라 마셨다. 가장 난감했던 제물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샨의 손에 잡힌 잔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투이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차디찬 금속을 눌렀다.
“그대는 제사를 하지 말아 달라고 소원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예상보다 독한 맛에 살짝 찡그리고 있던 투이나가 대답했다.
“샨에게 중요한 일인데 소원까지 써 가며 말릴 생각 없습니다.”
멈칫.
매끄러운 표면을 긁던 샨의 동작이 정지했다.
“내게 칼을 줄 생각인가?”
투이나는 흘끗 샨을 마주보았다.
제 등에 칼을 꽂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가 똑바로 묻고 있었다.
“요란하게 내 손발을 끊어 놓으려고 별짓을 다 한 다음에?”
무기 금지, 신을 부르는 것 금지, 제사 금지, 자유로운 외출 금지.
여차하면 적대적인 신이 나타나 그를 불태워 버릴 수 있는 장소에 가둬두고 침착하라 당부하기.
이것이 청혼했다는 이유로 냉큼 전쟁광에게 채운 족쇄였다.
‘미쳐 날뛸 만도 해. 이해는 해.’
투이나는 과거의 샨이 자신을 사랑했다고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다만 구석으로 몰아넣다 그에게 물려 죽기 전에 압박을 풀어 주려는 것뿐이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위험한 건 칼이 아냐. 사람이지.’
투이나는 이미 사제와 어마어마하게 논쟁했던 문제에 종지부를 찍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샨에게 칼을 줄 겁니다.”
그녀의 대답에 오히려 주변이 더 술렁거렸다.
놀라는 시종들을 확인하느라 투이나는 샨의 눈빛이 변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를 믿나?”
투이나는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문득 그의 목소리에 담긴 은근함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목덜미가 선득했다.
“……저야 언제나 아르힘 님을 믿지요.”
슬그머니 투이나가 말을 돌렸다.
샨이 거만한 눈빛으로 쏘아봤지만 차마 그를 믿는다고 선뜻 말할 수가 없었다.
‘왜 샨의 질문에 아르힘 님이 아니라 베인한테 죄책감이 들기 시작하는 거야?’
당혹스러웠다. 샨의 눈빛이 자꾸만 파고들어 낱낱이 속을 파헤치는 것 같았다.
고기를 문 짐승처럼 그녀의 반응을 질질 끌고 가던 샨이 피식 웃었다.
“아아, 알겠군. 내게 미안한가 보지.”
“왜 샨에게 미안하겠어요?”
“이유는 그대가 알겠지.”
샨이 느긋하게 말했다.
“예를 들어…… 연모하는 감정 때문에 보다 중요한 일을 그르치려 했다던가?”
‘뭐야?’
철퍽.
갑자기 투이나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올랐다.
‘왜 저런 소리를 하지? 설마…… 샨이 알았나?’
깊게 패인 샨의 푸른 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읽을 수가 없었다.
베인을 향한 걱정으로 조마조마해진 투이나가 말했다.
“샨에겐 연모가 필요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투이나의 확인은 효과가 있었다. 샨에게 드리운 조롱기가 사라졌던 것이다.
“절대로 샨과 하는 중요한 일에 사모라던가 애정이라는 감정을 끼워 놓지 않을 테니 그런 염려는 접어 두세요.”
“그거 참 대단한 일이군.”
샨이 성마르게 비꼬았다. 원하던 대답을 들었음에도 그는 오히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대는 올바른 말로도 나를 거슬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올바른 말이라니 다행이네요.”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샨이 곧장 눈살을 찌푸렸지만 움찔했지만.
그는 금세 화를 거두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앞으로도 미안해할 일이 없길 바라지, 루가.”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투이나가 답했다.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투이나를 응시하고 있던 샨의 입술이 말없이 위로 올라갔다.
어찌 됐던 자신을 위해 믿지도 않는 신의 제사를 준비하겠다는 투이나가 제법 귀여워 보였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열심히 비밀을 감추려 드는 게 말이다.
샨이 자꾸 잔혹해지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할지 모르겠군.’
그녀는 비밀이 이미 제 손으로 굴러들어왔다는 걸 알까?
그녀 주변에 심어 놓은 측근을 알아차렸는지도 궁금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오로지 그녀가 뼈저리게 후회할 날만이 기다려졌다.
* * *
투이나는 자꾸만 등이 오싹해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편하지?’
차라리 샨이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봤으면 이해라도 하지.
그는 평소랑 똑같은데 괜히 혼자서만 짐승의 아가리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다.
‘착각이겠지.’
샨이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기에 그녀도 원인 모를 한기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뒷덜미를 차갑고 축축한 손으로 만지는 감각은 샨의 거처를 나설 때까지 따라왔다.
하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투이나가 긴 숨을 토해냈다.
“후우…….”
“루가 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냥.”
라카인과 멀어지는 샨의 거처를 번갈아 본 투이나가 살짝 물었다.
“혹시 아까 샨의 기분이 안 좋았던 건가요?”
투이나가 라카인에게 물었다.
일 년을 넘게 봤어도 아직 샨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나빠 보이진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투이나가 찜찜해 보이자 라카인이 덧붙였다.
“원래 기분이 좋고 나쁨으로 행동을 가늠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죠? 왠지 샨이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서…….”
그녀가 말한 의미는 덫에 치인 것처럼 섬뜩하단 얘기였지만, 묘한 표현에 시종들은 다른 뜻으로 오해했다.
“뭐야? 분명 크로퍼드랑 좋은 분위기 아니셨어?”
“쉿. 아직 구혼 기간이잖나.”
“하긴 모하세스가 성격만 빼면 흠 잡을 데가 없으니…….”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 별 얘기 아닙니다, 루가 님.”
시종들이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과연 투이나의 마음이 어디에 정착할지 추측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뒤에서 그걸 고스란히 보고 있던 스카차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루가 님, 이만 성소로 가실까요.”
“네, 그래요.”
성소로 갈 때는 많은 인원이 필요 없어 자연스레 무리가 둘로 갈렸다.
아르힘이 있는 곳에는 접근 불가 판정을 받은 라카인이 미련을 뚝뚝 흘렸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이따 봐요.”
투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스카차와 시종 몇 명만 따로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과 꽤 거리가 벌어지자 스카차가 조심스레 말했다.
“루가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어떤 걸요?”
“신전에서 루가 님을 상대로 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투이나가 깜짝 놀랐다.
화들짝 놀란 건 시종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걸 루가 님한테 말하면 어떡합니까!”
“당신들도 내기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죠! 사제님들도 하는데 우리가 왜 빠진답니까?”
“의회에 있는 잘나신 나리들도 다 한답니다. 판돈이 어마어마한데 그럼 안 하남?”
“아무리 그래도 루가 님 계신 곳에서까지 쑥덕거리는 건 너무 무례하다고요!”
“여러분! 일단 진정하세요.”
어안이 벙벙해진 투이나가 말렸다.
“스카차,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해 줄래요?”
“그러니까 시작은 라카인을 감시해달라고 했던 사제였습니다. 그가 수상하게 굴진 않는지, 따로 만나는 사람이 없는지 보고를 듣던 사제가 어느 순간부터 루가 님의 이야기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요?”
“물론 저희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스카차가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그가 수상해서 조사를 해 보니, 다들 루가 님의 남편감을 두고 내기를 벌였던 겁니다.”
“세상에…….”
“기한과 상대가 명확한 데다 절대 속임수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 내기에 뛰어드는 자가 엄청 많아졌습니다. 알아보니 걸린 돈도 이미 단순한 내기 수준을 넘어섰답니다.”
투이나가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뒤로 이런 내기가 오가는 줄이야. 호위를 뽑지 않았다면 전혀 모를 뻔했다.
“그래서 여러분도 돈을 건 거예요?”
“저희는 그저 순수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겁니다, 루가 님!”
시종들이 급하게 변명했다.
“곁에서 루가 님을 모시니까 보이는 게 있잖습니까. 남들보다 쪼끔 더 유리할 뿐이죠.”
“그렇다고 절대 어디다가 말을 옮긴 적은 없습니다! 암요!”
“사제님들이 돈까지 쥐여 주면서 루가 님이 요즘 누굴 신경 쓰냐고 물어봐도 입 꾹 다문다니까요.”
시종들의 항변을 듣던 스카차가 참지 못하고 비꼬았다.
“예. 내기의 배당률을 신경 쓰느라 서로 정보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눈치를 보던 시종들의 입이 합 다물렸다.
반박을 못 한다는 소리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졸지에 내기의 주인공이 된 것도 모자라 돈까지 오가고 있었다니.
투이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지금이라도 중단할 순 없나요?”
“이제 와서 내기를 없애 봤자 어차피 할 사람들은 할 텐데요…….”
그건 그랬다.
시종이 살살 눈치를 보았다.
“그것보다는 지금처럼 돈을 한데 모아두고 싸움 날 일 없게 관리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관리라뇨?”
시종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잡아낸 투이나가 되물었다.
“내기를 주관한 사람이 있나요?”
“그것이…….”
시종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스카차가 대신 말했다.
“크로퍼드 상단입니다.”
일순 투이나의 눈빛이 변했다.
이 유쾌하지 않은 거대한 내기를 만든 게 크로퍼드 상단이라니. 베인의 집안이 아닌가.
‘……그럼 베인도 알고 있을까?’
갑자기 그게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투이나의 표정을 본 시종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내기는 다 레오나 크로퍼드가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입니다.”
“의회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왔는데 재밌겠다며 한바탕 웃더니 자기가 돈 관리를 맡겠다고 나섰다는군요.”
“수수료도 안 받겠다고 했답니다. 어차피 이만한 금액을 관리할 수 있는 상단은 자기들밖에 없지 않냐고 했다던데요.”
“아주 양심적이죠?”
열렬한 시종들의 반응을 본 투이나가 마른세수를 했다.
“……여러분은 베인한테 걸었군요.”
뜨끔.
찔린 시종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스카차가 한심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렇듯 사태가 심각합니다. 아무리 재미로 진행하는 일이라지만 장본인인 루가 님이 모르신다는 건 말이 안 되잖습니까.”
“맞아요. 정말 고마워요, 스카차. 하마터면 까맣게 모를 뻔했네요.”
투이나의 치사에 스카차가 뿌듯해했다.
시종들만 원망스럽게 그를 흘겼다.
“저어, 그럼…… 정말로 내기를 막으시려고요?”
걱정이 잔뜩 담긴 질문에 투이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솔직히 기쁘진 않아.’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받는 거나 마찬가지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돈이 걸리기 시작하면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감춰져.’
신전 밖에서 살 때 금화가 걸리면 얼마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지 많이 겪었다.
소문, 보장, 속임수, 현혹, 과장, 축소, 믿음, 기만.
귀에서 귀로 전해지는 정보들은 확실하다는 공기를 먹고 빵빵하게 커졌다. 실속 없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투이나가 직접 내기의 중심으로 뛰어든다면 흐름을 조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밀을 가진 자에게 그것만큼 강한 무기가 없으니까.
‘게다가 내기를 하는 동안 사람들이 말을 아끼게 될 테니 이득이 두 가지나 돼.’
내기란 걸린 돈을 나눠 갖는 구조다 보니 다른 사람이 손해를 봐야만 이득을 얻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서로를 속이려 들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 내게 도움이 되겠지.’
비록 뱃속 어딘가가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느낌이지만…….
“내기를 중단시키진 않을게요.”
“정말이십니까!”
시종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어떻게 되어 가는지 이제 루가 님한테도 알려 드릴게요.”
투이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급격히 침울해진 투이나를 본 스카차가 위로할 말을 찾았지만, 워낙 모자란 눈치로는 어려운 일이라 결국 그도 입을 다물었다.
성소에 도착할 때까지 다시 내기 얘기를 꺼내는 자는 없었다.
투이나도 생각에 잠기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사제님들까지 돈을 걸었다면 내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겠지.’
구혼자들은 당사자니 참여하지 않았을 테고, 스카차의 반응으로 보아 호위들도 내기를 안 한 게 틀림없었다.
투이나는 새삼 호위들의 존재가 다행스러웠다.
그동안 가깝다고 생각했던 신전 사람들이 이제는 몹시도 멀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제 베인과 있었던 일을 본 사람들은 절대로 소문 내지 않을 거야. 확실한 남편감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쥐고 있어야 유리하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라도 일부러 다른 사람과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게 낫지 않을까? 혼란스러워하도록. 내가 베인에게 진심이라는 걸 샨이 눈치 채지 못하게.’
샨은 하인이 많았다. 재산도 지나치게 많았다.
쓸 패가 여유롭다는 뜻이다.
비록 아르파 출신이라 아르힘 내에서 협조를 구하긴 어려워도 돈을 집어 주면 반드시 그에게도 정보가 흘러간다.
투이나가 골머리를 썩였다.
어떤 소문을 내는 편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고민에 빠져 있던 투이나가 벽에 부딪쳤다.
어느새 종탑에 도착했던 것이다.
‘휴, 정신 차리자. 아르힘 님께 고민을 전달할 셈이야?’
상념을 떨쳐 버린 투이나가 벽에 손을 짚었다.
“아르힘 님, 당신의 종 루가가 방문을 청합니다.”
그녀는 금세 성소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황금 종을 보자마자 아르힘의 존귀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라면 누구에게 걸겠느냐?”
“……네?”
인사를 하려고 무릎을 굽히던 투이나가 어정쩡하게 굳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아르힘이 공중에서 통통 뛰어내려왔다.
치료를 시작하려고 아르힘이 머리에 손을 올린 뒤에도 투이나는 당황스러워했다.
설마 아르힘이 만나자마자 내기 얘기를 할 줄 몰랐다.
‘오는 길에 한 얘기를 듣고 계셨나?’
투이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저는……. 죄송해요. 아르힘 님께서 내기를 반대하실 줄로만 여겼습니다.”
“나는 찬성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다.”
아르힘이 싱긋 웃었다.
“인간을 심판하고자 했다면 다스렸을 것이다. 인간을 구하고자 했다면 이 또한 다스렸을 것이다.”
그가 천천히 힘을 주자 투이나의 얼룩이 뜨거워졌다.
“다만 사랑하고자 함이니, 너희의 행동이 어찌 가엽지 않겠느냐.”
작은 손이 얼룩이 있는 자리를 토닥였다.
“그러니 아이야, 너의 의심 또한 내가 사랑하는 줄 모르겠느냐?”
소년이 개구쟁이처럼 미소 지었다.
너그러우면서도 확실한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누구를 내기에 걸고 누구와 결혼을 하든 나는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다.”
“……과분합니다.”
“행동에 걸맞은 답일 뿐이다. 네가 하는 일마다 즐거우니 주저하지 말거라.”
아르힘이 가볍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이미 허락하였노라.”
그리하여 구혼자 내기는 신의 허락까지 받아내고 말았다.
* * *
다음 날, 흑단으로 만든 상자 세 개가 신전으로 들어왔다.
가로는 한 뼘 정도로 짧았으나 세로는 발부터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길었다.
크로퍼드 상단의 문양이 새겨진 세 개의 검은 상자는 각각 크기와 무게가 똑같았다.
투이나는 잠겨 있지 않은 걸쇠를 열고 뚜껑을 들어 올렸다.
궤짝은 붉은 융단으로 푹신하게 안을 메운 뒤, 날카롭게 벼려낸 화려한 검을 담고 있었다.
“최고급 세공 장인과 대장장이 여덟 명이 매달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낸 세쌍둥이 검입니다.”
운반자가 활달하게 설명했다.
나머지 두 개의 상자를 열자 똑같이 생긴 검이 같은 모습으로 들어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은빛의 검 세 자루는 긴 양날에 넝쿨 모양의 보호 장식이 손잡이에 얽혀 있었다.
십자 형태의 단순한 크로스 가드만 보아 왔던 투이나는 독특한 모양에 감탄했다.
직접 검을 들어 보았다.
양손으로 잡았는데도 묵직한 무게에 검 끝이 흔들렸다.
‘그래도 힘이 좀 있으면 한 손으로도 다루겠는걸.’
몇 번 휘둘러 보려던 투이나가 어설픈 동작에 누가 다칠라 스스로 검을 내려놓았다.
“모양이 특이하네요. 취향을 타겠는걸요.”
“익숙해지면 재밌는 상황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선물로 주기엔 그만이죠.”
“베인이 쓰던 검을 참고했나요?”
능청스럽게 설명하던 운반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투이나가 시선을 떼지 않자 검 세 자루의 운반자가 씩 웃었다.
“누나가 이 정도 배려는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빛 머리를 땋아 내린 레오나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투이나는 참 묘한 순간에 검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세 자루의 검은 구혼자들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준비한 물건이다. 과거의 살인자를 찾아내려면 무기를 쥐어 주는 게 가장 적격이었으니까.
‘실은 베인이 아직도 검을 잘 다루는지 확인하려고 한 거지만…….’
투이나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어쨌든 검술 실력을 보려면 신전에서 금지된 품목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투이나는 베인의 형편없는 검 실력을 확인하고 안심하려고 했다.
그녀를 살해한 자는 분명 뛰어난 실력을 가졌으니까.
그런데 크로퍼드 상단에서 주최한 내기가 밝혀지고, 시드룬의 연구를 알게 되고, 샨의 제사를 돕는 지금, 단순히 그의 실력을 안다고 의심을 떨쳐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을 둘러싼 관계가 보다 복잡했으니.
‘과연 딱 한 번의 시험으로 범인을 가려낼 수 있을까?’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구혼자들을 더 멀리까지, 더 자세하게 보아야만 했다.
‘알아야만 해.’
투이나가 말없이 세 자루의 검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레오나가 안달을 냈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어쩌나. 미리 루가 님께 완성품이 어떻게 될지 말씀드릴 걸 그랬습니다.”
“검은 마음에 들어요.”
투이나가 어쩔 수 없이 약해졌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도 레오나의 말투가 베인을 닮아 있었기에 냉정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레오나가 방실거렸다.
“다른 마음에 안 드시는 건요?”
“내기 이야기를 들었어요, 레오나.”
투이나가 깍지를 꼈다.
가볍게 책망하는 어투에 의욕 많은 잡상인을 연기하고 있던 레오나가 곧장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런, 제가 잘못한 거죠?”
아름다운 눈망울에 반성의 빛이 깃들었다.
“루가 님께도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희 상단에서 정말 공명정대하게 내기를 주관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아르힘 님 앞에 맹세할 수 있어요.”
“왜 제게 먼저 말하지 않았어요?”
“루가 님께 말씀드리기엔 너무 세속적인 이야기잖습니까. 게다가 분명히 베인 생각이 나실 테고요.”
“베인 생각은 언제든 하죠. 레오나라면 신전 사람들까지 내기에 끼워 줬을 때 분명히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잖아요?”
레오나는 드물게 동요했다.
신전이 아니라 베인 얘기에 당황한 것이다.
본인의 실언을 알아차리지 못한 투이나가 계속 쳐다보자 그제야 레오나가 대답했다.
“모두가 돈을 거는데 신전 사람들만 빼놓는 것도 야박한 일이잖아요?”
“레오나!”
“농담입니다, 루가 님. 농담이에요.”
레오나가 얼른 웃음기를 지웠다.
“실은 저도 루가 님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비슷하다뇨?”
“어차피 제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내기는 시작되었을 텐데, 음지에서 돈을 걸기 시작하면 금액은 쉽게 뛰고 사람들도 위험해지기 쉽죠. 아르힘엔 전쟁이 없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쾌락에 돈을 쓰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레오나가 남 일처럼 얘기했다.
그 말에 문득 기억나는 게 있었다.
“레오나와 베인은 원래 아르피기아에서 태어났죠?”
“그렇습니다, 루가 님.”
레오나는 미소 지었지만 그녀의 눈빛에 살짝 조심성이 비쳤다.
“설마 제 신앙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시죠?”
“그럴 리가요!”
“저흰 이미 망한 나라에 아무런 유감도 없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조차 사라진 수호신을 믿지 않으셨죠. 떠돌던 저희를 아르힘 님이 받아 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레오나의 목소리가 슬프게 잠겨들었다.
다급히 투이나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런 소리 말아요. 물론 레오나와 베인이 여기 정착해서 몹시 기쁘지만, 여기가 아니었더라도 분명 잘해냈을 거예요.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상단까지 다시 일으켰잖아요?”
“하지만 아르힘이 아니었더라면 이교도였으니 결코 높은 지위까진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레오나가 온화한 표정 너머로 훌쩍이는 시늉을 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없었지만 물기에 젖은 눈동자만은 반짝거리며 빛났다.
“저희는 결코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루가 님.”
그녀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런 사소한 물건들을 바치는 걸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더 요구하십시오, 더!”
“레오나! 당신과 베인은 아르힘 사람이에요. 그걸 물건을 바쳐 가며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투이나가 말리려고 한 소리에 오히려 레오나의 목소리가 더 격해졌다.
“어쩜 이리 고결하실까! 루가 님이 피난민들에게 하신 일을 알자마자 진정으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신경 써 주는 건 루가 님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사제님들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계시죠…….”
그러나 당황한 투이나의 말은 흥분한 레오나의 귀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수호신이 있다는 어느 나라에도 아르힘 님과 루가 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이처럼 훌륭하신 분과 동생을 결혼시키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레오나가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기를 주관한 것도 다른 이유 없습니다. 제가 맡아야 공평함을 위해 돈을 못 걸겠지요? 안 그랬다면 전 분명히 베인이 승리할 거라고 상단의 전 재산을 털어 넣었을 겁니다.”
당당하게 외치는 레오나의 표정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투이나가 저려 오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제발, 레오나……. 진심으로 말리고 싶게 하지 말아요.”
“말리다뇨? 설마 베인이 진다는 말씀……. 그러니까 베인이 마음에 안 드신다는 말씀입니까?”
레오나의 눈이 희번덕하게 번쩍였다.
“분명히 외모만큼은 확실하게 가꿔뒀는데……. 그 녀석, 루가 님께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분명히 조언해 준 게 있건만.”
빠르게 눈이 가늘어지는 레오나가 불길했다.
투이나가 다급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이제 레오나가 왜 내기에서 빠지려고 했는지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레오나라면 차라리 주관하는 게 낫겠네요.”
“역시 루가 님께선 명민하신 분입니다.”
레오나가 언제 흥분했냐는 듯 윙크했다.
투이나만 한숨이 목에 걸렸다.
격렬하게 얘기하느라 풍성한 머리칼이 삐져나온 레오나가 호흡을 가라앉히며 머리를 정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한 마리 귀족 새처럼 우아했다.
“압니다. 제가 봐도 정말 몹쓸 성격이지요. 덕분에 상단은 커졌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남는 돈을 신전에 퍼부어서 속죄하는 수밖에요.”
싱글거리며 레오나가 허리를 숙였다.
절을 하듯 투이나에게 몸을 낮춘 레오나가 다시 한번 검이 든 상자를 투이나 쪽으로 밀었다.
이번에는 제법 단호한 손짓이었다.
“그러니 부디 받는 걸 부담스러워하지 마십시오. 크로퍼드 상단은 루가 님께 모든 걸 바쳐도 기쁠 것입니다.”
레오나가 워낙 간절하게 눈을 빛내는 통에 결국 투이나는 돈이 필요한 일이면 그녀를 부르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호의를 뿜어내는 사람을 거절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 * *
레오나와 있었던 일을 알게 된 베인은 한 손으로 얼굴을 파묻고는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창피해서였다.
“누이가 좀…… 과장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베인이 간신히 한 마디를 꺼냈다.
손가락 사이로 굴러가는 그의 눈동자는 차마 투이나를 바라볼 수 없는 듯했다.
그나마 투이나는 시간이 좀 지나 그럭저럭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레오나의 만행을 전해들은 베인은 죽을 맛이었다.
“……정말이지 루가 님께 별소리를 다 했군요.”
베인이 꾹꾹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투이나가 가볍게 웃었다.
“나름 재미있었어요.”
베인이 마른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깐 애달프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보다 정상적인 이야기로 루가 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엽게도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심정을 보여 주는 듯했다. 수선함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빛이 눈에 부셨다.
‘저런 모습에도 두근거리는 내가 이상한 걸까?’
뱃속이 간질거린 투이나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에 베인이 금세 볼을 붉혔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베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투이나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베인의 팔에 기댔다.
베인은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그녀 몰래 손을 바르작거렸다.
억눌러야 한다.
베인은 당장이라도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무수한 말을 예법에 맞도록 때려 부쉈다.
그는 한참을 정신적으로 내려친 뒤에야 정갈한 단어가 된 말을 투이나에게 건넸다.
“그렇다면 누이가 시작한 이야기를 제가 끝내겠습니다. 아르피기아가 어떻게 파멸을 맞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르힘에 이르렀는지.”
베인이 살며시 투이나의 손가락 끝을 붙잡았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