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12/43)

12.

‘…목을 내주고서. 그들은 물어뜯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노라.’

투이나가 방에 있는 동안 호위들은 문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러니까 하체를 칠 때는 차라리 멀리서 때리는 게 낫다니까.”

“창은 동작이 너무 커져서 돌린 다음에 위에서 내리꽂는 게 더 나아.”

“지난번에 그러다가 라카인한테 열세 군데나 비었다면서 격파당했잖아.”

“그건 경우가 다르지.”

호위를 서면서도 호루니와 스카차가 속닥거렸다.

라카인은 문에 기대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호위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훈련 때 겪어 본 바로는 차라리 라카인이 조용한 게 편했다.

무슨 일이든 기준이 높은 그는 일단 뭔가를 하려고 들면 끝장을 봤던 것이다.

지금처럼 침묵을 지키는 일도 그랬다.

그때 동상처럼 완벽하게 가만히 있던 라카인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쿵쿵쿵.

라카인이 투이나의 방문을 두들겨대자 호위들이 화들짝 놀라 대화를 멈췄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안에서 다른 소리가 들렸다.”

“그야 루가 님이 계시니 당연한 거 아닌가요?”

“…….”

라카인은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색으로 다시 문을 두드렸다.

“루가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건너편에선 대답이 없었다.

라카인은 아까보다 더 강경해졌다.

“세 번을 더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시면 들어가겠습니다.”

“예?”

“너무 무례하십니다!”

라카인은 대꾸도 없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호위들은 난감하게 말려야 할지 고민했다.

다행스럽게도 투이나의 외침이 곧 들려왔다.

“잠깐만요!”

라카인의 손이 뚝 멈췄다.

평소와 다름없는 투이나의 목소리에 호루니가 그거 보라는 듯이 눈썹을 모았다.

그러나 모아 쥔 라카인의 손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한참 만에 투이나가 소리쳤다.

“이제 들어와도 괜찮아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라카인이 문을 열었다.

투이나는 다소 부산스러운 자세로 침대에 올라가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나 싶었다.

호위들이 들어오자 황급히 허벅지 밑으로 손을 감춘 그녀가 활짝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급하게.”

“누군가와 함께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라카인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뜨끔한 투이나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 * *

조금 전.

어린 쿠즈까지 오자 팽팽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시드룬은 아쉬워 보였지만 돌아가겠다는 투이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습니까?”

“글쎄요.”

투이나가 별 의욕이 없어 보이자 시드룬이 드물게 계속 말을 걸었다.

“당신에게 방해가 되는 일은 모두 치워 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마법사 하나가 생기는 셈이다.

‘지나치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마법사라서 문제지.’

마법사라서 신이 없는 건지 신을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서 마법사가 되는지 모를 일이다.

불가능한 색으로 머리와 눈을 물들인 시드룬이 마법사가 아닌 시절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텐데.’

마법이라는 저주를 받지 않았을 때가 있었을 거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때, 열려 있던 마법진 너머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루가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헉?”

화들짝 놀란 투이나가 마법진 안으로 발을 헛디뎠다.

시드룬이 빠르게 마법진과 침대와의 거리를 좁혀 주었지만, 제대로 쿵 소리가 났다.

‘들키면 큰일이야!’

마법사의 마을이 밝혀지면 마법사들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신전, 의회까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아르힘의 신임은 추락하고 전쟁광들이 마법사들의 마을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켤 것이다.

그녀를 죽이겠다고 쫓아올 마법사들은 그다음 문제였다.

“괜찮습니까?”

“쉬잇! 목소리 낮춰요.”

투이나가 일단 시치미를 뗐다.

“잠깐만요!”

너무 시간을 끌어도 수상해 보일 텐데, 시드룬은 눈치도 없이 계속 마법진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바깥이 시끄럽다면 조용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투이나가 꾹꾹 시드룬의 어깨를 밀어 올렸다.

비밀로 해 달라고 한 장본인인 주제에 태도가 너무 허술했다.

라카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시드룬은 문 밖을 잠깐 쳐다보고는 사라졌다.

* * *

숨만 고른 투이나가 들어오라고 말하자마자 호위들이 들이닥친 게 지금 상황이다.

라카인이 마법을 전혀 모른다는 걸 알지만 방 안을 둘러보는 그의 모습에 괜히 가슴이 졸아들었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루가 님.”

“그래요?”

“쉬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번갈아 걱정했다.

투이나는 애써 태연하게 굴었다.

“아녜요. 전 여러분들도 쉴 줄 알았는데.”

“저희도요.”

호루니가 머쓱하게 뺨을 긁었다.

라카인은 고집스럽게 방을 전부 다시 확인한 뒤에야 돌아왔다.

“이상 없습니다.”

“그러게 잘못 들은 거라니까요.”

“듣다뇨?”

“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갑자기 들이닥친 겁니다.”

스카차가 투덜거렸다.

투이나만 가슴이 콩닥거렸다.

라카인이 무릎을 굽히고 투이나에게 솔직하게 물어왔다.

“제 귀에는 대화처럼 들렸습니다. 루가 님, 혹시 문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라카인은 귀도 밝구나…….’

투이나가 서둘러 둘러댔다.

“음, 아마 기도 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요? 요즘 혼자 있을 시간이 없어서 따로 감사를 드리지 못했거든요.”

“루가 님이 아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혹시 아르힘 님이 왔다 가셨나요?”

호루니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미 신과 독대하는 투이나를 상상한 모양이다.

마법사보다는 아르힘의 목소리라고 오해하는 게 낫지만…….

차마 이런 일에 신을 팔아먹을 수는 없었던 투이나가 얼버무렸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차라리 잘됐어요.”

투이나가 다치지 않은 쪽 손을 살짝 빼내어 침대 옆을 두드렸다.

“들어온 김에 저랑 있어요.”

“호위에 소홀할 수 없습니다.”

“앗, 저는 그냥 이야기나 좀 나눌까 하고…….”

라카인이 즉답으로 거절하자 투이나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라카인은 살짝 당황했다.

“루가 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 말하겠습니다. 무슨 비밀이라도 털어놓겠습니다.”

“비밀까진 말 안 해도 좋아요.”

“그럼 저번에 못 한 얘기를 들려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멈칫.

투이나에게서 입질이 오자 라카인이 내심 안도했다.

“죄인이라는 얘기요?”

“그렇습니다.”

호루니와 스카차까지 귀가 쫑긋 올라갔다.

라카인이 순순히 얘기할 기세라 그들이 슬금슬금 투이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초롱초롱한 세 쌍의 눈동자를 본 라카인이 어색하게 허리를 짚었다.

“라카인이 죄인이라니 상상이 안 가요. 정말 말해도 괜찮은 거예요?”

“감출 일도 아닙니다.”

라카인이 투이나를 안심시켰다.

“저는 원래 백부장으로 아르모압 정복 전쟁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습니다.”

“정말입니까?”

호루니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꽤 높은 지위였던 모양이다.

“어쩐지 지휘에 익숙해 보인다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하인으로…….”

스카차의 중얼거림에 호루니가 세차게 옆구리를 가격했다.

눈치가 없는 대가로 거하게 얻어맞은 스카차를 호루니도 라카인도 무시했다.

“출정을 앞둔 밤에 모하세스 님께서 계신 회의장에 암살자가 들이닥쳤습니다.”

“네?”

투이나가 가늘게 비명을 질렀다.

호루니는 그녀가 잔인한 얘기에 놀란 줄 알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샨에게도 암살자가 있었다니!’

그녀는 뜻밖의 공통점에 놀랐다. 높은 자에게는 원래 암살자가 뒤따르는 건가 싶어서.

“그 당시 아르파와 아르모압은 신도 한 명만 움직여도 나라의 경계가 바뀔 만큼 치열하게 대립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선왕이 승하하시자 어린 모하세스 님을 얕보고 선수를 친 것이지요.”

라카인이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설명했다.

“그러나 모하세스 님은 이미 아르파 님이 강림하실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무예를 갖추고 계셨습니다. 게다가 군 회의 중이었으니 다른 이들도 나서서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지요.”

세 사람은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침입한 암살자는 빠르게 처리되었습니다. 배후를 묻기 위해 한 명은 반드시 살려야 했습니다만…… 제가 마지막 암살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라카인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지금까지 모하세스 님을 섬겨 왔습니다.”

“잠깐만요.”

정신없이 듣던 투이나가 지적했다.

“딱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계속 하인으로 지냈단 말이에요? 돌이킬 여지도 없이?”

“예.”

“그때 대체 몇 살이었는데요?”

“열다섯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경악했다.

그들의 반응을 오해한 라카인이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지만 수치스럽다는 기색을 보였다.

“젊은 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제 부족함 때문입니다.”

“아니, 열다섯은 젊은 게 아니라 어려요!”

“그때 모하세스 님은 열일곱이셨습니다.”

라카인의 어조는 지적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듯 평온했다.

투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샨이 열일곱에 아르모압을 정복했다지만 이런 건 비교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어린 나이에 나라를 잃는 것보다는 어린 나이에 싸우는 것이 낫습니다.”

라카인이 대답했다.

맞는 말이지만 적절한 대답은 아니었다.

투이나가 물었다.

“그전에 나라를 지키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요?”

“선왕을 지키지 못한 죄로 목이 잘렸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샨이 명령한 일인가요?”

“몇 명은 직접 하셨습니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나은 정보다.

투이나는 샨을 떠올렸다.

신전 사람들만큼이나 겁에 질려 있던 하인들도.

“그래도 괜찮았던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따를 수가 있나요?”

“따르지 못해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라카인이 오히려 이해가 잘 안 간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이미 신의 뜻을 따르는 데 실패한 죄인이며,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말인가요?”

굳건하게 이어지던 라카인의 목소리를 투이나가 가로막았다.

“저랑 있을 때도 여전히 샨에게 속죄 중인가요?”

그 말을 하는 투이나의 눈이 진한 실망감을 담고 있었다.

그녀도 라카인이 결국은 샨을 따를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아르파를 믿는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낮추는 꼴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자기 삶이잖아. 지금 살고 있잖아.’

왜 바닥에다 한계를 긋는가.

라카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긍정하면 지금 섬기는 투이나에게, 부정하면 수호신인 아르파에게 죄를 짓는 셈이니 당연히 입을 열 수 없을 터였다.

투이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라카인, 말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인생으로 속죄할 생각만큼은 버려요. 그건 죄의 대상도, 값도 되지 못합니다. 정말로요.”

간절한 투이나의 목소리에 라카인이 비로소 입술을 움직였다.

“루가 님.”

“네.”

“손이 왜 그러십니까?”

아, 이런.

그제야 붕대를 감은 손을 깨달은 투이나가 작게 신음했다.

상처를 들킨 다음부터 전염병을 처리하러 갈 때까지 투이나는 계속 라카인을 쫓아내야만 했다.

“치료해야 합니다.”

“정말 큰 상처가 아니라니까요.”

“왜 다쳤는지 정말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겁니까?”

“독은 없었으니 걱정하지 마요.”

라카인은 안심하는 대신 목숨 걸고 치료하려고 들었다. 투이나가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 지칠 정도였다.

“하다못해 붕대만이라도 갈게 해 주십시오.”

“안 돼요.”

투이나가 어색하게 손을 감췄다.

‘피가 묻은 붕대는 시드룬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하면 정말 이상하게 들리잖아.’

시드룬은 연구에 쓸 피를 달라고 말했고, 투이나는 다시 몸에 구멍을 내느니 차라리 이미 흘린 피를 주는 걸 택했다.

그걸 설명할 수도 없으니.

투이나는 붕대를 노리는 라카인이 난감했다.

오죽하면 호루니가 그를 말렸다.

“루가 님의 뜻이니 내버려 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상처가 덧나면 결국 손을 잘라내는 건 루가 님입니다.”

“끔찍하게 왜 그러십니까.”

스카차가 진저리를 쳤다.

괜히 찜찜해진 투이나가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에이, 설마…….’

아주 만약에 잘못된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아르힘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었다.

라카인은 투이나에게 사제들의 치료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기억했지 아르힘의 존재는 종종 까먹는 것 같았다.

‘첫 만남부터 다쳤으니 이해는 해.’

그래도 밥까지 떠먹여 주려는 건 심했다.

결국 사제들을 이끌고 전염병의 진원지로 갈 때까지 투이나는 라카인에게 거리를 유지할 것을 부탁했다.

까만 천이 나부끼는 마을을 들어서면서 투이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확인했다.

열세 군데였다.

미리 환자들을 보러 와 있던 사제들이 삼삼오오 집에서 빠져나왔다.

바깥 연기를 마신 그들이 기침을 했다.

“피해가 이만하길 다행이군요.”

“어떻게 여기서 역병이 시작될 줄 아셨던 겁니까?”

“……아르힘 님의 뜻이지요.”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르힘의 이름을 대면 무슨 일이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미래의 일까지도.

‘어쩐지 요즘 들어 아르힘 님의 이름을 너무 빌리는 것 같아.’

투이나가 마음속으로 사죄의 기도를 올렸다.

영문도 모르는 사제들을 이끌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것만 해도 아르힘의 이름을 대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천오백 명을 죽인 역병의 소식이 수도까지 올라오기 전에 일을 끝낸 투이나가 울며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의 슬픔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루가 님!”

“으흐흑…….”

“지금은 사제님들께서 치료해 주셨으나 다음엔 내려오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시체를 태우고 병에 다시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헤요.”

만약을 대비해 사제 한 명을 두고 가고 싶었지만 궁색한 시골을 좋아하지 않는 사제들은 파견 임무라면 질색을 했다.

‘지금 꼼꼼하게 처리하고 가는 수밖에 없어.’

시체를 태우는 연기를 바라보던 라카인이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투이나를 멀찍이 따라다녔다.

투이나의 옆에 바짝 붙은 호루니는 어두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능력에 경외심을 감추지 못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일이 커지기 전에 나타나 정리하시니, 정말 대단하세요.”

“운이 좋았어요.”

투이나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아르힘은 모든 일에 나타나 해결하지 않았다. 신도 그러할진대 사람인 투이나가 모든 사건 사고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투이나는 뛰어다녔다.

‘모르면 몰라도 알았으면 막아야지.’

게다가 큰 문제가 될 걸 미리 처리해 두면 남은 시간은 구혼자들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끝낸 투이나가 몰래 장갑을 벗었다.

장갑은 크로퍼드 상단에서 보낸 선물 중에 하나였다.

새하얗던 장갑 끝이 연기와 재로 얼룩덜룩해진 걸 보자 다시 마음이 심란해졌다.

‘베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시드룬을 한 번 더 만나야겠어.’

투이나가 천천히 장갑 손가락을 하나씩 벗겼다.

감춰 뒀던 붕대가 드러났다.

미래의 일을 처리하느라 일정은 계속 바뀌었고, 예정된 만남일은 미뤄졌다.

샨은 봄맞이 축제 때 있었던 일을 빌미로 피하는 거라면 단단히 실망할 거라는 협박성 편지를 보내 왔고, 베인은 여느 때처럼 원망 대신 선물을 한 꾸러미 보냈다.

투이나가 시드룬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면 두 사람 다 지금처럼 기다리고만 있진 않았겠지만.

‘역시 둘은 계속 몰라야겠지.’

양쪽 견제도 힘든데, 삼파전은 제발 피하고 싶었다.

시드룬은 지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미한 게 낫다.

투이나가 가만히 붕대 위쪽을 눌렀다.

‘상처는 아물었네.’

바쁜 와중에도 투이나는 시드룬과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시드룬이 설명했던 개념들은 대부분 이해했지만 몇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마법사들은 영혼의 세계에서 뭘 얻어내려고 하는 거지? 대체 왜 손톱은 안 되고 피는 됐던 거야?’

투이나는 짧아진 검지 손톱을 문질렀다.

결혼을 피하기 위해서 일단 연구는 승낙했지만, 이걸 빌미로 마법사들이 세계를 정복해 버린다면 당연히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그 전에 마법사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비늘 문제는…… 짐작이 가.’

투이나는 오밀조밀 깨끗한 다섯 손가락의 손톱을 바라보았다.

직접 만졌을 때도, 피가 떨어졌을 때도 결과가 같았는데 손톱만큼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차이는 딱 하나였다.

‘내 병에 반응하는 거야.’

얼룩이 닿았던 자리마다 비늘이 새까맣게 변했다.

핏속에 얼룩이 있다는 상상은 기괴했지만 어쨌든 병자의 피에는 병이 흐른다.

비늘이 유일하게 깨끗한 손톱에 반응하지 않았으니 확실하다.

‘정말 내 병과 시드룬의 연구가 상관이 있는 걸까?’

아르힘에는 마법사가 없었지만 어느 성질 더러운 마법사가 얼룩병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다.

실제로 만나 본 마법사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싸했다.

‘시드룬을 도우면서 병을 치료할 방법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투이나는 다시 장갑을 꼈다.

연기가 사그라지는 언덕으로 사제가 투이나를 찾아 올라왔다.

“오늘 밤은 밖에서 주무시겠군요.”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치료했지만 혹시 모르니 주변 마을까지 돌아봐야하니까요.”

“그나마 신전이라고 부를 만한 걸 갖춘 곳은 여기뿐입니다. 곧 해가 질 테니 남은 마을은 내일 돌아보시지요.”

“네, 그렇게 해요.”

투이나가 언덕을 내려갔다.

상황을 정리하고 신전으로 돌아가면 시드룬을 만나야 하니, 미리 푹 자 둬야 한다.

연구는 밤에만 할 수 있었으니.

사제가 말한 마을의 신전은 몹시 허름했다.

작은 건물은 아슬아슬하게 창고라고 불릴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바닥에는 낡은 지푸라기가 굴러다녔다.

“비가 오진 않겠죠?”

지붕을 올려다보자 별 하나가 구멍 사이로 반짝였다.

호루니는 자발적으로 루가 님께 침대를 제공할 주민이 없나 찾아보러 떠났고, 라카인은 허리를 굽혀 지푸라기를 줍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 같이 자기에는 좁아 보이네요.”

“저희는 밖에서 경계를 서겠습니다.”

라카인이 한 손으로 짚을 모으며 대답했다.

“사제님들은요?”

“저희는 타고 온 마차에서 잘 생각입니다.”

마차나 여기나 비슷비슷했다.

의자에 푹신하게 천을 덧댄 마차가 차라리 더 편하리라.

사제가 냉큼 허리를 숙였다.

“좋은 밤 되십시오, 루가 님.”

“편히 주무세요.”

투이나가 웃으며 그를 보냈다.

스카차가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차리는 동안 호루니가 돌아왔다.

그녀는 시무룩했다.

“다른 집도 여기랑 다를 게 없었습니다. 루가 님 얘기를 꺼내자 오히려 분위기만 더 불편해졌어요…….”

“힘든 일을 겪었으니 오늘 밤은 조용히 보내게 해 줘야죠. 고생했어요.”

투이나가 빵을 쪼개 호루니에게 건넸다.

내심 그녀를 기쁘게 해 주리라 기대했던 호루니가 풀이 죽은 채 빵을 오물거렸다.

스카차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라카인은 가장 마지막에 빵을 받아 선 채로 먹었다.

창밖을 유심히 보는 그에게 투이나가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나와 본 건 처음이죠?”

“그렇습니다.”

“아르힘이 산과 소금 호수로 유명하지만 평지도 꽤 넓어요.”

“아르힘에서 가장 이상한 건 군대가 없다는 겁니다.”

라카인의 말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스카차와 호루니가 고개를 들었다.

“그야 이런 외지까지 아르힘 님이 돌보고 계시니까요.”

“한 번도 침략이 들어온 적이 없나?”

“간간히 시도는 있었지만 국경을 넘자마자 모두 화상을 입었죠. 그래도 끝까지 고집을 부린 자들은 재가 되었구요.”

“나라 전체를 주시하는 수호신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권능 또한 그래. 아르힘이 오래된 신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과한 편이다.”

“아르힘 님이 그만큼 강한 신이라는 거죠.”

스카차가 반박했다.

그러나 라카인이 궁금한 건 아르힘의 얼마나 강한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강한 분이 지키고 있다면 왜 루가 님은 다치시는 겁니까.”

잠깐 정적이 흘렀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투이나가 ‘으응?’ 하고 지목당한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설마 아직도 상처 얘기를 할 건 아니죠?”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카인이 짧게 간청했다.

투이나는 난감하게 눈을 굴렀다.

그녀는 차라리 아르힘 얘기를 이어 가기로 택했다.

“아르힘 님은 저 말고도 돌보실 게 너무나 많습니다.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하지만 루가 님은 루가 님이십니다. 특별히 아르힘이 보호하는 자여야만 합니다.”

“신이라고 하신들 사람이 하는 바보짓을 다 막을 수는 없잖아요.”

투이나가 말했다.

그녀도 알았다. 사실 제 발로 시드룬에게 찾아가는 일이 별로 똑똑한 짓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똑똑하지 않다고 해서 가치가 없나?

바보짓을 하면서 좀 다치고 혼란스러울지라도 목표에 다다른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저는 아르힘 님껜 이미 넘칠 만큼 받았는걸요.”

다시 삶을 얻은 투이나가 자랑스레 말했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라카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그날 밤의 대화는 끝이 났다.

투이나가 침상에 눕는 걸 확인한 호위 세 사람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마을의 신전에는 창문이 없었으므로 라카인이 문을 지키고 나머지 사람이 양 벽면으로 옮겨 갔다.

습관적으로 주변을 확인하던 라카인이 문득 반짝임을 감지했다.

안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신전 벽은 오래되어 틈새가 갈라져 있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안쪽의 모습에 라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틈새를 가리려고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손가락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마치 천장에서 내려온 거대한 전갈이 투이나를 낚아채려는 것 같았다.

그는 즉시 문을 박살냈다.

본능적인 대처였으나 이미 그가 발을 들였을 때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투이나는 조금 뒤척였을 뿐이다.

‘잠이 안 와.’

머리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몸으로 쏟아졌다.

마법사, 얼룩병, 베인, 역병, 아르힘 등등등…….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보던 투이나가 정면을 향해 똑바로 돌아누웠다.

“하아…….”

‘차라리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는 게 낫겠어.’

깍지를 끼고 있던 투이나가 힘차게 이불을 걷었다.

마을의 밤은 새까매서 불빛이 없으면 코앞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호위분들이 나가기 전에 등불에 덮개를 씌워 뒀었지.’

손끝으로 침대 밑을 헤집어 보던 투이나가 금세 덮개에 걸린 고리를 찾아냈다.

반쯤 상체를 일으킨 그녀가 등불을 들어 올려 덮개를 벗겼다. 그러자 기름을 머금은 노란색이 아니라 보라색 불빛이 터져 나왔다.

“시드룬?”

투이나가 등불을 떨어트렸다.

침대 위에 마법진이 나타나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투이나가 놀라는 동안 빠르게 완성된 마법진이 열렸다.

안개 속에서 번개 구름이 몰려오듯 시드룬의 머리카락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그 사이로 커다란 두 손이 나타나 단숨에 투이나의 양 겨드랑이를 붙잡았다.

“앗, 잠깐!”

투이나가 새된 소리를 냈으나 시드룬의 동작은 빨랐다. 단숨에 힘을 준 그가 무표정하게 투이나를 들어 올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무 뽑듯이 쑥 마법진 너머로 나와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투이나가 다리를 바동거렸다.

시드룬이 머리보다 높게 그녀를 들어 올렸던 것이다.

가뜩이나 어마무시한 키인데.

‘이건 너무 높잖아!’

진짜로 무서워진 투이나가 시드룬의 팔을 탁탁 쳤다.

“내려 줘요, 시드룬!”

“기다렸습니다.”

시드룬이 보물이라도 발견한 도굴꾼처럼 투이나를 올려놓고 움직이질 않았다. 꼭 햇빛을 비춰 봐야 반짝이는 줄 알듯이.

뒤통수에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이 느껴지는 걸 보니 또 마법사의 마을로 나온 모양이었다.

‘분칠을 안 지우길 잘했다.’

그 와중에도 투이나는 얼룩이 가려진 데에 안심했다. 정확히는 상황이 열악해서 지우지 못했던 거지만.

이렇게 시드룬에게 납치될 줄 알았으면 가능해도 안 했다.

투이나는 묘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시드룬을 보며 끙, 소리를 삼켰다.

‘분명 이게 납치인 줄도 모르겠지.’

투이나가 오랜만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래요. 나도 보고 싶었어요, 시드룬. 그런데 제대로 보려면 내려놔야죠?”

그 말에 시드룬의 팔이 내려갔다.

다는 아니고, 한 팔로 투이나를 감을 정도로 내려 장갑을 벗겨내기 위해서였다.

너무 쉽게 장갑을 빼낸 시드룬이 아무렇게나 장갑을 휙 던져 버렸다.

투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거 선물이에요!”

마법진이 번쩍하더니 다른 쪽 손 위로 장갑이 톡 떨어졌다.

투이나가 할 말을 잃은 채 장갑을 꼭 쥐었다.

시드룬은 가운뎃손가락으로 붕대를 끌러내더니 다시 마법진을 펼쳤다.

투이나는 신기한 마음으로 피가 분리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붕대에서 진득한 피를 얻어낸 시드룬의 얼굴이 흡족해 보였다.

투이나는 여전히 바닥에서 머리 하나만큼 떨어진 채로 엄격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내가 부르기 전까진 오지 않겠다면서요. 어떻게 알고 왔어요?”

“당신이 불렀습니다.”

“언제요?”

“방금 침대 위로 불빛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루가.”

“그건 또 어떻게……. 전 당연히 수도의 신전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인 줄 알았죠! 감시하지 말랬잖아요.”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제외한 공간에 왜곡을 걸어 두어 조건을 충족시킬 때마다 내가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가볍게 대답한 시드룬이 땅으로 투이나를 내려놓았다.

투이나가 매달려 있는 동안 얼얼해진 상체를 문질렀다.

“공간을 다루는 마법으로 거기까지 알 수 있단 말이에요?”

“아닙니다. 다른 마법사에게 마법을 빌렸습니다.”

“마법을 빌리다니……. 대체 무슨 마법사인지 꼭 만나 보고 싶네요.”

“그 사람만 말입니까?”

“다른 마법사들을 모두 소개해 준다면 더 좋겠죠.”

그제야 시드룬이 둥글게 뭉쳐 놓은 피를 다른 공간으로 날려 버렸다.

“마침 모여 있을 겁니다.”

시드룬이 손을 내밀었다.

‘이럴 땐 또 금세 멀쩡한 사람처럼 보인다니까.’

시드룬의 손에 어른거리는 마법진을 본 투이나가 그를 지나쳤다.

“멀지 않다면 걸어갈게요.”

“그러십시오.”

몇 발짝도 안 걸었는데 바로 시드룬이 투이나를 따라잡았다.

사각사각.

마침 해가 뜰 무렵이라 아직 풀숲마다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 바람에 옷은 물론이고 바닥에 끌리는 시드룬의 머리카락이 점점 젖어갔다.

“음……. 시드룬?”

보다 못한 투이나가 그의 머리카락을 감아쥐었다.

미끈한 감촉이었다.

머리를 잡는 감각에 시드룬이 뒤를 돌아보았다.

투이나가 끄트머리를 들어올렸다.

“차라리 묶는 게 좋지 않나요?”

“왜 그렇습니까?”

“일단 땅에 안 닿잖아요. 보기에도 시원하고, 더러워지지도 않고.”

“마법으로 관리해서 괜찮습니다.”

“와, 그건 부럽네요.”

투이나가 둘둘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말았다.

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번 잡은 머리카락을 바로 내동댕이칠 순 없었다.

투이나는 그냥 시드룬의 옆으로 총총 다가갔다.

그가 이따금씩 머리칼을 감은 그녀를 흘깃거렸다.

마음에 무언가가 걸린 것 같은데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시드룬의 손은 답을 아는 것처럼 움찔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터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서 숲에서 나타난 투이나와 시드룬은 금세 눈에 띄었다.

“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마법사가 그들을 손가락질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야?”

“아아, 시드룬 약혼녀다!”

투이나의 인사에 마법사들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뚫어져라 투이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선뜻 악수를 건네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의자에 앉은 채 고의적으로 그녀를 무시했다.

“틀렸어, 바보들아. 약혼자가 아니라 구혼자야.”

“네가 약혼자라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내가 정정하지.”

퉁명스럽게 대꾸한 수리시가 투이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지난번 만남 이후로 껄끄러워진 상대였지만 정작 그녀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수리시가 턱짓으로 인사했다.

“빨리 왔네. 몸은 멀쩡하지?”

“그럭저럭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수리시 뒤에 앉은 바즈아둡이 살갑게 인사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맑은 표정에 투이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였다.

“정말 시드룬의 연구를 돕는 게 너야?”

“나도 마법 한 번만 써 보자.”

“구혼자라는 게 사실이니? 시드룬을 찬 거야? 제발 그렇다고 말해 줘.”

“그만.”

어느새 다가온 시드룬이 가만히 투이나의 어깨를 안아 당겼다.

“내 연구 상대야.”

“쩨쩨하긴.”

마법을 써 보겠다던 사람이 투덜거렸다.

투이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상대가 시드룬이라 금세 침착해졌다.

“시드룬, 소개해 줘야죠.”

“왼쪽부터 일라이, 포보, 게누아 밀리리치입니다. 각각 침묵, 거품, 저주를 다룹니다.”

“함부로 남의 마법 좀 알려 주지 말라니까.”

일라이라고 불린 남자가 벌컥 성질을 내며 시드룬을 때렸다.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서로에게 마법을 쓰는 게 더 위험하다 보니 주먹질을 친근한 표현으로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게누아가 뾰족한 턱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투이나를 관찰했다.

“별로 특별해 보이진 않는데 왜 그렇게 푹 빠진 거래? 차여서 그래? 벌써 차였지? 그렇지?”

“적당히 해라. 시드룬한테 빠진다는 표현이 가당키나 하냐?”

“아오, 또 시비네, 이 자식이.”

“만나서 반가워요. 전 투이나예요.”

싸움이 붙을 기세라 투이나가 얼른 끼어들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게누아가 실처럼 가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좋아. 예의는 바르네.”

“다른 마법사들도 있습니다.”

시드룬이 대화를 잘랐다. 이미 소개가 끝난 마법사들에게 더 볼일은 없다는 태도였다.

‘얼른 다 소개한 다음에 연구를 도와달라고 할 셈이구나.’

그의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내가 시드룬을 연구했다면 훨씬 성과가 좋았을 텐데.’

시드룬에게 무시당한 마법사들은 짜증 난다는 얼굴이었지만 몹시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지켜보던 수리시가 혀를 차는 동안 투이나는 시드룬에게 안긴 채 옆으로 슥 옮겨졌다.

“앗!”

“뭐야!”

시드룬의 부주의한 동작 때문에 사람에게 부딪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하던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아는 얼굴이었다.

“뭣 하러 여길 또 기어들어왔지?”

레이벡이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여전히 얼굴에 긴 털을 기른 채였다.

난감해진 투이나가 방어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찾는 마법사가 있어서요.”

“내 연구도 도와야 한다.”

시드룬이 자기를 잊지 말라는 듯 끼어들었다.

“그래요, 그것도.”

투이나가 대충 시드룬의 팔을 툭툭 두드려 주자 레이벡은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털을 세웠다.

“괜히 들쑤시지 말고 꺼져. 제기랄. 아침부터 빈정 상하게.”

“레이벡은 시체를 되살리는 마법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없나요?”

투이나가 일부러 세게 물었다.

그러나 질문이 공터로 퍼져 나갔을 때, 생각보다 파급력이 강한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절반 이상이나 되는 아무 관심 없던 마법사들까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와, 시선 집중한 것 좀 봐.’

레이벡이 볼―과 수북한 털―을 씰룩거렸다.

“그런 마법은 세상에 없어.”

“저는 여기 있는 줄 알고 왔어요.”

“직접 보기라도 한 거야?”

낮게 깔린 수리시의 목소리가 물었다. 언제 왔는지 둥글게 모인 마법사들 틈에 자연스럽게 끼어 있었다.

“직접 봤어?”

“그래요.”

투이나가 좌중을 둘러보며 답했다.

“그러니 여러분이 제 질문에 답해 준다면 좋겠네요.”

쏟아지는 강렬한 집중에 투이나는 무심코 시드룬의 품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마치 그의 품이 안전한 것처럼.

‘참, 시드룬도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지.’

실수를 인정한 투이나가 한발 늦게 시드룬의 팔을 걷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시드룬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게도 설명이 필요합니다.”

투이나가 흠칫했다.

시드룬이 귀에다 대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간지러움에 떠는 투이나의 어깨에 그가 턱을 눌렀다. 그러느라 허리를 아주 많이 굽혀야 했다.

몹시 신경을 잡아먹는 동작이었으나 이쪽을 바라보는 마법사들이 워낙 강렬한지라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마법사들을 만날 생각으로 왔으니까 그냥 원래 용건에만 집중하자.’

심호흡을 한 투이나가 그대로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시작은 아르파의 왕, 샨 모하세스의 거처였습니다.”

산양이 되살아난 이야기를 들은 마법사들은 더없이 진지해졌다.

“시체였던 게 확실해?”

“확실해요.”

“그걸 다시 모하세스가 잡았단 말이지?”

“네.”

포보가 턱을 문질렀다.

“이상한 이야기로군. 그자는 굳이 성가신 공연까지 해 가면서 뭘 노릴 작자가 아닌데.”

“샨이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르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못 들어 봤어?”

포보가 잘난 체하며 말했다.

“아르파 자체가 강림하는 신이잖아. 육체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지.”

“무슨 헛소리야, 그게. 자기가 산양에 들어간 다음에 왕에게 다시 목을 베라고 시키는 신이 어디 있어?”

“맞아. 산양은 안 멋있어. 내가 신이라면 사자 같은 데 들어갈걸.”

“모하세스의 거처라고 해도 아르힘의 신전 안이라며? 아르파가 거기서 강림하긴 힘들지.”

마법사들이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투이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마법사분들인데도 신에 대해서 잘 아네요?”

“적을 알아야 잘 도망 다니지.”

수리시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듣다 보니까 하는 말인데, 그건 부활이 아니라 조종이야.”

‘샨이랑 같은 입장이네?’

왕에 이어 마법사까지 동의하자 신빈성은 훨씬 커졌다.

토론을 빙자한 다툼을 하던 마법사들이 해명을 요구하듯 쳐다보았다.

“부활의 전제 조건이 뭐야?”

“머리와 가슴을 갖춘 육체.”

“그거 말고, 영혼도 있어야 하잖아.”

“다시 움직이는 거야 마법으로 때운다고 쳐도 천년만년 마력을 쏟아 부을 게 아니면 영혼이 필요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우리 쪽에 조종하는 마법사가 있거든.”

수리시가 눈 밑이 잔뜩 그늘진 한 여자를 가리켰다.

내내 대화를 듣지 않는 척하던 여자가 움찔하더니 새우처럼 생긴 등을 돌렸다.

“……왜 이렇게 앞뒤 없이 굴지, 수리시?”

“우리 보호자께서 사모하는 사람이 묻는 질문인데 대답해 드려야지.”

수리시가 비꼬았다.

투이나는 다시 한번 낯이 뜨거워졌다.

시드룬은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했다.

“저쪽은 마탄타입니다.”

이름까지 불린 그녀가 마지못해 투이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왜 죽은 산양 따윌 조종하겠어.”

“성격이 이상하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탁자에 있던 나무잔이 번개같이 무례한 말을 한 작자의 이마로 날아갔다.

다행히도 충돌 직전에 연보라색 마법진이 중간에 나타났다.

잔이 탁자에 다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시드룬이 단조롭게 말했다.

“싸움은 안 돼.”

“알아.”

마탄타가 피곤에 짓눌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여전히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도 엎어져 있던 나무잔이 다시 똑바로 서더니 물을 찾아 날아갔다.

“마법진을 감추는군요?”

투이나의 말에 다들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지식은 어디서 얻었지?”

“샨이 이야기한 적 있어요.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감추고서 마법을 쓰기도 한다구요.”

“그래. 맞아.”

“사실 저렇게 드러내 놓고 마법진을 쓰는 건 시드룬 정도밖에 없어. 어느 멍청한 녀석이 내가 지금부터 마법을 쓰겠다고 광고해?”

물을 마시던 마탄타까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시드룬의 평가가 비슷한 모양이다.

‘마법사들끼린 이해할 줄 알았는데. 시드룬은 마법사 중에서도 이상한 사람이었구나.’

투이나가 시드룬을 올려다보자 그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시드룬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법진을 시야에서 감추는 건 시각적인 속임수입니다. 아예 안 나타나게 할 순 없으며, 각자가 다루는 마법의 대상이 아니면 관리할 수 없기에 감출 수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야, 야, 아주 다 말하지 그러냐.”

포보가 야유했다.

거품을 다루는 마법사여서 아마 그도 마법진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시드룬은 공간을 다루니 감추지 못하는 쪽이겠군요.”

“정확합니다. 물론 다른 마법사들처럼 감추려는 시도는 할 수 있으나 그러기 위해선 한꺼번에 공간 여러 개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잡한 소리 그만하고 단순하게 설명해.”

수리시가 끼어들었다.

“저 녀석 마법이야말로 최강이라고. 공간에는 뭐든지 들어가거든? 사람 하나를 집어 가도 되고, 우리 중에서 필요한 마법이 있으면 어떤 공간에든 집어넣고 사용할 수 있지. 그러니까 굳이 마법진을 감추지 않는 거야.”

수리시는 그러면서 의미심장하게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네가 여기서 누군가를 의심하고 싶으면 덤으로 시드룬까지 따라온다는 걸 기억해.”

수리시는 나름대로 경고를 하려는 것 같았다. 시드룬은 수상한 자식이니 괜히 이해하겠다며 힘 빼지 말라고.

이미 살인자 후보에 시드룬이 올라 있던 터라 투이나는 크게 충격받지는 않았다.

대신 애꿎은 마탄타만 성질을 냈다.

“아까부터 얘기가 튀는데, 난 아니라니까.”

“누가 뭐래?”

“하긴 큰 마법일수록 큰 마법진이 필요한데, 산양 정도면 마탄타가 마법진을 완전히 못 감췄을걸? 분명히 어디 하나가 바깥으로 삐져나왔겠지.”

인상이 더러워진 마탄타가 숟가락을 그자의 이마로 날렸다.

이번에는 시드룬이 막아 주지 않아 딱! 소리가 나며 부딪쳤다.

“아, 말로 해!”

“말로 하지. 닥쳐.”

틈만 나면 싸우는 마법사를 본 투이나가 일부러 대화를 갈랐다.

“단순히 조종당하는 움직임은 아니었어요.”

마탄타의 마법을 직접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그녀의 마법은 직선적이다.

움직임을 하나하나 조종했기에 가능한 동작들이었다.

‘날 공격한 산양은 눈이며 몸도 살아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는걸.’

머리부터 발굽까지 각각 자연스럽게 보일 만큼 움직임을 제어하려면 단순한 마법 하나 가지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평생 산양만 보며 살아왔다면 또 모를까.

그 산양은 조금 뻣뻣한 것만 빼면 완벽하게 살아 있을 때의 움직임과 똑같았다.

투이나의 설명에도 마법사들은 쉽게 부활이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난 왜 아가씨가 콕 집어서 부활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그런 건 불가능하다니까.”

부활 경험자인 투이나가 애매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조종은 아니라고 쳐도, 어쨌든 영혼이나 신이 들어가면 살아난 것처럼 보인다는 거잖아요. 그것도 일종의 마법 아닌가요?”

“전혀 다르지. 애초에 영혼이랑 신은 완전 다른 거야.”

“어, 어, 이 사람이 또 그러네. 내가 볼 땐 둘 다 비슷하다니까.”

“마법을 영혼만 쓸 수 있는데 뭐가 같아?”

“그 얘기 좀 더 해 주세요!”

투이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법사들은 그녀가 정말 관심을 보이자 신이 나서 떠들었다.

“신전에선 이런 얘기 안 해?”

“이래서 수호신들이 음흉한 거라니까. 자기들 얘기를 안 하잖아.”

“자, 자, 들어 봐. 인간들이 많을수록 수호신이 강해지잖아? 그런데 마법은 숫자랑 전혀 상관이 없거든. 내가 능력만 있어 봐. 진짜 신이랑 맞먹지.”

“맞아, 맞아.”

투이나는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아르파였으면 이미 신성 모독으로 끌려갔을 이야기다.

그녀도 아르힘을 믿었으니 화를 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법을 향한 열망으로 반짝이는 마법사들의 표정이 신을 믿는 사람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냥 저 사람들에겐 마법이 또 다른 신 같아.’

비록 마법사들의 태도가 오만하고 존중이 없긴 했지만, 그거야 샨이 이미 하던 짓이다.

그래서 투이나는 익숙하게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게누아가 말했다.

“난 복불복이라고 봐. 영혼에 신이 깃들든가, 마법이 깃들든가. 사람이 태어나면 둘 중 하나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둘은 공존할 수가 없고.”

“원래 신을 믿던 사람이 마법사가 되기도 하잖아.”

“걔가 마법사가 되고 나서도 계속 신을 믿는 거 봤어? 마법이 신을 쫓아 낸 거지. 영혼의 승리자, 마법!”

게누아가 요란스럽게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반짝이는 걸 칠해 놓은 손톱이 정신없이 오르내렸다.

“하지만 생명에 관련된 건 꼭 신의 영역이더라고. 죽이거나 살리거나 고치거나 등등등. 아마 수호신들만 영혼의 세계에 드나들 수 있으니 그렇겠지? 신들끼리 영혼이 모자랄까 봐 숫자라도 세는 것 같아. 안 그래?”

게누아가 깔깔거리며 동의를 구했다.

일라이가 덧붙였다.

“마법은 뭐랄까, 자기보다는 남에 관심이 많거든. 영혼은 그냥 재료지.”

“시드룬은 영혼의 세계를 열려고 하던데요.”

투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남의 영혼을 가져다 쓸 수도 있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드디어 시드룬이 말했다.

“마법으로는 영혼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내 마법이 영혼의 세계를 열 수 없듯이.”

“그럼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건가요?”

투이나가 마른 장작 같은 시드룬의 팔을 잡았다.

아무리 로브가 두껍다지만 그에게선 도무지 온기라는 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닿을 수 없더라도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드물게도 시드룬의 눈빛이 흐려졌다.

“아주 중요한 것인데…… 왜 중요한지 기억나지 않는군요.”

“…….”

“영혼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신뿐이야.”

수리시가 시드룬에게 쏠린 관심을 회수해 갔다.

“그러니까 산양이 살아난 일은 분명히 아르힘이나 아르파랑 관련된 문제라고. 확실해.”

“조언 고마워요.”

투이나가 진지하게 답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확실해졌다. 마법사들이 신전에 쳐들어와 마법으로 경고를 남긴 게 아니다.

‘그리고 그 통로를 열어 준 것 역시 시드룬이 아니었어.’

투이나가 무심코 시드룬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의심한 게 미안해서였다.

내내 몸을 기대고 있던 시드룬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팔로 투이나를 감았다.

“아무튼 산양 안에 뭐가 들어갔는지 몰라도 내 눈으로 한번 보고 싶네. 우리가 보면 차이를 알 텐데. 시체 남은 거라도 없어?”

“시체는 이미 태워 버렸어요.”

“아깝다.”

“뭐든 잘 보존해 두는 게 좋은데 말이야.”

마법사들이 시시덕거렸다.

“더 묻고 싶은 건 없습니까?”

시드룬이 말했다.

“없다면 우리의 연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빨리 시드룬과의 연구를 끝내 줘야 우리 차례가 돌아오잖아.”

“안 그래, 아르힘의 성녀?”

마법사들의 웃음소리가 일순 달라졌다.

“당신 몸에 영혼이 들었는지 신이 들었는지 우리 모두 까 보고 싶어 하거든.”

지금까지 시드룬의 약혼자로만 취급받던 투이나의 목 줄기가 단숨에 서늘해졌다.

아르힘의 성녀.

이 단어가 이렇게 무섭게 들릴 수 있는 말이던가.

‘모르는 게 아니었어.’

마법사들이 일부러 루가니 성녀이니 하는 소리를 안 해서 깜박 속고 말았다.

‘내가 아르힘을 믿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느긋한 척 그녀를 관찰하는 눈동자들이 희게 번뜩였다.

친근한 태도는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

아르힘에서는 단 한 번도 마법사를 잡아 간 적이 없지만 그들이 신에게 가진 적의를 무시할 순 없었다.

마법사들이 위협은 샨과 달랐다.

타고난 힘이 아니라 방심과 기습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시드룬이 천천히 어깨를 껴안은 팔을 더 감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내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어어, 말조심해, 시드룬. 우리가 참아 주고 있는 거라고.”

“아깐 시드룬이 가장 강하다면서요?”

“그 말도 맞고.”

“그런데 우리가 상대보다 약하다고 납작 엎드리는 종자는 아니라서 말이야.”

아까 하던 농담처럼 마법사들이 자연스럽게 이를 드러냈다.

“이해해 줘. 우리가 좀 험악한 시절을 보냈거든.”

껄렁거리는 마법사를 본 투이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익숙한걸.’

어디서 느껴 본 감정이더라니. 샨이 위협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비록 마법사들이 샨보다 더 은근하게 표시했지만 말이다.

‘다들 저렇게 협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힘들지 않을까?’

투이나는 그저 몸에 밴 방식으로 그들을 처리했다.

“네, 힘내세요! 절 믿어 주느라 고생하셨네요. 그래도 오늘 이야기 즐거웠어요.”

투이나가 성심성의껏 응원하자 마법사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믿다니?”

“절 믿으니까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 댁은 시드룬이 데려온 사람이잖아.”

“시드룬이 있으면 어디든지 쫓아가서 죽일 수 있으니까 걱정을 안 하는 거지.”

마법사들의 인간 신뢰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같이 살기 위해서 규칙으로 싸움을 금지할 만도 했다.

투이나가 반쯤 농담을 섞어 말했다.

“믿는 것보다 훨씬 귀찮은 짓을 좋아하시네요.”

“엥?”

“아니지. 그건 아니지.”

마법사들이 인상을 쓰는 사이에 수리시가 돌발적으로 낄낄거렸다.

“됐어, 다들. 이미 본전 다 털렸는데 뭘 더 말을 붙이시나?”

수리시가 투이나에게 씩 웃어 보였다.

“어이, 약혼자 아니고 구혼자, 끝나면 들러서 밥이나 먹고 가.”

“생각해 볼게요.”

투이나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쿠즈에게 인사 전해 주세요.”

“그래.”

투이나가 일어나자 시드룬도 그녀를 따랐다. 목에 덜렁덜렁 시드룬의 팔을 단 채 그녀가 먼저 걸어갔다.

‘이상한 상황도 자주 겪으면 간이 커지나 봐.’

마법사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그냥 길에서 만난 사람 같았다. 곧 다른 방향으로 사라지겠지만 잠깐 동안은 같이 걸을 수 있는 사람.

시드룬은 아직 함께 걷는 중이다.

투이나가 시드룬을 돌아보자 잘 따라오던 그가 눈을 맞췄다.

“시드룬, 나랑 많이 만나요.”

마법사를 만날수록 더 확실해졌다.

마법사들끼리만 지내다 보면 시드룬은 완전히 상상 속의 마법사로 변해버릴 것이다. 무시무시하고 저주받은 마법사 말이다.

마법사들이 그걸 원했다.

도망자에겐 분노가 쌓인다.

도망치던 마법사들을 숨겨 주고, 누구보다도 강한 시드룬을 분노한 마법사들이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완전히 넘어가진 않았잖아, 아직은.’

투이나는 뜬금없는 말에도 변화가 없는 시드룬을 올려다보았다.

연구 때문이긴 해도 이렇게 자신을 따르다 보면 분명 그도 뭔가 깨닫지 않을까? 세상에는 마법 말고도 해결책이 있다고.

투이나가 양손으로 꼭 그를 붙들었다.

“뭘 하고 싶은지 더 듣고 싶어요. 내게 도와달라고 했었죠. 그럴게요. 대신 다른 마법사들만큼 내 의견도 중요하게 여기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러겠습니다.”

시드룬은 쉽게 대답했다.

왜 굳이 이런 약속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투이나의 말이니 들어준다는 식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이 힘을 가진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을 줄이야.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판단 없이 목적에 끌려가는 게 훨씬 나빴다.

시드룬과 아까 만난 열여섯 명의 마법사를 떠올린 투이나는 자꾸만 불안해졌다.

그래도 연구하는 걸 보니 분명 시드룬에게도 나름대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제발 선한 목적이기를.’

투이나는 기도했다.

시드룬의 현관은 열려 있었다.

다른 마법사들의 방해 없이 무사히 그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투이나가 안도했다.

더 이상 그녀를 감싸고 있을 명분이 사라진 시드룬은 고분고분히 팔을 열었다.

투이나가 빠져나가자 정말 드물게도 그는 허전함을 느꼈다.

포옹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정작 투이나는 그걸 포옹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늘은 뭘 하면 되죠?”

빠르게 평상시로 돌아간 투이나를 보며 시드룬이 미약하게 올라왔던 온기를 휘저어 보냈다.

“루가가 되었을 때 아르힘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비늘이 반응했던 원인을 하나씩 짚어 보려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투이나는 원인이 자신의 병일 거란 추측을 알려 줄까 잠시 망설였다.

가뜩이나 병에 걸려 상심한 사람들을 시드룬이 연구 대상으로 마구 납치하는 상상을 한 투이나가 차근차근 질문부터 던졌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비늘은 대체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 거죠?”

“비늘은 영혼의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입니다.”

“그곳에도 뱀이 사나요?”

“뱀의 비늘은 아닙니다.”

시드룬이 멀뚱히 대답했다.

“꼭 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으음, 영혼의 세계라고 해서 거기엔 영혼들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

시드룬의 얼굴이 미미하게 바뀌었다.

투이나만 간신히 알아볼 만큼 희미한 변화였지만.

“내가 영혼의 세계에 간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죠.”

“그때 만들어진 이물질입니다.”

언제 마법을 썼는지 시드룬의 손 위로 다시 비늘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보라색…….’

지금까지 그저 시드룬의 취향이려니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의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영혼의 세계에 다녀온 뒤로 시드룬이 변한 거군요?”

의문문이었지만 투이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시드룬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나는 변화한 몸과 함께 이것들을 발견했습니다.”

시드룬이 비늘을 들어 올렸다.

투이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깨달았다.

색은 다르지만 제게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던가.

온몸에 생겨나는 회색 얼룩.

시드룬의 연구를 통해서 병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비늘을 따라 번쩍거렸다.

‘그러면 더 이상 아르힘 님이 힘들이지 않아도 모두를 고칠 수 있어!’

투이나는 점점 더 깊숙이 그의 연구에 빠져드는 자신을 알았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이건 배신이 아니었으니.

투이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시드룬도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연구를 시작한 건가요? 영혼의 세계를 다시 열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번에는 그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시드룬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알 수 없습니다.”

“…….”

“영혼의 세계가 있으니 가야 할 뿐입니다.”

시드룬이 말은 너무 태연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곳에 갔다가 기억도 잃어버렸다면서 무섭지 않은 걸까? 무서움마저 잃어버렸나?’

긴 손가락 사이로 비늘을 굴리던 시드룬이 짧게 마법진을 드러냈다.

비늘은 곧 자취를 감췄다.

차분히 시드룬은 눈을 맞춰 왔다.

“당신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잠시 주저하던 투이나가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답했다.

“……얼룩병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나요, 시드룬?”

그는 들어 본 적 없었다.

투이나는 자신의 병과 아르힘과 만났던 순간을 설명했다. 물론 지금은 신의 힘으로 다 나았다는 거짓말을 붙여야 했지만.

설명하는 내내 시드룬은 몹시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가 빛을 죄다 삼키려는 듯 몇 번이고 깊어졌던 것이다.

“신기하군요. 분명히 고려해 볼 연관점이 많습니다.”

“확실하다고 증명할 수 있겠어요?”

“시도해 보겠습니다.”

별로 안심이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시드룬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 와중에도 투이나는 주의 사항을 빼먹지 않았다.

“저한테 했던 것처럼 병에 걸린 사람을 막무가내로 데려오면 안 됩니다. 알았죠?”

“이 연구는 아무에게나 밝힐 수 없습니다.”

“하긴 사람들이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걸 쉽게 믿을 순 없겠죠. 직접 본 저도 힘들었는데…….”

“그게 아니라 마법사들이 영혼의 세계를 비밀로 하기를 원했습니다.”

“네?”

이건 정말 뜻밖이었다.

“왜죠? 그분들은 수호신을 싫어하잖아요.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면 마법사를 두려워하는 대신 대단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수호신을 가지는 대신 마법사가 되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증명만으로는 마법사에게 이롭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시드룬이 말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고 밝히면 오히려 신에게 집착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마법사가 없으니 매력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위험하기만 할 뿐이지요.”

시드룬이 말끄러미 투이나에게 질문을 돌렸다.

“당신 역시 영혼의 세계를 겪은 후 아르힘을 더 찬양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투이나가 난감하게 웃었다.

그랬다.

영혼의 세계는 아주 잠깐 겪었을 뿐인데도 치가 떨리게 만들었다.

때맞춰 와 준 아르힘이 그때만큼 경이롭고 감사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으니까.

‘아, 참, 또 있었지. 내가 되살아났을 때도 그랬어.’

무자비한 죽음을 가려 주는 신의 존재는 이미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부정할 수가 없네요.”

투이나의 대답에 시드룬은 알아서 나머지 질문의 답도 긍정이라고 꿰어 맞춘 다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분간은 저로 만족하는 수밖에요.”

투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완치 후에도 변하지 않는 어떤 변화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어쨌든 비늘은 제게 반응했으니. 일단 저부터 연구해 보고, 확실해지면 다른 얼룩병에 걸린 사람들을 데려오기로 하죠.”

이 말은 사실 아직 발병 중이니, 정말 원인이 얼룩병인지 대조해 보자는 뜻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시드룬은 투이나가 친 연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요! 다른 사람을 데려오는 문제는 그때 다시 결정해요. 게다가 이제 소개도 받았으니 직접 마법사분들을 설득해 볼 수도 있잖아요?”

투이나가 낙관적으로 말했다.

그녀가 얘기하면 뭐든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녀를 따라가려는 듯 무심코 시드룬의 손이 뻗어 나갔다.

“……당신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그가 머리 위를 토닥였다.

투이나는 잠깐 멍해졌다.

‘시드룬이 언제부터 이렇게 스스럼없이 굴었지?’

그러고 보니 아까 마법사들을 만났을 때도 무척 친근하게 접촉했다.

어찌나 자연스러웠던지 저도 모르게 태연하게 넘겨 버릴 정도였다.

기분이 이상해진 투이나가 그의 손을 떼어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수리시가 쿠즈에게 하는 걸 봤습니다.”

“아하.”

졸지에 애 취급이라니.

‘시드룬이 올해 스물세 살이었지?’

세 살 차이면 투이나의 손위 형제인 넷째 오빠보다 어렸다. 그가 스물여섯이니까.

나이를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어색함이 사라진 투이나가 그냥 똑같이 되돌려주기로 했다.

“그래요. 시드룬도 오늘 고마웠어요.”

그러나 토닥이기엔 시드룬의 머리가 너무 높았다. 대신 어깨를 두드린 투이나가 입을 가렸다.

“그럼 이젠……. 흐아암.”

투이나가 하품을 했다.

주변이 밝아서 잊고 있었는데 원래 한밤중일 시간이다.

“피곤합니까?”

“아깐 안 졸렸는데 약간 멍하네요.”

“원하던 것도 얻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됩니다. 더는 마법사를 소개할 필요도 없어 보이니.”

“정말요? 그럼 좋죠!”

투이나가 냉큼 수락하자 시드룬은 막상 아쉬운지 되물었다.

“혹시 피를 더 줄 수 있습니까?”

“그건 좀……. 또 다치면 생각해 볼게요. 흘린 다음엔 쓸 데도 없으니까.”

“좋습니다.”

시드룬이 가볍게 마법진을 열었다.

확실히 신전 밖이라 그런가. 마법을 완성하는 속도가 빨랐다.

돌아갈 준비를 하던 투이나가 마법진을 바라보자마자 헉 소리를 냈다.

“……!”

“무슨 일입니까?”

덜컹 심장이 내려앉은 투이나가 시드룬을 밀쳤다.

너무 늦긴 했다. 마법진은 무릎을 꿇고 기다리던 라카인의 정면에서 열렸던 것이다.

예의 바르게 정좌를 하고 있던 라카인이 말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라카인? 언제부터 거기에…….”

그의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투이나의 입이 더 달달 떨렸다.

얼마 밀려나지도 못한 시드룬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담백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들켰군요.”

“아, 아니, 설명할 수 있어요.”

극도로 당황한 투이나가 더듬거렸다.

‘마법사의 마을이나 연구를 들킨 건 아니니까 넘길 수 있어요!’

라카인에게 뒤통수를 보인 투이나가 시드룬을 향해 필사적으로 눈짓과 손짓을 보냈다.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는 걸 한참 관찰하던 시드룬이 답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약속만 지키십시오, 루가.”

“그러겠다는 뜻이에요!”

투이나가 재빨리 다짐했다.

시드룬은 그럼 됐다는 듯 투이나를 다시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믿겠습니다.”

묘하게 가벼운 시드룬의 말투에 불안해진 투이나가 다급히 덧붙였다.

“일단 수리시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무슨 마법을 쓰는지 몰라도 투이나는 마법사들 중에 제일 무서운 게 수리시였다.

그냥 직감적으로 그랬다.

수습할 걱정에 정신이 팔려 있던 투이나는 고분고분 시드룬의 팔에 몸을 맡겼다.

시드룬은 곧장 마법진 너머로 투이나를 내려놓았다.

마법진과 함께 시드룬이 사라지자 그녀는 더욱 울상이 되었다.

마법진에 가려져 있던 뒤쪽에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 호루니와 스카차가 보였기 때문이다.

‘다 들켰네!’

밀려오는 두통에 투이나가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

호위들은 턱 뼈가 떨어져라 입을 벌리고 있어서 반응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사실은 시드룬과 밤마다 몰래 만나던 사이라고?

차라리 마법사들이 숨어 사는 비밀 장소에 갔다고 털어놓는 게 파장이 적을 성싶다.

‘심지어 둘 다 진실이잖아.’

투이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안…… 자고 계셨네요?”

“루가 님을 호위하는 중입니다.”

세상 평온하게 라카인이 답했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자 물꼬가 트였는지 호루니가 딸꾹질을 했다.

“루, 루, 루가 님, 언제부터 마법사와 밀회를 즐기신 거죠?”

“밀회일 리가요!”

“그렇다면 마법사가 루가 님을 납치한 겁니까? 신전 밖으로 나오실 기회만 엿보던 거군요, 그 음흉한 놈!”

스카차의 목소리가 커졌다.

밀회보다는 이쪽에 신빙성이 실리는지 호루니의 눈도 커졌다.

“아니, 아니에요!”

투이나가 부정했다.

진땀을 흘리던 투이나가 내질렀다.

“저희가 만나는 건 아르힘 님도 알고 계세요!”

“예에?”

“정말이십니까?”

“그으럼요.”

일단 뻗어나가는 오해를 멈춘 투이나가 혀를 깨물었다.

‘물론 알고 계시지만 마법사는 믿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아, 내가 이렇게 시드룬과 계속 만나고 있는 걸 알면 뭐라고 하실지.’

이해해 주실 거란 마음이 반, 두려운 마음이 반이다.

투이나는 우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쪽으로 수습해 보았다.

“시드룬이, 음……. 제게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해서 다녀온 거예요. 청혼이랑은 아무 상관없이요.”

“루가 님께요?”

“네에. 하지만 제발 비밀로 해 주세요.”

투이나가 초조하게 손가락을 입술 위로 눌러댔다.

“사람들한테 알려지면 시드룬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똑같고요. 소란이 커질 테니 이 일은 반드시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자는 마법사입니다!”

스카차는 이거면 설명이 끝난다는 듯이 외쳤다.

호루니는 투이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신변이 걱정스러워 갈팡질팡했다.

의외로 가장 격렬하게 반대할 줄 알았던 라카인이 담담했다.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밤을 새우면 몸에 해로우십니다.”

“아, 하루 정도는 괜찮아요.”

“하루가 아니시잖습니까.”

투이나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그걸 어떻게…….”

“방에서 종종 루가 님이 아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벙 쪘다.

“문 밖까지 들렸어요?”

“그게 구분이 되나요?”

“저흰 못 들었는데요?”

라카인은 투이나의 질문에만 대답했다.

“들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르힘이라고 생각해서 방해하지 않았습니다만.”

라카인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가 님, 마법사든 신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주군께서 하시는 일에 따라가게만 해 주십시오.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

투이나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자 호루니가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아까 루가 님이 사라지신 걸 알고 이 근방을 다 뒤졌습니다. 심지어 라카인은 지붕까지 올라갔었어요.”

“예. 그러면서도 혹시 루가 님의 개인적인 사정일지도 모르니 사제님들에겐 알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투이나의 표정이 변했다.

‘봤구나.’

침대 위에서 시드룬에게 잡혀가던 모습을.

“그래서 문이 부서진 거였어요?”

투이나가 삐딱하게 기울어진 문을 가리켰다.

비스듬히 걸린 문틈으로 어슴푸레한 밤빛이 송송 들어왔다.

“다시 걸어 보려고 했는데 경첩이 나가서…….”

스카차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제가 그런 건 아니고 라카인이 부순 겁니다.”

“정말 미친 사람 같았어요. 건물을 다 뜯어 볼 기세로 수색하다가 갑자기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

쏟아지는 실토에도 라카인은 눈썹 털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투이나가 그에게 다가가자 비로소 침착한 목 아래가 땀에 흠뻑 젖은 게 보였다.

결국 투이나가 항복했다.

“데려갈 수 있는지 다음에 시드룬에게 물어볼게요. 장담은 못 해요. 오히려 여러분이 가지 않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어요.”

투이나가 여러 겹으로 경고를 쳤지만 라카인은 한 번에 걷어냈다.

“쓸모가 없더라도 곁에 두어 주신다면 반드시 한 번은 쓸모를 다하겠습니다.”

“쓸모가 없긴 왜 없어요.”

투이나가 간만에 핀잔을 섞었다.

“여러분만큼 제가 믿는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괜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불안으로 스스로를 좀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투이나가 약속했다.

“반드시 돌아올게요. 돌아오지 못할 일이라면 함께 가겠습니다.”

그녀는 급한 대로 이불을 걷어 와 라카인의 어깨에 둘렀다.

“그러니 제발 몸 좀 아껴 주세요.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차갑게 식은 몸에 천이 감겼다.

투이나가 말아 준 거라 직접 풀지도 못하고 라카인이 뻣뻣하게 말했다.

“루가 님 쓰실 이불입니다.”

“어차피 바깥에서 더 경계 서기엔 틀렸잖아요.”

투이나가 손짓했다.

“오늘은 그냥 다 같이 여기서 자요.”

“정, 정말이십니까?”

호루니가 작게 깩 소리를 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라카인이 이제야 반대하고 싶어 죽겠다는 소리를 냈다.

“루가 님.”

“이 주변에서 절 해칠 사람은 마법사밖에 없는데 방금 갔잖아요?”

스카차가 죽상을 썼다.

“그런 농담 재미없습니다.”

“에이.”

나름대로 회심의 농담이었던 투이나가 살살 호위들을 당겼다.

“그래도 안전하다는 말은 진짜예요. 게다가 라카인의 귀가 이렇게 좋은데 누가 침입하는 소리 하나 못 듣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어정쩡하게 호위들이 따라오자 투이나는 그대로 풀썩 누웠다.

“이러다 해 뜨겠어요. 얼른요.”

호루니가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투이나의 옆에 반쯤 누웠다. 스카차는 어색해 죽겠는지 눈만 굴렸다.

그러는 동안 라카인은 머리맡에 앉았다.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세요. 질문하기 전에 매번 물어보지 않아도 돼요.”

투이나가 누운 채 배 위에 깍지를 꼈다.

올려다보니 라카인의 긴 앞머리 밑으로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밤이라 더 새까만 색이다.

“호위를 들이시면서 주변의 누구를 가장 경계하셨습니까?”

투이나는 부드럽게 굳어 버렸다.

가뜩이나 경계심 강한 라카인이 물어볼 만한 질문이었다.

혹은 영민한 머리로 투이나가 특별한 상대만 눈에 띄게 조심한다는 점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 샨을 꺼려한 걸 알았나?’

라카인이 전에 섬기던 사람을 욕하기도 싫었고, 이젠 더 이상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심하고 싶을 뿐이니.

투이나가 바람처럼 중얼거렸다.

“등 뒤에 있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

라카인이 의아해했지만 투이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이니까 얼른 누워요. 안 그러면 침대로 보내 버릴 테니까.”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협박했다.

투이나가 바닥에 누워 있는데 절대로 호위가 침대로 가는 꼴을 볼 수 없는 라카인이 즉각 몸을 일자로 눕혔다.

고민하던 스카차도 결국 경직된 차렷 자세로 침대와 투이나 사이에 누웠다.

살짝 한쪽 눈을 뜬 투이나는 호위들이 모두 누웠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아, 좋다. 꼭 옛날 집 같아.’

제일 먼저 옆에 누워 놓고 가장 소심하게 웅크린 호루니에게 투이나가 빙그레 웃었다.

“팔베개해 줄까요?”

“아뇨! 어떻게 그런 무례를……. 해도 제가 루가 님에게…….”

“전 동생들한테 많이 해 봐서 익숙해요.”

“부럽네요.”

무심코 중얼거린 호루니가 화들짝 부정했다.

“아, 제, 제 말은…….”

“부러울 게 뭐가 있어요.”

투이나가 느긋하게 돌아누웠다.

“여러분은 이미 제 가족인데.”

가슴이 먹먹해진 호루니가 작게 그렇죠, 하고 속삭였다.

투이나에게 이불을 덮어 주려던 라카인은 혹시라도 천에 제 땀 냄새가 배었을까 봐 코를 씰룩였다.

자신들이 가족이라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잠깐 감각이 둔해진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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