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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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눈을 덮으리라. 어둠 속에서 자신을 노리는 적들을 향해…’

샨은 언제나 검을 가지고 다녔다.

아르힘의 신전에 와서 날붙이를 압수당했을―샨의 관점으로는 잠시 맡겼을― 때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검을 넘기셔야 합니다.」

강경하게 말한 자의 허리춤에는 긴 검이 매달려 있었다.

샨은 그를 비웃으며 검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감히 왕의 몸수색을 할 것이더냐.

맨손으로도 찢어 죽일 수 있을 자들에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샨은 모든 무기를 넘겼다.

그들은 덜덜 떨며 날붙이를 수거해갔다.

다만 딱 하나.

신을 부를 때 쓰는 도구만큼은 그의 목 위에 남아 걸려 있었다.

루가를 처음 만나러 가는 길에도 샨은 도구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과연 아르힘이라는 수호신은 규칙을 어긴 자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기대와 달리 루가라는 자를 만날 때까지 아무런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실망은 커지기만 했다.

제단 위에서 처음 본 루가는 생각보다 볼품없었다.

몸집은 샨의 절반만 했고, 음침하게 얼굴을 뺀 부분을 몽땅 답답한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이런 자가 정말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인가.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자가 생각보다 농담을 잘한다는 걸 깨달은 건 그 뒤의 일이다.

샨의 궁전에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장난을 치는 광대가 있었다.

루가를 대할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즐겁기는 하였으나 역시 왕비의 재목은 아닌 듯싶었다.

그런데 가끔 그녀가 똑바로 눈을 쳐다볼 때가 있었다.

모하세스에서는 낳아 준 부모라 할지라도 똑바로 샨을 보지 못했다.

왕이 된 순간 신이 깃들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그와 동등한 자는 루가뿐이었다.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인간이 아내가 된다면 위엄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게다가 아르힘 자체도 탐이 나는 땅이다.

구혼자가 좀 많긴 하지만 가치가 있으면 당연한 법.

샨은 완벽한 결혼 상대를 찾았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루가는 자신이 사실은 미천한 신분이라고 밝혀 버렸다.

샨은 자꾸 예상에서 엇나가는 루가에게 짜증이 났으나 동시에 본능적인 느낌이 왔다.

먼저 자신의 패를 공개한 자는 반드시 숨겨진 속뜻이 있기 마련이다.

솔직하겠다고 나선 루가에게서 큼지막한 비밀의 냄새가 났다.

샨은 자신했다.

본능적인 후각은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냐.

그는 관대하게 넘어가는 척하며 그녀를 관찰했다.

구혼 기간이 끝날 때까지 루가의 비밀을 찾아내는 짧은 유희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 후 같이 지내면서 샨은 의외로 루가와 대화하는 게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

실은 대화 자체를 타인과 제대로 해 볼 일이 드물었다. 애초에 동등하게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으니.

루가를 붙잡아다 종일 이야기를 시켜보고 싶었으나 그녀는 자꾸만 다른 구혼자에게로 쪼르르 가 버렸다.

오늘 연회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샨은 속이 끓어올랐다.

처음으로 망할 천 쪼가리를 벗고 그럴싸한 몰골이 된 걸 칭찬해 줬지만 기뻐하는 기색도 없더라니.

오히려 보잘것없는 상인이 설치는 대단하지도 않은 말에 더 기뻐하는 게 아니던가.

고귀해졌다고 하나 천성은 버리지 못하나 싶어 부아가 치밀었다.

게다가 감히 자신을 제치고 천한 놈을 먼저 찾아가기까지 하다니.

샨이 무심코 힘을 주자 은잔이 손안에서 애처롭게 삐긱, 하는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그녀가 기대에 못 미친다면 남은 건 실망뿐이다.

만일 루가가 감추고 있던 비밀이 시시한 감정놀음 따위라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허나 유흥은 유흥일 뿐.”

샨이 달빛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목적을 잊어서는 아니 되지.”

달을 가리듯 드리운 그의 그림자 에서 또 다른 인간이 한 명 걸어 나왔다.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릴 만큼 인적이 끊긴 장소였다.

샨의 푸른 눈빛이 불길처럼 쏟아졌다.

“네가 본 것을 고하라.”

그늘에 숨어 있던 자가 명령에 따랐다.

* * *

“샨?”

투이나가 파스락, 풀잎을 헤쳤다.

기다려도 샨이 돌아오지 않자 결국 바깥으로 나오고 말았다.

“샨! 어디 있어요?”

샨은 이름을 부르는 일은 개의치 않아 했지만, 이렇게 막 불러대는 걸 들었다간 벌컥 화를 낼 것이다.

위엄이 없다고 말이다.

“샤안! 샨!”

일부러 그 점을 노린 투이나가 강아지를 찾는 것처럼 소리쳤다.

‘화를 내려면 어쨌든 나타나야 하니까.’

샨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이상하지만 혹시라도 너무 신전 깊숙한 곳까지 갈까 봐 걱정이 됐다.

물론 신전의 중요한 길목은 무사제들이 지키고 있다.

샨의 성격상 막으면 더 들어가려고 할 테니 문제지.

샨의 부재를 알리자 연회장을 지키던 무사제가 주변을 수색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별관 밖까지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모하세스처럼 눈에 잘 띄는 자도 없으니 좀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근처에 샨이 갈 만한 곳도 없을 텐데…….”

“뭐, 모하세스가 누구한테 당할 자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자는 당하는 게 아니라 해를 깨칠까 봐 걱정이죠.”

호루니의 말에 무사제도 공감하고 말았다.

다른 구혼자들 때문에 연회장을 오래 비울 수 없었던 투이나가 망설였다.

‘찾으러 가야 하나?’

그때 주위를 돌아보던 투이나는 유난히 두리번거리는 스카차를 발견했다.

“괜찮을 거예요, 스카차.”

“아, 루가 님……. 주위를 좀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샨이 걱정되긴 하죠. 하아, 어쩐다.”

차라리 샨이 아까처럼 시끄럽기를 바랄 지경이다. 그럼 어디에 있는지 단박에 찾아낼 수 있을 텐데.

찾아낼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던 투이나에게 스카차가 말했다.

“저어, 그게 아니라 라카인이 보이지 않아서 찾는 중이었습니다.”

“세상에……. 라카인한테도 무슨 일 있나요? 아까 수색하러 갈 때 같이 간 줄 알았는데.”

“아, 아닙니다, 루가 님.”

스카차가 주저했다.

“실은…… 그가 사라진 지 좀 지나치게 오래된 것 같습니다.”

투이나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무슨 뜻이죠?”

“혹시 그가 모하세스와 있을…….”

“왜 나와 계십니까.”

“……!”

스카차의 의혹이 끝나기도 전에 장본인인 라카인이 나타났다.

벌에 쏘인 것처럼 펄쩍 뛰어오른 스카차가 입을 꽉 다물었다.

괜히 투이나까지 깜짝 놀랐다.

“라카인!”

“분부하십시오.”

영문도 모르면서 라카인이 즉각 답했다.

스카차를 잠깐 쳐다본 투이나가 물어봤다.

“샨을 찾으러 갔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연회장에 있는 분을 찾을 이유가 있으십니까?”

“예?”

라카인의 말에 투이나보다 먼저 스카차가 삑사리를 냈다.

“정말이십니까?”

“안에 계신 걸 보고 나오는 길이다.”

라카인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스카차가 낸 바보 같은 소리를 들은 호루니가 급히 뛰어왔다.

“왜요! 무슨 일이십니까!”

“……수색을 중단해도 되겠어요.”

“모하세스를 찾으셨습니까?”

“직접 확인해 보죠.”

투이나가 앞장섰다.

라카인은 이상한 사람들의 반응에도 군말 없이 투이나를 따라갔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간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천을 헤치고 나아갈수록 따듯해지는 공기와 반대로 숨이 막혔다.

‘침착해. 침착하게…….’

안개처럼 얇고 불투명하게 물들인 아마포를 살짝 걷어 올렸다.

연회장엔 다시 세 사람이 보였다.

언제 사라졌냐는 듯 샨은 차분히 앉아 있었다.

그녀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시선을 느꼈는지 샨이 고개를 휙 돌렸다.

“…….”

투이나를 발견하고도 샨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덫에 걸린 사냥감을 본 것처럼 느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움찔한 투이나가 무심코 천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천 뒤에 가려진 호위들을 건너다보니, 그들도 놀랐는지 정신없이 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대체 언제…….”

“어떻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들 중에서 오직 라카인만 이해하지 못했다.

샨이 자리를 비운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를 찾느라 주변에 무사제까지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오고가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게다가 하필 여긴…… 내가 죽었던 장소야.’

투이나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일부러 무시해 왔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겹치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호위를 포함해서 아무도 모르게 건물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우연일까?

세 사람의 호위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것까지 본 투이나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갔다.

“언제 돌아온 거죠?”

“언제 나갔는지는 알고 있나.”

샨이 평이하게 대답했다.

투이나가 찡그리자 그가 미미하게 이를 드러내며 질문했다.

“나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고 있나?”

“……나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기는 하나요.”

두 사람 다 똑같이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고 나자 팽팽해진 공기가 비로소 누그러졌다.

샨이 형형한 눈으로 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앉아 있고 그녀는 서 있는데도 거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내가 아는 루가로군.”

샨이 아주 약간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투이나도 간신히 숨이 트였다.

“……갑자기 사라져서 다들 놀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은 해야죠.”

“설명이라. 나도 좀 듣고 싶군.”

샨의 손이 올라왔다.

왠지 등허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샨은 마치 어느 부위를 뜯어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올려놓은 손등을 움찔거렸다.

“그대는 내가 아닌 자들 앞에서 다른 사람이 돼.”

“전 언제나 같은 사람이에요.”

“같기야 하겠지. 몸을 두 개 가질린 없으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를테면 이런 거다.”

허공에서 까딱거리던 손이 가볍게 투이나를 툭 쳤다.

그것뿐이었는데도 한순간 주의를 빼앗기기엔 충분했다.

기회를 잡은 그의 손가락이 뒷목을 휘어 감으며 단숨에 잡아당겼다.

쨍!

어디선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날카롭게 고막을 가르는 파열음이 지금만큼 선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황에 빠진 머릿속에서 윙, 하는 벌 떼가 날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샨이 그녀에게 입 맞추고 있었다.

세상이 뒤집혀 버렸다.

‘거짓말이야…….’

투이나는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를 밀어낼 순간도 놓쳤다.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

아니면 악몽이라도.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그러나 부릅뜬 눈동자가 서로를 노려보는 틈을 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려는 게…….

투이나의 손이 홱 얼굴로 치켜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샨이 떨어졌다.

과연 빠른 동작이었다.

“이제 좀 알겠나.”

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투이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있는 투이나의 표정을 본 샨이 그대로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확실히 알겠어.”

음식을 나르던 자부터 악기를 연주하던 자까지 동작을 멈추는 바람에 소리가 뚝 끊겼다.

턱이 바닥까지 떨어진 시종이 들고 있던 병에서는 포도주가 줄줄 쏟아졌다.

그래도 치울 생각을 못했다.

선뜻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누가 감히.

투이나가 손등으로 입을 누른 채 해괴한 단어들을 억누르는 사이 오직 베인만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움직였다.

“……루가 님.”

지금 이 순간을 가장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다가오자 투이나는 차라리 눈을 찔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베인은 별말 없이 흰 손수건을 건넸다.

닦으라니? 어디를?

손수건의 용도를 떠올리자 이번에야말로 화르륵 얼굴이 달아올랐다.

입술을 닦으라는 권유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 수가 있다니.

투이나가 얼른 받지 않자 베인은 무례를 무릅쓰고 거의 억지로 쥐여 주다시피 그녀의 손에 손수건을 올려놓았다.

차라리 대신 닦아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듯했다.

일단 손수건이 손에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입가로 올라갔다.

투이나가 천천히 입을 닦는 동안 샨은 하고 싶으면 하라는 듯이 팔짱을 꼈다.

패악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뒤에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아니, 당신은 그러면 안 되잖아!’

투이나의 부릅뜬 눈이 샨에게 고정되었다.

“……무슨 짓이죠, 방금?”

“말해야 아는 건가?”

샨이 짤막하게 말했다.

방금 내가 한 일을 너도 알고, 저자도 알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데, 하는 식의 말투다.

“나와 결혼하자는 뜻이지.”

급격히 뒷골이 당겼다.

벅벅 입술을 문지른 투이나가 손수건을 던지려다 베인이 줬다는 걸 기억해내고 꽉 쥐기만 했다.

“또 이랬다간 당신을 평생 추방하겠어요.”

“안타깝군. 우리가 결혼한 뒤에도 다시는 입 맞출 일이 없을 거라니.”

샨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누가 많이 아쉽겠어.”

하마터면 입 밖으로 험한 말이 튀어나갈 뻔했다.

평생 모르고 살았던 폭력성을 갈고닦고 싶게 만드는 걸 보니 확실히 전쟁에 탁월한 자다.

더 상대할 가치도 없어 투이나는 휙 몸을 돌렸다.

입맞춤당한 그녀보다 더 기겁한 사람들이 보였다.

아직도 멍청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투이나가 한숨을 삼켰다.

“입가심할 것 좀 주세요.”

“예? 아, 예에…….”

벙 쪄 있던 시종이 그제야 포도주로 흥건해진 바닥을 보고 뜨악했다.

얼어붙었던 시간이 녹은 듯이 다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할 때의 온건한 분위기는 남김없이 사라진 뒤였다.

아무도 크게 떠드는 자가 없어 억눌린 속삭임만 비질처럼 스쳐갔다.

방금 보았어?

그게 무슨 뜻인지.

저자가 정말로 마음이 있다면…….

투이나는 들리는 듯 아닌 듯 희미하게 스쳐지나가는 소리들 속에서 술로 입을 헹궜다.

원래도 잘 취하지 않지만 이렇게 마실수록 정신이 또렷해지는 건 처음이었다.

‘검을 빼앗긴 샨이 다른 방식으로 폭력을 휘두르기로 결심했나?’

그렇다면 최악이다.

표면적으로는 구혼 기간이기 때문에 가벼운 신체 접촉은 호위들도 묵인하고 있었다.

샨의 ‘가벼운’ 신체 접촉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항의하기 시작하면 대단히 성가시게 될 게 분명했다.

‘분명히 죽기 전보다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이렇게 꼬여 버린 거지?’

샨이 앞뒤 안 가리고 박살 내던 시절은 구혼 기간 끄트머리였다. 날만 없었지 칼춤을 추며 돌아다녔다는 말이 정확했다.

‘……그런데 입맞춤도 박살 내는 쪽에 속하던가?’

주변은 확실히 박살나긴 했지만, 본인의 생각이 다르다면 그게 더 문제였다.

만약 정말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설마…….’

목구멍을 넘어가던 포도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설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투이나가 불신에 가득 차 샨을 흘긋 곁눈질했다. 그는 이미 투이나를 잊은 듯이 하인들을 부리고 있었다.

절대로 저건 사랑에 빠진 인간이 아니다.

한차례 그를 노려보고 나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투이나의 상태가 영 이상했는지 호위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루가 님…….”

“저 침착해요.”

투이나가 안심시키려는 듯이 호위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돌아본 자리엔 호위 대신 베인이 있었다.

침착함이 싹 말라 버렸다.

투이나가 동그랗게 입술을 만 채 공허한 소리를 흘렸다.

“어…….”

“포도주를 따듯하게 데워 달라고 부탁하고 오는 길입니다.”

얌전히 그녀의 곁에 앉은 베인은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곧 새벽일 텐데 따듯한 쪽이 더 마시기 좋아 보여서요.”

“그렇……죠?”

“필요하다면 제 거처에서 꿀과 계피를 얼마든지 가져가라 말하였습니다. 저번에 단걸 좋아하셨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인의 자상한 목소리가 가만가만 그녀를 다독였다.

그는 이미 아까 있었던 소동을 잊은 듯했고, 덕분에 덩달아 그녀까지 잊은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연회에서 한차례 같이 시간을 보냈던 두 사람은 뚜렷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더 어색하고 더 초조한…….

그래도 들쑤셔진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버텼다.

누가 더 잘 감추는지 겨루기라도 하듯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시종들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회백색 빛이 식어 가는 난로에 새어들기 시작했을 때 곧 해가 뜨리라는 걸 알았다.

봄맞이 축제는 해가 뜨는 순간 끝났다.

샨은 엷게 비쳐 들어오는 태양을 느끼자마자 단숨에 천을 걷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때까지 작은 방 하나를 새로 채울 만큼 잔뜩 술을 마시며 버티던 투이나와 베인이 잔을 내려놓았다.

“으음…….”

그제야 졸음과 취기가 오르는지 베인이 살짝 아미를 찡그렸다. 색색이며 숨이 새어나오는 그의 얼굴이 발그스름했다.

그때까지 멀쩡하던 투이나가 가만히 한쪽으로 그를 기대게 해 주었다.

“쉬어요, 베인.”

“하지만 루가 님…….”

“이제 축제는 끝났어요.”

흰 아침의 빛이 수려한 얼굴로 번져 가자 그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또 아침이 오는군요.”

그 말에 이유도 모르고 가슴이 아렸다.

베인은 곧 몸을 추슬렀다.

살짝 흐트러져 있던 매무새를 정돈한 그는 다시 완벽한 구혼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시드룬은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물끄러미 투이나를 응시한 채.

투이나가 잠시 그에게 눈짓하자 시드룬은 벽 속으로 녹아내리듯 마법진과 함께 사라졌다.

* * *

“봄맞이 축제가 끝났다고 이렇게 기운을 잃으실 줄은 몰랐는데요.”

명랑한 목소리에 투이나가 얼른 베인에 대한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와 닮은 얼굴을 봤더니 또 생각이 났던 것이다.

“미안해요, 레오나. 제가 불러 놓고 예의가 아니었네요.”

황금빛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소매를 걷은 레오나가 화사하게 생긋 웃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셨으니 졸리실 수도 있죠. 낮부터 종일 아르힘을 돌보시고 밤을 새셨으니 얼마나 고되셨을까요.”

레오나가 다 이해한다는 말투로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언제든지 불러 달라고 말한 사람은 제가 아닙니까. 영광일 뿐이지요. 오늘도 신전에 들라는 루가 님의 말씀을 듣고 어찌나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레오나가 연극적인 태도로 말하자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투이나는 시끄러운 말들이 반가웠다. 주변이 소란스러울수록 어제 일을 기억 밑으로 덮어 버리기가 편했다.

짝.

레오나가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초대를 받아서 와 놓고도 아직 선물도 풀지 않았군요! 들어와라, 얘들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짐꾼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놀란 투이나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레오나, 이게 다 뭐예요?”

“다른 집에 방문할 때는 선물을 들고 가는 게 관례가 아닙니까.”

태연하게 대답하던 레오나가 투이나의 표정을 보더니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축제 때 보낼 기부의 일부라고 생각해 주세요.”

“기부요?”

“어차피 저희 상단에서 신전으로 물건을 보내도 필요한 것만 남겨 놓느라 루가 님이 전부 쓰시지도 못한다 들었습니다.”

레오나의 눈이 고혹적으로 휘었다.

“피난민을 돕는 것도 좋지만 루가 님 쓰실 물건은 남겨 두셔야지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아름다운 비단과 장식용 금관이 줄을 이었다.

열어 보기 아까울 만큼 정교하게 다듬은 보석함과 최고급 분통, 하얀 면으로 싸 놓은 두툼한 주머니도 여러 개였다.

“모하세스의 부도 유명하오나 저희 역시 뒤지지 않는답니다.”

“레오나, 이렇게 과한 물건을 사사롭게 받을 순 없어요.”

“어머, 이 무슨 섭섭한 말씀을. 과한 물건이 아니라 정말로 약소한 성의일 뿐입니다. 저희 상단에선 이런 것들이 조약돌처럼 발에 차인답니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은 물건을 본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조약돌이요?”

“조약돌은 좀 심했죠? 하지만 루가 님께 비하면 여전히 하찮디하찮은 물건이 아니겠습니까.”

레오나가 너스레를 떨었다.

“마음은 감사해요, 레오나.”

“물건도 감사히 바치고 있습니다.”

레오나가 꾸며낸 게 틀림없는 우아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베인은 루가 님께 온 마음도 바치고 있을 테지만요.”

“그건…….”

“아아, 물론 루가 님께 부담을 드리려는 게 아니랍니다.”

베인과 꼭 닮은 얼굴로 그녀가 나른한 연기를 계속했다.

“다만 사람의 마음에 비하면 물건은 얼마나 하찮은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끔은 신에게 바치기에도 부끄러울 때가 있으니.”

신앙으로 가득 찬 레오나의 목소리가 매끄럽게 하소연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신도를 가여이 여겨 주셔요. 이런 사소함까지 받아 주지 않으시면 속상해서 몽땅 도랑에라도 던져 버릴 수밖에 없답니다.”

투이나는 웃는 얼굴로 진땀이 났다.

‘농담……이겠지?’

가만 보면 레오나가 베인보다 더 막무가내로 굴었다.

상인의 수완인지 뭔지.

투이나로선 도저히 흘려 넘길 수가 없는 부분을 잘 찔렀다.

“받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말은 마세요.”

“어머나, 기뻐요.”

금세 레오나가 활짝 웃었다.

그녀는 잽싸게 투이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 단어도 놓치지 않았다.

“루가 님이 쓰신다면 베인도 분명히 기뻐할 겁니다.”

“……다음엔 이러지 마세요.”

베인과 꼭 닮은 얼굴로 기쁘다 말하는 모습에 괜히 심장이 뛴 투이나가 뺨을 붉혔다.

“레오나에게 부탁할 게 있었는데 이러면 말하기 어려워지는걸요.”

“어머나? 아니에요. 루가 님은 더 요구하셔도 되지요! 뭐든 말씀하세요.”

레오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투이나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로퍼드 상단에서…… 검을 만들 수 있을까요?”

투이나의 말에 다들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물론이죠. 저희 상단과 계약한 대장간도 많으니까요. 루가 님이 검에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취미가 아니에요.”

투이나가 미미하게 웃었다.

“구혼자들에게 선물하려고 합니다.”

레오나의 눈이 의아하게 깜박이자 시종이 놀란 눈으로 끼어들었다.

“저희도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언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꽤 됐어요.”

투이나가 대답했다.

레오나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단정한 투이나의 얼굴에서 별다른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투이나가 자신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라기에는 꽤 시간이 지났으니까.

담담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투이나가 물었다.

“안 되나요?”

“물론 들어드려야죠.”

레오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쩐지 홀린 듯이.

투이나가 웃자 세상은 다시 괜찮은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오나는 동생이 왜 루가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정직하게 한 사람을 바라보는 투이나의 시선이 꼭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처럼 만들었다.

“선물용이라면 화려하게 만들어야겠네요.”

“장식은 어떤 거라도 좋아요.”

검술에 문외한인 줄 알았던 투이나가 검의 구체적인 크기와 모양을 설명하자 레오나도 보다 진지해졌다.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겠군요. 흔한 모양이니 바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마워요, 레오나.”

흔한 검이라는 말에 투이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흔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살해할 때 자신만 쓰는 특별한 무기를 쓰는 바보짓이 어디 있겠는가.

투이나는 그저 몸에 느껴졌던 무게와 살을 뚫고 나왔던 검 끝으로 무기를 짐작해 보았을 뿐이다.

주변에 항상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렵지도 않았다.

종이와 펜을 빌려 투이나의 요구 사항을 적은 레오나가 물었다.

“세 자루 모두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야 하나요?”

“네. 무게까지 모두 똑같아야 해요.”

“알겠습니다.”

잠깐 호기심을 드러낸 레오나가 명쾌하게 종이를 접었다.

“보름 안으로 만들어 드리죠.”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루가 님 부탁인걸요.”

방긋 웃은 레오나가 구슬프게 눈썹을 늘어트렸다.

“아마 베인 녀석은 선물을 받아도 장식용으로만 쓸 겁니다. 검이란 건 밤마다 침대에서 껴안고 잘 수가 없잖아요.”

무심히 듣던 투이나는 문득 흘려 넘길 수 없는 대사가 끼어 있다는 걸 개달았다.

‘뭘 껴안고 자?’

“……네?”

“아이쿠,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오나가 자기 입술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루가 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면 그럴 거란 얘기였죠.”

“아하……하…….”

투이나가 몹시 어색하게 웃었다.

남의 입으로 듣는 베인의 애정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게 친누나라면 더더욱.

원래 형제는 서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걸 사명으로 타고나는 거다.

레오나는 그 뒤에도 몇 가지 농담을 추가해 베인이 들었다면 당장 입을 막아 버렸을 만행을 저질렀다.

투이나한테만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 문제였지.

적나라한 베인의 마음을 들을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 투이나를 놀리면서 레오나는 흐뭇해했다.

왔을 때보다 떠나갈 때 더 밝은 미소를 지을 정도였다.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또 뵈어요, 루가 님.”

레오나가 꼼꼼하게 손등에 입을 맞췄다.

참 여운이 강한 사람이다.

그녀를 배웅하자마자 시종들이 선물로 다가갔다.

“어쩜, 화려하기도 해라.”

“다음 의례 때 쓰시면 되겠네요.”

뜻밖에 라카인도 선물을 열어 보는 사람에 끼어 있었다.

보석에는 관심이 없는지 그가 흰 꾸러미를 열었다.

부드러운 밀알이 쏟아졌다.

“어머나, 자상해라. 루가 님의 속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봐요.”

순진하게 감탄하던 시종이 이내 입을 합 다물었다. 마냥 좋아하기엔 옆에 있는 호위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투이나도 덩달아 굳었다.

그녀가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 라카인은 크로퍼드 상단을 의심했다.

그런데 투이나가 독을 먹은 뒤 원래 몸이 약하다고 퍼트린 소문을 믿고 이런 선물을 준비해 온 것이다.

‘하필이면…….’

작은 불씨라도 의심을 켜기엔 충분했다.

크로퍼드 상단을 좋아하는 호루니와 스카차마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으니.

선물은 단순히 소문을 들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일과 관련이 없어요.

나는 그 일을 알지만…… 믿지요?

그렇게 말하는 레오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흰 자루를 쥔 라카인이 허락을 구하듯 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독은 없을 거예요.”

“확인은 해야 합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강경하게 말했다.

“여기에 독을 섞을 만큼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고 해도 조심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어리석다는 변명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

투이나는 라카인이 결국 부엌에 있는 사람을 모두 바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직접 맛을 보는 인간이다.

불안이 싹트면 안심할 수가 없다.

투이나가 입술을 깨물자 허락의 의미로 이해했는지 라카인이 남은 물건들도 수거해 갔다.

눈치를 보던 시종이 그가 보석 관까지 낚아채 가자 울상을 지었다.

“이, 이건 왜요?”

“먹는 독만 있진 않다.”

라카인이 단호하게 물건을 거뒀다.

시종이 순간 찔끔 손을 떼었다가 괜히 더 억울해졌다. 자기 것도 아닌 금은보화가 사라지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웠다.

“루가 님도 크로퍼드 상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시죠?”

“왜 안 말리세요?”

‘나도 같은 이유로 검을 주문했으니까요…….’

투이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을 삼켰다.

그녀도 살인자를 찾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샨의 이상 행동 이후로 과거가 모래알처럼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형태를 잃고 부스러지는 먼지가 되었다.

과거와 현재가 달라졌기 때문에 살인자도 없으리라는 생각은 샨의 입맞춤이 박살냈다.

먼저 살인자를 끊어내지 않으면 마음을 도려내 가져가 버릴 것이다.

‘나만 죽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하잖아.’

그때 제 뱃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다른 목소리가 빳빳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너만 죽지 않으면 되겠지. 하지만 그러다 베인을 잃고 싶어?’

목소리가 비웃었다.

투이나는 라카인이 물건을 모아 드는 걸 말리지 못했다.

* * *

물소리.

투이나는 정수리를 따라 흐르는 물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 깨닫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성소 안이었다.

투이나가 찰박이며 몸을 일으켰다.

성소 안은 언제나처럼 황금빛 광휘가 내리쬐고 있었다.

“아르힘 님.”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울리는 대신 물소리와 함께 쓸려가 버렸다.

투이나가 물을 짚었다.

성소의 물은 깊이 빠지는 대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처럼 손바닥 아래에서 요동쳤다.

투이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다.

커다란 종 안에도, 높은 천장까지 살펴도 탑에 있는 사람이라곤 없었으니까.

꿈에서 그러하듯 갑자기 덜컥 서러워졌다. 왜 혼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서러웠다.

그러나 아르힘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아이야.”

소년의 모습을 한 아르힘이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네가 부르면 언제나 내가 오지 않더냐.”

투이나가 그를 응시했다.

아르힘은 곧 소년의 모습에서 나이 든 노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깊게 꺼진 눈두덩과 달리 시퍼렇게 보일 정도로 선명한 흑발은 그대로였다.

“꿈인가요.”

“꿈이 아니다.”

주름진 눈으로도 명확하게 빛나는 신성을 보이던 아르힘이 이번에는 투이나 또래의 여자가 되었다.

매끄러운 흑발이 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허나 꿈이라고 해도 좋다.”

아르힘이 속삭였다.

“혼자서 방황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게 오라.”

더는 이기지 못하고 투이나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매끄러운 팔이 가볍게 목덜미를 감쌌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투이나가 아르힘을 안고 있는 거라 여겼을 모습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투이나의 정신이 맑아졌다.

그녀가 차갑고 시원한 검푸른 머리카락에 대고 웅얼거렸다.

“제가 잠들었었나요?”

“성소를 나가면 다시 잠들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수히 많은 별을 가진 하늘이라도 부끄러워 물러날 만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신이라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심장이 눌릴 정도라 투이나가 당혹스러워하자 아르힘은 빙긋 웃으며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결 마음을 놓은 투이나가 말했다.

“어찌 이리 맞춰서 나타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꼭 제 마음을 읽은 것 같아요.”

“아이야, 너의 기도는 언제나 듣고 있다.”

아르힘이 평범한 소년처럼 투이나의 주변을 건너뛰었다.

땅 대신 물을 밟는다는 점만 뺀다면 투이나의 다리를 경계선 삼아 노는 아이와 똑같았다.

천진난만하게 그녀의 무릎에 앉은 소년이 신의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 들어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걱정하고 싶지 않아요.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의심하는 것이 죄더냐?”

“저는…….”

투이나가 어지러운 마음속에서 말을 건져냈다.

“샨이 살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겐 분노와 무기가 있으니 저를 미워하면 죽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를 잘라 버릴 것이냐.”

“……아니요.”

투이나가 입을 감쌌다.

“아주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나를 싫어해서 죽였다면 싫어하지 않게 만들면 되겠지. 혼자 있다 죽었으니 지켜 줄 사람을 찾으면 되겠지. 분노의 방향을 돌리고 사건을 바꾸며 오지도 않은 미래가 달라졌다고 안심했어요.”

투이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람을 알지 못하면 결국 그대로네요.”

“하찮은 빗방울이 물길을 바꾸고 강을 범람케 하느니.”

아르힘이 힘을 주었다.

“네가 과거로 돌아온 순간, 이미 과거의 살인자는 의미가 없다.”

투이나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저를 죽이게 될 수도 있나요?”

“또한 같은 사람이 다른 이유로 죽이게 될 수도 있다.”

소년이 담담히 긍정했다.

그래서 아르힘은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나?

투이나가 의도했던 대로 구혼 기간의 마지막 밤에 찔려 죽으리라는 미래는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이제는 매일매일, 새로운 죽음을 의심해야만 했다.

투이나는 감히 신에게 대들고 말았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게 될 리가 없습니다.”

“이미 활에 맞고 독을 먹고서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느냐!”

준엄한 목소리가 꾸짖었다.

“너의 죽음은 죄다.”

채찍으로 맞은 듯이 투이나가 움찔했다.

아르힘은 노여움이 서린 눈이었다.

투이나가 처음 보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너를 죽인 자가 지은 죄이고, 죄인을 데려가는 것은 나의 몫이다. 헌데 살아남는 것까지 죄스러워한다면 지금 내가 너를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

“네가 나를 믿는다면 의심하거라.”

소년이 고개를 숙인 투이나의 볼을 애달프게 감싸 올렸다.

“의심해야만 한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투이나를 돌려보냈다.

텅 빈 방에 잠들어 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투이나는 자신이 이틀 동안 잤다는 걸 알았다.

“피곤하실 만도 하지요.”

축제에 연이어 레오나까지 만났으니.

시종들은 일부러 깨우지 않았노라 말했다.

중간에 라카인이 식사를 챙겨야 한다고 잠깐 인기척을 냈으나 죽은 듯이 자는 그녀를 보고 곧 포기했다고 했다.

‘아르힘 님께 다녀온 건 아무도 모르는구나.’

머리를 틀어 올리며 투이나가 넌지시 떠보았으나 시종과 호위 모두 그녀가 침대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믿었다.

문을 닫고 잠들었으니 보는 이가 없는 건 당연했다.

투이나의 머리 위로 두건이 내려앉았다.

하긴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투이나는 꼼꼼히 단장을 마친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일정은 취소해 주세요.”

“네?”

빗을 들고 있던 시종이 화들짝 놀랐다.

“사흘이나 쉬면 의회에서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

“사제님이 가져오신 요약본은 아침 식사할 때 읽어 봤어요. 첫 번째, 세 번째 안은 동문 연합에서 열 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낸 다음 진행하고, 두 번째 안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알려 주세요.”

“예……. 예에?”

“축제 비용에서 4할을 크로퍼드 상단에서 감당했으니 답례품은 지난번에 축복한 안식의 종이 좋겠네요.”

투이나가 앉은 자리에서 사흘 치 업무를 술술 불었다.

“북문에 나가 계신 사제님들의 순환이 늦다는 보고도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소금 호수로 파견인도 보내야 해요.”

쩍 입을 벌린 시종이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잠, 잠시만요, 루가 님. 적을 것 좀 가져오겠습니다.”

“네.”

투이나는 담담했다.

본인의 능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과거와 똑같은 일이었기에 사제들과 이끌어냈던 결론을 말했을 뿐이다.

‘전부 똑같은 건 아니지만 대부분 기억이 나서 다행이야.’

시종이 급히 적어서 전달한 종이에 잠시 후 사제가 합세해 돌아왔다.

“아니, 루가 님, 그동안 면담에 나오지도 않으시더니 어떻게 이처럼 빨리 결정을 내리시는 겁니까?”

사제가 종이를 넘기면서도 눈동자를 몹시 당혹스럽게 굴렸다. 급조한 답변치고는 썩 판단이 빨랐던 것이다.

“아직은 제안 단계니까요. 양이 좀 있으니 사제님들이 자세하게 검토할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루면 괜찮을까요?”

공교롭게도 양이 딱 그 정도였다.

사제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희야 검토가 일이니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갑자기 서두르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다른 할 일이 생겼거든요.”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곧 그녀의 뒤에 누가 있는지 이해했다.

루가의 행동이 달라졌다면 아르힘의 뜻이 아니겠는가.

“허어, 과연……. 알겠습니다. 신께서 일러 주신 일이면 더 볼 필요도 없지요.”

“아니, 아뇨. 검토해 보세요.”

냉큼 일을 안 하려는 사제를 투이나가 말렸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대로 알려 줬을 뿐이고, 지금은 또 모른다.

‘게다가 내 말을 아르힘 님이 알려 주신 거라고 오해하게 둘 순 없잖아.’

결국 사제에게서 잘 확인해 보겠다는 대답을 받아낸 뒤에야 그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분도 자리를 비워 주세요.”

“어디 가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시종이 물었다.

일부러 외출복까지 갖춰 입은 다음에 방에만 있겠다는 투이나가 이상했던 것이다.

“으음…….”

투이나가 대답은 않고 곤란하게 웃자 그제야 시종들도 대강 신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시종들이 나간 뒤에도 호위들은 남아 있었다.

“여러분도 가셔야 돼요.”

“다른 곳을 나가신다면 저희를 두고 가실 수 없습니다.”

라카인이 말했다.

본능적으로 투이나가 그냥 방에서 쉬려고 그들을 내쫓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게 분명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투이나가 곤혹스럽게 반복했다.

“나가지 않을게요.”

“그렇다면 호위는 바깥에서 서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나갈 일이 없어요. 피곤할 텐데 쉬는 게 낫잖아요.”

“있겠습니다.”

고집을 부릴 목소리라 투이나가 결국 포기했다.

“좋아요. 대신 안을 들여다보지만 마세요.”

“알겠습니다.”

라카인이 즉각 답했다.

호루니는 투이나가 덧붙인 조건에 호기심이 생긴 표정이었지만 군소리 없이 나갔다.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투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을 가져왔다.

밖은 환한 대낮이었지만 그녀는 등잔에 불을 켜고 침대 옆에 올려 두었다.

오래지 않아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어서 와요, 시드룬.”

마법진이 열리고 시드룬의 손이 천천히 등불을 짚었다.

마법진 밖으로 몸을 빼낸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이군요.”

“지금 봐도 괜찮죠?”

“그렇습니다.”

시드룬이 손을 내밀자 투이나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

아르힘을 만난 뒤 투이나는 완벽하게 신의 뜻대로 마음을 바꿀 순 없었다.

그저 조금씩이나마 받아들이려고 애쓰기로 했다.

항상 그러했듯이.

아르힘이 가장 먼저 믿지 말라고 했던 사내에게 생각이 미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시드룬이 가장 보기 편해.’

투이나가 무심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시드룬은 잠깐 그녀를 응시하다가 등잔을 집어 올렸다.

“이걸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요.”

영문을 모르는 투이나를 시드룬이 마법진 안으로 끌어들였다.

왜 등불이 필요했는지는 곧장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의 마을은 밤이었다.

불빛도 없이 새카만 밤은 오랜만이었다.

시드룬이 마법진을 닫자 주위를 밝히는 건 손에 들린 작은 등잔뿐이었다.

“지난번과 다른 곳이네요?”

“아르힘의 신전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투이나가 갸웃했다.

“신전에서 마법이 불안정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여기서 제 방까지 마법진이 연결되어 있다면 마법은 성공한 거잖아요.”

“나는 여기서 마법을 쓴 게 아닙니다.”

시드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다만 약속했던 대로 등불이 올라왔기에 그때 바로 차원을 연결한 겁니다.”

투이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시는 신전을 엿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차원에서 부름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이곳에 있으면 신전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시드룬이 답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긴 여러 개의 차원을 한꺼번에 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연구를 돕다 보면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겠지.’

시드룬은 그녀를 외딴 집으로 데려갔다.

지난번에 갔던 수리시의 집보다 작고 훨씬 쓰러질 듯이 보였다.

“여기가 제가 사는 곳입니다.”

그가 닫혀 있는 문을 삐걱 열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법사에 가장 가까운 시드룬의 집이라 투이나는 살짝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집 안은 난장판이었다.

“폭풍이라도 지나갔어요?”

투이나가 놀라 물었다.

벽면부터 바닥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책이었고, 뭔지 모를 유리구슬과 저울, 선반, 병, 시커먼 꾸러미까지 난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예 지나다니지도 못하게 통로를 꽉 막은 상자를 봤을 땐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투이나가 지나가지 못하는 걸 보더니 시드룬이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평소에는 마법으로 움직이니 몰랐습니다.”

“그렇겠네요.”

시드룬이 한꺼번에 마법진을 여러 개 만들었다.

투투투툭.

작은 마법진으로 물건들이 퐁당퐁당 빠지더니 곧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졌다.

‘또 다른 곳에다 그냥 쌓아 두는 거 같은데.’

투이나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동안 시드룬이 손을 당겼다.

“이쪽으로.”

투이나가 깨끗해진 바닥 위로 걸어갔다.

그를 따라가자 비로소 마법사다운 공간이 나타났다.

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에 사람만큼 큰 수정구가 흰 실에 매달려 천천히 돌고 있었다.

책과 종이 뭉치는 여기도 많았지만 벽면에 여기저기 석판을 걸어 두어 자리를 덜 차지했다.

어디를 보나 무언가를 잔뜩 쓰고 계산한 흔적이 가득했다.

시드룬은 투이나의 손을 놓고 앉으라는 시늉을 했지만 의자 같은 게 없었다.

그나마 안정적으로 보이는 낡은 종이 뭉치에 올라앉자 놀랍게도 편안했다.

시드룬이 들고 있던 등잔을 천장으로 올려 보낸 다음에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영혼과 신의 차원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은 신과 가장 가까운 자이니 여러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 시작할 건가요?”

“우선 당신이 겪었던 일을 명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드룬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꺼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비늘을 본 투이나가 움찔했다.

“설마 저한테 또 쓸 생각은 아니죠?”

“안 됩니까?”

“안 돼요.”

투이나가 단칼에 거절했다.

시드룬은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때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말해 주십시오.”

투이나는 최대한 정확하게 설명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둔 덕분에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겪었던 이상한 광경은 앞뒤가 맞게 설명하기엔 난감한 구석이 있었다.

“당신은 말도 못 하고 통로를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비명을 들었다고 한 게 맞습니까.”

“그래요.”

“당신이 봤다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나중에 들은 얘기와 일치하지 않았군요.”

“워낙 정신이 없어 그랬던 게 아닌 모양이죠?”

“당신이 비늘을 물고 마력과 접촉했을 때 차원 간섭이 일어난 겁니다.”

시드룬이 설명했다.

“사람은 한 번에 하나의 세계만 느낄 수 있습니다. 마법이 두 세계를 볼 수 있게 만들었고, 당신은 마법사가 아니기에 통제를 잃고 휩쓸렸습니다.”

‘정말 아르힘 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구나.’

그런데 시드룬이 덧붙였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겁니다. 당신은 정말로 아르힘이 나중에 나타났다고 확신합니까?”

“그게 무슨 소리죠?”

“당신은 마법사가 아닙니다.”

시드룬이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무수히 많은 세계 중에서 정확히 영혼의 세계를 골라 열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세계는 오직 죽음으로만 열리며 신만이 오가는 차원입니다.”

시드룬의 목소리가 쿵쾅거리는 맥박과 함께 커졌다.

“죽은 자가 아니라면 인간이 그 세계를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선고를 내리는 시드룬의 음성이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난 심장을 움켜쥐었다.

당신은 죽은 사람이 아닙니까?

투이나의 귀에는 시드룬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꺼낸 얘기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어.’

말을 잃은 투이나가 시드룬을 응시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 수가…… 없나?’

어물, 그녀가 입술을 움직이려던 찰나 시야에 무언가 뛰어들었다.

오싹.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과 동시에 새까만 창밖으로 샛노란 눈동자가 나타났다.

“꺄아아악!”

시드룬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놀라 쓰러진 투이나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세모난 동공을 확인한 그는 차분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곧 방 안에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한 인간이 떨어졌다.

바깥에 있던 눈동자도 동시에 사라졌다.

“으윽!”

투이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나타난 건 더러운 옷을 입은 삐죽삐죽한 머리의 사내였다.

시드룬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레이벡.”

“젠장! 내가 허락도 없이 나한테 마법을 쓰지 말랬잖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투덜거렸다.

허리를 문지르던 남자가 고개를 쳐들었다.

투이나가 흠칫했다.

레이벡이라고 불린 남자는 마구잡이로 기른 수염과 머리카락 때문에 사람보다 야수나 짐승의 변종에 더 가까워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샛노란 눈동자는 세모난 동공 때문에 더욱 이질적으로 보였다.

투이나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 걸 깨달았는지 안 그래도 사나운 눈빛을 하고 있던 그의 이가 씰룩거렸다.

시드룬이 말했다.

“볼일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불이 켜져 있길래 잠깐 들여다봤을 뿐이야. 제길, 꼬리뼈가 다 부러졌겠네.”

화를 내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레이벡이 중얼중얼 계속 험한 말을 쏟아놓았다.

눈이 동그래진 투이나가 말했다.

“……당신도 마법사인가요?”

“그렇다면 어쩔 건데?”

“시비 걸지 마십시오.”

시드룬이 덤덤하게 말하자 레이벡이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지 마. 난 여기 잠깐만 있다가 떠날 거니까. 그놈의 규칙은 여기 엉덩이 붙이고 살 놈들한테나 말해.”

“마법사들이 모여 살 때 다툼을 줄이기 위해서 규칙을 정했습니다.”

투이나가 궁금해 하는 줄 알았는지 시드룬이 설명했다.

무심코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벡은 자기한테 훈계를 하는 줄 알았는지 눈을 부라리다가 얼레? 하고 시선을 꼬았다.

그의 눈이 투이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새로 데려온 마법사냐?”

“아닙니다. 연구를 도와주러 온 사람입니다.”

“흥. 연구고 자시고, 저런 예쁘장한 처자를 데리고 다녀도 네놈의 약혼자가 머리채를 가만히 놔둔다더냐? 아주 저를 닮아서 멍청이 같은 거랑 결혼할 건가 보지.”

“약혼자가 아니라 구혼자예요.”

투이나가 다급히 정정했다.

도대체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여기서 만난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다 자신을 약혼자라고 알고 있었다.

‘왜 그 원인이 수리시 같을까.’

그녀가 틀리지 않은 추측을 하는 동안 레이벡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약혼자고 구혼자고 아가씨가 어떻게 알아? 당신 누구야?”

“아, 전 투이나예요.”

이름을 밝히며 손을 내미는 투이나를 보고도 레이벡은 쌀쌀맞았다.

“누가 악수하재? 마법사랑 상관없는 인간은 빠져!”

“그건 안 됩니다.”

시드룬은 강력히 레이벡을 막아서진 않았다.

그저 사실을 이야기하는 담백한 어조라 듣는 사람까지 저절로 힘이 빠졌다.

레이벡은 찌꺼기로 남아 있는 분노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성질을 냈다.

“여길 책임지기로 했으면 똑바로 해. 여기까지 적들이 쳐들어오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분풀이 삼아 책 더미를 걷어찬 그가 나갔다. 나갈 때도 밖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시드룬은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까 질문은…….”

“저 사람은 누구죠?”

그보다 빨리 투이나가 물었다.

연구에 협조할 때 조건으로 걸었던 약속 덕분인지 시드룬은 곧장 대답했다.

“레이벡은 변신 마법사입니다.”

“변신이요?”

“예. 꽤 실력 있는 편이며, 최근 전쟁터에서 도망칠 때 익숙하지 않은 날짐승으로 변신한 탓에 후유증을 겪고 있습니다.”

‘후유증이라니……. 역시 마법도 만능은 아니구나.’

시드룬은 예상보다 자세한 정보를 줄줄 쏟아냈다.

“도움을 요청하러 마력을 따라왔다가 이곳에 머무르는 중입니다. 회복되는 대로 떠나겠다더군요.”

투이나가 물었다.

“그럼 이 마을에는 마법사가 몇 명이나 살고 있는 거예요?”

“열일곱 명입니다.”

평생 한 사람이 한 명의 마법사를 보기도 힘들다는 걸 생각하면 꽤 많은 숫자였다.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무엇입니까.”

“시체를 되살리는 마법사도 있나요?”

시드룬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부활을 말하는 겁니까?”

“비슷하기만 하면 돼요.”

투이나는 샨의 거처에서 되살아났던 산양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의 섭리에 역행하는 그 끔찍함은 번개처럼 때때로 되살아났다.

드물게도 시드룬의 생각이 길어졌다.

“단순히 시체가 움직이는 거라면 이곳에 사물을 조종하는 마법사가 하나 있습니다.”

“정말요?”

투이나가 깜짝 놀랐다.

시드룬 때문에 마법사의 마을에 사는 마법사는 언제든 아르힘의 신전으로 올 수 있었다.

물론 세상에 알려지기도 싫어서 숨어 사는 마법사들이 굳이 아르힘의 신전에 나타날 리가 없지만.

일단 존재한다면 의심을 피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러겠습니다. 지금은 자리를 비웠으니 돌아오면 알려 드리지요.”

“고마워요.”

“하지만 생명을 되돌리는 마법은 불가능합니다.”

시드룬이 말했다.

“그것은 아직 신의 영역입니다. 영혼의 세계를 열어야만 죽은 육체에 영혼이 돌아와 살아날 테니까요.”

‘그래. 역시 아르힘 님이 아니면 되살아날 수 없어.’

신의 영역은 시드룬에게 물을 게 아니라 신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투이나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시드룬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그녀도 연구 대상에 포함된 것 같았다.

시선을 느낀 투이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 다른 얘기가 길어졌네요. 시드룬 질문에 답하자면, 아르힘 님은 분명히 끝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전에 나타났다면 곧장 다른 사제들과 호위들이 기절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원인은 역시 당신이로군요.”

곧장 투이나의 평정이 박살났다.

“네?”

“아르힘이 처음부터 당신 곁에 있었다면 마법이 나타났을 때 정확하게 영혼의 세계가 열린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에게 간섭을 받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아르힘이 아니라면 영혼의 세계를 열 수 있었던 건 당신의 능력입니다.”

시드룬이 예전처럼 눈을 빛냈다.

찔러도 꿈쩍하지 않는 희번덕하게 무서운 눈.

“마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아뇨.”

“루가가 될 때 특별한 의식을 치렀습니까?”

“아니요.”

시드룬은 실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루가가 되고 몸이 달라지거나 정신적으로 변화한 부분은 없습니까?”

“글쎄요. 신전에서 잘 먹고 다녀서 건강이 좋아지긴 했죠.”

“음식…….”

시드룬이 끼적거렸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딱히 말릴 이유가 없었다.

시드룬은 빠르게 줄을 그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다른 신체적 특징이 있습니까?”

즉각 머릿속에 얼룩병이 떠올랐다.

벙긋 입을 벌렸던 투이나가 팔짱을 꼈다.

“무례한 질문이에요.”

시드룬이 펜을 쥔 손을 허공에 멈췄다.

투이나가 딱한 눈으로 말했다.

“시드룬, 연구를 도와준다는 말은 날 파헤쳐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파헤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남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듣겠다는 거예요.”

“그렇군요.”

시드룬이 펜을 내려놓았다.

“그런 건 결혼 상대에게만 허락한다고 들었습니다.”

“커읍!”

갑자기 사레가 들린 투이나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얘기가 왜 그쪽으로 빠져요?”

“저도 구혼자입니다.”

“알고 있어요. 세상에, 제가 연구를 도와주면 꼭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면서요.”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다시 고려해 봐야 합니다.”

투이나가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꼭 내가 비늘을 만져 봐야겠어요?”

“당신이 위험했던 것은 차원을 조절할 마법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르힘이 이곳까지 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안전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시드룬의 말에도 투이나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마법사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아.’

아르힘이 직접 귀에다 대고 한 소리가 아직도 울리는데 선뜻 그러겠노라 말할 수가 없다.

고민하던 투이나가 말했다.

“아! 그 전에 시도해 볼 만한 다른 방법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어쨌든 저와 비늘이 만나 다른 반응이 나타난 게 핵심이잖아요. 꼭 제 전부를 준비할 필요는 없죠.”

투이나가 만졌던 비늘이 까맣게 타들어간 이야기를 꺼내자 시드룬도 흥미를 보였다.

“시험해 볼 가치가 있겠습니다. 완전한 접촉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를 사용해 보자는 제안이 맞습니까?”

“바로 그거예요.”

투이나가 한결 개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여기 가위가 있나요?”

그건 시드룬에게는 필요 없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진에서 쑥 가위를 꺼낸 그가 투이나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을 떠올렸던 투이나가 곧 생각을 수정했다.

머리카락을 자르려면 두건을 벗어야 했다.

“음……. 잠깐만요.”

이리저리 몸을 보던 투이나가 적당한 신체 부위를 찾아냈다.

손톱이었다.

‘자른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바짝만 안 깎으면 될 거야.’

투이나가 한 손으로 가위를 쥐고 짧게 자라난 손톱에 집중했지만 손보다 가위가 커서 움직임이 영 불안했다.

지켜보고 있던 시드룬이 말했다.

“내가 자르는 게 낫겠습니다.”

“그래 줄래요?”

자꾸만 미끄러지는 가위가 신경 쓰였던 투이나가 바로 승낙했다.

문제는 시드룬의 솜씨도 비슷비슷했다는 것이다.

큰 손이라는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한 그가 투박하게 날을 움직여서 오히려 더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손톱 밑을 찌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곧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지 손톱 하나가 짤막해졌다.

투이나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됐네요!”

시드룬은 작은 초승달 같은 손톱을 들어 올렸다.

신중하게 손톱을 응시한 그가 탁자 위에 올려둔 비늘로 다가갔다.

긴장한 투이나가 바라보는 사이 그가 손톱을 비늘 위로 떨어트렸다.

톡.

매끄러운 비늘에 연약한 반원이 미끄러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 두 사람이 계속 쳐다보았지만 비늘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잠잠했다.

“이 방법은 안 되는군요.”

“휴우…….”

투이나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이대로 가면 정말 비늘을 쥐는 수밖에 없는데.

그때 조용하던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어이, 시드룬! 약혼자를 데려왔다면서!”

“아!”

큰 소리에 놀란 투이나가 확 돌아서다가 신음을 흘렸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놓아뒀던 가위에 손을 찔린 것이다.

순식간에 피가 흘러나왔다.

“어라, 나 때문에 놀랐나?”

“으…….”

투이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깊게 찔렸다.

‘시드룬에게 감쌀 것 좀 달라고 해야겠어.’

피가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손바닥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으나 시드룬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드룬?”

투이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시드룬이 보는 방향과 같은 쪽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이해한 순간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피가 떨어진 비늘이 검게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투이나와 시드룬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이 핏방울이 떨어진 비늘은 완전히 검게 변했다.

잠깐 형태를 유지하던 까만 비늘은 성큼성큼 다가온 인기척에 날려 파스스 부서졌다.

“사람이 왔는데 뭣들 하고 있어?”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주인은 수리시였다.

투이나를 본 수리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야, 피 나잖아!”

수리시가 홱 투이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고통도 까먹은 투이나는 그래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자 수리시가 짜증스럽게 손가락을 딱딱거렸다.

“둘 다 정신 못 차리고 왜 이래?”

“적절한 연구 대상을 찾았다.”

“뭐?”

시드룬이 다시 투이나의 손을 빼앗아 갔다.

휙 튀는 핏방울에 쓰라려진 투이나가 그제야 통증과 함께 명료함을 되찾았다.

“아파요!”

“당신이 맞군요.”

시드룬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바닥을 대단히 귀중한 것처럼 어루만졌다.

불투명한 연보라색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당신이 내게 필요한 자였습니다.”

집요한 시선이 투이나를 파고들었다.

손목을 쥔 긴 손가락이 점점 조여들었다. 시드룬은 투이나를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사람이라는 껍질을 벗겨내고야 말겠다는 기묘한 집착이…….

“아니, 이 자식아!”

철썩.

굉장한 소리에 투이나가 흠칫했다.

투이나를 무수히 파고들려던 연보랏빛 시선이 가차 없는 손바닥에 가려졌던 것이다.

수리시가 시드룬의 얼굴을 철썩 철썩 때리며 밀어냈다.

“뭘 발견했든 내가 사람이 먼저라고 말했어, 안 했어? 안 놔? 당장 안 놔 드려?”

퍽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매끄러운 살갗이 점점 새빨개지는데도 시드룬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안 돼.”

“이게 정말……!”

“저 도망 안 가요, 시드룬.”

투이나의 목소리에 수리시의 폭력이 멈췄다.

콧잔등이 빨개진 시드룬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서로 협력하기로 했잖아요. 지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이 연구를 깨는 거예요.”

투이나가 단호하게 그의 손가락을 긁어내리자 덫처럼 오므라들었던 손이 툭툭 풀렸다.

얘기가 먹혀든 것이다.

수리시는 훈계를 할 때와 달리 기묘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허……. 당신처럼 말하는 녀석은 처음 봤네.”

“그런가요?”

“손이나 줘 봐.”

수리시가 심장보다 높은 곳으로 손바닥을 올렸다.

투이나가 움직일 때마다 시드룬이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수리시가 성질을 냈다.

“뭘 잘했다고 쳐다봐? 붕대나 꺼내 놔.”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었다.

붕대뿐만 아니라 웬 작은 유리병까지 딸려 있었다.

“시료.”

“내가 미친다, 미쳐.”

붕대만 낚아챈 수리시가 능숙하게 휙휙 상처를 압박했다.

“그 망할 유리병 깨트리기 전에 치워. 나중에 붕대에서 네 마법으로 알아서 채취해 가면 되잖아!”

“그렇군.”

해괴한 소리였지만 시드룬은 순순히 납득했다.

투이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마을에 온 뒤로 상식 어딘가가 무너져 버린 것 같았다.

수리시가 꽉 매듭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댁의 약혼자는 저런 사람이야. 차라리 좀 험하게 구는 편이 나아.”

이제 구혼자라고 정정해 주기도 번거로워진 투이나가 그냥 넘어갔다.

“여기 있는 마법사분들은 그래서 험해지신 건가요?”

“흥. 웃기지만 맞는 소리네.”

수리시가 투덜거렸다.

“다 전쟁터에서 쫓겨 다녔는데 성격이 고와질 리가 있겠어? 나라고 좋아서 시드룬을 챙기는 게 아니라고.”

“그럼 왜 챙겨 주시는 거죠?”

“그녀의 마법 때문입니다.”

“입 다물어.”

낮게 쉭 소리가 났다.

처음으로 수리시의 눈이 까맣게 불타올랐다.

“네가 여길 숨겨 주고 있다고 널 못 죽일 거 같아?”

이글거리는 눈과 마주쳤음에도 시드룬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협박한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니야.”

“그냥 내 마법에 대해선 입 닥치고 있으란 말이 어려워?”

“그녀와 약속을 했다.”

“무슨 약속!”

“연구에 필요한 질문에는 무엇이든 답해 주기로 했다.”

투이나가 변명할 틈도 없이 휙 수리시의 고개가 돌아갔다.

새까맣게 그늘진 수리시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아무리 투이나라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묻지 마.”

“안…… 그래요.”

“궁금해하지도 마.”

“잊을게요.”

“좋아.”

수리시가 턱을 까딱이자 그녀는 다시 평범한 중년으로 돌아갔다.

매듭을 끝낸 수리시가 성마르게 손을 놓았다.

“빌어먹을……. 어쩌다 저런 새끼를 맡아서는. 여기로 도망치는 게 아니었어.”

“이걸 봐.”

시드룬은 수리시의 욕설을 귓등으로 흘러 넘겼다.

그가 보랏빛 비늘을 꺼내 들자 수리시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여기서 또 왜 나와?”

시드룬은 말없이 핏방울을 가리켰다. 아까 난리 통에 떨어진 투이나의 피였다.

투이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도 피에 비늘을 가져다 대는 시드룬을 보며 가슴을 졸였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썅!”

검게 타들어간 비늘을 본 수리시가 탁자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이 번들거렸다.

“처음이잖아?”

“그래.”

마법사들이 그들만 아는 흥분으로 잠겨들기 시작했다.

“네가 왜 눈 돌아갔는지 알겠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에 나온 성과야?”

“팔 년만이다.”

“진짜 숫자 물어본 거 아니니까 닥쳐. 후……. 좋아.”

수리시가 빙글 돌았다.

“댁이 정말 신에게 선택받은 작자가 맞긴 맞나 봐?”

투이나는 화내지 않았다.

“그 말 뒤에는 설명이 있어야 되겠죠?”

수리시가 깍지를 꼈다.

“좋아, 루가. 어쨌든 장본인인데 설명을 빼놓을 순 없지. 시드룬이 영혼의 세계를 열려고 하는 얘기는 들었잖아.”

“그래요.”

“시드룬이 멍청하긴 해도 연구에는 꽤 제대로거든? 그래서 영혼의 차원을 찾는 건 해냈다 이거야. 문제는 그걸 여는 방법이지.”

시드룬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대부분의 세계는 마력을 이용하여 열 수 있습니다. 통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후의 세계는 인식만 가능할 뿐 살아 있는 한 어떤 것으로도 접촉할 수가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마력 대신 그 차원에 구멍을 내 버릴 다른 힘이 필요했다는 거야.”

수리시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내 제안은 시드룬의 마법으로 영혼의 차원을 알아 가는 동안 인간들을 죽여서 무슨 변화가 있는지 지켜보자는 거였어.”

순식간에 투이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발언이었다.

수리시가 피식거렸다.

“얼굴 풀어, 루가. 우리가 인간을 사랑했으면 너처럼 수호신이나 섬겼겠지 마법사가 됐겠어?”

“그럼에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한 걸 어떡해? 뭐, 아무튼.”

수리시가 대충 말을 잘랐다.

“그 계획은 안 써먹었어. 관측 범위가 너무 넓었거든. 뭐라도 알아내려면 인간들을 구덩이에다 몰아넣고 몰살이라도 시켜야 되는데, 그랬다간 근처에 있던 수호신이 죄다 분노해서 군대를 보냈을 테니까.”

“…….”

상처를 묶었던 천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왔다. 투이나가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됐다는 건 분명 실행을 고려해 봤다는 소리다.

“다행인지 조진 건지 시드룬이 딱 한 번이지만 영혼의 차원을 열었던 적이 있거든? 그래서 뭔가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러나 마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 때문인지 그때의 경험은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시드룬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수리시의 얘기에도 아무 충격을 받지 않는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그다음으로 주목한 것은 신의 힘과 마력이 반발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이 될 순 없으니 사제 몇 놈을 잡아다가 마법이랑 같이 써 보면 뭐라도 답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쉬워야지. 마법사를 환영하는 수호신은 어디에도 없지. 잡히면 죽은 목숨이고.”

수리시가 시드룬의 양 팔뚝을 콱 움켜쥐었다.

마치 훌륭한 상품을 소개하려는 악덕 상인 같았다.

“그래서 이 멍청한 마법사 녀석이 댁에게 청혼하러 간 거야.”

투이나는 필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억눌렀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투이나는 시드룬을 신뢰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배신감이 치밀다니.

“관대하게도 이 녀석을 죽이지 않고 연구까지 승낙해서 우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아니, 아르힘께 감사해야 하나?”

“사람을 우습게 여기면서 왜 내게는 이런 말을 다 털어놓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도 약속에는 충실하거든. 받을 게 있을 때면.”

수리시가 뒷말을 강조했다.

“너는 루가이니 무고한 목숨을 모른척하진 않겠지. 네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까 말했던 몰살이라는 방법을 고려할 수밖에 없어.”

“대체 무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럴 가치가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목숨.”

한순간 수리시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너랑 똑같이, 목숨 때문에.”

“…….”

투이나가 꽉 악문 이에 힘을 가했다.

아무리 끔찍한 자라고 해도 그들은 언제나 인간이다.

인간이었다.

“……다시는 생각으로라도 사람들을 몰살시키겠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댁이 계속 도와준다면.”

“조건 달지 마요.”

투이나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무조건입니다.”

“알겠습니다.”

시드룬이 대답하자 마지못해 수리시도 동의했다.

“그래, 알겠어.”

지금 이 순간 투이나는 아르힘이 옆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들의 말을 확실한 계약으로 묶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믿는 자인 루가는…….

투이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후에도 무엇이든 설명하세요. 예외는 없습니다.”

수리시가 잠깐 불안하게 투이나를 힐긋거렸지만 그녀는 올곧게 시선을 맞받았다.

지금은 수리시의 마법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안심했는지 수리시가 일부러 능청맞게 굴었다.

“좋아, 좋아. 알았으니까 이제 서로 다 입장 정리 된 거지?”

시드룬은 다시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뻔뻔하게도 수리시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물었다.

“붕대 다시 감아 주랴?”

“사양할게요.”

코웃음을 친 수리시가 갑자기 투이나에게 어깨동무를 확 걸었다. 투이나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무슨……!”

“아까 얘기는 끝났어. 너. 쿠즈한테 내가 욕했다는 소리 하지 마라.”

수리시가 빠르게 속삭였다.

그녀는 얼이 빠진 투이나를 잽싸게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뒤늦게 문가에 어른거리는 아이의 그림자가 보였다.

“우리 쿠즈,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

“엄마!”

까르륵 웃는 아이를 안아 올리는 수리시는 너무도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한 얘기 중 하필이면 아이에게 욕을 감춰 달라는 경고를 받은 투이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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