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해한 구혼자 3권
10.
‘…깨어나리라. 세상이 부른 탓에 찾아온 안개가…’
그래도 어쨌든 봄은 온다.
봄맞이 축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꽃으로 치장하는 행사였다.
아침부터 저마다 어떤 꽃으로 꾸밀지 고르느라 오랜만에 신전의 분위기가 들떴다.
“어떤 게 어울릴 것 같아요?”
양손에 꽃을 든 투이나가 차례차례 꽃을 들어 보였다.
“오른쪽이 좋습니다.”
“그래요?”
아무거나 다 잘 어울린다고 하면 물어본 의미가 없으니 라카인은 큰 걸 골랐다.
크면 좋은 거니까.
갸웃거리며 번갈아 보던 투이나가 활짝 웃으며 커다란 동백꽃을 라카인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러네요. 어울리네!”
라카인과 어울리긴 했다.
건장한 체격에 꽃 하나만 방울처럼 덜렁 매달려 있는 꼴이 아니라 진한 빨간색이.
들어오던 스카차가 폭소하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푸허읍! 무, 뭐 하시는 겁니까?”
“으음? 웃지 말아요. 스카차가 다음 차례니까.”
“……예? 저도요?”
“루가 님이랑 나가는 분들은 다 할 겁니다.”
시종이 새치름하게 말했다.
“호위들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전 준비 끝났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루니가 나팔꽃 넝쿨을 둘둘 머리에 감고 나타났다.
짧은 고수머리에 얽힌 앙증맞은 보라색 꽃잎과 잎사귀가 숲의 요정처럼 어울렸다.
“호루니! 너무 귀여워요!”
“가, 감사합니다.”
호루니가 칭찬에 어쩔 줄 모르고 홍당무처럼 빨개진 볼을 손등으로 가렸다.
저절로 남은 호위에게 시선이 쏠렸다.
스카차는 영 거북스러운지 주춤거렸다.
아르파 사람인 라카인이 자기들 문화랑 다르다고 거절하면 자기도 따라서 안 한다고 해 보련만.
정작 그가 제일 먼저 꽃을 걸고 쳐다보는 걸 보니 글렀다.
“루가 님도 아직 치장하기 전이시잖습니까.”
스카차가 황급히 화제를 돌리자 다행히 관심이 금방 옮겨 갔다.
“옳은 말씀입니다. 루가 님이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고요.”
“음, 가장까지는 아니어도 되는데.”
투이나가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꽃받침을 돌렸다.
“그것보단 오랜만에 두건 안 쓰고 나가고 싶어요!”
“네에?”
“일단 들어 보세요. 꽃이 크니까 머리를 하나로 땋아서 얼룩이 있는 자리마다 꽃을 꽂아 가리면 괜찮지 않을까요?”
투이나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제안했다.
매일 머리를 틀어 올려서 감추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무 답답해!’
그래도 과거에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산책 끝난 개처럼 머리카락을 풀어 놓기라도 했는데, 시드룬이 혹시 방에 나타날까 봐 이젠 잘 때도 두건을 쓰고 잤다.
‘시드룬이라면 알아도 별말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잖아.’
결국 밤낮으로 두건을 쓰고 있다 보니 답답해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반대하려던 시종도 투이나가 너무 간절하게 바라보니 흔들렸다.
“잘하면 될 것도 같고…….”
“그럼 해 봐요!”
투이나가 풍성한 머리카락들을 뒤로 넘겼다.
그녀가 양손으로 머리를 잡아 주는 사이 시종들이 머리를 빗기고 가지런히 땋기 시작했다.
“루가 님이…… 참 머리카락도 고우신데.”
“얼룩만 아니었으면…….”
혀를 차려던 시종이 얼른 입을 닫았다.
금빛 윤기가 도는 갈색 머리카락은 확실히 아름다웠지만 군데군데 난 회색 반점은 그걸 가릴 만큼 흉했다.
차라리 까맣거나 하얀색이었으면 그림자나 새치라고 우기기라도 할 텐데 얼룩병의 회색은 곰팡이처럼 이질적이었다.
“병을 생각하면 머리카락은 자르는 게 좋지 않나요?”
호루니의 물음에 투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자르면 얼룩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른다고 아르힘 님이 기르라고 하셨어요.”
“윽, 그게 움직이기도 합니까?”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 스카차가 시선으로 몰매를 맞았다.
투이나는 가벼이 넘겨 주었다.
“눈으로 보면 그대로인데 자고 일어나면 가끔 자리가 달라져 있어요. 신기하죠?”
“그,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루가 님. 제가 너무 무례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궁금할 수도 있죠.”
투이나가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굳이 얼룩병으로 어떻게 사람이 죽는지까진 말할 필요 없겠지.’
얼룩병에 걸린 사람은 딱 두 가지로 나뉘었다.
미쳐 죽거나, 온몸을 긁다 죽거나.
“땋는 건 다 됐습니다.”
솜씨 좋게 머리 끝부분을 꼬아 넣은 시종이 꽃바구니를 가져왔다.
다른 시종들도 모여 앉아 어떻게 꽂아야 가장 근사할지 심층 토론을 나누었다.
꽃꽂이라곤 모르는 투이나는 봄맞이 축제 때 부를 노래를 흥얼거렸다.
“잠든 자가 청하노니, 봄이여, 나를 깨워다오. 나를 덮은 비늘에 뿌리를 내려다오. 원치 않아도 너를 볼 수 있게.”
노래를 부르는 동안 시종들이 신중하게 꽃을 꽂았다.
토론은 갈수록 치열해져서 기웃거리던 호위들까지 끼어들게 만들었다.
호루니가 불끈 주먹을 그러쥐었다.
“루가 님은 무조건! 무조건 백합이라니까요!”
“은방울꽃도 괜찮지 않나?”
“네 취향 말고 루가 님한테 어울리는 거 말이야. 그걸로 어떻게 얼룩을 가리니?”
“이 꽃이 제일 크다.”
스카차와 라카인까지 거들자 시종들이 기어이 한 소리 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저리 가세요, 좀!”
“알아서 섞어 쓸게요.”
호루니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동안 화사한 꽃이 얼룩이 앉은 자리마다 내려앉았다.
풍성한 화환이 뒤에서부터 이마 위로 감싸 앉는 형태로, 자잘한 꽃들이 얼룩을 덮은 큰 꽃과 별처럼 이어졌다.
어느새 호위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떻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할 만큼 다른 세상 사람 같으면서도 이토록 친근할 수가 있는지.
“다 됐나요?”
투이나가 고개를 들자 감격한 호루니와 감탄하는 스카차와 고개를 끄덕이는 라카인이 보였다.
“인생 역작입니다.”
“제가 이 일을 하려고 신전에 들어왔나 봅니다.”
뿌듯해진 시종이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거울을 본 투이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
과거에 했던 봄맞이 축제 장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머리를 드러낸 게 제대로 먹혔다.
‘이런 사소한 일도 바뀌는구나.’
투이나는 신기했다.
어쩌면 이제 죽기 전과는 너무나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살인자가 만들어지기엔 지나치게 화창한 봄이니까.
투이나는 흠 하나 없는 매끄러운 흰 천에 꽃술과 색을 맞춘 황금빛을 더해 치장을 끝냈다.
머리가 화려한 만큼 옷은 단순할수록 좋았다.
꽃바구니를 하나씩 든 시종들이 투이나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봄맞이 축제에서는 화려한 꽃으로 몸을 장식해 뿌리내린 봄을 찬양했다.
꽃잎이 많이 닿을수록 축복을 많이 받은 걸로 간주해 서로에게 뿌려 주는 건 기본이었다.
물론 연인들을 위해 서로 꽃을 교환하는 것도 빠질 수 없었다.
북쪽 광장으로 나간 투이나를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의 구혼자가 몸을 틀었다.
길고 새까만 망토 위로 사방으로 뻗어난 가지를 얹은 건 샨이었다.
꽃 장식을 하라는 소리를 듣고 아예 명자나무 하나를 밑동부터 꺾어 놓은 모양이다.
어깨에 얹힌 가지가 얽힌 모습이 마치 왕관 같았다. 풍성하게 터진 붉은 꽃망울도 그와 잘 어울렸다.
그는 투이나가 들어올 때부터 눈을 떼지 않더니 제일 처음 시선이 부딪친 뒤에야 만족스럽게 조소했다.
“축제라고 얼마나 요란한 장식을 하나 보았더니, 그대는 더하는군?”
“어깨가 무거워 보이네요.”
투이나가 빙그레 웃으며 지적했다.
샨은 꽃잎 밑으로 드러난 투이나의 머리카락을 눈으로 천천히 훑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 무게도 견디지 못해서야 어디 왕이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게요. 그러니 저는 가지는 사양하고 꽃만 부탁해야겠습니다.”
샨이 가볍게 자신의 가지를 훑었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후두둑 꽃이 뜯겨 나왔다.
약간 당황한 투이나가 양손을 내밀었다.
짐승의 가죽을 뜯어 주듯이 붉은 꽃무리가 한 움큼 떨어졌다.
무심코 흘리는 꽃을 잡으려고 손을 돌리려던 그녀는 어느새 단단히 손바닥이 잡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갈퀴처럼 그와 손가락이 얽혔다.
샨이 꽃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 것이다.
이미 꽃은 안중에도 없었다.
부드러운 게 마구 뭉개지는 사이로 단단한 샨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럴 리가.”
점점 아프게 조여 오는 손과 반대로 샨의 여유로운 미소는 진해졌다.
강하게 짓눌린 꽃잎에서 진한 향이 흐르는 액체가 조금씩 배어 나왔다.
“이렇게 머리를 드러내니까 훨씬 낫군. 두건을 쓰고 있을 땐 꽉 막혀 보이더니.”
그때까지 시원하던 머리카락이 괜히 곤두섰다.
샨은 깍지를 낀 그대로 투이나의 손을 입술 앞까지 가져갔다.
닿기 직전까지 다가간 두 손이 힘겨루기를 하듯 떨렸다.
억지로 손을 빼려는 그녀를 그가 놔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면 한 사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라 일부러 자제하고 있던 건가?”
투이나가 어이없는 눈빛을 보냈다.
‘말을 해도 꼭.’
사람 오해하게 말한다.
어차피 샨도 다른 구혼자들처럼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건만.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기분이 좋았고, 축제기도 해서 샨에게 화가 나진 않았다.
대신 고민해 보던 투이나가 정말 입이라도 맞춰 줄 것처럼 발끝을 들어올렸다.
주위에서 헉 소리가 나는데도 샨은 대담한 성미답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이 드디어, 하는 식으로 번뜩였다.
투이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새파란 눈 안에 담긴 냉정함을 못 읽을 그녀가 아니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투이나가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쪽 소리 나게 자기 손등에다 입을 맞췄다.
“……!”
후드득.
뭉개진 꽃잎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투이나의 손이 풀려 나왔다.
오해하기 좋은 자리에서 쪽 소리가 나자 잠깐이지만 그의 손아귀 힘이 느슨해졌던 것이다.
‘의외네?’
그 틈을 타 빠져나온 투이나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먹혀들어서 신기했다.
저 무시무시한 샨에게 말 안 듣는 동생에게 뽀뽀해 버리겠다고 놀리던 장난이 통할 줄이야.
주로 동생들이 안 씻겠다며 질색을 할 때 써먹던 짓이다.
누나 뽀뽀를 받을 바에야 차라리 우물에 뛰어들어서 목욕을 하겠다던 귀여운 녀석들.
‘샨은 어른이라서 좀 낫나?’
샨은 동생과 달리 뭐라고 하지도 않고 미묘하게 찌푸리고만 있었다.
투이나가 킥킥 웃었다.
“결혼하면 한 사람만 사랑하죠.”
그 말에 찌그러진 샨의 미간이 한층 더 진해졌다.
“그 전까지는 괜히 다른 사람한테 화내지 마세요. 게다가 오늘은 축제잖아요?”
투이나가 몸을 장식한 꽃 한 송이를 뽑아 샨에게 건넸다.
장난을 마무리하자는 의미였다.
샨은 별로 달갑지 않은 눈으로 한참 투이나를 응시하다가 손가락 두 개로 꽃을 낚아채 갔다.
“그래. 내가 남편이 되기 전까지는.”
연인들 사이에서만 나누는 이 의식을 허락해 줄 생각이다.
어차피 남의 나라 관습이라고 생각하며 샨이 빙글빙글 꽃줄기를 돌렸다.
그동안 그의 시선은 다른 구혼자에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시드룬을 찾는 건 언제나 어렵지 않았다.
어디서나 가장 키가 컸으니까.
바닥까지 닿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에 목까지 덮는 두꺼운 로브를 입은 모습은 평소랑 똑같았다.
다만 신전에서 열심히 설명을 했는지 딱 한 송이 보라색 붓꽃을 귓가에 꽂고 있었다.
말만 들으면 어색한 조합인데 의외로 청초한 꽃이 날카로운 턱선과 잘 어울렸다.
시드룬의 진한 이목구비와 어울리지 않는 낭창한 몸선 때문일까.
산뜻하게 다가간 투이나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드룬?”
“반갑습니다, 루가.”
시드룬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축제 설명은 들으셨어요?”
“들었습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로 가느다란 줄기를 빼내었다.
조심성 없는 손길이 꽃을 부러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시드룬은 모가지를 부러트리지 않고 꽃을 건넸다.
안도한 투이나가 얼른 똑같이 한 송이를 뽑아 시드룬의 귀에 꽂아 주었다.
만개한 흰 꽃잎이 옮겨 가자 생기 없는 시드룬의 안색도 화사해졌다.
“자, 됐어요.”
“그다음은 어떻게 합니까?”
“네?”
시드룬이 여전히 투이나에게 숙인 허리를 들지 않았다.
“세 구혼자에게 모두 똑같이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시드룬이 아직도 쳐다보고 있는 샨을 가리켰다.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던 투이나가 샨의 불쾌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아!”
샨에게 가짜로 뽀뽀하는 시늉을 했던 투이나가 음, 하고 아랫입술을 눌렀다.
“그거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다른 구혼자가 받았다면 저도 받고 싶습니다.”
시드룬이 말했다.
뜻밖이다.
난감해하던 투이나는 곧 상대가 시드룬이라는 걸 되새겼다.
‘하긴 시드룬이잖아.’
별 걱정 없이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숙여 봐요.”
투이나가 그의 이마와 꽃 사이에 적당히 쪽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실제로 닿은 건 아니지만 시드룬은 만족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뒷걸음질 치던 투이나는 그제야 시드룬의 뒤쪽에 베인이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투이나가 후다닥 입을 가렸다.
만개한 분홍색 작약으로 가슴을 장식한 베인은 여전히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맑은 호수 같은 눈에 짧은 흔들림이 스쳐가는 걸 놓칠 수가 없었다.
투이나의 행동에 너무 놀란 듯이.
그때까지 멀쩡하던 볼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지? 베인이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갑자기 초조해졌다.
설마 베인이 무슨 생각을 하진 않겠지.
투이나는 절대 다른 구혼자에게 그런 마음은 없다고 맹세할 수도 있었다.
‘그런 마음은 대체 무슨 마음이야!’
투이나는 서둘러 잡생각을 쫓아냈다.
그녀가 다가가자 베인은 평정심을 되찾았다.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루가 님.”
봄맞이 축제니 그럴듯한 말을 건네야 하는데 투이나의 입술은 기껏해야 어, 음, 하는 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고마워요. 베인도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의 칭찬에 베인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제 꽃도 받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베인이 단정한 손짓으로 앞섶에 꽂혀 있던 만개한 작약을 떼어냈다.
주의 깊은 동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약한 분홍 꽃잎이 그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의도치 않은 가냘픔이 베인을 건드렸다.
구혼자 중에서 가장 화사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향기가 물씬 피어나는 꽃을 달았는데도 그녀에게 꽃을 주는 베인은 처연해 보였다.
‘정말 마음으로 주는 건 당신뿐인데.’
다른 사람에게 받은 꽃과는 금세 교환했지만 그에게서 받은 작약은 손을 떼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땋은 머리카락의 끝에서 꽃을 고를 때도 얼룩을 가리지 않는 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걸 찾고 있었다.
그에게 주기 위해서.
유난히 오래 걸려 건넨 꽃이라도 베인은 기쁘게 받아 들었다.
안심한 투이나가 물러났다.
그런데 얌전히 서 있어야 할 베인이 다시 앞으로 나왔다.
“하나 빠트리셨습니다.”
“네?”
그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 뺨을 만지작거렸다.
‘설마…….’
순식간에 솜털이 곤두섰다.
사람 심장을 들었다 놓은 주제에 본인도 은근히 민망했는지 그녀가 바라보는 동안 베인의 목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더 시간을 끌다간 그녀의 얼굴이 터지든지 베인의 얼굴이 터지든지 할 기세였다.
투이나는 빠르게 실행에 나섰다.
‘그래. 베인만 빼놓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녀는 눈 딱 감고 짧게 부딪쳤다.
떨어진 입술이 뜨거웠다.
“즐거운 봄맞이 축제 되기를.”
투이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베인에게서 떨어졌지만 그의 입꼬리가 슥 올라가는 장면을 놓칠 수가 없었다.
곧이어 베인도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즐거운 봄맞이 축제 되시길, 루가 님.”
흩뿌려진 인사가 무엇보다도 눈부셨다.
차례로 구혼자들과 교환 행사를 끝낸 투이나가 히죽거리는 시종들에게서 꽃바구니를 건네받았다.
“놀리지 마요.”
“저희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으이구.
투이나가 눈을 굴렸다.
보나마나 틈이 나면 둘이 언제 사이가 그렇고 그렇게 됐냐고 법석을 떨 게 뻔했다.
다행히 오늘은 외부 일정이 끝나면 저녁 늦게까지 구혼자들과 연회가 있었다.
연회가 끝나면 한밤중이니 시종들의 호기심을 좀 미룰 수 있겠지.
‘나도 놀랐어.’
베인은 열렬한 구혼자였지만 적극적인 구애자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미묘한 차이냐 하면, 결혼 전까지는 수줍어서 신체 접촉을 주저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과거 두 사람이 연인이었던 시기에도 그는 먼저 투이나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접촉한 뒤에도 얌전한 건 아니었지만…….
“루가 님, 아직도 더우세요?”
“네? 아, 아니요.”
투이나가 황급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볼이 뜨거워서 계속 손등으로 문질러 버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투이나는 베인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왜 벌써 연인 같지……? 나만 느끼는 거야?’
단순히 구혼자로서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니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만약 투이나가 처음부터 본래 성격을 드러냈기 때문에 베인이 끌리는 거라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베인은 날 사랑했잖아. 나를…….’
상기된 마음이 겉모습에도 영향을 미친 걸까.
축제 이후로 루가의 모습이 신의 딸처럼 아름답더라는 소문이 나라 밖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러나 정작 현재, 투이나는 산양처럼 돌아다니기 바빴다.
루가가 직접 축복과 꽃을 준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봄맞이 축제가 되면 아르힘이 직접 하늘에서 꽃비를 뿌렸다.
볼 수만 있었으면 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을 텐데. 아르힘을 보기만 하면 기절을 하니 목격자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가가 생긴 뒤로 바뀐 봄맞이 축제에 만족했다. 아무래도 직접 겪어 보는 편이 더 재밌으니까.
사람들은 귓가를 스치는 꽃잎에도 재잘거렸다.
“올해도 이렇게 꽃을 뿌리니 풍년이겠어.”
“아르힘 님 덕분에 땅도 점점 기름지게 변한다니까.”
“언니!”
그런데 그때 들린 꺄르륵 하는 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
“언니! 루가 언니!”
흩날리는 잎 사이로 자그마한 아이가 다가왔다.
투이나에게 돌진하던 아이는 그대로 라카인에게 막혔다.
이 장면까지 익숙했다.
“넌…….”
“헤스!”
곧장 당황한 비명이 들렸다.
옆구리를 짚고 달려오는 사람은 투이나가 구해 줬던 헬가였다.
한번 겪어 봤다고 이제 라카인이 무섭지도 않은지 대롱대롱 매달린 헤스가 방긋거렸다.
“죄송합니다, 루가 님…….”
“이게 무슨 소란인가!”
“사제님, 괜찮아요.”
지금은 축제다.
언성을 높일 일도 아닌데 괜히 축제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투이나가 까맣게 붙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안녕, 헤스? 그렇게 뛰어오다가 넘어지면 언니가 걱정하잖아.”
“네, 루가 언니! 고맙습니다!”
“루가 님이라고 해야지.”
사제가 지적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루가 님을 보자마자 막무가내로…….”
헬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를 집어 들고 있는 라카인이 금방이라도 내팽개칠 것처럼 보였는지 그녀의 손이 바닥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다친 데는 괜찮아요?”
“예. 다른 피난민 중에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려요…….”
다정한 투이나의 목소리에 글썽, 헬가에게서 얼핏 눈물이 비쳤다.
“루가 님이 아니었더라면 저희는 다 죽었을 거예요.”
“루가 언니랑 부딪친 게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그랬어요.”
헤스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끼어들었다.
헬가가 주섬주섬 말을 주워섬겼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저희는 정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애가 다시는 굶지 않을 거란 약속을 하신 게 루가 님이라면서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헬가가 거듭 머리를 숙이자 눈치를 보던 헤스도 따라 했다.
“……고맙습니다.”
투이나는 가슴 한구석이 저려 왔다.
되살아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살았을까.
헤스가 부딪치지 않았더라면 지금 머리를 숙인 여인은 영원히 땅 밑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가 달라져서 누군가를 구한 거야.’
투이나는 믿기지 않을 만큼 뿌듯해졌다.
내가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뿐인데 다른 사람에게까지 희망이 미친다.
아르힘은 그녀를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이라면 보다 나은 것을 주어야 하지 않나.
아직은 사람들에게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줄 수 있다면 주고 싶어.’
투이나는 오랜만에 루가가 됐을 때의 다짐을 떠올렸다.
축복을 받았다면 당연히 더 많은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세상에 나누기 위해서 주어진 축복이 아니던가.
투이나는 기쁨에 차 꽃을 끼얹었다.
아이의 머리 위로 축복받은 물처럼 꽃잎이 쏟아졌다.
“나야말로 기뻐.”
투이나가 헤스의 머리를 꼭 껴안았다.
아이를 들고 있던 라카인이 경계했지만 다행히 투이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지 않았다.
아이가 가진 무기라고는…… 살인적인 머리 냄새밖에 없었으니까.
“기쁜 소식을 위해 달려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감사하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헤스에게도 당신에게도!”
투이나는 이걸로도 기쁨을 표현하기에 부족한지 헤스를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잔뜩 꽃을 잔뜩 집었다.
“아르힘 님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하길!”
목표를 바꾼 투이나가 돌격했다.
헬가가 어, 어, 하는 사이 투이나가 꽃과 함께 그녀를 껴안았다.
“루, 루가 님…….”
졸지에 투이나에게 포옹당한 헬가가 쩔쩔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교도를 축복하는 모습에 사제들은 못마땅해 했지만 다행히 사람들은 좋아했다.
“루가 님께서 저렇게 아끼시는 것 좀 봐.”
“역시 아르힘 님 덕분이야.”
“아르힘 님의 축복이 함께할 것입니다!”
저마다 하늘로 치켜든 손에서 와하고 꽃이 휘날렸다.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투이나는 손안에 감기는 꽃잎을 바람에 날려 보냈다.
봄맞이 축제는 본의 아니게 포옹 행사로 돌변했다.
신전 사람들과 껴안으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줄 알고 사람들이 선을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제들은 질겁했지만 기대에 찬 사람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형식적으로 퍽 안았다가 떨어지는가 하면 시종들은 더 신이 나서 이리 저리로 뛰어다녔다.
“축복 받으세요!”
“축복이 함께하길!”
“어, 어, 저흰 안 돼요.”
물결치는 축제 속에서 호루니가 난감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나름대로 호위 임무를 지키려고 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이미 스카차는 안 된다고 외치면서도 한 아저씨에게 꽉 잡혀 있었던 것이다.
호루니도 악수라도 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한 손으로는 창을 잡고 다른 손으로 열심히 악수해 주는 호루니도 은근히 관심을 끌었다.
이런 소동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사람은 라카인이었다.
일단 낯선 타국인인데다가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로 혼자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누구야?”
“목에 걸린 건 또 뭐고…….”
“그 소문도 못 들었어? 루가 님이 모하세스한테서 내기로 뺏어 온 인간이라던데?”
“허어……. 어쩐지 흉흉하더라니. 저런 놈이 어떻게 루가 님을 지키는 거야?”
소문은 착실히 왜곡되어 갔다.
라카인이 왜 곁에 있는지 밝힐 수 없으니 사제들은 의도적으로 말을 골라 퍼트렸다.
샨의 거처에서 있었던 내기와 라카인의 관계를 적당히 섞었더니 꽤 그럴 듯했다.
라카인은 사람에 따라 샨이 보낸 감시자였다가, 결혼 예물이었다가,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다.
이런 평가는 신전 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투이나를 힐끔거리며 악수하던 호루니의 등을 사제가 쿡 찔렀다.
“호위가 자꾸 뭘 하는 게야.”
“봄맞이 축제 일정대로 하는 중입니다.”
“자네가 할 일은 저 야만인을 감시하는 거야.”
사제가 잇새로 낮게 말했다.
“아르힘에서 경계할 사람은 저놈밖에 없다고.”
“네, 알고 있습니다.”
호루니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전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호위라 매일 붙어 있다 보니 호루니의 눈에는 이래저래 보이는 게 많았다.
라카인은 투이나의 호위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매일 투이나의 방 밖에서 순찰을 도느라 덩달아 호루니와 스카차까지 교대로 잠을 설치는 건 아무도 몰랐다.
그나마 호위들이 한 명씩 붙어서 따로 다닐 때가 유일하게 라카인이 수면을 취할 시간이었다.
낮에 자면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도 잠을 자는데 왜 피곤하냐고 되묻지를 않나.
뿐만 아니라 틈틈이 두 사람을 훈련시키고, 투이나의 일정에 식사가 포함되어 있으면 자야 할 시간에도 따라 나와 독을 검사했다.
모하세스의 거처에서는 무수히 많은 하인들이 나뉘어서 하는 역할을 라카인은 혼자서 다 하려고 들었다.
아마 다른 호위들의 실력이 아직 부족해서겠지만.
그래도 투이나를 존경하는 마음과 별개로 라카인은 배우고 싶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지금도 사람들을 축복해 주는 투이나의 뒤에 라카인이 아무리 사람을 하나를 잡을 듯이 서 있어도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그가 몹시 주의를 기울여 가며 투이나를 지키고 있어서일까.
그는 투이나가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등으로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도 절대로 투이나에게 닿지는 않는 기술에 그녀는 그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했다.
“내 말 듣고 있는가?”
“예? 예!”
잠시 두 사람의 모습에 한눈이 팔린 호루니의 귀로 호통이 파고들었다.
“나 참, 아무리 축제라지만 주의하란 말이야.”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사제가 계속 훈계했다.
“자네들 하는 걸 보니 영 미덥지가 않아. 아무리 아르힘께서 늘 보고 계신다고는 하지만…….”
사제가 흘깃거렸다.
시선을 따라가 본 호루니가 뺨을 붉혔다.
중년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스카차가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었다.
간신히 검을 붙들고 안 된다고 하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호루니는 대신 부끄러워졌다.
“명, 명심하겠습니다.”
“아르파인들이 와 있는 동안은 주의하게. 그들의 신도 여기까지 따라온 거나 마찬가지지 않나. 아르힘 님이 아르힘에서 혹시라도 방해받을 순간이 있다면 오직 아르파가 간섭할 때뿐이니.”
사제는 못마땅하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 너무 루가 님에게 끌려 다니지도 말게. 아무리 그래도 아직 배울 게 많으신 분이야.”
호루니는 순간 벙 쪘으나 할 말을 끝낸 사제는 순식간에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호루니는 더 이상의 악수도 뿌리치고 투이나에게로 돌아갔다.
“표정이 왜 그래요?”
“아닙니다.”
호루니는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저도 여기서 호위를 설래요.”
“그러면 좋죠.”
영문을 모르는 투이나가 갸웃거리자 호루니의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사제에게 투이나의 편을 들고 싶었는데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이렇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게다가 라카인을 믿어 보자고 하는 투이나에게 신전의 의심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싫었다.
괜히 울긋불긋하게 안색만 다채로워진 호루니가 화살을 돌렸다.
“잠시…… 스카차만 잡아 올게요.”
괜히 스카차로 화살을 돌린 호루니가 성큼성큼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어리둥절해하던 투이나가 곧 싱긋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다들 라카인을 믿나 봐요.”
“그렇군요.”
“보세요. 이제 저랑 단둘이 남겨 두기도 하잖아요. 호위로 믿어 주는 거죠.”
단둘이라기엔 주위에 사람이 지나치게 많긴 했다.
주변을 둘러본 라카인은 무술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자는 자신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며 투이나의 말에 동의했다.
“괜찮습니다.”
라카인은 평생 배워 온 가르침을 말하듯이 읊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은 개의치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주군을 향한 것. 평생 명에 따를 뿐입니다.”
라카인의 말은 하인이나 호위가 아니라 군인처럼 들렸다.
문득 호기심이 생긴 투이나가 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라카인은 무슨 일을 했어요?”
라카인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
그의 눈은 대부분 앞머리에 드리운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한순간 또렷하게 눈동자가 드러났다.
예상보다 순하고 짙은 눈매였다.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놀란 투이나의 입술이 벌어졌다.
라카인은 묵묵히 기다렸다. 만약 투이나가 자세한 얘기를 묻는다면 바로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투이나도 금방 눈치를 챘다.
“……다음에 자세히 물어봐도 될까요?”
투이나는 주저했다.
본능적으로 이 자리에서 들을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지 물으십시오.”
라카인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때마침 호루니와 스카차가 요란하게 돌아와서 적절하게 화제가 바뀌었다.
“루가 님, 죄송합니다!”
스카차가 헉헉대며 긴장한 팔을 풀었다.
민들레 하나만 머리에 꽂아 뒀던 그는 꽃꽂이라도 당한 것처럼 머리카락에 온통 꽃잎이 달려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투이나가 싱글거렸다.
“와, 축복 많이 받았네요.”
“아닙니다.”
스카차가 황급히 머리에 붙은 꽃을 떼어냈다.
유일하게 신전에서 요구하는 근엄함을 따라가려는 호위였지만 별로 성과는 없었다.
노력이 과해서 안타까운 사례다.
죽상이 된 그가 호루니와 함께 투이나의 양옆으로 섰다.
호위들이 원래 대형으로 돌아가자 투이나도 마지막으로 포옹한 사람을 놓아 주고는 이동했다.
봄맞이 축제는 수도를 한 바퀴 돌고 동쪽 문으로 내려가 강에서 기다리는 마을 대표들에게 인사를 하면 끝이었다.
그들도 난민을 대하는 신전의 방침을 전달받았지만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저 순박하게 신이 선택한 루가를 만날 수 있다는 데에만 기뻐했을 뿐이다.
투이나의 분장도 사실 그들을 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치병이 말끔하게 나아 버린 기적의 미인.
“아르힘 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영광이 영원히 빛나시기를.”
“감읍하옵니다.”
투이나의 손을 꼭 붙든 사람들이 감격하여 돌아갔다.
투이나가 루가가 된 첫 해에는 지금보다 두 배는 사람이 많았다.
루가를 구경하려고 다른 사람들까지 마을 대표를 따라왔던 것이다.
신전에서 역정을 낸 뒤로 다시 질서는 지켜졌지만 사람들은 신과 대화한다는 루가를 향한 경외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아르힘께서는 잘 계시나요?”
“네, 그럼요.”
“늘 저희를 돌보시고 계시지요?”
“사랑하고 계십니다.”
진심이 담긴 투이나의 말에 사람들은 눈물을 훔쳤다.
시종들이 공을 들여 꾸며낸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성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투이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라카인은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확실히 신이 깃든 자 특유의 매혹이 있었다.
다만 명확하지 않은 차이점은 있었다.
라카인은 직접 목격한 아르힘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다. 까만 인영이 투이나를 덮었다고 느낀 순간 머리부터 타들어 갔으니.
아르힘의 현신을 직접 볼 수 없는 대신 라카인은 투이나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이다지도 밝고 희망차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이 아르힘의 힘일까.
정확하게 알아야만 했다.
“여기까지인가요?”
투이나가 바닥난 바구니를 탈탈 털었다.
“예, 돌아가셔도 되겠군요.”
사제가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행사가 끝났으니 남은 기간은 저마다 즐겁게 보내면 된다.
물론 신전 사람들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사제들은 남은 일 처리를 내일로 미루고 돌아가서 쉴 테지만, 투이나에겐 아직 연회 일정이 남아 있었다.
같이 참석해야 하는 시종들은 죽상이 되었지만 투이나는 아직 쌩쌩했다.
아침에 구혼자들을 만났던 기억이 새 숨을 불어넣듯이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베인!’
이제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있다.
“여러분, 고생하셨어요! 어서 돌아가요!”
산길을 뛰어갈 기세로 투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체력이 약한 시종들은 무사제들에게 업어 달라는 간절한 신호를 보냈지만 그들은 당연히 무시했다.
“루가 님, 조금만 천천히 가세요.”
“그러다 넘어지십, 헥, 니다.”
“조심하세요.”
투이나가 너무 힘들어하는 시종을 하나 부축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호루니가 얼른 튀어나왔지만 투이나는 사양했다.
“괜찮아요. 하나도 힘들지 않은걸요. 주변을 부탁할게요.”
싱긋 웃는 투이나는 정말로 생기가 넘쳤다.
호루니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맴돌았지만 투이나는 태연하게 시종을 동쪽 문까지 부축했다.
계속 그걸 지켜보고 있던 라카인이 드물게 질문했다.
“루가 님이 걸리신 병이 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스카차는 몹시 당황했다.
“아직 정확히 모르십니까?”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라는 것만 안다.”
라카인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건강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비밀로 감추는 이유를 모르겠다.”
“외관상이 크죠, 일단.”
스카차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르파에는 얼룩병이 없습니까?”
“없다.”
“그건 좀 부럽군요.”
머리를 긁적인 스카차가 설명했다.
“사실 보기에도 흉하지만 병 자체가 지나치게 끔찍합니다. 어떻게 얼룩병에 걸리는지도 모르는데 나이도 성별도 가리지 않고 발병합니다. 반점 하나만 생겨도 그다음부터 무서운 속도로 얼룩이 늘어나죠.”
그가 손가락으로 팔을 짚었다.
“팔다리에 생기는 얼룩이 가장 양호한 편입니다. 귀나 눈처럼 중요한 부위에 얼룩이 생기면 갑자기 제대로 들리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지 스카차가 부르르 한차례 떨었다.
“병에 걸린 자들은 곧 반점마다 고통을 호소하며 긁어대고,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둥 정신이 나가기도 합니다. 아마도 얼룩이…….”
스카차가 뒷말을 흐렸지만 라카인은 이해했다.
“머리에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거군.”
“……예. 확인해 볼 순 없지만.”
스카차가 한숨을 쉬었다.
“얼룩을 뜯어내려고 긁어댄 건 사제님이 치료해도 병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가 흐르는 팔을 치료하지 말라고 거부하는 사람까지 있었죠. 똑같은 고통을 또 겪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루가 님은 그러시지 않는다.”
“루가 님은 아르힘 님이 치료하고 계시니까요.”
이 대목에 이르자 스카차는 약간 확신하지 못하는 태도가 되었다.
“왜 루가 님만 병이 낫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르힘께서 염두에 둔 뜻이 있으신 건지, 아니면 아직 저희들의 믿음이 부족한 건지…….”
수호신의 힘은 신도들의 신앙에서 나온다.
막연하게 스카차는 투이나의 신앙심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유일하게 병이 낫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신전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신앙심이 강한 자에게 불치병이 낫는 기적과 함께 루가라는 지위가 주어진 것이다.
스카차는 새삼스레 감탄하고는 덧붙였다.
“아무튼 루가 님은 확실히 낫고 계시니 다행인 일 아닙니까. 제가 본 얼룩병 환자들 중에서는 가장 색이 옅으니 조만간 다 나으실 겁니다.”
“그 조만간이 결혼을 할 즈음인가.”
“예?”
라카인은 앞서가는 투이나를 눈으로 좇았다.
“병이 다 낫는다면 결혼해도 문제가 없을 테고, 아르힘은 새 루가를 들일 수 있겠지. 1년의 기간은 그러기에 충분한 시간 아닌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스카차는 당황해서 라카인이 아르힘을 낮춰 불렀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루가 님께 청혼한 사람들은 루가 님이 계속 루가이길 기대하고 청혼했을 텐데요.”
“…….”
“게다가 루가 님이 처음 루가가 되셨을 때 모든 일들을 어렵게 감당하셨단 말입니다. 고작 2년 만에 물러나시려고 그 고생을 하다니요.”
“확실하게 알아보는 게 좋겠군.”
라카인이 대꾸했다.
그는 첫 주자가 애써서 길을 닦아 놓으면 다음 사람으로 바뀌는 일이 훨씬 쉽고 간단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군이 헛된 일에 힘쓰게끔 둘 순 없으니.”
그리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겨진 스카차는 이상하게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주군이라는 단어가.
* * *
연회에 들어가기 전, 투이나는 다시 한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장식했던 꽃도 이미 시들시들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신전은 서늘한 밤공기를 아낌없이 내보냈고, 투이나도 보다 따듯한 보라색 가운을 걸쳤다.
가지에 움튼 싹이 마지막 껍질을 벗기 전에 보이는 푸르스름한 빛과 비슷했다.
이번 연회도 비슷한 색으로 꾸며졌다.
추위를 막기 위해 별관 안쪽에 자리를 마련하고 따듯한 향로를 피웠다.
아르파처럼 향락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얇은 천을 천장에 매달아 여러 겹 늘어트린 모습이 마치 샨의 천막을 연상시켰다.
다른 점은 돌로 된 바닥에 색유리로 박아 둔 타일이 보다 깔끔하고 정결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뿐이었다.
찰랑이는 소리와 함께 투이나가 나타나자 세 구혼자가 모두 일어섰다.
아침과 달리 다들 한결 느긋해 보였다.
샨은 망토를 벗었고, 시드룬은 앞에 놓인 요리에 관심을 가질 만큼은 사람다워 보였다.
베인은 아침과 다른 옷이었는데, 여전히 투이나가 주었던 꽃을 그대로 꽂고 있었다.
그걸 보자 가슴이 또 두근거렸다.
투이나가 살짝 집었던 천을 놓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대답하는 건 역시 베인뿐이다.
눈인사를 하며 다가가려던 투이나가 앗,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샨이 소리도 없이 발끝으로 투이나의 치맛자락을 슬쩍 밟았기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쭉 미끄러질 뻔했다.
투이나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샨!”
“두건을 다시 쓰다니 안타깝군.”
샨이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언제부터 그녀의 차림새에 신경을 썼다고.
뜬금없이 투정을 부리는 그가 많이 당황스러웠다.
“신전에 돌아왔으니까요.”
“루가는 항상 그렇게 꽉 막힌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건가?”
샨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내겐 아까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샨의 취향은 루가가 아니던가요?”
투이나가 일부러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쪽으로 샨이랑 취향이 맞다니 의외였다.
‘왕이니까 뭔가 고상한 쪽을 더 좋아할 줄 알았어.’
두건이 취향의 문제만 아니었으면 마음껏 벗고 다닐 것이다.
안타까움과 장난스러움을 섞은 투이나가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제가 이 모습으로 나설 때가 더 많으니 정 결혼하실 거라면 취향을 바꾸는 편이 좋겠습니다.”
“글쎄.”
투이나가 치마를 잡아당기는 모습을 본 샨이 살짝 발을 들어 올렸다.
“아르힘이 바뀌는 편이 빠를 것 같군.”
그가 발을 들자 탁 풀려난 투이나가 재차 휘청거렸다.
예상했다는 듯이 샨이 팔을 뻗었다.
그러나 샨이 투이나를 붙잡기 전에 장갑을 낀 손이 그녀를 먼저 낚아채 갔다.
“계속 서 계시기에는 바람이 춥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베인이 뒤에서 살며시 투이나의 팔뚝을 잡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목구멍 바깥으로 튀어나올 뻔한 심장을 도로 삼켰다.
“어, 언제 왔어요?”
“처음부터 같이 있었습니다.”
베인이 눈웃음을 짓자 금세 투이나의 넋이 빠졌다.
‘연회장이 아니라 저쪽 자리에 있다가 여기까지 언제 왔냐고 물은 거였지만…….’
그의 미소엔 더 반박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샨은 기껍지 않은지 인상을 썼다.
“남의 대화에 끼어드는 건 어디에서 배워 온 버릇이지?”
“남의 걸음을 막는 것도 대화법은 아니지요.”
베인이 샨의 말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투이나의 눈은 더 원을 그릴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녀가 아는 베인은 언제나 얌전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이든 참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옛날보다 성깔이 좀…… 생겼나? 그럴 수가 있나?’
과거에 베인은 샨을 대놓고 적대한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억이 아무리 아니라고 외쳐봤자 무슨 소용인가.
지금 베인이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데.
투이나가 당황한 사이 베인은 눈에 띄게 접근한 샨에게서 노골적으로 그녀를 떨어트렸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이죠.”
벙 찐 투이나가 대답했다.
연회장에 밥을 먹고 오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왜 베인이 말하면 뻔한 얘기도 중요한 얘기처럼 들리는지.
그대로 거의 넘어갈 뻔했는데 샨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직 얘기 안 끝났다.”
“어, 정말요?”
엉겁결에 투이나가 되묻자 샨이 눈치도 없냐는 듯이 노려보았다.
당연히 눈치 정도는 있지만 샨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상해서 튀어나온 반응이다.
물론 샨이 막 돼 먹고 무례하게 투이나를 붙잡는 일이야 많았지만 오히려 지금 잡힌 손은 그때보다 힘이 덜 들어가 있었다.
마치 보여 주려는 것처럼.
“갑자기 저한테 관심이 많아졌네요?”
“많았으니 청혼을 한 게 아닌가.”
샨이 쯧, 소리를 냈다.
헛소리 그만하고 이쪽으로 오란 뜻이다.
베인은 투이나를 잡아당기지 않았지만 그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계속 존재감을 드러냈다.
투이나는 이 상황이 참으로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든 뒤로든 나아가는 순간 투이나가 누구를 더 신경 쓰는지 드러나고 만다.
적절하게 다가온 시드룬이 아니었으면 꽤 곤란해졌을 것이다.
“연회는 언제 끝납니까?”
사락사락하는 발걸음으로 다가온 시드룬이 드물게 반가웠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투이나가 얼른 샨에게서 손을 빼내고 베인에게서 떨어졌다.
‘역시 아르힘 님이셔. 구혼자를 셋으로 준비하신 뜻이 있으셨군요!’
재빠르게 기도를 올린 투이나가 팔을 들어 올렸다.
마음이 가는 방향이야 어떻든 그녀는 루가로서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저문 가지에 깃든 노을의 껍질이 벗겨졌으니 곧 봄이 찾아옴이라.”
투이나가 드디어 준비해 온 연회의 여는 말을 읊었다.
경건한 말소리에 비로소 샨과 베인은 힘이 들어가던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그러나 그들이 부딪쳤던 찰나에 생겨난 적대감은 아직 공기 중에 그대로였다.
투이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함께 가지에 걸린 빛을 나누었으니 우리는 같은 과실을 기다리는 자들일 것입니다. 오늘만큼은 시름을 잊겠습니다. 그저 살아 있음을 축복하며.”
투이나가 한 호흡을 골랐다.
“이 밤을 지새우겠습니다.”
짤랑.
투이나가 손목에 걸었던 황금 고리를 빼내었다. 기다리던 시종이 똑같이 황금으로 만든 종을 내밀었다.
투이나가 손목을 꺾어 짧게 종을 내리쳤다.
대앵…….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두우웅 하고 신전 전체에 웅장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샨과 시드룬은 고개를 쳐들었으나 투이나와 베인은 침착했다.
거대한 종소리는 그녀의 기도를 아르힘이 들었다는 신호일 뿐이다.
신전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광장을 돌아나가 세 방향에 난 문을 통과해 아르힘의 마지막 백성이 들을 때까지 퍼져나갈 것이다.
메아리처럼 작아지더라도.
신이 당신의 곁에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
‘볼 수 없더라도 믿음을 가지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시종에게 황금 종을 돌려준 투이나가 황금 고리를 갈무리했다.
아르힘을 보며 대화할 수 있게 된 지금도 신의 이러한 전달 방식은 경이로웠다.
투이나는 유일하게 이 마음을 이해할 사람을 찾아 살짝 곁눈질했다.
베인은 기대했던 대로 미소 지었다.
연회가 시작되자 방금 전의 신경전을 까맣게 잊은 듯이 음악이 연주되었다.
나른하게 줄을 뜯는 리라 소리가 밤의 정적을 부드럽게 메웠다.
주의 깊게 구혼자들을 신경 쓰고 있던 투이나는 일부러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시드룬에게 다가갔다.
“그러면 하룻밤을 완전히 새워야 하는 겁니까?”
“네, 오늘만요.”
투이나가 접시에 담긴 요리를 덜어냈다. 많이 먹으면 포만감 때문에 금세 졸음이 왔다.
“뿌린 씨앗에 싹이 틀 때는 꼭 밤이잖아요? 그래서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그 시간을 같이 보내겠다는 뜻이에요.”
“그렇군요.”
시드룬이 파파야 절임을 먹는 투이나를 보더니 똑같이 따라 했다.
질겅거리는 식감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입이 이상한 모양으로 꿈틀거렸다.
쿡쿡 입을 가리고 웃던 투이나가 절임을 삼켰다.
“시드룬은 식사하지 않아도 괜찮나요?”
“먹으면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삼키는 게 잘 안되는지 시드룬이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음식을 눌렀다.
곧 꿀꺽하고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새알을 삼키는 뱀 같았다.
“효율이 없는 짓이라 자주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마법사가 되기 전에는 평범하게 먹고 다녔을 거 아니에요?”
시드룬이 고개를 기울였다.
연보라색 눈동자에 얼핏 감정 같은 게 스쳤다.
“그랬을 겁니다.”
투이나가 갸웃했다.
본인의 이야기에 가정법이라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추측을 내비쳤다.
“혹시 마법사가 되면 기억도 잃어버리나요?”
“아닙니다.”
시드룬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마법을 쓰다 보면 가끔 일어나는 실수 때문입니다.”
밤의 불빛에 비친 그의 머리카락이 여러 색으로 빛났다.
마법에 대해 말하는 시드룬은 금방이라도 보석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진 다음에 다시 합쳐질 것만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그가 열어 주었던 세계에서 보았던 짐승으로.
“연구는 빨리 진행될수록 좋습니다.”
시드룬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투이나가 적당한 말을 떠올렸다.
“조만간 찾아갈 수 있을 거예요. 시드룬과는 밤에 따로 만날 수 있으니까…….”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투이나가 말했다.
“……갈 수 있는 날 침대 옆에 등불을 올려 둘게요.”
“알겠습니다.”
시드룬은 만족했다.
구혼자들 중 그를 만족시키는 게 가장 쉬워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투이나는 아까부터 양쪽 뒤통수에 찌르르 와닿는 존재감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샨과 베인은 연회장의 끝과 끝으로 떨어져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투이나를 불렀다.
샨은 주변에 다가오는 인간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산처럼 험악하게 굴었다.
반면 베인은 가만히 난로가 앞에 앉아 식사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들이라고 투이나가 보여야 할 태도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시드룬이라는 중립적인 선택까지는 괜찮다고 치더라도 다른 상대방에게 먼저 가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샨이라면 몰라도 베인까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두 사람에게 시험이라도 당하는 것 같다.
‘시험이긴 하지.’
투이나는 혀가 아리도록 단 열매를 으깨었다.
구혼 기간이 시작된 순간부터 단 한 명인 남편감을 고르는 시험과도 마찬가지였다.
투이나가 두 번째 치르는 시험은 똑같은 시험지에 쓰인 전혀 다른 답안을 요구했다.
‘단순히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눈다고 전부 알 수는 없어. 사람은 누구나 보다 깊은 걸 감추고 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랑에 빠진 건 우연이다.
죽기 전에 보냈던 일 년의 시간보다 한 달이 되어 가는 지금에서야 알아낸 게 더 많았다.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 말이다.
아직 찾아내지 못한 살인자도 그런 모습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베인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고 모두를 쫓아낼 수는 없어.’
차라리 되살아난 직후 그랬으면 가능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베인에게도 의심이 싹텄으니까.
투이나는 아릿한 입 안을 씻어 버리기 위해 연거푸 차를 마셨다.
‘어차피 내게 청혼한 사람이니 사랑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걸……. 지금이라도 그를 의심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러나 한번 호되게 차가워졌던 심장이 쉽게 판단하지 말아 달라고 연약하게 팔딱거렸다.
지금도 떠올리기만 하면 온몸의 피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듯했으니.
베인이 만나자마자 열렬하게 사랑을 고백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정작 구혼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호감을 고백한 사람이 샨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휴우…….”
투이나는 네 번째 잔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췄다.
뒤에서 라카인이 새로운 주전자를 집어 들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루가 님. 맛을 보고 새 잔을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이미 많이 마셨으니까 더 안 마셔도 되겠죠.”
투이나가 사양했다.
그를 보니 머리가 맑아졌다.
‘어쨌든 선택을 안 할 순 없어.’
와장창!
그때 깨지는 소리가 났다.
투이나는 돌아보지 않고도 누구 짓인지 알았다.
천천히 다가갔다.
“…….”
끼익.
의자가 끌렸다.
투이나는 살며시 그의 등받이를 짚어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밝혔다.
깍지 낀 손을 모으고 있던 베인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좋은 자리를 찾았네요.”
투이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베인이 은근하게 화답했다.
“……인적이 드물어 조용합니다.”
“그러네요. 보는 이가 없어요.”
투이나가 의자를 당겨 그의 옆에 앉았다.
더 이상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목표로 한 대상이 이미 다른 곳으로 가 버린 뒤에야 주의를 끌 이유가 없었으니까.
‘샨이 너무 화를 내지 않으면 좋겠네.’
투이나는 차가운 발에 난로를 쪼였다.
베인은 그녀가 이쪽을 먼저 찾아온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샨을 척질 위험을 감수하고도 그에게 먼저 마음이 끌린다는 표현이었으니까.
베인이 배려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루가 님이 늦게 오셨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그런가요.”
투이나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녀도 알았다.
샨은 참지 못할 테고, 베인은 이해해 주리라는 것을.
그러나 가끔은 알면서도 들어주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어쩌면 내가 샨을 더 이상 너무 무섭게만 바라보지 않는 걸까?’
만약 샨이 정말로 검을 들어 다시 심장을 찌르더라도 이번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난로의 불빛이 베인의 눈동자 안에서 반사되었다.
“하지만…… 기쁘군요.”
그는 솔직히 말했다.
투이나의 몸이 조금씩 따듯해져 갔다.
“아까 많이 놀랐어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베인이 양손으로 입가를 눌렀다.
“신도로서 허락받지 못할 생각이겠지만.”
그의 눈이 묘하게 깊어졌다.
“루가 님이 대의를 위하지 않을 때 사랑스럽다고 느낍니다.”
뜻밖의 고백에 투이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놀란 그녀가 밭은 숨소리를 내자 베인이 부끄러운지 입가를 가렸다.
“때때로 루가 님의 남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꾸만 마지막 선택은…….”
베인이 뒷말을 흐렸다.
그러나 비스듬히 앉은 자세로 올곧이 그녀만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투이나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은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이겠지요.”
“아.”
화르륵.
투이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죠.”
투이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동안 나름대로 베인의 구혼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대단한 착각이었다.
단순히 그가 열렬하게 구애했다, 하는 문장하고 지금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단어와 표정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었다.
너무 떨려서 손바닥이 저릿거렸다.
‘어떡해…….’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붙잡고 나를 사랑하냐고 묻고 싶었다.
예, 라는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당신과 결혼해 버리겠다고 말하게.
“루가 님.”
정말 마음이라도 읽었나 싶은 타이밍에 베인이 투이나를 불렀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어깨를 들썩했다.
“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베인이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루가 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저는 항상 루가 님을 도울 것입니다. 설령 전쟁일지라도 말입니다.”
베인이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르힘은 약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알지만 저는 루가 님이 보다 자유롭게 선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남편이지 않습니까.”
마지막 말은 조금 떨려 나왔다.
투이나는 아르힘과 같은 말을 하는 베인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네, 그럼요. 전쟁이 나진 않을 거예요.”
투이나는 덩달아 열렬하게 말했다.
“정말 만약에 제가 샨을 거절하더라도 베인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전쟁 대신 루가를 살해하는 편이 간단하니까요.’
투이나는 놀라 되묻는 베인에게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글쎄요……. 샨이 그만큼 저를 아끼는 건 아니잖아요.”
투이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좋은 대가만 준비하면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는 탐욕스러운 자입니다.”
베인은 썩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자가 루가 님에게까지 해를 끼치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그건…….”
말이 나온 김에 샨이 어느 정도로 화가 났는지 단계를 구분하려고 투이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샨이…… 안 보여요.”
투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있던 자리에 있는 건 조각난 접시와 엉망이 된 탁자뿐이었고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일정대로라면 오늘 밤 그들은 다 함께 여기 있어야 했다.
과거에도 없었던 탈주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연회장 곳곳에 걸린 산들거리는 얇은 천에도 샨의 커다란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잠깐 알아보고 올게요.”
“예, 원하시는 대로.”
투이나가 샨의 자리를 치우던 시종에게 다가갔다.
“혹시 샨이 언제 나가는지 봤나요?”
“모하세스라면 볼일을 본다면서 나갔습니다.”
“언제요?”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납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을 거예요.”
시종이 우그러진 잔을 내보였다.
“아직 이게 따듯하니까요.”
투이나는 잠시 무지막지한 샨의 힘에 아연해했다.
‘조용해졌다 싶었더니 소리만 안 냈던 거였어?’
팽팽하게 두드려 놓은 은잔이 빵 반죽처럼 짓눌려 있었다.
정확하게 샨의 손가락 자국이 남은 잔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녀가 물었다.
“곧 돌아오겠죠?”
“글쎄요. 찾으러 나가시는 게 빠를 겁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시종의 말에 투이나는 더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