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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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쪽의 태양이 질 때 그가…’

봄맞이 축제는 준비부터 축제에 포함되었다.

아르힘에선 관상용 화초가 많이 나지 않아 주변 나라로부터 축제 때 쓸 꽃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백성들은 수레에 실려 오는 싱그러운 꽃들을 향기부터 감탄하고 즐겼다.

피난민들도 꽃을 꺾어 오면 신전에서 지급하는 구호품을 받을 수 있어 좋아했다.

따듯한 날씨보다 사람들이 온화해지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봄맞이 축제의 시작이었다.

축제가 가까워지자 덩달아 투이나도 사람들 앞에 나설 일이 많아졌다.

“그러고 보니 신전 밖은 처음이겠네요?”

투이나가 준비하던 호위들을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라카인만 콕 집어 본 질문이었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아르힘 사람이었으니까.

허리에 검을 매고 있던 라카인이 투이나의 질문에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닙니다. 모하세스 님과 아르힘에 올 때 한 번 보았습니다.”

“그럼 제대로 구경한 건 아니네요!”

투이나가 방긋 웃었다.

외출용으로 종아리까지 오는 샌들을 신은 그녀는 차림새까지 활달해 보였다.

“루가 일이 의외로 신전 밖에 나갈 때가 많아서요. 잠깐 호위로 지낼 때라도 구경은 제대로 하고 가야죠.”

“괜찮습니다.”

“관광 싫어해요?”

“루가 님을 지키는 게 더 좋습니다.”

자기 직업을 저렇게 산뜻하게 좋아하다니. 진지한 태도라 더 놀자고 하기 미안해질 정도다.

‘내가 놀아야 같이 노는 셈 치고 돌아다닐 수 있겠어.’

축제 전의 시찰은 단순히 민심 안정을 위해서였기 때문에 큰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돌아다니는 게 일이니까.

항상 마음 한구석에 라카인을 신경 써 줘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있던 투이나는 이번에 아주 잘 놀아 주리라 다짐했다.

“걱정 마세요. 분명히 안전하고 재밌게 다녀올 수 있을 테니까요!”

투이나의 말에 검 한 개를 더 등에 매던 라카인이 멈칫했다.

허리에 검을 차는 건 아르힘 식이고 등에 매는 건 아르파 식이다.

그걸 한꺼번에 하니 생각보다 가관이다.

큼직한 검 두 개를 주렁주렁 단 라카인을 본 스카차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니 신전 밖이라고 그렇게까지 준비 안 해도 됩니다.”

“신분이 증명되지 않은 자와 마주칠 일이 많은 곳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라면…….”

“진정하세요. 다른 나라도 아니고 아르힘에서 루가 님을 해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보다 못한 호루니까지 한마디 했다.

투이나가 난감하게 깍지를 꼈다.

그녀는 라카인이 호위를 철저히 서는 게 오히려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공격하란 뜻은 아니지.’

투이나가 선을 그었다.

“함부로 검을 뽑지만 않으면 괜찮겠죠. 대신 라카인, 신전 밖에서는 제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도 공격하지 마세요.”

호루니와 스카차가 동시에 갸웃했다.

보통 반대가 아닌가.

신전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투이나를 해칠 의도가 없는 사람들일 테니까.

복잡해진 호위들과 달리 라카인은 단순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작은 소동을 마치고 투이나 일행이 신전 밖으로 빠져나왔다.

구혼자들이 도착한 이후로 공식적인 첫 외출이라 약간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저기! 저기 나오신다!”

“루가 님!”

“옆에는 누구지?”

가볍고 긴 두건을 쓴 투이나의 뒤로 시커멓게 큰 그림자가 보이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 하긴 호위들을 소개하는 것도 처음이구나.’

호루니와 스카차도 막상 많은 인파를 눈에 두니 긴장한 모양이다.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가더니 자기도 라카인처럼 검을 두 개 차고 나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표정들이었다.

양팔로 가리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떼를 지었으니까.

투이나는 익숙하게 계단을 내려가 사람들에게 합류했다.

얼마 전까지 부대끼며 살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끔 루가가 아닌 투이나를 아는 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도 건강해 보이십니다.”

“아르힘 님께 꼭 인사드려 주세요.”

“축제 준비는 잘 되어 가나요?”

“그럼요. 걱정해 주신 덕분이죠.”

투이나가 친근하게 뻗어 오는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 주었다.

라카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검집으로 밀어냈다.

옆에 있던 시종이 툴툴거렸다.

“꼭 그렇게 밀어내지 않아도 됩니다. 다 루가 님을 맞이한 백성들이 아닙니까.”

“다른 나라 사람이라 어쩔 수 없어.”

“살살 하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라카인이 팔을 한번 쭉 밀면 서너 명이 한꺼번에 길 옆으로 밀려났다.

그렇게까지 해야 겨우 앞으로 좀 걸어갈 수 있었다.

바쁘게 인사하던 투이나는 꼭 자기 가게에 들러 달라는 사람까지 약속해준 뒤에야 구경꾼 행렬을 벗어날 수 있었다.

투이나 옆에 끼어 있던 호루니와 스카차도 간신히 빠져나왔다.

“하이고…….”

“루가 님이 나오시면 항상 이렇습니까?”

“음, 오늘은 라카인 덕분에 빨리 나온 편인걸요?”

투이나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시가지로 가면 다들 들어오라고 할 테니까 끌리는 곳 있으면 찍어 보세요. 들러 봐요!”

“루가 님도 신전 밖이 더 익숙하실 터이니 저희는 그저 좇기만 해도 되옵니다.”

그때 스카차가 조바심을 냈다.

“저…… 정말 아무 데나 가도 괜찮습니까?”

“네. 축제 전에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자리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갈 수는 없으니 여러분들이 좋은 곳으로 가요.”

투이나가 허리를 짚었다.

‘안 되면 눈 감고 찍지, 뭐.’

“그럼 서문 광장은 어떠세요? 새로 색유리 가게가 열렸는데 보기에 아주 아름답다고 합니다.”

“좋아요!”

호루니의 의견에 투이나가 찬성했다.

빠른 납득에 호루니가 살짝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그들은 언덕을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투이나가 장담했던 대로 문을 열어 놓은 가게에선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어서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루가 님! 축복 한 번만 주고 가십쇼!”

“잠깐만 와 보세요! 새로 들어온 옷감이 아주 고와요.”

“루가 님!”

라카인의 눈이 홱홱 돌아갔다.

낯선 구경거리 때문이 아니었다. 불경하게 루가를 막 불러대는 소리에 검집에 올라간 그의 손이 계속 움찔거렸다.

‘저러다 누구 하나 베는 거 아냐?’

신전에서 나온 뒤로 단단하게 굳은 라카인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정말로 저들을 그냥 두는 겁니까?”

“나쁜 뜻으로 저러는 게 아녜요. 아르힘 님이 불러 주시기 전까진 저도 구별될 일이 없었는걸요.”

“주군께서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시든 이미 저의 주군이십니다.”

라카인이 아주 진지하게 말해서 투이나는 그냥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주군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친하다고 생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루가 님.”

칼같이 대답한 라카인은 다시는 가게에서 부르는 소리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리웠어…….’

황토색으로 발린 건물들과 낮게 돌을 쌓아 둔 우물까지 너무도 친숙했다.

투이나의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어렸을 때 놀던 골목, 기대어 쉬던 의자, 사람들이 하도 오르내려서 밑이 새까매진 호두나무, 봄이 되면 하늘을 가리던 천막을 걷어내고 날리던 연.

사람들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투이나는 힘껏 달렸다.

시종들만 있었다면 말렸겠지만 이젠 바로 쫓아올 호위들이 있었다.

그들을 믿고 투이나는 북적이는 인파로 뛰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어어, 루가 님?”

투이나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뒤따라온 호위들이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잘 지내고 있나요?”

“물론이지요. 아르힘 님이 보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여러분에게 축복 있기를!”

기쁘게 인사한 투이나의 옆으로 산처럼 높게 쌓은 꽃수레가 드르륵 굴러갔다.

살짝만 옆으로 피했어도 넘칠 듯이 쌓인 노란 프리지아 속에 파묻힐 뻔했다.

‘와아, 향기가……!’

눈이 찡할 만큼 진한 향이 온몸을 감쌌다.

라카인이 투이나를 옆으로 빼냈다.

“괜찮으십니까?”

“네, 겨우 꽃인걸요.”

투이나가 킁킁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저것도 노란색 꽃이네요! 혹시 저게 라카인이 보았던 꽃이 아닐까요?”

라카인이 잠깐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사소했던 잡담을 투이나가 기억하고 있단 사실에 놀란 모양이다.

“아니……. 아닌 것 같습니다.”

“음, 아깝네요.”

투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앞으로 계속 볼 것도 꽃인데 그중에 하나는 있겠죠.”

기운차게 말한 투이나가 뒤늦게 헥헥대며 따라온 시종을 몰아 시가지로 내려갔다.

시장에 꽃이 넘쳐나니 가게마다 꽃으로 장식해 두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게다가 인심도 좋았다.

투이나가 축복해 주기 위해서 잠깐 가게에 들를 때마다 그녀의 품 안에 점점 꽃과 물건들이 늘어났다.

“하나씩 받으세요!”

투이나가 능숙한 자세로 과자를 던졌다. 호위들과 시종들이 착착 양손으로 붙잡았다.

“와, 거품 과자는 정말 오랜만이에요.”

“감사합니다, 루가 님.”

호루니가 기쁘게 입으로 가져갔다.

스카차도 내심 즐거워 보였다.

“……이것도 먹는 것입니까?”

“그럼요.”

라카인은 연약한 생김새에 끈적거리는 과자를 받고 몹시 거북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품 과자는 투명한 물방울 모양으로 만든 사탕 안에 색깔 설탕을 넣은 과자였다.

뜨거운 사탕이 굳기 전에 설탕을 집어넣는 기술이 핵심이라 다른 나라에선 꽤 고급으로 취급받았다.

‘아르힘에서는 흔한 과자지만 내게는 비싸서 생일일 때만 딱 하나씩 먹었었지.’

그래서인지 투이나에겐 유달리 거품 과자가 특별한 음식이었다.

처음 루가가 되고 나서 사람들이 선물로 거품 과자를 보냈을 때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이거 정말 아무나 못 먹는 과잔데.

루가라서 이렇게까지 바치나 싶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그렇게까지 귀한 음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투이나는 그래도 거품 과자만큼은 특별한 날에만 아껴 먹었다.

‘오늘은 특별해질 자격 있어.’

투이나는 호위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와작와작 사탕을 깨물어 먹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라카인은 무미건조하게 입에 던져 넣었지만 안 깨물고 녹여 먹는 게 은근히 먹을 만한가 보다 싶었다.

거품 과자를 혀 위에 올려놓고 기다리면 빠작, 하고 겉 사탕이 깨지며 설탕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파도가 친 모래사장에 바닷물이 스며드는 장면과 똑같다고 누군가가 감탄한 뒤로 거품 과자라는 이름이 붙은 사탕.

그게 투이나가 최초로 들은 바다의 이야기였다.

‘바다는 소금물에서도 물고기가 산다는데, 그게 정말일지 궁금해.’

아르힘의 소금 호수에는 풀조차 자라지 않았다.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암염이 너무 짙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물고기가 살 수 없을 만큼 진한 소금기가 아르힘에게 부유함을 약속했다.

사람들이 설탕을 지고 산을 오를 만큼.

혹은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문을 두드리게 만들 만큼.

“꺄아아악!”

그때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투이나가 홱 고개를 들었다.

더러운 차림을 한 꼬마가 꽃바구니를 넘어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투이나가 당황할 겨를도 없이 눈물콧물을 쏟으며 그 아이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도와주세요!”

그러나 아이의 작은 시도는 곧장 라카인에게 막혔다.

그가 딱딱한 손아귀로 꼬마의 허리를 한 줌에 들어 올렸다.

“떨어져라.”

“아악! 살려 주세요!”

흉흉한 생김새에 놀란 꼬마가 경기를 일으키듯 악을 썼다.

“라카인! 놔요!”

즉각 아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는 두 손 두 발로 착지하고도 겁을 집어 먹어서 벌벌 떨었다.

“꼬마야, 진정해라.”

스카차가 어색하게 아이의 어깨를 건드리는 동안 호루니가 주변을 확인했다.

“쫓아오는 사람은 안 보입니다.”

“그냥 장난인가?”

“아니에요!”

스카차의 말에 꼬마의 고개가 홱 들렸다. 격한 기세에 스카차가 주춤 물러났다.

“죽여요! 우리를 마구 죽이고 있어요!”

“뭐라고?”

안색이 달라진 투이나가 황급히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자세히 말해 볼래?”

“꽃을 땄더니 갑자기 활을 쏘고 막 옆에 있던 언니랑 다들……!”

목소리가 점점 커지던 아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기침했다.

그제야 아이가 작게 쥔 주먹 안에 비틀린 꽃잎이 보였다.

투이나가 단숨에 꼬마를 안아 올렸다.

“일단 가 보자.”

“루가 님!”

“우선 신전으로 데려가 얘기부터 들어도 안 늦습니다!”

“늦어요.”

“위험합니다!”

“제가 안겠습니다.”

다른 시종들의 말을 쳐내던 투이나가 마지막 말에는 반응했다.

라카인이 양손을 받치듯이 들고 있었다.

하지만 라카인을 본 아이는 더 소스라치며 투이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그는 첫인상을 망친 뒤였다.

“괜찮아요. 안을 수 있어요.”

“루가 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 말에 깔린 경계심을 알아차린 투이나가 짧게 물었다.

“……누굴 죽게 하는 건 싫지?”

투이나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이나는 그걸로 혹시나 꼬마가 해를 끼칠 거라는―혹은 암살자일 거라는― 주변의 걱정을 물리쳐 버렸다.

“그럼 방향을 알려 줘.”

“큰 문, 여기서 엄청 가까운 큰 문 바깥이요.”

말을 들어 줄 사람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아이가 훌쩍였다.

투이나가 성큼 걸어 나갔다.

“루가 님!”

“호위들이면 좀 말려 봐요.”

“저희가 어떻게…….”

시종들이 질책하자 스카차가 난감하게 그들을 피했다.

오히려 호루니가 단호했다.

“루가 님 하시는 일인데 따라야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무모하잖아요.”

“좀 믿어 보세요.”

호루니가 타박했다.

아이의 안내는 광장을 지나고 서쪽 관문이 나타나고도 계속 이어졌다.

경비를 서던 무사제가 투이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루가 님을 뵙습니다!”

“여기까진 어쩐 일로…….”

“바깥에 나갈 일이 생겼어요.”

“예, 예?”

무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디 가세요?”

“이 아이가 죽는 사람들을 봤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못 보셨어요?”

시커먼 얼굴에 두 눈만 빠끔히 뜬 아이를 본 무사제들이 의아하게 대답했다.

“여긴 조용했습니다.”

“바깥에서 우리만 다 죽인단 말이에요!”

아이가 악을 썼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확인해 봐야겠으니 무사제 몇 분만 따라오세요.”

“예? 아, 알겠습니다, 루가 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무사제들이 일단 움직였다.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에 시종이 발을 동동 굴렀다.

“루가 님, 설마 나라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니시지요?”

“나가야죠.”

“안 될 말씀입니다! 바깥은 아르힘 님이 오실 수도 없잖습니까!”

“맞습니다! 루가 님이 어떻게 지금처럼 설렁설렁 다닐 수 있는지 잊으셨어요?”

“설렁설렁이라니요!”

옆에 있던 스카차가 발끈했다.

자주 박살 나긴 했지만 호위로서 자부심이 있지.

호루니도 어떻게 못 믿을 수가 있냐는 듯이 노려보았다.

“루가 님은 저희가 지켜요.”

“아니, 사람이 죽는다지 않습니까.”

그들이 말다툼을 하는 사이 투이나는 바깥이었다.

라카인도 마찬가지였다.

왜 안 따라오냐는 라카인의 표정을 본 호루니와 스카차가 후다닥 쫓아갔다.

“루가 님!”

“같이 가요!”

“저희는 반대한다니까요!”

“여러분은 거기 남아도 돼요!”

투이나가 위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시종들이 따라가 봤자 지킬 사람만 늘어날 뿐이건만.

알면서도 시종들이 결국 쫓아내려왔다.

아르힘의 서쪽은 비탈길이다.

투이나 일행이 빠르게 내려갈 때마다 발밑에서 적갈색의 흙이 부스러졌다.

샨과 왔을 때는 동쪽으로 들어왔던 라카인이 유심히 주변을 살폈다.

서문 밖은 고도가 높고 지형이 험했다. 누군가가 숨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사이, 투이나에게 안겨 있던 아이가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저기요!”

투이나가 불그스름한 안개 같은 숲의 윗부분을 확인하고는 내려갔다.

관문에서 멀어지자 곧장 차가운 바람이 휙 불었다. 수호신의 축복이 없는 땅으로 나온 것이다.

당장이라도 피부에 서리가 맺힐 것 같은 맹추위였다.

‘방금 전까진 봄 날씨였는데…….’

수호신의 힘을 절절히 느끼며 투이나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자 어느 순간 공기가 다시 따듯해졌다.

다른 수호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 사이로 아이는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살구나무가 빽빽한 과수원이다.

“헬가 언니!”

새처럼 작은 소리로 부르던 아이의 목청이 곧 커졌다.

“언니! 어디 있어!”

“아무도 안 보입니다.”

스카차가 중얼거렸다.

호루니가 무사제를 이끌고 주변을 확인했지만 과수원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그때 라카인이 바닥에 쌓여 있던 꽃잎을 지익 발끝으로 치웠다.

“핏자국이 있군요.”

반신반의하던 시종들이 단숨에 굳어졌다.

라카인이 재빠르게 일어났다.

그의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나무 사이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어디서 나온 거지?’

투이나가 겁에 질린 아이를 단단히 안았다.

흰 머리를 뒤로 넘긴 노파와 활을 든 인간이 대여섯쯤 되었다.

노인의 목에 걸린 비취빛 목걸이를 알아본 투이나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르세라의 장을 뵙습니다.”

수호신 아르세라를 섬기는 수장, 바옷이었다.

“……아르힘의 딸이 여기서 무얼 하는 게지.”

“억울한 죽음을 들었습니다.”

바옷의 입술에 길게 패인 주름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들은 아르힘의 자식이 아닐 터인데.”

눈치 빠른 시종들이 퍼뜩 눈을 굴렸다.

시선을 받은 아이가 움츠러들었다.

‘난민이었구나.’

전쟁을 피해 아르힘으로 피난을 오는 자들은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는 피난민을 꺼렸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해서 수호신이 사라졌더라도 피난민들이 다시 모여 믿음을 유지하면 사라진 수호신이 돌아와 원래 있던 수호신을 밀어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학살당하거나 개종을 요구 당했다.

다만 아르힘은 워낙 백성들의 신앙심도 강하고 수호신의 힘 자체도 막강하여 밀려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 아르힘에서는 사라진 신을 믿는 자를 곱게 보지 않았다.

투이나의 옷깃을 생명줄처럼 잡고 있던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투이나가 가만히 아이의 뒤통수를 쓸었다.

“아르힘 님의 품을 찾아온 이들입니다. 신을 잃었다고 하여 무참히 살해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유가 없단 말이냐?”

탁한 녹색의 눈동자가 주름 안으로 깊게 파묻혔다.

분명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뒤쪽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가지를 보십시오.”

그들도 투이나를 알아보았는지 말투가 공손했다.

“사흘 동안 공물을 올려 막 틔워낸 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앙상해지더니 나뭇가지까지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눈이 힐난하듯이 아이를 향했다.

“꽃을 꺾는 일이 과실까지 해치는 일을 몰랐을 리가 없을 터. 나무를 상하게 한 만큼 돌려주었을 뿐입니다.”

“나무는 안 죽었잖아요! 왜 사람은 죽이는데요!”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주름진 볼은 절벽처럼 꿈쩍하지도 않았다.

수장의 불쾌함을 감지한 남자가 얼른 대꾸했다.

“죽인 적 없다. 활에 맞아 쓰러진 이들을 데려간 것이다.”

“데려가서 어쩔 건데요! 다시 죽여서 바쳐 버리게요?”

그때까지 잠잠하던 바옷이 딱 부러지는 소리로 말했다.

“우린 아르파가 아니다.”

공기에 밀려나듯이 아이의 목소리가 쑥 목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아르세라께서 산 제물을 받는다는 얘기를 누가 하더냐?”

“…….”

“아르힘의 딸이여.”

바옷이 투이나에게 말했다.

“그대가 신을 잃은 자들을 품겠다면 나도 이번 일을 그대에게 물으면 되겠는가?”

투이나는 당장 뺨에 찔리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봤자 난민.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이라는 항의가 들리지 않아도 귀에 선했다.

하지만 투이나는 시종들의 암묵적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꽃만 꺾어 갔나요?”

“예.”

투이나의 질문에 자신들을 믿지 못하는 거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더해졌다.

바깥에서는 몰라도 과수원의 안쪽으로 갈수록 차이가 선명했다.

가지가 휘청거릴 만큼 빽빽한 꽃은 누가 한 움큼 집어간 듯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바닥에도 소란 속에서 꺾인 가지가 밟힐 정도였다.

‘아르세라 사람들이 화가 날 만해.’

투이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그리고 난민들이 굳이 아르힘 밖으로 나가 꽃을 꺾어 온 이유도 이해했다.

그녀가 아이를 품에서 떼어내자 작은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대로 버려질 거란 공포로 질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투이나는 아이를 넘겨 버리려는 게 아니었다.

똑바로 바옷과 대면하기 위해서였다.

“물으십시오. 저 또한 이 일에 책임을 느낍니다.”

“동정심이라도 들었느냐.”

눈치를 보다가 투이나의 다리 뒤로 돌아가 숨는 아이를 보며 바옷이 말했다.

바옷이 위아래로 투이나를 훑었다.

“태양을 섬긴다고 누구나 태양이 되는 법이 아니거늘! 아르세라에서도 이미 그대의 이야기를 안다.”

투이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재로서는 그녀가 루가가 된 게 고작해야 1년이다.

갑자기 나타나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고 추앙받는 자를 누가 인정해 주겠는가.

나라 안에서도 이미 그것 때문에 말이 많은데 나라 밖이라고 다를까.

오히려 사실을 들키고도 짧게 화만 내고 수긍해 준 샨의 반응이 더 뜻밖일 정도였다.

바옷의 입이 냉정하게 내뱉었다.

“이미 그대의 결혼도 준비하는 마당에 잠깐 머물다 가는 자리를 억지로 쓸고 닦을 필요 없다.”

괜히 책임감 느끼는 척하지 말고 돌아가라는 비아냥이 옆구리를 아프게 비틀었다.

그녀의 뱃속에서 무언가 꿈틀했다.

“……잠깐 있을 자리라고 일에 소홀한 자라면 정말로 자격이 없겠죠.”

투이나의 대답에 바옷의 눈이 미미하게 휘어졌다.

“편하게 해 주려고 했더니 아니 되겠구나.”

바옷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그러쥐었다.

“루가여, 그렇다면 그대가 내가 잡아간 자들을 대신해 보라.”

신전이 무조건 피난민을 돕는 건 아니었다.

아르힘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갑자기 종교를 바꾸는 일은 드물었다.

다만 가끔씩 어차피 섬기던 신이 사라졌으니 다른 신을 믿지 못할 것도 없다며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바꾸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래서 신전은 꾸준히 피난민을 도왔다.

대신 아무 대가도 없이 하지는 않고 반드시 이유를 붙였다.

신전에서 공사가 필요하거나 축제라서 특별히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구호품을 받으려면 약간이라도 일을 하거나 다른 물건으로 교환해 가야만 했다.

이번에 피난민에게서 받으려고 했던 건 축제 때 쓸 꽃이었다.

‘정말로 쓰일 건 아니었어.’

행사 때 쓸 꽃은 탐스럽고 커야 해서 실제로 쓰는 건 다른 나라에서 사 온 것뿐이다.

피난민들이 가져온 꽃은 복도에 꽂아 줄 수준도 못 됐다.

‘하지만 도와줄 수 있는 명분만 된다면 괜찮다고 여겼는데…….’

투이나가 마구잡이로 뜯긴 가지를 보았다.

꽃을 가져다주면 먹을 것과 잠자리가 나온다. 당장 살 곳도 없는 자들은 필사적으로 긁어모았을 것이다.

투이나도 잘 알았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꼬박 기다려도 아무것도 받지 못할 때.

결국 푼돈이라도 주는 일을 하러 가려고 줄 선 자리에 젖먹이를 데려다 놓을 때.

사방으로 흩어진 가족이 모여서 가진 걸 풀어 놓아도 딱 한 끼의 식사도 되지 못할 때.

투이나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기억을 막지 못했다.

‘알고 있어.’

삶은 언제나 많이 필요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먹을 입이 늘어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식을 늘렸다.

조금만 키워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되면 자기가 먹는 것보다 더 많이 버니까.

산 입에 거미줄 안 치려고 사방으로 거미줄을 쳐 놓으면 적어도 이슬보다 많이 먹게 되기는 하였다.

투이나는 어머니가 먼저 낳아 놓은 형제자매가 직장을 구하기 직전에 태어나 가난의 마지막 고비를 넘길 시기에 자랐다.

그녀의 첫 기억은 부모의 얼굴이 아니라 곶감처럼 사람들 틈에 끼어 있던 장면이다.

말똥말똥하게 눈을 뜬 아이는 앞사람의 등과 뒷사람의 머리통 덕분에 차가운 바람도 느끼지 못했다.

꽁꽁 싸매어 놓은 몸으로 가만히 서 있으면 뒷사람이 앞사람을 따라가라고 슬쩍 밀었다. 그럼 쫓아갔다.

마치 술래를 정하지 않고 노는 꼬리잡기 같았다.

꼬리잡기가 끝나면 그제야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한없이 물에 가까운 음식이라도 어쨌든 아르힘에선 반드시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투이나는 피난민들도 최소한 그만큼의 평화로움을 갖기를 바랐을 뿐이다.

“허나 그들의 간절함이 지나쳐 여기까지 올 줄은 미처 감안하지 못했어요.”

투이나는 과거를 생략하고 짧게 정리한 설명을 전달했다.

“피난민들이 여기까지 나와야 할 이유를 외면하지 못했으니 그들을 대신하여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요지는.”

바옷이 톡톡 지팡이 윗부분을 집게로 두드렸다.

“충분히 알았다. 다시는 그들이 여기까지 내려오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

짧은 대답에 아이의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왔다.

그녀의 종아리 부근을 움켜쥔 손에 꽉 주름이 졌다.

‘더 이상 피난민을 돕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거구나.’

투이나는 아이를 두 번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확신을 주듯이 강하게 덧붙였다.

“다시는 여기까지 오지 않도록 고치겠습니다.”

“끝까지 손을 떼겠단 말은 안 하는구나.”

바옷이 동굴 바닥에도 구멍을 뚫어버릴 숨소리를 섞어 말했다.

주름 때문에 확신할 순 없지만 약간 웃음 같기도 했다.

“아르힘이 그토록 부유하다면 이번 일의 값을 따로 받아야겠군.”

“약간이라면 조정할게요.”

투이나가 미묘한 소리로 대답했다.

돈이 얽히면 의회에서 까이지 않을 자신이 별로 없었다.

바옷은 지금까지 실컷 몰아붙인 것만으로 만족했는지 툭 내뱉었다.

“되었다. 이 다음에 살구가 다 익으면 값이나 넉넉히 쳐서 사 가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

쿵.

대답에 만족한 지팡이가 땅을 찔렀다. 노인의 손에서 났다고는 믿기지 않을 힘이었다.

그 소리에 땅이 갈라지더니 땅 밑에 있던 피난민들이 보였다.

“꺅!”

“언니!”

새된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땅이 갈라지며 나타난 구덩이에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얽혀 있었다.

투이나의 다리를 잡고 있던 아이가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혹시라도 떨어질까 봐 기겁한 무사제가 따라갔다.

바옷은 냉정한 눈으로 한마디 했다.

“저들은 치료하지 말게.”

바옷의 눈은 더없이 고요했다.

“스스로 낫도록 둬. 아르힘의 힘은 잘 알고 있지만, 저들이 이제부터 아르힘을 믿겠다 간청해도 들어주지 말게. 루가에게 받을 값은 받았으나 저들에게는 따로 셈을 해야지.”

“……알겠습니다.”

바옷이 굽은 등에 뒷짐을 졌다. 탁한 눈동자가 허공을 보았다.

“축제 잘하시게.”

묘한 인사말을 남긴 바옷 일행이 느릿느릿 멀어졌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에 굳어 있던 사람들은 땅속에서 울리는 신음에 허겁지겁 구출하러 내려갔다.

다행히 목숨에 심각한 지장이 있을 만큼 다친 사람은 없었다.

“생각보다 많군요.”

“아르힘으로 다 데리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사제들의 말에 흙으로 엉망이 된 남자가 다친 어깨를 붙들었다.

“여, 여기서만 나가게 해 주면 기어서라도 가겠습니다.”

투이나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들을 구출했다.

구덩이 끝에 매달려 하나씩 끌어올려지는 사람을 볼 때마다 울먹거리던 아이는 찾던 사람을 발견하고서 기어이 서러움을 터트렸다.

“어, 언니!”

“헤스?”

옆구리를 누르고 올라온 여자가 와락 달려드는 아이를 껴안았다.

흙이 낀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너 무사했구나!”

“응! 언니가 알려 준 대로 진짜 다른 데 안 보고 뛰었어! 진짜 도와줄 사람이 바로 있었어!”

“뭐?”

어리둥절해진 그녀가 뒤에서 물끄러미 자신들을 보고 있던 투이나를 알아차렸다.

땅 속에 있을 때보다 더 사색이 된 그녀가 부상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덥석 엎드렸다.

“루, 루가 님? 죄, 죄, 죄송합니다!”

“일어나세요. 다치셨잖아요.”

“아닙니다! 미천한 목, 목숨으로 감히 아르힘의 루가에게 심, 심려를 끼쳐 드렸으니 이대로 죽어도 할 말이 없사옵니다.”

투이나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야?’

“그러지 말고 일어나세요. 지체하면 더 곤란해요.”

“하, 하지만…….”

“절 여기까지 데려온 아이까지 처벌해 달라고 할 생각은 아니죠?”

멍하니 눈을 꿈벅거리던 여자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요.”

투이나가 안심시켜 주듯 웃어 보였다. 대답처럼 아이가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활을 맞고 땅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시체처럼 피부가 차가웠다.

투이나는 조바심을 내며 그들을 이끌었다.

‘여기서 서쪽 관문까지 거리가 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투이나 일행이 사람들을 부축해 서쪽 문으로 돌아가자 이미 소문이 났는지 나갈 때보다 인파가 모여 있었다.

“루가 님!”

문을 연 무사제가 긴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나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신전에 전갈을 보내 뒀습니다. 곧 사제들이 올 겁니다.”

‘사제님들이 와도 치료는 못 해. 바옷과 한 약속이 있잖아.’

투이나는 초조하게 부상자들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차선책을 생각해냈다.

“저 사람들을 광장으로 옮기고 상처만 잘 막아 주세요. 절대로 사제님들이 치료하면 안 됩니다.”

“예? 하지만 이미 사제들은 불렀는데요.”

“네, 잘하셨어요. 그분들도 필요해요. 오면 곧장 제게 보내 주세요.”

“어딜 가실 겁니까?”

나갈 때도 들었던 질문을 다시 받은 투이나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피난민 구호소요.”

신전으로 통하는 출입구는 많았다.

북쪽 광장과 연결된 자잘한 계단이 언덕처럼 넓게 뻗어 있었다.

계단의 낮은 경사면 옆에 그늘진 곳에 문이 하나 있었는데, 문가에 선 사제가 시큰둥하게 파리를 쫓고 있었다.

광장 두 개를 가로질러 온 투이나가 익숙한 신전의 벽으로 다가갔다.

“여기가 구호소 맞죠?”

“예, 그런데요…….”

대충 대답하던 사제가 물어본 사람을 쳐다보고는 뒤늦게 쿠당탕 팔을 휘저었다.

“루, 루가 님!”

가만히 자기를 응시하는 투이나와 그를 노려보는 세 명의 험악한 호위를 맞닥뜨린 사제는 얼마나 놀랐는지 날아다니던 파리를 삼킬 지경이었다.

“여,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이것저것 확인 좀 해 보려고요.”

투이나가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사제는 그걸 창고가 아니라 자기를 털어버린다는 소리로 오해했다.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며 그가 벽을 짚었다.

“물론……. 예. 마음껏 보셔도 문제 될 게 없지요.”

투이나가 구호소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구호소지 거의 창고나 다름없었다.

가끔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침상이 두어 개 있었고, 적당히 쌓아 둔 잡꽃 무더기와 차곡차곡 정리된 구호품이 자루로 나뉘어 담겨 있었다.

“구호품은 이게 전부인가요?”

“아닙니다, 루가 님. 본관 창고까지 들어가면 훨씬 많습니다.”

“신전에서 쓰는 물건도 같이 보관하고요?”

“예, 예. 같이 있습니다. 아주 넉넉한 건 아니지만 축제 기념으로 크로퍼드가 새로 물자를 보내 준다고 약속해서요. 적당히 구호품으로 돌렸죠.”

“알겠어요.”

투이나가 하나씩 열어 보던 자루를 다시 묶었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라카인이 몹시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날리는 먼지를 손으로 휙휙 막아내고 있었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한 투이나가 간신히 침착하게 지시했다.

“본관에 남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 주세요. 창고에 남은 물건을 좀 가져와야겠어요. 아, 회계 담당이신 분도 꼭 챙기시고요.”

“예에……. 예?”

그리하여 뒤늦게 투이나를 쫓아온 사제들은 도착하자마자 투이나 대신 짐꾼들부터 봐야 했다.

“비켜나 봐!”

“머리 조심해!”

“끄응.”

“이게 무슨 난리가…….”

벙 쪄 있던 사제들이 용케 북적거리는 짐꾼들 사이에서 투이나를 발견했다.

“루가 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왔어요?”

커다란 자루를 하나씩 풀어 물건을 나누고 있던 투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뿐 아니라 호위들도 일손을 돕고 있었는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사제들이 질겁해서 밑단을 걷어붙이고 창고로 들어왔다.

“루가 님이 피난민들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는데……!”

“네. 그래서 미리 새 소식도 준비했어요.”

투이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었다.

그녀가 연극이라도 소개하는 사회자처럼 자루들 위로 팔을 뻗었다.

“이제 피난민들에게 구호품을 교환해 주는 일을 그만두려고요.”

“진심이십니까?”

“아닐 이유가 없죠.”

호루니가 나서서 사제들에게 아르세라에서 있었던 일을 전달했다.

설명을 들은 사제들은 잔뜩 찌푸리긴 했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걱정하시는 이유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아르세라 때문에 구호를 접는다고 하면 영 소문이 좋지 않을 텐데요.”

“접는다뇨?”

투이나가 반문했다.

“지금 물건을 옮기는 걸 보았으니 이해하신 줄 알았는데요.”

“접기 전에 남은 물건 다 터는 거 아니십니까?”

사제가 짤랑거리며 경망스럽게 손을 위아래로 털어댔다.

“돕는 건 계속할 거예요. 방법만 바꿀 겁니다.”

“예에?”

“아무리 그래도 무작정 난민들에게 퍼 줄 순 없습니다. 그런다고 그자들이 다 개종하는 것도 아니고요.”

“음, 그거 말인데, 제가 겪었던 일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사제들 중에 투이나가 가난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신전이 적극적으로 써먹는 주제였으니까.

‘지금까지 잘 써먹었으면 내가 쓸 때도 됐어.’

“어차피 이대로는 큰 효과도 없으니 도와줄 거라면 보다 제대로 하는 게 좋죠.”

“짧고 굵게 말씀이시군요!”

사제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아무리 인간미로 퉁 쳐 보려고 해도 너무 경박한지라 다른 자들이 헛기침을 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요.”

투이나가 계획을 설명하자 사제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접고 주저앉았다.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그걸 계속하려면 의회에서 분명히 반대가 들어올 텐데요.”

“자칫하다간 또 선을 넘었다고 꼬투리를 잡을 겁니다. 대놓고 말한 적은 없어도 계속 정치에서 물러나라고 옆구리를 때리는 작자들 아닙니까.”

“누구 덕에 먹고사는 줄도 모르고.”

“괜찮아요. 다음에도 그냥 제 핑계를 대세요.”

투이나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맞는걸요.”

“누가 감히 루가 님을 비난할 수 있겠어요?”

호루니가 열심히 편을 들었다.

“하긴 의장이 그 꼴이 났는데.”

사제들이 수군거렸다.

투이나를 사치스럽다 비난했다가 화상을 입은 의장은 아직도 상처가 다 낫지 않았다고 한다.

‘그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투이나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녀는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이 반가웠다. 자신의 의견이 곧 신의 뜻이라고 여겨질 지경은 아니었으니까.

루가가 된 후로 투이나는 신의 뜻을 오해하거나 잘못 전달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루가가 아르힘의 왕이라는 오해를 굳이 정정하고 다니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모든 일을 신의 뜻으로 엮을수록 자기 자신이나 신을 더 이해할 수 없어질 뿐이다.

“아무튼 사제님들만 찬성하시면 바로 진행할게요.”

“알겠습니다.”

“루가 님의 뜻이니 뭐……. 진행하셔야죠.”

어영부영 허락이 떨어졌다.

싱긋 웃으며 마지막 자루를 묶은 투이나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는 김에 한쪽으로 밀어 놨던 잡꽃 무더기도 집어 들었다.

이미 바짝 마르거나 가지가 꺾인 들꽃을 탁탁 모아 잡은 투이나가 창고 밖으로 나왔다.

“분부하신 대로 난민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무사제 하나가 보고했다.

투이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전에 잠깐 차림새를 점검했다.

기껏 온몸에 분칠까지 해 가며 얼룩을 지웠는데 다시 얼룩을 묻히고 나가긴 이상하니까.

라카인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수건을 공손히 내밀었다.

분명히 계속 옆에서 같이 물품 정리를 하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준비했는지 신묘했다.

“고마워요.”

투이나가 놀란 듯이 받아 들자 라카인은 작은 주전자로 수건에 물까지 적셔 주었다.

그녀는 분칠이 다 벗겨지지 않도록 살살 얼룩을 닦아냈다.

매일 얼룩을 덮기만 했지 지워 보기는 처음이라 신선했다.

투이나가 호루니에게 얼굴을 보였다.

“안 보이죠?”

“예.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깨끗합니다.”

호루니가 열렬히 답했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투이나가 사람들에게 나아갔다. 대부분 갑자기 루가를 보게 되어 얼이 빠진 상태였다.

투이나는 무심코 헬가와 헤스를 눈으로 찾았다.

‘안 보이네……. 아직 치료받는 중인가 봐.’

투이나가 차분히 목청을 틔웠다.

“모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시선을 모았다.

“어려운 길이었을 테죠. 쫓겨나온 처지도 서러운데 환영받지 못하는 땅을 몇 번이나 밟아야 했을 겁니다.”

연설과 비슷했지만 투이나의 차림새는 성스럽다거나 위엄이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먼지로 더러워진 옷에 볼품없는 들꽃을 한 줌 쥐고 있는 모습이 난민에 가까웠다.

주위를 둘러싼 호위와 사제들이 아니었다면 난민들은 누구를 주목해야 할지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도 쉬지 못한 다리로 여기까지 찾아오신 이유를 제가 감히 드릴 수 있을까요. 분명 아무도 그리할 수 없겠죠.”

투이나가 진심을 다해 말했다.

“다만 답을 얻을 때까지 베풀고 기다리는 일은 신의 뜻을 따르는 자로서 돌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숨을 한번 골랐다.

듣고 있는 자들의 눈에 희미한 희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투이나가 자신들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이.

“이제부터 구호품을 나눠 주는 일을 제한하겠습니다.”

파삭.

기대가 뻗어 가던 눈동자에서 한순간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순식간에 원망으로 바뀌는 분위기에 무사제들이 긴장했다.

투이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신전이 요구한 물건을 가져오면 구호품을 나눠 드렸습니다. 하지만 제한 없는 배분이 과욕을 낳았고, 다른 수단을 추구하는 길을 줄였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이미 아르세라의 일이 소문이 났는지 곤궁한 얼굴에 조금씩 분노가 퍼졌다.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우린 정말 죽으라는 말인가?”

“전부 다 서문 밖으로 나갔던 그자들 때문이야!”

“우린 이제 어떻게 하죠?”

같은 난민이라고 모두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그들끼리 싸움이 날 것 같았다.

“그분들을 탓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여기까지 나올 정도로 상태가 나은 분들이잖아요.”

투이나가 소리쳤다.

웅성거림이 조금 작아졌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구호품을 여러 번 타 간 사람도 있을 테고, 자신을 위해서 거짓으로 타 간 사람도 있을 거예요.”

“…….”

“이해해요. 그래서 꽃이 많이 필요했겠죠. 어차피 딱 한 번의 구호품으로는 모자라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소란이 멎었다. 투이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최소한의 물건일 뿐이에요. 경쟁해서 뺏어야 할 물건이 아니라 자리를 잡기 전까지 절박해지지 말라고 드리는 물건이란 말입니다.”

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챙겨 주는 존재던가.

“어렵게 수도까지 오신 분들은 분명 더 나은 기회를 바랐을 거예요. 아르힘 님이 함께하는 곳이니 어찌 축복이 없겠습니까.”

투이나가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경쟁한다고 기회가 늘어나진 않아요.”

조용해진 사람들에게 투이나가 나머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아르힘에 온 피난민들에게는 사흘 동안의 구호품을 드리겠습니다. 단! 나이 든 자, 병든 자, 어린 자라면 계속 지원을 끊지 않을 거예요.”

다친 자에게 사제를, 어린 자에게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여유를, 나이 든 자에게 안식을.

아르힘을 믿는 자들은 대부분 이 세 가지가 모두 가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투이나가 고개를 숙였다.

“싸우느라 낭비될 힘을 싸울 힘도 없는 자에게 돌리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거면 정말 충분해.’

투이나는 선언이 끝난 순간 아르힘이 강하게 그리워졌다.

‘아르힘 님, 제가 조금이라도 당신의 뜻을 이해하였나요?’

아르힘은 그녀가 마음으로 보낸 기도에 답했다.

“저, 저걸 봐!”

사람들 중 한 명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수십 개의 붉은 혜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땅으로 떨어지는 게 아닐지라도 갑자기 나타나 길게 빛을 남기며 움직이는 혜성의 모습은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광장에 서 있던 자들이 우르르 엎드렸다.

“세상에!”

“이런 신이 있다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희를 지켜 주세요!”

순식간에 호의적으로 바뀐 사람들은 본 호루니가 화색이 되었다.

루가는 어쩌면 이다지도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설득력을 지녔는지 매번 놀랄 정도였다.

그녀는 단지 신에게 선택받은 운 좋은 여자가 아니었다.

호루니는 집에 돌아가면 당장이라도 헛소문을 때려잡으리라 다짐하며 투이나를 돌아보았다.

투이나는 기쁘기보다는 안도와 형언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겹친 눈으로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

“잘 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총정리한 사제가 결론을 내렸다.

투이나가 약속했던 대로 사흘 치의 구호품을 모조리 나눠 주고 지원을 이어 나갈 수 있는지 계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앉아 있던 투이나가 그제야 잔뜩 솟아 있던 어깨를 내렸다.

“모자라진 않겠죠?”

“저질러 놓고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잠깐 불퉁하게 대꾸했던 사제가 곧 자리를 깨닫고 얼른 말을 골랐다.

“아르힘 님이 적절하게 도와주신 덕분에 의회에서도 별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금전적으로 따져 봐도 손해가 아니에요.”

사제가 숫자를 휘갈겨 놓은 판을 내려놓았다.

“이유가 좋았습니다. 사람들도 적당히 감동하고, 신전이 계속 지원할 만큼 나이 들고 어린 자는 어차피 아르힘에 많이 오지도 못하잖습니까? 지출이 좀 줄겠군요.”

얌전히 듣고 있던 투이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제의 말이 날아와 목구멍에 뚜렷한 멍울을 만들었는데, 정확하게 무엇으로 토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야.’

갑자기 자기가 말했던 모든 말들이 뒤엉켜 버리는 기분이다.

분명히 사제와 투이나, 둘 다 만족한 일인데 왜 꼬여 버린 기분이 드는지.

칭찬의 뜻으로 말했던 사제가 눈썹을 갸웃했다.

“루가 님?”

투이나가 입가를 눌렀다.

“……네. 그럼 이걸로 끝난 거죠?”

“예. 돌아가셔도 됩니다.”

투이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는 것보다 먼저 몸에 발라 놓은 분가루부터 씻고 싶었다.

‘답답해.’

곧장 물속에 양팔을 집어넣은 투이나가 살갗을 빠르게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진한 회색 얼룩이 드러났다.

“천천히 하십시오.”

라카인의 말에 투이나가 흠칫 동작을 멈췄다.

반쯤 씻긴 팔에 드러난 얼룩은 하얗던 옷에 묻은 먼지 자국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똑같이 생겼네.’

장난스레 생각한 투이나가 첨벙 대야로 두 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빨래하다 지친 사람처럼 라카인을 올려다보았다.

“……엉망인 것 같아요.”

라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가 섬기는 주군에게 반박할 뻔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엉망이 아니라고.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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