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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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떤 노래인지 듣고 싶구나.’ 곧이어 노래가 시작되었다.

샨의 적은 피를 쏟으며 죽는다.

아르힘에서 이교도와 불신자들이 신의 현신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샨을 죽기 살기로 피했다.

매일같이 아르힘에 도착하는 여행자의 절반이 피난민, 절반이 상인이다.

그러나 둘 다 샨을 두려워하며 피하려는 건 같았다.

아르파가 강림한 샨을 만나면 반항할 겨를도 없이 저절로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죽으니 도망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간과 심장을 파먹는 아르파의 괴물 왕은 아이들을 겁주는 단골 소재였다.

투이나도 그런 소문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 샨이 청혼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투이나는 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한 번, 나이가 겨우 네 살 차이라는 데 두 번 놀랐다.

비슷한 나이의 소년에게 어떻게 걸어 다니는 재앙이라는 악명이 쌓일 수 있단 말인가.

투이나는 이제 답을 알았다.

본인이 열렬하게 추구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샨의 이야기는 어디서든 들을 수 있습니다.”

거대하게 그녀를 덮은 샨이 입술을 비틀었다.

“내 장난을 호의라 믿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샨이 점점 몸을 기울였다.

“어리석게도 원래 미천한 신분이라 고백해 놓고도.”

그의 배를 따라 철퍽철퍽 어두운 것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위험함을 모르는 척 구는 건 아르힘이 만들어 준 루가의 천성인가?”

투이나는 먹구름을 몰고 온 새파란 달 같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두껍게 자리한 공포가 언제든지 피가 되어 쏟아질 준비를 했다.

그를 올려다보며 언젠가 비슷한 자세로 맞았던 비가 떠올랐다. 그때도 똑같이 비를 맞고 있던 이들도.

여기에서 자리를 피하면 붉은 비가 그들에게까지 흘러갈 것이다.

조용히 투이나의 입이 벌어졌다.

“제가 가진 것을 신이 주셨다면 당신이 시험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이 그러했듯이.”

샨의 눈이 꿈틀했다.

투이나의 눈은 고요했다.

“샨은 확실히 신에게 두려움을 바쳤군요. 하지만 아르힘께서는 제물 없이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

그는 말 그대로 잡아먹을 듯한 눈을 했다.

투이나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피곤했다. 샨이랑 이렇게 힘겨루기를 하는 게 끝나기나 할까.

샨에게 눌려 거의 바닥에 닿기 직전이라 그녀의 한숨은 더욱 길게 흘러나왔다.

그러다 문득 작게 흘러간 숨결에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미하게 샨의 팔이 움찔한 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투이나가 몸을 일으켰다.

“마셔도 더 취하는 사람이 없어 못 마시겠네요.”

그녀가 팔꿈치를 뒤쪽으로 물렸다.

그대로 바닥을 짚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새 천막 안으로 들어온 라카인이 가볍게 투이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그가 덤덤히 물었다.

“많이 드셨습니까?”

“아뇨.”

투이나가 휴, 하고 술 때문에 열이 오른 듯이 입가를 문질렀다.

그녀는 일부러 서늘한 표정을 유지했다.

샨의 밑에 깔려 있는 동안 목 아래로 계속 진득하게 식은땀이 배어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샨이 주는 공포는 뱃속 어딘가에서 부글거렸다.

샨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길로 그들을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투이나를 가두고 있던 팔이 튀어나가기 직전의 짐승처럼 굽어 있었으나 끝끝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멀리 서 있던 시종의 오금마저 떨게 만드는 압박이었으나 투이나는 그저 고개를 꾸벅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날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간간히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자 완전히 그치고 날이 갰다.

오랜만에 하늘에 구름이 없는 걸 보자 계속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휴우…….”

투이나가 체면도 없이 허리를 쭉 폈다. 샨의 거처에서 한참 전에 빠져나온 뒤라 누가 볼 걱정이 없었다.

하도 심장을 조였다 놓는 일이 잦으니 시종들까지 회복력이 좋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신전에 들어갈 때까지 조용했을 텐데 혈색이 좀 돌아왔다.

사제가 책망했다.

“어떻게 저자와 술을 마실 생각을 다 하십니까?”

“혼자 마시면 아깝잖아요.”

아무 말이나 한 투이나가 손부채질을 했다.

‘으음……. 그게 강하긴 했어.’

한발 늦게 찾아온 열기에 투이나가 비틀거렸다.

호루니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짱을 꼈다.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럴까요?”

투이나가 마음 놓고 호루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키가 비슷해서 딱 맞았다.

나른하긴 했지만 생각만큼 취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가 또렷하기만 했다.

샨이 했던 대부분의 위협보다 제일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던 말이 가장 신경 쓰였다.

「싸웠다면서?」

‘베인이랑 나랑…….’

투이나가 웅크리듯 파고들었다.

‘그게 싸운 건가?’

* * *

그녀가 한 짓은 베인의 얼굴에다 물을 뿌린 것과 비슷했다.

더 이상 대화를 못 하겠다는 선언.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베인은 다급하게 꽃과 편지를 보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의 편지를 받은 순간 투이나의 기분은 더 아래로 떨어졌다.

대체 베인이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베인은 아마 자신이 무언가 실수해서 투이나의 심기를 거슬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양심이 찔린 투이나는 그에게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답장을 보냈고, 하루의 침묵이 흐른 후 꽃은 보석으로 바뀌었다.

베인이 보낸 보석과 편지를 본 투이나가 벽에 쾅쾅 머리를 박으려고 해서 식겁한 호루니가 다급히 떼어내어야 할 정도였다.

‘라카인도 이런 기분이었어요?’

그의 마음이 갑자기 너무 이해가 잘됐다.

이렇게 해서라도 제발 이 무안함을 누가 가져가 줬으면 좋겠다.

자신은 미안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데 상대가 더 잘해 주려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보석을 돌려보내면서 투이나는 베인이 이걸 더 참담한 거절로 받아들이면 어떡하나 몹시 걱정스러웠다.

결국 구구절절 당신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만 빼고 작성해야만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오해나 풀고 있으니…….

속이 타서 편지를 쓰는 동안 투이나는 몇 번이나 혀를 깨물었다.

최대한 정갈하게 편지를 완성한 투이나는 직접 정원에 나가 꽃을 엄선했다.

그녀가 어설프게나마 완성된 꽃다발과 편지를 보낸 뒤에야 비로소 베인의 선물 세례가 멈췄다.

대신 그날부터 투이나의 방에 매일매일 다른 꽃이 꽂혀 있게 되었다.

누구의 부탁인지 뻔하지만 투이나는 차마 그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기쁘단 말이야.’

방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반겨 주는 리시안셔스를 보자 속절없이 마음이 풀어졌다.

얌전히 침대에 걸터앉은 투이나가 강아지의 턱을 긁어 주듯 리시안셔스의 꽃받침을 쓰다듬었다.

“얼른 샨이랑 한 내기가 끝나야 할 텐데요.”

“모하세스가 고집을 피우니, 원.”

사제가 혀를 내둘렀다.

가볍게 내걸었던 조건이 이렇게까지 발목을 잡을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무슨 사냥터를 가져오든 샨은 만족하지 못했다.

게다가 투이나가 베인과 싸웠다는 소문이 돈 이후로는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투이나를 불러냈다.

시종이 투덜거렸다.

“이젠 그 야만인이 사냥터라고 가져올 곳도 별로 안 남았습니다.”

“소금 호수에 빠져 죽어 가며 칼질을 할 생각이라면 또 모르죠.”

“루가 님, 어차피 모하세스는 보지도 않는 거, 지도를 그려 주는 짓도 그만두고 그냥 다 들어오라 하세요.”

샨에게 눌려 있던 불만이 이제야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투이나는 그저 허허 웃었다.

“절대로 안 들어줄걸요.”

마법사는 연락 두절에, 상인과는 사이가 소원했다.

샨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적절한 시기에 매일 불러낼 수 있는 방법까지 쥐었으니.

그는 투이나의 일정을 독점했다. 물론 본인의 성질머리로 기껏 만들어낸 기회를 많이 깎아먹긴 했지만.

어차피 샨이 아무리 잘해도 이미 베인을 사랑하는 투이나에게는 부질없는 짓이다.

되살아나기 전에 겪었던 1년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엔 완벽하고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다시 찾아온 1년은 구혼자 셋을 한꺼번에 파헤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전에 이미 했던 일들도 똑같이 또 해야 하잖아!’

투이나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풀썩 쓰러졌다.

의회나 사제들이 가져오는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루가를 본 사람들은 일을 줄여 주는 대신 잔뜩 늘려 주었다.

덕분에 눈 돌아가게 바쁜 나날을 보낸 투이나는 차라리 구혼자가 불러 주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

일이 어찌나 힘든지 끼니마다 왕창 먹는 투이나에게 라카인이 그래도 살이 빠지는 것 같다며 식사량을 늘릴 정도였다.

‘……베인한테만 갈 수 있으면 금방 괜찮아질 텐데.’

투이나가 애꿎은 꽃잎만 만지작거렸다.

그의 얼굴을 보면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할지 몰라 겁이 났다.

게다가 자칫 무슨 실수라도 해서 그와 연인이 되는 미래가 바뀌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투이나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기 전에 예전과 다른 일들은 빨리 해결해 버리는 게 좋겠어.’

당장 크고 급한 일은 두 건이었다.

산양을 조종했을지도 모르는 마법사를 조사하는 건 시드룬과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보류.

내기는 샨이 자기 입으로 싫다고 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사냥터를 찾아내지 못하는 이상 보류.

베인의 오해를 풀고 곧장 연인으로 돌아가는 건…….

「꿈이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아.’

투이나가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귓가에 베인의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다정하게 안았던 그의 팔이, 뺨에 드리운 속눈썹의 간지러운 그늘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그래도 보류해야 해.’

투이나가 꽉꽉 마음을 뭉쳤다.

처음부터 베인과 연인이 되면 도저히 마음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구혼 기간 중후반부엔 구혼자들끼리 모일 행사가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투이나는 팔로 화끈거리는 눈두덩을 눌렀다.

‘참아.’

눈꺼풀 아래로 조금씩 서늘함이 번져 왔다.

잊지 말아 달라는 듯 은근한 꽃향기도 함께했다.

‘참자. 참자…….’

투이나가 눈을 가리고 누워 있자 잠든 줄 알고 라카인이 이불을 들고 다가왔다.

그때 투이나가 벌떡 다시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요.”

무언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낀 투이나가 꽃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카인이 따라서 쳐다보았지만 딱히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투이나는 한참이나 뚫어져라 보더니 급기야 꽃병을 양손으로 힘껏 들어 올렸다.

없다.

갑자기 꽃병을 들어 올린 투이나가 뚫어져라 바닥만 바라보자 시종들이 술렁거렸다.

설마 너무 힘든 나머지 저걸로 누굴 내리칠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고, 간단히 질문을 던지기만 했다.

“혹시 여기 있던 종이 치우셨나요?”

“무슨 종이요?”

“시드룬한테 보내는 제 일정이요.”

“아뇨. 루가 님이 여기도 가져다 놓으신 줄도 몰랐는걸요.”

같이 바닥을 보던 라카인이 물었다.

“찾으셔야 하는 겁니까?”

“아니요.”

투이나가 도로 꽃병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치우지 않았는데 시종들도 모른다면 시드룬이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

‘역시 편지가 있던 자리에 놔두길 잘했다. 그런데…… 일정이 어떻게 됐었지?’

대충 기억하고 있던 일정표의 윗부분을 머릿속으로 더듬어 보던 투이나가 화들짝 일어났다.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어딜 가시게요?”

“그냥 잠깐 산책이요.”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

“네에.”

공식 일정은 아니라 시종들이 그냥 투이나를 배웅했다. 호위들이 따라가니 걱정할 건 없었다.

호위들과 투이나가 복도로 나왔다.

호루니가 물었다.

“산책이면 정원으로 가실 건가요?”

투이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아뇨. 사실 산책은 핑계고 시드룬이 왔을 거 같아서 나왔어요.”

“네? 루가 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마법사가 혹시 루가 님에게 설마 또 마법을 썼나요?”

“그게 아니라…… 시드룬이 일정표를 가져간 것 같아서요.”

“아하.”

두 사람이 친근하게 대화하는 걸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스카차도 끼어들었다.

“루가 님은 마법사가 꺼려지지 않으십니까?”

“음……. 아니라곤 말 못 하죠.”

하지만 전처럼 무서운 느낌은 아니었다.

시드룬과 했던 악수를 떠올린 투이나가 희망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만나다 보면 점점 친해지지 않겠어요?”

“루가 님.”

친목에는 관심이 없는 라카인이 말했다.

“마법사가 편지를 가져갔다는 건 그자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의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부턴 방 안에도 호위를 서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투이나가 황급히 부정했다.

라카인이 금방이라도 왜냐고 캐물을 것처럼 눈빛을 쏘았다.

‘아앗, 괜히 말했다…….’

마법사가 왔다간 것만으로도 기함할 텐데, 그를 따라 신전 밖을 나갔다는 걸 알면 또 한번 뒤집어질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몇 번 더 가야 할지도 모르는걸.’

아르힘의 전언도 있고, 시드룬이 말한 연구 때문에 마법사의 마을을 가긴 가야 할 것 같았다.

마법사들이 철저히 비밀로 부쳐 달라고 할 만큼 중요한 곳에 호위까지 데려가긴 어려워 보였다.

게다가 호위들이 그 장소를 알아봤자 괜히 해를 입을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마법사들에게 해를 입든, 아니면 마법사를 찾는 자들에게 해를 입든 말이다.

투이나가 말했다.

“마법사와 수호신은 상극이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아르힘께서 지켜보고 계신걸요.”

“하지만…….”

“자! 우린 시드룬부터 찾아봐요! 원래는 오늘 시드룬을 봤어야 하는 날이니 이미 와 있을지도 몰라요.”

투이나가 일부러 말을 돌리자 라카인은 더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투이나 일행은 가벼운 산책처럼 신전을 돌아다녔다. 마주치는 사제들과 간간히 눈인사를 하면서.

원래 시드룬과 만날 때는 응접실을 마련해 그곳에만 나타났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

지금은 아직 시드룬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다.

‘성소로 가진 않았을 텐데. 설마 내 방으로 돌아갔을 때 나타나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시드룬이라도 신전 사람들이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투이나의 협조를 구할 생각이라면 더더욱.

다행히 누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그들이 먼저 시드룬을 발견할 수 있었다.

투이나의 거처에서 멀지 않은 주랑을 지나갈 때 철책에 걸터앉은 그가 보였다.

철책 위에 새에게 앉아 가라고 만들어 놓은 수반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몸을 돌렸다.

“내려와요.”

투이나가 손짓했다.

마법을 써서 내려올 줄 알았는데 그냥 그는 훌쩍 뛰어내렸다. 키가 워낙 크니 뛸 거리도 별로 없긴 했다.

“기다렸습니다.”

그의 손엔 익숙한 종이가 들려 있었다.

일정표를 본 투이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요.”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호위들은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흩어져 경계를 섰다.

“마법을 써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그 때문에 계속 못 오면 어떡하지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시드룬이 멀뚱히 답했다.

“필요하다면 아르힘을 통해서든 다른 마법사를 통해서든 제게 전갈을 보내리라 여겼습니다만, 수리시가 말이 되냐면서 당신의 말을 어기고 신전에 가 보라고 하더군요.”

“그분이 잘하셨네요!”

투이나가 진심으로 말했다.

아르힘을 이용하다니 말도 안 된다.

하마터면 구혼 기간이 끝날 때까지 시드룬을 못 볼 뻔했다.

시드룬이 쥐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지금의 만남을 정해진 일정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지난번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말간 연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예상했던 질문이라 투이나는 후, 하고 호흡을 다잡았다.

“당신을…… 도와줄게요.”

아주 미미하게 시드룬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군요.”

“저는 연구에 대해서 모르는 입장이니 설명이 필요하거나 거부하면 반드시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가 없이 도와줄 생각이었던 투이나가 아르힘의 전언을 떠올렸다.

“그곳에 계신 마법사분들을 만나 보고 싶어요. 들어줄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고민이 무색하게 시드룬은 곧장 수락했다.

“연구를 돕는 대가로 무엇이든 제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큰일 나요, 시드룬.”

막힘없는 수락에 마음이 편해진 투이나가 그제야 농담을 했다.

“남들이 뭘 요구할 줄 알고요?”

“그만한 대가를 치러도 되는 일입니다.”

‘으응?’

너무 담담한 대답에 괜히 투이나가 무서워졌다.

‘나한테 뭘 하려고 저렇게까지 얘기하는 거지?’

설명과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 놔서 천만 다행이라는 다짐이 뇌리를 스쳤다.

역시 마법사는 방심할 수가 없다.

“그럼 앞으로 같은 시간마다 찾아오면 되겠습니까?”

“……네? 연구를 매일 하게요?”

“1년이란 시간은 짧습니다.”

시드룬은 벌써부터 조급하게 굴었다. 지금도 허락만 한다면 마법진을 열고 그녀를 데려갈 기세였다.

“저도 사람이라 피곤해서 매일은 힘들어요. 일도 많고, 행사도 있고, 게다가 아직 샨이랑 한 내기도 남았는걸요.”

“무슨 내기 말입니까?”

‘말해 줘도 되나?’

신전에서 딱히 비밀도 아닌 이야기라 투이나는 시드룬에게도 사냥터를 찾는 내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시드룬이 물었다.

“사냥터라면 무엇이든 잡기만 할 수 있는 넓은 장소를 말하는 겁니까?”

“하지만 강이나 호수는 안 돼요. 샨은 물고기가 아니라 말을 타고 싶어 하더라고요.”

투이나가 약간 미안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그도 신전 밖을 나갈 수 없어서 대리 만족이긴 하지만…….”

아직 초기이지만 좁은 신전에 갇혀있는 샨의 광증이 조금씩이나마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를 겪어 본 투이나만 할 수 있는 짐작이었다.

시드룬은 유리알 같은 눈을 천천히 굴렸다.

“그를 만족시켜 준다면 당신이 덜 피곤하겠습니까?”

“네?”

“꼭 신전에서 나가지 않더라도 사냥터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무슨 수로?’

생각의 꼬리는 빨리 따라왔다.

「마법사와는 다른 계약을 해야만 했다.」

아르힘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시드룬이 자유롭게 신전을 오갈 수 있는 이유는…….’

「마법사의 심장이 신전에 있는 한 그는 떠나지 않았으며, 약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천히 투이나의 턱이 벌어졌다.

“다른 구혼자들의 심장도 빼앗으려구요?”

경악한 투이나가 소리쳤다.

말하고도 본인이 말한 내용에 흠칫해 입을 틀어막았다.

뚫어져라 그녀를 보고 있던 시드룬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심장을 빼앗는다니……. 무슨 소리입니까?”

“신전에 올 때 아르힘 님과…….”

무심코 답하던 투이나의 말끝이 점차 흐려졌다.

시드룬은 정말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조차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문을 낳았다.

‘……시드룬이 한 계약이 지금도 유효한가?’

투이나의 추측으로는 과거 시드룬과 악수했을 때 나타난 거대한 마법진이 아르힘에게 심장을 맡겼다는 증거 같았다.

그 장소에서 마법을 쓸 이유도 없었고, 마법이 나타난 흔적도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되살아난 뒤로 시드룬은 투이나와의 첫 만남에서 그때처럼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가 악수를 거절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신에게 바쳐진 것을 두 번 바칠 수는 없으니까.

투이나가 넋이 나간 채 시드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투이나가 말을 잇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아는 것이 없어서 대화를 멈춘 것이다.

그를 보자 추측은 확신으로 변해 갔다.

‘지금 시드룬은 아르힘 님과 한 약속을 모르는 거야.’

투이나가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마법사와 아르힘의 약속도 밝혀질 수 없는 비밀이다.

투이나도 아르힘이 귀띔을 해 주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시드룬은 여전히 신전과 마법사의 마을을 번갈아 다녀도 멀쩡하잖아.’

그건 마법사와 아르힘과 한 약속이 유효하다는 증거였다.

투이나의 죽기 전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마법사와 아르힘의 약속도 수호신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투이나는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시드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장을 걸고 아르힘과 약속한 꼴이 된다.

신은 과거와 미래를 꿰뚫는 존재.

투이나가 되살아난 바람에 수호신을 통해 있던 계약마저도 꼬여 버린 것이다.

계약을 한 당사자마저 모르는 약속이 되어 버리다니.

투이나가 한참을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이건 다 추측이야. 그냥 추측.’

하지만 신빙성이 강한 추측이었다.

투이나는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에 호위들마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경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투이나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헤맸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야.’

“……시드룬.”

“예.”

투이나가 비장한 눈초리로 그에게 부탁했다.

“가슴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시드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대신 투이나만 죽을 것처럼 부끄러웠다.

‘차라리 파렴치한이라고 소리라도 질러 줘요…….’

본인 입으로 말해 놓고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려면 별수 있나.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손이 아니라 귀를 가져다 대면 오히려 끌어안기는 모양새라 더 안 좋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투이나의 자학도 커졌다.

‘그냥 농담이었다고 하면……. 더 쓰레기잖아.’

고통스러운 나머지 투이나가 잘못했다고 소리치려는 순간 시드룬이 머리카락을 걷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시드룬이 얌전히 가슴팍을 드러냈다.

그나마 그가 무덤덤하게 반응해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시드룬이 시간차 공격을 날렸다.

“다른 곳은 만지면 안 됩니다.”

으아악!

“고, 고마워요.”

투이나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떨구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녀가 직접 시드룬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지켜보던 호위들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투이나는 가만히 심장이 있을 만한 부근을 눌렀다. 생각보다 시드룬이 입은 옷이 두꺼웠다.

손바닥에서 작게 두근두근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게 시드룬의 심장 박동인지 자신의 소리인지 헷갈렸다.

투이나가 시드룬을 짚은 채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하지만 긴장해서 그녀 자신의 심장이 더욱 쿵쾅거리는 바람에 시드룬의 심장이 있는지 파악이 어려웠다.

‘가슴을 만져 본 적이 있어야 구분을 하지.’

라카인은 손목만 잡고도 심장이 뛰는 지 알아내던데.

이 순간만큼은 배우고 싶은 재주였다.

“……잠깐만요.”

투이나가 울고 싶은 심정으로 살며시 손바닥을 뗐다.

시드룬은 얌전히 그 자세로 기다렸다.

잠시 호위들을 돌아본 투이나가 난감한 상태로 굳었다.

‘비교해 봤으면 좋겠는데…….’

이미 투이나가 시드룬에게 한 짓을 본 호위들의 뺨이 발그스름했다.

투이나는 정말 창피해서 땅 끝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스카차랑 호루니는 안 돼. 나보다 어린 사람들한테 그런 짓을 어떻게 해.’

솔직히 지금 한 일도 못 할 짓이긴 하다.

투이나가 울며 겨자 먹기로 라카인을 불렀다.

“라카인, 잠깐만 와 줄래요?”

라카인은 바로 왔다.

그가 호위들 중에서 유일하게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낱같은 위안을 받으며 그녀가 빠르게 속삭였다.

“가슴 좀…… 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즉답이다.

투이나가 반쯤 해탈한 채로 그를 눌렀다.

“미안해요.”

손이 닿자마자 곧장 쿵쿵쿵 하고 불규칙적인 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놀란 투이나가 빠르게 손을 뗐다.

‘심장 소리가 원래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 거였어?’

혹시 라카인도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바라봤지만 무덤덤한 표정 그대로였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멀쩡합니다.”

투이나가 시드룬을 돌아보았다.

비교해 보니 확실히 알겠다.

‘시드룬에겐 없는 거야.’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했는데 심장 소리가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투이나가 돌아보자 시드룬이 다시 안 만지냐는 듯 쳐다봐서 투이나가 황급히 손을 털었다.

“이제 충분해요.”

투이나가 화끈거리는 볼을 손등으로 눌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드룬을 보자 머리가 복잡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은 알았으나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르힘도 말해 주지 않은 사실을 먼저 말해도 되나? 신께서 시드룬을 모르는 상태로 두었는데?

‘아니면 내가 말할 걸 예상하고 놔두셨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자면 끝이 없다.

게다가 시드룬은 과거에 스스로 아르힘과 약속을 한 당사자였다.

만약 지금 당신의 심장이 아르힘에게 걸려 있다고 해도 ‘아, 그렇군요.’ 하고 넘어갈 가능성도 충분했다.

천천히 식는 이마를 투이나가 몇 번이고 쓸어 넘겼다.

‘그렇다고 이대로 놔둬?’

시드룬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 심장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투이나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도 밝혀야 한다.

살해당했다는 사실도.

고민하던 투이나의 손이 점점 내려갔다.

아직까지 범인은 확신할 수 없었다.

말끄러미 그녀를 보던 시드룬이 물었다.

“이제 끝났습니까?”

“……충분히요.”

투이나가 한 손을 나머지 손으로 꽉 쥐었다.

“실례해서 미안해요. 신전에서 나가지 않고도 사냥터를 갈 수 있다는 말에 놀라서 그만……. 시드룬이 진심인지 확인해 보려고 그랬어요.”

말의 중의성을 아뜩하게 씹어 가며 투이나가 말했다.

“시드룬이야 어딜 가든 괜찮지만 다른 구혼자들은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드룬이 곧장 부정했다.

답지 않게 대답이 빨라서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사냥터만 필요하다면 굳이 세계와 연결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투이나가 헤 입을 벌렸다.

“자세하게 다시 설명해 줄래요?”

“당신이 수리시를 만난 곳은 이 신전과 이어져 있습니다. 같은 차원에 속한 세계를 연결하는 건 왜곡이 커 신전에서 시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와 상관없는 곳에서 사냥터를 찾는다면 얼마든지 열어 둘 수 있습니다.”

“잠깐, 잠깐만요.”

투이나가 방금 들은 말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말고 다른 차원이 또 있다고요?”

시드룬이 멀뚱히 대답했다.

“알고 연구를 돕겠다 한 거 아닙니까?”

하긴 시드룬이 찾는 게 신과 영혼이 사는 차원이었더란다.

거기까지는 납득했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3의 세계를 말하는 시드룬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에 얼마나 더 많은 차원이 있는 거죠?”

“그건 아직 모릅니다. 다 찾지 못했습니다.”

시드룬이 덤덤히 답했다.

그의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니 그나마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되었다.

투이나가 진정하고 물었다.

“……좋아요. 차원 이야기는 그렇다 치지만, 다른 세계라고 신전 바깥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아르힘이 제한한 신전이라는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됩니다. 차원은 층위가 다를 뿐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 생명을 방위로 놓는다면 길을 잃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

“게다가 물질에 의탁한 세계는 드무니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차원을 고정하는 마법은 많이 익숙해서 사고가 날 일도 없습니다.”

멍하니 시드룬의 말을 들으며 투이나는 딱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시드룬이 연구할 때는 저것보다 쉽게 말해야 될 텐데…….’

자칫하다간 신학 공부도 모자라 마법학까지 공부하게 생겼다.

혼미하게 듣고 있던 투이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문제없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증명해 보세요.”

마지막 문장에 시드룬이 무표정하게 불태우던 학구열을 멈췄다.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쌓아 온 시간을 내가 말 몇 마디로 이해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다행히 시드룬은 마법사이니 직접 믿게 해 주세요.”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갈 순 없다.

“이걸 우리 연구의 시작으로 삼는 게 좋지 않겠어요?”

짐짓 장난스럽게 투이나가 덧붙였다.

“좋습니다.”

투이나의 말에 수긍한 시드룬이 곧장 손을 뻗어 마법진을 그렸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구혼자들은 건물 바깥에 나와 있었다.

특히 샨은 하인들뿐만 아니라 거처에서 기르던 말까지 끌고 나왔다.

사냥터를 찾아냈으니 소원했던 대로 말을 데려오라고 투이나가 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투이나를 기다리는 샨의 눈은 묘한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투이나가 뭘 준비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진 않았으리란 기대가 있어서다.

시끌시끌한 샨의 무리 옆에 베인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이곳에 오자마자 투이나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주변을 향한 흥미를 끊었다.

샨과 베인은 같은 구혼자 입장이었는데도 각자가 서로 관련이 없는 듯 따로 놀았다.

투르르.

곧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투이나가 나타났다.

의외로 인원이 많았다.

말을 끌고 오느라 사제뿐만 아니라 무사제까지 꽤 섞여 있었던 것이다.

“다들 모이셨군요!”

투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베인이 곧장 허리를 숙였으나 샨은 똑같이 손바닥을 한번 까딱했다.

“루가가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을 줄은 몰랐군.”

샨이 비꼬듯이 말했다.

퉁명스럽게 굴어도 사실 기분이 좋다는 걸 알아차린 투이나는 개의치 않았다.

투이나가 어설프게 말의 고삐를 잡고 내려왔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오늘 일정에 다른 분들도 꼭 같이 참여하길 바라서요.”

투이나가 슥 베인을 향해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샨이 있는 자리라 베인에게 오래 시간을 쓸 수가 없었다. 투이나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샨과 저는 누가 먼저 사냥터를 찾는지 내기를 했습니다. 그동안 서로에게 만족할 만한 장소가 나타나지 않아 많은 시간을 허비했죠.”

투이나가 말하는 동안 말들만 꼬리를 털었을 뿐 조용했다. 덕분에 뒤쪽까지 목소리가 잘 전달되었다.

이목이 집중된 투이나가 말을 이었다.

“끝이 미진한 이야기는 시작한 의도를 흐리게 만들 뿐이니, 비록 내기라 할지라도 흥미를 위한 점에서 같으니 이야기의 선례를 따를까 합니다.”

유려하게 설명하던 투이나가 마지막 문장에 이르자 부담스러운 듯이 살짝 어깨를 으쓱하며 무게를 덜었다.

“보상보다 완벽한 결과물을 통해서요.”

그녀의 뒤로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던 시드룬의 등장이었다.

“……!”

“헉!”

가장 거리가 먼 벽과 벽 사이가 보라색 빛으로 이어졌다.

하늘과 땅에 닿을 듯이 거대한 마법진이 천천히 펼쳐졌다.

마법진의 중앙에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시드룬이 완벽하게 공간을 이었다.

마지막 빛의 줄기가 서로 맞닿자 방금 전까지 흙먼지가 날리던 길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정말로 열었단 말인가!”

사람들의 경악이 홍수처럼 휩쓸렸다.

미친 듯이 사제들이 지금 순간을 기록하는 동안 시드룬은 천천히 투이나의 옆으로 내려왔다.

머리 두 개만큼 차이가 나는 한 쌍이 의외로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투이나조차 경이감에 휩싸여 마법진을 올려다보는 동안 시드룬은 딱 한 번의 호흡만 내쉬었을 뿐이다.

마법진 안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투이나를 휘감아 돌았다.

생생한 냄새를 맡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마법진에서 눈을 떼고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곳이 바로 내기의 끝입니다.”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사람들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대,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깃펜 하나를 부러트린 사제가 턱을 떨었다.

지금도 마법진 안에서 쏴아아, 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아까 다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샨과 내기를 끝낸다는 말만 하셨잖습니까!”

“시드룬의 도움을 받는다는 얘기도 했어요.”

투이나가 난감하게 대답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사제들과 짧게 면담했는데 역시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대충’ 이해했던 사제들이 난리를 쳤다.

“아무리 루가 님이라도 지나치십니다! 신전에 이런 마법이라뇨!”

“아르힘 님이 얼마나 노하시겠습니까!”

“의회가 알면 얼마나 난리를……!”

“시끄럽다.”

샨이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그의 번득이는 눈은 마법진 너머의 땅에 고정되었다.

“저게 그대가 찾아낸 답인가?”

“그래요.”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본 샨의 눈이 번득였다.

“말을 끌고 오라고 한 걸 보니 들어가도 좋다는 뜻이군.”

“주의하십시오.”

투이나 대신 시드룬이 말했다.

샨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무슨 뜻이냐, 마법사.”

“이 세계는 당신이 아는 곳이 아닙니다. 너무 멀리까지 가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같잖은 경고는 집어치워라.”

샨이 코웃음을 쳤다.

“저런 숲을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을 거라면 뭐 하러 여기까지 나온단 말이냐?”

“저랑 내기를 끝내려고 온 거죠.”

투이나가 말했다. 그러자 샨이 투이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선후 관계를 명확히 했다.

결국 샨이 피식 웃었다.

“뭐 좋다. 내 직접 확인해 보지.”

그가 적의가 담긴 시선을 딱 한 번 던졌다.

“일은 이루어졌으니 이제 와서 방해하는 건 소용없다. 아르힘의 분노가 아니라 아르파의 분노를 맛보고 싶으면 계속 거기서 걸리적거려 보라.”

그의 경고에 가뜩이나 딱 달라붙어있던 사제들의 입이 아예 돌이 되었다.

샨은 난감해진 투이나를 두고 자기 무리로 돌아갔다. 곧장 말을 탈 준비를 하는 듯했다.

“우려스럽습니다.”

“어떤 부분이요?”

“신전은 넓지만 저들이 말을 달리면 금방 거리가 소진될지도 모릅니다. 마법으로 조정은 하겠지만 가급적이면 서로 멀리 떨어지지 마십시오.”

“따라다니란 말이군요.”

“예.”

그때 높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벌써 말 위에 올라탄 샨에게 고삐를 잡힌 말이 기운차게 몸을 튼 것이다.

그를 따라 하인들도 이미 말에 올라타 있었다.

질서정연한 군대 같았다.

가마에 앉았을 때와 달리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은 듯이 샨이 눈을 빛냈다.

“가자!”

샨은 두려움이라곤 없는 얼굴로 맨 앞에서 말을 달렸다.

땅을 박차는 수십 개의 다리에서 구름처럼 먼지가 피어올랐다.

“피하세요!”

마법진 앞에 서 있던 투이나와 시드룬이 급하게 자리를 옮겼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그들을 비껴나간 샨의 무리가 그대로 마법진을 뛰어넘었다.

흡사 곡예와도 같은 완벽한 이동이었다.

얼이 빠진 채 그들이 숲속으로 멀어져 가는 걸 본 투이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우리도 가요!”

투이나가 가까운 말의 등자를 밟았다.

승마는 거의 문외한이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위태롭게 말에 오른 투이나가 간신히 고삐를 잡았다.

“헉!”

낯선 감각에 아찔해진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주었다.

불행하게도 그걸 출발 신호로 알아들은 말이 곧바로 출발해 버렸다.

“와앗!”

“루가 님!”

혼자 달려가 버리는 투이나를 본 호위들도 급히 말에 올랐다.

단숨에 말에 올라탄 라카인이 바로 그녀를 쫓았다.

‘생각보다 더 출렁거리잖아!’

정신없이 달려가는 말 위에서 혀를 깨물 것 같아서 투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겁을 먹으면 안 돼.’

투이나가 손에 고삐를 감아쥐었다.

일단 승마고 뭐고 떨어지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되겠다.

투이나를 태운 말도 금세 마법진을 통과했다.

투이나까지 마법진으로 들어가 버리자 어영부영하던 사람들까지 하나둘씩 따라가기 시작했다.

바깥에 남아 있던 시드룬이 흘긋 남아 있는 인원을 확인하더니 돌연 사라졌다.

그가 자취를 감추자마자 거대한 마법진은 천천히 닫히며 사라졌다.

“루가 님!”

타닥, 타닥, 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말의 등에 바짝 엎드려 있던 투이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힉! 라카인!”

달리는 말 위에서도 침착하던 투이나의 평정이 흐트러졌다. 라카인이 바짝 옆에서 달리며 양 팔을 그녀에게 내밀고 있던 것이다.

“고삐! 고삐 잡아요!”

“당황하지 마시고 허리를 세우십시오!”

라카인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으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안장 뒤쪽으로 힘을 실을수록 말은 더 빨리 뛰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똑바로 말과 함께 선다는 생각으로 중심을 잡으십시오!”

“중심이요?”

투이나가 힘을 실어서 뛰어나간다는 소리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하체를 살짝 들었다.

하지만 이미 달리고 있던 말의 위에선 역효과라 오히려 몸이 크게 휘청이고 말았다.

“……!”

“아!”

라카인의 표정이 변하며 몸이 기이하게 확 틀어졌다. 조금이라도 다리 힘을 풀면 말에서 떨어질 자세였다.

오로지 하체 힘으로 말에 몸을 고정한 그가 투이나가 떨어질 때에 맞춰 뛰어들려는 찰나였다.

미친 듯이 달려가는 투이나의 위로 시드룬이 나타났다.

“잡으십시오.”

“시드룬?”

투이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시드룬이 내민 팔을 얼른 붙잡았다.

시드룬은 가볍게 투이나를 들어 올렸다.

주인을 잃은 말이 가벼워진 몸으로 달려 나갔다.

라카인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자세를 취한지도 모르고 안전하게 내려오는 투이나와 시드룬만 확인했다.

다시 땅을 디딘 두 발은 후들거렸다.

“어떻게…….”

“바깥의 문은 닫았습니다.”

시드룬이 덤덤하게 말했다.

곧 거친 투레질과 함께 호루니와 스카차가 탄 말도 도착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건 아니죠!”

“전 무사해요.”

다급히 대답한 투이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이 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다행히 라카인은 무사히 속도를 줄여, 기수를 잃고 멈춘 말의 고삐를 잡아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제야 진땀이 쭉 빠졌다.

시드룬은 투이나가 땅에 내려왔을 때부터 관심을 잃고 어느 먼 곳을 계속 응시했다.

“왕의 일행이 멀리 가는군요.”

“가서 말려야죠.”

급하게 말하던 투이나가 기침을 했다.

샨이 갑작스럽게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녀도 무리해서 달릴 필요가 없었다.

시드룬의 마법에 잘못 얽히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겪어 보지 않았나.

‘게다가…… 여기 들어온 사람이 너무 많아.’

투이나가 걱정스레 발돋움을 했다.

빨리 확인하고 내기를 끝낼 생각이었는데, 이미 샨의 일행은 여기서 보이지도 않았다.

시드룬이 천천히 팔을 풀었다.

“따라가겠습니다.”

그제야 투이나는 마법진도 없이 공중에 떠 있던 시드룬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마법이 급성장한 건 아닐 테니.

빠르게 추측을 끝낸 투이나가 물었다.

“이곳은 마법진 안이라 뭐든 당신이 통제할 수 있나요?”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수리시나 우리가 사는 세계랑은 다르게 말이죠?”

“그렇습니다.”

투이나와 시드룬의 대화에 호위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투이나는 안심했다.

“좋아요. 누구도 잃어버리지 마세요.”

“주의하겠습니다.”

스르륵.

시드룬이 샨을 말리러 사라졌다.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몰라 하던 호루니와 스카차가 차례로 말에서 내렸다.

잔뜩 걱정하는 얼굴들이었다.

“갑자기 달려 나가서 놀랐습니다.”

“샨을 따라잡으려다가 그만 아무 말이나 잡아 탔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사과하실 일은 아닌걸요.”

푸르르, 말이 고개를 젓는 소리와 함께 라카인도 돌아왔다.

투이나가 얼른 뒤를 돌았다.

그녀에게도 보일 만큼 흠뻑 땀에 젖은 주제에 표정은 계속 무덤덤한 라카인이 말에서 내렸다.

“괜찮아요?”

“예.”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혼자 다칠 걸 둘이 다치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

라카인은 질책을 달게 받겠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숙이고는 말이 없었다.

투이나도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을 도우려던 걸 알기에 더 뭐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투이나가 근심스럽게 라카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불 안 가리는 건 반드시 고쳐야 해. 저러다 정말로 죽고 말 거야.’

그때 스카차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우리가 마법 안으로 들어오다니…….”

그 말에 투이나도 스카차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남들이 모르는 마법사의 마을도 가 본 적 있지만, 마법으로 찾아낸 완전히 다른 세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햇볕에 가까워질수록 나뭇잎은 살아 있는 나무보다는 보석에 가까운 청록색이었다.

나뭇가지는 꼭대기에 가까울수록 은빛이었으며 땅으로 갈수록 검게 변했다.

우우우…….

어디선가 이름 모를 짐승이 우는 들렸다. 느리고 울림이 큰 소리였다.

“어쩐지 으스스하네요.”

호루니가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질렀다.

투이나도 내심 동의했다.

이 세계는 시드룬의 마법이 만들어내곤 했던 꺼림칙한 신비로움과 비슷했다.

‘시드룬이 다루는 세계라서 그런가?’

이렇게 낯선 공간에서도 구혼자들은 아르힘의 약속대로 신전 밖을 나가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게 가장 신기했다.

투이나는 싸할 만큼 상쾌한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샨은 만족할 때까지 달리게 내버려두고 우린 구경이나 하면서 갈까요? 마법 때문에 위험해지지 않으려면 그를 쫓아가긴 해야 해요.”

“좋아요! 같이 가요, 루가 님.”

“다시 말을 타실 수 있겠습니까?”

“음, 좀 순한 애로 바꾸면요.”

투이나가 민망하게 뺨을 긁었다.

예전에는 그럭저럭 탔는데 기초적인 수준이었기에 대처 능력은 좀 떨어졌다.

한 마리씩 바꿔 타며 확인해 본 결과 스카차가 타고 온 말이 가장 순하다는 게 밝혀졌다.

그와 말을 바꿔 타고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돌자 완전히 옛 감각이 돌아왔다.

“잘 타시네요, 루가 님!”

“이제 적응했어요.”

투이나가 웃으며 고삐를 잡았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디까지 왔나 확인할 셈이었다.

따각따각, 고삐를 돌리던 투이나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다.

은청나무 숲에서 회색 말을 탄 남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어쩐지 그의 금빛 머리가 익숙해 보였다.

반신반의하면서도 투이나의 혀는 저절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베인?”

투이나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거리였건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말머리를 돌려 사라졌다.

“잠깐만요!”

투이나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왜 도망가는 거지? 분명 베인이잖아.’

흔들리는 말을 진정시킨 투이나가 다시 소리쳤다.

“베인!”

그러나 그는 멈추질 않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달리기 시작한 말을 본 투이나가 고삐를 틀어쥐었다.

“쫓아가요.”

“네?”

“베인이 틀림없어요.”

투이나가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달리자 호위들이 서둘러 뒤를 따랐다.

투이나는 아까보다 편안하게 달리는 말에 납작하게 상체를 숙이고 앞서가는 베인의 뒷모습을 쫓았다.

높은 잎가지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달려가는 그들에게 부딪친 맑은 청록 수정 같은 잎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은색으로 부서졌다.

달려가는 발밑에서 으깨진 잎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점점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는 것만 같아 투이나는 몇 번이고 눈앞을 비볐다.

‘숲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한 사람을 네 사람이 쫓아가는 소리는 고요했다.

그런 기이한 분위기에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까지 더해져 투이나는 조바심이 났다.

“속도를 높일게요.”

투이나가 옆에 바짝 붙은 라카인에게 말했다.

그가 뒤쪽으로 신호를 주었다.

갑자기 속도를 높여도 사고는 없었다.

시드룬의 숲은 좀처럼 다리에 걸리는 게 없었다. 모든 게 건드릴 때마다 부서져 나갔다.

투이나가 속도를 올리자 그녀와 호위들 사이로 거리가 벌어졌다.

‘어라?’

달리면서 투이나가 뒤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호위들이 너무 멀었다.

특별히 뛰어난 기수도 아닌 자신이 이렇게까지 선두에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상함을 느낀 투이나가 속도를 줄일 때쯤 앞을 달리던 말도 점차 느려졌다.

천천히 호를 그리며 그가 투이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틀림없이 베인이었다.

말에 탄 베인의 모습은 주변 숲의 어두움과 달리 정결하고 빛나 보였다. 그래서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

투이나는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마주친 베인의 청록색 눈동자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숲과 닮아 있어서 그랬다.

베인은 오래도록 투이나를 응시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첫마디가 시리게 귀를 스쳤다.

그 순간 그녀는 사실 도망쳐야 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하고 잠깐 후회가 됐다.

“……그때 그렇게 나가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계속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는데, 아니……. 다 변명이네요.”

투이나가 천천히 손을 늘어트렸다.

감정이 회오리쳤다.

깊숙이 잠겼던 투이나는 자잘한 말들을 다 놓쳐 버리고 한 문장만 건져 올렸다.

“그냥…… 도망가는 걸 볼 수가 없어서 따라왔어요.”

베인의 상체가 흔들려 보였다.

투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그저 앉아 있는 동안 푸르르 하고 말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베인이 말에서 내리는 소리였다.

한 발씩 등자를 밟으며 내려온 베인이 천천히 고삐를 당겼다.

그는 여전히 부드럽고 자상한 얼굴로 투이나에게 손을 뻗었다.

“더 가지 않겠습니다.”

그가 투이나의 발밑을 받쳤다.

“……루가 님이 말씀하시니 더는 가지 않습니다.”

갈비뼈가 조여들어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투이나는 잠깐이나마 발밑에 닿았던 감촉에 몸을 떨다가 안장을 짚고 일어났다.

“가지 말아요.”

정말로 하고 싶은 말들을 눌러놓아도 진심이 튀어나왔다.

투이나는 훌쩍 안장을 넘어 베인의 품으로 내려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베인이 투이나를 안았다.

아릿한 체취가 훅 끼쳐 왔다.

목 깊은 곳부터 흘러나오는 이건 숲의 마력일까.

그가 말에서 자신을 내려 주는 동안 가슴 속까지 얼얼하게 아파 왔다.

‘그도 나를…….’

베인을 짚은 두 팔이 떨렸다.

그는 이해하는 것처럼 한번 강하게 꼭 그러쥐었다.

첫 번째 손가락이 가만하고도 다정히 피부를 쓰다듬었다.

영원히 그렇게 있고 싶었다.

곧이어 호위들의 말이 우르르 도착했다.

투이나와 베인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떨어졌다.

“루가 님! 먼저 가 버리시면 어떡해요!”

“같이 가기로 하셨잖습니까.”

호루니와 스카차가 아웅다웅 말했다.

라카인은 말을 재촉했는지 도착하고 속도를 줄이느라 몇 번을 더 원을 그렸다.

라카인이 흘긋 베인을 보았다.

구혼자라고 해서 의심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왜 도망친 겁니까.”

“루가 님을 보기 부끄러웠습니다.”

베인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라카인의 눈이 아직 투이나를 짚고 있던 베인의 손으로 향했다.

“지금은 별로 부끄러워 보이지 않습니다만.”

“붙잡혔으니까요.”

베인이 차분히 답했다.

늘 평이하던 라카인의 눈썹이 잠깐 치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더 물을 말이 없는지 라카인이 말했다.

“아까 달릴 때 루가 님도 느끼셨지요.”

“네.”

“아무래도 평범한 숲은 아닌 모양입니다. 루가 님의 말이 아무리 빨라도 이만큼 벌어질 거리가 아닙니다.”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에 있던 위화감을 모르려면 어지간히 둔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대강 이유도 짐작했다.

“시드룬이 계속 이 구역의 거리를 조절한다고 했어요.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

“그렇다면 우리도 떨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찾아야겠군요.”

베인이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푸르릉거리는 말을 붙잡고 있던 스카차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크로퍼드 님은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하셨겠네요.”

“전부는 모릅니다.”

베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하지만 루가 님이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으흠!”

투이나가 헛기침을 했다.

자꾸만 볼이 붉어지려고 했다. 괜스레 마음이 기꺼웠다.

아직 베인에게 털어놓은 말은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투이나의 말이 경쾌함을 띠었다.

“원래 샨과 한 내기였지만 시드룬이 사냥터를 소개해 줬으니 베인도 빠질 수 없잖아요.”

“영광입니다.”

베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어졌다.

아까 그를 둘러쌌던 아득함이 봄바람에 흩어지는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숲의 기이함이 옅어지는 듯했다.

말이 우는 소리와 대화가 섞이자 숲은 더 이상 가시처럼 부서지지 않고 평범하게 보였다.

낯선 풍경을 눈에 담아 둔 투이나가 다시 현실의 문제를 말했다.

“제가 마법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샨과 멀리 있을수록 시드룬의 힘이 약해질 테니,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방향과 반대쪽으로 가면 되겠어요.”

“알겠습니다.”

네 사람에서 다섯 사람으로 늘어난 일행이 다시 말에 올랐다.

혹시 모를 사고를 막기 위해 속도를 높이지는 않기로 했다.

천천히 구보로 걸으며 투이나와 베인은 나란한 거리를 유지했다.

다만 투이나는 점점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베인과 닿으면 닿을수록 그의 호감이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심지어 말로도 충분히 표현한 것만 같다.

그런데도 베인은 샨처럼 서둘러 마음을 확인하려고 들지 않았다.

‘기다려 주는 걸까?’

투이나가 계속 곁눈질하는 걸 알아차린 베인이 가볍게 말했다.

“……사실 루가 님께서 모하세스를 귀이 여기시는 줄 알았습니다.”

다그닥, 다그닥.

몇 발짝을 더 간 뒤에야 귀에 말이 꽂힌 투이나가 기함했다.

“네에?”

“신전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루가 님이 변하셨다고.”

베인이 그저 사실을 말한다는 듯이 나직했다.

‘이게 무슨 오해야!’

투이나가 다급히 정정했다.

“아니에요! 그냥 구혼자분들을 신경 쓰는 것뿐이에요!”

베인은 투이나가 어떤 마음이든 괜찮다는 듯이 미소 지었기에 오히려 그녀가 안달이 났다.

“여러분을 초대한 사람으로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고 싶을 뿐이지 절대 그런 건 아니에요. 아직 만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런 마음을 품겠어요?”

“……그렇습니까?”

자충수를 마구 던진 투이나가 안절부절못했다.

‘어떡하면 믿지?’

시드룬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말하려면 연구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건 비밀이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베인한테 고백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퍼뜩 좋은 생각이 난 투이나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정말이에요. 베인의 일도 신경 쓰느라 이것도 간직하고 다니는걸요.”

“그건…….”

투이나가 내민 손을 본 베인이 가깝게 다가왔다.

투이나의 손에 있는 건 베인의 거처에서 받았던 단추였다.

그도 알아보았는지 약간 흠칫했다.

“계속 가지고 다녔어요. 만나면 돌려드려야지 생각해서……. 떨어졌어도 다시 달 수 있잖아요.”

말하면서도 투이나는 민망했다.

좀 더 근사한 말을 할 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다소 놀랐던 베인의 눈이 찬찬히 가라앉았다.

“……혹시 누이가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걸 어떻게…….”

남매는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통하나 싶어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단추가 떨어졌는지 꼭 물어보라고 하던걸요.”

베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다음에 물어보세요.”

“네?”

베인이 내밀고 있던 투이나의 손을 단추가 떨어지지 않도록 다시 쥐어 줬다.

“간직하셨다가 다음에 둘만 있을 때 다시 물어봐 주십시오.”

베인이 몹시 쑥스러운 걸 감추듯이 속삭였다.

‘무슨 일인데 저렇게 부끄러워하지?’

궁금해서 눈이 휘둥그레진 투이나를 본 베인이 다시 말을 몰아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투이나의 고개는 이미 끄덕여진 뒤였다.

베인은 투이나가 단추를 도로 넣는 걸 본 뒤에야 겨우 차분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다행입니다.”

평정심을 되찾은 베인이 미소 지었다.

“루가 님이 그저 야만인에게 관대하신 것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순간 투이나는 멈칫했다. 베인의 목소리에서 안도로 덮어 둔 날카로운 경계심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겪어 보지 못한 날선 마음이 당혹스러웠다.

‘내가 알던 베인은…….’

다붓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를 부르려던 투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붉은 산은 발 구름 소리에 무너져 내리고, 흙먼지를 마신 이들은 검은 피를 토했다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서 목청을 맞추는 노래였다.

가사를 들은 투이나와 베인이 동시에 시선을 맞췄다.

“샨이에요!”

“가깝습니다.”

그들이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우거진 수풀을 단숨에 뛰어넘자 마치 샨의 거처가 재현된 것처럼 큰 공터와 사람들이 나타났다.

말에서 내려 노래를 부르던 샨의 하인들이 조용해졌다.

유일하게 말을 타고 있던 샨이 갑작스런 침묵에 흘긋 어깨너머로 시선을 넘겼다.

“도착했군.”

투이나를 보고서도 샨의 눈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반대로 바짝 긴장했다.

샨의 말발굽 밑에 짐승이 있었다.

처음 보는 청록색 가죽에 털이 긴 짐승이었다.

사슴과 닭의 중간쯤 되어 보였다.

신이한 동물에 낯설었던 것도 잠시, 꼼짝도 않고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은 투이나가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어떻게 잡았냐고 물어보진 않는군?”

투이나가 쏘아보자 샨이 한 손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아르힘의 신전 밖으로 나올 기회가 생겼으니 아르파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뿐이다.”

샨은 매서운 눈매를 찌푸렸다.

“본디 사냥터의 목적은 이를 위함이 아닌가.”

“샨이 갑갑하게 갇혀만 있는 것 같아서 마음껏 뛰어다니라 사냥터를 찾은 겁니다.”

투이나의 눈이 차가워졌다.

“반드시 사냥이 성취되지 않아도 뛰어 노는 것으로 만족하는 일이다 들었으니까요.”

“그건 실패하는 자들의 말이다.”

샨이 딱 잘라 말했다.

“보았으니 쫓았고, 잡았으니 제사를 올릴 뿐. 낯선 땅이라 해서 내가 겁이라도 내야 하나?”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하다못해 무엇인지 알아보기라도 해야죠. 여긴 낯선 땅이 아닙니까.”

“땅의 이름이 다른들 밟은 자가 같으면 쓸모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샨과 투이나가 다투는 사이 허공에서 시드룬이 나타났다.

움찔한 두 사람이 올려다보자 시드룬이 말했다.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네.”

“아니.”

샨과 투이나가 동시에 다른 대답을 했다.

“이만하면 충분해요.”

“난 아직 안 끝났다.”

“아르파 신에게 올릴 제사가 필요하다면 제가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안 돼요.”

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가 내 신에게 올릴 제사를 생각해 보겠다고?”

아차, 말실수인가.

투이나는 또 사제들과 심층 토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골치가 저려 왔다.

“생각만…… 해 보겠다는 거예요.”

“좋다.”

샨이 눈썹을 까딱했다.

“그래도 저 짐승은 가지고 가고 싶군. 고기 맛이 궁금하단 말이지.”

샨이 한쪽 입가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잡았으면 먹는 게 좋다고 그대 입으로 말했지 않은가?”

할 말이 없어진 투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버리고 가는 것보단 나으니까.’

“주군!”

그때 하인이 무례를 무릅쓰고 소리쳤다.

샨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짐승이 다시 일어나 있던 것이다.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리에서 같은 기시감이 스쳤다.

비가 내리던 날의 산양을 기억해 낸 투이나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긴장이 무색하게도 짐승의 뒤에서 시드룬이 몸을 일으켰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말 머리 옆에 있었는데 언제 이동했는지 모를 일이다.

“이곳의 숲에선 죽일 수 없습니다.”

시드룬이 짐승의 등을 쓸어내리자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낯선 짐승이 깡충거리며 뛰어갔다.

본인과 닮은 수풀 속으로 폭 뛰어 들어간 짐승을 본 샨이 어깨를 내렸다.

“싱겁군.”

짧게 혀를 찬 그가 하인들에게 다시 말에 오를 것을 지시했다.

시드룬이 마법사이니 이번에도 무슨 마법을 썼으리라 짐작했는지 그의 반응은 덤덤했다.

다만 시드룬이 공간을 다룬다는 걸 들었던 투이나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생명을 되살리는 건 신의 힘이 아닌가? 어떻게 시드룬이 저걸…….’

아무래도 그의 연구를 도우면서 제대로 마법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다짐이 강하게 들었다.

시드룬은 일행을 쭉 둘러보더니 잠깐 먼 곳을 보았다.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군요.”

“잠깐, 아직 사제님들이 안 왔어요.”

“곧 도착하게 두었습니다.”

시드룬이 답했다.

또 거리를 조절했는지 잠시 후 히힝거리는 말소리가 한꺼번에 이쪽으로 뛰어들었다.

“우왓!”

“루, 루가 님이다.”

하나, 둘, 셋.

도착하는 말을 눈으로 세던 시드룬이 팔을 들어 올렸다.

모두 도착한 걸 확인하고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신전에서 만들었던 마법진보다는 좀 작았지만, 세상에 구멍을 내듯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모습은 여전히 신비로웠다.

“가시죠, 루가 님.”

“아, 네.”

이번에는 베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익숙한 신전으로 그와 함께 달려가자 이 숲에 온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기에서도 이겼고.

“결과를 인정하시나요?”

모두 신전으로 돌아온 뒤에 투이나가 샨에게 말했다.

샨은 심술궂은 얼굴을 만들긴 했으나 오랜만에 말을 달린 상쾌함까지 지워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좋다. 그대가 이겼다.”

“와아아!”

눈치 없이 사제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기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소리에 샨의 성미가 또 삐딱해졌다.

“하지만 처음 얘기했던 조건대로 찾은 게 아니라 마법사의 도움을 빌린 건 해명을 해 줘야겠는데.”

역시나.

그 부분을 걸고넘어질 줄 알았던 투이나가 가볍게 대답했다.

“거기에 대해선 해명할 게 없군요. 그러니 대가인 소원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투이나가 차분히 답했다.

어차피 내기를 끝내기만 하면 목적이 달성되는 거였다.

샨은 투이나에게서 아쉬움의 흔적도 찾아보지 못하자 위험스레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

샨이 혀를 찼다.

“나는 해명을 듣고 싶단 것이지 승부에 불복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음, 네?”

뜻밖의 말에 투이나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제야 샨이 비죽이며 웃었다.

“내기는 끝났으니 언제든 내게 오라. 그대의 소원을 기다리고 있겠다.”

놀란 투이나의 모습에 비로소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 샨이 말을 몰아 거처로 돌아갔다.

* * *

샨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권리는 생겼지만, 무슨 소원을 빌지 생각할 시간은 나지 않았다.

마지막 겨울비가 그쳤으니 이제 언 땅이 녹고 봄이 올 시간이었다.

봄맞이 축제를 준비해야 할 기간이 다가온 것이다.

구혼자 세 사람에게 모두 일이 끝나면 꼭 찾아가겠노라 약속을 한 투이나는 사냥터 이후로 그들의 코빼기도 다시 보지 못했다.

“루가 님! 이 서류를 빠트리셨어요!”

“사제님이 부르십니다!”

“의회에서 예산 검토를 다시 해 달라고 장부를 돌려보냈습니다!”

“먹으면서 하십시오.”

마지막 말은 죽 그릇을 든 라카인이 한 말이다.

사제들과 뒤엉켜 퀭한 눈으로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투이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고마워요…….”

라카인은 힘없이 몇 숟가락 먹는 투이나를 보고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모시던 왕이었다면 이런 일들은 수하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왕이 모든 재능에 능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이나는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모든 안건에 자신의 의견과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사제들도 그녀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라카인이 보기엔 부조리한 낭비 같았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인 자신이 말 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투이나가 식사를 점점 줄이는 상황만 신경 쓰였다.

“루가 님이 잘 드세요?”

방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호루니가 물었다.

라카인이 고개를 젓자 실망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입맛이 없으신가…….”

“아르힘에선 수장을 위해 이런 음식밖에 준비를 못 하나?”

라카인의 기준으로 볼 때 이렇게 거친 귀리죽은 하인들이나 먹는 음식이었다.

호루니가 무안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신전이라고 마음대로 돈을 쓸 수는 없어서요. 곧 있을 봄 축제 때 사용할 꽃을 사들이느라 힘들어요.”

“왜 그 돈을 신전이 준비하지?”

“아, 뭐, 의회에서도 신전에 돈을 대주긴 하지만 그분들은 축제가 아니라도 쓸 데가 많거든요. 게다가 전통적으로 축제처럼 신민과 함께하는 일은 신전이 맡았어요. 그래서 사제님들도 더 오기로 요구를 안 하시죠.”

“그래도 식사조차 거를 만큼 준비하는 건 잘못됐다.”

“그건 그런데…….”

호루니가 잠깐 라카인이 든 그릇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난처해졌다.

“어, 이건…… 진짜 루가 님이 드실 만한 음식은 아니네요.”

“다시 받아오겠다.”

“아,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호루니가 허둥지둥 그릇을 빼앗았다.

“여기 계시다가 제가 가져오면 맛만 보세요.”

굳이 자기가 가겠다고 열심히 외치며 호루니가 얼른 뛰어갔다.

무언가 짐작을 했는지 라카인도 말리지 않았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호루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엌에서 일부러 하잘것없는 음식을 준 게 틀림없었다.

라카인이 음식을 요구했을 때 그가 먹는 줄 알고 일부러 형편없는 걸 준 것이다.

이미 아르파인이라 평판도 좋지 않은데, 그가 독을 넣었다고 요리장을 의심한 뒤로 가뜩이나 바닥이던 평판이 심연을 찍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언정 루가 님에게 이런 음식을 먹인 대가는 치러야지.

몰랐으면 알게 해 주리라 다짐하며 호루니가 뛰어갔다.

* * *

“후우……. 끝났나요?”

“예, 고생하셨습니다.”

지루하던 면담이 드디어 끝나고 사제들이 일어났다. 체면이고 뭐고 투이나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끄으으!”

어깨가 빠져라 팔을 뻗던 투이나가 으그그, 하고 어깨를 돌렸다.

“어휴……. 이러다 나중에 어깨에서 천둥소리가 나겠어요.”

투이나가 너스레를 떨었다.

묵묵하게 서 있던 라카인이 별다른 반응 없이 물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얌전히 받아 마신 투이나가 시원하게 숨을 내뱉었다.

일할 때는 심각해도 끝나기만 하면 빨리 생기가 회복되었다.

‘일이 끝났다고 축 처져 있으면 손해잖아.’

기력을 회복한 투이나가 눈을 반짝거렸다.

“참, 아까 먹던 죽은 어디 갔어요?”

라카인이 미미하게 움찔했다.

설마 아까 그걸 다시 찾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게…….”

드물게 말을 아끼는 라카인의 반응에 의아해진 투이나가 갸우뚱하는데 우렁차게 방문이 다시 열렸다.

“루가 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호루니가 쟁반 위로 수북하게 음식을 쌓은 채 돌아왔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상에! 엄청 많이 가져왔네요?”

“네!”

한차례 부엌을 뒤집어 놓은 호루니가 뿌듯하게 쟁반을 내려놓았다.

방금 구워내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납작한 황금빛 빵, 버터감자, 얇게 저민 햄과 찍어 먹는 꿀까지 있었다.

‘우와!’

투이나가 감탄하는 걸 알았는지 호루니가 배시시 웃었다.

“다 루가 님 드실 음식이에요!”

“아하하!”

까르르 웃은 투이나가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얼른 와서 앉아요! 같이 먹어요.”

손짓을 받은 라카인이 당황했다.

“저……도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어요.”

몰랐는데 호루니가 제법 손이 컸다.

투이나가 즐거운 마음으로 같이 서 있던 스카차도 불렀다.

시종들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사제 면담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머뭇거리던 라카인은 독을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를 떠올리며 조금 빵을 뜯어먹었다.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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