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기억을 추억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대답이 돌아왔다.
남편 될 사람을 발표하기 한 달 전의 일이다.
신전 안 거처에 감금되다시피 갇혀 있던 샨은 작은 일에도 벌컥 화를 냈고 투이나를 만나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방문할 때마다 갖은 방법을 써서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시종을 다치게 하거나 하인들로 붙잡게 시키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때 투이나는 이미 베인의 연인이었으므로, 샨에게 미리 거절을 밝힐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전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신에게 있어 언약은 힘이자 구속입니다.”
아르힘이 공표한 구혼 기간은 1년이었다.
왕과 마법사와 상인이 얌전히 신전을 떠나지 않는 건 그들이 약속에 잘 따르는 인간들이어서가 아니다.
신의 약속은 실제로 영혼을 구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혼을 지배한다거나 그런 괴담스러운 일은 아니고, 영혼의 일부가 약속을 깨는 걸 꺼림칙하게 여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만 개인의 의지가 대단하거나 원래 믿는 신이 따로 있다면 깨질 수도 있었다.
보통 수호신은 나라에 보호를 걸어 주는 목적으로만 영혼의 구속력을 발휘했고, 힘이 강한 아르힘이 좀 사사로운 편이었다.
청혼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아르힘은 두 가지 구속을 걸었다.
1년 동안 신전을 떠나지 말 것, 1년 동안 루가를 해치지 말 것.
구혼자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도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수락했다.
신전에서 승낙을 축복하듯 종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원래 초원 생활을 하던 샨에게 허락된 공간은 너무 좁았고,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한 신경증을 보였다.
만남 초기부터 투이나도 그를 어색해하고 겁을 먹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피를 보는 일이 늘어났고, 만약 청혼을 거절하면 반드시 전쟁이 나리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에겐 아르파가 있으니 약간의 피해만 감수하면 아르힘과 한 맹세쯤은 깨 버릴 거란 두려움이 팽배했다.
강제로 약속이 박살나면 분명 아르힘에게도 문제가 생길 테니까.
그래서 의회는 은근히 샨과의 결혼을 종용했다.
신전은 투이나와 베인의 관계를 옆에서 봐 온 만큼 노골적으로 샨과 결혼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안은 점차 그들을 좀먹어 갔다.
결국 베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투이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저 한 사람의 결혼일 뿐이라며 안심시키는 베인의 말에 겨우 위안을 받다가도, 샨이 검을 그녀의 귓가에 꽂아 넣고 웃음을 터트리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한 달을 남겨 놓고 투이나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샨과 단둘이 있을 자리를 마련했다.
투이나는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샨은 결혼을 하면 끝난다고 답했다.
“그대는 내 마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두 팔로 자신을 가둔 샨이 위협적으로 어깨를 틀어쥐었을 때, 그녀는 두 번 다시 이 관계를 돌이키지 못하리라 직감했다.
반드시 자신과 결혼하리라 믿는 그를 기필코 배신해야만 했기에.
* * *
그리고 지금.
샨이 똑같은 자세로 투이나를 눌러왔다.
강렬한 기시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아니야.’
투이나는 주춤하며 뒤로 탁자를 짚었다.
‘그때와 달라.’
샨은 아직 멀쩡했다.
그에게 서려 있는 건 광기가 아니라 장난기였다.
투이나는 이제 샨이 툭툭 내뱉는 위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내기를 떠올렸을 때 순간적으로 사냥터를 떠올리길 잘했지.’
샨에겐 해소할 방법이 필요했다.
신전 밖으로 나가게 둘 순 없을지라도 같이 장단을 맞추는 일 정도라면 할 수 있었다.
죽었다 되살아났는데, 그 정도 배짱도 없을까.
그래서 투이나는 다시 샨을 밀어내는 대신 팔뚝을 움켜쥐었다.
샨이 멈칫했다.
한 손에 팔이 다 안 잡혀서 그녀도 멈칫했다.
‘와, 근육…….’
잠깐 부럽다는 생각을 한 투이나가 얼른 잡념을 떨쳐 버렸다. 선뜻 접촉해 온 그녀를 본 그의 눈이 번득였기 때문이다.
“샨.”
투이나가 슬슬 팔을 밀어냈다. 다행히 샨이 슬슬 밀려났다.
다음에 할 말을 위해 투이나가 심호흡을 짜냈다.
“난 낭만적인 게 좋아요.”
“뭐?”
“진심 어린 애정을 말하는 거 말이에요. 원하는 게 무엇이든 들어준다면서요? 장난도 농담도 싫어요. 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거든요.”
팔을 벌린 틈을 타 투이나가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말했어!’
샨은 그녀의 예상치도 못한 말에 벙 쪄 보였다.
하지만 일찌감치 말해 두는 편이 나았다. 진작 말해 둬야 그가 가진 기대감이 떨어져나갈 것이다.
‘본인도 자기가 낭만이랑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
투이나의 전략은 간접적인 거절이었다. 대놓고 ‘난 당신 싫어요!’라고 하면 전쟁 터질 테니까.
만나는 내내 당신과 나는 애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최선은 친구, 최악은 냉전까지 예상하며 관계를 다져 나갈 생각이었다.
전에는 그를 일방적으로 두려워하다가 서로를 망쳤다.
‘다시 그러긴 싫어.’
샨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내가 이미 얘기하지 않았나.”
“그래요. 기억하죠. 하지만 여흥이라도 사람이라면 사랑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겠어요?”
“뭐라?”
샨이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백히 그는 연애를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러나 샨은 투이나가 자신이 청혼한 상대라는 걸 새삼 깨달았는지 잠깐 침묵했다.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게 그것인가?”
“네.”
차라리 사람을 죽여 달라고 했으면 덜 귀찮아 보였을 기세다.
샨이 마뜩찮게 턱을 굳히더니 투이나를 떠보았다.
“내가 낭만적이지 않아 보이나?”
“지금도 시체를 두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너무도 타당한 지적이었다.
샨이 그제야 투이나의 등 뒤에 있는 짐승을 곁눈질했다.
투이나는 아직도 호위들이 짐승을 향해 뛰어들던 순간을 떨쳐 버리지 못했건만.
샨은 본인이 제압해서 그런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이런 순간에도 구애를 하지.
“흠…….”
“신경 쓰지 말아요. 꼭 들어주지 않아도 되니까.”
투이나가 한발 물러나며 샨에게 청혼을 취소할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미리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죠.”
투이나는 질퍽하게 흐르는 검은 액체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언급하고서야 샨이 진지해졌다.
“……그래. 어떤 놈이든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지.”
그의 눈이 위험스레 빛났다.
결국 산양의 시체는 태우기로 했다.
더 의논해 봤자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고, 보관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되살아난 일이 꺼림칙한지 매장하는 관습인 샨도 동의했다.
샨이 비가 그치면 산양을 화장터로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고마워요.”
피가 흘렀던 자국까지 박박 지워진 뒤에야 투이나는 마음 놓고 쉴 수 있었다.
그동안 샨은 얌전히 천막 안에 앉아 있는 투이나를 응시했다.
“루가.”
“네?”
“비가 그칠 때까지 머물고 가는 건 어떤가?”
투이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상황이 자꾸 어긋나서 아직까지 제대로 된 잔치를 열어 준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났다.”
“지금요?”
“원래 무언가가 죽고 난 다음에는 잊을 만한 게 필요하거든. 기꺼이 잊을 것을 빌려주지.”
꽤 의외다.
‘나름대로 신경 쓰는 건가?’
투이나가 무릎 위로 팔을 포갰다. 낭만적인 게 좋다고 했더니 역시 실행 속도가 빠르다.
‘샨의 낭만은 뭘까.’
여전히 분위기는 살벌한 주제에 살짝 드러난 송곳니를 미소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아련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그가 호의적으로 나올수록 친해지기 쉬우니까.
“다음에요.”
투이나가 피식 웃었다.
“다음에 올 때는 무슨 일 없이 기대만 하고 올 수 있길 기도할게요.”
“좋다.”
타닥, 타닥.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약하게 울렸다.
잠시 후 산양을 치우는 걸 돕던 스카차가 돌아와 슥 장막을 걷었다.
“루가 님,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사제님이 다음 일정이 있다고 말씀하는데, 이만 가실까요?”
“그래요? 일어날 때가 됐네요.”
투이나가 찌리릿 저린 다리를 폈다.
숨죽이던 시종들은 이제야 샨의 거처에서 벗어날 수 있단 사실에 안도했다.
샨은 떠날 때가 되어서야 그녀 주위에 생겨난 평화로운 분위기를 인상을 찌푸려 가며 쳐다보았다.
“혹시나 해서 묻겠다, 루가.”
“음, 뭐죠?”
“날 전에도 알았나?”
샨의 목소리가 뜨끔 가슴을 찔렀다. 찔끔한 투이나가 얼른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가끔씩 말하는 게 거슬려.”
샨이 이죽거렸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또 뭐가 거슬린다는 건지.
투이나가 난감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감이네요.”
반쯤 문에 몸을 걸친 투이나가 피곤한 눈으로 말했다.
“싫다고 대화를 하지 않을 순 없으니 천천히 적응해야겠죠.”
그 말에 샨이 무슨 얼굴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그냥 잦아드는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돌아와 보니 치맛단이 온통 흙탕물로 젖었다.
샨의 거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기다리던 사제가 눈을 흘겼다.
“아르힘 님을 뵈러 가셔야 하는데 꼴이 이게 뭡니까.”
그 말에 지쳐 있던 호루니마저 발끈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루가 님이 신전에서 무슨 일을 겪은 줄 아십니까?”
“아, 아니, 이 친구들이 왜 이래.”
“…….”
버럭버럭하는 호위들에 놀란 사제가 당황했다.
라카인과 투이나만 침묵을 지켰다.
투이나는 괜히 또 다투고 싶지 않았고, 라카인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샨의 거처에서부터 쭉 조용했다.
‘라카인도 지쳤나 봐.’
투이나는 자신의 상태에 빗대어 이해했다.
괜히 상황도 모르고 말을 꺼냈다 성질만 긁힌 사제가 투덜거렸다.
“거참, 모하세스의 거처에만 갔다 오면 사람이 이상해진다니까. 그자가 또 무슨 짓을 했습니까?”
“일단 아르힘 님부터 뵈어야겠어요.”
투이나가 살래살래 손을 저었다.
“차림새가 좀 볼품없지만 그분을 기다리게 만들 수는 없으니 곧장 가겠습니다.”
“예에.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사제가 떨떠름하게 허리를 숙였다.
“두 분은 쉬고 계세요. 스카차, 뒤의 일정을 부탁드려요.”
“예!”
스카차가 곧장 그녀를 뒤따랐다.
호위를 맡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워낙 충격이 컸으므로 호루니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사제들과 합류해 떠나가는 투이나를 본 호루니가 한숨을 쉬었다.
“루가 님은 어쩜 저렇게 침착하실까요.”
“……침착한 게 아니다.”
“네?”
라카인은 굳은 눈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호루니가 궁금해했지만 끝끝내 그의 입술은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
투이나가 아르힘을 만나러 갈 때는 항상 사제들이 동행했다.
원칙적으로 신과의 대화는 불문에 부쳐야 했지만, 사제들은 대화가 끝난 직후 투이나가 무심코 흘리는 사소한 단서라도 줍고 싶어 했다.
아르힘의 성소로 가는데도 투이나가 평소처럼 상냥하게 대화를 건네지 않자 사제가 뒤에서 속닥거렸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건가? 모하세스의 거처에서 뭘 봤길래 그래? 피?”
“자네는 좀 입을 다무는 게 좋겠네.”
투이나를 따라갔던 사제가 퀭한 눈으로 대꾸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투이나는 담담했다.
어서 빨리 아르힘을 만난다면 가슴속에 달라붙은 답답함이 해소될 것만 같았다.
종탑에 도착한 투이나가 벽을 어루만졌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금세 안쪽으로 손이 빨려들었다.
눈부신 황금빛이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던 터라 황금빛 종에 반사된 빛이 물결에 비춰 반짝이는 모습이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아르힘 님?”
투이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르힘은 나라 어디에든 있었고 무엇이든 들었지만 현신한 몸은 딱 한 장소에만 존재했다.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성스러운 곳에 진흙을 남기는 게 몹시도 죄스러웠다.
‘사제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아득하게 투명한 물에 희게 거품이 이는 걸 보면서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물 위를 걸을 때 해야 할 생각은 지금 물 위를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다리가 푹 물속으로 빠질 듯했다.
한참의 시간을 들여 종탑 중앙으로 온 투이나가 고개를 위쪽으로 들어올렸다.
커다란 황금빛 종 안에서 웅크린 소년이 보였다.
투이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고 계신가?’
소년은 눈을 감고 있었다.
순간 신도 잠을 자는지 헷갈렸다.
작은 몸은 규칙적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새근거렸다.
투이나가 어찌할 줄 모르고 서 있던 찰나, 작게 속눈썹이 떨리더니 소년이 눈을 떴다.
“왔구나.”
작게 기지개를 켠 소년이 아래로 내려왔다. 동작 하나하나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 놀랐다.
아르힘과 만나자마자 산양 얘기를 하려고 생각했던 투이나는 멋쩍게 인사했다.
“존귀하신 몸을 뵙습니다.”
소년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할 말이 있다면 참지 않아도 좋다.”
“이미 알고 계신 듯하여…….”
허물없이 대하는 아르힘에게 안심한 투이나도 배시시 따라 웃었다.
소년은 아직 잠에 겨운 사람처럼 느리게 몸을 기울이더니 답했다.
“그래. 나도 그것을 보았다.”
“아르힘 님께서 하신 일인가요?”
“생명은 삶을 되짚을 때 항상 올바른 길로만 오지 않는다.”
소년이 답했다.
아르힘이 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제야 목에 걸렸던 민들레 씨앗 같던 불안이 내려갔다.
“미욱한 저를 용서하세요. 감히 아르힘 님이 되살려낸 목숨이라 짐승 또한 같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인간에게는 실수 또한 가치일지니. 그들 또한 방랑하는 영혼이니 가여워하는 너의 마음이 옳다. 같은 불안을 느껴도 좋다.”
아르힘의 말을 듣자 몸에서 긴장이 쭉 빨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는 이들 중에서 목숨을 되살려내는 힘을 가진 사람은 아르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길하게 되살아났던 짐승을 보았을 때 제 명치를 때린 것은 저 일만큼은 반드시 아르힘이 한 일이 아니어야만 한다는 절실함이었다.
그만큼 산양을 일으킨 힘에는 사람의 저편을 누르는 불안한 공포가 있었다.
세상에 다시는 나타나서는 안 된다.
투이나가 손을 모았다.
“부디 말씀해 주세요.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요?”
아르힘은 미소 띤 얼굴이었으나 그를 감싼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말이든 너의 의심을 부추기는 수밖에 없겠구나.”
“네?”
소년이 미미하게 눈썹을 올렸다.
“아이야, 네가 마법사와 함께했음을 내가 모를 것 같더냐.”
순간 발밑에 이미 땅이 없는데도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투이나가 입을 딱 벌리고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도 알았다.
설마 아르힘이 모를 거란 생각은 절대로, 전혀 안 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언급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뿐이다.
아르힘의 어조에 배어 있는 희미한 질책에도 투이나는 얼음물을 뒤집어 쓴 듯이 파르르 떨었다.
“잘못했습니다!”
“너를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아르힘이 안타깝다는 듯이 투이나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건네는 경고는 너를 위함이니.”
소년이 어깨를 짚은 그대로 다가왔다. 작은 체구가 다정하게 안아 위로해 주듯이 귓가에 속삭였다.
“마법사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아.”
투이나가 눈을 깜박였다.
아주 잠깐 아르힘이 그 나이대의 평범한 소년처럼 보였다. 강가로 걸어가는 아이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소리치는 목동처럼.
“마력은 기본적으로 강탈을 의미한다. 세계를 자신의 기준으로 맞추려는 자들은 왕보다 더 오만한 법. 신을 믿는 자라면 차라리 다른 신도 두려워하건만 마법사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년의 뺨이 일그러졌다.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믿는 것이 없다.”
작은 손바닥에서 열이 퍼져 나왔다.
“너를 얼마든지 데려가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순간 지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서 투이나가 움찔했다. 얼룩을 치료하는 아르힘의 힘이 유독 강했다.
그러나 그 고귀한 신이 고통에 공감하듯 찡그리고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소년이 중얼거렸다.
“아플 것이다. 네 몸에 섞인 마법이 다른 곳으로 가질 않는구나.”
괴로움 속에서 얼룩이 새카맣다 조금씩 회색빛으로 옅어졌다.
안간힘을 써 가며 신음을 참던 투이나가 말했다.
“하지만 시드룬도…… 맹세를 했어요. 신전을 떠나지 않겠다 아르힘 님께 약속하였는데, 어떻게…….”
“마법사와는 다른 계약을 해야만 했다.”
간신히 예전처럼 복구된 얼룩을 확인한 아르힘이 손을 뗐다.
“다른 이들은 영혼의 일부를 약속에 걸었지만 마법사에겐 구속이 듣지 않으니 육체의 일부로 대신했다.”
가뜩이나 놀란 마음을 참지 못한 투이나의 맥박이 더욱 빨라졌다.
“육체라면…….”
“내가 그의 심장을 받았다.”
아르힘은 투이나의 뺨을 감쌌다.
“마법사의 심장이 신전에 있는 한 그는 떠나지 않았으며, 약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소년이 천천히 위로 떠오르며 굳어 버린 그녀를 부드럽게 쓸었다.
투이나는 누군가가 둔탁한 자루로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르힘은 가엾은 자를 위로했다.
“그러니 걱정 없이 사랑하거라.”
엄숙한 휘광은 이내 빗줄기가 되어 쏟아졌다.
성소 바깥으로 나온 투이나는 더 이상 소년이 보이지 않는데도 하염없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 * *
‘시드룬과 악수할 때 나타난 거대한 마법진이 계약의 증거였던 거야.’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마구 문지르면서도 투이나는 좀처럼 평정심을 되찾을 수 없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엔 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아까 전, 아르힘과 대화가 끝나고도 멍하니 비를 맞고 서 있는 투이나를 사제들과 시종들이 놀라 데려왔다.
가뜩이나 병도 있는데 감기까지 걸리시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소리들이 귀를 그대로 스쳤다.
모든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마법사가 신전에서 활개 치는 일은 없었다.
아르힘은 이미 다 약속을 해 두었으니.
신의 안배는 대체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
그녀가 알 수 없는 저편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신의 힘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머리가 복잡해.’
아르힘은 마법사를 따라간 투이나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건 계속 시드룬을 만나도 좋다는 뜻일까. 만나긴 만나도 의심을 갖추라는 걸까.
결국 신은 그녀를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았으니.
‘아르힘 님이 신도들을 생각해서 스스로 답을 찾게끔 하는 분이라는 건 알지만, 정말이지 가끔은 그냥 속 시원히 알려 주셨으면 좋겠어!’
투이나가 흐그극,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뜨거운 물입니다.”
비 맞은 강아지 꼴로 낑낑거리는 투이나에게 라카인이 잔을 건넸다.
그는 독살 사건 이후로 모든 음식물을 중간에서 맛보고 있었다.
투이나가 말려 봤지만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사람이 낫다며 그는 그 역할을 자처했다.
“속을 따듯하게 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고마워요, 라카인.”
투이나가 호로록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워진 몸에 온기가 돌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어쨌든 아르힘 님께서 하신 말씀은 산양을 조종한 게 마법사라고 의심해 보란 거겠지.’
앞뒤를 짜맞춰 보면 그랬다.
‘시드룬의 마법은 공간을 다룬다고 했으니 그는 아닐 테지만……. 그 공간에 다른 마법사가 얼마나 살고 있는 거지?’
투이나는 아직 수리시와 바즈아둡의 마법이 뭔지도 몰랐다.
범인을 찾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더 시드룬의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아르힘이 여기까지 고려한 건지 아니면 지레 짐작인지 알 수가 없어 고통스러웠다.
‘어쨌든 찾아내야 해. 한 번 했으면 두 번 못 할 것도 없잖아.’
위험한 자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투이나가 따듯한 잔을 손에 쥐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자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라카인이 입을 열었다.
“루가 님.”
“음, 네?”
“얼룩이 옅어지셨군요.”
‘라카인의 눈은 못 속이겠네…….’
“아르힘 님을 뵙고 왔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라카인이 반복했다.
“루가 님.”
“네.”
“되살아난 짐승에 대해 드릴 정보가 있습니다.”
“네?”
홱홱 돌아가는 화제에 당황한 투이나가 잔을 내려놓았다.
“말씀하세요.”
“아르파는 강림하는 신입니다.”
얼른 이해하지 못한 투이나가 눈을 깜박였다.
라카인이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신이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면 짐승에게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산양에 들어간 게 아르파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라카인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그가 고개를 꾸벅였다.
벙 찐 투이나가 쳐다보는 동안에도 라카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물러나 묵묵히 주변을 경계했다.
‘왜 갑자기…….’
그 나름대로 도와주고 싶었던 걸까.
아직 신전 사람들은 그를 샨의 편이라 의심하지만 투이나는 그가 자신에게 맹세했던 순간을 믿었다.
그러니 말이 불완전한 원인은 라카인이 믿는 신에게 있을 터였다.
‘여기서 더 말하게 되면 아르파나 샨을 모욕하거나 배신하는 거라 침묵한 거야.’
투이나는 직감했다.
라카인은 산양이 되살아난 원인으로 샨을 짚고 있었다.
신의 말씀과는 반대로.
이번에 샨을 만났으니 일정상 다음에 만날 차례는 시드룬이었다.
원래 신전 어디서든 제멋대로 불쑥불쑥 나타나던 그가 요즘 보이지 않자 사제들은 어찌 연락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감시를 막으려 함부로 나타나지 못하게 한 탓에 다시 좀 나타나 달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사제들은 찜찜한 표정으로 그가 갈 만한 곳에다가 벽보를 붙였다.
이날 이때 나타나면 투이나를 볼 수 있으리라 하는 총 정리표였다.
그날 밤에 투이나도 시드룬도 다시 마법을 써서 신전에 와도 좋다는 얘기를 깜박해 버렸다.
‘설마 그렇다고 영영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 투이나는 침대 옆에도 일정표를 하나 올려 두었다.
시드룬이 그녀의 말을 잘 따르는 편이긴 해도 아예 말을 들을 수가 없는 상황이면 어련히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설마 1년을 기다리겠어?’
다음 날, 하루를 기다려 본 투이나와 사제들은 마법사가 나타나려면 멀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투이나는 베인을 먼저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투이나가 방을 나섰다.
벌써 며칠이나 흐른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얼마 안 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베인을 만나러 갈 때는 항상 호루니가 호위를 맡았다. 그런데 오늘은 라카인까지 따라 나왔다.
“음? 라카인, 어디 가요?”
“크로퍼드의 거처에서 다과를 자주 드신다 들었습니다.”
무슨 얘긴가 하던 투이나가 앗, 하고 목소리가 커졌다.
“어, 어, 아니, 베인은 그럴 사람 아니에요!”
“아직 범인을 못 찾았습니다. 확신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베인은 저를 죽일 이유가 없어요.”
“다른 구혼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아무리 투이나가 쭉 샨을 범인으로 의심하긴 했어도 지금 살해당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지금 그녀가 죽는다면 처음부터 작정하고 신전을 혼란에 빠트리려는 자의 소행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샨이네.’
투이나가 씁쓰레하게 생각했다.
시드룬은 신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고, 베인은 아르힘의 가호로 상단이 번성하는 중이다.
아르힘이 망하면 샨이 콧노래를 부르며 나라를 집어 갈 테니 유일하게 동기가 있는 셈이다.
시종이 라카인에게 핀잔을 줬다.
“여기서 제일 의심스러운 게 누군데 함부로 의심하느냐?”
“스카차의 조사 때문입니다.”
투이나가 독을 먹은 날 스카차는 말 그대로 사방을 뛰어다니며 정보를 끌어 모았다.
그러나 고생에도 불구하고 건질 만한 수확은 별로 없었다.
라카인은 그 얼마 안 되는 보고 중에서 부엌에 식재료를 납품하는 게 크로퍼드 상단이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크로퍼드 상단이 신전에 지원하는 건 그것만이 아니라니까. 여기서 쓰는 물건은 대부분 크로퍼드 상단 거야.”
“그러니 더 음모를 꾸미기가 쉽습니다.”
라카인은 꿋꿋하게 주장했다.
답답해진 시종이 뒷목을 잡았다.
타지 사람이라 크로퍼드 상단과 신전의 오랜 우호 관계를 일일이 설명하기도 번거로웠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하세요. 범인으로 몰릴 게 뻔한데 대놓고 다과에 독을 타겠습니까?”
“역으로 더 빠져나가긴 쉽습니다.”
“이 사람이 그래도!”
“진정들 하세요! 어차피 호위는 있어야 하니까.”
결국 투이나가 나서서 말려야 했다.
“오늘은 라카인과 함께 갈게요. 이렇게 싸울 일 아니잖아요.”
“자꾸 그렇게 봐주시면 안 됩니다. 태도가 문제라니까요.”
“그만하세요.”
투이나의 어조가 강해진 뒤에야 시종이 입을 다물었다.
라카인은 고개를 조금 숙였을 뿐 여전히 담담했다.
‘조만간 아르파인 친목회라도 열어야지 안 되겠어.’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고 해도 이토록 야박하게 굴 이유는 없다. 그것도 호의로 호위를 서 주는 사람에게.
투이나에게 라카인은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안 그래도 될 사람이 비밀을 안 까닭에 붙잡힌 셈이 아닌가.
오늘은 라카인이 호위로 가게 되자 호루니만 시무룩해졌다.
베인의 거처를 따라다니면서 옆에서 진귀한 과자를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다녀오십시오, 루가 님.”
덩달아 쉬게 된 스카차가 투이나를 배웅했다.
라카인이 남았으면 또 꼼짝없이 버거운 훈련을 해야 했을 터라 그가 몰래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호루니가 휴식의 단 꿈을 곧장 박살냈다.
“나랑 대련하러 가.”
“뭐?”
“어차피 할 거 없잖아. 라카인이 자기 없을 때도 수련하려고 알려 준 동작 연습해야 돼.”
“좀 쉬려고 했더니만…….”
스카차는 투덜거리면서도 수련장으로 따라 나섰다.
아닌 척해도 그들은 어느 정도 라카인을 믿고 있었다.
투이나가 알았다면 몹시 뿌듯해했을 것이다.
지금 투이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영 아니었으니까.
‘베인한테 가는 데 이렇게 불편하긴 처음이야.’
그냥 걷기만 해도 공기가 거북했다.
라카인은 원래 말수가 적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미했는데, 오늘은 시종들과 다퉈서 괜히 안 좋은 쪽으로 눈에 띄고 말았다.
투이나가 한숨을 삼키며 조용히 걸었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랬을까.
원래라면 진작 소리를 듣고 나왔어야 할 베인은 방문에 다가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들렸다.
“……같이 굴지 말고 제대로 해.”
“……잖아. 나라고 그러고 싶지 않은 게 아냐.”
저도 모르게 투이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의자에 앉은 남자와 그 등받이에 기댄 여자가 보였다.
똑같은 금발에 정지한 자세는 한 쌍의 정교한 공예품 같았다.
희고 수려한 외모가 어쩐지 근심에 잠겨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아차!
뒤늦게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걸 깨달은 투이나가 얼른 문을 두드려 인기척을 냈다.
똑똑똑.
“루가 님.”
놀란 베인이 곧장 일어섰다.
의자를 짚고 있던 여자는 역시나 레오나였다.
“어머나, 루가 님 오셨군요.”
레오나가 능숙하게 활짝 웃었다.
그녀는 오늘 승마복과 비슷한 다갈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베인은 그에 비해 다소 차분한 푸른 복장이었는데, 맨 위의 단추가 하나 떨어져 나가 있었다.
늘 단정하고 완벽한 복장을 유지하는 그였기에 더욱 놀라웠다.
“베인, 단추가…….”
“네?”
투이나에게 다가가려던 베인이 갑자기 얼굴을 확 붉혔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목젖이 드러나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루가 님께 이런 꼴을 보여 드리다니.”
급히 손으로 목을 가린 베인이 허둥거렸다.
맨 가슴을 보여 준 것도 아닌데 귀까지 새빨개진 그가 급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곧장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전 괜찮은데…….”
말리려던 투이나는 베인이 너무 부끄러워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베인이 서둘러 옆방으로 사라졌다.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있던 레오나가 대신 싱긋 웃었다.
“쟤가 저렇게 수줍음이 많답니다.”
“하하…….”
“근데 루가 님.”
레오나가 삐걱, 의자를 밀었다.
“저거 다 내숭이에요.”
레오나는 답답하기도 하고 짓궂기도 한 미소를 그렸다.
투이나는 갸우뚱했다.
과거 연인이었을 때도 베인은 늘 저랬다.
손목까지 오는 장갑을 꼭 끼고 결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수줍게 사랑을 속삭였던 것이다.
그의 손을 잡고 있던 투이나도 덩달아 가슴이 떨려서 저도요, 하는 말밖에 꺼내지 못했다.
연애했던 시간이 떠오르자 간질간질해진 투이나가 마냥 웃었다.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가 봐요.”
“후후후. 그럴까요?”
레오나가 의미 있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루가 님을 보니 좋군요. 이제 다시 뵈려면 봄맞이 축제 때를 기다려야 하니.”
“맞다. 곧 축제였네요.”
“루가 님도 바빠지시겠어요.”
“레오나는 어딜 가나요?”
“축제 전에 돌아오려면 미리 일해 둬야죠.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많네요.”
레오나가 유능해서 못 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조심하세요, 루가 님. 요즘 신전 내 소문이 흉흉하던데.”
“들으셨어요?”
“베인이 안달복달해서 저까지 시달렸거든요.”
본인이 말하고도 아차 싶었던지 레오나가 능청스럽게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건 녀석한테 비밀입니다. 루가 님한텐 하나도 안 그런 척할 테니.”
“하하. 네.”
갑자기 레오나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매의 눈으로 살펴본 레오나가 경박스럽게 떨어진 물건을 휙 주워 올렸다.
그녀가 찾은 건 손가락보다 작았다.
과장스럽게 훅 먼지를 분 시늉을 한 레오나가 소매로 문지른 다음에 투이나에게 내밀었다.
“자, 이건 루가 님께 드리는 뇌물입니다.”
새가 조각된 작은 은단추였다.
의아해하던 투이나는 이게 아까 베인의 옷에서 떨어져 나온 단추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건…….”
“베인이 돌아오면 왜 단추가 떨어 졌나 꼭 물어보세요.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네? 어, 음……. 그래 볼게요.”
“꼭입니다, 꼭.”
레오나가 싱긋 웃었다.
할 말이 끝났는지 레오나가 한쪽 팔을 들어 올려 가볍게 반절을 했다.
투이나도 똑같이 인사했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던 레오나가 시종의 뒤를 따라온 라카인에게 부딪칠 뻔했다.
“어이쿠!”
“…….”
라카인이 말없이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레오나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대신 커다래진 눈으로 한참이나 라카인을 훑어보았다.
물건을 감정하듯 도륵도륵 오가던 그녀의 눈이 점점 번쩍거렸다.
“루가 님! 호위를 새로 뽑으셨어요?”
“아아, 아뇨. 라카인은 원래 같이 뽑힌 호위예요.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교대한 거예요.”
“그으렇습니까?”
레오나의 목소리가 쭉 올라갔다.
분명 뭔가 낌새가 있는데 투이나로선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으응? 왜 신나셨지?’
뒤늦게 헛기침을 한 레오나가 통통 물러났다.
“엣헴!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루가 님. 안녕히!”
음흉한 미소를 지은 레오나가 옆으로 쏙 빠져나갔다.
투이나가 얼떨결에 인사했다.
복도로 나온 레오나는 혼자 감탄했다.
“하, 구혼자도 아닌데 저런 인간이랑 같이 다녔단 말이야? 베인이 알면 또 난리 나겠군.”
레오나가 군침이 도는 미소로 큭큭거렸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기는 했지만 상인의 눈으로 봤을 때 라카인은 특상급 대물이었다.
앞머리를 좀 치고 몸매를 조금만 강조해 주면 여자들이 줄을 설 게 틀림없었다.
레오나가 끌끌 혀를 찼다.
“물론 우리 베인보다는 못하지만 아까워 죽겠네. 이런 건 직접 봐야 재밌는데. 일 때문에 못 보고 가야 하는 게 아쉽구만, 아쉬워.”
가볍게 휘파람을 분 레오나가 누나 된 도리로 동생을 애도하며 걸음을 옮겼다.
라카인은 경계 어린 눈초리로 방금 지나쳐 간 여자를 확인했다.
“방금 나간 사람은 누굽니까?”
“베인의 누이 레오나예요.”
라카인이 또 의심할까 봐 투이나가 얼른 대답했다.
그가 베인을 비롯한 사람들을 의심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베인과 같이 있는 시간도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의심으로 빠져나가 버리면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라카인은 인상착의를 기억해 두려는 듯 뚫어져라 복도를 노려본 뒤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인이 돌아왔다.
단추가 떨어진 윗옷만 갈아입을 줄 알았는데 바지부터 장갑까지 맞춰 싹 달라져 있었다.
‘와아, 빠르다!’
옷 갈아입고 분칠하는 데 시종 여섯이 달라붙는 투이나와는 비교되는 속도였다.
“죄송합니다, 루가 님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사과부터 한 베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굳어 버린 그의 시선이 라카인에게 못 박혀 있었다.
투이나는 그저 신기했다.
‘역시 둘은 가족이야. 레오나랑 어쩜 이렇게 반응이 똑같지?’
베인의 속내도 모르고 투이나가 소개했다.
“어서 와요, 베인! 이쪽은 제 호위인 라카인이에요.”
“……저자는 아르파인이군요.”
“네, 맞아요!”
투이나가 베인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아르파인들은 검은 머리가 많고 짙은 입매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베인은 단번에 알아맞힌 것이다.
베인이 여전히 딱딱하게 라카인을 노려보았다.
“모하세스가 보낸 사람입니까?”
어리둥절한 투이나가 곧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샨이 권력을 이용해 다른 구혼자들을 만날 때 감시를 붙이기 시작했냐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투이나가 황급히 부정했다.
“아니에요! 제가 샨에게 호위로 달라 청했습니다.”
“루가 님께서요?”
베인은 아까보다 더 당황스러워 보였다.
“제가 알기론 신전에 무사제분들이 계실 텐데요.”
“음…….”
투이나가 난감하게 말을 골랐다.
샨의 거처에서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말하면 분명 걱정할 텐데.
그녀에게 곤란한 기색이 비치자마자 베인이 곧장 물러났다.
“아닙니다, 루가 님.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베인이 자상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만 저는 루가 님의 호위를 모두 여자분들로만 뽑는 줄 알아서 놀랐을 뿐입니다.”
“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투이나가 솔직히 말했다.
“제 옆을 지켜 주시겠다 맹세하신 분들이라면 그걸로 좋아요. 게다가 제대로 시험까지 쳐서 뽑은 분들인걸요.”
“그러셨군요.”
잠깐 입술을 누른 베인이 곧 차분하게 다가왔다.
그가 다시 평온해진 것 같아 투이나는 라카인은 시험에서 예외였다는 말을 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부디 편히 앉아 주세요, 루가 님.”
베인이 이미 다과가 차려져 있는 탁자로 투이나를 안내했다.
납작한 꿀빵과 우유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흰 식탁보 위엔 꽃이 가득했다.
은은하게 우러나온 차향까지 더해진 호화로운 식탁이었다.
‘세상에…….’
올라간 음식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싱겁게 먹는 데 익숙한 투이나의 입에서 벌써 군침이 돌았다.
투이나는 접시 옆에 놓인 작은 항아리를 달각 열었다.
푸릇푸릇한 꽃잎에 흰 알갱이가 온통 달라붙어 있었다.
“이건 뭐에요?”
“제비꽃 설탕절임입니다.”
베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루가 님께서 지난번에 보낸 꽃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하여 특별히 주문했습니다.”
“맞아요!”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바보처럼 웃음이 나왔다.
투이나가 베인을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그때 정말 기뻤어요.”
순간 베인의 미소에 금이 갔다.
무심코 식탁을 움켜쥔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셨습니까.”
“네.”
투이나는 그것도 모르고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고운 담청색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먹어 봐도 될까요?”
“……루가 님께선 여기 있는 거라면 뭐든 드실 수 있습니다.”
베인이 강조했다.
잠시 그를 덮쳤던 격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정함이 돌아와 있었다.
투이나가 사각거리며 잡히는 꽃잎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불시에 손등이 날아왔다.
“……!”
투이나가 움찔했다.
라카인이 투이나에게 닿지 않게 꽃잎을 한 손으로 덮고 있었다.
베인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무슨 짓입니까.”
“드시지 마십시오.”
라카인이 베인은 안중에도 없이 말하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투이나를 설득했다.
“제가 먼저 먹어 보아야 합니다.”
투이나처럼 놀라 굳어 있던 베인이 그 말에 어조가 거칠어졌다.
“……이자가 지금 제가 루가 님 드실 음식에 독을 탔다 의심하는 것입니까?”
“…….”
라카인은 침묵으로 긍정을 완강하게 표현했다.
당황한 투이나가 그를 말려 보았다.
“라카인, 정말 괜찮아요.”
“향이 강한 음식은 독을 넣기 쉽습니다.”
라카인은 고집을 부렸다.
일단 음식을 내려놔야 라카인이 물러날 것 같아서 투이나가 손을 빼면 그런 의도도 모르고 손이 금세 따라붙었다.
절대로 투이나를 만지지는 않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잘 따라오는지 기술이 대단했다.
‘아니, 감탄할 때가 아니지.’
그 순간 베인의 손이 다가와 투이나의 손가락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루가 님.”
뒤에서 속삭인 베인이 투이나의 손을 자신의 입가로 당겼다.
이번에는 라카인도 방해하지 않았다.
묘한 신경전 속에서 베인이 그녀의 손으로 꽃잎을 삼켰다.
그의 입술 너머로 꽃잎을 넘기면서 살짝 살갗이 스치자 손바닥 끝까지 저릿해졌다.
‘우와……. 와……. 으아…….’
투이나는 제대로 호흡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분칠로 가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손끝 발끝이 다 발갛게 변한 걸 들키고 말았을 거다.
베인이 완전히 얼어 버린 투이나에게서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루가 님. 제가 감히 루가 님께 독을 먹일 것이라 오해를 받으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와서 투이나가 급히 기침으로 감췄다.
“크흠, 오해가 풀렸으면 다행이죠.”
라카인은 직접 먹어서 확인시켜 준 베인을 흘긋 보고는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에게서 엉뚱한 사람을 의심했다는 후회는 한 점도 없었다.
투이나가 더운 얼굴을 식히느라 고개를 숙였을 때 베인이 살짝 그녀를 감아 돌렸다.
“앉으세요.”
베인이 직접 의자까지 밀어 넣어 주었다.
그가 닿았던 자리가 계속 신경 쓰였다.
베인은 그녀를 잡았던 손을 뒷짐 진 채로 앉았다.
늘 맞은편에 앉던 그가 웬일인지 옆 자리에 앉았다.
담담하게 베인이 접시를 들었다.
“걱정이 많은 호위를 두셨으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베인이 음식을 옮겨 담았다. 단정한 손이 조금씩 빵과 우유를 덜었다.
독이 없다는 걸 증명하려고 조금씩 음식을 베어 먹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아름다웠다.
정갈한 손짓이나 동작 때문일까.
씹고 삼키는 모습을 절로 지켜보게 만들었다.
그는 한 입 삼키고 나서는 꼭 다시 손을 뻗어 투이나에게 확인한 음식을 덜어 주었다.
그다음에야 다시 자신의 접시로 돌아와 다음 음식을 먹었다.
자신의 접시 위로 겹겹이 꿀과 빵, 설탕에 절인 잎사귀가 쌓였을 즈음에야 그녀도 먹을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한꺼번에 숟가락으로 떠올린 투이나가 합, 하고 입 안에 넣었다.
그가 건네주었기 때문인지 볼이 아릿하도록 달았다.
‘맛있어……!’
“즐겁게 드시니 다행입니다.”
투이나의 표정을 본 베인이 식기를 내려놓았다.
투이나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만족하는지 그는 차도 따라 주고 설탕과 우유도 넣었다.
“고마워요. 늘 이렇게 준비하려면 힘들 텐데.”
“루가 님을 위해 이 정도도 바치지 못한다면 상단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에 투이나가 녹진하게 꿀로 적신 빵을 삼켰다.
“참, 그러고 보니 저는 아직 베인이 상단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네요.”
“주된 역할만 말씀드리면 아르힘에 있는 가게들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거짓으로 가격을 올리진 않았는지, 품질은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죠.”
“아아!”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가 꽤 전략을 잘 짰다. 베인이 잠깐 가게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그를 목격한 손님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갈 테니.
‘바깥에서 살 때도 크로퍼드의 명성이 자자하더니 이래서였구나.’
신전과의 교류와 훤칠한 미남으로 다져온 크로퍼드 상단의 기반은 아주 튼튼해 보였다.
물론 의회에서 신전파 수장까지 올라간 레오나의 개인적인 인망도 두터울 터였다.
“그 외에도 누이의 일이 바쁘면 대신 장부를 정리하거나 손님을 맞는 잡일을 합니다.”
“꽤 바쁘네요. 쉴 시간이 걱정될 정도예요.”
“루가 님이 오시면 모든 일정은 비어 있을 겁니다.”
베인이 빠르게 훅 치고 들어왔다.
“저희 집 한쪽에는 정원이 있습니다. 그곳에 루가 님이 좋아하시는 제비꽃을 가득 심어 놓겠습니다. 날이 좋은날 창을 열어 두기만 해도 온통 제가 떠오르셨으면 합니다.”
“지금 저 유혹하시는 거예요?”
투이나가 농담 삼아 말했다.
그러나 그는 농담이라는 방패가 무색할 정도로 진지하게 답했다.
“유혹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덜컥.
대책 없이 심장이 내려앉았다.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 한 번만 주면 그는 당장이라도 이 세상에 있는 제비꽃을 몽땅 옮겨 심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바르르 날개를 떠는 새가 둥지를 튼 것 같았다.
‘이상하다……. 베인이 날 사랑한다고 했던 건 중간부터였는데…….’
사랑에 안달난 사람은 그녀여야 하지 않는가?
미래에서 돌아온 건 그녀니까.
나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간청하는 쪽이 되리라 예상했건만.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던 결심이 무색하게도 베인은 당장이라도 고백을 받아 줄 것처럼 굴었다.
꼭 투이나를 만나자마자 첫눈에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다.
‘그럴 리가 없잖아.’
투이나가 말라 가는 혀를 꼭 물었다.
신전에 들어오기 전에는 단 한 번도 베인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신전에 들어온 뒤에도 가난하고 병든 자가 가장 존귀한 위치에 올랐다고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다.
수상쩍게 나타난 두건을 쓴 여자를 아무리 베인이라도 처음부터 사랑했을 리 없다.
이건 자존감을 떠나 논리의 문제였다.
‘내가 세계를 뒤흔드는 미녀, 뭐, 이런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자신 역시 확실하게 세계를 들었다 놓을 미남인 베인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던 것도 아니었다.
아득히 가슴이 조여들었다.
투이나는 처음으로 그를 사랑한다고 확신한 순간을 떠올렸다.
되살아나기 전의 투이나는 지금보다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갑자기 낯선 곳에 오게 된 것도 당황스러운데 배워야 할 것도, 적대하는 이도 지나치게 많았다.
뭐가 맞는 줄도 모르고 당장 시키는 대로 엄숙하고 권위 있는 루가의 모습을 연출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다니던 얼룩을 감춰야 했고, 시시껄렁한 일로 웃고 떠들며 장난을 쳐서도 안 됐다.
가뜩이나 신전을 견제하는 의회에게 책잡힐 수 없다는 게 큰 이유였다.
몇 달만 기다리면 자진해서 의장이 대형 사고를 터트릴 거였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투이나는 위안 삼아 신전에서 만나는 사람들만이라도 편하게 대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존경도 사랑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라면 차라리 편한 게 낫다 싶어서였다.
그렇게 1년쯤 시간을 쏟자 자주 보는 얼굴들끼리는 나름대로 정이 붙었다.
그러자 이번엔 새로 나타난 구혼자들이 문제가 되었다.
「루가 님은 혼자만의 몸이 아니십니다.」
사제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위로는 아르힘을, 아래로는 백성들을 책임지고 있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귀가 닳도록 쏟아부었다.
그런 상황에 실제로 만난 구혼자들까지 예상보다 훨씬 무서워서 긴장이 빠질 틈이 없었다.
평생 아르힘 밖을 나가 본 적 없던 투이나에겐 모든 소문이 과장이 아니라 진실처럼 들렸던 것이다.
저런 사람들과 어떻게 결혼까지 할지 걱정으로 피가 마르는 투이나를 오직 베인만이 진정시켜 주었다.
샨이 던지는 위협 같은 구애도 없었고, 시드룬처럼 애정을 빙자한 접촉 요구도 없었다.
베인은 마치 루가를 만난 평범한 신도처럼만 대했다. 은은히 애정이 감돌긴 했지만 과하지 않게.
그는 차츰 마음을 놓은 투이나가 루가답지 않은 말실수를 해도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두 편히 여기게 될 거라 위로하기까지 했다.
투이나는 몹시 감동하면서도 그때까지만 해도 베인과 깊은 사이가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어떤 날, 투이나가 그의 의자에서 잠이 든 적이 있었다.
일부러 자려던 건 아니었다. 일정이 너무 많고 피곤해서 어깨만 기대어도 잠이 쏟아지던 날이라.
잠깐 자리를 비운 베인을 기다리다 그녀는 등받이에 뺨을 누르며 눈을 감았다.
깊은 잠은 아니었다.
저벅거리며 다가온 발소리를 분명히 듣고 있는데도 꿈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투이나가 잠든 것을 본 베인은 두 눈을 꼭 감은 그녀를 보고 괜히 부르거나 깨우지 않았다.
몸에 풀썩 따듯한 것이 얹혔다.
그 바람에 몽롱한 정신이 반쯤 깨어났을 때, 조심스러운 손길이 자신을 안아 드는 게 느껴졌다.
그는 잠에 취한 투이나를 잠깐 안아 올려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다시 눕혀놓았다.
의외로 가뿐하게 옮겨서 놀랐다.
무심코 그의 목에 한 팔을 감았던 투이나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베인은 떨어지려는 투이나를 붙잡았다가 살며시 속삭였다.
「루가 님, 잠드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투이나의 귀엔 그 소리가 자장가로 들렸다.
몸을 웅크리며 다시 잠에 빠지려는 그녀를 본 그가 천천히 무릎 맡에 앉았다.
「아직 드리지 못한 이야기를 꿈속의 일로 만들면 어쩌시려구요.」
곤한 숨소리에 베인의 목소리가 꾹 억눌렸다.
「당신에게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건 이미 많이 겪었습니다.」
무심결에 들려온 말에 얽혀 있던 속눈썹이 파르르 열리며 투이나의 눈이 떠졌다.
떠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베인은 이불을 덮어 주느라 잠에서 깨어나 어설프게 굳은 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절이라도 좋으니 꿈이 아닐 때는 일어나 저를 봐 주십시오. 그래야만 저도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절박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혹시 정말로 지금이 꿈이라면 사랑한다고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깨어나겠습니다.」
투이나는 멍하니 말의 무게에 눌린 듯이 한참을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계속 시종이 오는 소리에 베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어쩐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아, 지금 사랑에 빠졌구나.’
……하고 깨달았다.
투이나는 베인과 구혼자로 만난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베인이 만약에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걸 엿듣기만 했어도 자신은 속절없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영원히 짝사랑하는 한이 있더라도.
투이나는 베인과 연인이 된 뒤에도 그때 사실 자기가 깨어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쩐지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종종 대화를 나눌 때면 베인은 투이나가 그때 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갑자기 투이나가 고백을 하고 연인이 된 게 그 직후였으니.
베인은 그 말을 다 들으셨던 거냐는 은근한 기쁨을 다 감추지 못했다. ‘꿈이 아니였군요.’ 하고 중얼거렸으니까.
‘그때 물어볼걸.’
투이나는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베인에게로 돌아왔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언제부터 내 꿈을 꿨는지 물어볼 걸 그랬어.’
되살아난 뒤로 투이나가 그를 의지할 필요가 없어져서일까. 베인은 정중하고 자상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예전보다 초조해 보였다.
지금도 조금만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감정이…….
“루가 님?”
베인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정신을 차린 투이나가 놀라 덜컹 의자를 흔들었다.
“아, 음, 미안해요. 무슨 얘기 중이었죠?”
잠시 한눈을 판 투이나에게 베인은 여전히 상냥했다.
“괜찮습니다. 중요한 얘기가 아니었으니 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무엇이든 루가 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베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순간 고백했던 기억과 겹쳐져 무심코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혹시…… 신전 밖에서 절 만난 적 있나요?”
은은하게 흐르던 온화한 공기가 처음으로 끊겼다.
황금빛 속눈썹으로 감겨 있던 청록색 눈에 짙은 일렁임이 한 꺼풀 생겨났다.
투이나의 눈동자가 덩달아 커졌다.
베인은 잠깐 굳어 버린 듯 방금 들은 질문이 뭔가 한참을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아뇨. 없습니다.”
하지만 단어 너머로 느껴지는 직감은 거짓말이라고 외쳤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동요할 만한 질문이 아니었다.
투이나가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
왜 침묵했는지 물어보면 기억을 떠올리느라 그랬다고 답하겠지만, 표정 변화는 설명이 안 됐다.
‘왜 망설이는 거죠?’
단순히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고 했던 질문이 갑자기 커다란 의문 덩어리가 되었다.
예전에 밖에서 따로 만나 본 게 무슨 죄가 된다고?
투이나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베인이 곧장 화제를 틀었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는 몸이 많이 약했습니다.”
그가 찻잔을 저었다.
“누이의 과보호도 그때 생겨난 것이라, 어렸을 때의 기억이 많이 희미합니다. 힘들었던 시기인지라 혹 루가 님을 만났더라도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그렇습니다.”
베인이 정갈하게 답했다.
그럴듯한 설명이지만 투이나의 마음을 스쳤던 의혹은 자국을 남겼다.
‘무슨 생각이야……. 이 사람은 베인인걸.’
아무리 살해당해서 돌아왔다고는 해도 사람의 본질이 바뀔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오히려 놀라웠다.
투이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차를 마셨다.
“베인도 아팠다니 남 일 같지가 않아요. 그래도 지금은 무척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예. 전부 아르힘 님의 은총이지요.”
베인이 수줍게 말했다.
그러고는 잠깐 망설이더니, 누군가를 의식한 듯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도 한때 검술을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베인이요?”
“예.”
투이나가 깜짝 놀란 걸 오해한 베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투이나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베인이 검을 잡은 건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녀가 잡은 찻잔 속의 수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잘……했나요?”
“건강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무척 노력했습니다.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더 강해지고 싶었거든요.”
어느 무사들 못지않게 탄탄했던 체격은 타고난 게 아니라 수련의 결과였다.
그러나 투이나는 베인이 검을 잡은 모습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리기만 했다.
나를 찌른 검.
배를 꿰뚫고 나왔던 적의.
“안타깝지만 저를 가르쳤던 스승님은 제가 특출한 재능은 없다 말씀하셨…….”
쨍그랑!
투이나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졌다.
“루가 님!”
투이나가 뜨거운 찻물을 앉은 채로 피했다.
사고에 곧장 반응한 라카인이 그녀를 의자째로 잡아끌었던 것이다.
눈앞에서 멀어지는 투이나를 본 베인의 표정이 한순간 변했다.
라카인은 개의치 않고 찻잔을 잡았던 손을 확인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손끝에 닿은 체온 덕분에 투이나가 바로 정신을 차렸다.
놀란 그녀가 손을 뿌리쳤다.
“미안…… 미안해요. 제 실수예요.”
“괜찮으십니까? 많이 놀라 보이십니다.”
“그냥 잠깐 손에 힘이 풀려서요.”
투이나가 애써 밝게 대답했다.
하지만 라카인은 잠깐 닿았던 순간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잘 갈무리하고 있던 의심을 날카롭게 베인을 향해 드러냈다.
가뜩이나 투이나의 반응으로 예민해져 있던 베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투이나는 시종이 건네 준 손수건으로 찻물을 닦는 척하며 열심히 차가워진 손끝을 주물렀다.
‘진정해…….’
베인이 검을 쓸 줄 안다는 게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투이나는 자신이 동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가 않았다.
잠깐이나마 그가 자신을 살해했다고 의심하다니.
거의 아르힘을 배신한 것만큼의 강한 실망감이 가슴을 차지했다.
‘믿는다고 해 놓고 이렇게 쉽게 흔들리면 안 되잖아.’
마음의 비중이 클수록 사소한 일에 더 크게 흔들리는 법이거늘.
검에 찔렸을 때부터 제 안에 뿌려진 의심의 씨앗을 그녀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의심은 결코 씨앗으로 머무르지 못해 자라나고야 만다는 걸, 믿음으로 감싼 자리가 따듯하니 더 멀리까지 자라날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투이나는 이제야 다른 이들에게 가진 커다란 씨앗보다 가장 작은 씨앗에서 움트는 싹이 더 두려워졌다.
“가 봐야겠어요.”
투이나가 뻗어 나가는 줄기를 잘라내려고 애쓰며 일어났다.
베인이 망연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루가 님!”
“가 봐야겠어요.”
흐려진 눈으로 반복한 투이나는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이 아니라는 작은 속삭임을 양심에 압사당했다.
그녀는 도망치듯 베인의 방을 빠져나왔다.
* * *
“상인 놈이랑 싸웠다면서?”
샨의 말이 쿡 날아와 박혔다.
지도를 보고 있던 투이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샨이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투이나가 피곤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샨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다른 사고보다 그녀가 베인의 방에서 뛰쳐나왔다는 소문이 훨씬 빠르게 퍼졌다.
둘 다 온화한 성품에 특별히 사이가 안 좋을 일이 없어서 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으면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샨의 귀에까지 들어갔을까.
투이나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샨은 조언이랍시고 옆에서 이런 소리나 해댔다.
“그렇게 골치 아플 정도면 그냥 죽여 버리지 그래.”
“샨.”
“고통을 참는 것보단 낫잖나.”
샨이 팔짱을 끼고 턱을 까딱였다.
저 새파란 눈동자에 대고 일일이 고쳐 주는 것도 못할 짓이라 투이나가 한숨만 삼켰다.
베인을 의심하는 건 샨을 의심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낮과 밤, 마법사와 신, 거의 그만큼 상극인 짓이다.
샨을 범인으로 짚은 것도 그의 가치관과 몰려 있던 상황을 더해 짐작했을 뿐.
반면 베인 같은 사람이 의도를 갖고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은 머릿속을 아예 뒤집어 놓았다.
“……지도나 같이 봐요.”
억지로 생각을 덮어 버린 투이나가 그를 향해 양피지를 밀었다.
이번 내기를 위해 특별히 만든 물건이었다.
산양 사건 이후 사냥감을 신전으로 들여오는 건 금지되었고, 대신 사제가 한 명 따라가 위치를 기록했다.
정확하게 사냥터의 지형만 알려 줄 수 있도록 따로 지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제들은 산양이 되살아난 일의 배후를 샨으로 확신했다.
「모하세스의 하인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사실이고말고요.」
아르힘은 마법사를 지목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어서 투이나는 난감했다.
혼자만 품어야 하는 비밀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었다.
요즘은 차라리 샨처럼 담백하게 사냥터나 찾자고 내기를 하는 게 마음 편했다.
정작 내기를 하는 장본인이 편해질 만하면 이렇게 쿡쿡 들쑤셔 대서 탈이었지만.
“없앨 수 있는 건 없애는 게 낫다, 루가. 왜 그대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을 보고만 있지?”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죠.”
투이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사냥터를 찾았다고 부른 건 샨이잖아요.”
샨의 미소는 짙어지기만 했다.
“그대도 이미 내기가 구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았나.”
벌레를 튕겨내듯 샨이 지도를 밀쳤다. 파르르륵 떨어진 양피지가 형편없이 바닥에 구겨졌다.
‘정말 대놓고…….’
투이나는 탁자를 짚고 호흡을 골랐다.
샨은 눈치도 없이, 아니,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살살 그녀를 당겼다.
“굳이 고통을 즐기겠다면야 좋은 방법이 있지. 혼수품으로 가져온 물건 중에 좋은 술이 많거든. 아르힘인들은 제대로 된 술을 담그지 않는다는 소리에 빈손으로 올 수가 없더군.”
“오기 전에 약탈이라도 한 건 아니겠죠?”
“하! 그랬다면 편했겠지. 모하세스의 술 맛을 따라올 곳이 드무니 궁에서부터 직접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한 농담에 시종들만 죽을 땀을 삼켰다. 가뜩이나 심란하기도 하고 안개처럼 옅은 부슬비도 내리는 날이라.
투이나의 마음이 충동적으로 확 기울었다.
“좋아요. 마셔요.”
샨의 눈이 번득 밝아졌다.
막상 술을 먹겠다고 하니 사방에서 음식이 튀어나왔다.
얼마나 빠른지 거의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푹신한 샨의 천막에 앉은 투이나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약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대로 미리 잔치 준비를 했던 거예요?”
“잔치라니? 이 정도는 그저 평범한 한 끼가 아닌가.”
샨이 진심으로 되물었다.
투이나도 진심이냐고 묻고 싶었다.
구운 닭고기, 만두, 오리찜, 삶은 돼지고기, 속이 없는 말랑한 흰 빵, 사과, 자두절임, 고기완자, 맑은 탕, 양파절임, 국수, 시큼한 소스를 끼얹은 납작한 튀김, 새빨갛고 기름진 국, 삶고 굽고 튀긴 계란 한 무더기.
천막으로 날라진 음식은 그 외에도 이름을 모르는 수십 가지 다른 게 더 있었다.
게다가 음식을 세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새 음식이 들어왔다.
기가 질린 투이나가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이 다 같이 먹는 거죠?”
샨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누가 감히 왕의 식사에 동참을 하겠나?”
기대한 게 잘못이지.
투이나는 질린 눈으로 쌓여 가는 음식을 바라보았다.
“그만 물러 주세요. 여기 있는 것도 다 못 먹겠어요.”
“생각보다 입이 짧군? 술과 함께 먹으면 다 들어가게 되어 있다.”
샨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는 신경 쓰지 말고 먹으라는 듯 투이나의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술병을 딴 샨이 큼지막한 병을 가볍게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황금 잔을 만지작거리던 투이나가 샨의 눈짓에 잔을 내밀었다.
꼴꼴꼴.
한눈에도 맑고 향기가 고운 술이 잔으로 쏟아졌다.
‘자랑할 만한 술이긴 하네.’
투이나가 물끄러미 쏟아지는 액체를 보고 있자 샨이 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모하세스에서 왕이 술을 따라 줄 때는 높은 공적을 세워 치하하려는 목적이다.”
“전 샨에게 잘한 일이 없는걸요.”
“미리 당겨 받았다고 생각해라. 어차피 나중에 한 번은 경사스러운 일이 생길 것이지 않나?”
무슨 말인가 하던 투이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아, 결혼식…….’
그렇게 말하면 마시기 더 부담스러워지는데.
샨은 투이나를 기다리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투이나는 군침을 삼키는 신전 사람들을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홀짝였다.
순식간에 발끝까지 화한 기운이 부드럽게 번지는 걸로 보아 확실히 최상급이었다.
차려진 음식들도 어떻게 조리했는지 고기가 저절로 뼈에서 떨어져 나가고 빵은 질기지 않았다.
‘맛있긴 맛있다.’
투이나는 잠깐 샨을 잊고 먹는 일에 집중했다. 마음이 허해서 그런지 배 속이 차는 기분이 좋았다.
샨이 잔을 비우는 속도와 투이나의 잔이 채워지는 속도가 비슷했다.
꽤 술이 비워졌는데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마시는 그녀가 신기했는지 샨이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잘 먹는군.”
“다들 열심히 준비해 주신 음식이잖아요.”
“술까지 잘 마실 줄은 몰랐다.”
투이나야 분가루로 피부를 가려 티가 안 난다지만, 샨은 맨얼굴로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주제에 그녀에게 잘 마신다 칭찬했다.
투이나는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아예 대놓고 턱을 괴고 바라보던 샨이 물었다.
“밖에서 살 때 배운 건가?”
“이런 건 그냥 타고나는 거잖아요.”
투이나가 작은 날개구이를 오물 깨물었다.
“술을 억지로 마셔서까지 늘릴 생각 없어요.”
“그래. 술에 잡아먹히면 아니 되니.”
샨이 빙긋 웃었다.
마음에 드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흉흉한 기운을 누르고 지금처럼 느긋하게 굴었다.
그래서인지 샨의 천막에도 드물게 온화한 분위기가 찾아왔다.
적당히 습한 공기에 음식의 냄새가 섞여 천막 안에 가득히 차올랐다.
샨은 싫어했지만 미지근한 공기 덕에 이곳이 무척이나 안락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호위나 시종에게 음식을 전달해 줄 방법을 생각해 보던 투이나의 눈에 두 명 줄어 있는 자리가 눈에 띄었다.
투이나가 살짝 시종을 불렀다.
“호위분들은 어디 갔나요?”
“밖에서 독을 검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없어졌구나.
독을 검사하러 나간 라카인과 그를 감시하러 간 호루니였다.
두 사람 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아직 비가 내릴 텐데.’
투이나가 바깥을 흘끔거렸다.
전에 섬겼던 사람이 독을 탔을 거라 의심하며 맛보는 일이 결코 편할 리가 없었다.
그가 너무 작정하고 미움을 사는 듯해 신경이 쓰였다.
“나도 모처럼 술잔을 나누는군,”
넓게 다리를 꼬아 앉았던 샨이 무릎에 잔을 든 팔을 늘어트렸다. 앉아 있어도 꼿꼿하게 펴진 등 덕분에 그는 여전히 당당해 보였다.
샨은 투이나를 따라서 가는 빗방울로 젖어 있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지?”
“네?”
“구혼 기간이라도 루가는 나갈 수 있잖나.”
샨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렇죠.”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혹시 속은 취했나?’
투이나의 주의가 샨에게 돌아왔다.
그의 옆에 놓인 빈 항아리가 벌써 다섯 개였다. 같이 마신 것들이긴 했지만.
맛으로 짐작해 볼 때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이 술을 두 잔만 마셔도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샨은 덩치가 큰 육식 동물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배부르게 먹고 잠든 짐승이 앞에서 기웃거리는 사냥꾼을 보고 눈만 슬쩍 뜬 것처럼.
“이리 와.”
잠깐 굳었던 투이나가 그냥 또르륵 술을 따랐다. 반절 이상 먹은 술 항아리는 그녀도 들 수 있었다.
샨이 다시 말했다.
“바람이 차.”
“미지근하다면서요.”
“술을 먹으면 차지.”
샨이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은근한 동작과 달리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투이나가 잔을 내려놓았다.
“샨,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오지 않으면 내가 가.”
덜그렁.
샨이 술잔을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털썩 바닥을 짚었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앉은 자리가 이미 가까웠기에 그는 일어나는 대신 몸을 숙여 팔을 내밀었다.
그렇게만 해도 거대한 그의 덩치가 순식간에 투이나를 덮었다.
“샨!”
투이나가 소리쳤다.
그가 술잔을 던졌을 때부터 바짝 긴장한 스카차가 달려들려는 찰나!
“큭…….”
투이나의 얼굴을 그대로 눌러 버릴 듯했던 손바닥이 허공에서 멈췄다.
무슨 생각인지 자리를 피하지도 않은 투이나가 손가락 사이로 샨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
새파란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하나도 안 취했잖아!’
자신의 장난을 알아차린 투이나의 표정을 보았는지 샨이 쑥 손을 도로 내렸다.
“크크, 하하하!”
샨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투이나는 웃을 수 없었다.
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당황한 스카차만 검 집에서 반쯤 빠져나왔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처음부터 웃는 게 목적이었던 것처럼 한참을 큭큭거리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역시 이상하군.”
입은 웃고 있었지만 어느새 샨의 눈에는 웃음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위협하던 그대로 멈춘 손등이 샨의 턱을 가렸다.
“그렇게까지 무서워하지 않으면 의심할 수밖에 없잖나.”
그의 의심에서 질문이 사라졌다.
투이나가 그에게 너무 많이 보여 줬다. 송곳 같은 예리함이 투이나의 목까지 다가와 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본 샨이 이를 벌렸다.
“내 얘기를 어디서 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