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살해한 구혼자 2권6. (6/43)

나를 살해한 구혼자 2권

6.

…제안했다. ‘그렇다면 노래는 어떻습니까, 당신의 오랜…’

단숨에 투이나의 관심은 편지로 쏠렸다.

바닥 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편지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비늘 얘기도 썼어요?”

“썼습니다.”

딱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편지가 있다.

편지를 줍다가 괜히 병만 들킬까 봐 투이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바로 읽을게요. 시간이 걸릴 테니까 이만 돌아갈래요?”

“답장은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신의 부탁대로 감시를 그만두어서 언제 완성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전에 들러서 물어보면 되죠. 앞으로 신전에 안 올 건가요?”

“만날 수 없다면 굳이 신전에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구경이라든지…… 머물면서 식사라도 할 수 있잖아요.”

“첫날 이미 모든 곳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시드룬의 머릿속에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잊힌 듯했다.

“설마 답장을 줄 때까지 계속 그러고 나타날 건 아니죠?”

시드룬은 부정을 안 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어느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라면 답장을 쓰자마자 가져갈 수 있잖아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투이나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다.

“그러지 말고 다음 만나는 일정 때까지 기다리면…….”

“편지를 읽은 후에 나눌 대화도 노출할 수 없습니다.”

시드룬은 단호했다.

보아하니 편지에 대화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내용이라도 적혀 있는 모양이다.

‘시드룬이 이러는 건 처음 봤어.’

상황은 좀 이상하지만 시드룬은 편지를 전하는 일 이상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매일같이 들이닥친다면 힘들겠지만 딱 하루만 더 만나는 일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투이나가 반대해 봤자 그가 작정하고 고집을 부리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서로가 합의한 시간에 맞추는 게 낫다.

결정을 내린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차피 안 보일 거라는 걸 깨닫고는 말했다.

“그럼 내일 밤, 이 자리요.”

“내일 밤.”

확인처럼 말을 반복한 시드룬이 뒤로 물러났다.

마법진은 점점 작아지며 마지막 머리카락 한 올을 빨아들였다.

방은 다시 안온한 밤에 휩싸였다.

마법진까지 사라진 뒤에야 투이나는 서둘러 등불을 켰다.

‘저기 있다!’

바닥으로 몸을 숙인 투이나가 편지를 낚아챘다. 편지는 평범하게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다.

마음이 급한 투이나는 편지 칼도 없이 손으로 종이를 뜯었다.

‘이 편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마법의 기초는 마력입니다. 마력에 반발하는 것은 신의 힘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마법사는 하나를 다루고 하나로 궁극에 이릅니다.

자세히 보니 ‘마법사는’이라는 말 앞에 ‘밝힐 수 없는’이라고 썼던 흔적이 직직 펜으로 그어져 있었다.

마법사들은 현재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끝없는 전쟁에 차출되어 나이가 적고 많음을 가리지 않고 병력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라 하나를 제패할 만큼 뛰어난 마법사는 드뭅니다.

평범한 마법사는 병사 열을 대신하지만, 열한 번째 병사에게 죽임을 당할 만큼 약하기도 합니다.

나는 마법사들 중에 가장 궁극에 가까운 자입니다. 그러나 내 연구는 지금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또다.

어째선지 아까처럼 ‘나는’이라는 말 앞에 ‘시’라고 적었다가 직직 그은 흔적이 또 있었다.

시드룬의 편지는 계속 필체가 변했다. 꼭 중간에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알아보기 힘들게 잉크와 재까지 군데군데 엎질러져 있었다.

‘대체 어디서 쓴 거야?’

투이나가 종이를 뒤집어 살폈다.

편지는 세 장짜리였다.

그때 신과 가장 가까운 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르힘은 워낙 유명한 수호신이기에 루가의 소식도 빠르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를 위해 개인적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었고, 그래서 당신에게 청혼했습니다.

상상도 못 한 청혼의 정체였다.

‘지금까지 시드룬이 왜 청혼했나 싶었는데, 이런 이유였구나!’

투이나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시드룬은 지금처럼 멋대로 방까지 찾아올 수 있는 마법사다.

‘굳이 청혼할 필요가 있었을까?’

투이나의 의문은 뒷장에서 바로 해소되었다.

아르힘의 신전은 신의 보호를 받고 있어 그 안에서는 마법을 자유롭게 쓸 수 없습니다.

다만 구혼 기간에는 아르힘이 힘을 어느 정도 거둬들여 약간의 마법은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아르힘이 완전히 마법을 허용하지 않아 종종 좌표가 어긋나거나 마법이 실패했습니다.

연구에 적합한지 알아보려면 대상과 자주 접해야 합니다.

정확한 좌표로 실패를 줄이고자 당신에게 비늘을 전한 것입니다.

드디어 비늘 얘기가 나왔다.

투이나가 바짝 종이를 끌어당겼다.

비늘은 내 연구의 일부입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지만 큰 마력은 없기에 좌표로 삼기에 적절하다 여겼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비늘을 사용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보았던 그 문.

투이나의 호흡이 흔들렸다.

시드룬의 목소리가 편지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당신이 열었던 그 자리, 그 장소, 그 세계를 기억합니까?

현실이자 현실이 아닌 곳, 영혼이 가는 땅이자 신이 내려오는 하늘, 세계의 저편.

그곳이 내가 찾는 궁극입니다.

투이나는 잠시 편지를 내려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투이나가 보았던 장소는 기괴하고 다시는 접근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드룬은 바로 그 끔찍한 곳에서 신이 왔으며, 인간이 죽은 뒤에 간다고 써 놓았다.

수호신이 있는 한 백성들은 죽은 뒤에 영원히 방랑하지 않고 신의 곁에서 쉴 수 있다고 배웠는데.

투이나는 혼란스럽게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시드룬은 너무도 당연하게 신이 사는 세계를 말했다.

설마 마법사가 신의 힘을 훔친다는 소문이 진짜라도 된단 말인가.

투이나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편지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결국 나머지 부분도 읽어 내렸다.

마법사는 신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 준비를 했습니다만, 당신이 그곳을 열었다면 더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루가는 확실히 아르힘의 가호를 받고 있더군요.

평범한 인간은 문을 보자마자 죽습니다. 많은 마법사도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당신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비늘을 사용한 당신을 통해 문이 열렸는지 당장이라도 알아내고 모든 것을 실험해 보고 싶습니다.

연구가 필요합니다.

내가 있는 차원으로 와 주십시오.

‘차원?’

그를 아무리 찾아도 신전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보고와 구혼자는 신전을 떠날 수 없다는 아르힘의 말이 겹쳐졌다.

‘신전에 있으면서도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짐작했지만…… 그곳에 날 끌어들인 적은 없었어.’

투이나가 입술을 잘근잘근 눌렀다.

연구를 도와준다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도 돕겠습니다. 무엇이든.

협상도 가능합니다.

‘협상’ 글자에는 크게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까지 표시해 놓았다.

이 일에 모든 마법사의 운명이 달렸습니다.

여기까지가 아르힘이 알고 있는 내용이자 당신이 ‘바깥’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내 제안을 수락해 주십시오.

투이나가 복잡한 얼굴로 편지를 내려놓았다.

요약해 보자면 시드룬은 신이 있는 세계를 열고 싶어 한다.

그런데 투이나가 우연찮게 그 세계로 가는 문을 열었고, 눈이 돌아간 시드룬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연구하겠다 나선 것이다.

‘게다가 이게 다 이미 아르힘 님이 알고 계신 내용이라고?’

어느 것부터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허벅지 위에 편지를 펼쳐 놓은 투이나가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읽기 시작했을 때 투이나는 엎드려서 턱을 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끌리는 부분은 단 하나였다.

“연구를 도와준다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투이나가 작게 따라 읽었다.

죽기 전이었다면 그래도 될까 싶어서 망설였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구혼자를 줄일 수 있다면 샨을 조사하기도 편해지고 베인과 결혼하는 일도 간단해진다.

게다가 시드룬의 연구에 마법사들의 운명이 달렸다니 무턱대고 거절하기도 난감했다.

무슨 의미로 운명이라고 얘기한 걸까.

문제는 그가 문을 여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자신은 많은 고통을 겪을 거란 예감이었다.

비늘을 물고 겪었던 일은 두 번 다시 떠올리기도 싫었다. 생각만 해도 오한이 서렸다.

누군가가 다시 겪어 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번에도 아르힘 님이 도우러 오실 거란 보장이 없잖아.’

오히려 쓰러질 때마다 아르힘이 나타난다면 창피해서 루가의 자리를 자진 사퇴할지도 모른다.

나라 전체를 보살피는 신을 자꾸 불러내는 죄책감은 그만큼 컸다.

편지를 받았는데도 궁금증이 해결되기는커녕 질문만 늘어났다.

밤새 끙끙거리던 투이나는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 * *

투이나가 퀭한 눈을 치덕치덕 분으로 가렸다.

“어머, 루가 님, 웬일로 먼저 화장을 하셨어요?”

“슬슬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하하.”

투이나가 엉성하게 웃었다.

아침 식사를 가져온 시종은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루가 님이 대신 해 주시면 좋지만 바쁘신 분이 시간을 이런 데 쓰시면 되겠어요?”

“이런 일은 맡기셔도 됩니다.”

시종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이 이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으라는 듯 식사 쟁반을 쥐여 주어서 투이나는 얌전히 아몬드죽만 떠먹었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유난히 입이 썼다.

당장이라도 아르힘에게 달려가서 상담하고 싶은데 시드룬이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으으, 어떡하면 좋아.’

머리는 무거워도 배는 채워야 했다.

밥투정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짓이라 믿는 투이나는 깔깔하게 혀에 걸리는 죽을 억지로 삼켰다.

오늘 아침 호위는 라카인과 스카차였다.

깨작거리는 걸 본 라카인이 물었다.

“입맛이 없어 보이십니다. 지난밤에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니에요.”

투이나가 손사래를 쳤다.

“그냥 조금 피곤해서…….”

팅.

그때 흔들리는 손가락 사이로 숟가락이 떨어졌다.

‘어라?’

투이나는 왜 갑자기 숟가락이 떨어졌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누가 옆에서 건드린 것도 아닌데.

머리가 띵했다.

“루가 님?”

윙 하는 소리가 귓가에 찌르르 울렸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저절로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으윽!”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 투이나가 배를 움켜쥐었다.

사람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루가 님!”

“배, 배가 찢어질 것 같아요!”

투이나가 절절 끓는 비명을 잇새로 눌렀다.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투이나가 할퀴듯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숟가락을 떨어트리자마자 뛰어온 라카인이 시종을 제치고 그녀를 붙들었다.

라카인은 딱 한 번 상태를 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억지로 투이나의 입을 벌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목구멍을 쑤셨다.

“토하십시오.”

“욱, 으으……!”

갑자기 들어온 이물질에 놀란 투이나가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카인은 무례를 무릅쓰고 그녀의 몸을 단단히 잡았다.

“아이고, 루가 님!”

“무례한 놈! 그 손 당장 떼지 못할까!”

“호위!”

뒤늦게 스카차가 뛰어왔다.

라카인은 딱히 그를 막지도 않았다.

스카차가 어깨를 잡아채든 말든 우악스러운 손을 입에 끝까지 찔러 넣기에 바빴다.

“토하십시오!”

“우엑! 욱!”

목 안을 찔린 투이나가 기어이 허리를 꺾었다. 그 와중에도 침대에 토하지 않으려는 투이나를 라카인이 꽉 붙들었다.

속에 있던 걸 죄다 게워낸 뒤에야 투이나가 힘없이 늘어졌다.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린 시종들이 라카인을 붙들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독을 드셨습니다.”

“뭐라고요?”

날카로운 웅성거림이 공기를 갈랐다.

스카차가 황급히 엎어진 죽 그릇을 붙잡았다.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그는 증거물인 그릇을 꽉 쥐었다.

“독살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누가 감히 루가 님에게……!”

라카인은 남이 얼마나 경악하든 투이나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쉬는지 확인한 그가 손목을 쥐고 맥박을 확인했다.

루가의 몸에 손을 대는 라카인을 보면서도 시종들은 어쩔 줄 몰랐다. 뭘 하는지 몰라도 그가 그녀를 구하려는 것처럼은 보였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바로 토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투이나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눈에 띄게 파르르 떨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라, 라카인…….”

“배가 아직도 찌르는 듯하십니까?”

“아, 아뇨……. 그, 그냥…… 추, 추, 추워요.”

라카인이 이불로 그녀를 감싼 다음 뒤에서 안았다.

독은 토해냈어도 바로 기운을 보충해 주지 않으면 부작용이 남을 수 있었다.

뜨뜻한 체온이 전해져 오자 투이나는 간신히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 으…….”

“물을 가져오십시오, 최대한 많이.”

“예? 아……. 예.”

라카인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요구해서 시종이 움직였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투이나가 이를 딱딱거리면서 살아 있는 건 라카인 덕분이다.

라카인은 직접 물을 마셔 독이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멀쩡한 물임이 확인된 뒤에는 투이나에게 세 주전자나 마시도록 강요했다.

“그, 그만…….”

“남은 독을 희석시켜야 합니다.”

“더는 모, 못 마시겠어요.”

또 속이 울렁거려서 투이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고치처럼 그녀를 단단히 싸맨 라카인이 옆구리로 위치를 고정했다.

“그릇은.”

“여기 독이 들은 게 확실한 거죠?”

“확인해 봐야겠다.”

라카인이 그릇 바닥에 약간만 남은 죽의 냄새를 맡았다. 그의 코끝이 금세 씰룩였다.

“루가 님, 혹시 드시면서 맛이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게…… 이상하게 썼던 것도 같고…….”

투이나가 끙끙거리며 앓기에 라카인이 다리까지 동원해서 이불을 휘감았다.

보기 흉한 자세에 시종 하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말만 한 사내에게 감싸인 꼴이니.

라카인은 그대로 죽 그릇을 입가로 가져가 약간 맛을 보고는 곧장 도로 뱉었다.

“이 요리를 만든 사람이 누굽니까.”

“그야 늘 똑같이 요리장이…….”

“가서 붙잡아 오십시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허둥지둥 뛰어갔다.

스카차가 맨 앞이었다.

투이나는 그동안 자꾸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웅크렸다.

“독이란 게 워, 원래 이래요?”

“독마다 다릅니다만 루가 님이 드신 것은 심각한 독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목숨만 앗아가는 정도입니다.”

먹으면 죽는 독이 그냥 평범한 정도면 다른 독은 도대체 어떻게 된단 소리인가?

투이나의 안색이 더 나빠졌는지 그가 덧붙였다.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지만 강한 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다 드신 게 아니고 곧장 토했으니 큰 후유증도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혹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루가 님은 신께서 치료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라카인은 평이하게 말했지만 투이나는 괜스레 오한이 들었다.

‘그래도 문제인걸요…….’

투이나는 오들거리며 몸에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카차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요리장을 끌고 들어왔다.

그가 바닥에 쿵 엎어졌다.

“루, 루가 님! 저, 저는 억울합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루가 님을 해친단 말입니까!”

“시끄럽다!”

스카차가 사납게 검집으로 등을 쿡 찔렀다. 끌고 오는 길에 비로소 분노가 치민 모양이었다.

“사실대로 말해라!”

“정말입니다! 신전에서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요리장이 억울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바닥을 쳤다.

절절한 외침이었으나 그를 향한 시선들은 대부분 차가웠다.

“당신이 독을 넣은 게 아니면 우리가 넣었다는 소리밖에 더 돼?”

“그리고 식사를 가져올 때 시종들은 함께 움직입니다. 누가 따로 뭘 넣었으면 대번에 들키지!”

“억울합니다, 루가 님! 아르힘 님께서 보고 계셨으면 제 편을 들어 주셨을 겁니다!”

쿵쿵.

요리장이 바닥을 치며 항변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이자가 감히 누굴 들먹이느냐!”

“소리치지 마라.”

라카인의 말이 격해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가 님이 계신 자리다.”

요리장이 딸꾹질을 했다. 그제야 이불에 말려 있는 투이나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사, 살아 계시네……?”

“그래서 아쉽다는 거냐!”

“기, 기뻐서 한 소리입니다! 놀라서요! 살아 계시니 직접 말하겠습니다! 루가 님! 전 정말……!”

“목소리.”

라카인이 낮게 말했다.

곧장 싸하게 공기가 식었다. 라카인은 세 번 경고 안 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요리장의 무릎이 착 접혔다.

“저는 정말 시키는 대로 요리만 했을 뿐입니다. 사제님들이 식단을 짜서 전달하는 건 다들 알잖아요? 제가 따로 뭘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요리장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라카인은 투이나를 향해 말했다.

“루가 님이 드신 독은 야생 아몬드입니다.”

“엥? 야생 아몬드랑 그냥 아몬드랑 차이가 있습니까?”

“둘 다 독이 있는데, 야생 아몬드의 독이 더 강합니다.”

“그, 그럼 제가 만든 게 잘못이 아니라 아몬드가 문제였네요! 당장 납품업자를 잡아다가……!”

섣불리 죄에서 탈출하려는 요리장을 라카인이 붙들어 앉혔다.

“아몬드의 독은 열을 가하면 없어진다. 죽으로 만들었으면 먹어도 문제가 없어야 정상이다.”

“그럼 음식이 완성된 다음에 넣었다는 소리잖습니까.”

스카차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시종을 바라보는 눈빛에 의심이 섞였다.

시종들이 펄쩍 뛰었다.

“저희도 아니에요!”

“루가 님을 몇 년이나 모셨는데요!”

“누구는 아닌 줄 알아!”

“루가 님이 즉위하신 지 이제 일 년이 넘었는데 다들 무슨 소립니까?”

점점 가관으로 치닫는 대화에 스카차가 황당해했다.

“싸우지들 마세요…….”

투이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스카차와 시종들이 한꺼번에 시끌시끌해졌다.

“괜찮으십니까, 루가 님?”

“세상에, 세상에.”

“버틸 만해요.”

아직 몸이 으슬으슬했지만 차츰 떨림은 가라앉았다. 라카인의 말대로 강한 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요리장님이 저를 독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요리장이 억울하게 소리쳤다가 눈총을 받았다.

라카인이 서슬 퍼런 기세로 일어나려다 투이나가 다리 위에 앉아 있어서 멈췄다.

그러나 주먹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나서 요리장이 힉, 하고 목소리를 줄였다.

“제가 루가 님께 감사하면 감사했지. 아유, 진짜 눈물이 다 납니다.”

“당장이야 이유가 없을지 몰라도 조사해 보면 나오겠지요.”

“다른 자의 사주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정말 아닙니다요! 제가 그런 짓을 왜 합니까? 만약 제가 진짜 범인이라고 칩시다. 독살에다가 거짓말까지 했으니 아르힘 님이 당장 저를 불태우셨어야지요!”

마지막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투이나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의장이 화상을 입은 일은 이미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시종들이 주춤한 사이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믿어요.”

“루가 님……!”

감격한 요리장이 울먹거렸다.

‘꼭 아르힘 님 때문은 아니지만…….’

자신한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신이 징계를 내린다는 소문은 피하고 싶었다.

투이나가 힘없이 말했다.

“독살에 굳이 야생 아몬드를 쓸 필요는 없죠. 아마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장님이나 부엌에 드나드는 다른 분들에게 덮어씌우려는 속셈일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냥 실수라고 속일 수도 있으니…….”

“더 말하지 마십시오.”

라카인이 기운을 짜내는 투이나를 말렸다.

“많이 좋아졌어요. 원래 건강한 사람은 독을 먹어도 약이 된다잖아요?”

정말로 농담까지 할 여유가 생겼다.

라카인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다물었다.

투이나가 웅크렸던 몸을 폈다.

“그러니 일단 조용히 넘어가요. 다른 분들에겐 그냥 배탈이 났다고 하세요. 제가 신전에 처음 왔을 때 자주 그랬잖아요.”

“식사를 못 하시다가 갑자기 많이 드셔서 탈이 난 거랑 독을 드신 거랑 어떻게 같습니까!”

“아침부터 고기 먹고 체했다고 하시면 되죠.”

투이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튼 제 위장이 약하다고 소문을 내도 좋으니까 이 일은 함구해 주세요.”

그녀의 부탁에 시종들의 입술이 쭈그러들었다.

스카차는 강경했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감히 루가 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묵과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세한 조사는 스카차에게 맡길게요.”

투이나는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의 말도 틀린 데가 없었으니까.

“대신 딱 하루만이에요. 저도 오늘은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호위도 쉰다고 생각하고요. 괜찮겠죠?”

“예!”

갑자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스카차의 어깨가 바로 꼿꼿해졌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범인을 잡아오겠습니다!”

스카차는 서둘러 호루니를 찾으러 나갔다. 그녀랑 교대한 뒤에 본격적으로 조사할 작정이었다.

“요리장님도 따라가 보세요.”

“예? 예, 루가 님!”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굽실거린 요리장이 후다닥 나갔다.

투이나가 라카인의 팔로 늘어졌다.

“그럼 전…… 누워야겠어요.”

박박 긁어모은 기력을 다 쓴 투이나의 발음이 뭉개졌다.

투이나는 깨끗하게 새로 치운 침대에 다시 눕혀졌다.

시종들은 걱정스러워하며 계속 옆에 있으려고 했지만 정작 투이나는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한사코 사양했다.

라카인도 남을 생각이었지만 아르파인을 그녀와 단둘이 남겨 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랑이 끝에 겨우 방 안이 조용해졌다.

투이나는 당장이라도 잠들어 몇 시간은 깨어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아릿한 정신 한 가닥이 꿈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었다.

‘두 번째야.’

예전에 없었던 사고가 연달아 두 번이다.

샨의 거처에서 활시위에 맞은 것에다 자신의 방에서 독이 든 죽을 먹은 것까지.

간격조차 짧았다.

‘대체 누가?’

무엇보다 과거와 달리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암살을 시도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치…… 내가 되살아난 걸 알아차린 것 같잖아.’

투이나가 뜬눈으로 생각했다.

미래의 일은 알 수가 없다. 어떤 나라의 수호신은 예언을 해 준다고 하지만, 적어도 아르힘에 가까운 나라 중에 그런 수호신은 없었다.

‘대체 누가 알겠어?’

세상에서 오직 신과 자신만 아는 비밀이다.

되살아난 당사자인 자신조차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건만.

투이나가 끙끙 앓았다. 심신이 다 괴로웠다.

‘어렵게 생각하면 꼬이는 거야. 살인자가 내가 살아난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의심하지 말자. 차라리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자연스럽잖아.’

투이나가 힘겹게 추측을 끌어갔다.

‘내가 예전과 다르게 행동해서 새로운 변수가 생긴 거야.’

죽었다 살아났다고 또 다른 살인자가 생기다니.

갑자기 인생에 회의감이 든다.

그렇게까지 잘못 살았나?

막막함이 뺨을 때렸다. 이마에서 열도 나고.

투이나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너무 피곤했다.

밤을 새우고 몸까지 다친 탓에 투이나는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딱 한 문장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면…… 그도 내 구혼자일까?’

뛰어내릴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투이나는 잠을 향해 고꾸라졌다.

* * *

톡, 톡.

무언가가 가볍게 뺨을 두드렸다.

투이나는 무거운 몸으로 눈을 떴다. 세상모르고 잤더니 벌써 주위가 어두컴컴했다.

묘하게 어슴푸레한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뜨던 투이나는 곧 기겁했다.

빛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시, 시드룬……!”

“일어났습니까.”

머리만 동동 뜬 시드룬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언제 왔어요?”

“약속한 시간에 왔습니다.”

혹시라도 쫓아낼까 봐 그러는지 시드룬이 강조했다.

“그랬죠, 참. 제가 일이 좀 생겨 여태까지 잤네요.”

“편지는 읽었습니까?”

“네.”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투이나가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이대로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시드룬이 또 빤히 바라보았다.

“나를 가지고 무슨 연구를 할지, 어떤 짓을 하려는지 설명이 하나도 없잖아요. 부족해요.”

“여기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만요. 시드룬이 산다는 차원이란 게 뭐죠?”

“여…….”

“기서는 말할 수 없어요?”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받았다.

시드룬이 오기 전에 푹 자 두길 잘했지. 체력은 모자라도 상태가 회복되어서 대화할 만했다.

말이 끊긴 시드룬이 눈을 깜박였다.

“……직접 보는 게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군요.”

시드룬이 창문을 열듯이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내려와 있는 마법진의 한쪽이 옆으로 점점 커졌다.

사람 하나가 더 들어갈 공간이 생겼다.

“들어오십시오.”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투이나가 약간 당황했다.

“내가 사는 차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여기는 안전합니다.”

시드룬이 양 팔을 내밀었다.

투이나가 흘긋 마법진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들판 같았다.

“저번처럼 기절하긴 싫어요.”

“그러지 않을 겁니다.”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무릎을 폈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던 걸까. 침대 위에서 그를 향해 다가가니 마치 꿈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잠옷을 입은 채 마법사의 어깨를 붙들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으로 끌려들어간다.

살짝 마법진 안쪽만 엿보려고 했던 투이나는 그대로 허리를 붙들렸다.

“앗, 잠깐만요!”

침대를 디디고 있던 발이 허공으로 들렸다. 시드룬이 동아줄처럼 그녀를 잡아당겼다.

잠깐 허공으로 발장구를 치던 투이나는 단숨에 마법진 안쪽으로 떨어졌다.

쿵.

투이나가 앞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얼떨결에 고개를 들었다.

생기발랄한 봄 냄새가 났다.

무릎에 으깨진 잔디에서 나는 향이었다.

마법진 안쪽은 상상했던 것만큼 무시무시하진 않았다.

따스하게 햇볕이 잘 드는 공터에는 작은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울창한 숲은 마을을 보호하듯 끝을 알 수 없이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멀리서 새소리까지 들렸다.

“여기가…….”

“제가 사는 곳입니다.”

시드룬이 똑같이 바닥에 앉았다.

워나 호흡이 얕아서 몰랐는데, 보일 듯 말 듯 오르내리는 가슴이 그도 숨을 쉬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당신이 만든 차원이에요?”

“아니요.”

시드룬이 새근거리는 숨으로 답했다.

“여긴 마법사의 마을입니다.”

투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후 호흡이 가라앉은 시드룬이 좀 더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는 공간을 다루는 마법사입니다.”

시드룬이 마법진을 닫았다.

침대만 남아 있던 투이나의 방이 사라졌다.

“원래 마법사들은 서로를 잘 모릅니다. 각기 다른 곳에서 태어나서 마법을 수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많은 마법사가 도주했고, 안전한 장소를 갈구했습니다.”

시드룬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내 존재를 안 마법사들은 도피처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대가로 연구를 도와주겠다면서 말이죠.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습니다.”

“여기가 바로 그 장소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사람의 흔적이 없는 장소로 마법사들을 데려왔고, 그들이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여기가 실제로 바깥 세상에 있는 곳이란 말이에요?”

시드룬이 고개를 기울였다.

“안전을 위해 정확한 위치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아르힘에서 꽤 먼 곳입니다.”

차츰 이해가 되었다. 수호신이 없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스스로를 직접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수호신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신이 다스리는 땅을 벗어나면 대부분의 힘을 잃습니다. 아르파는 독특한 경우이긴 합니다만.”

그제야 투이나는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연구는 어떻게 진행할 거죠?”

“다시 한번 비늘에 접촉해 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싫어요.”

“어디까지 가능할지 허용 범위를 천천히 늘려 가겠습니다. 다른 마법도 병행해 보고, 신체의 일부로도 시험해 보지요. 일단은 머리카락이나 손톱 정도가 좋겠습니다.”

‘일단은’이라는 단어가 불길하다.

투이나가 더 물어보려는 찰나,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들 월에 녘이 없는 어린 아가씨를 잡아갔네.”

시드룬과 투이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까르륵 웃는 소리와 함께 붉은 머리를 가진 꼬마와 두 사람이 오솔길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또 해 줘! 더 해 줘!”

“그마안. 아빠 목 닳겠다.”

그림으로 그린 듯 화목한 가족이었다.

꼬마랑 닮은 다홍머리 여자가 잔디밭에 앉아 있던 그들을 발견했다.

“어이, 시드룬!”

“아는 사람들이에요?”

“마법사입니다.”

놀란 투이나가 서둘러 일어났다.

가까이서 본 마법사 가족은 생각보다 온화하고 푸근한 인상이었다. 그동안 마법사는 다 시드룬처럼 무섭고 기이할 줄만 알았다.

보기 좋게 살집이 잡힌 중년의 여인은 평범하게 옆집에서도 만날 법한 인상이었다.

가까이 온 그녀가 스스럼없이 시드룬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어쩐 일로 손님을 데려오셨네? 이 처자는 누구신가.”

“아르힘의 루가.”

“안녕하세요? 투이나예요.”

투이나가 얼른 인사했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던 그녀가 입을 벌렸다.

“아, 알겠다. 시드룬의 약혼자잖아?”

“구혼자예요!”

“그래, 결혼은 아직 안 한 사람. 똑같은 뜻이지, 뭐.”

대충 대답한 그녀가 소개했다.

“난 수리시. 이쪽은 내 남편 바즈아둡이랑 내 자식 쿠즈야.”

“반갑습니다.”

“안녕!”

두 사람이 동시에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즈아둡은 얼굴보다 큰 안경을 끼고 유순한 인상이었으며, 쿠즈는 대여섯 살쯤 되는 볼이 통통한 아이였다.

투이나가 양손으로 악수했다.

그들은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안녕?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계속 앉아 있던 시드룬이 그때서야 허리를 기울였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악수를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건…….”

‘처음 악수를 하자마자 마법을 써서 그랬죠.’

투이나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 시드룬이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엄청나게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단상을 내려갔다.

그때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이유를 몰랐다.

‘아무리 물어봐도 무슨 마법을 썼는지 알려 주지 않았지.’

함께 마법진에 들어온 지금도 시드룬은 의문투성이다.

‘시드룬의 마법은 공간이랬지. 그러면 그건 뭐였을까? 왜 나를 만나자마자 그렇게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야만 했을까?’

수리시가 상념을 깨며 혀를 찼다.

“됐어. 저런 말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말라고. 시드룬이 이상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거든.”

핀잔을 섞은 수리시가 물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왔기에 옷차림이 이래? 자다 나왔어?”

“아.”

그제야 잠옷 차림인 걸 깨달은 투이나가 황급히 차림새를 점검했다.

다행히 쓰러지기 전에 화장을 끝내서 피부는 깨끗했지만 머리카락이 그대로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의 반응을 오해한 수리시가 걸걸하게 웃었다.

“너무 놀라지 마. 예쁘장한 차림새에 안 맞게 머리를 풀어헤쳐서 그런 거니까. 색도 진하니 손질하면 좋겠네.”

“음……. 네?”

당황한 투이나가 어버버거렸다.

천만다행으로 얼룩이 까맣게 변한 덕분에 원래 머리카락 색에서 두드러지지 않은 모양이다.

적갈색 머리카락에 회색 얼룩이 있는 건 이상하지만 군데군데가 까맣다면 그냥 혼혈이려니, 머리색이 섞였으려니 생각하니까.

‘다행이다!’

처음으로 병이 악화된 게 고마웠다. 적절하게 시기를 맞춘 셈이다.

다채롭게 변화하는 투이나의 표정을 보던 수리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계속 밖에서 이야기할 거야? 우리 집으로 가자고.”

수리시가 대장처럼 앞장선 덕분에 시드룬과 뒤에서 얘기하기 편했다.

투이나가 물었다.

“저분도 연구에 대해서 아나요?”

“많이 돕는 마법사 중 한 명입니다.”

“시드룬이 하는 연구는 신이 계신 세계를 찾는 거라고 했죠.”

시드룬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찾아냈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여는 방법입니다.”

“그곳에 가면 뭐가 달라지나요?”

“끝이라는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모호한 대답을 한 시드룬이 멈췄다.

수리시의 집은 문턱이 낮아서 그가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투이나는 바닥에 끌리는 시드룬의 머리카락을 밟지 않으려고 기다렸다 들어갔다.

“손님들은 아무 데나 앉아.”

수리시가 대충 손을 저었다. 정말로 아무 데나 의자가 있었다.

소파 옆에 방석과 갈대 의자와 해먹과 천 뭉치가 한꺼번에 같이 있었다.

거실 중앙에는 뜬금없이 사다리처럼 높은 의자가 있었다.

각자 좋아하는 자리가 있는지 쿠즈가 다 해진 천 위로 기어올랐다. 시드룬도 자주 와 봤는지 자연스레 해먹에 걸터앉았다.

“얀마, 거기 앉지 말라니까. 그물에 머리 엉켜서 고생한 거 까먹었어?”

시드룬이 흘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날 땐 문제없어.”

“너야 문제없지. 머리카락이 죄다 끊어지면 보는 사람만 기절하는 게 문제지.”

“시드룬 머리카락 좋아!”

쿠즈가 방긋 웃으며 천 뭉치에서 동그란 공을 꺼내 들었다. 색이 익숙한 연보라색이었다.

“저게 다 머리카락이에요?”

“그래. 놓고 갈 때마다 쌓였더니 저렇게 됐네.”

“암냠얌.”

“쿠즈, 지지야, 지지. 삼키면 안 돼.”

부들부들한 머리카락 공을 깨무는 아이를 바즈아둡이 데려가 안았다.

깜찍한 장면이긴 한데 손에 든 물건때문에 신경 쓰였다.

‘고양이도 아닌데 저걸 입에 넣어도 되나.’

걱정 반 고민 반으로 투이나가 소파에 걸터앉았다.

“사실 여기 올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 일 줄은 몰랐어요.”

“왜? 마법사들 사는 데라서?”

수리시가 피식 웃었다.

투이나도 빙그레 입매를 올렸다.

“뭐, 소문이 살벌하면 우리야 편해. 지금도 마법사 좀 잡아 보겠다고 난리인데, 평생 도망 다니기는 싫거든.”

“마법에 대해 알려진 게 없어서 다들 예민해진 것 같아요. 마력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랬음 편하게?”

수리시가 턱을 괴었다.

그동안 시드룬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쿠즈를 방치함으로써 놀아 주었다.

“대충 얘기는 들었어요, 루가 님. 귀하신 몸인데 존대해야 맞겠지?”

“아, 아뇨. 말 편하게 하세요.”

“시드룬도 댁한테 말 안 놓던데?”

“저도 아직 못 놨으니까 괜찮아요.”

“쯔쯧. 이렇게 어색해서야 무슨 연구를 하고 결혼을 해.”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 보충하면 된다.”

시드룬이 잠잠한 눈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뭘 보충해야 하는지 알려 줄 차례네요.”

투이나의 말에 해먹에 앉아 있는 사람치고는 놀랍도록 흔들리지 않는 시드룬이 입을 열었다.

“마법은 발현하는 순간 역할을 다합니다. 마법사가 수양하는 것은 마력을 이용하는 방법이자 목적입니다.”

그가 손 위로 작은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방금 전까지 쿠즈가 가지고 놀던 머리털 공이 쑥 튀어나왔다.

직접 공을 잡고 있었음에도 쿠즈는 언제 사라졌는지 보지도 못했다.

어리둥절해진 쿠즈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바즈아둡이 낚아채 방으로 들어갔다.

“발현이라면, 우연히 마법사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시드룬은 다시 마법진을 만들었다.

“소문처럼 나라가 없는 자들만 마법을 갖는 건 아니지만, 수호신의 힘이 강할수록 발현하는 자가 적습니다. 일례로 아르힘에선 아직 한 명의 마법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는 어디 가서 하지 마.”

수리시가 경고했다.

투이나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떤 마법사가 나타났는지 파악하고 있다는 게 퍼지면 전쟁 중인 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붙잡으려 들 것이다. 마법사를 몽땅 잡아들여 마법사 군대를 만들 수도 있으니.

시드룬이 말을 이었다.

“마력과 신의 힘이 서로 반발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마법사의 출현까지 관계가 있다면 둘은 더 긴밀하게 엮이지 않겠습니까?”

그가 단숨에 모든 마법을 거둬들였다.

깜박이던 마법진이 제각기 사라졌다.

밝은 것이 꺼지니 아까보다 어두워진 착각이 들었다.

“나는 마법에 나타나는 반발을 이용해 신을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신과 같은 반발을 이끌어내는 차원을 찾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단순히 마법의 반발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어려웠습니다. 신의 힘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절 찾아왔군요.”

“그렇습니다.”

시드룬이 끼익 해먹을 끌었다.

설명을 듣고 나니 왜 밖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인지는 이해했다.

첫째로 신이 사는 세계의 실존성이었다.

사제들이 신앙이 먼저냐 신이 먼저냐 싸우기는 했어도 각각의 독립성을 주장하진 않았다.

그런데 시드룬은 신이 사는 차원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둘의 상관성을 부정한 것이다.

너와 신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사제가 아니라 신도에게 말했어도 뺨을 맞을 이야기였다.

둘째는 아르힘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의 문제였다.

시드룬이 편지로 언급했듯 그가 결혼해 알콩달콩 잘 살려고 청혼한 게 아니라는 걸 투이나도 알고 아르힘도 알았다.

어쨌든 그가 청혼을 했기에 투이나 결혼 후보에는 포함시켰다.

하지만 투이나가 마법사를 돕는 것까지 아르힘이 예상을 했을지는 미지수였다.

신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인간이 찾아내기를 원할까?

모든 수호신이 이교도와 불신자를 대하는 방법을 떠올린 투이나는 완전히 혼란스러워졌다.

아르힘과 가장 가까운 자신이 마법사에게 회유당하는 게 아닌가 겁도 났다.

지금 투이나는 신의 품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발을 뺄 순 없다는 강한 직감이 왔다.

“그곳에서 마법사의 신이라도 찾을 생각인가요?”

“우리가 신을 믿었으면 이미 마법사가 아니었겠지.”

“그럼에도 우리는 신과 함께 있습니다.”

수리시와 시드룬이 번갈아 답했다.

오랫동안 고민한 자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차분히 대답을 기다리는 그들을 보니 순간의 충동으로 답변하는 건 정말 못 할 짓이었다.

투이나가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생각해 볼 시간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시드룬은 선선히 승낙했다.

비록 말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다시 한번 잡아끌고 싶은 듯 보이긴 했지만.

긴장을 깨듯 수리시가 피유 하고 한숨을 쉬었다.

“됐다.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지.”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아르힘은 한밤중인데…….”

“그래서 안 먹는다고?”

투이나의 배에서 요란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수리시가 피식 웃고 투이나도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요. 야식이라 더 맛있게 먹겠다는 뜻이었어요.”

“좋아! 배 터지게 먹여 주마.”

껄껄 웃은 수리시가 남편을 부르러 일어났다.

투이나는 아침 식사도 토하고 잠만 잔 터라 무지하게 고프긴 했다.

시드룬은 더 이상 연구 얘기를 하지 않아 골이 난 건지 영혼이 없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투이나가 옆으로 다가갔다.

편하게 바닥에 앉아 길게 늘어진 시드룬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시드룬.”

그녀가 해먹에 걸린 머리카락을 한 올씩 풀었다.

시드룬이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원하는 걸 찾아낸 다음엔 뭘 할 건가요?”

“…….”

그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드룬은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의 다음까지 생각할 만큼 여유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투이나가 답을 원하는 것 같기에 시드룬이 입술을 움직였다.

“글쎄요.”

투이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냥 시드룬의 남은 머리카락을 마저 풀어 주고는 해먹 밖으로 꺼내 주었다.

시드룬은 질문의 원인을 찾는 것처럼 그녀의 동작에서 내내 눈을 떼지 않았다.

알고 보니 바즈아둡은 요리를 아주 잘했다.

“식사들 하세요.”

앞치마로 손잡이를 쥔 그가 수줍게 그라탕을 식탁에 올렸다.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 위에는 삶은 계란과 동그란 흰 빵, 버터와 당근이 가득했다.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가정식의 완벽한 형태였다.

투이나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아!”

“이이가 솜씨가 좋아.”

수리시가 뿌듯한 얼굴로 접시를 들었다.

“정말 맛있겠네요! 잘 먹겠습니다.”

“나도, 밥!”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즐겁게 울렸다.

갓 만들어서 따듯한 음식은 입에 넣기만 해도 배 속까지 훈훈해졌다.

작고 통통한 손으로 야무지게 숟가락을 쥐고 당근을 찌르는 쿠즈도 귀여웠고, 가볍게 잡담을 나누며 식사하는 수리시와 바즈아둡의 모습도 정다웠다.

정작 시드룬이 손님인 투이나보다 더 손님처럼 앉아 있었다.

물병처럼 가만히 식탁에 손을 올려둔 시드룬은 식사하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여기서도 안 먹네.’

죽기 전에도 시드룬이 뭘 먹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사람이니 다른 곳에선 먹을 거라 생각했는데.

투이나가 자꾸 흘긋거리는 게 신경 쓰였는지 수리시가 휘휘 포크를 흔들었다.

“어이, 신경 쓰지 마. 이 녀석은 밥 안 먹으니까.”

“배고프지 않은 것도 마법이에요?”

“마법이라면 마법이겠지. 칼에 맞아도 안 죽는 인간인데 배라고 고프겠어.”

수리시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 하긴.’

그가 창과 검에 몸을 꿰이고도 평범하게 걷고 말했던 게 떠오르자 납득했다.

‘공간을 다룬다더니, 배에도 마법을 썼나 봐.’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고 무한정 음식을 집어넣는 상상을 한 투이나가 키득거렸다.

웃음소리에 시드룬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손등이 움찔하더니 접시에 담긴 당근 한 토막을 집었다.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는 심사숙고하듯 쳐다보다가 그것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

“이야, 웬일이래?”

정말 깜짝 놀란 투이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시드룬이 뭘 먹는 건 처음 봤다.

당근을 입에 넣을 때의 표정은 똑같았는데 먹는 모습이 어색하고 힘겨워 보였다.

시드룬의 입 안에서 으득 하는 소리가 났다.

‘……당근이 아니라 이가 부러진 거 아니야?’

으득, 으드득 소리를 내며 당근을 씹은 시드룬이 어쨌든 꿀꺽 음식을 삼켰다.

왠지 박수를 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식사에 성공한 시드룬을 본 수리시의 반응은 냉정했다.

“그거 손으로 만졌으니까 책임지고 네가 다 먹어.”

“크흡…….”

웃음이 터진 투이나가 입을 가렸다.

시드룬은 우두커니 당근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역시 더 먹을 생각은 없었다.

식사 후 시드룬은 투이나와 함께 신전으로 돌아왔다.

다시 아르힘에 도착했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떠나기 전부터 방이 컴컴할 정도로 날이 흐리더니 겨울비가 내릴 조짐이었나 보다.

쏴아아.

빗소리가 서늘하게 공기를 감쌌다.

시드룬의 팔을 붙잡고 내려온 투이나가 침대를 밟았다.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썼는지 창밖이 푸르스름했다.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이다.

‘꿈을 꾼 것 같아.’

시드룬은 투이나를 내려놓고 마법진 너머에 서 있었다.

“이번에도 하루를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그보단 길게요.”

투이나가 시드룬의 담담한 얼굴을 응시했다.

“우리가 다음에 정식으로 만날 때까지는 결정을 내릴게요.”

“처음부터 모든 것에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드룬이 마지막으로 설득했다.

“나는 당신의 작은 부분이라도 절실합니다.”

무어라 대답하려던 투이나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신전으로 돌아온 이상 자세한 내용을 말할 순 없었다.

수리시는 떠나기 전에 투이나를 붙잡았었다.

「난 댁이 비밀을 지킬 거라 믿어.」

「당연…….」

「너무 쉽게 대답하진 마. 평범한 인간도 마법사를 꺼리는 마당에 특별히 신앙심이 깊은 인간이 계속 마법사의 편에 설 수 있을까? 섬기는 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해도?」

수리시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여기까지 왔으니 미안하다는 말은 안 돼.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안 믿어. 그러니까 만약의 사태를 미리 생각 잘해 두라고, 루가 님.」

살벌한 말과 달리 수리시가 짧게 투이나를 포옹했다.

힘 있는 동작에 처음으로 그녀가 마법사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래도 떠날 때까지 집 바깥에서 손을 흔드는 세 사람은 여전히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겼다.

투이나는 계속 답을 기다리는 시드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해해요, 시드룬. 난 이제야 처음으로 당신과 제대로 만난 기분이 드는걸요.”

마법사가 아닌 개인을 보았을 때 비로소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절실함이 뭔지 조금은 이해가 될 만큼.

시드룬은 투이나가 악수를 건넨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악수 한 번으로 그들의 관계가 다시 쓰였다는 건 확실했다.

마법진을 사이에 두고 잡은 감촉은 쌀쌀한 와중에도 따듯했다.

‘다행히 이번엔 새로 나타나는 마법진이 없네.’

작은 변화라도 잘하고 있다는 신호로 느껴졌다.

투이나가 살며시 손을 빼내었다.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시드룬의 검지와 중지가 붙잡으려는 듯 구부러졌다가 이내 다시 펴졌다.

천천히 닫히는 마법진을 향해 투이나는 손을 흔들었다.

* * *

비는 멈추지 않고 내렸다.

바닥을 때리는 물방울은 바람을 타고 신전의 바닥까지 부딪쳤다.

깨끗한 무늬에 얼룩이 생기는 걸 닦느라 시종들이 유난히 바쁘게 뛰어다녔다.

새벽에 돌아온 덕분에 잠깐 신전에서 사라졌었던 투이나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만 잔디밭을 돌아다니느라 잠옷에 물든 풀물은 설명하기에 약간 난감했다.

“꽃을 정리하다가 묻었나 봐요.”

치맛자락을 붙잡은 변명을 위해 투이나는 오랫동안 곁을 지키던 제비꽃을 안아 들었다.

갑작스런 비를 만난 제비꽃은 습기에 눌려 싱그러움을 잃고 아래로 처져있었다.

시들시들한 꽃잎을 만져 보던 투이나에게 라카인이 다가왔다.

“말린 것입니다.”

한 줌도 안 되는 꽃잎이 커다란 라카인의 손바닥에 작게 고여 있었다.

예전에 시종들에게 부탁했던 일인데 그가 받아 온 모양이다.

‘비 때문에 바깥에서 걷어 왔구나.’

“고마워요.”

투이나가 미소 지었다.

햇볕이 바삭할 때 말린 제비꽃은 연한 색이었다.

향기는 거의 날아갔지만 잎마다 배어 있는 햇볕의 흔적이 부드럽게 코를 간질였다.

이 순간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베인을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대신 한참 동안 마른 꽃잎에 코를 파묻었다.

다음에 만나야 할 사람을 위해 미리 대비하듯이.

* * *

촤아악!

빗줄기 속에서 비린내가 확 튀었다.

“꺅!”

붉은 피에 놀란 시종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쿠르륵거리며 거품이 이는 흙탕물에서 나는 소리가 비명 하나쯤은 쉽게 감춰 버렸다.

머리 위를 가린 장막 하나에 의지한 채 투이나는 샨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늑하고 거창한 그의 천막이 아니라 급하게 만들어낸 장소였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사냥터를 찾아냈다고 알려온 하인이 지금 샨의 앞에서 증거를 보이는 중이었다.

산양의 시체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소금 호수 옆의 산자락에서 잡아왔습니다.”

샨의 하인이 덤덤하게 보고했다.

무기도 없이 산양을 대체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한 건 둘째 치고, 피도 빼지 않은 어마어마한 무게의 시체를 그대로 들고 왔다는 게 놀라웠다.

‘그것도 비 오는 날에…….’

라카인을 뺀 호위들은 질린 눈으로 산양을 흘끔거렸다.

산양은 잡기 힘든 동물이었다.

사냥꾼이 몸을 숨기거나 덫을 놓기 애매할 만큼 험한 지형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샨의 하인들은 제법 덩치가 큰 놈을 잡아왔으니, 지키는 자의 입장으로선 저절로 경계심이 일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사냥감을 내려다본 샨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엇을요.”

“저 사냥터를 확인하러 사람을 보낼 생각이 있냐는 말이다.”

투이나가 불편하게 들썩거렸다.

샨이 그녀를 위해 물푸레나무로 만든 의자를 꺼내 왔지만 상황이 가시방석 같았다.

“샨이 생각하는 사냥터의 기준에 맞다면 확인해 봐야죠.”

“나는 산양보다 사슴을 선호하지만 아르힘에는 사슴이 별로 살지 않는다고 하더군.”

샨이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게다가 덫을 놓고 기다리는 건 제대로 된 사냥터라고 볼 수 없지.”

“싫다는 건가요?”

“그래. 불합격이다.”

샨이 차갑게 거절했다.

뜻밖이었다.

자신의 수하가 찾은 장소인데도 거절하다니.

솔직히 어느 사냥터를 말하든 먼저 찾기만 하면 승리하는 내기다.

‘샨은 이길 생각이 없는 건가?’

투이나는 문득 내기를 빌미로 자신을 붙들어 놓으려는 속셈일까 생각도 들었다.

내기가 끝나려면 두 사람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건 반대로 불러낼 구실이 된다는 의미다.

그녀를 보고 싶을 때마다 사냥감을 하나 잡아오면 확인하기 위해서 반드시 참석해야 하니까.

‘이건 생각지도 못했네.’

난감한 요소긴 했으나 아르힘에 사냥감을 잡았다고 둘러댈 수 있는 장소가 많진 않았다.

‘오래가진 못하겠지.’

샨의 하인들은 힘들게 잡아온 사냥감이 무용지물이 되었는데도 담담했다.

샨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치워라.”

“잠깐만. 잡았는데 먹지도 않나요?”

“저건 못 먹는다. 오는 내내 비를 맞아서 내장부터 썩었을 거야.”

투이나가 주춤했다.

고작 거절당하기 위해서 산 생명을 잡아다 시체로 만들다니.

착잡한 마음을 읽었는지 샨이 고개를 틀었다. 비스듬한 그의 얼굴은 비가 오는 날에도 메말라 보였다.

“재미가 없나?”

“어디서 재미를 느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래?”

샨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과 가까울수록 죽음을 즐기기 편할 텐데.”

투이나가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내내 냉정하던 샨의 얼굴은 그녀의 노려보는 눈길을 받고서야 씩 입매가 올라갔다.

“뭐, 루가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겠지. 지금 내가 재미없는 이유는 비 때문이야.”

샨이 습기를 먹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모하세스에선 폭설이 내릴 시기다. 여긴 기분 나쁘게 미지근하군.”

“신의 돌보심이죠.”

“그래. 아르힘의 힘이지. 신전만 따듯한 게 아니라 더 괴이해.”

산양을 치우는 하인들의 등 위로 거센 비가 쏟아졌다.

날씨가 추웠으면 고스란히 비를 맞은 하인들은 꼼짝없이 앓아누웠어야 했을 것이다.

샨은 하인들이 애를 먹는 꼴을 그냥 지켜만 보았다.

산양은 진흙탕을 빨아들여 더 무거워져 있었다.

“여기 오기 전만 해도 바깥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비를 싫어하나요?”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저 시체에는 벌레가 꼬였겠지. 냄새도 지독했을 테고. 따듯한 날씨가 아닌가.”

푸른 눈동자가 묘하게 번득였다.

“그러니 비가 아니라…… 당신의 신이 간섭하는 꼴이 싫다는 게 더 정확하군.”

들이대며 말하는 단어마다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

투이나가 차분하게 답했다.

“가끔은 샨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청혼했는지 모르겠어요. 사랑이라는 말도 꺼내지만, 실은 내가 아르파를 증오하길 바라는 거예요?”

샨은 가만한 태도로 투이나의 목소리를 삼켰다.

“증오도 괜찮지.”

그의 목울대가 울렸다.

“그대가 내게 감정을 가지기만 한다면 상관없다. 강렬할수록 결혼 생활이 재미있지 않겠는가?”

샨은 진담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투로 말했다.

자꾸만 번져 오는 바깥의 비 때문일까. 늘 날이 서 있던 그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부드러워 보였다.

그때, 산양을 치우던 사람들에게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쿵!

“방금 뭐죠……?”

투이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다급한 동작에는 은근히 샨을 계속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도 섞여 있었다.

반면 본능 어딘가에서는 위험하다는 신호가 울렸다. 하인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산양을 잡은 손을 놓고 있었다.

“무슨 소란이냐.”

샨이 짜증스럽게 시선을 떼었다.

멍한 눈으로 산양을 보던 하인들이 샨의 분노에 소스라쳤다.

“아닙니다. 잠시 저희가 착각을 하였습니다.”

“무슨 착각.”

당황한 하인들은 잠깐 주저했지만 거짓 없이 왕에게 답했다.

“시체가 움직인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투이나와 샨이 동시에 산양을 쳐다보았다.

까맣게 달라붙은 털과 경직된 다리는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대로 굳은 채 빗방울을 맞고 있었다.

잠깐 동안 산양을 바라보던 샨의 미간이 곧 일그러졌다.

“내가 지루하다고는 하였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여흥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는데.”

“……예, 그렇습니다.”

“착각한 대가는 무엇으로…….”

갑자기 샨의 말이 뚝 끊겼다. 산양의 뒷다리가 파들 떨렸다.

“…….”

하인 때문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산양을 보고 있었다. 분명히 크게 흔들리는 걸 목격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럴 수가…….’

투이나조차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는 중에도 산양의 움직임은 점점 커졌다.

샨이 그것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하인들은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동안 산양은 마구 몸을 뒤틀더니 기어이 바닥을 디뎠다.

검은 거품을 토해내며 일어난 산양이 네 다리로 우뚝 섰다.

눈동자를 잃은 그것의 흰자위가 이쪽을 향했다.

짐승이 빗속에서 되살아났다.

사람들은 감히 입을 열지도 못했다.

침묵만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악이었다.

누구보다도 뻣뻣하게 굳은 건 투이나였다.

두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아르힘의 신전에서 어떻게 이런 흉측한 일이……. 설마 나도 저렇게 죽음에서 되살아난 거야?’

그러나 산양의 눈은 생기가 없었고 다친 부위도 그대로였다.

오히려 보는 이들에게 강한 죽음을 연상시켰다.

제자리에 서 있던 산양이 기이하게 머리를 털더니 투이나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도망쳐!”

“꺄악! 꺄아아악!”

그제야 정신이 든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났다.

투이나도 뒤늦게 벌떡 일어났다.

“피하세요!”

호루니가 소리치며 앞을 막아섰다.

스카차가 다급히 투이나의 팔을 붙잡고 도망쳤다.

호루니는 샨양을 향해 창을 휘둘렀지만 예상보다 거센 힘에 당황해 손목을 돌렸다.

날뛰기 시작한 짐승은 난폭했다.

온몸으로 밀어붙이면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도리 없이 밀려났다.

스카차에게 끌려 뒤쪽으로 피하면서도 투이나는 싸우는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첫 돌격을 막은 호루니가 주춤하는 사이 어느새 넘어간 라카인이 짐승의 뒤에서 검을 치켜들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검을 들어 내리꽂았다.

그러나 피가 튀며 주저앉아야 할 짐승은 이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었다.

라카인이 당혹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지만, 딱딱하게 굳은 근육과 뼈에 걸려 검이 다시 뽑히지 않았다.

달려가다가 제지당한 짐승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고개를 젖혔다. 소리 없는 포효가 터졌다.

“……!”

뒤늦게 몸을 피하려던 라카인이 뒷발에 걷어차여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배를 움켜쥐면서도 그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라카인의 발이 짐승에게 끌려 드드득 밀려났다.

“하아압!”

호루니가 짐승의 앞다리를 후려쳤다. 분명히 뻑,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으나 짐승은 고통도 없이 날뛰었다.

투이나를 감춘 채 검을 든 스카차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이 뚫리면 투이나를 지킬 사람은 그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투이나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위급한 상황의 호위를 보자 이미 공포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은 비정상적으로 고요했다.

라카인을 압박했을 때처럼 샨의 하인들이 동시에 달려든다면 금방 끝날 텐데.

그들은 공격하는 대신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팔짱을 낀 샨이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멀어졌다.

“샨.”

그는 투이나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강철처럼 굳은 몸에서 형형한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음 순간 투이나는 그를 잃어버렸다.

“끼이익!”

귀를 찌르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투이나는 분명히 샨이 서 있었던 텅 빈 자리에서 고개를 돌렸다.

동작을 읽을 수 없는 눈은 그를 제대로 쫓아가지 못했다. 그저 유려하게 흐르는 붉은 빛이 크게 돌아 다시 멈췄다는 것밖에는.

투이나가 다시 샨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짐승의 목이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털썩, 털썩.

바닥으로 쓰러진 짐승의 몸에서 검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바닥으로 날아간 라카인이 텅 빈 손을 쥐었다 폈다.

샨이 그의 검으로 짐승을 베어 버린 것이다.

검으로 바닥을 짚고 선 샨이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형편없군.”

카랑.

샨이 검을 라카인의 앞으로 내던졌다.

“호위라면 공격에 나설 것이 아니라 뒤를 지켰어야지. 기본적인 것도 잊었나?”

“…….”

옛 주인의 말을 들은 라카인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샨은 더 시간 낭비 할 가치도 없는지 곧장 발을 돌렸다.

“루가.”

샨이 투이나를 향해 양손을 들어올렸다.

되살아난 시체를 죽이고도 그는 달라진 게 없었다. 얼룩 하나 튀지 않은 깨끗한 얼굴, 당당한 차림새.

발에 못이 박힌 듯 서 있는 투이나를 향해 그가 비죽 웃었다.

“왜 그래. 겁이라도 먹었나?”

투이나는 그때까지 꽉 다물고 있던 어금니를 들었다.

“시체를 봐야겠어요.”

“그러지.”

샨이 천천히 투이나에게 돌아왔다.

자리를 옮긴 하인들이 산양을 끌어다 탁자 위로 올렸다.

도망갔던 사제들과 시종들까지 그것의 주변을 둘러쌌다.

탁자를 짚은 투이나의 뒤로 샨이 끌어안듯이 다가왔다.

그녀에게 언제라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샨이 탁자를 짚었다.

“아르힘에선 이런 일이 흔한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투이나가 대답했다.

온 신경이 산양에 쏠려 있느라 샨이 귓가에 바짝 다가왔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두건의 끝자락을 뒤로 넘긴 덕분에 투이나의 둥근 귓불이 그대로 보였다.

샨이 혼자 씩 웃었다.

“사제님, 마력이 느껴지시나요?”

투이나가 물었다.

꺼림칙한 표정으로 표면을 훑던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법사의 장난은 아니라는 소리인데…….”

“이게 어디 장난으로 치부될 문젭니까?”

“살면서 이렇게 무서운 건 처음 봤습니다.”

시종들이 웅성거렸다.

샨은 감히 윗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떠드는 그들을 탐탁지 않게 노려보았다.

그들의 반응이 익숙한 투이나만 계속 심각했다.

입술을 깨물던 투이나가 물었다.

“산양이 언제부터 죽어 있었나요?”

말을 허락받지 못한 하인들이 샨의 턱짓을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저희가 잡았을 때는 살아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시가지로 들어왔을 때쯤엔 거의 움직임이 멎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샨의 거처에 산양을 내려놓았을 때도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다.

‘야생 동물의 생명력이 의외로 강하다지만…….’

방금 보았던 일은 죽기 직전의 발악으로 보기 어려웠다.

주저하던 투이나가 산양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를 손끝으로 만졌다. 익숙하게 끈적거리는 느낌이다.

“이건 피……로군요.”

“세상에, 흉측해라.”

“어쩌다 이렇게 검게 변했을까요?”

투이나가 샨을 흘깃 돌아보았다. 샨이 심술궂게 입꼬리를 내렸다.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샨의 무예가 뛰어난 건 알고 있지만 산양을 벨 때는 다른 힘을 사용한 걸 알고 있습니다.”

투이나는 묻지 않고 단정 지었다.

“라카인과 호루니가 찔렀을 때는 이런 게 나오지 않았어요. 샨의 신은 피를 다룬다죠?”

“알면서도 찔러 본 건가? 루가도 은근히 음흉하군.”

투이나는 농담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샨이 놀리는 재미가 없는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약간 아르파의 힘을 빌렸다.”

“아르파가 강림하지 않아도 신의 힘을 쓸 수 있나요?”

“괜히 대대로 전해지는 힘이겠나.”

적당히 대답한 샨이 턱을 문질렀다.

“아르힘의 신전이니 나도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다. 직접 강림한 것도 아니니 그 문제는 신경 끄도록 해라. 저 피는 원래부터 속에 고여 있던 게 빠져나온 거다.”

투이나는 참혹한 모습이 된 산양을 내려다보았다. 샨의 솜씨는 깔끔했지만 그전부터 곪아 있던 게 보였다.

“하지만 검게 변하다니…….”

“예전에 썩었거나 무언가가 조종한 부작용이겠지. 내 생각은 후자다. 잡은 지 얼마 안 되었고, 이것이 혼자 미쳐서 날뛸 리가 없으니.”

투이나의 눈이 어두워졌다.

빗속에서 산양이 되살아나는 장면은 이미 시종들에게 악몽이 되었다.

한번 살해당했다가 부활한 투이나마저도 산양을 보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이 충격을 받았다.

“누가 그랬을까요?”

“나는 ‘왜’가 더 궁금한데.”

샨이 몸을 기울이자 그의 그림자가 투이나에게 드리웠다.

“감히 루가와 나의 만남을 방해하다니.”

그제야 정수리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놀란 투이나가 팔꿈치로 그를 밀었다.

“떨어져서 얘기해요.”

배가 단단해서 밀어도 민 것 같지가 않다.

샨은 화를 내지 않고 일부러 버텼다.

“난 여전히 마법사의 힘이 의심스럽다.”

“다른 마법사가 여기까지 들어왔을 가능성은 낮아요. 마법사라면 아르힘 님의 신전을 자유롭게 드나들 리가 없습니다.”

“나는 다른 마법사라고 한 적 없는데.”

샨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가 암시하는 대상을 알아차린 투이나의 입이 벌어졌다.

“시드룬은 아니에요.”

“저주까지 받았다고 유명한 마법사를 너무 빨리 믿어 주는군?”

‘그거야 시드룬의 마법이 무엇인지 아니까 그렇죠.’

게다가 투이나와 시드룬은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을 꾸밀 낌새라곤 전혀 없었다.

시드룬과 함께 사는 다른 마법사들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이런 일을 위해서 시드룬이 마법진을 열어 주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주가 정말인지도 확실하지 않잖아요. 게다가 마법이라면 마법진이 보였어야 해요.”

“대상의 내부에서 마법진이 나타나도록 마법을 쓰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쓸 수 있다.”

샨이 대꾸했다.

“전쟁터에서 몇 번 당한 적이 있지.”

“어떤 마법사가 산양을 되살려서 이득을 보려고 하겠어요? 이런 마법이 있었으면 진작 사람을 되살렸겠죠.”

투이나는 은연중에 비난하는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되살리는 게 아니라 조종이다.”

샨이 재미있다는 눈으로 대답했다.

“그게 되살아난 걸로 보였나? 몸은 시체 그대로였어.”

투이나가 잠깐 움찔했다.

되살아난 자신과 겹쳐서 생각했더니 경우가 다르다는 걸 잊었다.

‘하지만 그냥 시체가 움직였다기에는 느낌이 달랐어.’

“억지로 조종해서 공격할 셈이었다면 이곳엔 산양보다 위협적인 게 많아요.”

“시체만 조종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

샨이 흥미롭게 대답했다.

사고 때문에 지친 투이나와 달리 샨은 오히려 활력을 얻고 있었다.

죽이고, 쓰러트리고, 적을 찾아내는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었다.

모든 사람들 중 오직 그만이.

“그대 말대로 마법사가 한 짓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원한을 샀나, 루가? 신을 적대하는 정신 나간 자가 또 있나?”

“…….”

투이나가 뼈가 있는 침묵을 보냈다.

샨이 고개를 까딱이더니 말했다.

“난 그대를 지키려는 거야.”

하나도 믿기지 않았다.

“그대는 만나면 만날수록 자주 아프고 다쳐. 아르힘의 보호가 소홀하다면 다른 자가 대신해야만 한다.”

“……결혼하자는 설득은 나중에 해요.”

“구혼 기간에 구애하지 않으면 대체 언제 하란 말이지.”

피를 보아서 그럴까.

그게 냉정한 얼굴 뒤로 이글거리는 본능을 일깨운 모양이다.

샨은 주변을 완전히 무시한 채 투이나를 유혹했다.

그녀에게도 은밀한 소망이 있으리라 확신하는 저 눈빛.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내게 오면 자비롭게 살 필요 없다.”

덜컹.

다가온 그의 무릎에 탁자가 흔들렸다.

“원하는 게 무엇이든 들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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