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것이 필요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다른 것을…
투이나는 산책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르힘의 신전은 아름다운 주랑이 건설된 곳이 많아서 원한다면 한 번도 햇빛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통로가 아닌 땅으로 곧장 내려가려던 샨이 끝없이 이어지는 다각 문양 바닥에 싫증을 냈다.
“산책이란 게 고작해야 구경인가?”
“걷는 데 더 의미가 있죠. 천천히 움직이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마음도 가라앉히는 거예요.”
“따분하다. 그래 봤자 좁잖나.”
샨의 미간은 굳은 채 펴질 줄을 몰랐다.
“흠뻑 땀을 쏟으며 도달한 장소가 여전히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때에야 비로소 머리가 시원해지고 패기가 끓어오르는 법이다.”
“그럼 정원으로 가요.”
투이나가 제안했다.
“초원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크고 식물도 많으니 여기보단 덜 답답하겠죠.”
“흠…….”
샨은 수락인지 모를 소리를 한번 냈다.
관성적으로 걸어가려는 그를 손바닥으로 꾹 누른 뒤에야 몸의 방향을 바꿨다.
샨은 투이나가 하찮은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르파에선 관심이 있는 자와 힘겨루기가 기본이다.”
불쑥 샨이 말했다.
“어리든 나이가 많든 먼저 붙잡는 자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법이니까.”
“어린아이도요?”
“그래.”
투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상대가 아무리 싫어도 힘이 약한 사람들은 그대로 당한단 말이에요?”
투이나가 경악하자 오히려 샨은 의아하게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럴 리가 있나. 약한 자는 무기를 쓰지.”
그가 허공에서 검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정확히는 목을 긋는 시늉이었다.
“어릴 때부터 왜 무예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나? 대련은 감정의 고양을 부르고 다가올 적에 대비할 수 있게 해 주지. 싸움이야말로 진정한 감정의 표현이야.”
“누구나 다 무예를 잘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무기를 만들어 주는 거 아닌가. 구애가 목적인 자는 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 무기는 저항하는 자의 몫이니.”
분명히 거친 관습인데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만약 제가 샨이 싫다면 거절의 표현으로 반격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
샨의 입매가 천천히 휘어졌다.
“물론 그 전에 나를 찌를 만한 실력부터 기르도록 해라.”
“정말로 아무 원망도 안 해요? 당한 사람이?”
“칼에 찔리는 게 두렵다고 구애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리고 부족한 실력으로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일도 어리석지.”
투이나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죽었던 일은 분명 다른 상황이지만…… 신경 쓰이네.’
투이나가 살해당한 건 누굴 사랑하려다 거절의 뜻으로 칼 맞은 건 아니었지만 샨의 사고방식이 몹시 신경 쓰였다.
‘내가 샨한테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었나? 아르파의 관습 때문에 칼 맞은 건 아니겠지, 설마?’
투이나의 표정이 아리송해 보이자 샨이 덧붙였다.
“물론 거절할 때 다른 자의 도움을 받아도 상관없다. 때로는 그런 능력이 더 힘을 뜻하기도 하지.”
“아아…….”
투이나가 안도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진짜로 그를 거절할 때를 대비해서 검술 수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내가 고작 1년 배워서 기습하는 상대를 막을 수 있을 만큼 검술 천재는 아닌걸.’
샨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난 호위를 뽑았다기에 이제야 아르파식대로 준비를 한 줄 알았다만?”
“네?”
투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호위를 뽑은 게 그런 식으로 해석될 줄은 몰랐다.
샨이 고약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표정이군. 쓸모없는 것. 기껏 목숨을 건져 놓고도 그런 얘기도 전하지 않았나?”
“……라카인이 말수가 적어서요. 저 또한 묻지 않았으니 탓할 일이 아니에요.”
우뚝.
샨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묘하게 짙어졌다.
“왜 그것의 이름까지 알고 있지?”
사람을 두고 그것이라니.
투이나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물어봤습니다.”
“흐음…….”
아까보다 불명확한 소리가 길었다.
잠깐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더니 투이나에게로 돌아갔다.
“루가의 자비는 알겠다. 아르힘의 신전에선 솜씨 좋은 치료를 한다기에 이미 고문이 끝난 상태인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속이 거북해졌다.
투이나가 울렁거린다는 표정을 짓자 샨이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준 선물은 정말로 삶아 먹은 모양이군?”
“저길 보세요. 정원에 도착했네요.”
자칫하다 위험해질 농담이라 투이나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신전의 정원은 굽은 벽을 활용하도록 만들어졌다.
구획을 나눈 흰 벽을 따라 담쟁이를 심고 그 안에 꽃나무와 작은 분수를 놓았다.
천장이 없는 온실과 비슷했다.
벌써부터 풍겨 나오는 싱그러운 냄새에 투이나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그때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며 올라왔다.
“어?”
순간 투이나의 숨이 멎었다.
먼저 정원에 온 사람이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금빛이 누군가의 이마를 스쳤다.
“루가 님!”
“베인?”
‘하필 지금…….’
베인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벌떡 일어나면서도 투이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으니.
그러다 뒤늦게 샨을 알아차린 베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곧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루가 님. 이곳에 오실 줄 몰랐습니다.”
“무례하다니요.”
투이나가 어쩔 줄 모르고 답했다.
베인이 일어난 자리에 떨어진 꽃잎을 보니 더 그랬다.
예전에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꺾었다고 한 제비꽃이 떠오르자 갑자기 목덜미가 확 뜨거워졌다.
‘설마 오늘도 기다렸어요?’
샨도 이리저리 흩어지고 꺾인 꽃줄기를 보았다.
“루가.”
그가 갑자기 투이나의 어깨에 양손을 짚었다.
‘으응?’
갑자기 샨이 당황스럽게 친한 척을 했다.
비록 어깨를 감싼 손이 폭력적으로 거칠지 않았다 해도, 높은 그의 체온 때문에 더웠다.
“구경을 시켜 주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구경이라니…….”
샨이 느긋하게 투이나를 밀며 정원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곁을 지나치자 베인은 예의바르게 물러났다. 어쨌든 다른 구혼자와 보내는 시간이니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따져 보면 정식 일정도 아니다.
‘베인은 저렇게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있을 필요가 없는데.’
순식간에 분위기를 장악한 샨 때문에 불청객의 느낌은 더욱 도드라졌다.
게다가 샨은 정원에 들어온 뒤로 일부러 투이나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음을 강조해댔다.
“꽃을 좋아하나, 루가?”
뚝.
샨의 손에 꽃나무의 가지가 부러졌다.
기겁한 투이나가 황급히 그를 붙들었다.
“막 꺾지 말아요!”
“잘 어울리는군.”
샨이 능청맞게 그녀의 턱 밑으로 꽃 봉우리를 들이대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샨이 미쳤나?’
투이나가 해괴한 표정으로 샨을 올려다보느라 뒤에 있던 베인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 팽팽해진 공기를 느낀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베인의 표정이 말끔해진 뒤였다.
“일정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루가 님. 다음에 정식으로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베인.”
투이나가 성급하게 말했다.
베인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루가 님이 좋아하시는 것들을 알고 있으니 언제든지 방문해 주십시오.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게 묵례한 베인이 천천히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샨이 휙 꽃가지를 던져 버렸다.
“샨.”
투이나가 팔짱을 꼈다.
샨도 기분이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저런 녀석을 정원에 들이나? 안목이 형편없군.”
잡쳤다는 표정으로 그가 손아귀에 남은 조각을 부스러트렸다.
“베인은 내 손님이에요.”
“내 경쟁자지.”
“결정은 내게 달려 있어요.”
샨은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한 조소까지 보였다.
“아르힘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고?”
투이나의 얼굴이 굳었다.
샨이 차갑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라, 루가. 어차피 정해진 일에 시간을 때우는 장난인 걸 알잖나.”
투이나도 알고 샨도 알았다. 그들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고.
어떤 교류도 감정을 일깨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알면서도 샨은 결정이 될 때까지 남은 시간을 때울 속셈이다. 당연히 자기가 선택될 거라고 믿으니까.
우뚝 서 있는 투이나에게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서 부러진 가지에서 흘러나온 진액 냄새가 났다.
‘아르힘 님이 내게 선택권을 주었다는 걸 샨은 몰라.’
죽기 전, 투이나는 남편을 결정했었다.
‘내가 살해당한 건 발표하기 직전이야.’
투이나는 아직 구혼자들에게 그녀의 마음을 밝히지 않았을 때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청혼을 거절해서 죽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도 당당히 자신과 결혼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라 말하는 샨을 보니 불안해졌다.
만약에 그녀의 마음이 흘러넘쳐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 티가 났다면?
‘그럴 리가 없어.’
투이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럴 리가…… 없나?’
막막해진 투이나는 부릅뜬 눈으로 샨을 응시했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확신하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샨.”
“…….”
“왜 제게 청혼했나요?”
“신이 결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냉담한 얼굴 위로도 바람이 불었다.
“너의 신과 나의 신이 함께.”
처음으로 투이나의 표정에 금이 갔다.
‘함께라니?’
“이봐, 루가. 다른 구혼자가 있다는 말에 화가 난 건 나다.”
샨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하나는 신도 없는 반푼이에, 다른 하나는 아르힘이 데리고 있는 떨거지였으니 망정이지 또 다른 신을 섬기는 자였으면 진작 죽였을 것이다.”
샨의 말에 순간 오싹해지며 정신이 들었다.
“당신도 원해서 청혼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의 의지를 무시하는 발언에 샨이 조금 기분이 상한 듯 대꾸했다.
“결혼할 때가 되었으니 신에게 아내를 찾아 달라 요구했을 뿐이다.”
샨이 유심히 투이나를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만나 보니 생각보다는 괜찮더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어차피 저와 결혼할 거라면 왜 다른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는 척 보여 주는 거죠?”
“여흥으로.”
샨이 손등의 뼈마디로 턱을 괴었다.
그에게서 관심 있는 척, 능글맞은 척하던 여유가 사라졌다.
그러자 매일 전쟁터를 마주한 사람의 무딘 껍질만 남았다.
밤에 만난 시체처럼.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새파란 두 눈동자만 번뜩였다.
“쓸데없는 장난질도 좋지만 일단은 내기부터 즐겨 보지. 다른 일에 흥미가 생기기 전에.”
투이나의 귀에는 마지막 문장이 다르게 들렸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흥미를 갖기 전에.
……라고.
“내기는 오늘 해가 지면 시작해요.”
투이나가 빠르게 말했다.
“신전을 출입할 수 있는 하인은 세 명으로 제한하고, 나가기 전에 동문을 지키는 무사제님께 신원을 보증받으세요. 저도 세 사람을 정해 사냥터를 찾겠어요.”
“찾은 뒤에 확인받는 과정은?”
“신전을 나갈 수 없으니 찾아낸 장소의 위치와 세 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선택하기로 해요. 확인을 위해 발견한 뒤에는 서로 한 명씩 바꿔서 방문해 봐야 합니다.”
잠자코 듣던 샨이 턱을 문질렀다.
“전에 보냈던 요청은 어떻게 됐지?”
시험해 보는 듯한 말투였다.
“따로 들어드릴게요. 원래 승인된 사안이었어요. 하지만 물자 이송은 저희 쪽 사람들이 함께 나갈 겁니다. 명단이 곧 갈 거예요.”
“훌륭하군.”
샨이 그제야 다시 사람처럼 얼굴 근육을 풀었다. 그는 차라리 시비를 거는 태도가 덜 무서웠다.
다행히 이번엔 칭찬이기까지 했다.
“느리게 보여도 일처리는 확신하게 하는군.”
“제게 달린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투이나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책임졌다는 뜻이든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든 샨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한 고비를 잘 넘겼다는 감이 왔다.
빨리 적응하고 싶어서 일부러 더 딱딱하게 말한 게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샨의 취향에 맞추려는 속셈은 아니었어도.
‘아냐. 맞춰야 해.’
투이나가 불안하게 떨리는 손을 정원수 사이로 감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샨한테는 들킬 수 없어.’
누구를 마음에 두었는지 들켜 버리면 분명 또 살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범인은 물론 샨일 테고.
자신의 죽음조차 버거운데 남의 죽음까지 이고 살 자신이 없었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면 더더욱.
투이나의 심장이 급박하게 뛰었다.
이미 1년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마음은 한 사람에게 기울었는데.
사랑하고 있는데.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처음이라 여기는 그들 사이에서 혼자만 애달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할 수 없어도 노력해야 한다.
투이나가 손가락 사이로 가칠한 나뭇잎을 쓸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더 맞추고 싶은 조건이 있나요?”
“없다.”
샨이 흔쾌히 답했다.
간신히 투이나의 어깨 힘이 풀렸다.
“샨도 사람을 고를 시간이 필요할 테니 이만 마무리할까요.”
“우리는 해가 질 때 다시 만나는 건가?”
투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람들만 보낼 거예요.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면 기별을 보내는 게 어떤가요?”
“그렇게 하지.”
샨은 더 이상 장난을 걸지 않고 답했다. 그녀가 차분해지자 더 이상 놀릴 맛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투이나가 발길을 돌렸다.
“그럼 먼저 돌아갈게요.”
“루가.”
그때 샨이 그녀를 불렀다.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긴장하던 찰나, 샨이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신전에 무기 없이 왔다는 사실만 기억해라.”
투이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이 어떻든 샨은 만족한 자세로 입꼬리를 올리더니 남은 가지를 꺾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후두둑 떨어지는 꽃망울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져서.
투이나는 도망치듯 정원을 빠져나왔다.
* * *
한참을 걸어 건물 안으로 돌아온 투이나는 샨도 하인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주르륵 미끄러졌다.
“후우우우…….”
“고생하셨습니다, 루가 님.”
내내 뒤를 쫓아다니던 호루니가 걱정스레 말했다.
투이나가 차가워진 피부를 문질렀다.
식은땀에 분가루가 엉겼다.
“엉망이죠?”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스카차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걱정해 주는 게 힘이 나 투이나도 응답하듯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안 도망가서.”
솔직히 도망가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저주받은 마법사에 난폭한 왕까지 연달아 들이닥쳤으니.
그런데도 자리를 지켜 준 사람들이라 저절로 믿음이 갔다.
신전에 머무는 사람들과 별개로 각별히 애정이 쌓였다.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이에게도.
“라카인은 깨어났을까요?”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같이 가요.”
쪼그려 앉아 있던 투이나가 얼른 일어났다.
다행히 라카인은 깨어나 있었다.
불에 탔다는 소리를 듣고 엄청나게 걱정했는데, 다행히 화상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사제님들은 역시 최고셔! 아르힘 님 감사합니다!’
말끔해진 라카인을 보며 투이나는 거듭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르힘의 신전이 아니었다면 살아서 그를 볼 일은 없었을 거다.
부상당했던 라카인 본인도 꽤 얼떨떨해보였다.
투이나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벌떡 일어났던 그를 다시 눕힐 때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무사하셨군요.”
“제가 할 말이에요.”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눈으로 보니 안심이 됐다.
투이나는 호위들과 함께 라카인 옆에 옹기종기 앉았다.
라카인이 불편한지 계속 몸을 들썩거렸다.
“누워 있어요.”
말 한마디에 라카인의 동작이 딱 멈췄다.
투이나는 그를 치료했던 사제들에게도 감사했다.
“정말 치료가 잘됐어요.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루가 님. 당연히 저희가 할 일인걸요.”
“고생을 좀 하긴 했습니다만 저희가 누굽니까. 거뜬하죠.”
“모하세스와 가셨던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그럭저럭요.”
누워 있던 라카인의 눈동자가 즉시 굴러갔다.
“모하세스 님과 둘이서만 만나셨습니까?”
“호루니와 스카차도 같이 있었어요.”
투이나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러자 라카인이 누워 있으라는 명령과 머리를 돌리지 않고 쳐다보려는 동작을 동시에 시도했다.
눈 튀어나오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는 소리다.
‘저러다 눈 빠지겠다.’
몸은 다 나았지만 쉴 필요가 있어보여서 누우라 했건만, 가만히 있다가 더 병나게 생겼다.
“……라카인, 그냥 일어나서 편하게 봐요.”
“감사합니다.”
번개처럼 라카인의 상체가 올라왔다.
한 번에 바로 무릎을 꿇은 그가 심각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샨이랑 얘기했던 내기요. 해 질 녘에 시작하게 됐어요.”
투이나가 라카인에게 내기의 세부 사항을 알려 주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카인이 자원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라카인……!”
“모하세스 님이 만족할 만한 사냥터를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필요할 겁니다.”
사제들이 당장이라도 반대하고 싶은 얼굴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투이나가 선수를 쳤다.
“안 돼요.”
라카인은 강하게 주장하던 사람치고는 거절에도 변화가 없었다.
‘실망한 게 아닌가?’
그래도 투이나는 설명을 붙였다.
“……못 믿어서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처음부터 여러분이 곁에 있길 바라서 호위로 뽑은걸요.”
투이나가 얌전히 모여 앉은 호루니와 스카차, 라카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투이나가 무릎 위로 가만히 손을 얹었다.
예전에 가족들끼리 둘러앉듯이 평온한 분위기였다. 아니, 더 친밀할지도 모르겠다.
같은 미래를 반복하지 않고자 바꾼 선택이었는데 막상 가져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의지가 되었다.
왜 과거엔 주변 사람들에게 이만큼 마음을 주지 않았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그랬겠지.’
이미 신전에서 받은 게 너무 많아 더 달라고 할 염치가 없었다.
투이나는 물끄러미 호위들을 응시했다.
“루가 님…….”
호루니가 금세 벅찬 목소리로 손을 모았다.
“반드시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의 사명인걸요.”
“저도 그렇습니다!”
스카차가 질세라 끼어들었다.
라카인은 변함없이 충직한 자세를 유지했다. 이미 한번 맹세를 올렸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모양이다.
“말만 들어도 기뻐요.”
투이나가 헤실헤실 웃었다.
기쁘다는 소리에 라카인도 냉큼 다시 말했다.
“지고 지엄하신 루가 님의 곁을 지키는 것은 더없는 영광입니다. 이 몸의 뼈가 부서지고 갈리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목숨 바쳐 지키겠습니다.”
“가…… 감사해요.”
라카인이 ‘기쁘지는 않으십니까?’ 하고 묻듯이 눈을 빛냈다.
투이나가 약간 어색하게 다시 웃은 뒤에야 그는 만족했다.
라카인의 과한 표현에 질려 버린 스카차가 화제를 돌렸다.
“그럼 내기엔 누구를 보내실 생각입니까?”
“사실 아르힘의 지도는 신전에서 완성본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수색은 하지 않으려고요.”
투이나가 말했다.
“그래서 사제님 두 분과 무사제님 한 분을 수색 담당으로 정했어요. 장소를 찾는 건 사제님들과 함께, 직접 갈 필요가 있을 때는 무사제님에게 맡기는 거죠.”
“괜찮은 방법이네요.”
“다들 바쁘니까요.”
그때까지 자리에서 뭉그적거리며 대화를 듣던 사제들이 후다닥 일어났다.
“어흠……. 그럼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루가 님.”
“예. 치료도 다 끝났으니 이제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할 일이 많으니 저희는 이만.”
괜히 찔린 사제들이 뽀르르 방을 나갔다.
호루니가 한숨을 쉬었다.
“전 아직도 사제님들이 뭐 때문에 바쁜지 모르겠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견습 시절에도 항상 사제들은 놀고먹고 무사제님들만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었더니…….”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치유 능력을 높이려면 혼자 수련하고 기도할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 그런걸요. 사고가 있을 때마다 신전 밖으로도 자주 나가시잖아요.”
라카인이 물었다.
“모든 사제들이 치유하는 힘을 가진 게 아닙니까?”
“거의 모든 분들이 갖고 계시죠. 어디까지 치료가 가능한지는 차이가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다들 노력하시구요.”
“그럼…… 루가 님께서는 신전에서 가장 강한 치유 능력을 갖고 계시겠군요.”
“네?”
투이나가 일순 당황했다.
“아니요. 저는 그런 힘 없어요.”
라카인이 잠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장은 본래 가장 강한 자가 되는 게 아닙니까?”
“루가 님.”
그때 호루니가 헛기침을 했다.
“아직 쉬어야 하는 분에게 너무 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참, 그렇죠.”
투이나가 얼른 일어섰다.
“막 정신을 차린 데다 적응할 것도 많을 텐데 너무 배려가 없었네요. 남은 이야기는 차차해요.”
라카인이 아니라 투이나를 걱정해서 말을 꺼낸 호루니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라카인은 눈치도 없이 말했다.
“바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도 동의했습니다.”
“음, 그래도…….”
고민하던 투이나가 사양했다.
“쉬는 김에 쉬어야죠. 정말 문제가 없으면 내일부터 보기로 해요. 괜찮죠?”
“알겠습니다.”
라카인이 즉각 수락했다.
스카차가 얼른 투이나를 부축했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호루니와 스카차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갑자기 심각해진 호위들에 놀란 투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무슨 일이죠?”
한껏 불편한 기색을 공유하던 호루니와 스카차는 결심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라카인을……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네?”
투이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라카인을 믿지 말라니.
주변을 살피던 호루니와 스카차가 그녀를 방문에서 떨어진 쪽으로 이끌었다.
“실은 저희가 뽑힌 뒤로 사제님이 특별히 당부를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호위로 선발된 그날, 짐을 꾸린 그들을 찾아온 사제는 엄격한 태도로 주의를 주었다.
루가 님의 뜻으로 호위를 임명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견습이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 것.
그리고 라카인을 감시할 것.
「두 사람이 함께 선발되었으니 감시가 어렵진 않겠지요. 루가 님의 호위는 물론, 아르파인의 행적까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투이나는 부탁한 적 없는 지시에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정말로 라카인을 감시했던 거예요?”
“화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루가 님이 지시하신 줄로만 알고…….”
호루니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니에요. 그냥 좀 놀라서. 계속 얘기해 주세요.”
이야기가 끊길까 봐 투이나가 조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스카차가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특히 모하세스의 거처로 갈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모하세스의 방문일에 저희끼리 유심히 그자를 살폈습니다.”
투이나도 기억했다.
샨이 만들어낸 긴장감도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그 와중에 라카인까지 감시하려면 신경 줄이 끊어지는 것 같았을 터다.
속사정을 털어놓는 지금도 두 사람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우려했던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작해야 며칠이고, 아르파인이 쉽게 루가 님께 충성을 바쳤다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이라…….”
“수상한 정황은 충분합니다.”
“수상하다면…….”
“며칠 전 루가 님이 방으로 들어가신 뒤의 일입니다.”
사제를 기다리며 세 사람이 바깥에서 호위를 서던 때였다.
투이나가 인사하고 들어간 뒤, 약속대로 사제가 도착했다.
그런데 라카인은 사제가 기도를 올리기 전에 잠깐 그를 멈춰 세웠다.
목을 다친 탓에 말을 할 수가 없어 다른 이들은 묻지도 못하고 지켜보았다고 한다.
주변을 살핀 라카인은 주먹만 한 돌덩이를 하나 집어 들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제 손을 내리쳤다.
“헉!”
투이나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저, 정말로요?”
“그렇습니다, 루가 님.”
“사제님이 그의 손까지 합쳐서 다시 치료해야 했어요. 한참이나 걸렸습니다.”
“하지만…… 대체 왜요?”
혼란에 빠진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이 대목에 이르자 호루니와 스카차도 표정이 안 좋아졌다.
“저희 추측이긴 합니다만, 스스로 처벌을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네?”
“루가 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아르파에선 신을 섬기는 법이 다릅니다. 이른바 불경죄라는 게 존재하지요.”
신성을 획득한 수호신은 본래 그 자체로 완전하다.
때문에 신도들이 선행을 베풀면 그의 뜻을 따르는 일이고, 악행을 저지르면 신의 뜻에 반했으니 죗값을 치렀다.
그런데 아르파는 아르힘처럼 수호신이 나라에 상주하는 형태가 아니다.
인간이 강림을 통해 부분적으로 신성을 획득하기 때문에 절대불가침한 신성성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즉, 사람들에게 확실한 권위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부수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아르파인들에게는 신 혹은 왕을 모독하는 일이 거의 이교도, 불신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따로 조사를 했는지 스카차의 입에서 술술 설명이 흘러나왔다.
“명령에 불복하는 것, 허락 없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 함부로 왕의 육체에 손을 대는 것 등등이 전부 모독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라카인이 스스로를 다치게 했던 손은 모하세스를 잡았던 쪽입니다.”
투이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투이나를 보호하기 위해 샨의 손목을 잡았었다.
‘그래서……!’
그걸 목격한 두 사람은 라카인이 여전히 샨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으리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샨의 거처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라카인을 구속하는 신앙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거다.
“또 보십시오. 아르힘 님이 나타나셨을 때 유일하게 라카인만 불에 탔습니다. 게다가 계속 모하세스에게 존칭을 쓰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를 루가 님의 호위로 계속 둘 수가 있겠습니까.”
“……알고 있었어요.”
“예?”
“라카인이 여전히 아르파를 믿는 건 알고 있었어요.”
투이나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수호신이 살아 있는 한 당연히 아르파를 믿어야지요. 저는 여러분도 이미 아는 줄 알았는데요.”
예상치 못한 대화의 흐름에 호루니와 스카차가 약간 당황했다.
설마 아르힘의 직속인 루가가 여기서 화를 내지 않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설명이 필요한 표정이길래 투이나가 덧붙였다.
“샨이 제게 라카인의 처분을 넘기면서 잠시 행동의 자유를 얻었을 뿐 신앙은 그대로예요. 언제라도 라카인이 샨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아르파 신이 개입할지도 모르죠.”
호루니와 스카차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이 되었다.
오히려 투이나는 라카인이 아르힘을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더 두려웠다.
그러다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라카인은 충성심이 너무 과했다. 주변 상황도 제대로 못 보고 맹목적으로 다칠 인간이다.
“그, 그럼 이미 모하세스에게 정보를 넘겼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면 더더욱! 지금이라도 격리시켜야 합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항변했다.
투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루가 님!”
순간 두 사람은 투이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순간에도 그를 믿을 수 있냐는 듯이.
‘신전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네.’
투이나가 처음으로 신전에 발을 디뎠을 때, 모두가 그녀를 성녀라 불렀다.
‘성녀’라는 두 글자에는 지나친 순수함과 세상과 격리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 필요한 능력은 정반대였는데도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면서도, 문득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여전히 순수하고 어리숙한 모습을 기대한다는 걸 깨달았다.
때로는 그 기대를 위해서 무시하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투이나는 초연하려고 했지만 타인의 시선은 생각보다 행동을 옭아매었다.
‘아르힘 님이 신경 써 주시지 않았다면 그대로 끌려 다니고 말았을 거야.’
투이나를 위해 아르힘은 일부러 루가라는 호칭을 만들었다.
별개의 이름은 별개의 권위를 만드니까.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투이나는 루가의 권위를 빌려오기로 했다.
“라카인이 샨에게 비밀을 넘겼어도 원망하진 않겠지만, 정말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투이나가 손목에 남은 분을 문질러 지웠다.
까만 얼룩이 드러나자 호루니와 스카차의 안색이 금세 거북해졌다.
“이미 병을 들켰다면 샨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니까요.”
투이나가 씁쓸하게 말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담이었다.
“우리가 바보라서 사람을 믿는 게 아니잖아요.”
투이나가 소매를 내려 얼룩을 다시 감췄다.
호루니와 스카차는 완전히 풀이 죽었다.
미안해진 투이나가 그들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사실 걱정해서 해 준 말일 텐데,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희가 많이 부족해서…….”
호루니가 코를 훌쩍였다.
“아니에요. 저도 한참 멀었는걸요.”
그녀에게도 의심은 있다.
따끔.
순간 이유 모를 죄책감이 번졌다.
아니, 아는 죄책감이던가.
결국은 의심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자신조차 살아남기 위해 샨을 살인자라고 의심하고 있으니까.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언젠가는 의심을 떨쳐낼 수 있을 거예요.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때가 오면……. 언젠가는.”
“분명 그렇게 되실 겁니다.”
“루가 님은 신에게 사랑받고 계시잖아요.”
어설프게 위로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투이나가 결국 활짝 웃었다.
“아르힘 님도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 말에 호루니와 스카차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밝아졌다. 루가가 해 주는 축복만큼 확실한 보장도 없었으니까.
투이나만이 아르힘에게 가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 * *
물론 아르힘의 모든 사람들이 루가를 환영하지는 않았다.
“루가 님, 의회에서 찾아왔습니다.”
옆으로 누워 자고 있던 투이나의 머리가 화들짝 놀라 굴렀다.
“벌써요?”
바닥에 머리를 박을 뻔한 투이나가 급히 눈을 비볐다.
“밀린 일정을 감안해도 예정보다 빠르네요?”
“모하세스와의 내기 때문입니다.”
“아아.”
투이나가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준비하자마자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루가 님, 세수부터 하실까요.”
“네.”
끼익.
사제가 문을 열자 언제 왔는지 라카인이 보였다.
정말 칼같이 복귀한 모양이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라카인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세숫대야까지 들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루가 님.”
“잘 잤어요?”
투이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원래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는 라카인이 척척 걸어 들어왔다.
“물을 준비했습니다.”
“흠! 루가 님은 제가 씻길게요.”
시종이 새침하게 대야를 뺏었다. 자기 할 일을 빼앗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라카인은 대야를 다시 낚아챌 것처럼 움찔했지만 그저 얌전히 뒷짐을 졌다.
‘음……. 활기차네!’
의회를 맞을 준비를 하느라 투이나는 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전통적으로 아르힘을 섬겨 온 신전과 달리 의회는 적당히 수호신과 거리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신앙심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라를 관리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의회는 루가가 나타난 뒤로 갑자기 왕 취급을 해야 하냐며 가장 큰 불만을 드러낸 집단이었으니까.
허겁지겁 준비를 마친 투이나가 특별할 때만 쓰는 베일을 둘렀다.
의회에 얕보이면 안 된다고 사제가 특별히 마련한 물건이다.
“됐나요?”
“아름다우십니다.”
“고맙습니다!”
투이나가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그녀가 왜 이렇게 조급해하는지 모르는 라카인만 다른 호위들을 돌아보았다.
급히 뒤를 따라가던 호루니가 그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모았다.
“오늘 호위는 제가 맡기로 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건 스카차한테 물어보세요!”
“어, 내가?”
갑자기 지목당한 스카차가 당황했다.
시종들까지 줄줄이 빠져나가자 마지막으로 호루니가 부탁하는 시늉을 하고는 문을 닫았다.
스카차는 불길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 * *
투이나는 의회가 기다리고 있는 방 앞에 도달하기 세 걸음 전에 끽 멈췄다.
헐떡이는 숨을 고른 투이나가 다시 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럭저럭 위엄에 찬 모습을 갖춘 뒤에야 투이나가 문을 열었다.
“루가 님 들어오십니다.”
끼이익.
한꺼번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팽팽한 공기가 훅 끼쳤다.
샨의 거처에서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 사람들은 위협이 아니라 견제하려는 목적이니까.’
긴장 속에서 투이나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늦으셨군요.”
의장이 딱 잘라 말했다.
‘눈뜨자마자 달려온 건데…….’
투이나는 시무룩해졌다.
불시에 나타난 건 의회 쪽이었음에도 투이나는 그들만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
“죄송해요.”
“앉으시죠.”
투이나가 앉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앉았다.
그녀보다 먼저 도착했던 사제가 의제 검토안을 넘겼다.
원래 투이나에게 의회 회의에 참석할 권한은 없었다.
의회에 들어가려면 몇 가지 자격과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걸 모두 통과하면 가문의 이름을 만들 자격이 생겼다.
가문의 이름, 그러니까 성씨를 만드는 건 친인척이 모두 의회에 들어와 권력이 집중되는 걸 막기 위한 의도였다.
그렇게 제한을 두었음에도 의회에서 파벌은 생겼고, 크게 의회파와 신전파로 갈리게 되었다.
의장을 중심으로 한 의회파는 신전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게 목적이었기에 투이나는 그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불편했다.
사제들과 필사적으로 공부하는 이유도 대부분 그들에게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제 모하세스가 보낸 병력이 신전을 탈출했다 들었습니다.”
“탈출도 아니고 병력도 아니에요. 제 허락이 있었고, 하인 셋을 내보낸 겁니다.”
무심코 투이나가 반박했다.
의장은 시큰둥했다.
“모하세스 출신에 무예를 수련한 자를 병력이 아니면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군요.”
“너무 무례하군요, 의장.”
부드러운 목소리가 퉁명스러운 말투를 가로질렀다.
다들 엄격한 차림을 한 와중에 홀로 느긋한 자세를 취한 여자였다.
“루가 님이 머리를 두건으로 가리셨다고 머리가 없어진 거라 착각하는 분이 의장이라면 곤란하지요.”
“레오나!”
모욕당한 의장이 성을 내는 동시에 투이나의 눈이 밝아졌다.
‘레오나 크로퍼드!’
반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은 베인의 누이 레오나였다.
투이나가 그쪽으로 시선을 맞추자 레오나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높이 묶은 금발을 늘어트린 레오나는 베인과 꼭 닮은 아름다운 얼굴선과 날렵한 몸매를 가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베인이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깍지를 낀 레오나가 턱을 괴었다.
“얘기를 빙빙 돌리지 말죠. 모하세스의 하인들이 당신 사업장을 헤집기라도 했습니까?”
“루가로서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보라 말한 것뿐입니다.”
의장이 으르렁거리며 본심을 드러냈다.
“듣자하니 겨우 내기라더군요. 철없는 내기에 아르힘의 내부를 정찰시켜 주다니 모하세스가 좋아서 춤을 추겠습니다.”
의장에 말에 대부분 동의했다.
시기가 어느 땐데 전쟁광의 하수인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냐는 발언도 나왔다.
의기양양해진 의장이 마저 쏘아붙였다.
“애초에 의회 회의에 루가 님이 있는 것도 우려스럽습니다. 아직 심려가 많으신 분의 실수로 아르힘에 문제가 생긴다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걱정하는 척하면서 투이나를 돌려 까는 솜씨가 일품이다.
레오나가 생글생글 웃더니 흘리듯이 말했다.
“제가 기억하기론 지난 의제는 우유 값을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루가 님이 실수하실 내용이나 있는지 모르겠군요?”
낙농업을 치는 의장이 시뻘겋게 핏줄을 세웠다.
“사사로운 안건만 있는 건 아니지요! 그렇게 따지면 당신이야말로 할 말이 많아야 하지 않습니까?”
의장이 보복하듯이 레오나를 노려보았다.
“어리니까 치장에 관심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예, 그래요. 하지만 너무 지나치잖습니까! 신전에서 분가루에 돈을 대체 얼마나 쓰는 줄이나 압니까? 화장수는요?”
듣고 있던 투이나의 낯이 확 뜨거워졌다.
그들은 투이나가 사 가는 분가루의 의미를 몰랐다. 의회에도 그녀가 여전히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그저 평범하게 보여야 했을 뿐인데.
“아무리 레오나 당신이 가장 큰 후원자라지만 우리도 엄연히 신전에 기부를 한단 말입니다.”
싸해진 분위기를 승기로 여긴 의장이 계속 쏘아붙였다.
“저희는 그런 씀씀이를 알면서도 존중하지 않습니까. 상호 존중입니다. 상호 존중!”
“의장님.”
잠깐 눈썹을 움찔한 의장이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나 존중받을 영역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듣다 보니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여러분께 솔직하고 싶어요.”
투이나가 갑자기 속내를 털어놓자 사람들은 어리벙벙해졌다.
‘약점은 누구에게나 있어. 그건 잘못이 아냐.’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신전도 당연히 의회에게 모든 정보를 개방하겠습니다. 단, 여러분 또한 아르힘 님 앞에서 어떤 거짓도 없으리라 믿어요.”
투이나가 의장을 똑바로 바라보자 순간 표정이 변했다.
투이나가 죽기 세 달 전, 의회에서는 대형 사고가 하나 터졌었다.
두 명 이상의 친족은 받지 않는 의회에 이미 의원인 자가 신분을 속이고 피붙이를 들여보낸 사건이다.
가문의 이름을 받지 못한 사생아에게 몰래 후원을 하고 의회 시험에 통과시킨 것이다.
전혀 외모가 닮지 않아 몇 년이 지나도록 눈치를 못 채다가 모든 안건에 동일한 의견을 내서 덜미가 붙잡혔다.
나라의 신뢰를 깬 일이라 여파는 굉장했고, 신전까지 나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다.
사건에 연루된 두 사람은 아르힘의 성소까지 끌려갔고,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투이나가 최후를 알고 있는 당사자를 바라볼수록 의장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갔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야. 난 두렵지 않아. 하지만 당신은…….’
의장의 마음에는 스스로 만들어 낸 죄책감의 덫이 있었다.
무언가 눈치를 챈 레오나가 대신 미끼를 살살 건드렸다.
“물론 그리하겠습니다, 루가 님. 서로에게 솔직하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맹세를 하라면 백 번도 더 할 수 있지요.”
“잠, 잠깐. 너무 앞서나가는군요.”
의장이 처음으로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당연히 여기 있는 모두 아르힘 님에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맹세를…….”
미간을 좁힌 투이나가 쐐기를 박으려는 그때, 갑자기 의장이 소리를 질렀다.
“으, 으아악!”
“뭐야?”
“뜨거워! 내, 내 팔이……!”
콰당!
의자가 넘어지며 의장이 바닥을 뒹굴었다.
깜짝 놀란 투이나도 그쪽으로 뛰어갔다.
의장이 다급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시뻘겋게 부어오른 화상 자국이 드러났다. 방금 불로 지진 것처럼 심각한 상처였다.
‘저건……!’
투이나가 숨을 들이켰다.
어린아이의 손바닥처럼 생긴 화상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세요.”
투이나가 다급히 말했다.
“예?”
“으흑……. 아, 아파!”
“빨리 데려가서 치료하란 말이에요!”
투이나가 드물게 소리쳤다.
그제야 의원들이 허둥지둥 의장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
사제가 급히 다가가려는 것을 투이나가 막았다.
“소용없어요, 사제님. 빨리 우물 쪽으로 데려가 주세요.”
“네? 하지만…….”
“제 말 믿으세요.”
투이나의 단호한 태도에 비로소 사제는 의장이 왜 화상을 입었는지 알아차렸다.
안색이 달라진 사제가 허리를 굽혔다.
“아, 알겠습니다. 아르힘 님의 뜻대로.”
다친 사람을 부축한 사람들이 우당탕 움직였다.
의회파, 신전파를 가리지 않고 투이나를 지나치는 이들은 경외와 공포가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르힘이 직접 경고한 것이다.
회의는 흐지부지 끝났다.
“…….”
남겨진 투이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식으로 끝나길 바란 게 아니었다.
‘아르힘 님이 당장 처벌하길 바라지 않았어.’
그저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투이나는 아르힘이 그녀를 위해 의장에게 화상을 입혔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원래부터 죄인이었기 때문에, 감히 신전 안에서 거짓을 고하려 했기 때문에…….
그래도 당연하지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이 옥죄어들었다.
‘저도 죄인인가 봐요, 아르힘 님.’
감히 신을 이용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고 말았다. 경배를 올려야 할 순간에.
투이나는 막막해졌다.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명확하지가 않다. 아르힘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레오나가 정적을 깼다.
“아, 레오나…….”
“어머, 벌써 제 이름을 부르시네요?”
깜짝 놀란 레오나가 물었다.
그녀의 생생한 반응에 이끌리듯이 투이나가 같이 당황했다.
‘참, 아직 우린 서로 소개도 안 한 사이였지.’
죽기 전에 몇 번 베인과 함께 만난 적이 있어서 혼자 친숙했다.
“미안해요, 함부로 이름을 부르다니.”
“아아, 그러실 거 없어요. 오히려 루가 님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기분 좋은걸요?”
레오나가 유쾌하게 말했다.
아까 있었던 소동에도 태연자약한 레오나는 팔을 들며 인사했다.
“정식으로 소개드리겠습니다. 크로퍼드 상단의 주인, 레오나 크로퍼드입니다. 제 동생에게 청혼 받으셨으니 얼굴은 익숙하시죠?”
연극적인 자세로 손목을 돌린 레오나가 허공에서 모자를 벗는 시늉을 했다.
활기찬 동작에 겨우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요. 두 분이 많이 닮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루가 님께만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 베인이 워낙 잘생겼잖아요? 닮았다는 소리에 보람을 느끼게 하는 애는 그 녀석밖에 없을 겁니다.”
“아하하.”
투이나가 쿡쿡거리며 웃자 레오나는 몹시 뿌듯해했다.
“직접 루가 님을 만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알현하고 싶었는데 의회가 빡빡하게 굴어서 고생을 좀 했죠.”
“그러셨어요?”
레오나의 입술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보다시피 제가 너무도 노골적인 신전파 사람이잖습니까. 여기저기서 견제가 많아요.”
“……아까 많이 놀랐죠?”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같은 의회 사람이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두려워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레오나는 오히려 대담하게 나왔다.
“뭐, 아르힘 님이 계신 자리에서 멍청하게 굴 만큼 어리석은 자가 있어 놀라기는 했습니다.”
레오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감히 루가 님께 꼬투리를 잡다니. 미친 거죠.”
콧방귀 한 번으로 우스꽝스러움을 날려 버린 레오나가 눈을 빛냈다.
“그나저나 루가 님, 베인은 마음에 드십니까?”
“네, 네?”
연달아 쏟아지는 레오나의 말에 투이나가 정신없이 휩쓸렸다.
“아아! 압니다. 물론 아직 구혼 기간이지요. 말씀하기 어려우시죠. 동생을 보낸 걱정이 먼저 튀어나왔네요.”
“아녜요. 베인은 정말 좋은 사람인걸요.”
“이런! 그건 제가 남자를 찰 때 자주 쓰는 말인데.”
“아, 아니요!”
투이나가 기겁했다.
“설마요. 베인이면 누구한테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데…….”
말을 하면서도 투이나는 혀가 꼬이는 걸 느꼈다.
레오나는 횡설수설하는 투이나를 인자하게 바라보았다.
“오늘처럼 많이 놀라셨을 때는 그저 아름다운 걸 보고 푹 쉬는 게 제일이지요.”
레오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루가 님, 제 동생에게 갈까요?”
레오나는 동생과 똑같은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투이나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올 만큼 똑같이.
투이나의 목이 메었다.
“네, 보고 싶어요.”
투이나는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대신 아르힘에는 소금 호수가 있다.
투명한 호수는 바닥에 가라앉은 암염을 드러냈고, 소금 결정이 햇빛에 반짝였다.
루가가 되어 첫 시찰을 나간 날 투이나는 제일 먼저 소금 호수를 찾았다.
파문도 일지 않는 고요한 수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녀는 헤엄칠 필요도 없이 떠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베인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도 똑같았다.
투이나는 그때의 생각을 하며 레오나와 함께 베인의 거처로 향했다.
약속대로 그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투이나는 더 참지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힘든 하루였다. 힘든 하루라서.
발소리를 듣고 나온 베인이 놀라 주춤했다.
“루가 님?”
베인은 늘 그랬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도 제일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불러 주었다.
그대로 달려간 투이나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앗…….”
투이나와 함께 찬 공기가 휘감겼다.
갑작스런 포옹에 놀란 베인이 몸을 굳혔다.
‘나도 알아. 지금의 베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구혼 기간의 끝에 다다를수록 두 사람을 연인으로 보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구혼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찾는 것조차 너무도 즐거웠던 때.
‘되살아난 뒤로 참고 또 참았는데.’
힘겨운 일에 계속 억눌러 왔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지금만, 잠깐만…….’
투이나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베인은 몹시 난감한지 움직이지 않다가 주저하며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따스한 체온이 둘러진 걸 깨닫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느새 망설임은 자취를 감췄다.
문득 투이나는 허리춤이 바짝 당겨진 걸 알아차렸다.
베인의 머리가 어느새 어깨 위에 웅크리듯 파고들었다.
분명히 그녀가 끌어안은 모양새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그에게 힘껏 끌어 안겨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
이미 뒤꿈치를 들고 있던 그녀의 발끝이 아슬아슬할 정도까지 자꾸만 올라갔다.
그의 손바닥이 등을 쓸었다.
당황한 투이나가 화들짝 안았던 손을 움찔하자마자 베인이 차분히 뒤로 물러섰다.
다채로운 빛이 스치는 투이나의 눈동자에 차분히 자신을 갈무리하는 베인이 담겼다.
“많이 힘든 하루셨나 봅니다.”
베인이 평소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제야 떨어질 준비를 한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무리 그녀라도 포옹 뒤에 이런 말까지 들어 버리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투이나의 팔이 스르륵 떨어졌다.
“아, 음……. 그게…….”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서까지 울려서 멍했다.
도움을 청하듯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지만 별로 도움은 안 됐다.
호루니는 처음 본 애정 표현에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느라 바빴고, 레오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분들…….’
투이나가 민망함을 간신히 쓸어 담았다.
“고, 고마워요. 위로가 필요해서 저도 모르게…….”
“아닙니다. 루가 님께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베인이 상냥하게 다시 팔을 벌려 보이기까지 해서 정말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베인이 원래 처음부터 이랬나?’
분명히 구혼 기간 초반에는 안 이랬을 텐데.
기억이 흐릿하다.
그냥 베인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던 것도 같고.
레오나가 짝, 박수를 쳤다.
“자, 자, 루가 님을 이렇게 밖에 세워 두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들어갈까요?”
그녀는 능숙하게 사람들을 방으로 집어넣었다.
투이나는 들어가는 내내 베인이 당연한 듯이 옆에 서 있어서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살짝 손가락만 뻗어도 장갑을 낀 그의 손에 닿을 텐데.
레오나는 앳된 청년들을 같은 소파에 몰아놓고 자기는 차를 가지러 쏙 빠졌다.
얌전히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침묵을 깬 건 베인이었다.
“루가 님이 레오나 누이와 같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신전에서 의회 회의가 열렸거든요.”
“아, 그래서였군요.”
베인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그들을 만났다면 루가 님이 피곤해하실 만도 합니다. 제 누이도 의회에 다녀오면 일이고 뭐고 낮잠부터 자야겠다고 눕는걸요.”
“정말요?”
“잠깐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훨씬 가벼워진다고 그랬습니다. 루가 님도 시험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여유가 있다면 그래 보고 싶네요.”
투이나가 반가이 대답하자 베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많이 바쁘신 겁니까?”
“그냥…… 좀 정신이 없어요.”
투이나가 웃으며 말을 흐렸다.
‘하긴 죽기 전보다 더 복잡해졌네.’
수레바퀴 돌아가듯 정해져 있던 일정은 되살아난 투이나를 의식하듯 삐걱거렸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벌레를 잡듯이 여기서 툭, 저기서 툭.
투이나는 변해 가는 일상이 반가웠다. 죽음을 피할 만큼은 달라져야 하니까.
그래도 과거가 지나치게 바뀌어서는 안 된다.
베인과 연인이 되어야 하니까.
‘지금까지는 잘해 온 것 같아.’
그의 옆에 앉아 있으니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보였다.
베인이 말했다.
“정 피곤하시면 저를 만나러 오셨을 때 잠깐 눈을 붙이셔도 됩니다.”
“네? 어떻게 그래요, 사람을 앞에 두고 대낮부터.”
“괜찮습니다. 루가 님이 그렇게라도 자주 방문해 주신다면…….”
베인이 살짝 말끝을 끌었다.
여운과 함께 발갛게 달아오르는 귓불이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어떻게 당신을 보면서 잠들어요?’
밤을 지새우며 보아도 좋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입이 말랐다.
때마침 레오나가 돌아와서 투이나는 말실수를 면했다.
“뭐야? 저 없는 사이에 제 험담이라도 하셨나요?”
“그럴 리가요.”
“후후. 정말 험담이라도 개의치 않을 테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레오나가 우아하게 쟁반을 내려놓았다.
동생을 구혼자로 보냈으니 당연하겠지만 레오나는 처음부터 아주 우호적이었다.
죽기 전에도 그녀는 ―원래 신전파이기도 했지만― 베인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강력한 아군이 되어 주었다.
레오나가 차를 권했다.
“뭐, 베인이 뭐라고 하든 자주 찾아와 주세요. 늘 준비하고 있는 녀석이라.”
분위기를 평온하게 하는 따스한 차향이 피어올랐다. 베인은 방문할 때마다 다른 차를 대접했다.
투이나가 ‘홍설차’라는 낯선 이름의 차를 홀짝였다.
혀끝이 아렸다.
떫은맛에 놀란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베인이 웃음을 감추며 각설탕을 건넸다.
“드시면 나아지실 겁니다.”
이에 닿은 각설탕이 달각 소리를 냈다. 투이나는 붉은 뺨을 감추려고 사탕처럼 설탕만 빨아먹었다.
달았다.
베인이 그녀의 찻잔에 대신 각설탕을 집어넣었다.
“참, 베인은 무슨 일로 레오나를 부른 건가요?”
다디단 설탕을 녹여 먹은 투이나가 물었다. 베인이 레오나를 손님으로 부르는 건 원래 한참 뒤의 일이라 은근히 궁금했었다.
“아, 저 녀석이 상담할 일이 있다고 해서…….”
“누이.”
그때 베인이 조용한 말투로 제지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투이나가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베인의 옆얼굴이 낯설었다.
레오나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왔지만, 역시 사생활이라서요.”
레오나가 시치미를 떼며 생긋 웃었다.
이렇게 되면 더 궁금해지는 쪽은 투이나였다.
‘뭐지? 뭐야?’
과거였다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같이 일 년의 시간을 보내 이 정도 사소한 일은 물어볼 사이였는데.
지금은 그렇게 살짝 물어보기엔 만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아쉽다.’
혼자서만 마음이 앞서나간다.
“사랑받고 자라 금세 가족이 그리워졌나 보다 여겨 주세요. 호호호.”
레오나가 찻잔으로 표정을 감췄다.
베인이 멋쩍어하며 조심스레 접시를 밀었다.
“더…… 드십시오, 루가 님.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맛있어요.”
투이나가 얼른 과자를 깨물었다.
잘 먹는 투이나를 본 베인이 안심한 미소를 지었다.
베인과 함께 있으면 시간은 지나치게 빨리 지나갔다.
별로 대화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창문에 노을이 비쳤다.
최대한 같이 있는 시간을 배려해 주려고 기다리던 시종들이 차츰 저무는 해를 힐끔거렸다.
레오나는 일부러 모른 체했지만 투이나까지 흘끔 창밖을 쳐다보자 깔끔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자주 놀러 오세요, 루가 님. 당분간은 베인을 만날 때 저까지 볼 수 있는 기회랍니다.”
“아하하. 네.”
“……초대는 하였지만 누이가 맡은 일이 과중하여 오늘처럼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베인이 정정했다.
레오나가 과장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우야, 듣기 흉하구나. 이 누이가 루가 님을 뵙는 자리에 끼어서 불편하다 대놓고 말해도 좋을 것을.”
“레오나!”
베인이 또 처음 보는 얼굴을 했다.
다만 이번에는 누이의 말에 창피해하는 모습이었다.
형제가 많은 투이나는 그의 반응을 아주 잘 이해했다.
투이나가 쿡쿡거리며 베인에게 기대었다.
“전 레오나도 좋아요. 같이 있으면 즐거운걸요.”
“어머나, 영광이네요, 루가 님.”
레오나가 씨익 웃었다.
베인은 팔뚝에 닿아 있는 투이나를 신경 쓰느라 놀리는 걸 받아치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부탁하세요. 만나서든 제가 있을 때든 루가 님의 청이라면 뭐든 마련해 보겠습니다.”
‘예전이라면 사양했겠지만…….’
투이나는 욕심을 내 보기로 했다.
“생각해 볼게요.”
“제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베인이 질세라 말했다. 은근히 불만이 쌓인 눈초리였다.
그것마저 너무 귀여웠다.
“어휴, 무서워라. 저 녀석이 더 성내기 전에 가 보겠습니다.”
레오나가 툴툴거리며 치마를 털었다.
“조심해서 가세요.”
“또 만나요, 루가 님.”
투이나가 손을 흔들었다.
베인은 눈인사만 했다.
“두 분이 친해 보여서 좋네요.”
“루가 님도 형제가 계시다 들었습니다.”
“네. 제 위로 언니 오빠가 다섯 명이고 동생은 셋이에요.”
“대가족이셨군요.”
아르힘에서는 자식을 많이 낳는 경우가 흔했다. 수호신의 보호 덕분에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베인은 부모님과 누이뿐이라는 걸 알고 있죠.”
“알고 계셨습니까?”
베인이 살짝 눈가를 문질렀다.
“루가 님은 계속 가족이 많으셨으니 제가 어색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베인이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다소 놀란 투이나가 무심코 말했다.
“어색하면 어떤가요.”
말하면서 그녀는 오히려 들떴다.
“어색하니까 더 많은 걸 알아 갈 수 있는걸요?”
투이나가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볼이 패이며 드러나는 작은 이에 담긴 환희에 베인은 속절없이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웃고 떠들고 수줍어하는 보통의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수호신은 백성을 돌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지도.
투이나는 미래이자 과거의 연인에게 인사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베인!”
우린 금세 다정해질 테니까.
* * *
“흠, 흐음!”
이를 닦으며 투이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양칫물을 뱉어도 노래가 나왔다.
‘베인이랑 전보다 빨리 가까워질 것 같아!’
포옹을 받아 준 베인 덕에 투이나의 기분은 최고조를 찍고 있었다.
‘혼자서만 일 년 동안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어때. 일 년 더 연애하면 되지.’
그녀는 바보처럼 해죽 웃었다.
“……되게 기분 좋아 보이시네, 루가 님.”
스카차가 신기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호위를 서면 원래 격의 없는 모습을 많이 본다지만, 지내면 지낼수록 투이나는 엄숙하고 자비롭게 축복을 내리던 루가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크로퍼드의 거처에서 무슨 일 있었어?”
스카차가 호루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무리 호위라도 남의 사생활을 말하기 꺼려진 호루니가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물어보지 마.”
“뭐야? 태도가 왜 그래.”
“쉬잇.”
호위들이 떠들자 시종이 눈치를 주었다.
호루니와 스카차가 다시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다홍색 호롱불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물 튀기는 소리만 가끔 찰박거리며 나는 평온한 저녁에 오래 긴장하기는 어려웠다.
빗을 들고 까르르 웃는 투이나는 얼룩투성이 피부로 돌아가도 즐거워 보였다.
유일하게 경계 태세를 풀지 않는 건 라카인뿐이다.
뚫어져라 꽂히는 그의 시선을 본 스카차가 이번엔 귓속말을 했다.
“……저기 말이다. 저거 궁금해하는 거겠지? 저렇게 보는 거.”
“글쎄……. 그렇지 않을까.”
“아르파인들은 죽이려는 건지 지키려는 건지 구분이 안 가.”
스카차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야, 그리고 자꾸 나한테 감시 떠넘기지 마. 어색해서 미치겠다. 난 아직 불편하다고.”
“정 싫으면 루가 님 말씀대로 그만둬도 되잖아.”
“……노력해 보는 거지. 어떻게 바로 그만두겠어.”
스카차가 팔짱을 꼈다. 호루니도 입을 다물었다.
라카인을 어떻게 대할지는 두 사람에게 아직도 어려웠다.
의심스럽긴 한데, 남는 시간마다 함께 수련해 주는 걸 보면 나름 열정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진이 빠졌을 때 루가를 공격할 셈인가 싶어 긴장하면 본인이 더 주변을 경계하고.
투이나가 부탁한 일이 없으면 감시하기 민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안 했다.
실은 호위를 교대제로 맡는 것부터 설득하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오죽하면 루가가 나서서 재웠을까.
투이나의 말을 듣고 무조건 의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인간적으로 친해질 만큼 다가갈 곁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도 별로 원하지 않는 눈치였으니.
“루가 님이었다면 쉬웠을 텐데.”
호루니가 별 의도 없이 중얼거렸다.
스카차는 속으로 동의했다.
솔직하고, 다가가기 쉽고, 친근하고. 감시하기엔 제격이다. 그녀에게는 아무 비밀도 없어 보이니까.
그 어떤 비밀도.
“많이 졸리세요?”
머리를 풀어헤친 투이나가 자박자박 걸어왔다. 호위들의 자세가 흐트러진 꼴을 보고 피곤하다 오해한 것이다.
“아닙니다!”
“오늘 일정도 끝났는데 돌아가서 쉬어도 좋아요.”
“넵.”
“네에.”
딴생각을 하다 들킨 호위들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투이나를 보고 있던 라카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루가 님.”
“네?”
“얼룩이 진해지신 것 같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랬나요?”
투이나가 얼버무렸지만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뒤였다.
“그러고 보니 좀 어두운 듯도…….”
“설마 병이 심해진 겁니까?”
‘다들 눈썰미도 좋지!’
투이나가 애매하게 입을 벌렸다.
자신도 확신할 수가 없어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실제로 몸이 안 좋아진 것도 아니고 조금만 기다리면 어차피 아르힘을 만나러 갈 예정이라 넘길 생각이었건만.
“하하. 그림자의 장난이 아닐까요?”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은 투이나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지금 있는 일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사제들에게 다시 온몸을 검사당하기는 싫었다.
다행히 시종이 편을 들어 주었다.
“아르힘 님이 계속 치료하고 계신데 설마 그럴 리가요.”
“자라면서 조금씩 나빠지는 병입니다. 갑자기 안 좋아졌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투이나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미심쩍은 분위기는 남아 있었다.
‘숨겨야겠다. 계속 보다간 계속 얘기하겠어.’
씻고 난 뒤라 딱히 얼룩을 가릴 방법이 없어서 투이나는 침대로 슬쩍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이불로 감춰 보려는 속셈이었다.
“정말 병이 심해지면 제가 먼저 알 테니 다들 걱정 마세요. 시간도 너무 늦었잖아요.”
투이나는 애벌레처럼 이불을 폭 감쌌다.
라카인은 얼굴에 난 얼룩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루가 님.”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잘 자요.”
끼익.
문이 닫히고 침대 옆에 있는 등불 하나만 남았다.
‘일단 한 고비 넘겼나?’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돌아가고 호위만 남은 모양이다.
“휴우…….”
투이나가 풀썩 이불을 내려놓았다.
등불 쪽으로 머리를 돌린 투이나가 이쪽저쪽으로 팔을 비춰 보았다.
색이 진해진 얼룩은 검은 것보다 타들어간 자국 같았다.
‘진짜 왜 이렇지?’
눌러도 아프진 않았다. 그냥 감각이 없었다.
시드룬의 마법에 당해 쓰러진 뒤로 이렇게 되었으니 분명 그때가 원인일 텐데.
‘그 비늘도 까맣게 변했었지.’
치료가 끝난 다음에 투이나는 직접 사고가 있었던 자리에 갔었다.
불길한 색으로 물든 비늘은 시종이 막대기로 건드리자 파스스 부서지며 사라졌다.
‘그건 뭐였을까?’
투이나는 일렁이는 불꽃을 응시했다.
불의 춤은 아르힘을 목격한 이교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법에 조종당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투이나가 아르힘을 보자마자 기절한 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심란해.’
투이나는 여전히 시드룬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명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시드룬은 얼마나 편지를 길게 쓰는 중인지 아직 소식이 없었다.
그녀가 베개에 뒤통수를 꾹 눌렀다. 사람들을 내보내고도 잠이 쉽게 올 것 같지가 않았다.
투이나가 손으로 더듬거리며 등불을 껐다.
불이 꺼지자 방은 금세 어두워졌다.
투이나는 코앞까지 손등을 당겨 보았지만 어디에 얼룩이 있는지 윤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암흑이었다.
‘잠들어야지. 자야 해…….’
투이나가 뒤척였다.
그러다 언뜻 희미한 빛을 감지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아주 약하고 희미한 빛이 어딘가에서 일렁였다.
‘반딧불이 들어왔나?’
투이나가 상체를 일으켰다.
빛이 나는 곳을 확인한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침대 바로 옆 허공에 보라색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시드룬?!’
경악한 투이나가 입을 틀어막는 사이 마법진은 완성되었다. 평소보다 자그마한 크기였다.
불안해진 투이나의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마법진에선 뭐든 튀어나올 수 있었다. 그녀가 보았던 무엇이든.
‘침착해!’
소리만 지르면 바로 호위들이 들어올 것이다.
투이나가 엉거주춤 마법진에서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완성된 마법진에서 편지를 쥔 손이 쑥 튀어나왔다.
“흡!”
괴랄한 소리를 내뱉을 뻔한 투이나가 간신히 목에 걸린 숨을 삼켰다.
시드룬의 손은 등불이 놓인 탁자보다 조금 높은 데서 나타났다.
느리게 내려온 손이 편지를 놓을 자리를 찾는 듯 움직였다.
곧이어 그가 탁자 위로 편지를 떨어트렸다.
그러나 너무 가벼운 편지는 얌전히 떨어지는 대신 팔랑거리며 탁자를 툭 스치며 지나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바닥에 깔린 어둠 때문에 편지가 보이질 않았다.
‘전달했으니 그냥 돌아가 줬으면!’
시드룬의 손등은 핏줄이 도드라진 채로 고민하듯 멈춰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마법진에서 쑤우우욱 나머지 팔이 튀어나왔다.
‘으악! 으악!’
기괴한 장면에 투이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시드룬!”
그녀가 새된 소리로 속삭이자 어깨까지 나온 팔이 뚝 멈췄다.
본인이 불러 놓고도 정말 들릴 줄은 몰랐던 투이나가 움츠러들었다.
잠시 후, 마법진의 크기가 커지더니 길고 가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가 마법진 바깥으로 머리를 내민 것이다.
“깨어 있었습니까?”
마법진이 발하는 빛에 시드룬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머리를 늘어트리고 일렁이는 시드룬의 모습은 수면 위로 나온 인어 같았다.
조개껍질 같은 그의 말간 눈동자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홀린 듯이 그를 지켜보던 투이나가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깨달았다.
‘내 얼룩!’
“다가오지 말아요!”
투이나가 황급히 목소리를 죽였다.
시드룬이 방에 있다는 걸 깨달으면 사람들이 들이닥칠 텐데.
그들은 당연히 등불을 가지고 올 것이다.
‘밝아지면 끝장이야…….’
그녀는 초조해졌다.
얼룩병을 딱 한 사람한테 들켰는데도 일이 엄청나게 꼬였다.
구혼자한테까지 병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모든 게 어그러질 것이다.
‘하지만 분통은 저쪽에 뒀는걸!’
분통을 꺼내려면 시드룬을 지나쳐야 했다.
아무리 마법진의 빛이 약하다고 해도 바로 옆을 지나칠 때까지 얼룩을 들키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불 켜지 말아요.”
다급하게 말한 투이나가 이불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다행히 밤이 그녀를 감춰 주었다.
“이대로 얘기해요.”
“어둠 속에서 말입니까?”
“그래요.”
시드룬은 가만히 있었다.
한동안 숨소리만 대화를 차지했다.
투이나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나타나지 마세요.”
“편지를 쓰면 마법을 써도 좋다고 했습니다.”
시드룬이 평이하게 대답하자 투이나가 이마를 문질렀다.
“그랬죠. 제가 그런 건 맞지만 혼자 있을 시간에 나타나면 곤란해요.”
“남들과 함께 있을 때 나타나는 게 더 방해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밤에 혼자 있는 여자를 찾아오는 건 방해가 아니라 위험이에요.”
시드룬의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당신이 위험한 겁니까?”
순간 투이나는 그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시드룬은 분명 아름다운 생명체였다.
진하고 굵은 뼈대에 의외로 가는 턱 선이 목을 따라 흘렀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머리색도 감탄스러웠다.
그러나 미인이어야 할 눈은 박제된 것처럼 감정이 없었다.
그나마 그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던 나머지 부분은 마법진 속에 감춰져 있었다. 몸이 잘린 채 돌아다니는 짐승처럼.
투이나의 손아귀에서 이불이 구겨졌다.
“글쎄요. 나는 당신이 더 위험해질 것 같은데요.”
시드룬은 물끄러미 어둠을 들여다보았다. 투이나가 있을 방향을 찾아보던 시드룬이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의 어조는 사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듯 고저가 없었다.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쓴 이유도 오직 그것뿐입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