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녀가 제안했다. 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더 아름다운…’
마지막 제안까지 꼼꼼하게 검토한 사제들이 일어섰다.
“수고하셨습니다, 루가 님.”
“그럼 모하세스에게 전달하는 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제가요?”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투이나가 돌아갈 준비를 하다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사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오늘이 모하세스 방문일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먼저 제안을 꺼내신 줄 알았는데요.”
“아, 아뇨! 샨의 거처에서 사고가 있던 날 전체적으로 날짜를 다 미뤘어요.”
“그래요?”
갸웃갸웃하던 사제가 다시 일정표를 들여다보았다.
“아아, 맞다. 그러셨네요. 허허. 그때 하루만 바꾸신 줄 알고 나머지 일정을 그대로 놔뒀더니 오해한 모양입니다.”
“저,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흠……. 가서 고쳐야겠군요. 죄송합니다, 루가 님.”
그 말에 진짜냐고 되물은 다른 사제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 루가 님, 제가 이미 모하세스에게 전갈을 보냈는데요…….”
“네? 무슨 전갈이요?”
“오늘 방문하신다고…….”
“네에?!”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을 전달받은 투이나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말하기 민망한지 사제의 목이 점점 어깨로 파고들었다.
“저도 그와 같은 일정표로 전달받아서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쭈그러든 사제가 그래도 할 말은 끝까지 했다.
“모하세스에게 가 보셔야겠습니다.”
투이나가 울상을 지었다.
* * *
샨의 거처로 가는 일은 출발부터 잡음이 꼈다.
“제가 가야 합니다.”
“당신만은 안 됩니다!”
호위를 부르려던 투이나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접었다.
푹 쉬었다고 완전히 쌩쌩해진 라카인이 한층 더 완성된 고집을 부린 것이다.
간신히 비밀을 들킨 아르파인을 잡아다 앉혀 놨더니 다시 샨에게 보낼 생각이냐고 나머지 사람들은 펄쩍 뛰었다.
‘사실 라카인은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오지 않았나요?’
잠깐 그 사실을 말할까 했던 투이나는 별로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관뒀다.
어차피 다들 알고 있는데 일부러 무시하는 것 같았다.
“모하세스 님의 거처엔 저보다 뛰어난 실력자들이 넘쳐납니다. 제가 반드시 동행해야 합니다.”
라카인이 무적의 논리를 꺼냈다.
라카인의 실력은 이미 증명되었으니 우리를 무시하는 거냐고 반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샨의 거처에서 호위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애초에 그를 뽑은 이유가 사라진다.
게다가 원래 그쪽에 있었으니 실력자가 많다는 말을 거짓말이라 몰아붙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투이나가 만나러 가는 아르파인들의 왕이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무예를 지녔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른 사람들도 앞선 이유들을 다 알고 있었지만 라카인에게서 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근거를 댈 수 없는 반대만 계속하는 중이었다.
널 못 믿겠다, 라는 말이 쏟아졌으니까.
라카인이 우두두 떨어지는 말의 파편을 등으로 튕겨냈다. 그는 처음부터 투이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 해 주십시오.”
“휴우…….”
길어지는 말다툼에 지친 투이나가 결국 항복했다.
“그래요. 가요.”
“루가 님!”
“대신 이번에는 다른 호위분들도 다 같이 가겠어요.”
“예?”
“네!”
오전 면담에 동행했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자기가 갈 줄 알았던 스카차가 깜짝 놀랐다.
루가 님이 자신을 못 믿는가 싶어 항변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지친 투이나가 미안한 시선을 보내자 입을 열기도 전에 조용해졌다.
어쨌든 그도 아르힘의 무사제였으니.
투이나가 라카인에게 말했다.
“라카인, 가겠다는 마음은 고맙지만 제 호위로 나타나면 분명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투이나는 그 뒷말이 더 중요했다.
“근데 싫은 소리가 아니라면요? 당신이 그리우니 돌아오라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아요? 전 그게 걱정이에요.”
라카인의 미간이 굳어졌다.
“저를 따라 주는 건 감사하지만 언젠가 라카인이 돌아가야 할 고향 사람들에게 괜히 밉보일 필요는 없잖아요.”
미움보다 사랑의 문제였다. 미움이야 쌍방향이든 일방통행이든 상관없으니 얼마나 편한가.
라카인이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라카인의 목소리에는 후회나 그리움 같은 감정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저는 오직 신을 섬길 뿐입니다. 그리하여 기쁨을 얻습니다.”
순간 투이나는 질문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떤 신을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질문에 투이나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는 사이, 시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루가 님! 어서 가셔야 합니다! 지금도 늦었다고 아주 난리에 난리가 났습니다.”
“정말요?”
서둘러 대화를 중단한 투이나가 뛰기 시작했다.
호위를 위해 앞서가는 라카인을 본 호루니와 스카차가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금세 두 사람을 따라붙었다.
샨의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샨이 화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왔을 때와 달리 거처에 돌아다니는 하인들이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무례하다고, 시선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던 시종마저 막상 하인들이 쳐다보자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빽빽하게 쏟아지는 시선의 화살에 일행의 말수는 확 줄어들었다.
‘……눈으로 압박한다는 게 이런 건가 봐.’
등골이 서늘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손아귀가 목줄을 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선의 대상이 자신이 아님에도 그랬다.
라카인은 이 모든 시선을 감내했다. 혼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어서 와라, 루가.”
거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샨도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늘을 등지고 선 샨이 무시무시하게 커 보였다.
그의 어깨에 진 그림자만으로도 투이나를 다 가릴 수 있을 듯했다.
“샨, 다시……. 앗!”
투이나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샨이 확 그녀를 끌어당겼다. 졸지에 허리를 붙잡힌 투이나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샨에게 완전히 끌어안기기 전에 중간에서 덜컥 몸이 멈췄다.
라카인이 자신의 왕이었던 자의 손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
“헉.”
투이나가 경악했다.
놀란 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들을 둘러싼 하인들이 동시에 긴 막대로 라카인의 목 줄기를 눌렀던 것이다.
단단해 보이던 근육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루가의 호위가 됐다는 게 사실이로군?”
“…….”
철그렁거리는 소리에 샨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덜덜 떠는 손으로 귀 밑까지 창을 들이댄 호루니와 하인들에게 팔을 눌린 채 그의 뒤통수를 향해 검을 뻗은 스카차가 보였다.
샨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다른 새끼 호위들도 뽑았고.”
그는 웃었다. 그러고는 확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 나를 위한 준비인가, 루가?”
투이나의 코앞에서 그의 숨결이 흩어졌다.
“내가 보낸 선물은 어쩌고?”
가까이에서 본 샨의 눈동자는 너무도 새파래서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죽기 전이었다면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가 팔을 감은 허리가 갈수록 저려오는 것 같아서 투이나가 억지로 힘을 주었다.
“……삶아 먹었어요.”
“하핫!”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게 다 장난이 되었다.
샨의 포옹도 장난, 호위들의 반응도 장난, 하인들의 공격도 장난, 고문 도구를 삶아 먹은 성녀도 다 장난.
샨이 큭큭거리며 투이나를 잡은 손을 놓았다.
하인들이 무기를 치웠는데도 식은땀을 흘리는 스카차와 호루니만 무기를 잡은 손을 내려놓지 못했다.
라카인은 보는 사람이 다 아파 보이는 벌게진 목을 문지르지도 않았다.
샨이 즐거운 듯이 말했다.
“맛이 있었으면 좋겠군.”
“형편없었어요.”
“지난번에 준 음식은 잘 먹기에 좋아할 줄 알았다만?”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줄 알았다면 그때도 안 먹었을 거예요.”
샨의 미소가 점차 진해졌다.
“좋아. 사과하지.”
샨이 다리를 펴고 앉았다.
투이나가 사과에도 불구하고 말없이 그를 쳐다보자 샨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르파의 이름에 걸고 지난번 음식은 같은 재료가 아니었다.”
“……믿겠어요.”
“좋아. 그럼 앉아라.”
샨이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투이나는 자신을 따라온 일행을 안쓰러운 눈으로 잠깐 보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시종 중에는 기절한 자도 있었다.
무릎을 짚은 샨이 불쑥 말했다.
“내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호위를 뽑았다고 말이에요?”
“정확히 내 거처에서 나가자마자 뽑았다면 의심스럽지.”
투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도 왕이다.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게 한두 번이겠는가.
“혼자 한 의심은 아니니 할 말 없네요.”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르힘이라면 뭐든 다 지킬 수 있으니 걱정을 왜 하겠냐고 할 줄 알았는데?”
“샨이야말로 아르힘 님의 신전에 몸소 들어왔으니 이미 무장을 해제한 거나 다름없다고 할 줄 알았죠.”
투이나가 대답했다.
그건 실제로 투이나가 샨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정확하게 자신이 할 법한 말이었기에 샨의 표정이 묘해졌다.
신경이 지끈거리느라 몸살이 날 것 같은데도 투이나는 샨의 반응에 약간 웃음이 났다.
“내가 보낸 편지는 받았나.”
“네. 알아보느라 시간 좀 걸렸어요.”
투이나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호위들의 심장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걸알까.
알 것이다.
투이나의 심장이 그 옆에서 같이 타고 있었으니까.
성격에 안 맞는 말을 하느라 투이나의 심장엔 과부하가 걸렸다.
그러나 이게 샨과 가장 정확하게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샨은 대담하고 도전적으로 굴지 않으면 대답도 제대로 해 주지 않는 사람이니.
투이나가 말을 이었다.
“샨의 제안을 전부 들어줄 순 없어요.”
“흐음?”
가볍게 목을 긁는 소리였는데도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발톱을 숨긴 발바닥 앞으로 굴려 나온 심정이었다.
이러니 처음 볼 때부터 겁에 질리지 않고 배기나.
투이나의 맥박이 쿵쿵 뛰었다.
‘분명히 오늘이 끝나면 심장이 반으로 줄어들어 있을 거야.’
아르힘을 만나서 치료받기 전까진 절대 샨을 두 번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투이나가 심장을 쪼개서 입 밖으로 던졌다.
“그러니 저랑 내기 하나 하지 않을래요?”
투이나의 제안을 들은 샨의 푸른 눈이 길쭉하게 가늘어졌다.
“내기?”
샨이 금방 자세를 바꿨다. 무릎을 세워 앉은 그에게서 강한 흥미가 풍겨 나왔다.
“내기라……. 뜻밖인데? 무슨 내기를 원하지?”
샨은 차라리 재밌어하는 편이 나았다.
투이나가 미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샨을 신전의 몇몇 구역만 빼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줄게요. 대신 마지막 요구 사항을 본인이 직접 해내는 거죠.”
“직접 하다니?”
“말이 달릴 만한 장소가 있을지 누가 먼저 찾을 수 있을까요?”
투이나가 최대한 흥미롭게 들리려고 애쓰며 말했다.
샨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내기군. 여긴 아르힘의 신전이다. 당연히 루가가 유리하지 않나.”
“대신 저는 얼마나 크거나 뭐가 있어야 말이 달릴 수 있는지는 전혀 몰라요.”
“미리 넓은 장소를 알아두고 날 못 들어가게 하면 그만이지.”
“샨이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 장소는 당연히 저도 함부로 쓸 수 없는 곳이에요. 뒤늦게 말을 바꾸면 내기는 제가 지는 걸로 해요.”
투이나의 조건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샨이 천천히 턱을 문질렀다. 약간 할 마음이 든 모양이다.
“대가는 뭐로 할 거지?”
“……소원 하나 들어주기 어때요?”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
샨이 빤히 투이나를 응시했다.
마른 침이 절로 넘어갔다.
‘너무 속 보이나?’
투이나가 몰래 살짝 침을 삼켰다. 어떻게든 호위를 향한 관심을 떼어 내려다 보니 무리수가 튀어나왔다.
가만히 바라보던 샨이 입을 열었다.
“조건을 바꾸지.”
“네?”
“돌아다니는 구역은 신전 바깥도 포함하고, 찾을 장소는 사냥터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깥이라뇨!”
“난 나가지 않고 하인들을 시킬 테니 안심해라. 어차피 네가 살던 나라이니 사냥터 하나쯤은 금방 찾겠지.”
샨이 무심하게 말했다.
투이나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도로 닫혔다.
“이러면 너무 저한테 유리한데요.”
“쉽게 말하지 마라, 루가. 내가 만족하는 사냥터가 그리 쉽게 나올 것 같나?”
샨이 피식거렸다.
뭘 기대하는지 알 수가 없다.
투이나가 찌푸린 눈매로 대답했다.
“어차피 샨은 나갈 수도 없는 사냥터를 찾아 봤자 쓸모가 없잖아요. 좋은 내기는 아니네요.”
“진심으로 내가 아르힘에게 구속되리라 믿나?”
투이나의 표정이 확 변했다.
샨은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힘 풀어라. 일부러 루가에게 유리하라고 해 주는 말이니.”
“어째서요?”
샨은 금세 딴청을 피웠다.
“이대로 할 텐가? 말 텐가? 대답하면 말해 주겠다.”
“샨.”
대답 대신 투이나가 책망하듯 그를 불렀다.
“정말 제가 이겼을 때 소원을 들어줄 자신 있나요?”
샨의 미소가 위험스레 짙어졌다.
은근한 위협에 그는 더욱 달아오른 듯했다.
“물론이다. 아르파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자신이 시작한 내기에 신의 이름까지 거는데, 끝까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내게 유리한 조건이니 반드시 함정이 있을 거야. 그래도…….’
유희에는 벌칙이 뒤따른다.
앞으로 샨을 알아가려면 그가 무엇을 거는지 봐 둬야 하지 않을까?
결심을 내린 투이나의 말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그렇다면 하겠어요.”
샨이 알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받아들이겠다.”
“이제 이유를 말해 줘요.”
“아아.”
샨이 지금까지 보았던 중에서 가장 크고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내게 무슨 소원을 빌지 궁금해졌거든.”
샨은 어리둥절해진 사냥감을 마지막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오직 아르힘만을 섬기는 성녀가 아르파에게 소원을 비는 모습도 꽤 장관이 아니겠는가?”
강렬한 깨달음이 뇌를 때렸다.
‘실수했다…….’
그제야 투이나는 제 발로 함정에 걸어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투이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지금 화장을 씻어내도 분칠로 가릴 필요가 없을 만큼 새하얗게 변했을 게 틀림없었다.
샨이 지각이 아니라 호위에 대해 분노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머리가 그쪽으로만 바삐 돌아간 탓이다.
투이나로선 라카인을 꼭 데리고 있어야만 하니 어떻게든 샨의 분노를 돌릴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급하게 만들어낸 차선책이었는데…….
구멍이 있었다.
가까스로 내기라는 방편을 생각해 낸 것만 해도 빨리 대처한 편이지만, 샨은 순식간에 눈치를 채고는 구멍까지 파악해내 미끼를 던졌다.
어쩌면 처음 이곳으로 올 때부터 투이나 일행을 둘러쌌던 기이한 분노가 다 계획된 것일지도 모른다.
추측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전에 일부러 고문 도구를 보내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했을지도?
애초에 라카인을 보낸 것부터가?
아니, 활을 쏘려다 사고가 난 것부터 다 계획된 것이라면?
‘으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투이나가 골치만 썩이는 물음표들을 다 쫓아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샨이 투이나의 병을 알고 라카인을 보낸 건 아니라는 것이다.
라카인이 살아서 신전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투이나가 그를 처리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낼 수 있으니.
샨에게는 그거면 충분했을 것이다.
투이나가 라카인을 통해 샨에 대한 정보를 연다면, 샨도 반대쪽에서 마찬가지로 루가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내게 유리한 것은 상대에게도 유리한 것.
투이나는 그 말을 실시간으로 절절히 깨닫는 중이었다.
“신선한 공기라도 필요한가? 설마 루가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
샨이 놀리듯이 말했다.
원망스럽게 그를 흘깃거리는 투이나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잔혹한 즐거움이다.
‘애초에 겁을 먹지 말았어야 했어.’
공포가 일을 키웠다.
투이나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꼭 움켜쥔 샨의 손아귀를 느낄 수 있었다.
* * *
“하아…….”
완전히 녹초가 된 투이나가 침대로 쓰러졌다.
투이나의 일행이 샨의 거처에서 나오는 모습은 완전히 패잔병의 무리가 따로 없었다.
‘내일 면담 때 내기에 대해 말하면 사제님들은 대체 얼마나 쓴소리를 하실까.’
평소에 그렇게 수다를 떨던 시종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는 바닥을 때렸다.
내기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샨이 했던 말이 핵심이었다.
엎어져 있던 투이나가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신학서를 끙, 하고 다시 끌고 왔다.
투이나가 보려는 부분은 기초 중의 기초라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사람은…… 두 명의 수호신을 섬기지 못한다.”
소리 내서 읽은 투이나가 다시 고개를 박았다.
나라의 수호신은 그들을 믿는 신도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나라가 부강할수록 신앙심은 더 커졌고, 그러면 수호신의 힘도 자연스레 강해졌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기반을 신도들에게서 얻는 만큼 모든 나라의 종교는 변절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비로운 아르힘마저도 이교도가 그의 현신을 보기만 해도 불타 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데 투이나가 아르힘을 믿는 신도로서 아르파에게 소원을 빌면 어떻게 될까?
무슨 결과든 상상 이상으로 끔찍할 것이다.
‘정말 전혀 생각 못 했어.’
당연히 투이나가 제정신이라면 아르파에게 소원을 빌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샨의 이름을 간과한 것이다.
투이나는 루가지만 아르힘의 이름을 쓰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신과 별개의 존재니까.
그러나 모하세스에서는 왕이 대대로 수호신의 이름을 받고, 그들의 수호신을 자신의 몸에 불러오는 의식을 치렀다.
즉, 샨은 스스로를 아르파 신이라고 여길 수가 있었다.
어쩌면 남에게까지.
“으으으!”
투이나가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빠르게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며 아르힘을 만난 이교도에 대한 끔찍한 묘사를 다시 읽은 투이나가 다시 괴로워했다.
“으아아……!”
착잡하게 그 꼴을 보고 있던 시종들이 결국 입을 열었다.
“그……. 루가 님. 아르파는 아르힘 님과 다른 방식으로 힘을 행사할 겁니다.”
별로 도움 되는 얘기는 아니었다.
투이나의 상상에 새로운 끔찍함이 덧붙여졌다.
“불이 아니라 피로요?”
“…….”
시종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아르파의 왕이 누비는 전쟁터마다 내리는 피의 저주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도 못 되었다.
‘차라리 검에 찔려 죽는 게 낫지.’
투이나가 다시 책으로 고개를 처박았다가 이마에 찍힌 자국을 낸 채 다시 일어났다.
“후…….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딱 하나예요.”
“방법이 있긴 있습니까?”
시종이 뜨악스럽게 되물었다.
투이나가 허탈한 미소를 잠깐 지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다.
“샨이…… 무조건 내기에서 이겨야 해요.”
투이나가 비장하게 말했다.
시종들은 쏟아지는 한숨을 삼켰다.
루가의 방 바깥에 있는 호위들도 참담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산책하듯 따라다닌 다른 장소와 달리 샨의 거처에서 정말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란히 문 앞에 앉은 세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한 명은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태긴 했다.
침울하게 앉아 있던 호루니가 라카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목부터 손목까지 벌겋게 눌린 자국이 심각하게 부어올라서 숨을 쉬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호루니가 입을 열었다.
“……곧 사제님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
라카인은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의기소침해진 호루니가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렇게 무력할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단순히 눈앞의 상대를 제압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호위가 된다면 호위 상대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전에선 얌전한 결투란 없었고, 개미귀신 구덩이에 빠지듯 순식간에 목숨 줄이 추락했다.
고작 창 하나에 의지해서 그 자리에 서 있던 자신이 더 믿기지 않았다.
거세게 팔을 움켜쥔 스카차도 사정은 비슷했다. 험악하게 요동치는 눈동자를 간신히 숨긴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는 대화를 마친 투이나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꼼짝도 못 하고 처음 자리에서 검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샨의 거처를 나간 뒤에야 그의 손에서 쨍그랑하고 검이 떨어졌다.
투이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한번 끌어안고 다독여 주었다.
그것이 분했다.
“내가 지켜야 할 분에게…… 오히려…….”
울컥한 스카차가 뒷말을 씹었다.
남은 두 사람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투이나가 그렇게 갑작스레 내기를 꺼낸 건 그 자리에 가득 찬 위협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샨이 공격적으로 나왔을 때 어떻게든 자신이 제어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컸으니까.
차라리 시종들이 없었거나 호위가 그들과 엇비슷할 정도만 되었어도 투이나가 그렇게 초조한 제안을 할 필요가 없었다.
상황은 생각을 주도한다.
투이나를 위해 안전한 분위기를 이끌어내지도 못한 그들은 확실한 실패자였다.
떠올릴수록 분해진 스카차가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호루니의 눈가도 빨갛게 변했다.
라카인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세 사람에게 반쯤 기운 달빛이 비쳤다.
잠시 후, 등 뒤에서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투이나였다.
“아직 밖에 있어요?”
“루가 님.”
호루니가 서둘러 일어났다.
실핏줄이 터진 스카차가 황급히 찬바람을 얼굴에 쐬었다.
라카인이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일어났다.
투이나가 그들을 번갈아 응시했다.
“……미안해요. 오늘 저 때문에 고생했죠.”
“아……닙니다.”
“루가 님 때문이라뇨.”
눈이 따끔거려서 호루니가 고개를 푹 숙였다.
투이나는 그저 미안했다.
“방금 시내에 마차 사고가 있어서 사제님들이 대부분 그리로 나가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렇게 오래 기다릴 줄 알았으면 진작 들어오라고 할 걸 그랬네요.”
“아닙니다.”
아까보다 명확해진 목소리로 스카차가 대답했다.
침착한 척하는 그의 말투에 기어코 호루니의 목에 물기가 어렸다.
“루가 님……. 괜찮으신 거죠? 모하세스와 한 내기 때문에 혹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어, 아니에요!”
투이나가 급히 정정했다.
“분위기가 좀 심각하긴 했지만 정말 괜찮아요. 샨이 저를 곯리려 해서 좀 속을 끓이겠지만…….”
“…….”
“그래도 청혼을 한 상대이니 심한 짓은 안 할 거예요. 평생을 함께하려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어요?”
그들을 위로하려다 무심코 베인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투이나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그때 호루니가 울적하게 말했다.
“모하세스는 잔인한 자입니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어서 투이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일 거라 믿어요.”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스카차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루가 님도 저희만큼이나 어리신 분입니다. 차라리 너희를 믿지 못하겠으니 갈아 치우겠다 하십시오.”
스카차의 말에 참고 참던 호루니가 기어이 소리쳤다.
“그만 좀 해! 네가 여기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무도 안 궁금하니까! 루가 님한테 그만 안겨!”
“내가 언……!”
반박하려던 스카차가 확 고개를 돌렸다.
하필 오늘 안겨서는.
쏘아붙인 뒤에야 겨우 얌전해진 스카차를 흘겨본 호루니의 눈동자가 붉었다.
“루가 님, 저는, 저는 달라요. 제가 노력해서 꼭…… 어디에 계시든 안심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겠습니다…….”
목이 메는지 호루니의 뒷말이 먹어 들어갔다.
‘이 사람들을 어쩌면 좋아…….’
투이나도 울컥했다.
이 모든 상황을 누구의 탓이라고 꼬집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더 나아지겠다고, 포기해도 괜찮다는 말들을 들으니 가슴이 저며 왔다.
‘호위를 뽑길 정말 잘했어.’
그들이 투이나를 자신의 일처럼 여겨 줘서 기뻤다.
“여러분은 제 옆에 계시기만 해도 충분해요.”
투이나가 진심을 다해 말했다.
호루니가 코를 훌쩍였다.
자연스레 남은 한 사람인 라카인에게로 고개가 돌아갔다.
달빛을 등진 그는 죄책감인지 의지인지, 무엇이든 알아볼 수 있는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라카인도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투이나가 강조했다.
그러나 라카인은 묵묵했다.
‘살아는 있나…?’
순간 선 채로 죽었나 싶어 숨소리도 안 들리는 그가 걱정스러워졌다.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쓰라린 목을 짚었다.
열이 올라오는 부은 살이 만져졌다.
“들어카 쉬입시오, 루가 님.”
괴랄한 목소리가 라카인의 목에서 새어나왔다. 부운 목구멍에 새끼 새가 빠져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당황한 투이나가 황급히 말았다.
“으아아……! 알겠으니까 일단 말하지 마세요. 그만 말해요.”
환자를 세워 놓은 투이나의 죄책감이 굉장했다.
‘치료받는 거만 보려고 했는데.’
자기가 여기 있으면 괜히 신경만 쓰이게 생겼다.
투이나가 얼른 나왔던 문을 빠끔 열었다.
“저는 지금 들어가지만 여러분은 꼭 제대로 치료받고 들어가야 해요. 알았죠? 내일 멀쩡한 상태인지 확인할 거예요.”
“예.”
“에옉에.”
라카인이 끝까지 괴상한 소리로 답하는 걸 들은 투이나가 얼른 방으로 쑥 들어갔다.
* * *
다행히 다음 날이 되자 호위들은 다시 말짱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투이나는 크게 안도했다.
“다들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좋은 아침은 무슨 좋은 아침입니까!”
반짝 손을 들던 호루니의 인사가 새벽같이 와 있던 사제의 호통에 가려졌다.
어제 샨과 한 내기를 듣자마자 사제들이 면담을 아침으로 확 당겨 버렸던 것이다.
투이나가 배시시 웃었다.
“사제님들도 좋은 아침 되셔야죠.”
“휴우…….”
한숨을 뻑뻑 쉰 사제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눈치를 보던 호위들도 따라 들어갔다.
“어디 자세히 들어 봅시다.”
투이나가 샨과 나눴던 내기의 내용을 자세하게 털어놓는 동안 시종은 아침 식사를 가져와 탁자에 올렸다.
“……그래서 각자 내일부터 사냥터 탐색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사제들이 죽상을 썼다.
“하인 몇을 밖으로 내보내도 좋다는 허락이 언제 이렇게 커졌답니까.”
“미안해요.”
사제는 탓하지 않았다.
“앞으로 샨의 거처에 갈 때엔 사제 한 명을 꼭 데려갈지 검토를 해 보도록 하지요.”
일단 내기를 받아들이는 걸로 일단락이 났다.
투이나가 제일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물었다.
“소원에 관한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도 전달받은 뒤로 조사를 좀 했습니다.”
사제가 양피지를 하나 밀었다.
“아르파의 신이 모하세스의 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가 말했던 대로 그가 신이나 마찬가지라는 경지는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신전에 들어왔을 때 벌써 난리가 났겠지요.”
“아마 필요할 때마다 강림의 형태로 이뤄질 겁니다.”
투이나가 양피지를 꼼꼼하게 읽었다.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기록을 수집한 자료였다.
처음부터 모하세스가 전장에 나서지는 않습니다.
그가 말을 타고 뛰어드는 것은 어느 정도 땅이 피로 적셔진 뒤며, 그가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든 후로 그의 주변에 있던 백여 명의 병사들이 동시에 쓰러졌습니다.
그러고는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웃음이 들리더니 눈앞이 뜨겁고 붉은 피로 덮였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보니 간신히 도망쳐 나온 몸이 개울에 처박혀 있었고, 머리부터 종아리까지 핏줄이 다 터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그대로 기절했습니다. 사람의 몸에 그렇게 많은 피 구멍이 있을 줄은 몰랐…….
토할 것 같아진 투이나가 확 양피지를 덮었다.
사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혹시 루가 님이 내기에 이겨서 모하세스에게 소원을 빌어도 아르힘 님의 분노를 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투이나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입맛이 뚝 떨어진 투이나가 먹다 남은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하필 메뉴가 소시지였다.
“만약의 일이지만 샨이 강림을 했는데 제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소원을 빌 가능성은 없나요?”
“없습니다.”
사제가 단정 지었다.
“모하세스에게 아르파가 강림을 하면 이성을 완전히 잃는다고 합니다. 누구와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니 금세 알아보시겠지요.”
투이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틀린 점이 있나요, 라카인?”
그제야 이 자리에 아르파인이 있다는 걸 깨달은 사제들이 끽 의자를 돌렸다.
문에 기대어 서 있던 라카인이 대답했다.
“전부 옳습니다.”
멀쩡한 목소리였다.
사제들이 이교도에게 기도를 해 주는 걸 찜찜하게 여기긴 했지만 치료는 잘되었다.
사제들이 눈을 굴렸다.
“허어, 그러고 보니 아르파인이 있었군요.”
“모하세스의 최측근이었다죠? 잘됐군요! 그동안 모자란 자료가 좀 있었는데.”
“아니, 당신은 기껏해야 복식 전문이면서 아르파인까지 데려갈 생각이세요? 우리 전쟁사 집필이 몇 년이나 걸린 줄 아세요?”
“씁……. 다들 조용히 하지 못하겠는가? 루가 님의 호위다.”
본인도 잠깐 눈이 빛났으면서 중년의 사제가 점잖은 척했다.
투이나가 웃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라카인과 직접 상의해 보기로 해요.”
“참, 루가 님, 맡기셨던 물건도 조사가 끝났습니다.”
사제가 소매를 펄럭거렸다.
순간 뭘 맡겼는지 기억을 못하던 투이나가 탁자 위에 오른 보랏빛을 보고는 바로 떠올렸다.
“아, 비늘!”
“가장 신성력이 높은 사제와 마법 연구에 헌신한 사제들을 모아 놓고 모든 가능성을 다 점쳐 보았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행이네요.”
투이나가 기꺼운 마음으로 비늘을 확인했다. 비늘은 여전히 시드룬에게서 받았던 그대로 반짝였다.
“직접 그 비늘을 물고 시드룬을 불러 본 사제도 있었는데, 그때도 마법사가 나타났었습니다. 루가 님이 부른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곧 돌아가긴 했지만요.”
“그러기까지 했어요?”
투이나가 깜짝 놀랐다.
가끔 보면 사제들도 간이 보통 큰 게 아니다.
사제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루가 님이 쓰실 건데 당연히 확인해야지요. 별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시드룬이 루가 님이 아니면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긴 했습니다.”
“와아…….”
시드룬이 약속을 잘 지키는구나 싶었다.
마음 어딘가에서 혹시 계속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싹 가셨다.
“혹시 이게 무슨 비늘인지는 알아내셨나요?”
“사냥꾼과 어부를 각각 둘이나 불렀으나 모두 처음 본다고 하더군요. 한 명이, 확실치 않은 어투였지만 차라리 뱀 비늘에 가까운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뱀이요?”
투이나가 두툼한 비늘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런 비늘을 가진 뱀이라니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진짜 뱀은 아닐 겁니다. 이런 비늘을 가진 뱀이라면 사람보다 더 클 게 틀림없거든요.”
사제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그건 다행이네요. 만들어낸 물건이라는 거죠?”
“예. 게다가 걸려 있던 마법도 대단치 않습니다. 담긴 마력이 많지 않은 걸 보니 정말 단순히 자신을 부를 때 쓰라고 준 모양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법사가 신전 어디 있는지는 좀처럼 파악이 되질 않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신전을 훑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사제가 울상이 되었다.
투이나가 위로했다.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아르힘께서 알려 주시겠죠.”
“아닙니다. 아르힘께서 나타나신다면 오히려 저희의 태만이지요.”
어떻게든 구혼자들이 아르힘의 말을 따르게 만들려는 사제들의 노력이 참으로 가상했다.
투이나의 해법은 언제나 간단했다.
“그럼 직접 불러서 물어봐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마침 사제님들이 모여 계시니 괜찮죠?”
“좋습니다.”
사제들이 곧장 찬성했다.
투이나가 입을 벌려 어금니 쪽으로 비늘을 집어넣고는 힘껏 깨물……
……려고 했다.
뎅.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투이나의 귀가 찌르르 멍해졌다.
“……여러운?”
비늘을 문 채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눈앞이 이상하게 보였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사제들이 흐려지며 갑자기 멀어졌다.
조금 전에 울렸던 종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커졌다. 고막이 아플 정도로 떨렸다.
투이나는 크게 뜬 눈을 깜박일 수가 없었다.
비늘을 문 입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
시종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은데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다.
갑자기 소금에 푹 절여진 것처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모든 것이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들리면서도 들리지 않았다.
투이나의 동공이 거세게 떨렸다.
그때 온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킥킥킥.”
“닿았다. 닿았어.”
“히히히힛!”
그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시드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들어서는 안 될 소리였다.
지직.
시야 끝이 부서지는 느낌이 나더니 투이나의 시선 끝에 거대한 통로가 나타났다.
‘내게 지금 뭐가 보이고 있는 거야?’
너울이 일렁이듯이 안개처럼 단단한 물질이 마법처럼 펼쳐졌다.
어쩐지 그것이 익숙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투이나는 뒤늦게 어디서 그런 걸 보았는지 떠올렸다.
‘시드룬의 머리와 똑같은 색이야.’
쉼 없이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수백 수천 개가 넘었다. 그들은 하나의 모래바람처럼 끊임없이 속삭이다가 사라졌다.
“잘 가.”
“사랑해 줘.”
“죽었다. 죽는다! 죽는다!”
동시에 투이나의 몸이 미친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감춰 놨던 얼룩이 달군 쇠로 지지듯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아!”
비명을 지르려고 투이나가 입을 벌렸지만 목이 꽉 막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투이나는 할 수 있는 한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불에 달군 집게로 얼룩을 으깨 버리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데, 공포스럽게도 통로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커지는 게 아니었다.
그건 투이나에게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오면 안 돼…….’
그녀는 겁에 질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기에 닿으면 안 돼!’
통로의 모습이 확확 바뀌었다.
새벽이었다가, 노을이었다가, 뻥 뚫린 암흑이 되더니, 어느 순간 크게 눈을 뜬 시드룬의 모습이 잠깐 비쳤다.
그러나 그도 곧 사라졌다.
수백 개의 목구멍이 쩌억 입을 벌렸다.
그녀에게 닿기 직전에, 그것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부드러운 색의 안개로 변했다.
투이나가 거의 쓰러지려는 찰나, 서늘한 손이 다가와 투이나의 눈을 가렸다.
“잊어라.”
팟!
그 순간 그녀가 보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헉!”
투이나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덜덜 경련하던 그녀의 입에서 비늘이 툭 떨어졌다. 원래대로 돌아온 눈앞에서 신전의 시종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기절……하고 있어?’
언제 왔는지 투이나의 발치를 붙든 라카인마저 옆으로 툭 쓰러졌다.
그 모든 장면이 희고 넓은 손바닥 아래로 보였다.
어지러운 머리로 가쁘게 숨을 오르내리던 투이나는 누가 자신의 뒤에 있는지 천천히 깨달았다.
그리고 알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흠뻑 젖은 투이나의 눈동자가 신이 창조해낸 가장 완벽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소년의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 버린 남자가 빛을 두른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자애롭다고 생각한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끝없는 신의 고요함이 투이나를 사로잡았을 뿐.
“아르힘 님…….”
속삭이듯 중얼거린 투이나는 그대로 힘을 잃고 기절해 버렸다.
* * *
그녀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의식부터 힘줄 하나까지 모두 진이 빠졌다.
가물거리던 투이나가 손끝 발끝을 까딱였다.
모두 다 제 몸이 아닌 듯했다.
‘살아 있나?’
고통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잔상 같은 미열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대로 꼼짝 않고 다시 잠들고 싶었다.
다 잊어버리고.
걱정 같은 건 모른 채…….
솜털 같은 손길이 이마를 스쳤다.
“…….”
투이나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온통 어둠인 곳에서 홀로 빛을 머금은 소년이 있었다.
다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르힘이었다.
“……여긴 어디인가요?”
“너의 방이다.”
아르힘이 대답했다.
신의 빛에 의지하자 어렴풋이 주변 윤곽이 드러났다. 익숙한 공간에 안심이 되는 건 아주 잠깐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힘없이 중얼거리던 투이나가 곧 억지로 고개를 틀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아이야, 안심하거라. 그들은 기절했을 뿐이다.”
아르힘의 목소리는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여전히 어지러우면서도 투이나는 하염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해야 질문이라도 할 텐데.
남는 건 그저 걱정이었다.
“그 비늘에 문제가 있었나요?”
“…….”
“아니면 이번에도 제 몸이 문제였던 걸까요? 제 병이…….”
“반드시 부딪치는 것이 있다.”
아르힘은 대답 대신 짧은 이야기를 꺼냈다.
“스스로는 불꽃을 내지 못한 채 남에게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은 무엇이냐.”
“……부싯돌이요.”
“맞혔다.”
아르힘이 싱긋 웃어 보였다.
투이나는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점점 눈을 뜨고 있는 게 힘겨워졌다.
“네가 지닌 것 때문에 괴롭고 다칠 때가 있을 것이다. 네게서 튀어나간 불꽃이 커다란 산불로 번질 때도 있을 것이다.”
아르힘의 작은 손이 조약돌을 잡듯 투이나를 쥐었다 놓았다.
“그러나 괴로워하지 마라. 다른 이에게 부딪치지 않도록 내 품에 너를 들이지 않았느냐.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힘들어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다 막아 주겠다.”
아르힘의 말이 잔잔하게 파고들었다.
강하게 안심한 탓일까. 수마가 몰려왔다.
“아르힘…… 님…….”
투이나가 잠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곤한 그녀를 대신해 마음을 읽은 신이 대답했다.
“그들이 기절한 까닭은 비늘이 아니라 내게 있음이라. 내 현신이 나타나기 전에 경고했음을 탄식하노라.”
어렴풋한 종소리를 떠올린 투이나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 * *
꼬박 하루를 잠들고 일어난 투이나는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투이나를 보자마자 엉엉 울기 시작한 호루니를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말을 시작했다.
“그건 아르힘이셨습니다!”
“아니, 마법이었습니다!”
“제가 아르힘 님의 현신과 함께했습니다!”
그날의 충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사제들이 흥분해서 떠들었다.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던 투이나가 골이 울려서 머리를 기댔다.
“다들 조금만…… 침착하게 말해 주세요.”
“그러니까 루가 님이 비늘을 집으셨을 때 말입니다.”
그들의 설명으로는 투이나가 비늘을 깨물자마자 곧장 마법진이 나타났다고 했다.
시드룬이 평소에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보라색이었는데, 웬일인지 마법진이 완성되어도 시드룬이 나타나지 않았단다.
대신 마법진이 점점 무서운 색으로 변하더니 크기가 더욱 커져 갔다는 걸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때 문에 기대어 서 있던 라카인이 투이나 쪽으로 튕겨나가듯 달려갔다고 했다.
꼼짝 않고 서 있던 투이나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린 건 그다음이었다.
전혀 몰랐는데, 라카인은 큰 소리로 투이나를 부르는 걸로도 모자라 무엄하게도 몸을 흔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때 투이나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가요?”
“예. 저 무엄한 아르파인이 뭔가 단단히 잘못한 것이지요.”
투이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라카인 때문도 아니었다.
방을 둘러보던 투이나는 호위들 사이에 라카인이 서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왜 라카인이 안 보이죠? 설마 그도 뭐가 잘못된 거예요?”
난감해진 시종이 눈치를 보았다.
“그것이…….”
투이나가 비명을 지르자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나머지 사람들도 투이나에게 다가가려고 했단다.
그러나 그들이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엄청난 위압감이 그들의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고 한다.
“그분이 바로 아르힘 님이셨던 것이지요!”
방금 전 흥분을 억누르던 사제가 다시 외쳤다.
신앙심이 없으면 신의 현신을 보지 못한다는 건 말 그대로였다.
부족한 신앙심으로는 존재를 알아채자마자 기절하는 게 대다수였고, 그나마 오랫동안 기도와 수양을 거친 사제만 간신히 옷자락을 보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리고 아르힘에서 유일하게 신을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투이나뿐이었다.
새삼 루가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들이 투이나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많이 부담스러웠다.
고개를 가로젓던 투이나가 흠칫 입술을 깨달았다.
“그럼 라카인도 아르힘 님의 현신을 보았으니…….”
“예. 그자만 유일하게 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투이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스카차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절에서 깨어난 사제님들이 곧장 치료에 들어갔으니 너무 염려하진 마십시오.”
어떻게든 좋게 표현하려는 스카차의 노력에도 한 시종이 눈치 없이 말을 보탰다.
“사실 그대로 죽지 않은 게 기적입니다. 옆에 있던 사제들이 뜨거운 걸 느끼고 깨어날 정도였으니까요.”
“욱…….”
“그만하세요!”
토기가 치민 토이나가 팔을 휘저었다.
호루니는 버럭 화를 냈다.
방금 깨어난 사람한테 산 채로 불타 죽을 뻔한 이야기를 대체 왜 하는가.
아르힘의 현신을 만난 데에만 들떠있던 신전 사람들이 그제야 떠들던 주둥이를 다물었다.
먹은 것도 없는 투이나가 헛구역질을 했다.
한참 만에 진정한 투이나가 호루니가 받쳐 준 등으로 일어났다.
“치료는 어떻게 됐죠?”
“이미 깨끗이 나아 원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충격이 클 것이니 쉬고 있을 뿐입니다.”
사제가 대답했다.
기실 아르힘의 사제들은 죽지만 않으면 다 살려 내는 힘을 가졌기에 무슨 얘기를 들어도 숨만 붙어 있으면 다 괜찮다고 여겼다.
신이 주신 힘이 그들과 함께했으니까.
‘그래서 아르힘 님을 만난 데에만 정신이 팔렸겠지. 원래 독실한 분들이니 이해할 수 있어…….’
투이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지친 몸으로 그녀가 말했다.
“라카인은 원할 때까지 아무도 부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루가 님도 더 쉬시겠습니까?”
사제가 물었다.
도무지 상황을 읽지 못하는 그에게 호루니가 다시금 원망스러운 눈빛을 쏘았다.
스카차도 표정에 실망이 역력했다.
투이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일어날게요.”
미안해서라도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비늘은 어떻게 됐죠?”
옷을 위로 걸쳐 입으며 투이나가 물었다. 호루니가 직접 그녀가 입는 걸 도왔다.
“루가 님이 떨어트린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되고 정신도 없거니와 차마 줍기가 어려워서…….”
한 시종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신 겁니까?”
머리를 묶던 투이나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비늘을 물고 나서 겪었던 일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게 정말 현실이었을까?’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다시 머리카락을 묶는데 집중했다.
그런데 눈에 거슬리는 게 있었다.
“어?”
투이나가 올리던 머리카락을 그대로 늘어트렸다. 그녀가 뚫어져라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착각인가?’
모든 얼룩들이 처음 병에 걸렸을 때보다 까맣게 보였다. 회색이 아니라 타들어 간 자국처럼 검은색이다.
크게 뜬 눈으로 그녀가 손가락 마디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몸에 난 얼룩도 똑같아…….’
“왜 그러십니까, 루가 님?”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팔을 이불 아래로 감췄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투이나가 얼른 옷을 껴입었다.
피부를 보면 색이 진해진 걸 금방 알겠지만, 머리카락은 원래 색이 짙어서 잘 눈에 띄지 않는 모양이다.
투이나가 급한 대로 손을 분가루 통에 통째로 집어넣고 칠했다.
“어쨌든 나가는 대로 시드룬을 만나 봐야겠어요. 어떻게 부르죠? 비늘은 이제 쓸 수 없어졌으니…….”
시종과 사제들이 슬쩍 서로를 쳐다보았다.
“저, 루가 님.”
“네?”
“시드룬이라면 이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후두둑.
그녀의 손에서 분가루가 떨어졌다.
대충 차림새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자 시드룬이 보였다.
새하얀 돌기둥 사이로 긴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시드룬은 그 모습마저 이질적이었다.
막상 그를 눈앞에 두자 마음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바위에서 이끼가 떨어져 나오듯 그가 다리를 움직이자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뿌리처럼 딸려 나왔다.
시드룬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야기가 필요하겠습니다.”
“그래요.”
투이나가 고갯짓을 했다.
시드룬과 투이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사고에 대해 말해 주시겠습니까?”
투이나는 뒤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호위들은 가까웠고, 고함을 치면 시종들에게도 충분히 들릴 것이다.
심란함을 진정시키는 데 실패한 투이나가 되물었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제가 준 비늘을 사용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고의였나요?”
“아닙니다.”
시드룬이 별로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투이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사제님들이 비늘엔 약간의 마력만 있었을 뿐, 제가 겪었던 사고를 유발할 정도는 아니라고 맹세하더군요.”
“그렇습니다.”
투이나가 걸음을 홱 멈췄다.
꼭 나무와 함께 걷는 기분이었다.
감정이라곤 없는 깨끗한 얼굴을 올려다보던 투이나가 결국 울컥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세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시드룬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준 물건이잖아요.”
“당신이 받았으니 앞뒤 사정을 듣는다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드룬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화가 치민 투이나가 결국 먼저 말로 쿡 찔렀다.
“사과부터 듣겠어요.”
시드룬이 눈을 깜박거렸다.
“미안합니다.”
투이나가 그를 계속 바라보자 시드룬이 천천히 반복했다.
“미안합니다.”
“계속 똑같은 말을 한다고 사과가 진심으로 바뀌진 않아요.”
투이나의 머리가 슬슬 저려 왔다.
‘여기는 화가 나서 아프기도 하는구나.’
시드룬은 돌처럼 단단한 광택이 나는 눈동자로 투이나를 응시했다. 꼭 박제가 된 기분이다.
한참 만에 시드룬에게서 미약하게 반응이 나타났다.
“멱살을 잡아도 됩니다. 화나면 보통 그렇게들 하더군요.”
“뭐라구요?”
예상 밖의 대답에 화가 흐트러졌다.
시드룬은 진심이었는지 아예 직접 자신의 옷을 끌어올리는 정성까지 보였다.
조신하게 양손으로 멱살을 잡은 그가 투이나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가련하게 스스로를 당긴 시드룬을 보니 저절로 얼이 빠졌다.
기가 막힌 투이나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해 버렸다.
“제가 잡기엔 당신이 너무 높군요.”
시드룬이 허리를 숙였다.
그래도 높았다.
어이없어하던 투이나는 곧 마음을 바꿔 발뒤꿈치를 올렸다.
까치발로 일어난 투이나가 시드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놀란 호위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사실 멱살은 핑계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 어려운 이야기라…….
그녀가 멱살 안으로 속삭였다.
“시드룬.”
투이나가 유리알 같은 눈을 올려다보았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투이나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를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여전히 그녀의 숨결이 닿기엔 시드룬이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 죽음 속에서 당신을 봤어요.”
“…….”
시드룬은 말이 없었다.
‘분명히 나와 눈이 마주쳤잖아요.’
투이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비늘을 깨문 순간 나타났던 통로에 시드룬이 있었다.
반응을 보니 그도 기억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래도 설명하지 않을 건가요?”
투이나는 있는 힘껏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힘으로는 고작 그의 머리카락을 살랑이게 하는 게 전부였다.
“당신은 그게 뭔지 알죠? 그래서 날 만나러 왔잖아요.”
시린 바람이 불었다.
시드룬은 투이나의 소원대로 흔들려주는 대신 천천히 그녀를 향해 허리를 기울였다.
무슨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문득 그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투이나가 탁 손을 놓았다.
“왜 마법사에게 신이 없는지 궁금하다 했었죠.”
투이나가 한발 물러났다.
고작 한 걸음 떨어졌는데도 시드룬과의 거리가 오랜 세월처럼 벌어진 느낌이 들었다.
“신께서는 영혼이 있는 자에게만 섬김을 받습니다.”
시드룬의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빛이 스쳤다.
투이나는 여전히 떨어진 자리에서 그를 향해 말했다.
“마법으로 영혼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마법사에게는 계속 신이 없을 거예요.”
시드룬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투이나만 애가 탔다.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걸까?’
감정이 한계를 넘쳐흐르자 모든 것이 안타까워졌다.
‘해칠 의도가 없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투이나를 구하러 나타난 아르힘의 모습에 라카인이 쓰러진 것처럼, 큰 힘은 존재만으로도 너무 위험했다.
이끌어 주는 존재도 없이 힘만 손에 넣은 마법사들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신전에 서 있는 시드룬은 부딪치기만 해도 산불을 내 버릴 부싯돌 같았다.
그가 다시 마법을 쓰려는 듯 손에서 보랏빛이 일렁였다.
투이나는 지난밤 아르힘이 왜 그토록 안심하라 일렀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제야 제가 두려워하실 걸 알고 계셨군요.’
투이나가 심각하게 다음 대책을 고민하고 있을 때 시드룬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조금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투이나의 뺨이 턱 붙잡혀 올라갔다.
“무슨……?”
뺨이 간질거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시드룬에게서 쏟아진 머리카락이 몸에 마구 감겼다.
시드룬이 빤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너무 가깝게.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 꺅!”
당황한 투이나의 손이 그의 얼굴로 튀어 올랐다. 팍!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거리 조절 실패했어!’
졸지에 남의 얼굴을 가격해 버린 투이나가 당황했다.
시드룬은 아무렇지도 않게 투이나의 손을 올린 채로 입을 움직였다.
“당신도 보았습니까?”
“네? 일단 놓고 얘기해요!”
시드룬은 거의 열렬하게 보일 만큼 투이나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기겁한 호루니와 스카차가 몇 차례나 경고했지만 소용없었다.
“떨어지십시오!”
“이러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입술을 깨문 호루니와 스카차가 동시에 무기를 휘둘렀다.
푹,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지만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시험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시드룬은 로브 밑으로 검과 창을 박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찌른 사람이 기묘한 감각에 흠칫할 정도였다.
“힉!”
“역시 사, 사람이 아니야.”
그들의 목소리가 마구 떨려왔다.
그러나 스카차와 호루니는 이미 샨의 거처에서부터 바짝 독이 올라 있었다.
“그냥 당겨!”
마법이고 뭐고 호루니가 힘으로 시드룬의 어깨를 붙잡았다.
뒤늦게 스카차도 시드룬의 양팔을 억지로 붙들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낸 스카차가 간신히 시드룬의 팔을 위로 걷어 올렸다.
투이나가 서둘러 벗어났다.
턱이 얼얼했다.
호위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잡아끌자 드디어 시드룬이 질질 뒤로 끌려 나갔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드룬의 발이 허공을 밟았다.
그러나 시드룬의 키가 워낙 커서, 딱 한 번만 걷는 데 성공해도 투이나를 향해 훌쩍훌쩍 가까워졌다.
시드룬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내가 보았던 게 역시 잘못되지 않았군요. 무엇을 보았습니까? 어디를 보았습니까?”
“시드룬? 내 말 듣고 있어요?”
천천히 뒷걸음질을 하던 투이나가 팽팽하게 당기는 느낌에 멈칫했다. 팔뚝에 시드룬의 머리카락이 감겨 있었다.
‘이게 언제 이렇게……?’
머리카락을 풀어 보려고 하던 투이나는 제대로 엉켰다는 걸 깨닫고 그냥 무작정 잡아당겼다.
‘차라리 끊는 게 빠르겠어!’
그러나 시드룬의 머리는 질겼다.
머리카락이 죄다 뽑힐 위기에도 시드룬은 무서우리만큼 집요했다.
“당신이 이미 안다면 나와 함께 그곳으로 가 주십시오.”
“시드룬!”
“뭣들 해! 말리지 않고!”
“사람이 무슨, 뭐가 이리 미끄러워!”
“잔말 말아요!”
호루니가 아예 폴짝 뛰어 시드룬의 목을 감았다.
“이야아압!”
작정하고 뒤에서 매달린 호루니가 안간힘을 다해 그를 거꾸로 잡아당겼다.
노력이 가상한지 시드룬의 움직임이 더욱 느려졌다.
오싹한 눈동자가 속박하듯이 투이나를 향해 빛났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투이나가 주춤거렸다.
이젠 더 물러날 곳도 없다.
느리게 다가오는 시드룬의 눈동자와 비늘을 깨물고 보았던 통로가 순간 겹쳐졌다.
“싫어요!”
투이나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눈을 찔렀다.
뚝.
정적과 함께 드디어 시드룬의 동작이 멈췄다.
‘으악! 으아…….’
손가락이 푹 들어가는 느낌에 그녀가 진저리를 쳤다.
‘물컹거려!’
자기가 저지른 일에 오히려 놀란 투이나가 황급히 손을 뗐다.
“괜, 괜찮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름이 끼쳤다.
시드룬의 눈은 손가락에 찔렸는데도 계속 부릅떠진 상태였다. 정확하게 그녀의 손가락이 동공을 누르는 장면에 힘이 풀렸다.
‘게다가 아직도 눈을 마주치고 있잖아.’
투이나가 넋이 나가는 동안 아직도 겪을 게 부족하다는 듯이 싸늘한 목소리가 등골을 후려쳤다.
“재밌는 광경을 다 보았군?”
투이나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좌절했다.
‘아아, 제발…….’
길의 끝에 선 샨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샨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침착했다.
‘한 번에 한 사람씩만 해도 힘든데.’
투이나가 당혹스럽게 샨을 빤히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뒤로 넘기고 하인들을 거느린 그는 마치 이곳의 주인처럼 보였다.
쓸데없이 당당한 모습에 오히려 빨리 정신이 돌아왔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죠?”
“눈을 찌르던 장면부터.”
샨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주 즐거워 보였다.
“오늘 보지 못했더라면 내가 당할 뻔했군.”
농담을 받아 줄 상황이 아니라 투이나는 적당한 말도 찾지 못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온 거죠?”
“우리의 내기를 잊었나?”
“내기?”
시드룬이 되물었다.
흥미롭게 구경하긴 했어도 성가신 마법사까지 끼워 줄 생각이 없던 샨은 그를 무시했다.
“루가, 나도 종종 느긋함을 즐기곤 하지만…….”
샨이 시드룬을 짧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구혼자라고 투이나가 시드룬과 같이 있던 장면이 불편했는지 아직 가깝게 서 있던 투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대를 제쳐두고 다른 데로 빠지는 꼴을 두고 볼 거라 기대하나?”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내기는…… 정말 잊고 있었네요. 미안해요.”
투이나가 지끈거리는 머리로 인정했다.
‘깜박했어. 사냥터 내기도 있었지.’
상황이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내기를 하기로 해 놓고 쓰러지는 바람에 하룻밤을 그냥 보냈다.
인내심이 바닥난 샨이 직접 신전 안으로 쳐들어올 만도 하지.
뒤에 버티고 선 시드룬도 찜찜했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샨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투이나가 샨에게 몸을 틀자 뜻밖에도 시드룬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게 먼저 볼일이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귀찮게 굴지 마라, 마법사.”
시드룬이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끝도 없이 상승하는 상체를 보자 그제야 그의 키가 실감이 났다.
쑥, 덜그렁.
그의 몸에서 저절로 빠져나온 창과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멈칫한 호루니와 스카차가 그제야 시드룬을 놓아 주었다. 거의 떨어지는 무기를 피해 도망치는 모습에 가까웠다.
‘마법사를 무서워하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겠어.’
마법은 직접 보고도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경험상 옷 아래로 곧장 피가 번져야 정상인데.
‘저런 마법이면 나도 좀 배워 둘까?’
순간 혹했다.
투이나에겐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 간절했는데,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마법이 가장 효과가 좋아 보였다.
‘부작용만 없었다면 정말 도전해 봤을 텐데.’
투이나는 아직도 시드룬의 마법 근처에 갔다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마법에 섣불리 손대는 건 삼가야 한다.
시드룬이 평소처럼 무딘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더 늦게 왔습니다.”
“난 선약이다.”
샨이 단번에 진지한 말투를 쳐냈다. 그가 지금 관심 있는 건 투이나와 한 내기뿐인 듯했다.
“일방적으로 약속을 깬 자가 설마 여기서 더 인내심을 시험하지는 않겠지.”
“사정이 좀 있었어요. 전달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
투이나가 피곤하게 말했다.
여전히 표정이 풀리진 않았지만, 샨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사정이 있어 보이긴 하는군.”
그의 시선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스카차와 멍한 호루니를 가로질렀다.
뒤늦게 호위들이 무기를 후다닥 집었다.
샨은 웃기지도 않는단 표정이었다.
“데려갔던 하인은 안 보이는군? 호위로도 써먹지 못하겠나?”
“그 사람도 포함해서 이야기가 좀 길어요.”
“설명해 줄 건가?”
“음…….”
투이나가 곤란한 신음을 흘렸다.
비늘을 물고 겪었던 일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함부로 떠들기 어려웠다.
‘게다가 시드룬도 웬일인지 민감하게 반응했단 말이야……. 분명 뭔가 더 있어.’
투이나가 시드룬을 보자 샨이 못마땅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됐다. 분명 쓸데없이 마법사가 끼어들었겠지.”
“그건 그래요.”
‘관심은 없어도 예리하네.’
참을성이 바닥난 샨이 투이나에게 걸어왔다.
“거기 호위들, 따라와라. 루가와 산책을 하겠다.”
“산책이요?”
“아르힘에는 취미로 그런 게 있다 들었지.”
샨이 눈을 내리떴다.
세상에서 가장 산책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권하니까 참 이상하게 들렸다.
“누가 그런 얘길 다 해 줬어요?”
“내겐 귀가 많아.”
샨이 누가 보아도 시드룬을 따돌리려는 모양새로 투이나에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자상한 태도에 안 어울리게 표정은 이번에도 거절하면 가만 안 있을 거라는 것처럼 흉흉했지만.
“함부로 사람 풀지 마세요.”
투이나가 경고하며 손바닥을 얹었다.
“꼼짝없이 갇혀 지내라는 거냐?”
샨은 비꼬았지만, 그녀가 접촉하자마자 눈에 띄게 기세가 누그러졌다.
“돌아다니는 건 좋지만 아직 내기는 시작도 안 했잖아요. 바깥에서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겁주고 다니는 건 아니겠죠.”
“흠……. 누구 때문에 늦춰졌는지 잊었나.”
가만 두면 바람 타고 일어날 들불 같은 성질머리니, 손바닥으로 불을 끄는 느낌으로 투이나가 대화를 이끌었다.
“대신 조건을 불리하게 해도 좋아요.”
“마음에 드는군.”
“루가.”
그때 시드룬이 다시 투이나를 불렀다. 무던한 얼굴에 짙은 눈썹이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드룬이 이만큼이나 집요하게 군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죽기 전까지 포함해서 처음이야.’
샨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중요하면 똑바로 설명부터 해라.”
‘샨이 할 말은 아닌데.’
“…….”
시드룬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 득실거리는 사람을 본 그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다른 자들에겐 알려 줄 수 없습니다.”
“시드룬, 나는 항상 다른 자들과 함께 있을 거예요.”
투이나가 딱 잘라 말했다.
“잠들 때부터 눈 뜰 때까지 혼자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걸요. 당신을 만나러 갈 때도 반드시 한 사람은 곁에 있을 거구요.”
“그리고…… 신도 곁에 있고 말입니까?”
뜬금없는 말에 투이나가 잠깐 멈칫했다.
‘왜 자꾸 아르힘 님을 찾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투이나의 시선이 시드룬에게 쏠리자 샨이 뚝 흐름을 끊었다.
“말을 못하면 손을 놀려라, 마법사.”
“편지를 쓰란 말이군요.”
다행히 시드룬이 제안을 좋게 받아들였다.
“편지라 해도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하니 그때는 신전에서 마법을 쓰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허락할게요.”
투이나가 수락했다.
시드룬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워 보였다. 묘하게 전보다 길게 꽂히는 시선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럼 결정되었군.”
어쨌든 결과적으로 투이나를 끌고 나가는 건 샨이었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샨이 힘을 주어 투이나를 당겼다.
너무도 쉽게 덜렁 발이 들렸다.
‘역시 기분이 내켜서 그냥 맞춰 준 거였어.’
잠깐 허공을 디뎠던 투이나가 얼른 땅을 밟았다.
호위들은 산책이 아니라 납치되는 것 같은 모양새에 얼굴을 구기며 따라갔다.
뜻밖에도 샨의 하인들은 뒤에 남았다.
“저분들은요?”
“필요 없다. 본인 호위나 잘 챙기지.”
샨이 귀찮게 대답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투이나가 안쓰럽게 돌아보니 역시 호루니와 스카차는 자존심이 몹시 상한 표정이었다.
시드룬은 물끄러미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더니 사라졌다.
“자꾸 뒤돌아보지 마라.”
그의 손이 뺨을 잡아 돌렸다.
“나와 있을 때 자꾸 다른 자를 쳐다보는 건 무슨 심보지?”
새파란 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샨의 눈동자는 가까이서 보면 푸른 빗살이 새겨져 있었다. 딱 하나의 정점을 위해 몰려드는 군사의 창처럼.
‘……샨도 눈을 찌르면 시드룬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까?’
문득 아까 있었던 일과 겹쳐졌다.
투이나가 계속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샨이 조용해졌다.
“혼자가 아니라서요.”
샨의 미간이 굳었다.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신경이 쓰이잖아요.”
“하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느껴지는걸요.”
투이나가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지금처럼.”
눌린 볼 아래로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샨은 기분 내키는 대로 구는 척했지만 은근히 위협에 능란했다. 버럭 성질을 내고 화가 나는 척할 때도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 차가웠다.
‘왜 굳이 욱하는 성질인 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샨의 진심은 불길 아래 감춰져 있어서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투이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다른 구혼자를 압박하거나 견제하는 일도 비슷했다.
사제들은 그가 구혼자들을 공격적으로 대하는 건 서열을 확실히 하려는 짓이라고 설명했다.
야만적인 본능이 드러난 왕의 습관일 뿐이라고.
하지만 투이나는 반드시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단순히 싸움을 잘한다고 그렇게 빨리 정복에 성공했을 리 없어.’
그리고 지금처럼 심장부터 서늘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로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려는 시도가 공중에서 부딪쳤다.
“……좋아. 봐주지.”
샨이 힘을 풀었다. 악력 때문에 볼이 얼얼했다.
오늘 볼이 참 고생한다.
투이나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잔뜩 긴장한 호위들이 약간 무기를 내렸다.
미리 투이나가 눈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난리가 났을 것이다. 호위들이 샨을 때려눕히든, 반대로 처참하게 당하든.
투이나는 조금씩이지만 샨을 대하는 새로운 방법에 적응하고 있었다.
죽기 전이라면 꿈도 못 꿨을 말투로 투이나가 경고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샨은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도?’ 같은 농담을 붙이진 않았다.
“소원을 말하려면 내기부터 이겨야 할 텐데.”
“제게 유리한 내기라고 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하루를 말없이 미뤘으니 불리한 조건을 하나 걸어야지.”
‘음, 할 말 없네.’
납득한 투이나가 물었다.
“어떤 식으로요?”
“장소를 찾은 다음 사냥터로 쓸 만한지 결정하는 건 나다.”
“내 의견을 빼고 결정하겠다고요?”
투이나가 되묻자 샨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설마 내가 이기겠다고 루가가 찾아낸 장소마다 별로라는 말을 하겠나?”
‘표정은 그렇다고 하는걸요.’
떨떠름한 투이나를 보자 샨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걱정할 거 없다. 내 기준은 완벽하고, 아직까지 그보다 더 나은 걸 찾지 못했으니.”
샨의 말은 자신감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어쩐지 그런 자신이 선택한 결혼 상대이니 자랑스러워하라는 어조가 배어 있어서 투이나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