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진실된 신앙심은 어떠신가요.’
마법사가 만들어낸 재의 폭풍을 목격한 호루니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갑자기 몰아닥치는 바람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법을 상대해 본 적 없었고, 대련 외에는 누군가를 공격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누가 있는지 깨달은 순간 본능적으로 다리가 뛰쳐나갔다고 한다.
루가를 잃는 것만큼 이 나라에서 불경한 일이 없었다.
구르듯이 아까 던졌던 창을 집어 든 호루니는 라카인보다 조금 늦게 투이나에게 도착했다.
쉼 없이 날리는 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투이나의 주변을 맴돌았다고 한다.
“……그러다 마법사가 가까이 왔을 때 하마터면 그, 그대로 공격할 뻔했습니다.”
호루니가 쩔쩔매며 말했다.
“루가 님과 구혼자의 대화를 망칠 뻔하다니, 정말 죄송해요.”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읽은 책에서는 마법으로 교란하고 뒤에서 치는 일도 종종 있었기에…….”
그 말에 견습 무사제를 담당했던 무사제가 펄쩍 뛰었다.
“호루니! 내가 분명 바깥의 병법서는 읽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신전에 비치된 문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가뜩이나 주눅이 들어 있던 호루니가 더 움츠러들었다.
라카인이 물었다.
“많이 아는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됩니까?”
“자네는 빠지게. 이제 막 호위가 된 사람이 아르힘에 대해 알기나 하나? 우린 아르파와 달라.”
무사제가 짜증을 냈다.
투이나는 서로를 위해 다시 물었다.
“설명해 주세요.”
루가의 말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마지못해 콧김을 내뿜은 무사제가 대꾸했다.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정보에 무슨 정확함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럴수록 가짜 정보에 휘둘릴 가능성만 높아집니다. 사고 판단은 정확한 책으로 배운 뒤에 적용하면 충분해요.”
“그러나 실제로 루가 님을 호위하러 온 것은 이자뿐이다.”
라카인이 대답했다.
무사제가 코웃음을 쳤다.
“오판이었습니다. 이런 재 따위가 무슨 위협이 된다고…….”
“아무래도 당신은 이전에 마법사를 만나 본 적 없는 모양이군.”
라카인이 단정 지었다.
무사제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하게 바뀌었다.
“뭐야?”
“전쟁터에서 실제로 마법사가 뒤를 치러 오는 일은 흔하지 않지. 하지만 교란, 속임수에는 탁월하다. 살의만 있다면 무엇이든 치명적이지 않겠나.”
뭐라 대꾸하려고 인중을 움찔거리던 사제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여긴 아르힘 님이 계시네!”
“그러니 더 큰 사고가 될 수 있지.”
라카인이 다시 투이나 쪽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신전에서 마법을 제한한 일은 아주 잘하신 일입니다. 역시 루가 님이십니다.”
본인 얘기인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듣던 투이나가 눈을 깜박였다.
“그래요? 어, 음……. 고마워요.”
“고작해야 루가 님을 이틀 본 주제에 뭘 역시인가!”
사제가 짜증을 냈다.
그러나 라카인에겐 먹히지 않았다.
“호위는 중요한 순간에 행동으로 나설 수 있는 자가 좋습니다. 어떤 판단에서 출발했든 이자는 루가 님에게 왔고, 저자도 문제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라카인의 말에 다 같이 잿더미로 고개를 돌렸다. 호루니에 신경 쓰느라 스카차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앗, 스카차! 스카차!”
투이나가 급하게 소리쳤다.
“루가 님! 체통이요!”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투이나를 말리는 것보다 직접 데려오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무사제 하나가 튀어갔다.
잠시 후 시커멓게 된 스카차가 어리둥절하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호위 때문에요.”
투이나는 라카인의 말과 섞어 상황을 설명했다.
듣는 내내 스카차는 흠칫했다가 입을 딱 벌렸다가 기뻐했다가 하는 둥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었다.
“무, 물론 루가 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달려간 겁니다. 그자가 마법사 일 줄은 몰랐지만.”
영광스러운 말투로 스카차가 중얼거렸다.
사제들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그래도 아까 시험에 떨어진 자를 다시 쓴다는 게 좀…….”
“다시 하겠습니다!”
스카차가 다급하게 말했다.
반응은 마땅찮았다. 이미 시험이 끝난 마당에 재도전이 오히려 불공평하게 보일 가능성만 높았으니까.
“루가 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역시 골치 아플 땐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한테 넘겨 버리는 게 최선이다.
문제를 넘겨받은 투이나가 가만히 라카인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아르파 사람이니 굳이 저런 소리를 들으며 호루니와 스카차를 칭찬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로 좋은 호위가 될 가능성을 본 거겠지.’
때로는 한발 떨어진 사람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투이나는 라카인을 믿기로 했다.
호루니의 손을 놓은 투이나가 단정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는 찬성하고 싶어요. 호루니, 스카차, 두 분 다 제 호위가 되어 주시겠어요?”
“네, 네!”
“그리하겠습니다!”
열렬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제들이 끙 소리를 냈지만 더 군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루가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휴,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무사제는 남아 있는 지원자들에게 결과를 알리기 위해 떠났다.
앞뒤 사정을 들은 견습 무사제들이 조금 아쉬워하는 소리를 내긴 했으나 대체적으로 결과를 인정했다.
“좋아. 다 끝났으니 씻으러 갈까요? 재가 너무 많이 묻었네요. 두 사람은 천천히 숙소를 옮긴 다음에 제게 와 주셔도 돼요.”
“아닙니다! 바로 짐 싸겠습니다!”
“저도요!”
호루니와 스카차가 앞다투어 말했다.
하인으로 끌려와 애초에 짐이랄 게 없는 라카인은 덤덤했다.
“가는 길은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라카인이 가볍게 팔을 내밀자 그의 머리카락에서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하나 톡 떨어졌다.
그 순간 바깥에서 살던 습관이 튀어나온 투이나가 앞머리를 훔쳐 주었다.
“이게 뭐예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돌아가면 다시 닦아요.”
흠칫한 라카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투이나는 짐짝같이 느껴지는 어깨를 한번 당기고는 이동했다.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이 모두 시커먼 재투성이라 자꾸 웃음이 나왔다. 씻기면 사라지는 얼룩이란 얼마나 귀여운지.
돌아온 투이나를 맞아 주는 손님은 하나 더 있었다.
“어머나!”
시종이 탄성을 내질렀다.
사제가 푸른색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하늘하늘하고 아름다운 제비꽃이었다.
좀처럼 모으기 힘든 꽃에 투이나가 탄성을 질렀다.
“갑자기 어디서 이렇게 예쁜 걸 구해 오셨어요?”
“크로퍼드에서 보내는 선물입니다.”
“베인이요?”
투이나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자 제비꽃다발이 가득 품에 들어왔다. 꺾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싱그러운 향이 물씬 풍겼다.
“예뻐라…….”
저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투이나가 꽃다발에 코를 묻었다. 한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신선한 향이 가슴까지 들어와 나갔다.
제비꽃 속에 파묻힌 투이나는 여느 아가씨보다 더 생생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기쁨으로 달아오른 뺨에 어쩔 줄 모르고 떨리는 속눈썹이 나비처럼 어른거렸다.
지켜보던 사람들마저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꽃다발을 전해 준 사제마저 투이나를 쳐다보다가 민망해했다.
꼭 남의 연애를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쪽지도 전해 달랍니다.”
그가 얼른 시선을 떼며 작은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투이나가 서둘러 쪽지를 펴 보았다.
루가 님을 기다리는 동안 무심코 꽃을 꺾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이 꽃이라. 루가 님께 바치지 않으면 꺾은 시간이 헛될 것만 같습니다.
투이나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정중한 말투로 자제했지만 그가 얼마나 자신을 기다렸는지가 확 와닿았다.
‘맞아. 예전에도 처음 만났을 때 꽃을 선물했었지.’
그때는 사고가 없었기 때문에 베인을 직접 만나서 받았다.
그의 거처는 원래의 모습을 잊을 정도로 공들여 꾸며져 있었고, 주인의 성품을 닮아 아늑했다.
대화를 하며 긴장이 풀리자 베인은 각기 다른 꽃이 꽂힌 화병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꽃을 골라보라고 권했었다.
귓가에 스치는 베인의 숨결이 아직도 생생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또렷하게 기억난 투이나의 볼이 살짝 뜨거워졌다.
‘어떻게 이번에도 똑같은 꽃을 보냈지?’
그때 투이나가 선택한 꽃도 제비꽃이었다.
잎사귀에서 꽃잎으로 번지듯 푸릇푸릇하게 물든 모양이 아름다웠고, 자신을 바라보는 베인의 눈동자 색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꽃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앙증맞은 꽃잎들이 볼을 간지럽혔다.
과거와 똑같은 일이었는데도 하나도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기뻤다.
‘꽃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잊고 있었어. 세상에, 지금까지 그게 무슨 꽃이었는지도 기억을 못 했다니.’
이번에는 절대로 까먹지 않으리라 거듭 다짐했다.
여운에 잠겨 있던 투이나가 속삭였다.
“내일 찾아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제가 허리를 숙였다.
투이나는 작은 보라색 꽃잎들을 살짝 손가락 사이로 만져 보았다. 가냘프고 부드러웠다.
‘구혼 기간이라는 게 실감이 나.’
원래 이런 거였다.
구혼 기간은 살인자를 찾느라 진을 쓰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는 기간이 되어야 했다.
투이나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시간을 약간이나마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내게 꽃을 준 당신…….
“무척 감동적이네요, 루가 님.”
시종이 흐뭇하게 말했다.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투이나가 꽃다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꽃의 힘으로 축 처져 있던 시종들의 활기가 되살아났다. 재와 먼지를 씻어내며 시종들이 종알거렸다.
“어쩜 이리 배려심이 좋을까요?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불쑥 찾아오는 누구랑 비교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네요.”
“역시 루가 님의 차기 남편감은 베인밖에 없습니다.”
베인 지지자들이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는 투이나의 시종들이 꼬물거리며 비누를 문질렀다.
“아직 초반인걸요, 뭐.”
“루가 님이 좋아하셨다는 걸 알고 나면 다른 분들도 얼마든지 꽃을 선물할걸요?”
베인 지지자들이 손을 휘저었다.
“다른 두 사람은 꽃을 박살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투덜거리던 시종이 뒤늦게 방 안을 점검하던 라카인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그가 다 듣고 있었으니.
전 주인을 욕해서 달려들지 않을까 겁을 먹은 것이다.
눈치를 보던 시종은 곧 그가 주인을 바꿨다는 걸 기억해냈다. 무안함을 감추려고 시종이 목소리를 키웠다.
“안 그렇습니까, 라카인?”
“……?”
졸지에 불똥이 튄 라카인이 어리둥절하게 투이나를 돌아보았다.
꽃을 들고 있던 투이나가 새어나오는 웃음을 꽃으로 감췄다.
시종이 계속 추궁했다.
“당신도 아르파인이니 말해 보세요. 만약 당신이 루가 님께 청혼했다면 꽃을 드렸을 겁니까?”
“무슨 꽃인지가 더 중요해요.”
옆에서 다른 시종이 거들었다.
라카인은 어리둥절하게 시종을 쳐다보다가 이제 대놓고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하는 투이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꽃을요?”
라카인은 곧장 심각한 고민에 들어갔다. 자신의 주군에게 바칠 물건이니 꽃이라도 가장 좋은 것이어야 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라카인이 입을 열었다.
“저는 장…….”
“설마 장미는 아니겠죠?”
“아유, 너무 식상하다.”
시종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파에선 야생 장미가 많이 자랐다. 당연히 사랑의 선물로 많이 이용되어 꽤 흔한 꽃으로 취급받았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화려하고 풍성한 꽃이었다.
라카인이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투이나가 말했다.
“왜요? 장미도 멋진걸요. 단 한 송이만으로도 아름다운 꽃은 드물잖아요.”
“치, 루가 님은 무슨 꽃이든 한 송이라도 좋아하시면서 그러십니다.”
“살아 있는 건 다 예뻐요.”
투이나의 말에 시종들이 까르륵 웃었다. 라카인만이 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모하세스에선 무슨 꽃이 자라지?’
샨이 언뜻 모하세스에 있는 궁전을 얘기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는 겨울에만 피는 새빨간 꽃을 제일로 친다고 했던가.
기억이 어렴풋하다.
‘라카인도 같은 나라 사람이니 그 꽃을 제일 좋아하려나.’
투이나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반대로 라카인이라면 무슨 꽃을 받고 싶을 거 같아요?”
“루…….”
“루가 님이 주는 거면 뭐든 좋습니다, 하지 말구요.”
정확히 그렇게 대답하려던 라카인이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시종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라카인이 대답했다.
“기억에 남는 노란색 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름을 모르겠습니다.”
“개나리!”
“수선화!”
“금잔화?”
시종들이 정답을 외치듯 번갈아 말했다.
마지막은 투이나가 외친 말이다.
라카인이 멀뚱멀뚱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름을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에이, 뭐야.”
“들었을 때 팍 떠오르는 것도 없어요?”
놀리는 것도 쿵짝이 맞아야 하지.
라카인이 고개를 젓자 시종들은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지었다.
꼭 대답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투이나가 장난스레 말했다.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알려 주세요. 못 들으니 궁금하네요.”
“알겠습니다.”
이런 대답은 빨랐다.
투이나는 물병을 하나 찾아서 꽃다발을 꽂았다. 둥글게 꽂히도록 정리한 그녀가 떨어진 꽃잎을 하나하나 골라 쥐었다.
“남은 건 말리는 게 좋겠네요.”
“뜻대로 하십시오, 루가 님.”
시종이 대답했다.
싱긋 웃은 투이나가 소매를 걷었다.
“자아, 그럼 저도 씻어 볼까요?”
서로를 향해 물을 튀기기 시작한 루가와 시종들을 본 라카인이 당혹스러워하며 벽으로 붙었다.
그는 꽃의 이름을 더 떠올려 봐야 할지 격의 없는 물놀이를 호위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둘 다 루가를 위한 일이 아닌가.
그러다 투이나가 무릎 위쪽으로 밑단을 걷어 올리자 빠르게 꽃의 이름을 생각하는 쪽으로 바꿨다.
라카인이 황급히 벽을 향해 뒤돌았다.
* * *
호루니와 스카차는 약속한 대로 하루 만에 짐을 전부 옮겼다.
애초에 숙소가 주 신전에서 그리 멀지 않기는 했다.
사제들은 마뜩찮은 얼굴로 투이나와 같은 건물에 호위들의 방을 배정해 주었다.
물론 이번에는 라카인의 방도 제대로 선정되었다.
나란히 붙은 방들에 흐뭇해하던 투이나가 곧 호루니와 스카차를 발견했다.
하룻밤 만에 상기된 얼굴로 나타난 두 사람을 보며 투이나는 몹시 반가워했다.
“어서 와요!”
“루가 님!”
벅찬 소리만 간신히 내지른 호루니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나마 이성이 좀 남아 있던 스카차가 정식으로 소개했다.
“루가 님께 스카차, 호위로서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스카차. 투이나예요.”
“호루니입니다!”
호루니가 씩씩하게 발꿈치를 붙였다.
규정대로 인사를 끝낸 스카차가 라카인을 흘깃거렸다. 그는 지난 시험부터 계속 덤덤하게 서 있는 라카인을 흘깃거렸다.
시선을 알아차린 투이나가 소개했다.
“아, 이쪽은 라카인이에요. 여러분과 함께 제 호위를 맡기로 했어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스카차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 생각한 투이나가 말을 이었다.
“오늘 호위는 두 분에게 부탁드릴게요. 라카인이 그저께부터 잠을 못 자서.”
라카인은 루가가 명령한다면 여기서 사흘 밤낮을 더 샐 수 있다는 표정이었으나 일단은 얌전히 있었다.
첫날부터 바로 임무를 받은 스카차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루가 님!”
“오늘은 어디로 가시나요?”
살짝 긴장한 호루니가 양 주먹을 꼭 쥐었다.
“베인을 만나러 가요.”
“베인 크로퍼드 말씀이십니까?”
어렵지 않은 상대에 내심 두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분이라면 한 명으로도 충분하겠군요.”
“제가 가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부탁할게요.”
투이나가 얼른 나선 호루니를 반갑게 여겼다.
금세 발그레해진 호루니가 창을 쥐고 앞으로 나왔다.
먼저 말할 기회를 놓친 스카차가 하는 수 없이 비켜섰다.
지난번 시험부터 계속 약간씩 호루니보다 늦는다.
서로 그걸 알고 있는지 지나치며 눈인사를 하는 두 사람이 영 껄끄러워보였다.
시험에서 떨어트린 장본인이니 호루니도 그의 눈치가 보여 마냥 들떠 할 수도 없었고.
어쨌든 같이 호위가 됐으니 스카차도 불편한 티를 내기는 과했다.
그렇다고 무뚝뚝하게 서 있는 라카인이 달가운 것도 아니었으니…….
시작은 좋았는데.
투이나와 호루니가 떠나자 두 남자 사이에 상당한 관계적 불편함이 밀려왔다.
고심 끝에 스카차가 먼저 친목을 시도했다.
“……안녕하십니까.”
“…….”
라카인은 대답도 안 했다.
심지어 떠나가는 투이나를 바라보는 옆모습이 무시무시하기까지 ―스카차의 눈에는 그랬다.― 했다.
졸지에 어색함을 독차지한 스카차는 제발 루가 님이 빨리 돌아오시라고 속으로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투이나는 빨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새로 뽑은 호위 덕분에 들뜬 데다가 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에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루가 님.”
‘보고 싶었거든요.’
투이나가 바깥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살짝 삼켰다.
베인은 매혹적인 상대였다.
빼어난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
그와 대화를 할 때면 오로지 상대방에게만 집중한 표정이 넋을 홀리게 했다.
가장 치명적인 건 숨길 생각도 없이 드러나는 호의였다.
거처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던 베인이 발소리를 듣자마자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루가 님!”
작게 두리번거리던 얼굴이 투이나를 발견하자마자 화하게 밝아졌다.
단정하게 정리한 금빛 머리카락이 목덜미에서 물결쳤다.
살짝 아랫입술을 물었다 떼며 다가오는 베인의 모습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침을 꼴깍 삼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의 바르게 웃는 모습마저 잘생겼다.
정중하게 팔을 내밀고 상체를 기울이는 모습에 투이나는 어깨를 다쳤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손을 얹을 뻔했다.
“들……어갈까요?”
“예. 기꺼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성실한 청년의 미소에 시종들이 넋을 잃었다.
투이나가 팔을 잡아 주지 않았는데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 걸었다.
호위보다도 가까운 위치였다.
“바쁘시다 들었는데도 와 주셔서 정말로 기쁩니다. 저는 더 오래 기다려야 할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와야죠. 게다가 그런 선물을 받았으니 베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투이나가 다정스레 말했다.
베인의 입매가 기분 좋게 움찔거렸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계속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 말에 베인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입니다. 루가 님께 보내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무엇을 좋아하실지, 혹시 결례가 되진 않을지 걱정했습니다.”
“결례라뇨. 베인이 얼마나 배려 깊은데요.”
투이나는 진심이었다.
샨과 시드룬을 연타로 겪고 나면 베인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배려의 화신이었다.
투이나와 보폭을 맞춰 걷던 베인이 거처 안쪽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화사한 창과 밝은 색으로 꾸며진 방에서는 예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벽까지 새로 칠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를 들여놓은 베인의 거처는 크로퍼드 상단의 응접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투이나에게 감탄하는 기색이 스쳤다.
“와…….”
“마음에 드십니까?”
“그럼요.”
투이나가 활짝 웃었다.
“방이 꼭 베인을 닮았네요.”
투이나가 깨끗하게 덮인 가구의 표면을 살짝 쓸었다. 부드러운 천은 갓 빤 것처럼 보송보송했다.
베인의 귓불이 눈에 띄게 달아올랐다. 헛기침으로 수줍음을 감춘 그가 허둥지둥 입을 감쌌다.
“아, 루가 님이 앉을 준비도 제대로 안 해 놓았군요.”
베인이 허둥거렸다.
이미 탁자엔 다과가 담긴 깨끗한 도자기까지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베인은 손님 접대를 혼자서 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투이나에게 의자를 빼 주고 돌아서면서 거리 가늠에 실패한 그의 긴 다리가 탁자에 부딪쳤다.
쿵, 쨍!
“아, 이런…….”
당황한 베인이 떨어진 잔과 투이나를 번갈아 보았다.
야속하게도 떨어진 잔은 여러 갈래로 박살나고 말았다.
그는 분명 완벽한 만남을 준비하고 있던 눈치였건만.
난감하게 서있던 베인이 살짝 깨진 조각을 건너뛰었다.
“못 본 척해 주시겠습니까?”
베인이 자연스럽게 발로 깨진 잔을 가렸다. 능청스러운 동작이 오히려 수줍어 보이는 사람은 베인밖에 없을 거다.
버티지 못하고 새어나오려는 웃음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밀어 올렸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베인이 싱긋 미소 지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절로 훈훈해졌다.
새 찻잔을 꺼낸 베인이 시종을 부르지 않고 작은 화로에 물을 끓였다.
“차를 좋아하십니까?”
“겨우 마실 줄만 알아요.”
“저희 상단에서는 차도 들여놓고 있습니다. 루가 님의 입에만 맞는 걸 발견한다면 나머지 차들도 기꺼이 즐거운 유희로 변할 것입니다.”
베인이 어떠냐고 묻는 듯한 눈길을 잠깐 보냈다. 마치 숨겨 놨던 자신의 장점을 살금살금 내보이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아, 안 돼, 벌써 귀여워 보이면.’
1년간 누적된 경험이 벌써부터 투이나의 심장을 말랑하게 만들었다.
베인의 이런 사랑스러운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었다.
다른 구혼자들도 외모가 상당했지만 베인의 미모는 보기만 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힘이 있었다.
속에서부터 흘러나와 눈으로 넘쳐나는 다정함 때문일까.
그의 표정을 딱 한 번이라도 본다면 베인이 하는 사소한 동작을 놓칠 수가 없게 된다.
베인이 살며시 주전자를 들었다.
“이건 가장 최근에 수입한 차인데 벌써 입소문을 타는 물건입니다. 루가 님께도 꼭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베인이 주전자를 기울이자 짙은 갈색에 끈적거리는 물이 주둥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 보는 액체에 시종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거품이 보글거리는 짙은 차는 이상하게 코를 간질이는 냄새까지 났다.
투이나 곁에서 같이 진한 냄새를 맡은 호루니가 가장 크게 놀랐다.
“잠깐만요, 루가 님! 독약일지도 모릅니다!”
“네?”
투이나의 뒤에 서 있던 호루니가 소리쳤다.
“앗!”
깜짝 놀란 베인의 손에서 그만 손잡이가 미끄러졌다.
와장창!
“꺅!”
“루가 님!”
새하얗던 깔개에 까만 액체가 번져 나갔다.
베인과 투이나가 동시에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괜찮아요?”
“괜찮으십니까?”
제일 먼저 서로의 안부부터 확인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머, 어떡해! 안 다치셨습니까?”
시종이 호들갑스럽게 다가왔다.
투이나와 베인이 정지한 사이 시종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식탁보를 모았다.
“혹시 다칠지도 모르니 물러나 계세요.”
“네? 아…….”
한발 늦게 반응한 베인이 곧바로 뒤로 움직였다.
그는 아래를 살피자마자 곧바로 다시 고개를 들어 투이나와 눈을 맞췄다.
베인의 눈동자에 진하게 드러난 감정에 놀란 투이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얼결에 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진정해…….’
투이나는 코를 찌르는 냄새에 집중했다.
“독약이라니요, 호루니?”
“그……. 따, 딱 봐도 수상하게 생겨서 냄새까지 이상해 당연히 독약인 줄 알았습니다…….”
호루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바깥에서 본 마법사 책에…… 독약을 만드는 그림으로 나와 있던 게 이것과 똑같이 생겨서…….”
마법사가 거품이 풀풀 나고 끈적거리는 액체를 냄비에 담아 젓는 동화라면 투이나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을 재울 때 쓰는 단골 소재니까.
호루니의 말에 출처를 깨달은 시종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호루니는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내 투이나를 바라보고 있던 베인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호위께서 오해하실 만하네요. 이건 코코루나에서 수입한 초콜릿이라고 하는 차입니다. 강한 향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이 있긴 하지만.”
베인이 탁자에 흘러내린 액체를 손가락으로 쿡 찍었다.
“독은 없습니다.”
베인이 손가락을 핥았다.
“보십시오. 괜찮지 않습니까?”
베인은 멀쩡할지 몰라도 보는 사람에겐 치명적이었다.
입술을 눌렀다 떼는 손가락이 관능적일 줄 누가 알았으랴.
투이나가 계속 멍하게 넋을 놓고 있자 베인이 목소리에 서운함을 살짝 섞었다.
“게다가 제가 왜 루가 님께 독을 드리겠습니까. 누구나 청혼을 한 상대라면 평생을 함께하고 싶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겠죠.”
베인이 명제부터 꼬집자 그제야 호루니가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루가 님! 베인 님! 제 실수입니다!”
“저도 사과할게요, 베인.”
덩달아 정신을 차린 투이나가 말을 보탰다.
베인은 마음씨까지 넉넉했다.
“제 실수도 있습니다. 잘 잡고 있어야 했는데. 오해해서 그런걸요. 다치지 않으셨다면 괜찮습니다.”
상냥한 말투였다.
시종들이 어쩜, 하고 감탄하는 걸 보니 마음속 신랑감 후보 점수를 아주 후하게 준 모양이다.
베인이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호위를 들이시다니요. 혹시 일신상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겁니까?”
“문제는요. 그냥 제가 좋아서 뽑았어요. 바빠지신 무사제님 고생도 좀 덜고요.”
매끄럽게 대답한 투이나가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좋아! 안 막히고 말했어!’
괜히 베인에게 사고나 살해당할 걱정 같은 무거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루가 님의 뜻이니 분명 좋은 의도셨겠지요.”
베인이 선하게 웃었다.
아까 두 사람 사이를 묶어 놓았던 묘한 정지가 풀렸다는 신호였다.
깨끗하게 탁자를 치운 뒤 베인은 다시 차를 따랐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작은 잔에다 여러 개였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초콜릿을 나눠 담은 베인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권했다.
“아무래도 제가 너무 루가 님만 보았나 봅니다. 늘 루가 님과 함께하시는 여러분에게도 대접해 드렸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어머, 어머…….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감사합니다.”
입은 사양하면서도 공손히 받아드는 손길은 정직했다.
시종들이 금세 화색이 되었다.
아까 실수 때문에 난감해하던 호루니까지 한 잔 돌아갔다.
베인이 투이나에게 제일 마지막으로 잔을 건넸다.
“고마워요, 베인.”
잔을 쥔 손이 살며시 얽혔다.
가만히 닿아 오는 손가락에 흠칫한 투이나는 또다시 베인의 눈을 들여다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시선엔 이미 명백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나름대로 피하려고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감출 수 없었다.
죽음을 넘어 과거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는 감정.
저를 좋아하십니까?
불확실한 열망을 담은 눈동자가 한순간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투이나는 약하게 미소 지으려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아, 야속한 사람…….’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결국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투이나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당겼다.
“……차가 맛있네요.”
실은 맛도 몰랐다. 예전에 자주 마셔서 맛있다는 기억만 확실했다. 베인과 만날 때마다 그가 같은 차를 대접해서 입맛이 길들여졌다.
빈속에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것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베인은 그때까지 계속 무언가 찾으려는 듯 계속 투이나의 눈에서 시선을 헤매었지만.
그사이 그녀는 따듯한 액체에 기대어 다시 활짝 웃어 보일 만큼 평정심을 되찾았다.
“왜 인기가 있는지 금방 알겠어요.”
“처음 먹어 보는 맛입니다!”
“고소하고 부드럽고 달콤하니, 절묘하군요.”
“그렇죠?”
여기저기서 경탄이 터졌다.
투이나는 안심하고 배 속을 따듯하게 채웠다.
‘활발한 분들과 함께 다녀서 다행이야.’
대화 소리는 쉽게 감정을 까먹어 삼키게 했다.
뒤에서 불안불안하게 차를 홀짝이던 호루니까지 맛을 보자 눈이 반짝거렸다. 입맛에 맞는 모양이다.
베인은 그때까지 뭐에 맞은 듯이 계속 서 있었다. 누가 억지로 그의 뒤통수를 때리고 강도질을 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베인?”
투이나가 그를 부르자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던 베인이 그제야 다시 시선을 맞췄다.
“아, 네, 루가 님.”
“왜 계속 서 계세요?”
“앉……겠습니다.”
베인이 주전자를 거의 떨어트리듯이 놓았다.
투이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단정하게 앉은 베인이 계속 조금씩 자세를 바꿨다.
보는 사람이 신경 쓰일 만큼 자잘한 움직임이었다.
“혹시 어디 불편한가요? 아까 베였어요?”
“아닙니다. 다치지 않았어요.”
베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말수는 확실히 줄어들어 있었다.
베인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어색한 침묵이 생기면 언제나 먼저 새로운 주제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상하네.’
원래라면 베인이 가벼운 잡담과 함께 꽃을 보러 가자고 투이나에게 권할 차례였다.
방에 이미 준비된 꽃들은 화사했다.
그러나 베인은 어딘가 초조한 사람처럼 보였다.
계속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자꾸 눈에 걸렸다.
“베인.”
“…….”
“베인?”
잠깐 멍하던 베인이 뒤늦게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루가 님이 부르는 소리를…….”
베인이 당황해 머리카락을 쓸었다.
“잘…… 듣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불편하면 일찍 돌아가도 괜찮아요. 다음에 다시 오면 되니까.”
“아닙니다!”
베인이 다급히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루가 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베인이 서둘러 방긋 웃었다.
일단 대화를 시작하자 그는 빠르게 원래 상태를 회복했다.
침착해진 베인의 자상한 말투가 이어졌다.
“꼭 구혼이 아니더라도 신전에 오기 전부터 루가 님을 계속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아, 크로퍼드 가문이 특히 아르힘 님을 독실하게 믿는다고 들었어요.”
기억하는 정보가 있어 기쁜 투이나가 말했다.
투이나가 기억해 주는 정보가 있어 기쁜 베인이 대답했다.
“네. 아르힘 님이 돌봐 주신 덕분에 상단도 계속 번성하고 있습니다. 루가 님께서 구호 활동에 전념하신 덕분에 굶는 자도 얼마나 줄었는지 모릅니다.”
베인이 덧붙여 강조했다.
“저희 상단만큼 상황을 정확히 아는 곳도 없었죠.”
투이나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그들과 함께했었으니까요.”
“저는 루가 님의 그런 점이 좋습니다.”
베인이 가볍게 던진 말에 애꿎은 투이나의 가슴이 술렁거렸다.
“가끔은 혼자 생각해 보곤 합니다. 저희에게 루가 님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신께서 주셨을지도 모른다고.”
베인이 가만히 손을 모았다.
“그래서…… 루가 님과 만나 이렇게 대화하는 일이 저에게는 꿈만 같습니다.”
환하게 퍼지는 그의 미소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후로는 죽기 전과 똑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조금 늦긴 했지만 꽃을 보여주고 방 안을 거닐었던 것이다.
베인은 다시 투이나에게 익숙한 친절함으로 돌아갔지만, 이상하게도 이따금씩 말을 멈추곤 했다.
그렇다고 투이나가 딱히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꽃을 만져 본다거나 농담을 했을 뿐인데 베인이 순간순간 뭘 까먹은 듯이 굴었던 것이다.
‘어디 아픈가?’
슬슬 걱정이 될 정도였다.
베인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1년을 함께 지낸 투이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결국 세 번째로 입을 벌렸다가 그냥 다문 베인이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인정했다.
한발 물러난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어……. 루가 님, 실례지만 부탁을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아르힘 님이 분부하신 대로 구혼 기간에는 신전을 나갈 수 없지만, 손님을 초대하는 건 가능하겠습니까?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가능하죠.”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구혼 기간에도 신전에 드나드는 사람은 많았다. 방문객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만 준비해 두면 아무 문제 없다.
“그런 건 꼭 저한테 허락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신전은 언제나 열려 있는 걸요.”
“감사합니다, 루가 님.”
베인이 기뻐하니 이 정도면 됐다.
‘하긴 갑자기 가족이나 친구와 떨어져 지내려면 힘들 거야.’
과거에도 신전에선 구혼자들의 손님을 막진 않았다. 다른 구혼자들이 워낙 비사교적이어서 그렇지.
투이나의 마음이 바깥에 있는 가족들에게 잠깐 머무르다가 금세 신전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활시위가 없이도 쏜살처럼 날아갔다.
정해진 만남이 끝날 때가 되자 베인은 몹시 아쉬워하며 문을 잡아 주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나가려고 베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희미하게 체취가 맡아졌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신료의 냄새였다.
기꺼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저도 즐거웠어요, 베인.”
“다행입니다.”
베인이 아쉬운 듯이 속삭였다.
“다음에는 루가 님의 몸이 더 나은 상태이길 기도하겠습니다.”
깜짝 놀란 투이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일부러 다친 어깨 쪽을 쓰진 않았지만 그래도 손 같은 건 제대로 움직였는데.
“알고 있었어요?”
베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엔 시종들이 더 흥분해서 야단이었다.
“어쩜……. 정말이지 품위 있고 낭만적인 청년이에요.”
“구혼자라면 이래야죠.”
“초콜릿이란 거, 정말 맛있었어요.”
호루니까지 감격해서 중얼거렸다.
달콤한 액체는 첫 호위를 맡아 바짝 긴장한 사람까지 성공적으로 녹여 버렸던 것이다.
“다들 즐거웠다니 다행이네요.”
“루가 님, 그냥 바로 베인 님과 결혼하시면 안 돼요?”
“그러게 말이에요!”
“에이, 그럴 순 없죠.”
시종들의 주접이 아슬아슬한 지경에 도달하자 투이나가 얼른 막았다.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갔다간 무슨 소란이 또 날지 모르니.
그래도 시종들은 행복했다.
“뭐, 바로 결혼하시는 것보단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좋지요.”
“아아, 루가 님 결혼하시면 아쉬워서 어떡해.”
“결혼해도 여러분은 보러 올 테니 걱정 마세요.”
“어머, 호호호!”
그때 화기애애하게 돌아가던 일행의 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합! 흐핫!”
“어?”
“루가 님, 제 뒤로 오세요.”
호루니가 급히 투이나를 감쌌다.
누가 신성한 신전에서 기합을 외치고 있었다.
그것도 거의 쥐어짜내듯이.
놀란 투이나 일행이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했다.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런데 얼굴들이 익숙했다.
“라카인? 스카차!”
당황한 투이나가 소리치자 그제야 움직임이 뚝 멈췄다.
“루, 흐억, 루가 님!”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스카차가 털썩 주저앉았다. 먼지가 풀썩 날렸다.
반면 라카인은 말끔한 얼굴로 종종종 뛰어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루가 님.”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예요?”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라카인이 대답했다.
이제 보니 검을 든 건 스카차뿐이고 라카인은 맨손이었다.
놀란 호루니의 시선을 깨달은 스카차가 거칠게 얼굴을 닦았다. 그가 급히 호흡을 골랐다.
“별일 아닙니다. 무예를 맞춰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았으나 투이나는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이미 스카차의 자존심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우선 좀 쉬는 게 좋겠어요.”
스카차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시종의 도움을 받아 땀을 식히는 사이 자세한 얘기는 라카인에게 들을 수 있었다.
투이나가 떠난 뒤에 남은 호위들은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일이 없으면 들어가 쉬면 좋을 텐데.
정작 밤을 샜다는 라카인이 말짱하게 눈 뜬 채 투이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스카차도 혼자 들어가기 뭣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라카인이 살가운 성격도 아니라 나름대로 자존심과 멋쩍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스카차가 말을 붙여 본 게 시작이었다.
「뭘 보고 계신 겁니까?」
「…….」
「이봐요, 어차피 루가 님을 호위하며 계속 볼 사이인데 이렇게 나온다고 도움 될 거 없습니다.」
「잘하는 게 뭐지.」
「예?」
아니, 그보다 반말……?
당황한 스카차가 질문을 놓쳤다.
「지금 저한테 한 말입니까?」
「호위라고 해도 각자 잘하는 분야가 다르니 알아 둬야 한다.」
스카차의 반응에도 라카인은 변함이 없었다.
황당을 넘어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 스카차가 대꾸했다.
「당연히 무예입니다.」
「…….」
라카인이 슥 그를 쳐다보았다. 말은 안 해도 속말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스카차가 울컥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그때 시험은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라 방심했을 뿐입니다.」
「방심하는 자는 실력을 말할 수 없다.」
「뭐야?」
라카인은 기어이 스카차가 마지막 한계를 때려치우게 만들었다.
「그럼 직접 시험해 보시지!」
스카차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보는 것과 같았다.
아니, 본 것보다 더했다.
두 번의 공격 만에 나가떨어진 스카차가 눈을 불태웠고, 라카인은 그걸 다 받아 주면서 조금씩 동작을 바꿨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그가 자신에 맞춰 움직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가르치려 한다는 사실에 더 분노한 스카차는 계속 달려들었다.
그럴수록 라카인의 덤덤한 맞춤 교육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알아서 더 빡쳤을 것이다.
그래서 못 멈췄겠지.
앞뒤 사정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투이나조차 뒷말을 잇지 못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스카차의 머리에서 홧홧 김이 피어올랐다. 화가 났던 만큼이나 쪽팔림이 스카차를 걷어차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 실수입니다, 루가 님. 상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스카차가 중얼거렸다.
라카인이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내가 잘하는 분야는 은신이다.”
무예도 아니란 소리다.
화를 돋우는 말에 스카차의 어금니에서 빠드득 소리가 났다.
‘라카인처럼 덩치가 큰 사람이 어떻게 은신을 잘한다는 거지?’
그는 어떤 장소에 놓아도 신체 부위 중에서 뭐가 하나는 튀어나올 것처럼 생겼다.
잠깐 딴 생각을 하던 투이나가 휘휘 생각을 쫓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하잖아요.”
“예상보다 호위들의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라카인의 말에 스카차를 포함한 호루니까지 표정이 구겨졌다.
실시간으로 두 사람의 원망을 한 몸에 사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라카인이 꿋꿋하게 말했다.
“배우는 수준이라면 칭찬할 만하나 루가 님의 호위가 된 이상 한참 부족합니다. 전혀 쓸 수 없습니다.”
“이봐……!”
울컥한 스카차가 수건을 내던졌다.
“그러니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그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뒷말에 스카차와 호루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투이나도 놀랐다.
“라카인이…… 직접요?”
“달리 가르칠 사람이 없습니다.”
라카인이 당당하게 말했다.
얼굴에 철판을 깐 말에 스카차의 속이 다시 부글거렸지만 그가 꺼낸 제안 때문에 선뜻 화를 내기도 어려웠다.
확실히 무사제도 쉽게 제압하는 실력을 볼 때 라카인은 여기서 가장 뛰어난 무예를 지녔다.
게다가 아르파인의 무술은 잘 알려진 바가 없었다.
모하세스를 향한 백성들의 충성심은 대를 이어 내려왔고, 외국인에겐 대화보다 검을 먼저 내미는 문화였다.
애초에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자가 아니면 처음 만나 인사를 하는 관문부터 통과할 수가 없단 소리였다.
그리고 아르파인과 대화할 실력이 되는 자는 이미 자신의 무예를 확실하게 갈고 닦은 뒤라 아르파인의 무술을 흡수하기도 어려웠다.
약간 발전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런데 라카인이 너무 선뜻 자신의 무예를 전하겠다 선언한 것이다.
‘좋은 기회잖아?’
때마침 호루니와 스카차는 견습 무사제였다.
호위로 쓸 만큼 어디 가서 당하고 살 일이 없는 무사들이지만 실력이 완벽하게 다듬어졌다기엔 부족했다.
물론 그 전에 본인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때로는 모든 가능성이 준비되어 있어도 본인의 마음이 길을 가로막을 때가 있으니.
거부감은 잘 뽑히지 않는 뿌리였다.
그때 뜻밖에도 호루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배우고 싶어요.”
“……!”
자그마한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지도 않고 곧았다. 망설임이라고는 없는 표정이었다.
“가르쳐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호루니가 꽉 창을 잡은 손을 비틀었다.
설마 그녀가 먼저 자청할 줄은 몰랐는지 스카차가 입을 딱 벌렸다.
나름대로 큰 결심을 내린 호루니를 본 라카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
“내일 새벽부터 시작하겠다.”
라카인은 여전히 턱을 다물지 못하는 스카차를 설득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대신 시종들이 스카차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는 어찌할 텐가.
쏟아지는 물음의 시선에 그의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치열하게 자존심과 사투를 벌이던 스카차가 결국 벌떡 일어났다.
“저도, 저도 하겠습니다.”
스카차는 그렇게 욕하고 싸워 놓고 염치도 없냐는 소리를 벌써 들은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안 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합니까.”
화가 나더라도 자신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려운 결심을 해낸 스카차를 향한 라카인의 대답은 담백했다.
“알겠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어차피 안 한다고 해도 끌고 갈 생각이었다.”
“……!”
“아하…….”
호루니가 뒤늦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젠 화가 나기보단 허탈해진 스카차가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래도 잘 해결된 것 같네.’
상황을 지켜보던 투이나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끝났나요?”
“예.”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투이나가 턱, 라카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라카인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제가 떠나기 전에 분명히 자라고 말했을 텐데요.”
라카인이 크게 움찔했다.
“……제가 잠을 못 잤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라카인이라면 충분히 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줄 알았죠.”
“…….”
“이해한 거죠? 그런데 안 한 거잖아요.”
순식간에 주도권이 투이나에게 넘어갔다.
방금 전까지 라카인에게 탈탈 털리던 스카차가 단전에서 올라오는 히죽거림을 참느라 입술을 푸들거렸다.
라카인이 항변을 시도했다.
“……호위를 맡은 자는 만약을 대비해 열흘 동안 밤을 새우는 훈련을 받습니다.”
“라카인은 원래 호위도 아니었잖아요. 게다가 이미 새 호위도 뽑았고요. 설마 자기가 고른 사람들을 믿지 못했나요?”
“…….”
“진짜 호위라면 언제나 몸 상태를 관리해야죠. 지금 와서 밤새우는 훈련을 하면 되겠어요? 무책임하잖아요.”
투이나가 결정타를 날렸다.
마지막 단어에 제대로 얻어맞은 라카인이 굴복했다.
“……자러 가겠습니다.”
“좋아요. 이번엔 잠드는 거 보고 갈게요.”
“루가 님!”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시종이 마지막 말에 딸꾹질을 했다.
투이나는 단호했다.
“걱정 마요. 설마 이대로 밖에서 재우겠어요?”
그 걱정이 아닙니다만! 하고 시종이 외치기도 전에 투이나가 라카인을 끌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놀란 호루니가 호다닥 뒤를 쫓아갔다.
“같이 가셔야죠, 루가 님!”
겅중겅중 뛰어가는 호루니를 본 나머지 사람들도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는 우르르 일어나 뒤를 쫓았다.
라카인의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란히 문 앞에 도착한 투이나가 라카인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문 열 거니까 도망가지 말아요.”
“도망가지 않습니다.”
라카인은 아직도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지 멀뚱하게 대답했다.
일단 왜 도망가야 하는지부터가 난제였다. 어쨌든 명령이 떨어지면 철저하게 지켰으니.
아무리 시켜도 자기 싫다고 도망 다니는 동생들을 붙잡은 경험만 떠올린 투이나가 기운차게 문을 열었다.
“누우세요.”
라카인이 고분고분 신발을 벗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남아 있긴 했다.
남의 방이니 투이나는 안까지 들어가진 않고 방문에 기대서 라카인이 눕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계속 투이나의 눈치를 보며 반듯하게 다리를 뻗었다.
명령 수행을 지켜본 투이나가 잠시 후 헉 소리를 냈다.
“어…….”
예상치 못한 문제와 맞닥트린 투이나가 입을 가렸다.
투이나의 반응에 라카인의 상체가 벌떡 들렸다.
그러나 시선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확인하자마자 그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침대가…… 너무 짧잖아?’
투이나가 황당하게 발가락을 바라보았다.
방에 가구를 들여놓을 당시에는 누가 주인이 될지 고려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이불을 넘어 허공으로 튀어나온 발이 어색하게 꿈지럭거렸다.
계속 그러고 있으니 거북한지 라카인이 안간힘을 다해 몸을 당겨 보았다.
결과는 안쓰러웠다.
“…….”
투이나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다른 사람들도 도착했다.
“루가 님, 여기 계셨군요!”
“저희랑 같이 움직이셔야……! 컥.”
잔소리를 쏟아 놓으려던 시종이 가관인 라카인을 발견하고는 공기를 잘못 마셨다.
“그, 저, 자는 겁니까?”
“저러고요?”
“아이고, 키가 저리 커서…….”
시종이 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이 좋은 호루니가 말했다.
“가로로도 좀 짧은 거 같은데요.”
안 듣는 척하고 있던 라카인이 움찔했다.
작은 이불을 덮어서 가리려고 했는데 사이가 좀 떴다.
좀 많이.
원래 시종들 숙소였던 터라 침대 크기를 다 똑같이 맞춰 놓은 게 원인이었다.
결국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라카인이 도로 일어났다.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입 돌아가요.”
“아르힘은 따듯해서 괜찮습니다.”
“이불 좀 더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 꼴을 본 뒤라 차마 침대에서 자란 말을 못 하겠는지 시종이 침구를 바리바리 싸 왔다.
둥지를 만들 듯이 침구를 깐 뒤에야 그럭저럭 라카인이 누울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괜찮겠어요?”
“예.”
라카인은 차라리 아까보다 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샨의 천막에 누웠을 때와 비슷해서 오히려 그에게 익숙할 수 있겠다.
막상 편하게 눕고 나자 이번엔 잠드는 게 문제였다. 라카인은 부담스러워서 그런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거기 계십니까.”
“네에.”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는지 라카인이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감고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 그를 보니 자신이 옆에 있으면 끝까지 못 잘 것 같았다.
‘또 깨어나서 딴짓할까 봐 보고 가려고 했는데.’
투이나가 일어났다.
“충분히 잘 때까지 못 나오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르힘 님을 뵈러 가시나요?”
“네.”
투이나가 살짝 방을 빠져나왔다.
“가서 다 말씀드려야지요.”
닫히는 문틈으로 라카인의 눈동자가 보였다 사라졌다.
성소로 가는 길은 호루니가 호위를 계속했다.
스카차도 몹시 가고 싶어 했지만 그도 휴식이 필요한 상태긴 마찬가지였다.
뒤에 남겨 놓고 온 호위가 걸리는지 시종이 물었다.
“아르힘 님이 괜찮아 하실까요?”
“뭘요?”
“아르파인을 곁에 두셨으니…….”
시종이 말끝을 흐렸다.
아르힘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겐 한없이 관대하지만 나라를 침범하는 이교도까지 봐주지는 않았다.
사실 아르힘이 가진 힘이 너무도 강력해 신이 있는 곳이면 불가항력으로 쓰러져 나간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신앙이 없는 자는 신을 보는 것조차 감당할 수가 없다.
“반대하실 거였다면 이미 저희가 알 수 있었을 거예요.”
“하긴 아르힘 님께서는 늘 보고 계시니……. 그래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네.”
투이나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시종들이 뒤에 멈추고 그녀가 혼자 걸어가자 호루니가 깜짝 놀랐다.
서둘러 같이 따라가는 호루니를 시종이 잡아챘다.
“……!”
“어허, 자네! 자네는 따라가면 안 되네.”
반사적으로 창을 휘두를 뻔했던 호루니가 움찔했다.
방금 머리가 날아갈 뻔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시종 대신 호루니의 가슴만 세차게 벌렁거렸다.
“루, 루가 님을 혼자 보내면 안 되잖습니까.”
“저 안에 아르힘 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인가. 나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게.”
시종이 핀잔을 주었다.
호루니가 당황한 얼굴로 종탑과 투이나를 번갈아 보았다.
“아르힘 님은 어디에든 계신다고 배웠습니다만…….”
“물론 그렇지만 저 안에는 그분의 현신이 계신단 말이야. 세상에 오직 루가 님만 만날 수 있는 장소이니 혹시 침입자가 있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
“예에……?”
신은 무엇으로 신앙을 가늠하는가.
어안이 벙벙해진 호루니와 시종들이 오래된 신학 논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투이나가 익숙한 느낌을 타고 종탑 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바깥은 논쟁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일단 성소로 들어오자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맑은 파문이 이는 물보라만 작은 종처럼 귀에 울렸다.
소년 아르힘은 투이나가 들어올 때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날리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한 투이나가 서둘러 무릎을 숙였다.
“당신의 종 루가가 여기 도달하였습니다.”
소년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평범한 개구쟁이 같은 동작에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움직이지 말거라.”
화들짝 놀란 투이나가 고개를 들려다가 급히 멈췄다.
어정쩡한 자세에 곤혹스러워하던 투이나가 눈동자를 굴려 앞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아르힘이 그곳에 없었다.
“네게 부정한 것이 있구나.”
소년의 목소리가 어느새 어깨 위쪽에서 들려왔다.
한쪽 손으로 뒷짐을 진 아르힘이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어쩌다 이런 것을 들였느냐?”
“그게…….”
쩍.
어깨를 가리고 있던 천이 갈라졌다.
드러난 상처는 새카맸다.
상처를 스치는 공기에 이유 모를 한기가 든 투이나가 부르르 떨었다.
“앞으로 다치면 내게 오거라.”
살 밑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에 소름이 끼친 찰나, 라카인이 꿰매 놨던 실이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기생충처럼 비틀리며 허공을 떠돌던 검은 실이 뚜둑 소리와 함께 가닥가닥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계속 그녀의 어깨를 계속 묵직하게 잡아당기던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아르힘 님!”
훨씬 편안해진 투이나가 긴 숨을 내쉬었다.
‘아아, 살 것 같아…….’
정말 순식간에 나았다.
직접 어깨를 당겨 보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처를 확인한 투이나의 기분이 순식간에 상승했다.
소년이 씩 웃으며 허공에서 도로 내려왔다.
“사소한 상처라고 소홀히 생각 말고 곧장 와야 한다. 내가 귀찮아할 거라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노여움을 살 거라 미리 말해 두마.”
속으로 뜨끔한 투이나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왜 사제님의 기도가 듣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너는 이미 이유를 알고 있다.”
투이나는 노력했지만 짐작하지 못했다.
“……깊은 뜻에 저의 생각이 미천하여 닿지 못했으니 부디 다시 깨달음을 주시옵소서.”
공손한 말에 아르힘이 빙긋 웃었다.
딱한 아이를 안아 올리듯이 소년이 말했다.
“왜 반드시 내게 주기적으로 기도를 하러 오는지 떠올려 보거라.”
“그건…….”
병 때문이다.
투이나가 걸린 얼룩병은 지금까지 어떤 치료법도 발견되지 않았다.
병에 걸린 이들 중 오직 투이나만이 아르힘의 힘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중이었으니.
‘얼룩병 때문에 기도가 듣지 않아서 얼룩병이 아닌 상처에도 똑같이 통하지 않게 되는 거라면?’
“너의 생각이 옳다.”
투이나의 생각에 아르힘이 답했다.
작은 조언에도 금세 정답을 찾아낸 투이나를 소년이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투이나의 얼굴이 잠깐 밝아졌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아르힘에서 얼룩병에 걸린 건 투이나 한 명이 아니었다.
투이나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아르힘 님.”
“예전에도 너는 내게 똑같은 질문을 했었지.”
투이나의 말을 모두 짐작한 아르힘이 미리 대답했다. 투이나의 마음에서 너무 크게 울리는 소리였으므로.
루가가 되었을 때 투이나는 딱 하나의 질문만을 품었다.
‘왜 저일까요?’
투이나가 루가로 발탁되어 신전으로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내지른 비명은 너 이제 안 죽겠구나,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우리도 이제 살았구나!」
남편과 자식을 길쭉한 팔로 아등바등 끌어안은 어머니는 그때까지 본 얼굴 중에서 가장 삶을 향한 환희로 넘쳐나고 있었다.
심지어 벙 찐 채 서 있던 투이나를 처음으로 끌어안아 등을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물론 병이 옮을세라 금방 떨어지긴 했지만 포옹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투이나는 단 한 번도 더 오래 살고 싶다거나 후회되는 과거를 바꾸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냥, 이대로도 만족했다.
아르힘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과거에도 너는 이미 대답을 들었고 지금 또한 들을 것이다.”
투이나도 대답을 기억하고 있었다.
천 자락을 꼭 쥔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투이나에게 아르힘이 양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가만가만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너는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자그마한 팔이 가볍게 힘을 주어 투이나를 당겼다.
기쁘다고 생각하면서도 투이나는 안긴 그대로 어찌 할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아르힘 님……. 저는 아직도 유일한 희망에 대해선 전혀 모르겠어요.’
아르힘은 듣고 있었다.
간절히 이 삶을 원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말고 투이나가 선택되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제가 누군가와 만나 사랑을 하고, 병도 깨끗하게 낫고, 계속 살아가는 게 정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충분하다.”
투이나의 머리를 껴안은 소년이 작게 속삭였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투이나는 무엄하다 생각하면서도 작은 소년의 몸을 끌어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의 체온은 따듯했다.
두근거리는 맥박 소리를 들으며 투이나가 눈을 감았다.
곧 아르힘이 치료를 시작하는지 몸에 번진 얼룩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기만 했다.
투이나가 성소에서 나왔을 때 뺨에 눈물 자국이 있는 걸 모른 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풍부한 표정으로 열심히 ‘내가 지금 보는 거 너도 보여?’ 하고 외쳐댔으니 말이다.
여운에 잠겨 있던 투이나마저 풋,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신과의 만남이다 보니 차마 누가 먼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수가 없는 모양이다.
간질거림을 참지 못한 투이나가 양 팔을 들어 올렸다.
“저 다 나았어요!”
“……역시 아르힘 님이십니다!”
뒤늦게 찬탄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혼자 투이나를 보내고 얼마나 안절부절못했는지 땅에 창으로 구멍 자국을 내놓은 호루니까지 확 기쁜 기색이 되었다.
“잘되셨습니다!”
“아휴, 다행입니다. 그동안 숟가락도 제대로 못 드셔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다친 어깨가 하필 주로 쓰는 쪽이었다.
투이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많이 부탁드릴게요.”
“염려 마세요. 한 상 크게 차려 올리겠습니다.”
금세 일행은 시끌시끌해졌다.
“그나저나 루가 님, 혹시 왜 사제님의 기도가 상처에 듣지 않았는지 들으셨습니까?”
“역시 아르파의 저주지요?”
“아아, 아뇨. 제 병 때문이에요.”
투이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건만.
“앗…….”
“아…….”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물어본 사람이 죄인이 된 흐름을 눈치 챈 투이나가 짓궂게 덧붙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존귀한 아르힘 님을 제 주치의로만 쓰게 생겼으니 너무 과분한 축복을 받아 버린 거 있죠?”
시종들이 멈칫, 이 농담에 웃어야 될지 몹시 갈등했다.
이거 신성 모독 아니야? 아니, 자학 개그인가?
다행히 더 어색해지기 전에 호루니가 열렬히 외쳤다.
“정말 루가 님은 대단하시군요! 누구도 그런 영광을 누려 볼 순 없을 겁니다.”
“예, 예! 맞습니다!”
시종들이 냉큼 맞장구를 쳤다.
순수한 호루니 덕에 잘 넘겼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투이나가 호루니 옆에 착 붙었다.
“저 이제 팔짱도 낄 수 있어요.”
“루, 루가 님……. 저는 호위를 서야 합니다…….”
“금방 돌아가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있으면 오히려 더 안전한 느낌이 드는걸요.”
호루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짧게 잘라 놓은 곱슬이라 달리 쑥스러움을 갖출 옆머리가 없었다.
하긴 투이나도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 올려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긴 했다.
완전히 자신을 믿는 투이나를 본 호루니는 창을 꼭 잡으며 앞으로 더 호위에 충실하리라 거듭 다짐했다.
* * *
투이나의 쾌활함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성소에서의 일도 좋았고, 살짝 들여다본 호위들의 숙소에서 라카인이 아주 푹 자고 있다는 전갈도 받았기 때문이다.
‘일이 잘 풀리려나 봐.’
투이나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제들이 뭐가 하나 풀린 것처럼 방긋거리는 그녀를 찜찜하게 쳐다보았다.
원래 사제들과의 면담 시간이 되면 아무리 투이나라도 바짝 긴장해 양피지를 한참 들여다보고는 했으니.
“……그래서 레오나 크로퍼드에게 출입 허가를 보내는 데 동의하시는 겁니까?”
“네? 아, 네!”
투이나가 퍼뜩 면담실로 정신을 되돌렸다.
“지난 방문 때 베인이 제게 직접 요청했어요.”
“뭐, 가족이니 그럴 수 있지요.”
“며칠짜리로 발급할까요?”
“그동안 크로퍼드가 우리한테 기부한 게 있으니…….”
“원래 신도들 쪽 건물은 자주 출입했었습니다. 그래도 외부인인데…… 여기까지 들어오기는 좀 그렇군요.”
곰곰이 대화를 듣던 투이나가 결정을 내렸다.
“우선 열흘로 할까요? 충분히 가족끼리 지낸 다음에 다시 방문할 날짜를 정하면 되겠죠.”
“그렇게 되면 베인의 방문일에 레오나 크로퍼드와 마주치실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투이나가 선뜻 대답했다.
‘베인의 가족인걸.’
게다가 크로퍼드 상단이 아르파를 얼마나 믿는지는 이미 나라 밖까지 유명했다.
나라를 떠나기 전에 신전에서 기도를 하면 절대로 털리지 않는다고 외친 상단주의 말은 거의 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신의 가호가 함께하는지 감히 도적 떼가 크로퍼드 상단의 물건을 털어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일 엄청난 양의 수레가 신전에 드나들었고, 크로퍼드는 수고로움을 감당하는 대가로 신전에 아낌없는 수익을 퍼부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콩고물도 많이 떨어지는 터라 아르힘의 백성들도 크로퍼드 상단을 가장 아꼈다.
크로퍼드 상단의 그러한 명성은 베인의 누나인 레오나가 맡은 뒤에도 이어졌다.
‘오히려 레오나 크로퍼드라면 꼭 만나 보고 싶을 정도인걸.’
그래서 레오나의 출입 허가는 쉽게 떨어졌다.
문제는 다음 안건이었다.
“샨 아르파 모하세스가 자신의 거처 옆에 있는 신전 동문으로 출입하겠다고 알렸습니다.”
“뭐라고요?”
경악한 사제들이 탁자를 내리쳤다.
“아니, 구혼 기간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규칙을 어기려는 겁니까?”
“이런 무례한!”
“아르힘 님이 가만 계시지 않을 겁니다!”
투이나는 침착했다.
다행히 과거에도 똑같이 일어났던 일이라 놀라지 않았다.
“여러분, 일단 끝까지 읽어 보세요.”
“예?”
아무리 흥분하고 싶어도 너무 차분한 사람이 있으면 저절로 김이 식기 마련이다.
미간을 찌푸린 사제들이 작게 휘갈긴 글씨를 어렵사리 해독했다.
샨은 악필이었다.
“……신전에서 제공하는 물자에 만족할 수 없어 직접 사람을 보내고 제사를 지내야 하니 신전 바깥에 공간을 마련해 달라?”
“허!”
사제들은 기가 막혀 했다.
“게다가 말을 달릴 구역이 필요하다고 넓은 공터를 찾아 달랍니다. 관대하게도 완전히 자기 것으로 하진 않고 빌려 쓴다나요.”
“참나!”
갈수록 가관이라고 여긴 사제가 탕!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더 볼 가치도 없습니다! 신전에 들어오기 전과 완전히 태도가 다르잖아요.”
“벌써부터 꿍꿍이를 부리는 작태가 아주 수상합니다.”
“절대로 들어줄 수 없어요!”
“아니요.”
투이나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요구가 과한 거였어요.”
“예?”
설마 투이나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소리에 사제들이 눈을 홉떴다.
“루가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다 들어주자고요?”
“물론 저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좀 있기는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배려해 줄 거예요.”
사제들이 생전 처음 만난 사람 보듯 투이나를 쳐다보았다.
과거에는 샨이 워낙 악명을 떨치다보니 모두들 그에게 많은 족쇄를 채워 놓은 것은 물론, 이해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나라를 노리고 들어왔을 게 뻔하니 미리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태어나기를 초원에서 태어나 탁 트인 벌판에만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 그를 갑자기 벽이 가득한 공간에 가두고, 종교가 다르다고 아르파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도 금지했다.
심지어 아르힘이 있으니 신전 내부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제한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분노가 꾸준히 누적될 만도 했다.
그 시간을 오로지 투이나와의 결혼만 보고 버텼으니, 그만큼 루가가 되기 전에는 평민이었다는 소리를 해댄 투이나에게 폭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어.’
신전에 들어오기 전에 구혼에 대한 내용을 설명했기 때문에 모든 걸 다 합의하고 청혼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계약서를 아무리 읽어도 모른 채, 직접 겪어 봐야만 불합리하다는 걸 깨닫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구혼 기간의 후반부가 되자 샨은 몹시 난폭해졌었다. 사람들은 미리 제한을 걸어 둔 것에 안도했지만.
투이나는 선후 관계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같은 장면을 두 번씩 보면 아, 하고 깨달음을 얻듯이.
투이나가 펜을 들었다.
“아르힘 님의 말씀을 어길 순 없지만 최대한 편의를 봐 주는 게 좋겠어요.”
투이나는 엉망진창으로 써 갈긴 샨의 글씨 옆에다가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첫 요구 사항은 곧장 허락하고, 제사는 샨이 직접 나가지 않으면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
“동문 바깥은 바로 세피룬 강이라 제사를 올릴 만큼 엄숙한 곳은 찾기 어려울 거예요. 이 말을 꼭 같이 전해 주세요. 말이 달릴 곳은……. 쓸 만한 곳이 있나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던 사제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없습니다. 동쪽 외곽의 행진로는 아직 보수가 덜 끝났거든요.”
“서쪽 외곽 진입로는요?”
“크로퍼드 상단이 쓰고 있습니다. 항상 쓰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수레가 들어올 때가 많아 말을 달리기에는 위험합니다.”
“어렵게 됐네요.”
투이나가 펜 끝으로 입술 아래를 툭툭 쳤다.
“그 부분은 같이 좀 더 천천히 찾아봐요.”
보류, 하고 또박또박 글씨를 쓴 투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난 사제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눈을 해괴하게 뜬 사제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루가 님, 혹시 모하세스에게 반하셨습니까?”
“컥! 크헉, 콜록!”
마신 것도 없는데 투이나는 갑자기 기침을 했다.
감당이 안 되는 질문에 투이나가 책상을 부여잡고 몸을 떨었다.
‘와……. 정말 이러기 있어요?’
간신히 요동치는 갈비뼈를 멈춘 투이나가 억울하게 소리쳤다.
“꼭 사람한테 반해야만 잘해 준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그렇잖습니까. 갑자기 모하세스에게 호의적으로 나오시니.”
“그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1년 정도 봐서 대강은 알고 있답니다.’
투이나가 남은 기침을 삼켰다.
물론 샨에게 잘해 주는 이유가 있기는 했다.
샨의 요구를 들어주면 화가 덜 쌓일 테니까. 그럼 미래에 투이나를 죽이는 일도 없겠지.
처음 생각했던 살해 동기는 폐기했지만, 여전히 범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샨이었다.
다만 화가 나서 투이나를 죽였을 거란 추측 말고는 아직 제대로 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처리하자.’
투이나는 샨과 안심하고 대화할 수 있는 정도까진 가고 싶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손님을 초대한 우리가 양보하는 게 옳은 부분이기는 해.’
투이나가 까먹지 않고 되새겼다.
비록 행동에 나선 동기가 순수한 배려가 아니라 약간 부끄럽긴 했으나 그렇다고 양보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샨은 저와 결혼할 수 있을지 없을 지도 모르는데 1년간 다른 수호신의 신전에 갇혀 살길 선택했어요. 이 정도 배려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정작 그자는 틀림없이 자기가 루가 님과 결혼하리라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요.”
사제가 투덜거렸다.
“아하하…….”
그래도 결국 샨의 비위를 맞춰 놔서 나쁠 건 없다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