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엇이든 바치리라 맹세 하겠어요.’ 그러자 신께서 물었다.
“음, 그럼 이제 샨이 얘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내 얘기라니?”
“내 이야기를 하나 주었으니 샨에게도 하나 받고 싶어서요.”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비록 등골은 짜릿했지만 아직 그가 호의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결혼할 상대이니 궁금하다는 건가.”
“네.”
“슬슬 후사를 생각할 때가 되었기에 신부를 찾았다. 격에 맞는 자를 고르던 중 루가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
“소문이요?”
“아르힘의 땅에 수호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샨의 눈이 잠깐 번뜩였다.
“강한 수호신은 몹시 드물지. 게다가 미혼에 나이까지 비슷한 신붓감이라면 지나치기엔 아깝지 않은가.”
“샨이 청혼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습니다.”
“나에 대해 알고 있었나?”
“아뇨. 몰랐어요. 그래서 구혼 기간이 반가웠죠.”
투이나의 어투가 어쩐지 씁쓸했다.
샨의 눈매가 예리해졌으나, 그가 자세히 알아보기도 전에 미묘함은 새처럼 날아가 버렸다.
같은 자리임에도 잠깐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던 투이나가 금세 활달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1년은 참 짧은 시간이에요.”
“그래서 부지런히 알아봐야 하지.”
갑자기 샨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날아간 걸 놓치는 성미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게 생겼다, 루가.”
갑자기 샨의 태도가 바뀌자 시종들이 얼어붙었다.
‘난 또 결투 신청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샨이 투이나를 데려간 곳은 아까 그 연무장이었다.
말끔해진 장소에 투이나를 데려다 놓은 샨이 우르르 무기처럼 보이는 걸 쏟아 놓았다.
간신히 심장을 진정시킨 투이나의 맥박이 다시 빨라졌다.
“뭘 하려고요? 설마 신전에서 피를 볼 생각은 아니죠?”
“이런 걸로는 아무도 못 죽인다.”
샨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길쭉한 활대를 발로 두어 번 밟았다.
“1년이나 갇혀 지내면서 무예도 연마하지 말란 말인가.”
“처음 신전에 왔을 때도 봉으로 사람들을 위협했던 걸 기억합니다. 정말 샨에게 필요할까요?”
“때려죽일 셈이면 주먹으로도 가능하니 그렇게 걱정되면 데려온 하인들의 손을 전부 자르도록 해라. 원한다면.”
마지막 말은 위험스레 길었다.
솔직히 기기묘묘한 무기들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사제들이 최대한 날이 붙고 위협적인 걸 제외하려고 애쓴 흔적만 보였다.
‘사람이 제일 위험하네요, 사제님. 그랬네요.’
투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조용하게 굴어 줄 테니 활을 잡아라.”
“네?”
샨의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말했던 대로 구혼 기간에는 서로를 알아 간다고 하지 않았나, 루가. 나는 말로 판단하지 않아.”
샨이 직접 만져 보던 활을 투이나에게 넘겼다.
무심코 받아 들기만 했는데도 무게가 상당했다.
“행동을 보지.”
입 다물고 쏴 보라는 소리다.
투이나가 엉거주춤 활을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하긴 나만 상대를 평가하는 게 아니었지.’
투이나가 활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죽기 전에 샨이 활 쏘는 걸 몇 번 봐서 대충 어떤 식인지는 알았다.
이대로는 쏠 수 없다는 것도.
“딱 한 번뿐이에요.”
의외라는 듯 샨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눈짓하자 하인이 다가와 그녀에게 장갑과 깍지를 끼워 주었다.
구혼자도 아닌 외간 남자가 덥석 투이나의 손을 잡자 시종이 뒤에서 끙 소리를 흘렸지만 당사자들은 대수롭지 않았다.
한쪽은 진짜 아무렇지도 않았고, 다른 쪽은 상대방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하인도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였다.
하인이 아무 말도 안 해서 그가 양손을 내밀고 기다리는 게 활을 달라는 말인 줄 뒤늦게 알았다.
투이나에게 활을 건네받은 그가 꼼꼼하게 시위까지 확인하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이제 쏴도 되나요?”
하인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샨도 약속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허락의 의미는 분명했다.
“좋아요.”
투이나가 어설프게 자세를 잡았다.
‘처음에 있는 힘껏……!’
팔꿈치를 뒤로 확 젖혔다.
기운찬 시도였지만 팽팽한 활시위가 순순히 당겨질 리가 없었다.
“윽!”
투이나가 안간힘을 썼다.
‘병은 있어도 체력은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부족이다.
하현달처럼 휘어진 시위가 부들부들 떨렸다. 얌전히 고정 되어 있어야 할 화살까지 춤을 추듯 흔들렸다.
“루가 님, 힘내세요!”
시종이 작은 소리로 응원했다.
웃음이 터질 뻔한 투이나가 다시 집중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활시위가 팽팽해졌다.
그런데 제대로 자세가 잡히자마자 시위 끝에서 투둑, 하는 괴이한 소리가 났다.
“어?”
“꺄아악!”
바람이 휙 갈라졌다.
투이나는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단지 기시감을 느꼈을 뿐이다.
‘뜨거워!’
투이나의 몸이 천천히 뒤로 꺾였다.
“루가 님!”
시종이 뛰어왔다.
그러나 투이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샨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샨이 그녀의 뒤통수가 깨지기 전에 등을 잡아챘다.
“루가.”
투이나가 고통으로 신음했다.
하지만 아픔보다 놀란 탓에 정신이 금방 들었다.
“으……. 어떻게 된 거죠?”
“시위가 끊어지면서 줄에 맞으셨습니다!”
한발 늦게 도착한 시종들이 소리쳤다.
투이나가 실금처럼 번진 붉은 얼룩을 확인했다.
‘다행이다. 그때처럼 심한 상처는 아니야.’
투이나가 끙끙거리자 샨이 인상을 썼다.
“움직이지 마라.”
“루가 님한테서 손 떼십시오!”
다급해진 무사제가 험하게 경고했다.
아랫것에게 명령을 들은 샨이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딱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위압감에 눌린 무사제가 주춤했다.
그를 완전히 무시해 버린 샨이 미간을 좁혔다.
“상처를 봐야겠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다들 진정하세요. 전 멀쩡해요.”
투이나가 사양하려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하필 다친 팔이라 하자마자 후회했다.
“돌아가서 치료받으면 됩니다.”
“여기서도 할 수 있다.”
샨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조금 전 움찔한 게 분했는지 무사제가 대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르힘의 신전에선 바깥의 치료는 필요 없습니다.”
“무사제님!”
상황을 걷잡을 수 없기 전에 투이나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먼저 가서 사제님을 불러 주시겠어요? 금방 간다고 전해 주세요. 큰 상처는 아니니 안심하라는 말도요.”
완고한 말에 샨의 표정이 삐딱해졌다.
“나를 믿지 않나, 루가?”
투이나는 그저 애매모호한 표정밖에 지을 수 없었다.
당신이 살인범 후보 1순위라고 어찌 말할까.
“괜히 걱정을 늘릴 필요 없잖아요.”
“가겠다면 말리지 않는다.”
샨이 일어섰다.
아직 그가 잡아 주고 있던 상황이라 투이나의 몸도 딸려 올라갔다.
‘악, 내 어깨!’
섬세하지 못한 동작에 비명을 참느라 투이나의 주먹이 확 쥐었다 펴졌다.
무사제가 얼른 부축했다.
“가시죠, 루가 님.”
투이나가 흘끗 샨을 돌아보자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벌렸다.
투이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했다.
‘무슨 의미지?’
그녀가 등을 돌리자마자 샨이 명령했다.
“루가를 따라가라.”
“알겠습니다.”
샨의 하인이 즉각 대답했다.
투이나가 놀라 말렸다.
“전 정말 괜찮아요. 굳이 도와주려고 사람까지 붙일 필요까진…….”
“도와주라고 보내는 게 아니다.”
샨이 냉랭하게 말했다.
“이미 거절한 걸 억지로 넘겨 줄 생각 없다. 대신 처분권을 주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라.”
“처분이요?”
샨이 고개를 까딱였다.
자세히 보니 아까 활을 봐줬던 자였다.
“아…….”
‘사고 상황을 설명해 주라고 같이 보내는 건가?’
의외로 마음을 써 주는 모양이라 투이나가 고갯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샨은 시큰둥했다.
‘뭘까? 이상한 표정인데.’
그러나 무사제가 움직이자 더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찢어진 천이 상처를 마구 건드려댔다.
‘끄악! 일단 가서 생각하자!’
투이나 일행은 서둘러 샨의 거처를 벗어났다.
기다리고 있던 사제가 그들을 맞았다.
“이쪽으로 모시세요.”
사제가 가까운 방에 투이나를 눕혔다.
치료를 시작하기 위해 그가 손을 모았다.
아르힘의 사제들은 기도로 어떤 병이든 치유할 수 있었다. 아르힘이 준 또 다른 기적 중에 하나였다.
입 속으로 기도를 중얼거린 사제가 투이나의 상처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나 흰 빛과 함께 치유되어야 할 상처는 그대로였다.
“아니……!”
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사제가 다급히 경건한 자세를 취하더니 조금 더 빠르게 기도를 읊었다.
아까보다 훨씬 길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쯤 되니 투이나도 일이 심상찮게 돌아간다는 걸 알아차렸다.
“루, 루가 님에게 기도가 듣질 않습니다.”
“그럴 리가요!”
순식간에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루가 님이야말로 축복 중의 축복이자 신앙의 으뜸이십니다. 매번 아르힘 님을 만나서 치유받는 분에게 기도가 안 듣는다니요!”
“혹 사제님께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이보세요. 전 방금까지 환자들을 치료하다 불려나온 겁니다!”
사제가 울컥해서 대꾸했다.
“대체 루가 님이 어쩌다 다치신 겁니까? 무사제들은 뭘 했어요?”
“모하세스의 거처에서 활을 쏘시다 시위가 끊어졌습니다.”
“모하세스? 아르파인들 말입니까?”
“그게 문제가 되나요?”
투이나가 고통 속에서 캐물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진 사제가 더듬거렸다.
“혹시 수호신 아르파가 이번 일에 개입했을지도 모릅니다.”
추측을 꺼낸 사제는 곧 확신했다.
“예, 그럴 겁니다. 틀림없어요. 다른 신이 아니면 감히 누가 아르힘 님의 치유를 방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아르힘 님이 계신 곳에 아르파가 강림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 상의는 나중에 하시고 일단 치료부터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투이나가 간곡하게 말했다.
사제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죄송하지만 루가 님, 저는 다른 치료법은 모릅니다.”
“네에?”
“아니, 사제씩이나 되신 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매일 공부만 하시잖아요!”
“생각을 해 보세요. 아르힘 님의 신전에서 굳이 다른 치료법을 배울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아마 다른 사제들도 모를 겁니다.”
“하다못해 창고에 바르는 약초 같은 거라도 없나요?”
투이나가 이를 악물어 가며 말했다.
바깥에서 살 때는 사소한 병에 일일이 신전을 찾아갈 수 없으니 다들 간단한 민간요법을 갖고 있었다.
사제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루가 님.”
“으으윽…….”
실망한 투이나가 신음을 흘렸다.
축복이 지나쳐서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어깨를 다친 게 아니면 차라리 혼자서라도 어떻게 해 보련만.
고민하던 그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가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그가 같은 방에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들이 놀라 펄쩍 뛰었다.
“누, 누구냐!”
“저 사람, 샨이 보낸 하인이에요!”
시종 하나가 그를 알아보았다.
방까지 따라온 그를 본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붙잡아!”
곧장 험악한 난장판……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무사제가 멱살을 잡아 내리꽂자 하인이 바로 머리를 박았다. 그는 저항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안까지 들어왔느냐!”
“아무도 막는 자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눌린 얼굴에서 웅얼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대답에 민망해진 무사제의 목소리가 커졌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당연히 바깥에서 기다려야 할 거 아닌가! 여기가 어디라고……!”
“주군께서 루가 님을 따라가라 하셨습니다.”
“뭐라?”
“탓하지들 마세요. 모두 정신이 없었잖아요.”
“그래도 임무 태만입니다.”
사제가 궁시렁거렸다.
투이나가 눈총을 주고서야 그는 얌전히 팔짱을 꼈다. 어쨌든 본인도 눈치 채지 못한 사람이니.
“어디까지 들었느냐?”
“네놈이 활을 잡았을 때 무슨 짓을 한 게지?”
“활을 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화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들었습니다. 활을 점검할 때도 문제는 안 보였습니다.”
“다친 사람이 나왔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나!”
투이나는 말싸움을 듣는 동안 점점 더 지끈거리는 상처를 무시하기가 힘들어졌다.
“정말 치료해 줄 수 있나요?”
“루가 님! 안 될 말씀입니다!”
“무슨 속셈인 줄 알고요!”
반대가 우렁찼다.
솔직히 아픈 사람의 입장으로는 지금 잘못을 알아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다.
무심코 어깨에 힘을 준 순간 바늘로 확 내리긋는 느낌이 났다.
‘히익!’
“여러분!”
투이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전 기도가 아닌 치료법도 몇 번 봤어요. 혹시 이상한 짓을 하면 바로 알아차릴 테니 제발 먼저 믿어 봐요.”
“하지만 루가 님!”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
뒷말을 잇기 위해 투이나가 심호흡했다.
“이 신전에 들어온 이상 그도 아르힘 님의 가호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믿으셔야죠.”
기어이 수호신까지 들먹이고 나서야 사람들이 얌전해졌다.
무사제가 못마땅한 얼굴로 하인을 놓아 주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이마에서 먼지가 부스스 떨어졌다.
“치료 부탁할게요.”
“허튼짓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따듯한 물과 깨끗한 천을 가져다주십시오.”
무사제의 경고에도 샨의 하인이 담담하게 요구했다.
시종 하나가 서둘러 준비한 물건을 대령하자 투이나에게 다가온 하인이 찢어진 옷을 벌렸다.
“헉!”
“읏…….”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졌다.
가까이 서 있던 시종들은 하인을 말려야 할지 도와야 할지 안절부절못했다.
“상처를 씻기겠습니다.”
“네.”
“잠깐!”
대야를 집던 하인을 사제가 중지시켰다.
그의 눈빛이 부리부리해졌다.
“여기서 본 것은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해라.”
“사제님.”
“맹세해라!”
하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투이나가 바라보자 사제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받아 둬야 합니다, 루가 님.”
안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투이나가 아닌가.
그를 탓할 수도 없어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하인은 조심스럽게 상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한쪽 소매를 내렸다.
물에 적신 천이 찍어내듯 피와 먼지를 닦아냈다.
그리고 다른 것도.
“……!”
투이나의 몸에서 하얗게 묻어 나오는 가루를 본 하인의 눈에 처음으로 놀라움이 스쳤다.
분가루가 떨어지자 인간의 몸에서 볼 수 없는 회색 얼룩을 발견했던 것이다.
루가가 되고 나서 사제들은 투이나의 병에 가장 관심을 보였고, 또 숨기고 싶어 했다.
「얼룩병에 걸리고 이렇게 오래 살아 있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아르힘 님의 은총이 대단하군요.」
「아르힘께서 점차 나아질 거라 약속하셨어요.」
「신의 말씀이니 당연히 이뤄질 것입니다.」
사제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허나 그때까지 병이 있다는 건 감추는 게 좋겠습니다.」
이유를 묻는 투이나에게 사제들은 세 가지 근거를 댔다.
첫째, 아르힘이 단숨에 고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알려지면 신앙심이 떨어진다.
둘째, 보기 흉측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사지 못한다.
셋째, 병의 존재가 타국에 알려지면 아르힘의 약점이 될 수 있다.
투이나는 셋 모두 납득했고, 자신의 병을 감추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 심지어 그녀의 가족까지 투이나가 깨끗이 나았다고 믿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무엇 하느냐! 빨리 치료하지 않고!”
초조해진 무사제가 재촉했다.
그들도 이 자리에서 루가의 병을 들킨 게 달갑지 않았다.
하인의 초점이 다시 상처로 돌아갔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습니다.”
“그래서?”
“꿰매야 합니다.”
솜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강한 침묵이 퍼졌다.
‘아, 세상에! 맙소사, 세상에…….’
살을 꿰매야 한다는 생각에 투이나마저 머리가 아찔했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곪아서 통째로 도려내거나 불로 지지면 됩니다.”
샨의 하인은 쓸데없이 친절했다.
투이나가 울상이 되었다.
“……꿰매는 걸로 부탁할게요.”
“독한 술을 가져다주십시오.”
시종이 난색을 표했다.
“아르힘에는 술을 빚을 만한 식물이 자라지 않습니다. 신전이니 독한 술을 사 오지도 않고요.”
“적당히 취할 정도면 됩니다.”
“루가 님은 주량이 세서 취할 때까지 마시려면 한참 걸립니다.”
하인은 잠깐 곤란스러워했다.
“그럼 깨끗한 나무토막과 등잔을 하나 준비해 주십시오.”
“그건 어디에 쓰게요?”
하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담한 눈빛이 보면 알게 될 거란 분위기라 더 무서웠다.
그의 해결책은 죽진 않을 테니 참아라, 였다.
“무십시오.”
하인이 자그마한 나무토막을 입 가까이 내밀었다.
투이나의 숨이 턱 막혔다.
“진심이에요?”
“비명을 지르다 혀를 깨무시면 안 됩니다.”
진지한 답변에 투이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나무토막을 받아 들었다.
‘제발, 아르힘 님! 지금 나타나 주시면 제가 정말 감사드릴 텐데요.’
하지만 바쁜 수호신은 이런 일엔 응답하지 않았다.
괜히 투이나의 죄책감만 늘어났다.
그녀는 최후통첩을 받은 패전국처럼 나무토막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라카인입니다.”
“기억할게요.”
투이나가 나무토막을 물었다.
라카인은 마치 협박처럼 들리는 말에도 깔끔하게 실을 꿰었다.
“끄으……!”
생리적인 비명이 새어나왔다.
바늘이 피부를 오가는 장면에 보는 사람들까지 움츠러들었다.
“어우…….”
“신이시여! 꺅!”
고통을 참으려고 투이나는 라카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치료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고통 때문에 자꾸만 손이 날아갔다.
재주도 좋지.
라카인은 어깨를 파고드는 손톱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흡! 하고 날아오는 팔도 요리조리 잘 피했다.
그러면서도 상처를 꿰매는 손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으니, 무술깨나 해 본 솜씨다.
후들거리는 어깨가 경련을 멈추지 못할 때쯤 치료가 끝났다.
라카인이 매듭을 지은 실을 툭 끊었다.
“잘 참으셨습니다.”
“끝났어요……?”
영혼이 반쯤 나간 투이나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라카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투이나도 끄덕끄덕 따라 했다.
머리를 끄덕이던 투이나가 끄덕끄덕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절이었다.
* * *
이번엔 다시 깨어나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완전히 녹초가 된 투이나가 흠칫 눈을 떴다.
“루가 님!”
바짝 다가왔던 시종이 깩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셨습니까! 몸은 어떠세요?”
“안 좋아요…….”
투이나가 축 처진 상태로 대답했다.
시종이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그자 말로는 며칠 요양하면 좋아진다고 합니다.”
“끝난 다음엔 어떻게 했죠?”
“잘 가둬 뒀습니다. 루가 님을 치료하자마자 곧장요.”
“그랬군요.”
투이나가 상처 반대편으로 살짝 돌아누웠다. 어깨 치료가 끝나자 이젠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기도가 듣질 않았지? 사제님들의 기도가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아르힘 님이 이걸 보면 뭐라고 하실까……. 게다가 병도 들켜 버렸어. 그것도 샨의 사람한테.’
오늘 했던 행동도 곧장 되살아났다.
‘미리 신분을 밝혀 상황이 달라졌잖아. 그건 잘했어.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면 훨씬 더 문제가 커질 거야.’
자신을 속이는 인간이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샨의 얼굴이 무섭게 어른거렸다.
“으으…….”
투이나가 베개를 움켜쥐고 앓았다.
‘다시는 그를 속였다고 말 못 해. 어떻게 또 그러겠어.’
이제는 사제들이 난리치지 않아도 투이나 쪽에서 필사적으로 병을 숨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라카인이 관건이다.
“그를 어쩌면 좋죠…….”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곧 샨에게 돌려보내야 하잖아요.”
“절대로 안 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루가 님의 맨살을 보고도 어찌 보내겠습니까.”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루가 님. 모하세스가 그자의 처분을 루가 님께 맡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투이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샨은 정확하게 ‘처분’이라고 말하며 그를 보냈다.
그때도 찜찜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다.
시종이 더 열성적으로 나왔다.
“그에게 루가 님을 다치게 한 죄를 물어야 합니다.”
“설마 라카인이 일부러 시위를 끊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럼요. 흥. 모하세스가 처분을 넘기니 어쩌니 했어도 그 하인이 애초에 누구 명령을 들었겠습니까?”
“다 상황을 넘겨 보려는 수작이죠.”
“알아도 캐지 말라는 은근한 위협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시위가 끊어진 상황은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여러 겹으로 꼬인 시위가 투이나 정도의 힘에 끊어질 리가 없다. 겨우 당기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러나 투이나는 시종들의 험담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아니야.’
음모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시위를 끊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죽이지도, 두렵게도 못한다.
혹시 사고를 이용해 볼 속셈이었어도 그는 투이나를 너무 순순히 신전으로 보내 주었다.
게다가 샨은 차라리 직접 찾아와 검을 던져 주는 성미였다.
샨이 길리안티나를 정복했을 당시의 일을 들은 적이 있다.
무조건 항복이라며 성문을 연 길리안티나의 왕은 백 명의 사수를 잠복시키고 샨의 갑옷을 벗겨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샨은 그들의 계획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홀로 들어가 자신의 수호신을 불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 단 한 명에게 몰살당했다.
‘본인 입으로 말한 사실이니 틀림없어.’
힘이 있는 자는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괜히 샨을 제일 먼저 범인 후보로 올린 게 아니었다.
‘잠깐.’
생각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 혹처럼 걸렸다.
투이나가 그 부분을 더듬었다.
‘과거에 루가의 신분을 속였다고 날 죽였다기엔 너무 기간이 길어.’
그가 정말 미친 듯이 화내긴 했지만 신분을 들킨 건 살해당한 밤보다 두어 달은 앞선 일이다.
일이 터지려면 그보다 훨씬 전에 일어났어야 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
반갑지 않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계속 엉켜만 가는데, 뒤처리해야 될 일까지 자꾸 생겨났다.
다친 몸으로는 일정을 소화하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에 바깥에 쉬는 이유를 알려서도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수호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아파서 쉰다니. 망신이야.’
고심하던 투이나는 샨의 거처에서 있었던 사고 수습을 위해 당분간 일정을 미룬다고 알렸다.
다행히 만남이 취소되었는데도 베인과 시드룬은 모두 괜찮다는 답을 보내왔다.
딱 한 명.
샨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꾸로 다른 제안을 보냈다.
기도가 먹히지 않은 상황까지는 모를 테지만, 라카인을 제대로 신문하는 줄 안 모양이다.
샨에게 다녀온 시종이 작게 말했다.
“원하면 고문 도구를 보내 주겠다는데요.”
골이 띵했다.
‘그래도 제 백성인데 어쩜 저럴 수가 있어?’
이래서야 야만스럽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투이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받으세요.”
“네?”
“받아서 신전 밖에 조용히 버려 주세요. 괜히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쓰는 것보단 낫겠죠.”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시종이 뛰어나갔다.
방금 들은 말을 잊고 싶은 투이나가 귀를 문질렀다.
“방금 일은 없었던 걸로 해요.”
“알겠습니다.”
열심히 문지른 덕분에 양쪽 귀가 발그스름하게 변했다.
오늘 투이나는 어차피 병을 아는 사람을 만날 예정이라 번거롭게 화장을 하지 않았다.
“……편하게 앉아요.”
바로 라카인이었다.
바닥에 꿇어앉은 그는 미동도 없었다.
무사제들이 끌고 와서 내동댕이칠 때부터 벌떡 일어나 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었던 순간을 제외하면 머리털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너무 각이 잡혀서 부담스러웠다.
“벌을 내리려고 부른 게 아닙니다.”
“주군의 뜻대로 하십시오.”
“샨이요?”
“이제는 루가 님이 저의 주군이십니다.”
라카인이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투이나는 몹시 당황했다.
“언제부터요? 아니, 저는 사람 안 받아요!”
“받으셨습니다.”
너무 확신에 찬 목소리라 순간 그랬나? 하고 넘어갈 뻔했다.
화들짝 놀란 투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해를 했네요. 샨은 라카인의 처분만 내게 넘긴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여 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투이나가 기겁했다.
“제가 왜 라카인을 죽여요?”
“실수를 해 귀하신 몸에 상처를 냈으며, 주군이 감추고자 하는 비밀을 미천한 신분으로 알았으니, 이제 죽음으로써 영원히 입을 다물어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라카인은 차분히 자신이 죽을 이유를 읊었다.
누가 보면 상을 달라고 하나 오해할 만큼 열정적인 말투였다.
‘연습했나? 어떻게 더듬지도 않아?’
하룻밤 갇혀 있던 동안 저 말만 연습했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처음부터 라카인을 구박했던 사제마저 굳이 저렇게까지? 하는 얼굴이 되었다.
투이나가 지나가는 말로 한탄했다.
“라카인, 여긴 사람 죽일 도구도 없어요.”
“알겠습니다.”
라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대답을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한 순간 바닥이 쿵 울리며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라카인이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악!”
“꺄악! 피, 피!”
“마, 말려요!”
투이나가 소리치며 뛰어갔다.
무사제들도 혼비백산했다.
신전 바닥은 말 그대로 돌덩이다. 그럼에도 두 번째 돌격을 준비하던 라카인이 강제로 어깨를 붙잡혔다.
“이봐, 진정해!”
무사제들이 아무리 붙잡아도 라카인은 바닥에 몸을 던지려고 들었다.
이마에서 두 줄기 피가 흘렀다.
숨도 못 쉬게 놀란 투이나가 다급히 한 손으로 라카인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제야 그가 동작을 뚝 멈췄다.
“왜 이래요!”
“죄송합니다, 루가 님.”
라카인이 희번덕한 눈동자로 말했다.
“제 힘이 부족하여 한 방에 가지 못했습니다.”
번들거리는 눈이 진심이라 기가 막힌 투이나가 잡았던 그대로 밀어 입을 막아 버렸다.
“라카인은 일단…… 일단 말하지 마요. 사제님?”
벙쪄 있던 사제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치료 좀 해 주세요.”
“허, 참……. 아르힘께서 이 야만인의 머릿속까지 고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사제는 몇 번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제의 치료가 닿자 라카인은 바로 나아 버려 원통하다는 기색을 잠깐 보였다.
코앞에서 그걸 목격한 투이나는 대체 이 외국인을 어쩌면 좋을까 깊이 고민했다.
‘아르파에선 인신 공양을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설마 이런 식은 아니겠지? 아냐. 절대 안 돼.’
투이나가 서둘러 끔찍한 추측을 접었다.
“죽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을게요.”
입이 막힌 라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라도 끄덕여 주지.’
투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나 때문에 죽을 생각은 아니잖아요?”
반갑지 않게도 고개가 열심히 끄덕여졌다.
은근히 부아가 난 투이나가 실망스럽게 말했다.
“자꾸 죽으려 들면 샨이 정말로 날 일부러 다치게 했다고 믿겠어요. 증인이 사라지면 들키지 않을 테니까. 샨이 사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당신에게 죽으라고 시켰다면 벌써 실패한 거예요.”
라카인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그러니 이대로 죽으면 저나 샨, 양쪽에 죄를 짓는 겁니다.”
투이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라카인도 그랬다.
잠시 후 전부 이해했는지 라카인이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고요?”
“…….”
“좋아요. 죽으면 이번에야말로 죄를 묻겠어요.”
투이나가 앞뒤가 안 맞는 경고를 했다.
라카인은 얌전히 턱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혹시라도 정말 죽어 버리면 아르힘 님께 부탁드려서라도 영혼을 잡아오겠어.’
속으로 기도한 투이나가 살며시 손을 떼었다. 다행히 조금 우울해 보이긴 해도 라카인은 얌전했다.
‘휴우…….’
한숨 돌린 투이나가 그 자리에 무릎을 접어 앉았다.
루가의 체통이고 뭐고.
투이나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누군가를 위하고 싶으면 다른 방법을 좀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라카인이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묵직한 겨울 사나이처럼 생겨서 저런 표정으로 대답하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핏자국도 그대로잖아.’
까만 머리카락에 슬슬 피가 말라붙기 시작해서 그의 생김새가 더 흉흉해 보였다.
투이나가 물었다.
“활시위가 원래 잘 끊어지는 물건이에요?”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줄을 바꿨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단숨에 시위를 끊어 버릴 만큼 힘이 셀 리는 없잖아요.”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라카인은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저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잘리지 않고서야 그렇게 단숨에 끊기기는 어렵습니다. 잘린 줄을 본다면 더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의 활은 샨의 거처에 그대로 두고 왔다.
투이나가 회의적으로 물었다.
“샨이 보여 줄까요?”
라카인은 침묵했다.
하긴.
한숨을 쉰 투이나가 대화를 넘겼다.
“아무튼 너무 성급했어요. 어차피 저도 라카인을 그냥 보낼 생각은 없었다고요.”
“그 말씀은……?”
“죽어서까지 입을 막을 필요는 없지만, 제 병이 알릴 수 없는 비밀인 건 맞아요.”
투이나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니 굳이 샨에게 돌려보낼 필요가 없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제게 힘을 빌려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라카인의 표정이 묘하게 침울해 보였다.
역시 하루아침에 섬기던 사람을 잃으면 쉽지 않겠지.
‘샨이 내친 거나 다름없으니…….’
투이나가 위로하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그래도 계속 가둬 두진 않을 거니까.”
“예?”
대답은 라카인 대신 날아왔다.
“루가 님! 설마 저 아르파인을 계속 데리고 다니시려고요?”
“네.”
투이나가 가볍게 대답했다.
“본인 잘못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안 그래도 구혼자들 때문에 신전의 인력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고작 한 명 때문에 감시를 늘리다니요.”
투이나를 말리려다 엉겁결에 내부의 상황까지 털어놓은 무사제가 얼굴을 확 구겼다.
라카인은 못 들은 척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게다가 샨이 처분하라 했던 하인이 멀쩡한 걸 알면 다시 돌려 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맞아요!”
“그때야말로 비밀이 새어 나가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부디 신중하게 여겨 주소서.”
항의가 앞다투어 들어왔다.
그러자 투이나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르파인의 뛰어난 무술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호위로 쓰기로 했다 알리세요. 샨에게 보내는 신뢰의 표현도 되니 아마 좋아할 겁니다.”
“예?”
그녀의 선언에 사제들이 뒷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안, 아니 됩니다!”
“루가 님의 호위로 저런 자로 뽑다니요?”
“이미 루가 님의 안전은 저희가 지키고 있습니다! 설마 신전의 무사제들을 믿지 못하십니까?”
“믿어요. 하지만 방금 직접 인력이 부족하다고 하셨잖아요.”
투이나가 덧붙였다.
“이번 사고로 확실히 제 곁에 붙어 있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다고 이미 과중한 임무를 수행 중인 무사제님들을 괴롭히고 싶지도 않고요.”
“하지만…….”
“물론 라카인만 제 호위가 되진 않을 거예요. 견습 무사제님들 중에 시험을 치러 몇 명을 더 뽑을 생각입니다. 교대로 호위를 맡으면 될 거예요.”
사제들이 곰곰이 투이나의 제안을 따졌다.
“아주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만…….”
“저자의 실력은 확실한 겁니까?”
“여기서 가장 뛰어납니다.”
내내 조용하던 라카인이 냉큼 끼어들었다.
본인 입으로 한 칭찬에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투이나가 애매하게 동의했다.
“음, 아까 무사제님들도 제압이 어려우셨으니…….”
살짝 운만 띄웠는데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알아들었다.
무사제 두 명이 양쪽에서 어깨를 붙잡았는데도 바닥에 머리를 박으려는 라카인에게 질질 끌려갔던 것이다.
게다가 아르파인답게 라카인은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덩치가 있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무사제들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약간 미안해진 투이나가 그들을 달랬다.
“어제 일로 이미 지쳤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여러분의 건강이 걱정스러워요.”
“……염려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무사제들이 푹 고개를 숙였다.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넸다.
“괜찮다면 호위를 뽑는 시험에도 나와 줄래요? 분명히 제가 모르는 여러 가지를 짚어 주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물론입니다!”
투이나의 전담 무사제가 호기롭게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사제가 끙, 하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무사제들 본인이 저리 수긍해 버렸으니 꼼짝없이 호위를 뽑는 걸로 결정이 난 셈이었다.
일이 착착 진행되어 갔다.
투이나는 확인차 다시 물었다.
“라카인, 제 호위가 되어 줄 거죠?”
“예.”
대답이 너무 빠르다.
투이나는 좀 더 신중하라고 조언할까 하다가 관뒀다.
괜히 거절하면 자신만 곤란해진다.
‘다행이야.’
남몰래 투이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그녀에겐 라카인을 필히 호위로 두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샨의 측근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도 투이나는 샨이 직접 말하지 않으면 그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과거에는 그저 결혼이었으나 지금은 살인자를 찾아야 했다.
그녀에겐 라카인이 가진 정보가 절실했다.
‘그리고 정말 호위가 필요하긴 해.’
이번 사고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등을 지켜 주려면 정말로 가까워야 했다. 달려갈 필요가 없을 만큼. 얼굴만 봐도 안심할 수 있게.
그래서 투이나는 이번 기회에 완전히 자기 편이 되어 줄 사람을 뽑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투이나가 무심코 명치 부분을 문질렀다.
신에게 사랑받는 건 고귀한 명예지만 어딘가 외로운 구석이 있었다.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라카인이 첫 번째 호위가 되는 건 여러 가지로 기쁜 일이다.
투이나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배어나왔다.
“고마워요, 라카인. 과정은 좀 복잡했지만,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라카인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이 조금 늦게 흘러나왔다.
“당연히…… 따를 것입니다. 하겠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또 머리를 박는 줄 알고 움찔했던 사람들이 굳건하게 위쪽에 고정된 목을 보고 진정했다.
신에게 기도하듯 라카인이 깍지를 끼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제 저는 주군을 지키는 한 자루의 검이 되어 평생 녹슬지 않는 인생을 살겠습니다. 다가오는 자를 적대하고 떨어지는 자를 경계하겠습니다.”
투이나는 당황했다. 라카인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렸던 것이다.
다만 그의 손만이 꼿꼿하게 위로 들렸다.
“이제 저의 검집이 떨어져 나갔으니 베이지 않고 저를 휘두를 자, 오직 주군뿐입니다.”
본격적인 맹세를 받을 줄 몰랐던 투이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당황한 건 비슷비슷했다.
면담을 기록하는 사제만 흥미를 잔뜩 드러내면서 펜을 정신없이 휘갈겨댈 뿐이다.
‘아르파의 의식인가 봐.’
당황한 반응 속에서도 라카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투이나가 받기 과분하다 느낄 만큼 경건한 태도였다.
새까만 머리카락 위로 솟은 깍지가 바위에 꽂힌 검 같았다.
‘나는…… 그를 믿나?’
망설이던 투이나가 살짝 그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영광이에요.”
깍지 낀 손이 움찔하더니 쑥 내려갔다.
라카인이 벌떡 일어서자 반쯤 홀린 듯이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제야 최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사제가 헛기침을 했다.
“흠, 흠, 루가 님 하시는 일이니 당분간은 두고 보겠습니다.”
“쓸모가 있다면 밝혀지겠지요.”
아직까지 다들 반신반의했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
투이나가 말했다.
“그럼 호위 문제는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사제들이 고개를 숙였다.
호위 문제를 결정하자 주제는 선발 방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호위를 뽑으실 생각입니까?”
펜대를 굴리던 사제가 물었다.
“글쎄요. 각자 자신 있는 분야가 다르지 않나요? 제가 무술을 익힌 것도 아니지만…….”
투이나가 고민했다.
“호위를 하려면 아무래도 검이나 창을 잘 쓰는 자가 좋겠죠.”
“맨손 격투도 봐야 하지 않습니까?”
“수상한 자를 알아보는 안목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절이 바르고 루가 님의 위엄에 거슬리면 아니 됩니다.”
갑자기 따지는 조건이 늘어났다.
라카인에 대한 일이 번개처럼 결정된 바람에 다음 사람을 뽑는 데 예민해진 것이다.
“하루 만에 그걸 다 확인하려고요?”
“일일이는 불가능하지요.”
“시험을 치러야겠군요.”
“호위는 당장 뽑아야 합니다. 오래 미룰 수 없어요.”
사제들이 라카인을 흘끔거렸다.
그러나 투이나의 말이 아니라면 라카인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제들도 대부분 책상물림이라 비슷비슷하게 허약했다. 몸 쓰는 일은 잘 모른다는 소리다.
궁리하던 사제들이 무사제에게 화살을 돌렸다.
“자네들은 뭐 좋은 생각 없나?”
“……대련은 어떠십니까?”
무사제가 용기를 내어 제안했다. 사제들이 바로 격파했다.
“너무 무난해.”
“신전에서 싸움이라니요.”
“차라리 검으로 나무라도 베어 보는 게 낫겠습니다.”
“그게 가능한 것이었습니까?”
“시켜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굉장하군요.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사람이 모이면 그렇듯이 내용이 점점 산으로 갔다.
투이나가 일자로 다문 입을 꼬물거렸다.
“정하기 어려우면 차라리 제가 시험을 준비할까요?”
“루가 님이요?”
뜻밖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칼 한번 잡아 보지도 못한 사람이 호위를 뽑는 시험을 준비한다니.
미심쩍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곧 투이나가 제안을 설명하자 그럭저럭 납득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괜찮겠군요.”
“취지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네.”
의자가 동시에 끌렸다.
회의가 끝난 것이다.
사제들이 착착 물건을 정리해 나갈 준비를 했다.
무사제들은 라카인을 다시 감금하려다 멈칫했다.
라카인이 멀뚱멀뚱 투이나의 곁에 서 있기만 하고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당장이라도 끌고 가고 싶은 표정을 짓던 무사제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루가 님.”
“네?”
“저자를 호위로 삼으셨다지만, 아직 다른 호위들이 없으니 일단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시할 사람도 없는데 저놈을 뭘 믿고 곁에 두신답니까, 하는 뒷말은 생략되었다.
“아아…….”
투이나가 깨달음과 이해가 섞인 감탄사를 흘렸다.
라카인은 단순명료하게 주장했다.
“못 갑니다.”
“뭐라고?”
“새 호위는 내일 뽑는데, 제가 자리를 비우면 지킬 자가 없습니다.”
“없기는 왜 없나! 여기 있는 자 모두 루가 님을 모시기 위해 있거늘!”
“네놈이 있기 전에도 루가 님은 우리가 잘 지켰다.”
라카인은 대답 대신 흘긋 투이나의 어깨를 곁눈질했다.
‘잘 지킨 꼴이 저거입니까?’ 하는 무언의 질책을 알아차린 무사제의 눈이 뒤집혔다.
“아니, 지금 누구 때문에 저 상처가 났는데!”
“저 분수도 모르는 자가!”
“감히 우리를 모욕해?”
격분한 무사제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단숨에 제압되는 일은 없었다.
이번엔 반격한 라카인이 어깨 밑을 쳐올리자 몸이 붕 떠서 뒤집혔던 것이다.
“어, 어……!”
“라카인!”
투이나가 소리치자 그대로 넘겨 버리려던 라카인이 곧장 허리를 폈다.
덕분에 무사제는 꼴사납게 날아가는 건 피했지만 팔이 꺾인 채 라카인의 등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아악! 놔라!”
수치스러운지 무사제의 발이 바동거렸다. 그의 키가 좀 작았다.
“놓아 주세요!”
“루가 님께 다가오는 자는 모두 적입니다.”
“제 편이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호위를 없애야 목표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쉽고, 어제의 친분은 오늘의 적이 됩니다. 누구든 방심할 수 없습니다.”
“이놈, 누가 누굴 의심해! 방금 루가 님께 충성을 바친 놈이! 염치도 모르나!”
무사제가 욕을 퍼부었으나 라카인은 완고했다.
쓸데없이 신빙성이 높은 말에 투이나가 웃음을 깍 깨물었다.
“아르힘 님의 신전에서는 사고가 흔하게 일어나지 않아요. 그분도 저를 해칠 이유가 없고요.”
신의 이름을 들은 라카인이 움찔했다.
마지못해 그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렇다면 주군의 거처 밖에서 보초를 서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서는 건 좋지만 무리하면 안 됩니다. 모든 일이 다 끝나면 라카인도 다시 보내 줄 테니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구요.”
“…….”
“그리고…… 무사제님도 좀 놓아 주세요.”
이 말은 냉큼 잘 들었다.
어이쿠!
떨어진 무사제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원망스럽게 라카인을 노려보았지만 라카인은 놓자마자 그를 잊어버렸다.
‘서로 사이가 좋아지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사제들 사이에 낀 라카인은 호박 속의 오이처럼 혼자 뾰족하게 톡 튀었다.
‘그래도 무사제님이 고생할 일은 줄어들 테니 그나마 다행이다.’
시간이 진정시켜 주길 바라며 투이나가 상황을 마무리했다.
“이제 됐죠? 더 문제 될 게 있다면 다음 면담 때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쉬십시오, 루가 님.”
내심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비로소 빠져나갔다. 엉덩이를 문지르는 무사제는 특히 발소리가 컸다.
“따라 나오질 않고 뭣 해!”
그의 성화에 라카인까지 무사히 방에서 내쫓겼다.
‘한 고비 넘겼네.’
완전히 지쳐 버린 투이나가 다리를 뻗었다. 열심히 라카인을 데리고 있을 방법을 고민한 보람이 있었다.
무사제가 워낙 걱정하긴 했지만, 투이나는 라카인을 호위로 들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실력도 좋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아직 무슨 생각인진 잘 모르겠지만…….’
무사제들은 각자 맡은 업무가 있어서 계속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교대로 호위를 맡아도 피곤함을 감출 수 없었으니.
윤곽을 잡았다고 생각한 범인이 다시 흩어져 버린 만큼 등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중에 아르힘과 만날 때 호위 얘기를 할까 했는데, 다행히 혼자 힘으로 잘 처리가 되었다.
‘아르힘 님이 기뻐하실까?’
투이나가 배시시 웃었다.
시종이 다가왔다.
“뭐가 그리 좋으세요?”
“일이 잘 끝나서요.”
“잘 끝나긴요. 저는 아까 무사제님이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놀라 죽을 뻔했습니다.”
“설마요. 무사제님도 강하신데.”
“모르는 말씀이죠. 한 명한테 무사제님이 그리 쉽게 당할 정도인데, 모하세스의 나머지 하인들은 어느 정도겠어요? 하아, 걱정 또 걱정입니다.”
“부디 아르힘 님이 불쌍한 저희를 돌봐 주셔야 하는데…….”
“차라리 루가 님의 호위에 아르파인이 있어서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싸움은 잘하더군요.”
“그럼요. 그럼요.”
투이나의 마지막 대답에 시종이 허리를 짚었다.
“하여간 루가 님도 참 긍정적이시라니까. 아직 웃고 계실 때 상처나 한번 볼까요?”
“앗, 네!”
시종이 소매를 걷었다.
투이나는 얌전히 어깨를 내주었다.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는 손길이 느껴질 때마다 투이나가 끙, 하고 입술을 눌렀다.
검은 실로 꿰맨 흉터와 얼룩이 합쳐진 몰골은 좋진 않았다. 벌레가 빨아먹은 나뭇잎 같았으니.
간질거리는 느낌을 참으려고 투이나가 다른 생각에 집중했다.
‘아르힘 님을 뵈면 왜 이 상처는 사제님들의 힘으로 낫질 않는지 물어봐야지.’
물론 먼저 내일 시험에서 뛰어난 호위부터 찾아봐야겠지만.
* * *
다행히 다음 날은 쨍하니 화창했다.
시험 장소가 마땅치 않아 평소에 화장터로 쓴 공터가 급히 치워졌다.
시험에 대한 이야기는 잘 전달이 되었는지 투이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무리의 견습 무사제들이 보였다.
대부분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가까이에서 루가를 본 적도 없었다. 신전 외곽에 마련된 숙소에서 수도와 무예에만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문은 들을 수 있었고, 소문의 인물이 가까워지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루가 님이셔!”
“정말로 우리 또래시잖아……?”
“루가 님이 오셨으니 어쩌면 아르힘 님께서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지 모르겠어.”
열띤 속닥거림이 여기까지 들렸다.
그들을 가르치는 무사제가 엄격하게 소리쳤다.
“일동 엄숙!”
곧바로 견습 무사제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눈빛이 예리해졌고, 자세도 바로잡아졌다.
제법 훈련받아 온 티가 났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분. 분명 지금 몹시 불안하고 떨리는 분도 있을 거예요.”
투이나가 꾸밈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슴을 펴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리라 믿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루가 님이 내리는 시험의 장이시니 열과 성을 다하도록!”
참관하러 온 사제가 목소리를 더했다.
“영광으로 받들겠습니다!”
함성이 우렁찼다.
투이나가 시험 내용을 설명했다.
“여러분은 공격 조와 방어 조로 나뉠 거예요. 시험 기회는 한 사람당 한 번입니다. 공격과 방어 중 성공한 분만 남아서 다음 시험을 기다려 주세요.”
“시험 내용은 무엇입니까?”
“저거요.”
투이나가 쌓인 장작을 가리켰다. 미리 준비해 둔 물건이었다.
한쪽 벽면에 다섯 개가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높이가 사람의 가슴 위치와 비슷했다.
시종이 외쳤다.
“두 사람씩 짝지어 서십시오!”
견습 무사제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금세 다섯 쌍의 줄이 만들어졌다.
장작 옆쪽에는 미리 창고에서 꺼내놓은 무기들이 있었다.
무기 앞에 서 있던 시종이 가장 앞줄로 다가갔다.
“두 사람씩 나와 자신 있는 무기를 고르세요. 먼저 집은 자가 공격을 맡습니다.”
무기 앞에 선 견습 무사제들이 망설였다. 공격과 방어 중에 어떤 것이 더 유리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호위를 뽑는 것이니 언뜻 방어가 유리해 보이긴 한데.
주저하던 한 사람이 물었다.
“루가 님, 공격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걸 원하시는 겁니까?”
“여러분은 이제 눈앞의 나무 장작을 암살하고 호위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투이나가 차분히 대답했다.
“공격 조는 장작에 상처만 입혀도 성공입니다. 방어 조는 그걸 막기만 하면 통과예요. 하지만 서로 무기가 부딪칠 기회는 딱 한 번뿐입니다.”
잠깐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공격이 유리하리라.
망설이던 견습 무사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무기로 뛰어들었다. 각자 선호하는 무기가 이미 있었으니.
심판을 맡은 무사제가 무기를 잡은 이들을 서로 마주 보게 시켰다. 방어 조가 등으로 장작을 가리고 섰다.
“준비가 되면 공격해라.”
서로를 살피던 다섯 쌍의 견습 무사제가 기합과 함께 돌격했다.
“하압!”
따다닥!
무기들이 한꺼번에 맞부딪쳤다. 짧은 순간에 합이 가려졌다. 두어 개의 장작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사제가 돌아다니며 나무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다음!”
한 호흡 만에 시험이 끝났다.
각각 공격과 방어에 성공한 견습 무사제들이 교대했다. 각자 아쉬움과 성공했다는 흥분이 역력했다.
투이나는 장작이 떨어지고 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히 가슴이 쿵쿵거렸다.
이 시험은 매 순간이 자신이 살해당하던 장면의 반복이었으니까.
‘그래도 직접 보니까 훨씬 견딜 만하다.’
시험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왜 호위를 뽑으려 하는지 기억하기만 하면 되니까.
어떤 상황이 닥치든 자신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
지원자들도 지나칠 만큼 열심히 시험을 치러 주었다.
이상하게도 투이나는 모두가 노력하는데도 시험을 지켜보면서 약간 속이 거북했다.
투이나가 영문을 모르고 가슴을 두드렸다.
‘아…….’
답답함이 가셨다.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날 찌를 때도 저렇게 망설임이 없었겠구나.’
투이나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공격과 방어 둘 다 똑같이 주저하지 않는데도 목적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믿어야 해.’
믿지 않고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
투이나는 다시 시험에 집중했다.
그녀의 눈으로는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으로도 버거웠다. 공격하는 사람이 땅을 박차면 어느새 검을 놓치거나 장작이 쓰러져 있거나 했다.
삶과 죽음은 정말 한순간이다.
시종은 부지런히 박살난 장작을 화장터로 날랐다.
부서진 채로 던져지는 장작을 보니 머릿속에서 번져 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참, 내 시체는 어떻게 했을까?’
만약 아르힘이 살려 주지 않았다면 투이나의 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신랑이 되리란 기대에 찬 구혼자가 제일 먼저 싸늘한 신부를 발견했을 거다.
‘으아……. 더 끔찍하네.’
결혼 전이니 장례는 아르힘 식으로 치러졌을 터였다.
루가의 장례는 아직 법도가 없었다.
아르힘 식 장례에서 부유한 자는 방문객들을 초청해 슬픔을 잊는 잔치를 벌였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깨끗한 천에 말아 태웠다.
투이나도 그렇게 몇 명의 가족을 아르힘의 품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신전에서는 함부로 시체를 내보내지 않는다던데. 어쩌면 여기서 태워졌을 수도 있겠지.’
꽤 슬픈 짐작이다.
투이나는 잠시 시험에서 벗어나 수북하게 쌓인 잿더미를 응시했다.
자신이 지닌 얼룩과 똑같은 색이었다.
“으악!”
그때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비명이 들렸다.
투이나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창을 든 한 여자와 바닥에 넘어진 남자가 보였다.
투이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일이죠?”
“시험을 치르는 중에 저를 공격했습니다!”
넘어져 있던 견습 무사제가 급히 일어섰다. 창을 들고 선 쪽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그녀가 잔뜩 긴장한 채 말했다.
“시험의 내용은 공격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공격했고, 저는 막았습니다.”
“하지만 무기가 아니라 저를 직접 타격했습니다!”
공격을 맡은 이가 항변했다.
듣자하니 시험의 내용을 다르게 이해해서 발생한 사고 같았다.
“어찌할까요.”
사람들이 사제들과 투이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공격자를 쓰러트린 방어자는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반응에 점점 더 안색이 나빠졌다.
들고 있던 창이 잘게 떨렸다.
‘가여워라…….’
물론 시험이니만큼 감정이 앞설 순 없었다.
투이나가 얼른 물었다.
“이름이 뭔가요?”
“호루니입니다.”
그녀가 여전히 태연하려 애쓰며 답했다.
“쓰러지신 분은요?”
“스카차입니다.”
“호루니가 방어하기 전에 확실히 공격했나요?”
“그건…….”
스카차가 주춤했다.
순간 답변하려던 그의 눈동자로 복잡한 감정이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더니 입술을 깨문 스카차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때 발이 하나 앞서긴 했습니다.”
“저것도 공격에 해당하나요?”
투이나가 물었다.
그러자 무사제가 답했다.
“상황이 상황이니 돌입부터 공격으로 간주할 수는 있습니다. 어쨌든 목표와 거리가 가까우니까요. 조금 빠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말입니다.”
마지막 문장에 호루니가 움찔했다.
투이나가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호루니가 옳겠네요. 조건은 공격과 방어뿐이었고, 그녀는 성공했으니 다음 시험을 치를 자격이 있습니다.”
호루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상대편은 꽤 억울해 보였으나 루가의 말이니 순순히 따랐다.
두 사람이 공손히 각자의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아까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진 뒤였다.
서로를 향한 공격이 허용된 걸 알았으니 장작에 달려들기 전에 더 많은 견제를 거쳐야 했다.
대련을 반대했던 사제는 팽팽해진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투이나는 아무도 다치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혹시 사고가 나도 사제님이 계신 데다 상대방을 직접 공격하는 것도 아니니까 큰 부상은 없을 거야.’
게다가 실제로 호위를 설 때를 생각해 보면 선제공격도 나쁘지 않았다.
라카인은 좀 과한 편이지만.
시험의 목적에 따라 호루니는 제대로 판단했을 뿐이다.
통과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간 호루니가 땀에 젖은 팔을 닦았다.
표정에서 안도감과 은은한 성취감이 묻어나왔다.
다행히 첫 시험이 거의 끝나 갈 때쯤에 벌어진 일이라 분위기가 심하게 과열되진 않았다.
“졌습니다.”
마지막 시험을 치른 두 사람이 무기를 내렸다.
깔끔하게 절반이 줄어들었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다른 분들은 가도 좋아요.”
“예.”
“만나 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다음 시험은 어떻게 치러지나요?”
한차례 땀을 흘려서 그런지 다들 기세가 좋았다.
투이나의 제안은 처음 무예 부분까지라 뒤는 사제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제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의 뒤로 심상치 않은 길이의 양피지가 쌓여 있었다.
“헉.”
“저게 다 뭐야?”
1차 통과자들이 웅성거렸다.
딱 봐도 단순히 몸 쓰는 문제가 아니었다.
투이나도 갓 신전에 들어왔을 때 엄하게 가르치던 사제들이 떠올라 괜히 불안해졌다.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베껴 쓰던 손목이 아팠다.
‘살살 내셔야 할 텐데…….’
불길하게도 밤새 문제를 준비한 사제의 눈 밑이 퀭했다.
그녀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두 번째 시험은……!”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사제가 야심차게 문제를 털어놓으려는 순간 양피지에 휙 재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공들여 쓴 문제가 안 보일세라 사제가 얼른 입으로 재를 훅 불었다.
그러나 양피지에서 재가 날아가기 무섭게 까만 가루가 두 배로 도로 붙었다.
황당해진 사제가 팔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막았다.
“아니, 이게 무슨…….”
“저기 좀 봐요!”
사람들이 소리친 쪽을 바라보았다.
화장터에 쌓여 있던 잿더미였다.
누가 억지로 걷어찬 것처럼 확 검은 가루가 치솟았다.
꽉꽉 눌러 뒀던 재는 바람을 타자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에, 퉷! 갑자기 웬 재야?”
“루가 님……! 콜록! 이쪽으로 피하세요!”
“아뇨, 괜찮…….”
‘……아요!’ 하고 소리치려던 투이나의 목구멍으로 가루가 정확하게 꽂혔다.
“컥!”
기침을 하느라 투이나는 사람들을 진정시킬 틈을 놓쳤다. 사실 화장터에는 피할 만한 곳도 없었다.
‘바람만 가라앉으면 되는데!’
피부에 난 구멍으로 돌진하는 매캐한 가루 때문에 사람들이 마구 팔을 휘저었다.
어깨를 다쳐서 상체 거동이 불편한 투이나만 막지 못하고 고스란히 재를 다 맞게 생겼다.
그때 허리를 숙인 투이나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가 막겠습니다.”
“라카인?”
투이나가 재가 섞인 쇳소리를 냈다.
반드시 무사제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라카인도 오늘 호위로 따라오는 게 허락되었다.
어젯밤 그는 밤을 새워 가면서 투이나의 방문 앞을 지켰다.
성의를 봐서라도 인정해 달라는 투이나의 말에 무사제들이 넘어가 주었던 것이다.
투이나에게 맹세를 한 이후로 라카인은 놀라울 정도로 확고한 충성심을 보였다.
보통 강한 충성심은 한 사람을 향할 때만 나오는 것.
그래서 주인이 바뀐 뒤에도 변함이 없는 라카인의 모습을 의아해하는 자들이 많았다.
‘사실 나도 그래.’
라카인은 지나치게 순종적이었다.
같이 시험장에 갈 때도 얌전히 뒤에서 따라오기만 할 뿐, 피곤한 기색을 하나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랬던 사람이 이런 일에도 선뜻 나서는 걸 보니 신기하다.
라카인이 비장하게 팔을 벌렸다.
“제 뒤에 계십시오.”
‘앗, 비장해질 필요까진 없는데…….’
투이나가 엉거주춤 고개를 들었다.
필요하다면 몸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지키겠다는 듯한 모습이 제법 웅장하기까지 했다.
이 순간이 너무 기묘하게 느껴져 투이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고작해야 바람에 날리는 재일 뿐이건만.
“콜록! 켁, 켁…….”
“어흠, 크험!”
곧 사람들의 기침보다 먼저 풀풀 날리던 가루가 가라앉았다.
애초에 잿더미를 날려 버린 어떤 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심해질 이유가 없었다.
거세게 콜록거리며 무사제가 소란의 원인으로 다가갔다.
나풀거리는 까만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콜록! 거기 누구냐?”
무사제가 앞을 휘저었다. 그러자 누군가의 팔꿈치가 잡혀 끌려나왔다.
뜻밖의 인물에 무사제가 눈썹을 휘었다.
“스카차?”
“무……사제님.”
화들짝 놀란 그가 엉거주춤 돌아보았다.
‘아까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이잖아?’
놀란 투이나가 라카인의 허리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빼꼼 나온 머리를 본 라카인이 흠칫하더니 양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 부근을 가려 주었다.
무사제가 소리쳤다.
“자네 여기서 뭣 하는 건가!”
“수상한 자를 봤습니다. 그런데…….”
스카차는 곰덫에 치인 사람처럼 꼼짝을 못 했다.
스카차가 보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무사제가 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검은 물체가 길쭉하게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다.
괴이한 생물체에 놀란 무사제가 본능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무기를 보고도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체를 밝혀라!”
무사제가 용기를 내 검을 내밀었다.
검 끝이 점점 가까워지는데도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저 새까만 것이 움직이면 더 오싹할 것 같았다.
“밝히라니까!”
당황한 무사제가 검을 내질렀다.
검 끝이 까만 물체 사이를 그대로 쑥 가르고 들어갔다.
“……!”
“이게 무슨……!”
“또 잘못 나왔군요.”
고통스러운 비명 대신 무미건조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이 상황, 저 목소리.
귀에 지나치게 익숙하다.
‘잠깐만?’
투이나가 의심스럽게 불렀다.
“시드룬……?”
“안녕하십니까, 루가.”
검은 물체의 양쪽이 갈라지더니 투이나를 향해 한 팔을 들어 올렸다.
까맣게 재를 뒤집어쓴 시드룬이 인사한 것이다.
긴장이 탁 풀렸다.
대신 강한 어이없음이 밀려왔다.
“왜 그러고 있어요?”
“당신을 만나러 온 겁니다.”
‘그 꼴로?’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시드룬이 움직이자 비로소 까만 것이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까지 시드룬의 몸에 검을 찔러 넣고 있다는 걸 깨달은 무사제가 황급히 손을 잡아당겼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스카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질린 얼굴로 굳어 있다가 시드룬이 움직이자 간신히 옆으로 비켰다.
‘대체 어디에 찔린 거지?’
투이나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살펴도 시드룬이 다쳤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무사제가 무릎을 꿇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
시드룬이 멍하니 그를 지나쳤다.
누구에게 무례한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시드룬이 어둠에서 빠져나와 걷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저주받았다는 악명에 너무도 걸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 한 명, 막아서는 자가 있었다.
“멈추십시오.”
라카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라카인만이 그나마 시드룬과 눈높이가 비슷했다.
가깝게 서 있는 투이나에게만 그의 긴장이 느껴졌다.
유일하게 까만색에 침범당하지 않은 연보라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라카인 뒤의 투이나를 향해서.
명령에는 잘 따르는 시드룬이 더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만날 차례입니다.”
“……네?”
“어제 일정이 취소되었으니까요.”
시드룬이 설명을 곁들였다.
‘설마 일정을 미룬다는 얘기를 딱 하루로 받아들인 거야?’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챈 투이나가 되물었다.
“당분간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면서요?”
“그래서 어제 만나지 않았습니다.”
시드룬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당분간의 기준이 마법사치고도 몹시 낮았다.
“저는 그것보단 긴 기간을 얘기한 거예요.”
시드룬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투이나가 자신을 만날 수 없는지 가늠해보는 모양새였다.
“멀쩡해 보입니다.”
“시드룬은 안 그래 보여요.”
투이나가 반쯤 농담으로 대꾸했다.
시드룬은 겉은 까맣고 속은 보라색인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줌 내려다보았다.
성의 없는 손짓이 툭툭 머리카락을 털었다.
저 힘으로는 턴 손자국도 안 남겠다.
투이나가 한숨을 쉬었다.
“이리 와요.”
“제가 털겠습니다.”
대화를 듣던 라카인이 말했다.
곧장 손바닥을 쫙 펼치는 게 적극적이긴 했으나…….
시드룬은 희미하게 찡그리며 투이나 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한테 받겠다는 의지가 아주 확실했다.
투이나는 한 손으로 재빨리 시드룬의 머리를 털었다. 머리 감기보다는 빨래하던 실력에 가깝긴 했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끼워 위에서 아래로 흔들던 투이나가 대충 재를 걷어냈을 쯤이었다.
곁눈으로 계속 투이나의 손을 쫓아다니던 시드룬이 길고 마디가 진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지가 손날을 툭 건드렸다.
“여기 얼룩이 있습니다.”
“네?!”
시드룬이 닿자마자 불에 덴 듯이 놀란 투이나가 손을 확 잡아 뺐다.
너무 급하게 빼는 바람에 애꿎은 시드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희생당했다.
‘갑자기 무슨 뜻이야?’
심장이 쿵쾅거렸다.
당황한 투이나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지만 시드룬은 뽑힌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알고서 한 소리는 아니겠지? 아닐 텐데…….’
투이나가 어쩔 줄 모르고 가슴팍에 손을 강하게 눌러 숨겼다. 긴장이 흘렀다.
시드룬은 사람 속이 터질 만큼 느리게 다시 시선을 맞췄다.
“왜 멈췄습니까?”
“…….”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었기에 그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사제들은 설마 이틀 만에 병을 들켰을까 봐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까지 불안해하면 안 돼…….’
그들을 본 투이나가 간신히 호흡을 눌러 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요.”
평정심을 되찾은 투이나가 말했다.
그녀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시드룬,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구혼자에서 당신을 빼겠어요.”
“……!”
처음으로 시드룬에게서 표정 변화가 나타났다.
의아함과 난감함이 스치는 눈을 투이나가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런 일은 무엇입니까?”
“허락 없이 저를 찾아오는 일, 아르힘 님을 뵈러 가는 일, 몰래 저를 엿보거나 함부로 마법을 쓰거나 하는 일 전부요.”
투이나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시종들은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닌 지 눈치를 보았다.
시드룬이 잠시 뜸을 들였다.
“외웠습니다.”
“잘했어요.”
투이나의 입에서 습관적으로 칭찬이 튀어나왔다.
‘앗, 이건 아닌데…….’
멋쩍어진 투이나가 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진정하기도 전에 시드룬이 2차 반격을 가했다.
“그럼 당신이 보고 싶어지면 어떡합니까?”
“컥……! 켈록, 켈록!”
“괜찮으십니까?”
귀가 의심되는 말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물도 없이 기침한 목이 쓰라렸다.
시드룬에겐 세상 무감각한 표정으로 애정 표현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죽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진심도 아니면서 저렇게 말하고 다니면 언젠가 큰일 난다고 말해 줄까? 그러면 알아들을까?’
투이나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일정에 맞춰서 부르도록 할게요.”
“어떻게 연락할 생각입니까?”
“평소처럼 시종…….”
“마법을 쓰지 못하면 그가 제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네?”
놀란 투이나가 시종 쪽을 돌아보았다. 겁에 질려 있던 시종이 딸꾹질을 하더니 대답했다.
“네, 네. 그 말이 맞습니다. 루가 님께 전갈을 받고 밖으로 나가면 어느 순간 마법사가 눈앞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전했고요.”
“아하?”
어쩐지 빨리 돌아온다 싶었다.
‘난 또 걸음이 빠르신 줄 알았지.’
시종의 다리를 좀 과하게 믿었던 모양이다.
마법이었다니.
투이나가 재차 확인했다.
“그럼 마법 없이는 지금 머무르는 거처에도 못 돌아가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투이나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
“항상 바로 나타나서 이야기를 들었다면 제 주변을 마법으로 감시하고 있었다는 소리구요?”
“그랬습니다.”
시드룬이 쉽게 인정했다.
그만큼 급격하게 두통이 밀려왔다.
‘아아, 시드룬 제발…….’
환장을 참으며 투이나가 물었다.
“설마 제 방도 들여다봤어요?”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다고 시드룬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그럼 치료할 때 내 얼룩을 본 건 아닌가 봐.’
시드룬이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 계속 신경을 쿡쿡 찔렀다.
‘지금 떠보면 일만 복잡해지겠지.’
환장할 목록을 정리한 투이나가 허리를 짚었다.
“앞으로는 앞서 말한 것들 전부 금지에요. 신전 안에서 허락하는 마법은 딱 하나, 거처로 돌아가는 것만 하겠어요. 그럴 수 있죠?”
왜인지 이번에는 시드룬이 곧장 알았다고 하지 않았다.
시드룬이 투이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보고 싶어지면 어떡합니까.”
말문이 막힐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끄응……. 시드룬의 거처에서도 제가 부르는 걸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어디서든 부를 수 있는 마법이라면 좋겠는데.”
말하면서도 투이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신은 신도들이 하는 기도를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건 모든 수호신이 공통적으로 갖춘 능력이었다.
‘신을 믿지도 않는 시드룬에게 그런 식의 마법을 기대하는 건 너무한 거겠지.’
투이나가 어디까지 마법을 허용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시드룬이 자신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렇다면 이걸 사용하면 됩니다.”
잠시 후 시드룬이 작고 납작한 물건을 꺼냈다.
특별한 마법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던 투이나는 오히려 익숙한 형태라 놀랐다.
‘저건 비늘이잖아?’
물론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비늘에서 보랏빛 윤기가 흘렀다.
시드룬의 머리카락을 녹여 굳히면 저런 색이 나올까.
물고기나 뱀의 비늘이 아니라 차라리 보석에 가까웠다.
시드룬이 비늘을 내밀었다.
“필요할 때 입에 넣고 깨물면 곧장 알 수가 있습니다. 그때 마법을 써서 당신을 만나러 오겠습니다.”
“이걸 입에요?”
투이나가 당혹스러워했다.
시드룬은 그걸 감탄사로 이해했는지 주의를 주었다.
“삼켜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라……. 꼭 깨물어야만 하나 해서요.”
“비늘이 단단해서 깨무는 게 가장 좋습니다. 다른 행동은 별로 효과가 없더군요.”
시드룬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좀 특이한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비늘은 아름다웠다.
마법이 담긴 물건답게 매혹적이기도 하고, 꼭 조개처럼 안이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였다.
‘게다가 과거엔 없던 물건이잖아.’
죽기 전과 달라지는 일이라면 환영이지만, 보기에 예쁜 만큼 속이 보이지 않아 의심스러웠다.
‘근데 내가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저걸 받아야 그나마 시드룬의 마법을 줄일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시드룬이 아무 데서나 튀어나왔다간 그때야말로 심각한 사고가 터지리라.
시드룬은 긴 침묵에도 무던하게 비늘을 들고 기다렸다.
한참 비늘을 쏘아보던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럼 조심해서 쓰도록 할게요.”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루가 님.”
라카인이 두 손 사이를 급하게 가로질렀다.
그가 겁도 없이 마법사인 시드룬에게 지시했다.
“루가 님께 드리기 전에 안전한 물건인지 본인이 먼저 입에 넣어 보십시오.”
라카인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의 요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제 곧 그의 목이 몸과 거창한 작별 인사를 할 것이란 속뜻이 담긴 외침들이었다.
하지만 투이나와 라카인은 둘 다 침착했고, 시드룬은 아무렇지 않게 비늘을 직접 입에 넣어 그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아드득 소리가 났다.
“……이러케 하면 되니다.”
시드룬이 비늘을 깨문 채로 말했다.
발음이 새는데도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투이나가 볼에 힘을 깍 줬다.
“알겠……어요.”
웃지 않으려고 파들파들 떨며 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먹기 싫은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드룬이 비늘을 도로 뱉었다.
“그럼 다음에 사용해 볼게요.”
확인을 마친 투이나가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서 비늘을 집어 가려던 찰나였다.
“루가 님, 더럽습니다.”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라카인이 중간에 가로채 갔다.
“라카인!”
“제대로 씻어서 가져오겠습니다. 원하는 향이 있으십니까? 무슨 향이든 진하게 냄새가 밸 때까지 담금질을 하겠습니다. 루가 님 입에 들어갈 물건이 아닙니까.”
“어, 음……. 괜찮아요.”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가 님에겐 항상 더 좋은 물건, 완벽한 물건이 필요합니다.”
라카인이 진심으로 말했다.
시드룬이 멀뚱히 듣더니 대답했다.
“저것은 더 좋은 것도 없고,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제게 딱 맞는 물건이네요.”
투이나가 샛길로 새려는 대화의 고삐를 잡았다.
“잘 받을게요, 시드룬. 제 얘기에 동의해 줘서 고마워요.”
“필요하다면 따릅니다.”
시드룬이 빈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어딘가 허전한 모양이다.
“가능한 한 빨리 불러 주면 좋겠군요. 나는 오래 기다리기 힘듭니다. 당신을 만나지 않는 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
마지막 말에 투이나의 낯이 뜨거워졌다. 시드룬이 하는 말들은 종종 오해를 샀다.
‘하지만 다 과거에나 있었던 일이야.’
투이나는 어떤 오해도 없이 깔끔하게 그를 배웅했다.
“잘 가요, 시드룬.”
시드룬은 말끄러미 투이나를 응시하더니 사라졌다.
돌아갈 때는 제대로 돌아갔는지 또 한번 잿더미가 파괴되거나 하는 소동은 없었다.
마법사는 등장만으로도 여기저기 새까만 흔적을 남겼다.
완전히 마법진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투이나가 꼭 쥐고 있던 주먹을 뒤집었다.
아까 시드룬이 건드린 자리를 보기 위해서였다.
맥박이 거칠게 뛰어올랐다.
그 자리엔 정말로 까만 얼룩이 있었다.
‘진짜 들켰나?’
긴장한 투이나가 까만 얼룩을 문질러 보았다. 분이 벗겨졌는지 확인할 셈이었다.
그러나 하얀 가루 대신 까만 가루가 묻어나왔다.
“아!”
투이나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이거 재구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다행이다.’
시드룬에게 병을 들킨 줄 알고 피부까지 차가워졌었다.
크게 안도한 투이나가 흐물흐물 쪼그려 앉았다.
“아아아, 놀래라……. 안 들켰구나.”
“괜찮으십니까, 루가 님?”
곧장 라카인이 무릎을 굽혔다.
그제야 라카인한테도 잔뜩 묻은 새카만 얼룩이 보였다. 앞장서서 재를 막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엉망인 몰골로 세상 진지하게 묻는 라카인을 보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 얼굴이 그게 뭐예요!”
라카인이 움찔했다.
까만 얼룩 속에 흰 자위만 커 보여서 더욱 우스웠다.
투이나가 살살 손 끄트머리로 라카인의 얼굴에 묻은 얼룩을 닦아냈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
바로 손을 뗀 투이나가 권했다.
“괜찮으니까 가서 씻어요. 그리고 호위라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일까지 대신 다 해 줄 필요는 없어요.”
라카인은 오히려 충격받은 듯했다.
“제가 루가 님을 섬기지 않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호위를 더 뽑길 잘했네요. 그럼 저를 섬기지 않을 때 다시 만나서 알아볼까요?”
“루가 님…….”
대답을 들은 라카인은 황망해 보였다.
재를 뒤집어쓴 상태에서 저 표정까지 추가하니 정말 길 잃은 부랑자가 따로 없다.
투이나가 어깨를 으쓱―이려다가 굉장히 후회하고는― 손짓했다.
“제 옆에 무사제님들이 계시잖아요. 씻으러 가세요.”
약간 거리를 두고 있던 무사제가 얼른 다가와 옆자리에 섰다. 제깟 놈 혼자보다 우리가 안전하다는 심보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럼…… 최대한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한 라카인이 전력 질주를 했다.
그 틈을 타서 사제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루가 님, 아까 마법사가 준 물건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잠시만요.”
잠시 후 라카인이 물방울을 튀기며 돌아왔다.
무사제가 마지못해 물러나고, 투이나의 옆에 선 라카인이 그에게 비늘을 건넸다.
“마법이 걸려 있겠죠?”
비늘을 손에 쥔 채 기도를 시작한 사제의 답변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흰 빛이 일렁이던 사제의 손이 갑자기 파드득 떨린 것이다.
“윽! 마나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사제가 급히 기도를 멈췄다. 신의 힘과 마법에 충돌하면 서로 거세게 반발했다.
사제가 손을 펼치자 불똥이 터진 듯 퍼진 화상이 보였다.
“세상에…….”
비늘을 다른 손으로 옮긴 사제가 재빨리 기도를 외웠다.
순식간에 다친 자리가 말끔해졌다.
사제가 꺼림칙하게 비늘을 손톱 끝으로 잡았다.
“보셨죠? 생각보다 강한 마법이 걸려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일부러 화상을 입지 않으려고 짧은 기도를 한 겁니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라니.”
“시드룬을 부르기 위해서 그만큼 강한 마법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쓰시기에 위험한 건 사실입니다. 검사를 허락해 주십시오, 루가 님.”
“그렇게 해요.”
투이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가 재빨리 비늘을 주머니에 갈무리했다.
“그나저나 호위를 뽑는 중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요.”
“시험을 계속 치를 수 있겠습니까?”
양피지를 들고 서 있던 사제가 움찔했다.
“그것이…….”
그녀가 내민 양피지는 이미 재가 묻은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불어서 재를 떨어내는 일도 한두 번이지 기어이 잉크에 엉긴 재가 새까맣게 번져 버렸다. 문제를 알아보기는 다 틀렸다.
사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망할 마법사……. 죄송합니다. 내가 이걸 얼마나 준비했는데…….”
사과인지 욕인지 빠득거리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하긴 자신 같아도 밤새 준비한 문서가 한순간에 다 날아간다면 어금니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라카인이 말했다.
“더 시험을 치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투이나를 위해 라카인이 직접 손가락으로 한 명씩 짚었다.
“저자, 그리고 이자가 호위로 쓸 만합니다.”
처음 가리킨 사람은 잿더미 속에 엉거주춤 서 있던 스카차, 두 번째는 투이나 근처에서 창을 들고 있던 호루니였다.
‘언제 왔지?’
호루니를 발견한 투이나가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서 있던 터라 라카인에게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다.
다른 사제들이 즉각 라카인의 선택에 항의했다.
“아니, 저자는 아까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이잖아!”
“기준이 있는 소리를 해야지.”
“저 두 사람만 마법사가 나타났을 때 제대로 움직였습니다. 불러서 확인하십시오.”
사제들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움직였다. 반신반의하는 움직임이다.
‘……그 난리 통에 그걸 다 봤단 말이야?’
그들을 위해 투이나가 직접 호루니를 불렀다.
“호루니, 이쪽으로 와 줄래요?”
“예……!”
화들짝 놀란 그녀가 다가왔다.
가까워지자 호루니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안색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창을 꽉 잡은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제들이 남몰래 혀를 찼다.
“시험엔 통과했다지만 저리 겁을 먹어서야…….”
호루니가 창을 꽉 바투 쥐었다. 튀어나온 손마디가 새하얬다.
안쓰러워진 투이나가 직접 손을 잡아 진정시켰다.
“이제 놓아도 괜찮아요.”
흠칫 놀란 호루니가 덜그렁 창을 떨어트렸다.
옆에 있던 라카인이 누구 하나 발등이 다치기 전에 잡아 걷어냈다.
호루니가 더듬거렸다.
“저, 저는…….”
“아까 시드룬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했는지 설명해 줄래요?”
투이나가 가만히 호루니의 손을 다독였다.
“아니면 물 한잔 마시고 말해도 좋아요.”
덧붙인 말에 호루니가 아주 희미하게 바르르 웃었다.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아는 게 불안하기도 하고, 차라리 마음 편하기도 한 모양이다.
호루니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건 괜찮습니다, 루가 님.”
말랑한 투이나의 손에 얌전히 잡혀준 채로 호루니가 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