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살해한 구혼자 1권1. (1/43)

나를 살해한 구혼자 1권

1.

삶의 끝에서 눈을 감으면 간절히 기도하게 돼, ‘다시 살아나 하늘을 볼 수 있다면…’

배가 뜨겁다.

그동안 살면서 많은 죽음을 상상해 왔지만 이런 방식으로 죽게 될 줄은 몰랐다.

투이나는 명치를 뚫고 나온 검 끝을 내려다보았다.

입에서 쿨럭 피가 터져 나왔다.

꼭 남의 일처럼 보였던 검이 그제야 고통을 선사했다.

투이나의 무릎이 꺾였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살인이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투이나는 뒤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검으로 찌른 자가 발로 밀어 버린 탓에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소름 끼치는 느낌과 함께 검이 뽑혀 나갔다.

“누, 누가…… 좀…….”

간신히 새어나온 목소리는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급히 도망치는 발소리만이 어지럽게 머리를 울렸다.

“도와…….”

투이나는 절망하며 입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살인자가 달아난 복도는 고요했다.

투이나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가냘픈 숨이 끊어질 듯이 새어나왔다.

‘어떻게 감히 신이 계신 곳에서…….’

신전 바닥의 금빛 선 위로 붉은 액체가 번져 나갔다.

자신이 이곳을 더럽히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평생 당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것이…… 당신께서 제게 바라는 결말인가요?’

투이나의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었다.

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비참한 결말이었을 테지.

‘아르힘, 나의 신이시여.’

다가온 죽음 앞에서 투이나는 경건해졌다. 신전에 온 뒤로 얼마나 과분한 행복을 맛보았던가.

몸의 떨림이 차츰 가라앉았다.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투이나는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것 같았는데 더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부디 저를 거둬 주세요.’

* * *

그리고 눈이 뜨였다.

“헉!”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투이나는 방금 물속에서 건져진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심장이 어찌나 거칠게 뛰는지 조금 전까지 죽어 가고 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살아 있어?’

투이나는 더듬더듬 배를 만졌다.

붕대라도 감겨 있을 줄 알았던 상처는 매끈했다.

아니, 아예 상처 자체가 없었다.

“세상에…….”

투이나가 중얼거렸다.

검에 찔렸던 몸도 따듯했다.

‘분명히 죽었는데.’

잠드는 것과 달리 몸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감각을 확실히 느꼈다.

의식을 잃고 세상과 멀어지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한데.

거기서 되돌아오다니.

똑똑.

멍하니 충격에 빠져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루가 님, 일어나셨습니까.”

시종의 목소리였다.

투이나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로 살아난 거야!’

기쁨이 치솟은 투이나가 침대를 뛰어내렸다.

이런 기적을 가만히 누워서 받을 수는 없다!

멀쩡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닥에 두 무릎을 쿵 찧은 투이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아르힘 님! 절 지켜보고 계셨군요!”

투이나는 감격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신께서 자신의 목숨을 살린 게 틀림없었다.

‘또 한번 생명을 받다니, 얼마나 큰 영광인지!’

투이나가 정신없이 기도에 빠진 사이 대답을 기다리던 시종이 결국 그냥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루가 님.”

“시간이 급하옵니다.”

우르르 들어오던 시종들이 침대 맡에 무릎을 꿇고 있던 투이나를 발견하고 기함했다.

“루가 님! 체통을 생각하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투이나가 손을 맞잡고 활짝 웃었다.

“여러분! 오늘도 아르힘 님의 기적이 내리셨습니다!”

감격해 부르짖는 투이나를 시종들이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예에, 그리하셨겠지요.”

“바닥이 찹니다.”

시종들의 반응에 투이나는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검에 찔린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는데 다들 왜 이렇게 미지근하지?’

이 정도면 신학서에 기록되어도 될 정도로 큰 기적이 아닌가.

갸웃거리던 투이나는 시종들에게 끌려 일어나다가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뎠다.

그 바람에 풍성한 투이나의 머리칼이 어깨 너머로 쏟아졌다.

긴 적갈색의 폭포는 얼룩덜룩한 회색 흔적으로 가득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확인한 투이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 머리가…….”

“흉측하지요.”

“빨리 가려 드리겠습니다.”

시큰둥한 대답에도 투이나는 황급히 손바닥을 펼쳤다.

회색 얼룩으로 가득했다.

손목, 팔꿈치와 다리 등 눈 닿는 곳마다 모두 얼룩투성이다.

마치 처음 병에 걸렸을 때처럼.

‘왜 돌아왔지?’

비로소 투이나가 당황했다.

‘신전에 들어온 뒤로 거의 다 나았었잖아.’

혼란스러워진 투이나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시종들은 도로 악화된 병의 증세에도 전혀 놀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덤덤한 사람이라도 부활이라는 기적 앞에서까지 무심하게 반응할 수는 없다.

차츰 이상함이 스며들었다.

빤히 지켜보는 중에도 시종들이 그녀를 씻기고 옷을 입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두건으로 감추었다.

죽었다 깨어나서 정신이 없던 투이나가 확인하듯 물었다.

“신기하지 않나요?”

“예. 삶의 모든 순간이 신기로운 신의 임하심이지요.”

“늘 감사하고 있답니다.”

시종들은 달달 외운 말을 그대로 읊었다.

아무리 신전 사람들이라도 반응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들이 먼저 주제를 돌려 버렸다.

“루가 님, 집중하세요. 곧 구혼식이지 않습니까.”

“구혼자들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될 자리라고 혹시 긴장하셨습니까?”

투이나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요. 구혼자들이 온다구요? 지금? 처음으로?”

“예.”

“그럴 리가요…….”

투이나에게서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종들은 투이나의 반응을 거부감으로 해석했다.

“그렇게 겁내실 필요 없습니다.”

“여긴 아르힘 님의 신전인걸요. 루가 님은 그저 선택만 하시면 됩니다.”

“아뇨, 아뇨! 구혼자들은 옛날에 이미 도착했잖아요.”

그들이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곁눈질했다.

“구혼자들이 도착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말 몰라서 그러세요?”

투이나는 당황했다.

저 반응, 그리고 예전처럼 돌아간 머리카락까지.

‘뭔가…… 일이 잘못됐어.’

투이나는 본래 비천한 신분이었다.

태어났을 때 자신의 어머니는 아기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곰팡이처럼 피어난 회색 얼룩이 온 몸에 퍼져 있었으니까.

기겁한 그녀는 탯줄도 자르지 않은 아이를 밀짚으로 덮어 버렸다. 그냥 죽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투이나는 끈질기게 살아 있었고,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다른 자식들과 함께 그녀를 길러야만 했다.

몸이 자라나면서 얼룩은 작아졌지만 그것도 잠시뿐, 사춘기와 함께 얼룩은 다시 번져 갔다.

어머니는 그때야말로 투이나가 죽을 것을 장담했다.

「젖도 안 먹이고 자란 병든 년이 오래 살 리 없어!」

투이나도 반쯤 동의했다.

그래도 그녀는 물과 다를 게 없는 죽을 끓이고 해진 옷을 꿰매면서 태양을 보러 다녔다.

세상이 근사한 순간을 잠깐이나마 즐겨 둬야 하니까.

그러다 그녀는 신을 만나게 됐다.

투이나가 태어난 나라 아르힘은 신의 이름으로 유명했다.

단 한 번의 침략도 허용하지 않았던 나라.

치유하는 힘을 가진 사제들.

그리고 때때로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신까지.

그런 배경에서 당연히 아르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심은 최고조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신을 처음 만났을 때 투이나가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늘을 밟으며 내려온 존재를 본 투이나는 너무 놀라 물동이를 그대로 떨어트렸다.

물동이가 즉시 박살났다.

신의 모습은 차마 눈으로 보기 죄스러울 정도로 고귀했다.

깨진 조각 위에서 바들바들 떠는 투이나를 신께서 자애롭게 감쌌다.

그때 무엇을 보신 걸까. 신은 투이나를 신전으로 데려와 루가로 만들었다.

크나큰 소란이 나라를 뒤집어 놓았다.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신에게 항의가 먹힐 리가 있나.

「루가는 나의 이름을 대신하며 내리는 말이니, 그대들은 루가를 나와 같이 대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투이나가 차츰 루가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그녀에게 청혼한 세 사람이 있었다.

투이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

‘그래. 다 기억나.’

시종들이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염려와 달리 투이나는 세 명의 구혼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 년 동안이나 함께 지냈으니까.’

아찔하게 기억이 몰려왔다.

수백 개의 낮과 수백 개의 밤이.

그들과 지냈던 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충격에 휩싸인 투이나가 입을 딱 벌렸다.

“괜찮으신 거죠?”

“네, 전…… 괜찮아요.”

투이나가 급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맙소사, 믿어지지가 않는다.

‘과거로 돌아왔어!’

아무리 따져도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병은 다시 심각해지고, 검에 찔렸던 상처는 사라지고, 구혼자가 이제야 도착한다잖아! 게다가 아무도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몰라!’

투이나가 저도 모르게 배를 눌렀다.

과거로 돌아왔다면 모든 상황이 설명이 된다.

게다가 이 나라에는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도 있다.

아르힘.

투이나가 벌떡 일어나자 사방에 분가루가 휘날렸다.

“루가 님!”

“어디 가세요?”

“아르힘 님을 뵈러 가야겠어요!”

“예?”

기함한 시종들이 투이나를 말렸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을지 모르는걸요!”

“하지만…….”

“구혼자들을 기다리게 만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순식간에 머리가 맑아졌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면…… 구혼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투이나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시종들이 재빠르게 몸치장에 달려들었다.

앉으니까 차라리 생각에 집중하기가 쉬워졌다.

‘이해가 안 가.’

투이나가 입술 밑을 눌렀다.

‘아르힘 님께서 나를 왜 하필 지금으로 돌려보내셨을까? 죽기 직전이 아니라 구혼자가 신전에 도착하는 날이라면…….’

죽음이 구혼자와 관련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죽음의 순간, 투이나가 너무도 쉽게 등을 내줬던 이유가 있었다.

그날―사실 방금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실감하기 어려운―은 구혼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투이나는 결혼 상대를 발표하기 전에 각각 구혼자에게 정중한 거절과 수락을 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떨리던지.

단둘이 앉아서 결혼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너무 긴장이 되어, 찬 공기를 좀 쐬고자 창문을 열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대로 등에 검을 맞았다.

투이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도 충격이 생생했다.

‘거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어.’

신전은 그날 밤을 위해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비웠다. 구혼자들도 상당한 직위를 가졌기에 보안도 엄격했다.

성대하게 꾸며진 내실을 몇 겹의 경비가 둘러쌌는지 모른다.

구혼자가 아니면 감히 출입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살해당했으니…….

차츰 과거로 돌아왔다는 흥분이 가라앉았다.

대신 의심이 자리를 차지했다.

‘내게 결혼하자고 한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나를 죽였다고?’

세 명의 구혼자가 있다.

그들 중 한 명은 살해자가, 다른 한 명은 남편이 될 것이다.

잘못 고른 대가는 죽음뿐이었다.

투이나가 차가운 현실을 깨닫고 얌전해진 사이, 시종들이 그녀의 손을 가져가 톡톡 하얗게 두드렸다.

얼룩이 차츰 희미해져 갔다.

꼭 다문 투이나의 입술과 별개로 잘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화려한 장식도 휘감겼다.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의 눈이 곧 또렷해졌다.

‘아르힘께서 굳이 지금 되살리셨다면 이유가 있다는 거잖아.’

투이나가 옷을 입혀 주는 시종들에게 몸을 맡겼다.

‘누가 그랬을까? 처음부터 죽일 생각으로 왔다면 기다릴 이유가 없어. 무슨 계획을 세웠던 걸까? 아니면 마음이 바뀌어서?’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기 전에 상황을 바꿔야만 한다. 범인을 알아내야만 한다.

어려운 수수께끼가 하나 생겼다.

투이나가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눈이 부시게 변해 갔다.

주름을 잡은 흰 옷이 파도처럼 떨어지고, 깨알만 한 보석으로 엮은 넓은 장신구가 포말처럼 반짝였다.

맨발에 신은 푸른 샌들만 빼면 어디로 보나 빛이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투이나는 거울 속으로 완벽하게 성스러운 자신을 응시했다.

아무런 흠도, 얼룩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새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투이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기뻐.’

누구도 삶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막을 수 없다.

‘죽는 그날까지 저를 떠나지 않으셨군요.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저를 거둬 주셨지만 어느 때보다도 기쁩니다. 살아 있어요. 제가 살아났어요!’

투이나가 찰랑이는 빛 속에서 손을 맞잡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당신을 기쁘게 하겠습니다!’

기도에 응답하듯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종들이 놀라 고개를 든 사이 투이나가 일어섰다.

뒤늦게 다른 자들도 그녀를 따랐다.

구혼자를 만나러 가며 투이나가 생각을 정리했다.

‘한 명씩 되짚어 보자.’

구혼자는 셋이다.

붉은 왕, 샨 아르파 모하세스.

저주받은 마법사, 시드룬.

대상인, 베인 크로퍼드.

모두 아주 유명하고 힘이 있는 자들이었다.

무시무시한 소문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죽기 전의 투이나는 첫 만남 때 몹시 긴장하고 말았다.

그들도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렸고, 자신도 비슷하게 유명하다는 걸 깨닫는 건 더 오래 걸렸으니.

‘그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하는 걸까?’

투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제 그들을 알아.’

성큼성큼 걸어가는 투이나의 앞으로 문이 열렸다.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

“루가 님!”

“아르힘의 성녀다!”

“축복받은 분이시여!”

엄청난 인파가 환호했다. 신전을 꽉 채운 신도들이 꽃가루를 뿌리고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을 반겨 주는 모습이다.

투이나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예전이었다면 긴장해서 얼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니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절절하게 전달되었다.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가슴까지 저릿했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데.

환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본 투이나가 벅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

“여러분!”

시종들이 기겁했지만 더 큰 환호에 밀려났다.

투이나는 정신없이 양팔을 흔들었다.

“오늘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축복이 있기를!”

“축복 받으세요!”

“꺄아아!”

투이나보다 더 격한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루가 님!”

시종이 입을 앙 다물고 말했다.

복화술로 주의를 주는 모습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 자리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각별한지.

투이나는 종종걸음으로 단상에 올랐다.

과거와 달리 주변이 제대로 보였다.

죽기 전에는 실수가 그렇게 두려웠었다. 입가는 돌덩이처럼 굳었고, 눈도 제대로 돌리지 못했다.

무얼 하든 아르힘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고 혼났으니까.

신을 실망시킬까 봐 겁났다.

‘이제는 두려워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을 알잖아.’

투이나는 구혼자들이 나타날 장소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내려다보았다.

구혼자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신전은 주랑에 긴 양탄자를 세 개 깔아 두었다.

‘설령 살인자가 있다고 해도 내 마음이 달라질 일은 없어.’

생각과 동시에 긴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첫 번째 구혼자가 신전에 들어선다는 신호였다.

“모하세스 왕국의 왕이 도착했습니다!”

“샨 아르파 모하세스입니다!”

웅장한 음악이 울리자 가마를 짊어진 수십 명의 사람이 동시에 양탄자를 밟았다.

팔각 문양과 금으로 만든 가마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게가 나가 보였다.

그런 가마의 정중앙에 더 무거워 보이는 인간이 앉아 있었다.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사자처럼 앉아 있는 왕.

샨이다.

멀리서도 그의 얼굴에 박힌 두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전장에서 샨을 만나면 차라리 기절한 채 죽게 해 달라고 빌게 된다 할 만큼 그는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정복한 땅은 셀 수가 없으며 흘린 피는 강을 이룬다고 했다.

뛰어난 무예로는 막을 자가 없었으니 사람들은 아르힘을 침략하지 않고 청혼을 해 온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물론 정말 다행인지는 의견이 갈렸지만.

샨은 앉아 있는데도 거대해 보였다.

죽기 전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인사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잔뜩 겁먹은 자신에게 그가 웃어 보였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그건 분명한 조소였다.

“아르힘에 온 걸 환영합니다.”

투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가마에서 내린 샨이 딱딱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투이나는 살금살금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애잔한 웃음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성공했다.

샨의 침묵이 길어졌다.

‘비웃는 건보단 낫긴 한데…….’

슬슬 뜬 눈이 시려 올 즈음에 샨이 입을 열었다.

“아르힘의 성녀라더니, 내가 당장 불타 죽지는 않는군?”

‘아아, 뭘 기다리나 했더니.’

과거에 들었던 질문을 똑같이 다시 듣자 그저 신기했다.

다른 나라의 왕이니 샨은 수호신이 달랐다. 하지만 아르힘은 이교도에게 가장 유명한 신이었다.

다행히 투이나는 알맞은 대답을 알고 있었다.

“아르힘께서는 마땅히 받을 죄만 심판하십니다.”

“그래, 아르힘. 왜 여기선 안 보이지? 그 신은 어디든 마음대로 나타날 수 있다던데.”

“아르힘께서는 마땅히 모습을 보여야 할 때 나타나십니다.”

투이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샨이 짧게 웃었다. 과거와 비슷한 조소였다.

“우습군. 신앙심이 강한 성녀가 있어서 아르힘은 좋겠어.”

예전처럼 샨이 말했다.

투이나는 신기한 눈으로 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와, 어쩜 이리 똑같을까.’

상황은 똑같지만 다른 반응을 보이면 달라질까 싶어 투이나는 과거와 다르게 대답을 추가했다.

“성녀가 아니라 루가라고 불러 준다면 더 기쁘겠어요, 샨.”

샨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순간 두 번째 함성이 터졌다.

“두 번째 구혼자가 도착했습니다!”

“시드룬입니다!”

투이나의 시선이 당장 가운데에 있는 양탄자로 쏠렸다.

우두커니 투이나를 노려보던 샨은 마지못해 다시 가마에 올랐다. 그러나 아까보다 흥미를 띤 눈빛이었다.

곧 하인이 그를 떠받들고 내려갔다.

두 번째 구혼자는 걷지 않았다.

허공에 보라색 선이 나타나더니 천천히 둥근 문양을 그리며 움직였다.

선의 끝이 맞닿은 순간 강한 빛이 터져 나왔고, 잠깐 눈을 가린 사이 마법사는 이미 공중에 나타나 있었다.

“우와아!”

“방금 봤어?”

환호가 울리긴 했지만 다소 크기가 작았다. 눈앞의 광경에 놀라기도 하고,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바람 때문에 허공에 뜬 시드룬의 머리는 시든 넝쿨처럼 둥글게 말려 있었다.

몸 전체를 감싸듯 원을 그리던 연보라색 장발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드룬은 기이할 정도로 키가 컸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은 저주를 받았다는 그의 소문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훤칠한 허리를 바로 폈다.

그리고 몇 걸음 만에 투이나에게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시드룬입니다.”

뜻밖에도 정중한 인사말이었다.

무시무시한 말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은 은근히 당황했다. 오로지 투이나만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아르힘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녀의 인사에 시드룬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멍하게 보이는 눈과 짙은 눈썹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미남이었다.

눈동자도 머리와 똑같은 연보라색이었다.

시드룬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마른 몸집에 비해 큰 손.

“악수는 사양할게요.”

“그렇습니까.”

투이나의 거절에도 그는 무덤덤했다.

시드룬과 같이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그가 어떤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투이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시드룬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머리카락이라도 잡아당겨야 겨우 표정이 바뀔까.

간질거리는 손가락을 감춘 채 투이나는 시드룬을 내려보냈다.

곧 기다리고 있던 마지막 구혼자가 양탄자 위로 올라왔다.

“세 번째 구혼자가 도착했습니다!”

“베인 크로퍼드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함성 중에 가장 열렬한 호응이 터져 나왔다.

그는 유일한 아르힘 출신이기도 했고, 부유하고 인망 높은 미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선 두 사람이 워낙 눈에 띄는 등장을 한 덕분에 걸어오는 게 오히려 특별해 보였다.

베인이 살짝 긴 금발을 넘기자 부드러운 인상이 드러났다.

몸은 의외로 탄탄해서, 날렵한 음유시인이거나 상냥한 사냥꾼으로 착각할 법했다.

차분히 걸어오던 베인이 투이나를 발견하더니 서두르듯 살짝 뛰기 시작했다.

긴 주랑을 달려온 그가 투이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루가 님을 뵙습니다.”

“그대를 환영합니다.”

투이나는 처음으로 그를 일으켜 주기 위해서 다가갔다.

베인은 몹시 영광이라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무릎을 꿇어 유일하게 팔을 붙잡아 주어야 했던 사람이다.

차분히 일어선 베인까지 인사가 끝나자 투이나에게는 순간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어쩌면 이렇게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을까.’

아르힘이 고른 구혼자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투이나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도 없었다.

‘정말로 이 중에 날 찌른 사람이 있단 말이야?’

훤칠한 세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올려다보자 투이나는 그만 확신이 흐려지고 말았다.

살인자가 있다는 확신이.

어느새 군중들도 환호를 멈추고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에게 모두 감사와 축복을 전하겠습니다.”

또랑또랑한 투이나의 목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구혼자들을 받아들일 것을 선언합니다. 1년이라는 구혼 기간 동안 어떤 불편함과 해로움이 없도록 보살피겠다고 약속하겠어요.”

서약을 읊는 동안 투이나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라 저절로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전과 달리 마음을 다잡은 덕분이었다.

살인자가 있다는 슬픔이나 비장함은 없었다. 몰래 검을 감춘 구혼자에게 배신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다만 비참하게 홀로 죽어 가던 순간에서 깨어나 보니 원망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게다가 성녀 루가인 이상 자신을 죽여 나라를 어지럽히려는 자를 찾아내는 일쯤이야 간단하게 해내야 할 것 같았다.

‘할 수 있지, 그럼.’

투이나는 결의를 다졌다.

이러다 또 죽으면 신이 다시 살려 주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투이나는 아르힘을 사랑하고, 물론 아르힘께서도 모두를 사랑하겠지만 기적이 매일 일어난다면 어디 기적이겠는가.

남들이 갖지 못한 두 번째 기회라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축복이다.

유난히 눈을 반짝이는 투이나를 본 구혼자들의 얼굴에 잠깐 이채가 스쳤다.

누가 봐도 정략적 청혼이었기에 루가에게는 달갑지 않을 거라고 모두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투이나는 활짝 올라간 입꼬리로 외쳤다.

“환영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르힘 님의 축복을!”

선창한 투이나를 따라 신도들이 외쳤다.

곧 흥겨운 음악이 울리며 연회가 시작되었다.

오늘을 위해 신전이 마련한 음식만 궤짝으로 백 개를 넘고, 부대로는 예순 개를 채웠다.

사제들이 신전 안팎으로 모여든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동안 귀빈이 있는 안쪽에서는 따로 마련한 술잔이 돌았다.

실은 투이나도 바깥에 나눠 주는 음식이 좀 더 익숙했다.

반으로 자른 빵과 으깬 감자, 신 냄새가 나는 맥주까지.

‘신전으로부터 자주 받아먹었었지.’

추억에 잠겨 있던 투이나가 구혼자들을 곁눈질했다.

샨은 전쟁터가 익숙하니 거친 음식에 개의치 않을 게 뻔했고, 시드룬은 자기가 뭘 먹고 있는지나 알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베인은 비교적 곱게 자랐지만 자신이 권하면 얼마든지 기쁘게 먹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투이나는 선뜻 그들에게 음식을 권하지 못했다.

너무 그들을 잘 아는 척하는 게 좋지만은 않으리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투이나가 속에 양고기를 채운 제비추리 요리를 적당히 잘랐다.

“다들 마음껏 드세요.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입니다.”

“영광입니다, 루가 님.”

베인이 즉각 답했다.

그는 투이나의 시선이 닿자 더욱 자세를 바르게 세웠다. 긴장했는지 자꾸 입술을 감쳐무는 게 보였다.

그를 바라보기 안타까워서 시선을 돌리니, 시드룬이 음식은 먹질 않고 갈색으로 구워진 껍질만 쿡쿡 찌르는 게 보였다.

‘저러다 다 식겠다.’

대신 잘라 주고 싶을 지경이라 엉거주춤 투이나가 손을 뻗는데, 갑자기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샨이었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샨은 가만히 있어도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창날 같은 시선에 뺨이 꿰일 지경이라 투이나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제게 할 말이 있나요?”

“굳이 1년씩이나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샨이 불쑥 말했다.

“여러 명이 청혼을 했다고 한들 그중에서 한 명을 골라 바로 결혼하면 그만 아닌가?”

그 말에 다른 구혼자들까지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샨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남편을 선택할까 봐 동공이 불안스레 커져 있었다.

투이나가 구혼자를 안심시켰다.

“구혼 기간은 제가 아닌 아르힘 님이 정하신 겁니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과 단숨에 사랑에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샨은 전혀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니. 설마 그걸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겠지?”

“왜 비웃죠? 사랑할 사람이 여기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죠.”

투이나가 대꾸했다.

뼈를 담은 말에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들이 졸도할 것 같은 신음을 흘렸다.

다행히 샨은 격노하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더 기다릴 필요도 없군.”

샨이 쿵, 제 무릎을 짚었다.

저 가벼운 동작에 바닥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비교도 되지 않는 상대인데 뭐 하러 고민하나? 저런 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고? 시간 낭비 하지 마라, 루가.”

아주 간단하게 샨이 다른 구혼자를 꺾어 버렸다.

시드룬은 면전에서 욕을 먹거나 말거나였지만 베인은 울컥했다.

“속단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다 똑같은 구혼자가 아닙니까.”

베인의 말에 샨이 벽력처럼 손을 휘둘렀다.

“어딜 장사치 따위가!”

“무슨 짓이에요!”

투이나가 급히 소리쳤다.

하마터면 샨의 손짓에 베인이 뺨을 맞을 뻔했던 것이다.

그것도 파리를 쫓는 동작으로.

투이나가 가까스로 베인을 잡아당겼다.

그녀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베인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루가 님……?”

입술을 깨문 투이나는 일단 수습했다.

“성급히 행동하지 마세요. 그러셔도 모든 결정은 1년이 지나야 내려질 겁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잖나.”

샨이 성가시다는 듯 대꾸했다.

“날 저들과 동등하게 둔 것 자체가 모욕적이군.”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모욕을 받더라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시드룬이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소란이 잦아들었다.

덤덤한 목소리가 오히려 귀에 쏙 들어왔다.

‘와……. 정말 비꼬는 것처럼 들리지만 본인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설명해 줘야 하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라 투이나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샨이 날이 선 눈매로 대꾸했다.

“마법사, 주인이 없어 모르는 모양이지만 세상엔 명예라는 것이 있다.”

“명예는 모욕으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어리석군. 그 모욕을 말살하는 것이 명예다.”

“그렇군요. 하나 배웠습니다.”

시드룬이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아주 진지한 태도가 사람 김빠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샨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더 공박하기를 기다렸으나 시드룬의 관심은 다시 음식으로 돌아갔다.

태산 같은 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시답잖은 짓뿐이군. 돌아가겠다.”

“아, 잠깐……!”

일어나려는 샨을 투이나가 주춤 올려다보았다.

샨은 자신을 향해 뻗은 그녀의 손을 보고 아주 약간 만족스러워했다.

“실망하지 마라. 다음에 제대로 된 연회가 무엇인지 보여 줄 테니. 모하세스의 연회는 이보다 훨씬 낫다.”

“초대 고마워요.”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다 원래 하려던 말을 얼른 이어 붙였다.

“거주 규칙은 기억하나요?”

“그래. 구혼 기간 동안은 신전 밖으로 못 나간다는 그 규칙 말이지.”

샨이 가마에 등을 기댔다.

그가 무릎을 세우더니 선심을 쓰듯 말했다.

“당분간은 따라 주겠다.”

곧 가마가 들렸다.

그는 대놓고 반항심을 드러낸 주제에 마치 개선장군처럼 떠났다.

투이나는 저 전쟁광을 1년 동안 붙잡아 둘 수 있어서 다행인지, 아니면 1년간 같이 살아야 해서 불행한지 헷갈렸다.

군인처럼 험상궂고 덩치가 큰 샨의 하인들을 보니 그런 마음은 더욱 커졌다.

투이나가 시종을 불렀다.

“샨의 숙소는 어떻게 됐죠?”

“더 넓은 공간을 배정해 달라고 하셔 언쟁이 좀 있었습니다만 결국 처음 정했던 자리에 천막을 쳤습니다.”

“휴……. 다행이네요.”

“루가 님, 그자가 데려온 하인만 수백 명을 넘습니다. 하나같이 거친 자들이라 무사제들이 골머리를 썩고 있어요.”

특별히 신체가 좋은 자들로 뽑아 훈련시킨 무(武)사제들까지 힘들어한다면 그보다 연약한 시종들은 어떨지 쉽게 짐작이 갔다.

시종이 약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루가 님께서 저 야만인에게 하수인을 줄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야만인이라는 소리 마세요. 그 부분은, 음, 노력해 볼게요.”

투이나가 걱정스레 속삭였다.

과거에도 샨의 하인들로 문제가 몇 번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부분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조심해야지.’

다시 살아나 예전의 실수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건 좋았다.

“죄송합니다, 루가 님.”

베인이 말했다.

“저런 무도한 자의 청혼도 받아야 하셨다니. 정략결혼일지언정 차라리 다른 사람과 맺어지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깜짝 놀란 투이나가 손을 내저었다.

“세 분 다 아르힘 님이 골라 주신 분인걸요. 전 마음에 들어요.”

“그렇……군요.”

투이나의 밝은 대답에도 어쩐지 베인은 크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베인의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가 숱 많은 속눈썹 위로 드리워졌다. 풍부한 감정을 품은 청록색 눈동자에 투이나가 비쳤다.

“루가 님,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뭔가요?”

“왜 결혼을 결심하셨습니까?”

베인이 멀리 사라지고 있는 행렬의 꼬리를 응시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봉을 휘두르는 샨의 하인들에게 놀라 마구 흩어지고 있었다.

베인이 주저했다.

“루가 님께 청혼한 사람이 묻기에는 적당치 않은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또한 아르힘 님의 뜻이셨어요.”

투이나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녀가 갑자기 주어진 신분과 신전에서의 생활에 차츰 익숙해져 갈 즈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우느라 정신이 없던 때에 신이 찾아왔다.

「네가 사랑할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마.」

갑작스레 나타나 결혼을 권하는 아르힘의 말에 투이나는 들고 있던 신학서를 내동댕이칠 뻔했다.

「저, 저는 아직 아르힘 님의 뜻에 따르기에도 부족한걸요.」

「이것 또한 나의 뜻이다.」

그렇다면야…….

하지만 투이나가 계속 결혼에 낯설어하자 아르힘은 관대하게도 1년의 구혼 기간을 두었다.

서로 알아볼 시간을 가지라고 말이다.

“솔직히 세 분씩이나 청혼하실 줄은 몰랐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가 님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라도 청혼했을 겁니다.”

베인이 성급하게 말했다.

투이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샨이 떠났다고 금세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이럼 안 되는데…….’

루가로서 남편감들은 공평하게 대해야 했다.

약간 미안해진 투이나가 떠난 샨의 빈자리를 응시하자 베인이 다시 주의를 끌었다.

“루가 님, 관대하게도 제가 머물 숙소로 한 층을 다 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실은…… 다른 분들은 모두 그곳에서 지내지 않겠다고 했거든요.”

“그랬군요.”

대단한 얘기도 아닌데 베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처음부터 베인은 적극적으로 나왔다.

유순한 자세에 자상한 말투까지.

그녀 쪽으로 주의 깊게 다가앉은 모습은 누가 봐도 호감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

홀린 듯이 그를 응시하던 투이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내기 편하실 것 같다니 다행이에요. 염려하고 있었답니다.”

진심이라는 걸 강조하려고 활짝 웃은 투이나는 베인이 또 말을 걸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자칫하다간 벌써부터 루가가 점찍은 남편감이 베인이라는 소문이 나게 생겼으니까.

“시드룬?”

시드룬이 시선을 움직였다.

베인은 또다시 투이나의 주의가 자신을 건너뛰자 고운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그걸 보았지만 보지 못한 척을 어렵게 해낸 투이나가 말을 이었다.

“방금 들었겠지만 마법으로 머무른다 해도 신전 밖으로는 나가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시드룬이 재깍 대답하자 투이나의 입매가 미묘해졌다.

‘말은 잘하는데…….’

하지만 투이나는 시드룬도 종종 사고를 쳤었다는 점을 떠올렸다.

‘구혼자들이 신전에서 못 나가게 한 것도 아르힘 님이 미래를 다 미리 보셨기 때문일까? 그때부터 내가 과거로 돌아올 줄 아셨나?’

신이 가진 힘은 아직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사제들의 연구가 거듭되어도 여전히 난해하여, 유일하게 신과 직접 대화하는 루가에게 은근한 압박이 쏟아지기 일쑤였다.

「신에게 질문 좀 해 보라고 하셔도 일단 저부터 사제님의 말을 이해해야 물을 수 있지 않을까요.」

돌려 말하는 문장 속의 핵심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투이나는 미사여구로 장식한 대화를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게다가 지금은 그저 어떻게 된 일인지 빨리 아르힘의 답변을 듣고 싶을 뿐이다.

식사가 끝나자 축복 의식이 이어졌다.

샨은 진작 나갔고, 시드룬은 마법사라 의식을 받는 게 불가하여 의식 대상은 베인 뿐이었다.

투이나가 직접 금가루가 섞인 소금물을 무릎 꿇은 베인의 머리에 뿌렸다.

신이 내린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경건한 자세로 의식을 마친 베인이 일어났다.

“오늘 이렇게 맞아 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베인에게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분명 루가 님께서도 심려가 크시겠지요. 구혼이 조용히 끝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베인은 주저하는 몸짓으로 투이나의 소매를 살짝 쥐었다.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언제나 루가 님을 위해서 살 준비가 되었습니다.”

베인이 살짝 소매에 입맞췄다.

투이나가 멍하니 올라간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예의에 어긋난 건 아니었다.

다만 그의 몸짓에는 여운을 남기는 구석이 있었다.

베인이 수줍게 웃으며 입을 떼더니 아쉬운지 손가락으로 살짝 소매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조용히 돌아갔다.

시드룬은 끝까지 한 입도 먹지 않은 음식을 두고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투이나만 갑작스러운 습격에 정신이 혼미했다.

“루가 님! 루가 님!”

“구혼자들이 떠났으니 루가 님도 가셔야지요.”

“네? 아, 그렇죠.”

허둥지둥 투이나도 일어났다.

간신히 표정을 정리한 투이나가 연회장을 떠나오자마자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허윽, 어떡해.”

투이나가 손목을 틀어쥐었다.

“방금 봤어요? 소, 소매에…….”

“루가 님, 제발 체통을 지키십시오.”

시종이 앓는 소리를 냈다.

투이나의 심장이 새끼 제비처럼 팔딱거렸다. 미청년의 공손한 구애는 파괴력이 엄청났다.

‘너무 다정해!’

투이나가 소매를 팔락거리며 열을 식혔다.

과거엔 긴장한 나머지 애정 표현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되살아나고 보니 베인이 처음부터 대놓고 들이대고 있는 게 아닌가.

‘원래 청혼은 이런 거였지……?’

투이나가 양 뺨을 꽉 쥐었다.

시종은 설레서 어쩔 줄 모르는 투이나를 망아지처럼 보며 진정시켰다.

“자, 심호흡하세요.”

“휴우, 휴우…….”

투이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똑같이 한 번 더 했다.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 볼에 손자국이 남았다.

‘어떡하면 좋아.’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기 전까진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투이나가 눈을 감았다.

빨리 신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들어야 했다.

‘대답을 들은 후에는? 살인자를 찾을 준비가 되었나?’

비로소 그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아르힘 님을 만나러 가야겠어요.”

“그럼 다시 화장을 할까요?”

“아녜요.”

투이나가 사양했다.

“이대로도 충분한걸요.”

신을 만나러 가는 데 더 이상의 포장은 필요 없으니.

아르힘의 신전은 반으로 자른 양배추처럼 생겼다.

건물 사이마다 둥근 벽이 겹겹이 늘어섰기 때문이다.

수많은 복도와 문을 지나 중앙까지 들어오면 야트막한 언덕에 입구가 없는 종탑이 서 있다.

그곳이 아르힘이 거처하는 성소였다.

종탑의 종은 필요에 따라 저절로 울렸다.

평범한 사제들은 출입조차 금지되었고, 루가 또한 아르힘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종탑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여기서부턴 저 혼자 갈게요.”

“네.”

뒤따르던 무사제가 멈추더니 주변을 경계했다.

투이나는 혼자 탑으로 다가갔다.

낮은 언덕 정도는 금방 오를 수 있었다.

종탑을 마주한 투이나가 벽에 손을 짚었다.

“아르힘이시여, 당신의 종 루가가 방문을 청합니다.”

투이나가 정중히 말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따듯한 반죽 같은 벽을 누르자 손이 푹신하게 안쪽으로 빨려들었다. 아르힘이 보낸 허락의 표현이었다.

투이나는 겁내지 않고 나아갔다.

곧 귓가에서 뻥 하고 뚫리는 느낌과 함께 물소리가 들렸다.

투이나의 발목에서 물이 참방였다.

성소는 어떤 창문도 없었지만 황금빛으로 빛났고, 단단한 바닥 대신 투명한 물이 흘렀지만 걸을 수 있었다.

물 위를 걷는 건 언제나 어려운 법이라 투이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는 걸 택했다.

대신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 아르힘을 찾았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존귀한 음성이 울렸다.

“어서오너라.”

“아르힘 님을 경배합니다.”

투이나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인사를 받은 대상은 아주 높은 곳에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황금색 종을 들여다보고 있던 소년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칼에 순수하고 쫑긋한 눈매는 완벽한 타원을 그렸다.

수호신 아르힘은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었지만 투이나가 본 건 항상 소년이었다.

아르힘이 허공을 밟으며 내려왔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느냐.”

소년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아르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에는 썩 잘 어울렸다.

멍하니 응시하던 투이나가 불쑥 말했다.

“구혼자들이 도착했어요.”

말하자마자 반성했다.

‘이런, 신께서 이미 알고 계실 얘기를 하고 있잖아.’

투이나가 좀 더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다시 말했다.

“실은…… 당신께서 저를 되살리시자마자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아르힘의 미소는 변치 않았다.

계속 말하라는 뜻인가 헷갈린 투이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또 한번 구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관대하신 분. 저어……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혹 제가 겪는 혼란을 도와주실까 싶어서요.”

“네 마음이 미흡하구나.”

아르힘은 이해심 많은 표정을 지었다. 꼭 어른스러운 동생 같다는 불경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

투이나가 경건함을 되찾으려고 손을 모았다.

“왜 저를 살려 과거로 보내셨나요?”

맑은 침묵이 놓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식은땀이 솟아났다. 어쨌든 눈앞의 순진해 보이는 소년이 바로 이 나라의 수호신이었으니까.

한참 만에 아르힘이 입을 열었다.

“네가 겪는 일들은 언제나 내가 마련한 것이다.”

안타까움일까.

아르힘이 가만히 투이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이유를 찾지 못했느냐?”

정수리가 차가워졌다.

아르힘의 손에서 물줄기가 일렁였던 것이다.

파도처럼 흘러내린 물은 남아 있던 분칠을 모조리 씻어 보냈다.

그러나 천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원래대로 얼룩진 피부가 된 투이나가 아르힘을 올려다보았다.

“아르힘 님…….”

“알다시피 내 힘으로도 너를 완벽하게 낫게 할 수는 없다.”

아르힘이 인자하게 말했다.

곧 피부가 고통으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치료의 시작이었다.

투이나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이, 짙은 회색 얼룩이 아주 약간 밝게 바뀌었다.

투이나는 죽기 전 과거에서 꾸준히 아르힘의 치료를 받은 덕에 병이 조금씩 나아졌다.

거의 원래 피부로 돌아올 지경까지 갔건만, 되살아나면서 질병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르힘이 손을 뗐다.

“아이야, 안심하거라. 다른 방법이 필요해진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과거로 돌아오면 제 병이 낫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건가요? 살해당하지도 않고……?”

“대신 대가가 필요했다.”

투이나는 그게 무언지 알기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아르힘의 상징은 생명이다.

그러나 신의 기적은 희생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투이나는 때마침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아르힘이 시간을 되돌리는 기적을 쓸 수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죽어 가면서 했던 기도가 정말로 자신의 영혼을 아르힘에게 보내 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뻐.’

자신을 아낌없이 바친 덕분에 되살아날 수 있었다면 충분했다. 차고도 넘쳤다.

“제가…….”

목이 멘 투이나가 한 호흡을 쉬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요?”

“모든 해답을 가진 자가 있을 것이다.”

아르힘이 고요히 답했다.

소년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눈빛이 반짝였다.

“네가 올바른 사람을 찾아 결혼했으면 좋겠구나.”

움찔한 투이나의 입에서 저절로 말이 튀어나갔다.

“아르힘 님,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그리하라.”

“정말로…… 구혼자들 중에 저를 죽인 사람이 있나요?”

대답은 빨랐다.

“그렇다.”

투이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종탑 바깥이었다.

항상 신과의 대화가 끝나면 자연스레 성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알현은 끝나셨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무사제가 물었다.

투이나가 대답과 함께 서둘러 언덕을 내려갔다.

“네. 아르힘 님께서 잘 맞아 주셨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시종이 서둘러 천으로 투이나를 감쌌다. 씻겨 나간 뒤라 온몸의 얼룩이 고스란히 다 보였다.

그러나 정작 투이나는 얼룩 걱정은 안 했다.

들킬 사람이 있다면 신경을 썼겠지만, 신전의 가장 심장부인 성소에서 누구한테 병을 들키겠는가.

오히려 홀가분했다.

신에게 직접 대답을 들었으니까.

‘내 추측이 진짜일지 계속 의심하고 싶진 않았어. 아르힘께서 확실하게 해 주셔서 다행이야.’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인정한 순간에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씁쓸하긴 하지만.

‘정말로 세 사람 중에 한 명이 범인인 거구나.’

타고난 질병 덕분에 죽음이 그렇게까지 무섭진 않았다.

구혼자인 척하는 암살자가 추가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다만 상대에 대한 아릿한 실망이 번져 와서 투이나는 일부러 크게 어깨를 으쓱였다.

‘됐어. 진짜로 죽어 보기까지 했으니 더 놀랄 일도 없잖아?’

……라고 생각하자마자 그게 큰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밝은 보라색 착각이다.

“힉!”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보랏빛에 투이나가 기겁했다. 동시에 목구멍으로 심장을 뱉는 소리를 낸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보라색 마법진.

시드룬이 온다는 신호였다.

‘여기…… 성소에…… 마법사가?’

하도 놀라니 생각도 띄엄띄엄 하게 된다.

눈이 휘둥그레진 투이나가 시종들을 돌아보았다. 그들도 함박만 하게 입이 벌어진 상태였다.

“감히 마법사가 이곳에!”

“막, 막아야 합니다!”

“사제님, 사제님이 오시면…….”

“늦었어요!”

투이나가 휙 천을 둘러쓰는 틈을 타 문양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한 남자가 떨어졌다.

계단을 내려오듯이 시드룬이 착지했다.

모인 사람들을 죄다 놀라게 해 놓고 정작 본인은 이쪽을 보지도 않았다.

멍하니 고개를 든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이쪽으로 나왔지.”

시드룬이 중얼거렸다.

시종들은 눈이 빠져라 그를 쳐다보았고, 무사제는 잡은 검을 휘두를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법이 겁나지만 않았다면 분명 휘둘렀을 거다.

꼼꼼히 피부를 가린 투이나가 그제야 물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시드룬이 투이나를 확인했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뇨. 인사 말고요. 지금 인사할 때는 아닌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시드룬이 평이하게 동의했다.

온몸을 가려 간신히 눈동자만 내놓은 투이나가 천을 꽉 옭아매었다. 얼룩을 가려야 해 표정으로 감정을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여긴 아르힘 님이 거처하시는 성소예요.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시드룬이 오히려 호기심을 드러냈다.

“저쪽에 아르힘이 있단 말입니까?”

“쳐다보지 마세요!”

투이나가 급하게 경고했다.

“환영회가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무례하게 구세요.”

“무례합니까?”

“그럼요!”

한심한 선문답에 투이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무나 함부로 드나드는 곳이 아닙니다. 당장 떨어져지세요.”

고개를 기울인 시드룬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드리웠다.

“아르힘을 만나려면 언제 오면 됩니까?”

“언제든 안 돼요!”

“당신과 결혼한 뒤에도?”

불의의 습격에 투이나의 머리가 띵해졌다.

말문이 막혔다.

‘뭐, 청혼을 했으니까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할 순 있지. 아직 만난 첫날이지만. 그것보다 정말 결혼하면 마법사라도 신을 만날 수 있나?’

혼란에 빠진 투이나가 말을 잇지 못하자 보다 못한 시종이 대신 끼어들었다.

“그 무슨 무도한 말씀입니까! 루가 님과의 성스러운 결혼을 가볍게 언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무겁게 언급하는 건 어떤 방식입니까?”

눈치도 없이 시드룬이 또 되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온 투이나가 대화를 붙잡았다.

“일단 나가죠. 같이 좀 걸어요, 시드룬.”

시드룬에겐 명령형으로 얘기하는 게 더 잘 먹힌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었다.

과연 그가 순순히 따라 나왔다.

일단 아르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시드룬은 투이나가 신경 쓰였나보다.

“아까와 달라지셨군요.”

시드룬이 한마디 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는 아이 같은 꼬락서니에 무슨 말을 할 줄은 알았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차라리 구혼자들 중에서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는 시드룬에게 걸린 게 나았다.

투이나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추워서요.”

“그렇군요.”

역시 시드룬이다.

이런 시원찮은 변명에도 금방 고개를 끄덕여 주니.

투이나는 따듯한 오후 햇살을 만끽하며 천천히 걸었다.

“왜 아르힘 님을 만나려고 한 거죠? 그것도 몰래.”

“아르힘을 만날 때 누구에게 알려야하는지 몰랐습니다.”

“원래 안 되는 일이라 알려 봤자 소용없었을 거예요. 그래도 정 만나도 싶다면 일단 저한테 말하세요.”

시드룬이 멀뚱하게 눈을 깜박였다. 표정이 무뎌서 그거라도 안 하면 산 사람 같지 않았다.

“당신은…… 아르힘과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까?”

“꽤 자주요.”

새로운 화제에 시드룬이 관심을 보였다.

등 뒤로 멀어지는 종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왜 아르힘이 당신에게만 나타납니까?”

“저에게만 나타나시지 않아요. 그분은 원한다면 어디든 현신…….”

“큼, 흠!”

뒤따르던 시종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외부인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준다는 뜻이다.

시드룬은 이해하지 못했다.

“시종이 당신을 부르는 겁니까?”

“어, 으음……. 그런가요?”

확신하지 못한 투이나가 혹시나 싶어 되물었다.

시종이 애써 상냥하게 답했다.

“그으……. 아닙니다, 루가 님.”

아니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드룬이 또 물었다.

“아르힘을 당신만 만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그를 믿습니까?”

“목소리는 들리잖아요.”

친절하게 대답한 투이나가 재빨리 질문을 잡아챘다.

“그리고 아직 제 첫 질문에 대답을 못 들었어요.”

시드룬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제야 첫 질문을 떠올려 보는 모양이다.

“몰래 만나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수호신은 온 나라를 다 지켜보고 있을 테니 몰래 만날 수가 없죠. 만나려고 한 이유는 아르힘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요?”

“마법사에게 신이 없는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투이나가 걸음을 멈췄다.

수호신이 없는 땅에서 태어나는 마법사들은 많은 괄시를 받았다.

우선 그들을 지켜 주는 신이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쓰는 마법이 신의 힘을 훔쳐다 쓰는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마법사는 몰매를 맞아 사라지거나 전쟁터로 끌려갔다.

때문에 시드룬처럼 사람들에게 이름을 떨치고도 무사히 돌아다니는 마법사는 참으로 드물었다.

그만큼 강하다는 증명도 되었다.

투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이유는 마법사들이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마법사에겐 마법사의 이유가 있지만 신에게 있는 이유도 필요합니다.”

시드룬이 대답했다.

호기심이 살그머니 피어올랐다.

왜 죽기 전에는 그에게 이런 걸 물어보지 않았을까?

‘시드룬과 같이 있는 게 편해지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투이나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럼 처음 올 때부터 아르힘 님을 만날 생각이었나요?”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게 청혼했나요?”

투이나의 마지막 질문에 시종들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새 시드룬에게서 옮았는지 투이나까지 민감한 얘기를 척척 꺼내 들었다.

물론 본인이 민감하지 않아서 한 소리다. 이 정도 질문은 받아 줄 사람인 걸 아니까.

그런데 시드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투이나가 더 놀랐다.

시드룬이 길게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에게는 따로 바라는 일이 있습니다.”

어쩐지 기분이 오묘하다.

“무엇인가요?”

“당신과 결혼하여 당신의 몸을…….”

“루가 님!”

이어지는 말에 시종이 비명을 질렀다.

거의 악을 쓰는 소리였다.

“이렇게 구혼자 한 명과 따로 오래 계시면 아니 됩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 항의가 들어올 겁니다!”

“참, 그랬죠.”

퍼뜩 투이나가 정신을 차렸다.

구혼자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날짜까지 돌아가며 정하지 않았나.

샨이 알면 불같이 화를 내든가 억지로 투이나를 붙잡아 두든가 둘 중 하나였다.

둘 다 곤란하기는 매한가지다.

계속 뒤집어쓴 천을 붙잡는 것도 슬슬 손이 아파 와서 투이나는 순순히 시드룬을 보내 주었다.

“아무래도 자세한 얘기는 미뤄야겠네요.”

“알겠습니다.”

시드룬은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궁금한 쪽은 투이나다.

‘시드룬이 진짜 범인이라면 날 왜 죽였는지도 말하지 않을까?’

묻는 대로 술술 부는 시드룬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그가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든 모습만큼은 정말 상상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아냐. 좀 더 적당한 때가 있겠지.’

다짜고짜 왜 나를 죽였냐고 물었다간 본전도 찾지 못할 게 뻔했다.

게다가 실은…… 아르힘에게 대답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나타난 의심스러운 인물이 따로 있었다.

투이나는 일단 그쪽을 먼저 파 보기로 다짐했다.

“시드룬?”

“예.”

“다른 사람에겐 우리가 오늘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 줘요. 분명 곤란해질 거예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드룬이 무심하게 손을 들었다.

곧 연보라색 빛이 환하게 나타나더니 그가 사라졌다.

시드룬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뒤에야 투이나가 제 몸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었다.

“휴……. 큰일 날 뻔 했네요.”

“큰일은 이미 났습니다!”

시종이 뒤에서 천을 둘둘 말았다.

얼굴에 피가 몰려서 핏줄까지 서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수호신도 없는 무례한 인간이 저 지경일 줄이야.”

“마법사가 저렇게 멋대로 신전을 돌아다니면 안 되죠! 애초에 왜 구혼자들에게 거처를 정해 줬는지 전혀 이해를 못 했답니까?”

“음, 시드룬에게 다시 말해 볼게요.”

“그러다 제 몸만 상하지.”

“……?”

“마법과 신의 힘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흥. 아르힘 님의 관대함으로 감히 신전에서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줄도 모르고.”

시종이 그를 비난했다.

마법사는 평범한 인간보다 신의 힘에 취약했다.

사람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능력을 자랑하는 마법사라도 수호신의 가호를 받는 전쟁터에 종종 끌려가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신의 힘에 닿기만 해도 피를 토한다는데, 현신까지 가능한 아르힘과 마주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굳이 본인이 직접 만나겠다니.’

시드룬이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죽기 전에도 그와 아르힘에 대한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마법사에겐 불편한 주제일 거라 짐작해서 일부러 피했기 때문이다.

‘아르힘 님을 만나도 안전하니까 만나려고 했겠지?’

확신할 순 없었다. 죽기 전까지 시드룬이 살아 있긴 했지만, 워낙 변수가 많은 인물이라.

“사제님들과 이야기해 볼게요.”

“그러시겠습니까?”

시종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늘은 구혼자들이 도착하는 날이라 특별히 면담이 없었지만 내일부턴 원래 일정대로 움직여야 했다.

루가의 일정은 널널한 편이다.

신학 교육, 사제 면담, 기도, 정기 의회, 시찰 정도다.

원래 투이나가 신전 바깥에서 살았음을 고려하면 적당한 배려였다.

다만 이번 해는 구혼자가 등장해서 자유 시간이 대폭 줄어들고 대신 정기적인 만남이 추가되었다.

그 첫 번째 차례가 샨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투이나는 시종에게 부탁해 양피지를 한 아름 받았다.

구혼자들의 정보가 적힌 문서였다.

죽기 전에 이미 읽어 본 것이었지만 혹시 그때 놓친 정보가 있나 싶어서였다.

“후우.”

투이나가 문서에 낀 얇은 부스러기를 불어냈다.

샨 아르파 모하세스.

모하세스 왕가의 첫째 아들.

어머니만 생존, 아버지는 왕실 무덤에 안치되었으며 두 동생 중 한 명이 전사하였다.

수호신은 아르파.

핏줄로 축복이 이뤄지는 형태.

아르파의 축복 덕분에 세 살 때부터 검을 잡고 다섯 살 때 이미 전투에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17살, 아르모압 정복. 19살, 길리안티나 정복. 20살, 세르뭄 정복.

그리고 그가 도착한 네 번째 나라가 바로 아르힘이었다.

투이나는 걱정스레 문서를 말았다.

‘역시 수상해…….’

계속 전쟁을 이끌던 왕이 갑자기 청혼을 하다니. 그것도 연전연승을 하던 상태가 아닌가.

‘한 번도 패배하지 않던 사람이 다른 행동을 한다면 이유가 뭘까?’

전략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적합했다.

‘샨이 우리는 훌륭한 동맹이 될 거라는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당시 샨은 당연히 투이나가 청혼을 수락할 거라고 여겨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나라 아르힘은 소금 호수와 강한 수호신 덕분에 언제나 부유하고 평화로웠다.

샨의 군사력에 안정된 거점까지 갖춰진다면 대륙 통일도 가능할 거라는 섣부른 전망까지 나올 정도였다.

사제들은 그래서 샨의 청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나의 제국은 다른 신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걸 뜻했으니까.

남은 신이 아르힘이 될지 아르파가 될지 누가 알겠나?

「그자가 당장은 아르힘 님의 힘에 겁을 먹어 선전 포고 대신 청혼을 했다지만, 속에 감춘 야심은 빤하죠.」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다 전쟁이라도 나면 뒷감당은 누가 합니까?」

「아르힘께서 힘을 쓰신다 해도 아르파 역시 강한 신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루가 님께 그런 무도한 자와 결혼하란 말입니까.」

샨과 만난 다음에 사제들의 면담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그걸 또 해야 하는구나.’

투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게다가 범인 찾기도 해야 해.’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꼭, 반드시 의심을 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동기가 있는 쪽이 먼저다.

마지막 밤을 떠올린 투이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날 찌른 검이 여기까지 튀어나와 있었어.’

투이나가 가슴 위로 한 뼘 거리를 만들어 보였다. 피에 젖은 검 끝은 정확히 심장을 꿰뚫었다.

보통 이상의 힘과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꽤 큰 검이었으니 몰래 들여오기도 힘들다.

‘어떻게, 누가 그랬는지만이라도 확실히 알아내면 좋을 텐데.’

투이나가 턱을 괴었다.

지금까지는 검을 쓰는 실력으로 보아 샨이 제일 의심스럽다. 일단은 그가 보여 준 게 있으니.

턱을 괸 손가락이 볼을 파고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확실해지면 그때 알아보자. 사람부터 찾는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항상 이유를 가진다. 자기만의 이유를 갖고도 다른 사람을 찌를 수 있었다.

투이나가 가장 걱정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왜 날 죽였는지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이 죽이려는 마음을 바꾸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살인 동기를 이해하고 그에게 다른 걸 주어야 한다.

“…….”

등잔 기름이 타들어 갔다.

‘그래도 기회는 있어.’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보던 투이나가 덮개로 심지를 눌렀다. 바깥과 차단되자 빛은 연기 없이 사라졌다.

투이나는 짧게 기도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 * *

두 번째 하루가 시작되었다.

‘살아 있나?’

눈을 번쩍 뜨자마자 투이나는 그것부터 확인했다.

혹시나 어제 하루가 통째로 주마등일까 봐 살짝 걱정했다.

손끝으로 명치를 만져 보고 살갗에 난 얼룩까지 확인한 뒤에야 투이나는 안심했다.

전부 그대로다. 과거 그대로.

“루가 님, 일어나셨습니까.”

“들어오세요!”

평소처럼 안부를 묻는 시종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기운차게 일어난 투이나가 제일 먼저 세수를 했다.

환영회가 끝났으니 어제처럼 공들여 몸치장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얼룩을 가리기 위한 화장 시간이 빠질 수가 없어서 투이나의 아침은 제법 긴 편이다.

“오늘이 샨을 만나러 가는 날이죠?”

“그렇습니다.”

분칠하기 편하게 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던 투이나가 팔도 쭉 폈다.

시종들이 열심히 톡톡톡 분을 두드렸다.

“루가 님, 구혼자들 첫인상은 어떠셨어요?”

“그걸 꼭 물어봐야 압니까. 당연히 베인 님이 으뜸이죠.”

“여러분은 어땠는데요?”

흥미가 생긴 투이나가 물었다.

이때다 싶어 시종들이 칭찬 공세를 펼쳤다.

“워낙 소문이 자자했는데, 역시 베인은 참한 청년이더군요. 훌륭한 외모에 예의범절까지 아주 깍듯하잖아요.”

“아, 하지만 전 시드룬도 인상 깊었어요. 연보라색 머리를 가진 사람은 처음 보는걸요.”

“자넨 머리카락으로 결혼을 하나.”

“의외로 샨도 괜찮지 않습니까? 얼굴도 생각보다 근사하고, 몸매가…… 아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동시에 마지막 말을 한 시종을 쳐다보았다.

시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왜들 이렇게 쳐다보십니까? 솔직히 진짜 근육 잡힌 몸매는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구나 하고 감탄했다구요.”

확실히 샨의 덩치는 예사롭지 않은 데가 있었다.

게다가 평생 무술로 다져진 몸이니.

다른 시종들과 투이나가 동시에 끄덕였다.

“하긴 어제 보니 팔뚝이랑 허벅지가 실한 게…….”

“어깨도 넓은 게, 한 번에 두 명쯤은 거뜬히 안겠던데요.”

“죽어도 좋으니 가슴팍 한 번만 쓸어 봤으면…….”

“그만! 루가 님 앞에서 이런 세속적인 얘기라니!”

그나마 제일 점잖은 시종이 펄쩍 뛰었다.

웃겨서 광대가 터질 것 같아 투이나는 볼 안쪽을 씹어 가며 참았다.

“몸이 좋으면 뭘 하나? 결혼 상대로는 불합격이야, 불합격.”

“하긴 아무리 왕이어도 그렇게 야만스러워서야 제대로 루가 님을 공경할 것 같지 않아요.”

“거기선 매일 피로 제물을 바친다던데……. 으으…….”

발목을 칠하던 시종이 부르르 떨었다.

“너무 겁내지 마세요. 설마 아르힘 님의 신전에서 누굴 해치려구요.”

“루가 님, 저희보다 루가 님이 더 걱정이에요.”

“제가요?”

투이나가 깜짝 놀랐다.

“지금이야 아직 루가 님에 대해서 잘 모르니 잘 대해 준다지만, 루가 님이 원래 평민이었다는 걸 알면 분명 난리가 날 거예요.”

“맞아요, 맞아.”

그럴 듯한 얘기다.

심지어 정말 들키기까지 했다.

샨은 외국인이라 루가라는 말이 왕의 다른 말인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구혼 기간 내내 쭉 그렇게 대했고.

나중에 아르힘에는 왕이 없다는 사실과 투이나의 비천한 출생을 알고 난 뒤로 불같이 화를 냈었다.

「감히 이 나를 농락하였나!」

지금 생각하면 투이나가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고 청혼한 쪽이 잘못 아닌가 싶지만.

당시에는 정말 전쟁 나는 줄 알았다.

루가가 나라에 처음 있는 최고 직위이며 수호신이 직접 선택한 사람이라는 걸 거듭 설명하고 달랜 끝에야 겨우 잠잠해졌다.

그렇게 화를 냈으니 청혼을 물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샨은 의외로 ―자존심 때문인지― 끝까지 구혼자로 남았다.

“아앗!”

그때 불현듯 스친 생각에 투이나가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까!”

“헉, 저희가 혹시 꼬집었나요?”

“그건 아니에요!”

바깥에서 호위를 서던 무사제까지 무슨 일이냐고 문을 두드려대서 투이나가 황급히 말렸다.

‘그래. 어쩌면 샨이 내 정체를 알고 배신감 때문에 복수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새로운 추측에 투이나가 정신을 빼앗겼다.

‘들켰을 때는 일단 참았다지만 샨 성격에 자길 농락한 상대를 그냥 참아 줄 리가 없어.’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속인 사람도 없는데 혼자 속았다지만.

‘구혼 기간 내내 신전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으니 더 화가 쌓이기만 했을 거야.’

아르힘의 신전에서 샨은 제약이 많았다. 쌓여 있던 분노가 계기를 만나 터졌다고 보는 게 그럴듯했다.

‘이러면 동기, 실력, 범인까지 딱 맞아 떨어져. 역시…… 샨이 날 죽인 걸까?’

투이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하루 만에 추리해낸 결과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쩌지?’

미래의 일에는 죄를 물을 수가 없다.

지금 샨한테 왜 자길 죽였냐고 따져 봤자 오히려 무슨 소리냐고 역정을 들을 게 뻔했다.

‘역시 처음 생각했던 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고요히 생각에 잠겼던 투이나의 눈동자가 한 순간 빛났다.

* * *

퍽.

바람을 타고 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라오던 시종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

“활을 쏘는 중인가 봐요.”

“예……? 하지만 신전에서는 날붙이의 소지를 금하지 않았습니까!”

“제대로 검사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무사제가 끼어들었다.

시종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무기는 빼앗았지만 몸을 단련한다는 것까진 막을 순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샨이라도 이런 날씨라면 몸이 근질거렸을 거다.

쾌청한 하늘 아래 투이나 일행이 샨의 거처로 마저 향했다.

첫 방문이라 다들 은근히 겁에 질려 있었다.

일행에 포함된 무사제만 넷이었으니.

그때 또 한 번 둔탁한 퍽, 소리가 울렸다.

시종들뿐만 아니라 무사제들까지 예민한 표정을 지었으나 투이나는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곧 하얀 외벽 너머로 시야가 탁 트이며 웅장한 천의 물결이 나타났다.

아르파 식대로 둥글게 천막을 친 샨의 거처였다.

시끌시끌하고 기운찬 분위기가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정적인 신전에 갑자기 시장이 들어선 것처럼 활발하게 불을 지피고 짐을 나르는 하인들이 보였다.

샨이 올 때 워낙 챙겨 온 물건이 많아서 말을 백 마리나 끌고 왔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삼 일 만에 거처에다 새 마구간까지 지었었지.’

새삼스레 감탄하며 투이나가 천막 사이로 발을 들였다.

입구에 꼿꼿이 서 있던 하인 하나가 신원을 파악하고 다가왔다.

“루가 님이십니까. 이쪽입니다.”

딱딱 떨어지는 말투였다.

투이나 일행은 그의 안내를 받아 안 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정작 샨의 하인들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신전의 시종들에게는 그 단호한 절제가 더 오싹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대놓고 구경이라도 하지. 아예 없는 사람처럼…….”

“쉿, 듣겠어요.”

“루가 님에게까지 저러다니, 정말 무례합니다.”

무사제까지 그 태도를 불편해했다.

투이나가 설명했다.

“예법이 달라서 그래요. 우리는 서로시선을 맞춰야 하지만, 저분들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큰 실례라고 들었어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아르힘에 왔으면 아르힘 방식을 따라야죠.”

“흠, 흠.”

뒤에서 들려오는 얘기에도 샨의 하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절도 있는 자세로 발을 멈췄다.

퍽.

아까보다 훨씬 커진 소리가 귓가에서 터지자 시종들이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그곳에 활을 든 샨이 서 있었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과녁을 노려보던 샨이 눈동자만 움직여 투이나를 응시했다.

분명히 그녀가 온 걸 보았는데도 그는 활을 내려놓지 않고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또 한번 강한 힘으로 날아간 화살이 뻑 소리를 내며 부딪쳐 떨어졌다.

화살 끝을 천으로 감싸 놓았던 것이다.

꽂힐 리 없는 화살이라도 얼마나 강한 힘으로 여러 번 쏘았는지 과녁 중앙이 닳아 있었다.

‘굉장해…….’

투이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샨의 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은 배울 만했다. 속에 뭘 품고 있는지 모를지라도.

천천히 활을 내린 샨이 미소 지었다.

그제야 투이나를 알아차린 척 짓는 웃음 속으로 감춰져 있던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기다리고 있었다, 루가.”

샨이 성큼성큼 뜰을 가로질렀다.

가벼운 차림새였다.

셔츠 한 장에 바지만 입었는데, 허리에 화살 통이 달려 있었다.

천이 얇아서 그런지 그의 몸매가 지나치게 잘 보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상의 탓에 탄탄한 배와 넓은 가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와…….’

예전엔 몰랐는데, 아침에 샨의 몸매 얘기를 해서 그런지 적나라하게 시선이 갔다.

시종들까지 흉보던 걸 까먹고 훑어볼 지경이었으니.

투이나가 얼른 시선을 쫓아냈다.

“어제는 너무 일찍 헤어졌지요. 거처는 편안한가요?”

“좀 좁더군.”

샨이 대답했다.

투이나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그의 거처를 예의상 다시 둘러보았다.

‘음, 역시 넓네.’

이게 좁다면 원래 살던 곳은 얼마나 넓은 걸까.

샨이 허리를 짚었다.

“아직 연회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걸 기대했다면 말이지.”

“설마요.”

“따라와라.”

샨이 흘리듯이 활을 놓았다.

하인이 곧장 연무장을 정리했다.

투이나는 두리번거리며 가장 큰 천막으로 향했다.

살대 하나가 거의 작은 나무만 했다.

천막 안에서도 여전히 하늘이 보였다. 천장 군데군데 덮어 두었던 천을 열어 놓아 빛이 쏟아졌다.

두 번에 나눠 지탱시킨 벽과 바닥에는 두툼한 양탄자가 무늬를 맞춰 깔려 있었다.

색다른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도 났다.

감탄하는 시종이 반, 무서워하는 시종이 반이었다.

“편하게 앉지.”

샨이 권했다.

딱히 정해진 자리가 없었는데도 무릎을 굽히자마자 어디서 의자가 튀어나왔다.

대기하던 하인의 솜씨였다.

투이나의 호위 때문인지 하인이 직접 의자를 두지 않고 그녀의 시종에게 대신 의자를 넘겼다.

아르힘에 없는 예법이라 시종이 당황했다.

엉거주춤 엉덩이 밑으로 의자를 넣으려는 걸 본 투이나가 얼른 의자를 뺏었다.

“제가 할게요.”

투이나가 머쓱하게 말했다.

내내 지켜보고 있던 샨이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의 시종이 둔하군?”

“제가 더 잽싸서요.”

투이나가 적당히 대답했다.

샨은 반응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으음……. 어떻게 시작하면 좋지?’

사실 투이나는 오기 전부터 그에게 할 말을 정해 두고 있었다.

샨이 범인이라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솔직해지는 게 가장 낫다고 판단했다.

‘자기를 속인 대가로 복수하고 싶어 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밝히는 게 나아.’

샨은 투이나의 신분이 천하다며 싫어했고, 오랫동안 속였다며 또 분노했다.

그럴 바엔 화날 이유를 한 가지라도 줄여 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막상 샨을 눈앞에 두니 입을 떼기 쉽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유성우를 닮아서 사방으로 튀었기 때문이다.

투이나는 긴장해서 마른 입술로 서두를 떼었다.

“실은 따로 말할 게 있어서 먼저 만나자고 했어요.”

“그래? 난 당연히 나를 처음으로 만나러 올 줄 알았는데.”

“아마 샨이 들으면 화를 낼 얘기라 서둘렀습니다.”

“내가?”

샨이 찡그렸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의중을 가늠하듯 진해졌다.

“화를 낸다니,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안 가는군. 일부러 화나게 할 생각인가?”

“말하지 않으면 더 화가 날걸요.”

그제야 샨이 흥미를 보였다.

“털어놓아라.”

“샨은 루가를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걸 그대가 어떻게 알지?”

“절 대할 때와 달리 다른 구혼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죠. 특별 취급은 반갑지 않아요.”

“그들이 신경 쓰이나?”

샨이 턱을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입술이 느리게 내려갔다.

“지배자가 돌보는 자를 생각하는 건 미덕이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나약함이 된다, 루가.”

“바로 그런 점이 문제라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열성적으로 말하던 투이나가 목소리를 한 단계 낮췄다.

“저는 그들과 같아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정말이에요. 당신은 루가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나와 똑같이 신의 선택을 받은 자. 고귀한 임무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지. 다른 이들은 군말 없이 따르는 게 제 의무를 다하는 길이다.”

샨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투이나는 완고한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만약…… 샨이 선택을 받지 않았다면요?”

“상상으로라도 그런 일은 없다.”

투이나가 작게 웃었다.

진심이 저렇게 단호할 수도 있구나.

“제겐 상상이 아니었어요.”

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전 원래 루가가 아니었거든요.”

침묵이 흘렀다.

샨의 시선이 예리해졌다. 진실을 가늠하려는 훑어보는 시선에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곧 농담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샨의 눈이 놀랍도록 차가워졌다.

“설명해라.”

“아르힘에는 왕이 없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안의 다섯째로 태어났어요. 아르힘 님의 부름을 받고 루가가 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조여들었다.

샨의 하인들조차 훅하고 숨을 들이마실 정도였다.

착각이겠지만 샨을 중심으로 일렁이는 분노가 보였다.

투이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화를 낸 건 아냐. 어쨌든 아직 소리는 안 질렀잖아. 그때 겪었던 분노보다는 약해.’

압박을 이겨낸 투이나가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듯해 먼저 말을 꺼냈는데 잘한 일이었네요. 모르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샨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니 청혼을 물린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청혼을 취소하길 바라는 건가?”

샨이 조용히 말했다.

“본인이 가진 약점을 먼저 털어놓고 내가 거부하면 일이 다 끝날 것처럼 말하는군.”

투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히 은은하게 분노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도 어쩐지 품고 있는 뜻이 조금 이상했다.

“그저 샨을 속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정말 그뿐이라면 이름을 부르는 짓부터 멈춰라.”

서슬 파란 단어가 날아와 투이나의 말을 잘랐다.

“네 말대로라면 감히 나와 말을 섞을 신분이 아니지 않은가.”

투이나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랬다.

원래라면 샨의 행렬을 사람들 틈에 끼어 같이 구경했을 신분이다.

어쩌면 그마저도 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전혀 다른 미래잖아.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걸.’

실제로 겪은 미래를 갖고 있는 투이나에게 가정법은 어색했다.

그렇다고 샨에게 그런 얘기를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적절한 말을 고르느라 투이나는 한동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샨은 자신의 입으로 비밀을 털어놓고는 어떻게 할 줄도 모르는 인간을 응시했다.

뻣뻣하게 굳은 목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는 투이나를 보자 샨의 속에서 무언가 삐걱거리며 엇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루가겠지.”

“……그래요.”

“후우.”

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 들어찬 분노의 불길을 빼는 동작이었지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어깨가 하나같이 움찔했다.

그때까지 곧게 앉아 있던 샨이 삐딱하게 몸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내게 당당하게 굴 만큼의 배짱은 있군.”

형형한 눈빛이 냉정하게 보일 만큼은 누그러졌다.

“청혼은 취소하지 않겠다.”

투이나의 입이 딱 벌어졌다.

딱 봐도 어리둥절해진 투이나를 보며 샨은 짐짓 어금니를 갈았다.

“아르힘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루가라는 사실은 확실하니 그거면 충분하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되물으며 다른 방향을 보던 샨의 눈동자가 찌르듯이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다행이죠.”

투이나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어……. 당연히 취소할 줄 알았는데.’

역시 처음에 말하길 잘한 걸까.

심지어 샨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했다.

“루가에게 청혼을 할 때는 다른 정보를 구할 수가 없었다. 알 만큼은 안다 생각해 청혼한 내 불찰도 있군.”

그럼에도 불찰이라고 말하는 턱만큼은 오만하게 보였다.

“나는 날 속이는 인간이 싫다. 진실을 남의 입으로 듣는 건 더욱 저열하지.”

샨이 불쑥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러니 내게 할 말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온다고 약속해라.”

다짐을 받아내려는 눈빛이었다.

투이나가 반사적으로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가까워…….’

분명히 샨은 건너편 의자에 멀리 앉아 있는데 그저 상체를 숙인 것만으로도 코앞까지 다가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인 뒤에야 투이나가 대답했다.

“그래요.”

“좋아.”

샨이 물러났다.

그제야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검이 매달린 허리춤을 붙잡고 긴장해 있던 무사제들도 손을 내렸다.

그들을 경계하던 샨의 하인들도 보이지 않던 신경전을 멈췄다.

“휴우……. 목이 마르네요.”

분위기를 바꾸고자 투이나가 다과를 청했다.

곧 식사 때라 마실 것과 함께 과하지 않은 간식이 들어왔다.

“윽, 저게 다 뭐야.”

근처에 서 있던 시종 하나가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르파 사람들은 육식을 즐기다 보니 강한 향신료를 좋아했다. 때문에 간식으로 나온 음식들도 하나같이 톡 쏘는 향이었다.

냄새를 처음 맡아 본 시종들은 찡그려지는 얼굴을 감추느라 난리였다.

무례한 행동이 신경 쓰였지만 투이나는 여유가 없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할 생각이었다.

“고마워요, 샨. 좋은 음식들도 그렇고, 오늘 화도 안 내고 이야기를 들어 줘서요.”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샨이 피식거렸다.

‘어? 제법 웃기도 하고. 정말 괜찮은가 봐.’

투이나가 안도했다. 일이 잘 풀렸다.

‘검에 찔릴 걱정 하나는 덜었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투이나는 선뜻 아르파 음식에 손을 가져갔다.

원래 입맛이 까다롭지도 않았고, 지난 1년 동안 그와 지내며 아르파 음식에도 이미 익숙해졌다.

심지어 아르파 특유의 알싸한 매운 맛은 가끔 생각나기까지 했다.

투이나가 거리낌 없이 먹자 모두가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외국인이 우리 음식을 좋아하는 건 처음 보는군.”

“먹어 보기 힘든 맛이긴 하죠.”

투이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공들여 요리한 음식이잖아요. 어렸을 땐 음식이 있기만 해도 좋았는데. 이건 정말 맛있어요.”

“루가가 되기 전엔 가난했나.”

“꽤 가난했죠.”

샨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무슨 반응을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지만.

하다못해 정말 맛있나, 그랬다면 기쁘다, 같이 먹자, 뭐 이런 반응이라도 나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럼 친해졌다고 착각이라도 해 볼 테니.

‘어쩔 수 없지,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 갑자기 샨이 툭 내뱉으며 턱을 괴었다.

“난 빈곤한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

“그들은 대개 자신의 불행을 얘기하기 바빠 무엇에 얽매어 있는지를 남에게 드러내곤 하지.”

“…….”

“하지만 그대는 괜찮군.”

투이나는 멍해졌다.

‘왕은 다 저런가?’

평가가 아주 가혹했다. 원해서 얻은 가난도 아닌데 얘기까지 즐겁게 하라니.

투이나가 눈을 치뜨는 동안 샨이 혼자 쿡쿡거렸다.

“역시 루가가 된 덕분인가?”

샨이 짧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별로 반갑진 않았다.

저렇게 웃는데도 상큼하긴커녕 으스스한 느낌까지 들었다.

짐승이 이를 드러내면 보통 미소가 아니라 공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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