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레이린은 굉장히 오랫동안 걸었다.
사방이 온통 환하고 따스했다. 주변의 형체가 뚜렷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포근한 감각만은 선명해 별다른 의문이 일지 않았다.
레이린은 안온한 감각에 취해 있으면서도, 이따금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등 뒤를 한 번씩 돌아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형체 없는 힘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레이린이 망설이는 듯하면 등을 떠미는 힘이 점차 세졌다. 그녀가 끝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돌리면 불안감은 언제 찾아왔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지루할 정도로 단조롭던 주변 풍경에 변화가 일었다.
‘강?’
저 앞에 강이 하나 있었다.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귓가를 울렸다.
‘저건.......’
그리고 그 강의 너머. 꽃이 만발한 동산 위에서,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놀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에 황금색 머리카락이 찬란하게 빛났다. 바람에 꽃잎이 흩날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어째서인지 저들에게로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레이린은 홀린 듯 걸음을 옮겨 강으로 다가갔다. 흰 맨발이 강과 동산을 잇는 다리를 디뎠다.
‘조금만 더.’
동산에 가까워질수록 몸이 점차 가벼워졌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며 걸음을 재촉했다.
짤그락.
‘......?’
다리의 중간을 밟는 순간, 이질적인 소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며 시선을 내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발목 위로, 작은 구슬을 엮어 만든 발찌가 걸려 있었다.
레이린은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또다시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그녀는 선뜻 걸음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
그때, 강 저편의 동산에서 웃고 있던 누군가가 레이린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황금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여인이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리를 절반쯤 건너온 여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레이린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레이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여인이 돌연 생긋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생했다, 아가.”
“아.......”
“이제 돌아가 쉬자꾸나.”
여인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레이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러나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그녀에게서 제 손을 빼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그러니?”
여인이 의아하게 물었다. 어딘지 익숙한 눈매 아래의 황금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레이린은 속으로 저가 왜 이러나, 싶어 당황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마음과 달리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저는 돌아가고 싶어요.”
여인은 그 말에 한순간 입을 벌렸다가, 이내 친숙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소중한 게 생겼구나. 영원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인간이 중하니?”
레이린은 잠시 고민한 끝에 말문을 뗐다. 온기 속에 부유하는 듯 희미했던 정신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모든 인간이 사랑스러운 건 아니에요.”
“.......”
“그렇지만 분명 사랑스러운 인간은 존재해요.”
혼란스럽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레이린은 미소를 띤 채 저를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그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남은 시간을 걷다가, 같은 끝을 겪고 싶어요.”
설령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이 고통뿐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단조로운 행복만이 가득할 영원보다는, 슬픔과 기쁨이 엉망으로 뒤섞여 있는 다채로운 찰나를 택하고 싶었다.
“그래. 네 선택이 그렇다면야.”
여인은 그 대답에 환하게 웃음 지었다. 레이린은 그 미소에 어딘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깜박였다.
여인이 레이린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서며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레이린이 지나온 다리의 끝에 새하얀 문이 생겨났다.
“가렴.”
여인은 레이린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레이린은 문 앞까지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끝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엄마는 괜찮아.”
그 말에 레이린이 눈을 크게 떴다. 뒤늦게 제자리를 되찾은 기억에 무어라 입을 벌리는 찰나, 새하얀 문이 돌연 밝게 빛났다.
“행복하렴, 내 아가야.”
기쁨이 담뿍 담긴 속삭임을 끝으로, 레이린의 몸이 흰빛에 집어 삼켜졌다.
* * *
아직은 푸르스름한 새벽.
“아.”
에드윈은 정원에 피어 있는 꽃을 꺾다가 말고 무심히 신음했다. 꽃을 꺾다가 가시에 스친 것인지 손끝에서 피가 방울방울 배어 나왔다. 작은 상처라고는 하나 충분히 고통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무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새파란 눈에, 그의 눈만큼이나 푸른빛의 장미 봉오리들이 여럿 비쳤다.
“.......”
에드윈은 잠시간 눈 덮인 장미 봉오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레이린의 유리관 옆을 꽃으로 장식하게 된 이후, 그는 평소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꽃말을 알아보기까지 했다. 행여 좋지 않은 꽃말을 지닌 꽃을 그녀의 곁에 두게 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자연스럽게 푸른 장미의 꽃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불가능, 혹은.......
‘기적.’
에드윈은 잠시간 제 손에 들린 꽃들을 내려다보았다. 신력의 여파 탓에 모든 꽃이 드물게도 생생하고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그것이 차가운 유리관에 박제되듯 누워 있는 제 연인의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강한 악력에 아름답게 피어 있던 꽃들이 엉망으로 짓이겨졌다.
무거운 숨을 내뱉은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저도 모르게 기원했다.
‘신이시여.’
살면서 단 한 번도 신을 믿지 않았던 남자가 신을 찾았다. 에드윈은 엉망이 된 꽃을 쥔 손에 고통스럽게 얼굴을 파묻었다. 코끝에 싱싱한 풀 향이 잔인하리만치 진득하게 맴돌았다.
‘제발.......’
제발, 제발. 당신이 그리도 아끼고 아끼던 그녀를....... 레이린을.
‘돌려주십시오.’
그렇게 비는 순간이었다.
사박-
작은,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인기척이 등 뒤에서 가까워졌다. 에드윈은 한순간 숨이 멎는 듯해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가, 이내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신부의 것처럼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정원의 입구 너머로, 에드윈에게 등을 보인 채 넋이 나간 듯 주저앉아 있는 남자의 머리카락은 옅은 회청색이었다.
“에드.”
죽은 사람처럼 핏기없는 입술이 아니라, 보기 좋게 혈색이 오른 입술이 벌어졌다.
레이린의 맨발이 닿는 곳마다 눈이 녹으며 새싹이 텄다. 그녀는 초록의 잔상을 남기며 에드윈의 앞에 멈춰 섰다.
에드윈은 차마 시선도,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저 굳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레이린이 불현듯 물기 어린 웃음을 머금었다.
“참 멀리 돌아왔지, 우리.”
“.......”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말하고 싶어서.”
레이린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손을 뻗었다. 엉망이 된 꽃다발의 반대쪽 손을 깍지 껴 붙잡은 그녀가 나직이 읊조렸다.
“나의 남은 시간, 삶, 생명.”
헤르기아스에서 통용되곤 하는 결혼식의 서약문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 모든 것을 바쳐 일평생 당신 하나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하오니.......”
레이린이 걸음을 조금 더 옮겨 에드윈과 가까이 섰다.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고는 말을 맺었다.
“이를 받아들이겠다면 신랑은 신부에게 맹세의 입맞춤을 하십시오.”
직후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트린 에드윈이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레이린을 끌어당겼다. 허리에 팔이 휘감기고 커다란 손이 뒷덜미를 감싸자 그녀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벌리며 서로를 휘감아 안았다. 백날을 목말라 했던 사람처럼 혀를 얽고, 입술을 맞대어 비비며 갈급하게 서로를 탐했다.
맞닿은 입술 새로 눈물의 맛이 났다. 레이린은 그것을 느끼고는 또 한 번 웃어 버렸다.
눈 내리는 어느 새벽. 푸른 장미가 한가득 피어난 정원에서, 그들은 마침내 영원을 약속했다.
Epilogue.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게 완벽해야 해! 알아들었나!”
“옙!”
“좋아! 움직여!”
군기가 바싹 들어간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궁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경쾌한 걸음으로 단상에서 내려서는 엘빈을 본 키안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그냥 사용인을 더 고용하자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키스티엘 경.”
그 말에 엘빈은 팔짱을 끼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이린이 사람을 무작정 많이 부리는 걸 달가워하진 않을 텐데? 적은 인력을 효율적으로 바쁘게 굴리는 거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그렇군요. 그보다 폐하라고 불러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무례합니다.”
키안이 안경을 추켜 올리며 날카롭게 지적했다.
몇 달 사이 헤르기아스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영지의 구분이 사라지고 대륙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호노라투스’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왕도’라는 말이 그를 대체했다.
루에이리 왕가의 흔적을 지우는 일만큼, 새로 통합된 대륙을 다스릴 자를 세우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영주들은 레이린의 동의를 얻어 그녀를 왕으로 추대했다.
기실 민심은 에드윈과 레이린, 두 사람에게 나누어 쏠려 있었다. 하지만 상징성과 명분을 따지자면 살아 있는 신이라 불리는 레이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옳았다. 레이린 본인이 동의했다고는 하지만, 키안은 혹 그녀가 사람들의 말에 떠밀려 반강제로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닐지 걱정했다. 하지만 레이린은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내가 선택한 나의 사람들이니까. 오히려 이렇게 책임질 수 있게 되어 기쁜걸.’
그렇게 말하는 레이린은 이미 그 자체로 ‘군주’였다. 그 모습을 본 키안은 걱정을 훌훌 털어 버리고는 기꺼이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한편, 언제나처럼 깐깐한 태도에 얼굴을 찌푸린 엘빈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투덜댔다.
“알겠다니까요.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실수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머지는 믿고 맡기겠습니다.”
“별말씀을. 한데, 달리 가실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레이린 보러 갈 겁니다. 수고하십시오.”
“뭐라고요? 이 미친......!”
키안은 제게 일을 떠넘기고 레이린에게 가겠다는 엘빈의 말에 분통을 터트리려 했으나, 흰 은발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후였다.
“하여튼 쥐새끼 같기는.”
혀를 끌끌 찬 키안이 깊은 한숨을 삼켰다. 그는 그래도 제가 아니면 누가 또 이 귀찮은 일을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나 싶어 몸을 바로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두서없이 허공을 떠돌았다.
햇살을 받은 왕궁이 새하얗게 빛났다. 색색의 장식과 줄들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왕궁을 장식하고 있었다.
키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날씨 한번 좋군.”
오늘은 ‘레이린 아스트리드 이티엘’의 대관식 날이었다.
한편, 본궁 2층의 한 방.
“세상에.......”
헬레나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으며 감탄을 흘렸다. 그 곁에서 마거릿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연신 감탄했다.
“너무 아름다워요, 레이린! 아, 아니. 폐하.”
들뜬 마음에 무심코 레이린의 이름을 입에 담았던 마거릿이 황급히 말을 고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수많은 이의 손길에 둘러싸여 있던 레이린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말아요, 마거릿. 계속 그러면 저도 리브릭 공이라고 부르는 수가 있으니.”
“세상에, 그런 무서운 협박을 하시니 힘없는 저로서는 도리가 없네요. 알겠어요, 레이린.”
마거릿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당당하고도 빠르게 태도를 바꾸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쾌활한 모습에 레이린과 헬레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레이린이 걸친 망토의 끝부분을 매만지던 마담 지젤이 마무리를 마치고 망토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손짓으로 다른 이들을 물리며 말했다.
“......다 되셨습니다. 예식이 끝날 때까지 격한 움직임은 자제해 주십시오, 폐하.”
“알겠네. 늘 고맙네, 지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이날을 위해 유스티아에 있는 제 작업실을 통째로 왕궁에 옮겨 놓은 지젤이 기쁜 듯 생긋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레이린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사용인들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와.......”
헬레나는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감탄했다. 마거릿 또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꺼내지는 않았으나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레이린이 걸친 드레스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함이 돋보이는 흰 드레스였다.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원단 위로 그녀의 머리 색과 같은 금색의 수가 놓여 있었다. 드러난 어깨 위로 새하얀 담비 털이 달린 붉은색의 긴 망토가 흘러내렸다. 황금색 머리카락은 가볍게 틀어 올려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덕에 고개를 조금씩 돌릴 때마다 화사한 빛을 뿌렸다.
“국왕 폐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아름다워요, 레이린 양.”
헬레나가 담백한 어조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만큼 오늘의 레이린은 위엄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똑똑.”
“어머.”
그때, 입으로 장난스럽게 노크 소리를 낸 라그나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놀라 고개를 돌린 마거릿이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숙였다.
“브리어스 공. 오늘 멋지시군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짙은 남색의 예복을 차려입고 머리카락을 깔끔히 쓸어 넘긴 라그나르는 말 그대로 빛이 났다.
그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능숙하게 그 칭찬에 호응했다.
“감사합니다, 리브릭 공. 그보다 부군께서 아래에서 기다리고 계시던데요. 헬레나 영애께서도 이만 내려가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곧 예식이 시작될 테니까요.”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경하드립니다, 폐하.”
헬레나와 마거릿이 몸을 숙이며 뒷걸음질로 방을 나섰다. 레이린이 픽 웃음을 흘리며 라그나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네트 양은?”
“지금쯤 왕도를 벗어나고 있을 거야. 리오넬 제스 경이 배웅을 맡았으니 신변에 관해서는 걱정할 것 없어.”
레이린이 내민 손을 정중히 받쳐 잡은 라그나르가 씨익 웃음 지으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눈부십니다, 나의 왕이시여.”
“......또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하고 내려가자. 이러다가 늦겠어.”
“분부하시는 대로.”
라그나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레이린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부터 대관식이 열리는 별궁까지 붉은 카펫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고 지나는 와중, 라그나르가 문득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번득였다.
“그나저나 에드윈 클로비스 그 새끼. 안 그래도 네가 유스티아에 있을 때부터 불안하다 싶었더니 이렇게 기회라도 되는 양 덥석 너를.......”
“청혼은 내가 했다니까.”
“그걸 받아들이면 안 되지!”
“그러면 나더러 거절당하라고?”
“그것도 안 돼!”
뭐 어쩌라는 건지. 레이린은 결국 조금 커다랗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긴 했는지, 라그나르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앞으로 계속 지켜볼 거야.”
“그래. 앞으로도 계속.”
레이린은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라그나르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씨익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을. 제발 좀 떨어지라고 해도 안 떨어질 테니까 그렇게 알아.”
“기꺼이요, 브리어스 공.”
이윽고 별궁의 입구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본 순간, 레이린의 얼굴에 꽃이 만개하듯 환한 미소가 걸렸다. 라그나르는 그 얼굴을 보고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다녀와, 린.”
별궁의 문 앞에 서 있던 에드윈이 레이린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왔다. 레이린은 새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런 식으로 대관식과 결혼식을 합쳐 버려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에드윈은 담담히 답했다. 하지만 진득한 시선만은 레이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고 그 위로 짙게 입을 맞췄다.
“그에 대한 보상은 밤에 받는 것으로 결정했으니까요.”
손등 위를 간질이는 감각, 머리 위로 행복의 파편처럼 쏟아지는 색색의 종잇조각. 마지막으로, 시선만으로도 저를 향한 열기가 오롯이 느껴지는 사람. 레이린은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제 눈에 새기며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 * *
......이티엘 왕가의 시조는 레이린 아스트리드 이티엘 왕이다. 그녀는 헤르기아스에 강림한 살아 있는 신이자, 수백 년간 이 땅을 병들게 했던 루에이리의 혈족을 몰아내고 평화를 되찾은 ‘구원의 날’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은 본디 레이린 브리어스였으며, 헤르기아스력 497년 10월 4일에 윈프리드(현 푸리엘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본디 루에이리력 346년 10월 4일이라고 표기해야 정확하나, 그녀의 탄생을 설명하는 데 반역자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저자의 생각에 의거, 헤르기아스력으로 교체 표기한다.)
(중략)
레이린 아스트리드 이티엘 왕은 부군인 에드윈 이티엘과의 슬하에 1녀를 두었으며, 이티엘력 43년 향년 65세로 붕어했다. 레이린 왕의 부군이었던 에드윈 이티엘은 그녀의 죽음 이후, 약 한 달여 간 [날개 없는 신을 위하여]라는 자서전을 집필한 후 숨을 거두었다.
필자는 그 끝에 실린 노래를 아래에 첨부하였으며.......
[얀 테나민, ‘신화와 역사의 사이’ 중 발췌.]
* * *
그들은 날개가 없다네.
날개를 버리고 우리 곁으로 왔다네.
온 땅에 웃음과 평화 가득하니.
날개 없는 신이 우리의 곁에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