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87)

* * *

흰 눈이 소리 없이 허공을 수놓았다. 추락의 계절을 상징하던 칼바람이 제 가시를 누그러트리며 조용히 물러났다. 분명 눈이 내리고 있었음에도 사방에 초록이 가득했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온화해졌다.

멸망이 멈췄다. 그 변화를 체감한 사람들은 하나둘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생각을 거쳐 나온 행동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세상을 뒤덮은 빛에 놀라 바깥으로 뛰쳐나온 호노라투스의 시민들 또한 차례로 무릎을 꿇어 자신들이 목격한 광경에 경외를 표했다.

그 가운데, 아네트와 레이린이 맞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종전의 일에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정신을 잃은 그녀의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지며 고개가 휘청 기울었다.

레이린은 그런 아네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제 무릎 위로 기대게 했다. 흰 눈밭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다.

“린.”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그나르가 보였다. 라그나르가 몸을 숙여 레이린의 손을 붙잡았다. 아네트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그 손을 부드럽게 밀어낸 라그나르가 싱긋 웃었다.

“내가 할게. 너는 클로비스 공한테 가 봐.”

“......오빠.”

레이린은 충동적으로 불쑥 말을 내뱉었다. 그 부름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왜 그래?”

“......화나지 않아?”

“왜?”

“내가.......”

루에이리의 핏줄을 살렸으니까.레이린은 차마 그리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나 라그나르는 그녀가 속으로 삼킨 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는 양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네가 결정한 일이잖아.”

“.......”

“그리고 핏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긴 세월 고통받았던 자에게까지...... 죄를 물을 필요는 없겠지.”

라그나르는 아네트를 제 무릎 위로 대신 기대게 하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의 어조에서는 체념이나 절망, 분노 따위가 아닌 평온이 묻어났다.

라그나르는 스토이를 증오했다. 스토이에게서 시작된 루에이리를 증오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모든 루에이리를 죽여 없앨 것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수없이 상처 입고도 간절하게 삶을 갈구하는 눈을 보고 나니.......

‘정말로 이 땅에 신이라는 게 있다면.’

‘살려 주세요.......’

그조차도 예전의 제 모습을 닮은 듯하여 이제는 담담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레이린 본인이 결정한 일이지 않은가.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고, 또 따를 뿐이었다.

“걱정되잖아. 얼른 가 보래도.”

라그나르는 쉽사리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레이린을 달래듯 나직이 말했다. 레이린은 머뭇거림 끝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라그나르는 그러다 입술 상한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끝끝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그녀가 에드윈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드.......”

챙-

이질적인 소음이 벼락처럼 귓가에 내리꽂힌 것은 그때였다. 레이린은 흰 눈밭 위를 구르는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을. 에드윈이, 검을. 놓쳤다고?

멍한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와 대조되게, 지금껏 곧은 자세를 유지하던 에드윈의 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무너졌다.

“에드윈!”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른 레이린이 땅을 박찼다. 잘게 경련하는 에드윈의 곁에 꿇어앉은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를 붙들었다.

“에드? 에드. 정신을.......”

짙고 새파란 눈이 레이린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입술이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달싹였다. 피가 말라붙은 손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힘겹게 올라가다가 툭, 떨어졌다.

......숨이.

“......에드?”

느껴지지 않는다.

레이린은 멍하니 에드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텅 빈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언제나 끈질기리만치 저 하나만을 쫓던 눈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삼켜질 듯 짙고 짙은 색의 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어붙은 돌처럼, 아름답게 세공한 보석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아.’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던 레이린의 시야에, 바닥을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검이 들어왔다. 그것을 본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당장이라도 아네트를 팽개치고 일어날 것처럼 보이는 라그나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안해.’

그녀는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이며 아프게 웃었다. 그 입 모양을 읽어 낸 라그나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사방이 정적인 짧은 틈. 레이린은 그 틈을 타 땅을 구르던 검을 덥석 쥐어 들며 입술을 움직였다.

[나의 어버이, 만물의 주인이시여.]

문득 입가로 자조가 스쳤다.

[이제 저의 비루한 목숨을 제물 삼아 망각의 강 너머의 이에게 배와 노를 내어 주려 하노니.]

아, 이래서였나. 하얗게 흩날리는 눈발, 그 위로 점점이 떨어지던 핏방울, 끈 떨어진 인형처럼 휘청거리는 여린 몸. 처음부터 나는.......

[당신께서 내어 주신 이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당신을 사랑하게 될 운명이었나 보다.

“린, 안 돼!”

라그나르가 절규하듯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푹-!

레이린은 제 손에 쥔 검으로, 제 복부를 찔렀다.

10. 끝과 시작

그 밤에 많은 일이 있었다.

땅 위로 초록이 돋아나고 살을 에는 듯했던 칼바람이 멎었다. 마물들이 구슬픈 울음을 길게 토해 내며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대륙 최북단에 자리한 늪지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이 돋아났다.

대륙이 ‘신의 분노’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날을 ‘구원의 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변화를 체감하는 즉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신의 자비에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지역을 가릴 것 없이 주점은 그 어느 때보다 성황이었다.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삼삼오오 주점으로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까 루에이리가 말이지, 신족에게서 강제로 힘을 빼앗아 쓴 탓에 이 땅이 이 지경이 되었던 거라지 뭐람!”

“세상에나......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끔찍한 짓을.......”

“마티아스의 영주는 죽었다죠?”

“금지된 주술을 연구하겠다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생사람 잡아다가 죽였다더니, 꼴 좋다!”

“애초에 그 주술이라는 것도 신족의 힘을 뺏어다 쓰는 거였다며?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반정이 끝난 뒤, 네 명의 영주가 왕궁에 모여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왕가가 내내 숨기고 있던 비밀들, 왕가와 켈레마의 유착 관계, 마티아스에서 정신 계열의 주술을 연구하며 벌인 수많은 일이 드러났다.

엘빈의 지시로 적령의 길드원들은 평범한 상인의 행색을 한 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죄인들의 이야기를 퍼트렸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또한 분노했다. 지금껏 마물로 인해 고통받고, 지독한 추위로 인해 스러진 생목숨들을 책임지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왕궁 앞에서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하라며 울부짖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 갔다.

결국 네 영주가 직접 시민 앞에 나서서 고개를 숙이고서야 사람들의 분노는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한편, 왕가에서 유스티아에 부여한 반역죄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 또한 밝혀졌다.

“유스티아의 영주님께서는 ‘그분’을 구하시려다가 모함을 당하셨다는 거지?”

“그렇다더라니까! 애초에 영주님께서 진상하신 찻잎에 독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던데, 반역은 무슨 반역!”

“그럼 마티아스와 손을 잡고 진실을 묻으려고 자작극을 벌였다는 거야? 왕이라는 작자가 정말.......”

도저히 험한 말을 내뱉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왕과 마티아스, 켈레마를 욕하면서도 종종 잔을 들어 에드윈과 ‘그분’의 용맹과 자비를 찬양했다.

네 명의 영주가 왕궁에 모여 각 지역 간의 경계를 없애고, 대륙을 통합해 하나의 왕가를 세우려 한다는 이야기가 돌자 사람들의 기대감은 더욱 높아졌다. 사람들은 에드윈, 혹은 멸망을 막고 대륙에 평화를 되찾아 준 ‘그분’이 왕좌에 오르길 바라며 대관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소문 속의 왕궁과 실제 왕궁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 * *

“클로비스 공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키안은 보고를 올리기 위해 영주들의 집무실을 찾았다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늘 단정하게 묶고 있던 연녹색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눈 밑으로는 짙은 눈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상태의 릴리트와 유리엔이 어두운 얼굴로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에서 대답을 읽어 낸 키안 또한 한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또 대연회장에 계신 겁니까, 그분들은.”

“우리가 이해해 줘야 하지 않겠나. 하나뿐인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이니 그리 충격을 받을 만도 하지.”

유리엔이 무거운 목소리를 내며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릴리트는 괜스레 뻐근한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한숨을 삼켰다.

깊이 침잠한 연갈색의 눈이 텅 비어 있는 두 자리를 훑어보았다.

‘두 분...... 괜찮으시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키안 자신 또한 전혀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채로 죽어 버린 듯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감히 괜찮지 않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라그나르는 본궁의 옥상 난간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눈도, 바람도, 더는 매섭지 않고 따스하다는 점이었다.

기실 기온만으로 따지자면 지금은 원래의 ‘봄’이어야 했다. 하지만 신력으로 인해 대륙의 질서가 갑작스럽게 제자리를 찾은 탓에 날씨에는 혼란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라그나르는 넋이 나간 얼굴로 희뿌연 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죽을까?’

이제는 더 지켜야 할 것도 없는데.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단 하나조차 지키지 못하고 잃었는데. 저 같은 놈이 더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레이린이라는 고삐를 잃은 머릿속이 미친 듯 날뛰었다. 남색의 눈에서 빛이 가셨다.

‘그래, 죽자.’

멍한 얼굴의 라그나르가 몸을 일으키며 시선을 내렸다. 발아래로 드넓은 왕궁의 전경이 펼쳐졌다. 그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설핏 미소를 띠었다.

‘곧 만나러 갈게, 린.’

라그나르가 지금까지 중 가장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휙-!

가녀린 팔이 그의 허리를 휘감아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이 휘청 기울어지며 두 인영이 함께 바닥을 굴렀다.

“뭐야.”

라그나르는 저도 모르게 이를 빠득, 갈며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그를 휘감아 안고 있던 인영이 그의 몸 아래에 삼켜지듯 깔렸다. 살기 형형한 남색의 눈이 짙은 녹색 눈을 노려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루나. 죽고 싶어?”

루나는 제 위에서 으르렁대는 라그나르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살기가 고스란히 쏟아지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언뜻 광기가 어린 눈이 루나의 목덜미를 배회했다. 그것이 꼭 이 목을 조를까 말까 고민하는 듯 보여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하지만 턱이 공포로 덜덜 떨려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적어도 레이린은 그녀가 그러길 바랄 것이었다.

루나가 라그나르의 살기를 이겨내려 이를 악물고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미쳤어?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면 죽어! 죽는다고!”

“입 닥쳐.”

“아니! 당신이 그 멍청한 생각 관둘 때까지는 못 닥쳐!”

라그나르는 지나친 분노 탓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루나가 레이린의 친구였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녀를 죽이고픈 충동이 치밀었다.

네까짓 게 대관절 무얼 안다고 함부로 그런 말을 지껄이나.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 줄 알고, 감히 그따위로 입을 놀려.

라그나르가 끝내 이성을 잃고 제 손을 루나의 목 위로 가져다 대는 순간. 루나가 그의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렇게 멍청하게 굴면 전해 주라는 말이 있었어.”

그 말에 거짓말처럼 라그나르에게서 살기가 가셨다. 그가 경악으로 굳어진 채 입술만 달싹였다.

“......뭐?”

루나는 그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무의식중에 공포로 인해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있지, 루나.’

이제는 꿈인 것처럼 느껴지는 어느 한가로운 오후. 루나의 집(정확히 말하자면 레이린이 사 주었던) 소파에 나른히 늘어져 있던 레이린이 손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일찍 죽으면-’

‘아! 너 또 그 재수 없는 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안 전해 줄 거야! 안 전해 줄 거라고!’

그 옆의 소파에 앉아 사과를 깎던 루나가 경기를 일으키며 사과 껍질을 던졌다. 레이린은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과 껍질을 민첩하게 잡아내고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그냥 가정일 뿐이잖아. 응?’

‘.......’

‘만약 내가 일찍 죽어서...... 오라버니가 나를 따라 죽겠다고 난동이라도 피우면 꼭 이렇게 전해 줘.’

레이린의 눈이 곱게 휘었다. 창밖으로 비쳐든 햇살에 황금색의 눈이 더없이 찬연하게 반짝였다. 루나는 그 빛에 한순간 넋을 잃고 레이린을 바라보았다.

“그런 한심한 짓 하면 저승에서도 안 볼 거야.”

루나의 손목을 억세게 쥐고 있던 라그나르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루나는 무언가 공포스러운 것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주춤주춤 몸을 물리는 라그나르를 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시큰거리는 손목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라그나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내 몫까지 오래오래 살다가 와. 그래야 만나 줄 테니까.”

그 말을 내뱉는 루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 이상 말을 잇는 것은 루나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루나는 레이린이 이 말을 꺼낼 때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경기를 일으키거나 내도록 투덜거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조금 더 캐물어 볼 것을.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고. 한 번만 더 물어볼 것을. 그런 의미 없는 후회가 아프게 가슴을 짓이겨 말을 내어놓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볼 안쪽을 짓씹어 피를 내면서까지 레이린의 말을 남김없이 전했다.

“오빠의 세상이...... 나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넓어졌으면 좋겠어.”

“.......”

“행복해야 해.”

그 말을 끝으로 라그나르의 몸이 휘청 무너졌다. 흡사 절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엎드린 그가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으며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루나가 짐짓 냉랭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 같은 멍청이가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윽.......”

“하지만 레이린이 부탁했으니까 이렇게라도 당신을 붙들어 놓는 거야. 그 애가 살라고 했어. 그러니 살아.”

라그나르는 끝내 짐승 같은 신음을 쏟아 내며 오열했다.

그의 등 위로 눈송이가 하나둘 쌓여 가는 동안, 루나는 말없이 그 곁을 지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을 나풀나풀 수놓는 눈송이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나쁜 계집애.’

루나가 입 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도 불그스름했던 눈시울이 한결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날 이후 대연회장 한가운데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대연회장은 불조차 꺼진 채 적막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눈이 내리는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생생하게 피어난 꽃들로 장식된 유리관이 하나 있었다.

흡사 관처럼 보이는 긴 사각형의, 뚜껑이 열린 유리관 안에는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긴 황금색 머리카락이 물결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조용히 감겨 있는 눈 주변으로 자리한 이목구비는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흰 드레스 아래로 드러나는 피부는 핏기가 비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새하얬다.

레이린은 꼭 깊은 잠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누워 있었다.

“.......”

에드윈은 유리관 옆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레이린을 바라보았다.

빛을 잃은 새파란 눈이 레이린의 얼굴을 쓰다듬듯 움직였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제 것으로 만들 듯 움직이던 시선은 그녀의 발목에 있는 발찌에 이르러 멈춰 섰다.

문득 헛웃음을 삼킨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발찌를 건드렸다.

짤그락.

작은 구슬들이 마찰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이것은 분명, 켈레마의 분수대 앞에서 에드윈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세요. 착용자를 보호하는 기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착용자를 보호해 주는 기원이 깃들어 있다던 발찌. 레이린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품 안 깊숙이 갈무리하고 있던 것.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한낱 돌덩이일 뿐이었다.

‘......레이린?’

그날, 분명 그는 숨이 끊어졌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며, 시야가 흐릿해지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 종내에는 온 세상이 암흑으로 물드는 감각. 그것은 분명 죽음이었다. 그는 죽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처음 감각이 돌아오고, 눈을 깜박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꿈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코끝에 감도는 불길한 혈 향에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린.’

복부에 커다란 자상을 입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레이린. 그리고 그녀를 붙잡고 오열하는 라그나르 브리어스의 모습이었다.

‘아.’

에드윈은 그 순간 진심으로 제 목을 조르고 싶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레이린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발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할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막아선 것은 라그나르 브리어스였다.

‘하지 마.’

에드윈이 제 목으로 가져가던 손을 낚아챈 라그나르가 그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겉으로 처절하게 미쳐 있었다면, 에드윈은 속으로 조용하고도 확실하게 돌아 버린 상태였다. 그는 진심으로 라그나르의 손을 꺾어 버리려 했다. 라그나르가 그보다 먼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린이 자기 목숨으로 널 살렸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

‘지금 네 안에 있는 게, 린의 목숨이라고.’

그 말이 벼락처럼 뇌리에 내리꽂혔다. 에드윈은 라그나르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는 순간 실소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단 하나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절망. 그리고 레이린의 생명이 저를 통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저열한 희열이 번갈아 찾아오며 머릿속을 온통 짓이겼다.

신족의 특성인지, 레이린의 시신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부패하지 않았다. 그저 상처를 입은 채로, 차갑게 굳어, 눈을 감았던 그 상태 그대로 잠든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에드윈과 라그나르는 차마 그런 그녀를 땅에 묻을 수 없었다. 릴리트와 유리엔 또한 그들을 말리지 못했다. 내심으로는 썩지 않는 시신을 보며 레이린이 다시 살아나지는 않을까, 하는 미약한 희망이나마 품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구원의 날로부터 이 주일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레이린은 그저 썩지 않는 죽음이 되어 이곳에 안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

유리관 옆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에드윈은 문득 관 위로 쏟아지는 희미한 빛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잠시간 하늘과 관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발찌에서 손을 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하루가 지났으니 또다시 새 꽃을 꺾어와 유리관을 장식할 생각이었다.

에드윈은 단정한, 하지만 인간의 생기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걸음으로 대연회장을 벗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쥐 죽은 듯 누워 있던 레이린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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