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것은 마치 한밤중에 떠오른 태양과도 같은 강렬한 빛이었다.
황금빛 광채가 온 땅을 휩쓸었다. 어떤 이는 그 빛에서 자비를, 어떤 이는 신성함을, 어떤 이는 친근하고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어둠을 가득 메우고 있던 소란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쨍그랑-!
기이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날카로운 파열음이었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던 붉은색의 반투명한 막이 산산이 부서져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로드 에드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라그나르가 바닥에 쓰러진 에드윈을 이끌고 정문 밖으로 나왔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눈 뜰 수 있겠어요?”
“......로드 라그나르.”
에드윈은 온몸과 얼굴이 피범벅인 상태였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그가 희미하게나마 입술을 달싹여 말을 뱉어냈다. 라그나르는 그 사실에 깊이 안도하며 그를 부축했다. 에드윈이 쿨럭, 작게 피를 토해 내며 그의 어깨에 기대어 섰다. 기이한 광채에 얼어붙어 있던 기사와 병사들도 뒤늦게 당황에서 벗어나 소란해졌다.
“의사! 거기 의사 없나!”
“영주님께서......!”
라그나르와 에드윈은 그 소란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왕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본궁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이 없자 기사와 병사들도 하나둘 이상함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고 왕궁을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눈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전 온 땅을 휩쓸었던 황금빛 광채와 꼭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물결을 그리며 흩날렸다. 언뜻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황금빛 눈과 달리, 여인이 손에 들고 있는 검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왕궁의 정문 앞에 모여 선 이들을 발견한 여인의 걸음이 한순간 멈칫 느려졌다.
“.......”
에드윈과 라그나르의 모습을 발견한 황금색의 두 눈이 경악한 듯 크게 확장되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의 여인이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이내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이내 두 사람의 앞에 다다른 여인이 걸음을 늦추었다. 그때까지 라그나르에게 기대어 미동도 없던 에드윈이 비틀거리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동시에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무너지는 에드윈의 몸을 감싸 안았다. 레이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선 에드윈이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태어나 처음 숨을 쉬는 것처럼 생소한 감각이 손끝과 발끝으로 퍼져 나갔다. 잔뜩 굳어 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에드윈을 끌어안은 채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던 레이린이 끝내 눈을 꾹 감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드.”
“.......”
“미안해.”
“.......”
“미안해.......”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또다시 이 빛나는 사람을 상처 입힌 것이 죄스럽고 또 죄스러워서. 감긴 눈꺼풀 아래로 맺혀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드윈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잠시간 그를 끌어안은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레이린이 제 얼굴에 와 닿는 시선에 눈을 떴다. 눈물이 차오를 것처럼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녀는 울며 미소 지었다.
“오빠.”
평소와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느낌의 부름이었다. 라그나르는 그 부름에 일순 작게 입을 벌렸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프게 웃었다.
‘아.’
레이린은 그 웃음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에 또다시 마음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도 기억하고 있구나. 당신도, 잊지 못했구나.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과 미안함, 동시에 그리움과 반가움이 한데 뒤엉켜 속을 복잡하게 짓눌렀다.
그때 에드윈이 또다시 쿨럭, 작게 피를 토해 냈다. 레이린의 어깨 위로 검붉은 핏자국이 스멀스멀 번졌다. 그것을 느낀 그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혈색이 빠져나갔다. 레이린이 다급한 손길로 그를 제게서 떼어 냈다.
“에드?”
에드윈의 얼굴은 레이린보다도 창백했다. 시체와도 같은 얼굴빛에 그녀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라그나르가 곧장 다가와 에드윈을 부축했다. 그가 참담한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아까의 주술, 무언가 심상치 않았어.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그 순간, 천지를 울릴 정도로 거대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전을 때렸다.
[-레이린 브리어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왕궁의 정문과 성문을 잇는 대로의 중간. 어느새인가 제압당해 있는 연합군과, 그들을 둘러싼 마티아스군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티아스군의 가장 앞에 선 채로 아네트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이드리스의 모습 또한.
이드리스는 수많은 사람 사이로도 정확히 레이린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주술로 커다랗게 증폭된 목소리가 뇌리에 꽂혔다.
[당신이 가진 힘의 마지막 조각을 잃고 싶지 않다면, 무기를 버리고 내게 오는 게 좋을 거야.]
그가 아네트의 목덜미에 칼을 더욱 바짝 갖다 대며 말을 맺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레이린에게로 향했다.
레이린은 이를 악문 채 이드리스를 노려보았다. 주홍색의 눈은 얄미우리만치 여유로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다 알아냈군.’
레이린은 이드리스의 손에 붙들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아네트, 그리고 이드리스의 발치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제노의 모습을 보고는 빠르게 판단을 끝마쳤다.
이드리스는 아마 제노와 아네트에게서 레이린이 이 땅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 신력이 심장으로 전해진다는 것 등을 알아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 이르러, 아네트를 인질로 삼아 저를 협박하는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불행.’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바라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불행이다. 그것은 곧 헤르기아스의 멸망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 만약 레이린이 아네트가 지닌 힘의 조각을 되찾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이 땅은 멸망하게 되어 있었다. 레이린을 죽이고 그 심장을 취하여 본인이 직접 이 땅을 멸망시키든가, 아네트를 죽여 간접적으로나마 멸망을 부추기든가. 그것이 지금의 이드리스가 가진 목적일 것이다.
레이린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힐긋 시선을 돌려 이드리스의 주변을 살폈다. 연합군과의 전투 탓인지,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주술사가 에벤뿐인 것을 확인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좋아.”
“린?”
라그나르가 경악한 얼굴로 레이린을 돌아보았다. 그에게 기대어 서 있던 에드윈 또한 말은 하지 않았으나 핏발 선 눈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레이린은 제가 한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협조하지.”
그들에게 힐긋 시선을 던진 그녀가 천천히 사람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 갔다.
챙그랑-!
레이린이 손에서 검을 떨어트렸다.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린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레이린은 무언가 미심쩍음을 감지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이드리스의 시선을 피해 아네트와 눈을 맞췄다.
왕에게서 되돌려받은 신력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의 8할 정도 되는 양이었다. 그마저도 갑작스럽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탓에 레이린이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능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눈물에 젖은 연푸른 눈과 시선을 맞춘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공주님. 아니, 아네트 양.]
턱을 덜덜 떨며 울던 아네트가 제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레이린은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내저어 보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티 내지 말고 들어요.]
‘어, 어떻게.......’
[나를 믿어요.]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흡, 멈췄다. 그녀의 눈에서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양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레이린은 단단한 눈으로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내가 도와줄게요.]
‘.......’
[내가 여기서 세 걸음 더 다가가는 순간, 딱 한 걸음만 앞으로 크게 내딛어요.]
‘하지만.......’
아네트는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제 목덜미에 바싹 닿아 있는 칼날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태양처럼 강렬한 빛의 눈이 그녀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이드리스는 당신을 죽이지 못합니다. 목이 조금 베이는 정도에서 끝날 거예요. 내가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고.]
‘.......’
[용기를 내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아네트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던 연푸른 색의 눈이 이윽고 결연하게 굳어졌다.
아네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한 레이린이 한숨을 삼키며 이드리스를 바라보았다.
“이드리스 프리조프 당신, 혹시 그거 알고 있나?”
“......헛소리하려는 거면 집어치워. 당신이 공주의 힘까지 거두지 않으면 이 모든 게 무용지물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한 걸음.
“아니.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궁금하지 않아? 제대로 들었다면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알 텐데.”
두 걸음.
레이린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
이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은 레이린이었다. 그에 반해 이드리스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레이린은 등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그녀와 발맞춰 움직인 군사들이 긴장된 얼굴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여전히 턱을 덜덜 떨고 있는 아네트가 보였다. 레이린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이드리스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이드리스가 사납게 으르렁댔다. 칼을 쥔 손이 아네트의 목으로 더욱 바싹 다가섰다. 레이린은 그가 곧잘 지어 보이곤 하던, 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속살거렸다.
“-당신의 미래는 어떻게 끝나게 될 것 같아?”
[지금!]
레이린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눈물 젖은 얼굴의 아네트가 이를 악물고는 앞으로 크게 걸음을 옮겼다. 이드리스가 손에 쥐고 있던 칼이 흰 목을 스치며 붉은 선을 남겼다.
“뭐......!”
한순간 당황한 이드리스가 반사적으로 아네트의 목에서 손을 물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라그나르의 비수가 이드리스의 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프리조프 공! 피하십시오!”
에벤이 경악하며 검은 보석을 꺼내어 들고 주술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에셀이 주술석을 부수어 에벤을 기절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레이린은 아네트가 걸음을 내딛는 순간 곧장 땅을 박찼다. 크게 휘청거리는 그녀를 제 쪽으로 당겨 안으며 바닥을 굴러 이드리스의 곁에서 벗어났다.
푹!
“크아아악!”
라그나르의 비수가 이드리스의 눈에 정확히 박혔다. 이드리스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본능적으로 몸을 접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에드윈이 살벌하게 눈을 번뜩이며 뛰쳐나가 검을 휘둘렀다. 바람을 찢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은빛 검이 매섭게 내리쳐졌다.
서걱!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이드리스의 목이 몸에서 떨어졌다. 주홍색 눈은 허공을 가르는 은빛 검날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쿵-!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긴 남빛의 머리카락이 피와 눈, 흙 등으로 엉망이 되었다.
“......끝났어.”
챙그랑, 챙-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 마티아스군이 하나둘 절망적인 얼굴로 무기를 내려놓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네트 양, 괜찮아요?”
레이린은 이드리스의 단말마를 들은 직후 황급히 몸을 일으켜 제 품의 아네트를 살폈다.
아네트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흰 머리칼은 바닥의 눈과 흙이 묻어 얼룩덜룩해졌고, 이드리스의 추궁을 견디느라 몸 곳곳에는 생채기가 있었다. 목에 남은 가는 상처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여태까지 본 것 중 가장 후련하고 홀가분한 얼굴로 울며 웃고 있었다.
“아제트리아 양, 아니...... 브리어스 양.”
아네트가 눈물 젖은 눈을 접어 생긋 웃으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네트는 발을 떼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확신이 없었다.
나는 못 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결국 이렇게 또 무력하게 죽게 될 거야. 지금껏 강박으로 느껴질 만큼 저 자신을 묶어 왔던 말들이 발목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요.]
그 말.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난생처음 타인에게서 들어 본, 할 수 있다는 그 말이. 그렇게나 크게 느껴질 수가 없어서. 그래서 아네트는 무거운 발을 옮겨 저를 옥죄던 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연푸른 눈은 지쳐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희열로 가득 차 있기도 했다.
“.......”
레이린은 그 손을 잠시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제 손을 들어 올려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고마워요.”
아네트의 잇새로 실낱같이 작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부터 퍼져 나온 황금빛 광채가 다시 한번 세상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