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날 밤. 호노라투스를 둘러싼 성벽 안팎에서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앨리슨을 비롯한 몇몇 귀족이 저녁부터 베푼 술과 만찬으로 인해,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대부분이 반쯤 졸고 있거나 아예 잠들어 있었다.
‘빨리, 빨리!’
후드를 뒤집어쓴 앨리슨이 초조한 얼굴로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후드를 쓴 동료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성문 쪽으로 접근했다.
“읍......!”
그들은 성문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경비병들의 입을 민첩하게 틀어막으며 반대쪽 손으로는 주술석을 깨트렸다. 주술석이 손가락 틈새로 자그마한 빛을 발하며 파삭, 부서지자 경비병들의 눈이 뒤집히며 몸이 휘청 기울어졌다. 앨리슨의 동료들은 혹여 경비병들이 땅에 쓰러질 때 큰 소리가 날까 두려워 얼른 그들의 몸을 받쳐 땅 위로 눕혔다.
“지금이야! 당겨!”
경비병들이 모두 쓰러진 것을 확인한 앨리슨이 작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끄덕인 동료들이 성문 옆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둔탁한 소리가 나며 성문이 서서히 벌어졌다. 앨리슨은 행여 성벽 위를 지키는 경비병들이 깨어날까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성문이 삼 분의 이쯤 벌어지자, 그 밖에 서 있는 연합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성벽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연합군이 성문 안으로 물밀 듯 들이닥친 후였다.
“뭐, 뭐야!”
“성문이 열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일단 성문부터 닫아라! 빨리!”
당황한 경비병과 기사들이 뒤늦게 고함을 치며 허둥지둥 무기를 치켜들었다. 저 멀리에 있는 마티아스군 또한 소란을 인지한 것인지 하나둘 막사의 불을 밝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리라 예상한 듯, 성문 안으로 밀려들어 온 연합군은 제일 먼저 앨리슨 일행으로부터 도르래를 넘겨받아 그곳을 방어했다. 유리엔이 한 손에는 세검을, 한 손에는 커다란 은빛 방패를 들고 손수 도르래 앞을 지켰다.
“주술사...... 커헉!”
릴리트를 필두로 한 일부 기사들은 재빠르게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가 주술사부터 제압했다. 앨리슨 일행으로부터 촌장인 에스틴과 주요 전력인 주술사들이 왕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기에 망설임이라고는 없는 행동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 이상 민간인은 절대 건드리지 마라! 우리가 베어야 할 것은 무고한 시민이 아니다!”
“예!”
그사이, 라그나르와 에드윈은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쳐내며 군사를 이끌고 곧장 왕궁으로 내달렸다.
최근 호노라투스를 휩쓴 노래와 이야기, 더불어 왕에 대한 흉흉한 소문 탓에 민심은 진즉 떠난 상태였다. 클로비스 기사단과 브리어스 기사단이 대로를 내달리는 것을 본 시민들은 입술을 꾹 다물며 뒤로 물러났다. 잠결에 눈을 비비며 바깥으로 나온 아이를 얼른 감싸 안아 집 안으로 들어가 숨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이따금 높은 위치로 보이는 귀족들이 사병을 이끌고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크, 클로비스 공? 정말 클로비스 공인가?”
“제기랄. 분명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
에드윈과 라그나르를 막아선 귀족들은 에드윈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너나 할 것 없이 사색이 되어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두 사람은 속도조차 줄이지 않은 채 검을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모조리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성문부터 왕궁까지 절반 가까이 내달렸을 때, 한 노귀족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이게 무슨 무도한 짓이오! 특히 클로비스 공, 당신은 폐하를 살해하려 들었으면서 어찌 그리 뻔뻔하게......!”
“개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에드윈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라그나르가 먼저 싸늘하게 말을 짓씹어 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노기등등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귀족의 목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피가 솟구치고 비명이 난무하는데도 일말의 동요조차 없이 혀를 쯧, 찬 라그나르가 에드윈을 향해 말했다.
“저거 진짭니까?”
“......죽이고 난 후에 물어보시는 겁니까.”
“공이 안 했으면 내가 하려고.”
그는 말끝에 입꼬리를 길게 끌어당겨 히죽 웃었다.
“......로드 라그나르.”
그 웃음을 본 에드윈은 찰나 머리를 스쳐 지나간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당신은 바로크 드 루에이리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습니까?”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개구진 웃음을 띠고 있던 라그나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원한...... 원한이라.”
그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저를 향해 달려드는 귀족의 팔을 잘라 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원한이라고도, 혹은 질긴 악연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군요.”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에드윈은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궁의 정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에드윈과 라그나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고개를 돌려 성문 쪽을 바라보자 릴리트와 유리엔이 호노라투스로 들어오려는 마티아스군을 막아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마티아스군 쪽에 있는 켈레마의 부촌장 때문에 연합군은 서서히 왕궁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에드윈이 손을 한 번 휘둘러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무심히 말했다.
“저들이 여기까지 다다르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뭐. 성벽을 지키던 놈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왕궁도 비슷한 꼴일 것 같습니다.”
라그나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에드윈의 말에 응수했다. 두 사람은 이내 왕궁 내로 진입할 작전과 계획 등을 간략하게 회의했다.
“제가 먼저 들어가죠.”
에드윈은 자신이 먼저 왕궁 안에 발을 들일 것을 자처했다. 그의 시선이 음산한 어둠에 둘러싸인 왕궁을 힐긋 일별했다.
‘에스틴 촌장과 주술사들이 왕궁에 무슨 짓을 해 놓았을지 모른다.’
성문이 열린 지 못해도 30분은 지났다. 왕궁에서도 진즉 이 소란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발을 들이는 것은 에드윈 자신이 되어야 했다. 혹시 라그나르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레이린이 슬퍼할 테니까.
“좋습니다.”
라그나르는 에드윈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신은 반쯤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린은 어디 있는 거지? 혹시 이 부근에 있다가 휩쓸리기라도 하면.......’
그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에드윈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레이린은 왕궁, 못해도 호노라투스 주변에 있을 것이었다. 라그나르는 행여 그녀가 지금의 전투에 휩쓸려 다치기 전에 왕을 죽이겠다 다짐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전군. 진입한다.”
에드윈이 이내 무거운 목소리를 내며 클로비스 기사단과 함께 정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정문 안으로 한 발을 디딘 순간.
“......!”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안에 있던 주술석이 위험을 경고하듯 짧게 빛나더니 산산이 부수어졌다.
“패트릭! 오지 마라!”
에드윈은 본능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제 뒤를 따르던 패트릭을 검집으로 밀쳤다. 무방비하던 패트릭이 그 힘에 정문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바닥을 나뒹군 그가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주군-!”
그때, 왕궁을 둘러싼 담벼락을 기준으로 반투명한 붉은색의 막이 솟아났다. 더불어 정문 안쪽의 바닥에 빼곡하게 새겨진 새빨간 글자들이 일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
에드윈은 말 그대로 뇌를 포함해 사지를 조각내는 듯한 통증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무너졌다.
“주군! 아아악!”
“경, 우선 진정하십시오!”
“젠장, 왜 이렇게 단단한......!”
“주술석도 먹히질 않습니다! 이 정도면 대체 생목숨을 얼마나 갈아 넣은.......”
패트릭이 절규를 토하며 정문 안으로 뛰어들려는 것을 브리어스의 기사가 막아섰다. 라그나르가 기겁한 얼굴로 붉은색의 막을 깨트리려 했으나 반투명한 막은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그 곁에서 에셀이 온갖 종류의 주술석을 동원해 막을 깨트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두서없는 외침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아.......’
점점 온몸의 감각이 아득해졌다. 눈, 코, 입, 귀를 비롯해 구멍이란 구멍에서 죄 피가 쏟아졌다. 에드윈은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의 강한 통증에 짓눌려 바닥에 엎어진 채 힘겹게 바르작거렸다. 우습게도 고통에 눈이 돌아갈 것 같은 이 상황에서조차, 단 한 사람의 얼굴만이 시야에 선연했다.
‘......레이린.’
마지막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어 희미하게 남아 있던 숨이 끊어지려 하는 차였다.
화악-!
본궁에서부터 천지를 밝히듯 환한 황금색 광채가 터져 나와 모두를 집어삼켰다.
* * *
레이린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조용히 움직였다.
왕궁에 잠입해 약 하루 간 사용인들을 살핀 결과, 그녀는 정기적으로 구석에서 주술석으로 통신을 하는 이드리스의 첩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커헉......!”
레이린은 첩자가 이드리스에게 보고를 끝낸 직후 천장에서 뛰어내려 그의 뒷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그 후 기절한 첩자의 입을 막고 전신을 묶어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아마 사용인들 대부분이 해이해진 지금, 그를 발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드리스의 첩자까지 찾아내 처리한 이상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레이린은 검 한 자루를 들고 왕의 침실로 이동했다.
최근 왕의 심기가 어지러워 사용인이 매일 죽어 나가는 탓인지, 왕의 침실 주위에는 문을 지키는 친위대 둘뿐이었다.
‘공주가 도망친 게 알려졌다면 지금 같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공주가 사라진 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왕궁은 잠잠했다. 레이린은 그에 잠시 헛웃음을 삼켰다. 도대체 사용인들이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으면 왕이 직접 명령을 내려 감시하게 한 공주가 사라진 사실조차 모른단 말인가.
‘뭐, 나에겐 잘된 일이지만.’
레이린은 복도 모퉁이 너머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신력이 미약하게 일렁였다. 당장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의외로 별다르게 조치를 해 두지는 않았네.’
레이린은 조금 의아한 기분으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왕의 침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신력의 기운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외려 클로비스 저택의 주술 보호막보다 약하다면 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레이린은 이내 제 속에서 일렁이던 신력을 갈무리했다. 호흡을 짧게 가다듬은 그녀가 침실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발을 떼려던 찰나.
달칵.
“폐하.”
그때 돌연 방문이 열렸다. 문 앞을 지키던 친위대 두 사람이 황망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방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왕이 나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는 이곳을 지켜라.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산책이라도 하려는 것이니.”
“위험합니다. 모시겠습니다.”
친위대가 곧장 반발했다. 그에 자못 잠잠하던 왕의 얼굴이 대번에 와락 일그러졌다. 연푸른 눈을 형형히 번득인 그가 사납게 일갈했다.
“혀가 잘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짐에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따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알겠습니다.”
두 기사는 마지못해 대답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왕은 그들을 뒤로한 채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어딜 가려는 거지?’
레이린은 미간을 설핏 일그러트린 채 조용히 왕의 뒤를 따랐다.
왕이 향한 곳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침실이 있는 곳 바로 위층에 있는 알현실이었다. 이리 깊은 밤에, 서재도 아닌 알현실을 찾는 모습은 절대 자연스럽지 않았다.
‘......뭔가 있어.’
레이린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왕이 알현실의 문을 닫고 사라진 후, 인기척이 충분히 멀어진 후에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옥좌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아무도 없음이 분명한데도 공연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그가 옥좌 팔걸이를 매만졌다. 작게 달칵,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옥좌 뒤로 늘어져 있던 휘장이 걷히며 그 뒤로 문이 하나 드러났다. 왕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린은 조용히 움직였다. 옥좌 가까이 다가가 벽에 난 문 너머를 들여다본 순간.
‘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옥좌 너머로 드러난 공간은 서고였다.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 거기에 꽂힌 무수히 많은 종이와 책. 그리고, 입구를 마주 보고 있는 안쪽의 벽에 커다랗게 쓰인 문구.
「나의 피를 이은 자들아, 명심하거라. 우리가 순백의 눈송이라면, 그들은 눈을 녹이고 봄을 되찾아올 황금빛 태양일지니. 만일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자를 마주하게 된다면 죽임당하기 전에 죽여라. 그는 저주받은 땅의 주인,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죽음에서 돌아온 자일 테니. 유리 왕좌 위에서 춤추는 왕들이여,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그것이 누가 남긴 말인지는 대번에 알아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레이린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바로크 드 루에이리.”
저벅-
이를 갈며 그의 이름을 짓씹어 뱉은 레이린이 서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떤 왕이 몸을 홱 돌렸다.
황금색 머리카락, 황금색 눈. 그것을 확인한 왕의 얼굴에 일순 경악, 공포, 그것을 뛰어넘는 광기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이제라도 어긋난 질서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겠다.”
레이린은 더없이 서늘한 얼굴로 손에 쥔 검을 들어 왕을 겨누었다.
“지금이라도 네 손으로 목숨을 끊어라.”
“.......”
“그렇게 한다면 공주의 목숨은 거두지 않도록 하겠다.”
덤덤한 목소리가 끝맺어지는 것과 동시에, 공포에 질린 얼굴이던 왕이 한순간에 표정을 바꾸며 미친 듯 웃어 젖혔다.
“아하하...... 아하하하!”
한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를 떨며 실소를 흘리던 왕이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질서? 지금 질서라고 했나?”
그는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레이린을 노려보며 웃었다. 직후 돌연 핏발 선 눈을 부릅뜬 그가 귓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질렀다.
“-이 땅에서의 질서는 곧 짐이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발악하듯 외친 왕이 몸을 돌려 벽에 드리워져 있던 휘장을 끌어 내렸다. 그러자 그 뒤로 낡은 검 한 자루가 드러났다. 왕이 그것을 뽑아 들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을, 그녀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시왕이신 엘피스 드 루에이리께서 신을 죽일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검이다.”
머리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불길한 고동 소리가 점차 몸집을 키워 가며 귓가를 울렸다. 분노, 그리고 본능적인 공포로 인해 자꾸만 몸이 굳어지려 했다. 레이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어 간신히 이성을 붙들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왕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광기 어린 웃음을 내비쳤다.
“내 이 검으로 다시 한번 이 땅의 신은 루에이리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리.”
그 말을 끝으로 왕이 땅을 박차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레이린은 옆으로 몸을 틀어 그의 공격을 피했다. 왕은 득달같이 그녀를 쫓아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레이린은 제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검을 재빠르게 쳐냈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피 묻은 검이 튕겨 나갔다. 한순간 놀랄 정도로 강한 충격에 손목이 시큰했다.
‘악력이.......’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사이 또다시 검이 복부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놀람도 잠시였다. 레이린의 얼굴이 차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제 복부를 노리고 날아든 칼날을 흘리며 곧장 왕의 가까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퍽-!
“커헉!”
왕이 커다랗게 숨을 토해 내며 바닥을 굴렀다. 악귀 같은 얼굴을 한 그가 아득바득 몸을 일으키며 옆에 있던 책장을 밀어 버렸다. 커다란 책장이 레이린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다.
“......!”
레이린이 놀라 몸을 피했다. 책장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커다란 소음을 내는 것과 동시에 떨어진 책들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이대로 가다가는 여기가 다 망가지겠는데.’
레이린은 바로크의 검을 막아 내며 그리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서고 안에서 싸우다가는 왕가의 비사와 관련된 기록이 망가질 수도 있으니 알현실로 나가 싸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판단을 끝마친 즉시 레이린은 왕의 공격에 밀리는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가 몸을 홱 돌려 서고를 나섰다. 희번덕 눈을 빛낸 왕이 곧장 그녀의 뒤를 쫓았다.
레이린은 옥좌를 지나 단을 내려오는 와중에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에 곧장 몸을 돌렸다.
챙-!
왕이 크게 도약해 내리친 검이 그녀의 검에 막혀 커다란 소리를 냈다. 왕이 이를 으득, 갈며 검을 물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왕을 서고 밖으로 끌어낸 지금은 거리낄 게 없었다. 레이린은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후 왕에게 달려들었다. 왕은 갑자기 뒤바뀐 레이린의 기세에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사방에서 저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 때문에 그럴 정신마저 없어졌다.
“이, 큭......!”
챙, 채앵-!
쉴 틈 없이 검이 움직였다. 왕의 몸에 하나둘 생채기가 늘어 갔다. 그는 정신없이 레이린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이......!’
왕은 이를 으득, 갈았다. 레이린을 상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녀와 제 실력 사이에 아득한 격차가 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의 레이린은 마치 서서히 목을 옥죄는 뱀처럼 차근히 왕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언제라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양.
얕보이고 있다. 그 사실은 바로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큰 어둠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결국 눈이 돌아간 왕이 한순간 강하게 레이린의 검을 밀쳐 내며 검을 던져 버렸다.
“......!”
레이린이 놀라 움찔 굳어졌다. 그 틈을 타 품에 손을 넣은 왕이 에스틴에게서 받은 주술석을 꺼내고는 절규하듯 외쳤다.
“죽어어어!”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그가 주술석을 깨트리려고 손에 힘을 주는 순간.
푹-!
“끄아아아악!”
레이린의 검이 그보다 먼저 주술석을 쥐고 있는 쪽의 어깨를 관통했다. 왕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주술석을 떨어트렸다. 레이린은 주술석이 떨어져 깨지기 전에 발끝으로 받아 내 알현실 반대편으로 굴렸다.
“끄흐, 으, 아윽!”
왕이 피가 철철 흐르는 어깨를 쥐고는 숨을 헐떡였다. 그가 바닥에 널브러져 몸부림치는 사이 피가 점점 더 넓게 퍼졌다.
왕은 제 주변으로 퍼져 가는 피, 그 피가 닿은 레이린의 발끝, 피 웅덩이에 비친 레이린의 얼굴을 차례로 응시하더니 히득히득 웃음을 흘렸다.
“흐, 흐흐, 흐.......”
죽음을 앞두고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레이린이 뜻을 알 수 없는 웃음에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
레이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왕궁 전체에 섬뜩할 정도로 커다란 신력의 파동이 일었다. 알현실 창밖으로 불길한 붉은빛의 막이 하늘을 뒤덮는 것이 보였다.
‘주술.’
그것은 본능 같은 깨달음이었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거칠게 짓씹었다.
그녀와 같은 것을 느낀 듯, 왕은 고통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일그러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 어, 어떠냐....... 응? 어떠하냐?”
“.......”
“네, 네가 가진, 힘으로, 네가 사랑하는 자들, 을 손수 죽이는, 느낌이, 흐, 흐흐.”
왕은 이제 완전히 광인 같은 웃음을 흘리며 킬킬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돌연 표정을 바꾼 그가 눈을 까뒤집으며 레이린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레이린의 이성이 남김없이 날아갔다.
“입 닥쳐.”
그녀가 이를 아득, 갈며 검을 내질렀다.
푸욱.
칼끝이 살을 가르는 느낌과 함께, 레이린의 검이 왕의 심장을 관통했다. 직후 눈이 멀 듯 환한 황금빛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