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87)

* * *

“저기 보이는군요.”

사박.

청년, 제노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땅 위로 발을 디디며 조용히 말했다. 후드 아래로 가려진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두 귀가 쫑긋 움직였다. 그와 같은 차림으로 곁에 서 있던 레이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흩날리는 눈발 저편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래.”

성벽 근처에 새까맣게 몰려 있는 군대를 확인한 황금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개중에서도 그녀의 시선은, 짙푸른 색 천 위에서 빛나고 있는 황금색 장미 문양에 붙박여 있었다.

“.......”

레이린은 무의식중에 제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꽉 쥐었다. 본디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 색을 감추어 주었던 목걸이는, 어째서인지 이제 아무런 효과도 없이 평범한 장식이 되어 버린 채였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이 기억을 모두 되찾고, 신족의 능력인 ‘언령’도 일부나마 되찾았기 때문이리라. 레이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입을 열어 길게 숨을 내뱉자 새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레이린은 잠시간 말없이 하늘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인족 혼혈, 제노는 그 옆모습을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그는 이곳까지 오는 내내 ‘레이린’이라는 사람이 참 기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느낌은 아무래도 그녀가 신족이라는 이유에서 비롯되는 부분이 클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은 바라보는 것 자체로 경외를 불러일으켰으니.

하지만 레이린이 가장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을 하는 것은 내리는 눈을 바라볼 때였다.

처음으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 날. 레이린은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눈을 한참이나 올려다보고 있었다.

‘.......’

눈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금색의 눈은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노는 그런 눈을 한 그녀에게 차마 무언가를 묻지 못했다. 제 질문이 그녀의 어깨 위로 얹어지면 그대로 먼지로 화해 사라질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 어떤 것도 묻지 못했다.

“가지.”

그때, 레이린이 허공에서 시선을 떼고 나직이 목소리를 냈다. 제노는 제 머릿속을 채운 상념을 지워 내고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군대의 눈을 피해 호노라투스의 성벽을 반 바퀴쯤 돌았다. 성문의 반대쪽에 가까운 곳에 이르자 제노가 수풀을 헤치고 들어갔다. 레이린은 왜인지 등줄기가 오싹한 탓에 경계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은 후에야 그의 뒤를 따랐다.

“이곳입니다.”

제노가 빽빽한 수풀의 어느 부분을 걷어 내자 그 아래로 엉성하게 끼워져 있는, 헐거워진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로 들어가면 골목 끝과 연결됩니다. 다행히 지금은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후드 아래로 그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 수인족 혼혈의 말이니 외려 제 기감보다 믿을 만했다.

레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을 빼내고 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골목 안으로 몸이 완전히 들어오자마자 자세를 바로 하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그사이 제노가 날쌔게 개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돌덩이를 끌어당겨 그들이 들어온 개구멍에 채워 넣은 그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곧장 왕궁으로 가시는 겁니까?”

레이린은 짧게 고민에 잠겼다가 천천히 답했다.

“......그래. 하지만 지금 당장 왕을 죽이러 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건 우선 왕궁이나 그 근처에서 바깥 상황에 대한 정보를 좀 얻고 난 후의 일이지.”

‘왕을 죽이겠다’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표정, 목소리는 싸늘하리만치 무감했다. 제노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살기에 본능적으로 어깨를 굳혔다가, 이내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고개를 저으며 그 뒤를 따랐다.

레이린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골목을 통해 왕궁 주변까지 이동했다.

‘가장 큰 변수는 이드리스 프리조프다.’

레이린이 이드리스의 손에서 빠져나왔으니, 그는 그녀가 향할 것으로 짐작되는 곳에 필시 제 사람을 심어 두었을 것이다.

이드리스는 레이린이 왕가와 무언가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왕궁 안에 그의 심복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왕궁에 숨어들어 왕의 목숨을 거두어야 하는 레이린에게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레이린은 골목 안쪽의,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왕궁의 뒷문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훤히 보였다.

‘오늘 하루는 동태를 조금 지켜보다가.......’

레이린은 이곳에서 경비대의 순찰 일정, 오가는 사람들의 행색 등을 살펴보고 잠입할 생각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평정심이 깨어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레이린은 뒷문을 통해 드나드는 사용인들의 사이, 불안한 기색으로 뒷문을 향해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설프네. 그것도 심하게.’

품에 맞지 않는 하녀복을 입은 여자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언뜻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홀쭉했으며, 연하늘색 눈동자는 불안으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잠깐.’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제노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레이린은 손을 휘저어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선은 가냘픈 인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인은 긴장된 얼굴로 경비병에게 출입패를 내밀었다. 그것을 건성으로 확인한 경비병이 얼른 나가라며 손을 휘적거렸다. 그녀는 곧장 바깥으로 나와 품에 감춰져 있던 검은색 클로크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근처의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레이린은 여인이 모습을 감춘 골목과 주변의 지리를 잠시 살피고는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가자.”

“예? 어디를요?”

“됐고, 일단 따라와.”

레이린은 행여 여인을 놓칠까 봐 제노의 물음을 그리 일축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제노는 조금 의아해하는 듯싶었으나 곧 그녀를 뒤따라 소리 없이 움직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저 앞에서 빠르게 걷고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린은 일부러 옆 골목으로 돌아가 그녀를 앞질러 갔다. 등 뒤를 연신 돌아보며 걸음을 옮기던 여인이 모퉁이를 도는 것과 동시에, 반대쪽 길에서 불쑥 튀어나온 레이린이 그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힉......!”

여인이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 바람에 깊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가 뒤로 미끄러졌다. 후드의 무게 탓에 여인이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 또한 하릴없이 벗겨졌다. 머리를 가리고 있던 천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 아래로 눈송이같이 흰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이, 이거 놔! 놓으라고! 내 말 안 들려? 놓으란 말이야!”

여인은 가냘픈 팔을 어떻게 해서든 빼내기 위해 거칠게 발버둥 쳤다. 그러나 안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다 가늘고 힘없는 팔로 레이린의 악력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레이린은 공황에 빠르게 숨을 헐떡이는 여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강한 어조로 속삭였다.

“아네트 공주님.”

“이거 놓......!”

“공주님, 진정하세요. 접니다.”

낮고 강한 어조의 말에 아네트가 반사적으로 몸부림을 멈췄다. 풍랑을 맞은 듯 흔들리는 연하늘색의 눈동자가 상대의 후드 아래로 향했다. 후드 자락 아래로 설핏 드러난 얼굴을 본 아네트의 눈이 커졌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넋 나간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제트리아 양?”

“예, 맞습니다. 그보다, 왜 왕궁을 나오신 겁니까.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요.”

레이린은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아네트의 팔을 놓아주었다. 설령 그녀가 제게서 도망치려 한들 소용없는 일이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 예상대로, 아네트는 레이린이 팔을 놓자마자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흡사 무릎을 꿇는 듯한 자세로 주저앉은 그녀가 레이린의 클로크 자락을 덥석 붙들며 고개를 들었다.

“아, 아제트리아 양.”

아네트는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눈에 띄게 핼쑥해진 안색이 그러한 기색을 부각했다.

아네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레이린을 올려다보며 빠르게 말을 쏟아 내었다.

“아제트리아 양. 이 힘은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애초부터 바란 적도 없었고, 아바마마가 시키는 것도 따른 적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목숨만.......”

“공주님.”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제발요.......”

레이린이 난처한 얼굴로 몸을 숙여 그녀를 일으켜 주려 했으나 아네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녀의 옷자락을 더욱 세게 그러쥐고 울 뿐이었다. 새하얀 얼굴 위로 눈물이 쉼 없이 쏟아졌다. 그간의 설움이 한꺼번에 닥쳐와 아네트는 말 그대로 오열했다.

왕은 아네트가 ‘계승식’을 거부한 이후로 그녀를 방에 감금하다시피 했다. 식사도, 물도 주지 않고 하루에 한 번씩 찾아와 계승식을 치르기를 강요했다. 그때마다 아네트는 싫다고 소리를 지르며 버텼다. 처음에는 방 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부수던 왕은 이제 아네트의 머리채를 잡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감시를 맡은 하녀들도 인상을 찡그리며 아네트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왕궁의 지리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커튼 너머로 경비병들의 순찰 패턴을 관찰하며 그것을 기록해 외웠다. 하녀들이 자리를 비우는 틈을 타 가까스로 사용인의 복장과 출입패도 훔쳐냈다.

아네트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왕궁을 빠져나왔다. 골목을 걷는 내내 당장이라도 왕의 하수인들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궁으로 끌고 갈 것 같아 뒤를 돌아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도망쳤다. 정확히는 이대로라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잠시나마 그런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레이린을 만난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눈을 목격한 순간. 그 희망은 새하얀 모래가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공주님.”

레이린은 꺽꺽대며 우는 아네트를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아네트를 제게서 떼어 제노에게 기대게 하며 말했다.

“공주님을 데리고 아까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 그리고 곧장 에르치니아군 쪽에 합류해. 다른 사람들은 안 돼. 무조건 영주 중 한 사람을 만나서 레이린 브리어스가 보냈다고 말해. 그러면 받아 줄 거야.”

제노는 반사적으로 아네트의 어깨를 감싸 붙들면서도 반문했다.

“당신께서는.......”

“......나는 여기 남아야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레이린은 그렇게만 답했다. 그녀는 아직도 힘없이 울음을 삼키는 아네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경비병들의 순찰 일정과 왕궁의 비밀 통로, 아직 기억하고 계시죠?”

아네트는 눈을 깜박여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네트처럼 어설픈 자를 서슴없이 궁 밖으로 내보낼 정도라면 따로 의복을 구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었다. 궁의 경비는 현재 엉망일 것이 뻔했다.

그녀에게서 왕궁의 정보를 남김없이 듣고 외운 레이린은 이내 몸을 돌려 사라졌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제노가 한숨을 삼키고는 아네트를 조용히 채근했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그는 골목길을 되짚어 아까 들어왔던 개구멍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스로 호흡을 갈무리한 아네트 또한 힘겹게나마 그의 뒤를 쫓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조금 전 호노라투스로 잠입했던 개구멍 앞에 다다랐다. 몸을 숙여 돌을 빼낸 제노가 바깥에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여기로 나가시면 됩니다.”

“......네.”

아네트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몸을 숙여 구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전보다 더욱 가냘파진 몸은 손쉽게 구멍을 빠져나갔다. 제노는 그녀의 몸이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직후.

퍽-!

“윽!”

강한 충격이 뒷덜미를 강타했다. 제노는 한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느끼고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는 의식이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로도 선명한 주홍색의 눈이 그를 보며 웃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군.”

이드리스는 제 손에 쥐고 있던 주술석을 미련 없이 부서트리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조금 전. 이드리스는 연합군의 동태를 살피러 바깥에 나와 있었다.

‘......?’

성벽의 수풀로 파고드는 그림자를 본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워낙 찰나였던지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본인의 감을 섣부르게 무시하지 않고 파고들기로 결정했다.

이드리스는 곧바로 에벤을 포함한 제 심복들을 데리고 은밀하게 성벽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수풀 사이에 숨겨져 있던 구멍을 발견하고는, 그 근처에서 주술로 몸을 숨기고 먹잇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건 내 생각보다도 훨씬 큰 수확인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여인의 새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그 옆에서 바닥에 널브러진 채 저를 노려보는, 동물의 귀를 지닌 청년까지. 이드리스는 실로 오래간만에 짙은 만족스러움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신께서는 나와 같은 생각이신가 보군.”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제노의 시야가 새카만 암흑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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