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편, 에셀이 호노라투스를 벗어나 연합군에 합류한 후 일주일이 막 지나갈 즈음.
“들어가시지요, 에스틴 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스틴은 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다가 시종장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시종장의 뒤를 따라 알현실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가 등 뒤로 닫혔다.
“켈레마의 에스틴이 이 땅의 주인을 뵙습니다.”
에스틴은 저 멀리 옥좌에 앉은 왕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왕은 짐짓 인자한 미소를 띠고는 물었다.
“그래. 어쩐 일인가, 에스틴? 혹 연구에 진척이라도 있는 건가?”
연푸른 눈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에스틴은 차마 왕과 시선을 맞출 자신이 없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약 일주일 전.
‘-제가.’
‘억지로라도 스승님을 막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녀는 착실하게 자신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던 에셀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했다. 에스틴은 에셀이 성벽을 빠져나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기사와 주술사들의 입단속부터 했다.
물론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에스틴은 에벤이 정신계열 주술에 관련한 자료를 모조리 훔쳐가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기억 왜곡의 주술을 사용했다.
다행히 어설프게나마 주술은 먹혀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쫓았던 것이 산에서 내려온 짐승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에셀의 부재는 감추려야 감출 수 없었다. 연구를 돕게 하고 있다고 둘러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다 한들 식사도, 화장실도 오가지 않는 것은 분명 이상했다.
에스틴이 사용했던 기억 왜곡 주술은 에벤이 관련 자료를 도둑질해 간 탓에 완전하지 못했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이 서서히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 하여 에스틴은 차라리 제 입으로 먼저 사실을 밝히고 죄를 청하고자 왕을 찾아왔다.
에셀을 놓쳤으며, 그 아이가 왕가의 비밀에 대한 자료들을 들고 연합군에 합류했다는 말을 전했다가는 대번에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 사실을 듣게 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은 선택지임이 명확했다. 에스틴은 한참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런, 그런 이유로 찾아뵌 것은 아닙니다.”
“......하면 어쩐 일인가?”
왕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달리 서서히 차가워진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몸을 거의 반 정도 접은 상태로, 그녀가 더듬더듬 에셀의 일을 고백했다.
“제 제자가, 에셀이...... 도주했습니다.”
“.......”
“마수화 주술에 반발하면서, 왕가와 켈레마의 관계와 그 이유에 대해 폭로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붙잡으려다가.......”
에스틴은 말을 맺었을 때 제게 들이닥칠 분노가 두려워 입술만 달싹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분노로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자 외려 숨이 막혔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왕도, 에스틴도 아니었다.
“폐하, 외무부장 길로우 클레타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알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왕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외무부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클레타 공.”
“송구합니다, 폐하. 하나 사안이 중대하여 곧장 전해드려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보고가 끝난 후에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실제로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매무새 또한 단정치 못했다. 그에 왕은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고는 말해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길로우 클레타가 곧장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최근 시민들 사이에 이상한 노래가 퍼지고 있습니다. 한데 그 내용이.......”
그는 빠른 어조로 노래의 가사, 그리고 이따금 사람들 틈에 섞여 ‘신의 분노는 왕가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라는 말을 퍼트리고 다니는 이야기꾼에 대해 털어놓았다.
“하! 하하하!”
왕은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서 실소했다.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던 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노래라, 노래.......”
에스틴과 길로우 클레타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긴장시켰다.
왕은 위태로운 걸음으로 길로우 클레타를 지나쳐 걸었다. 문 옆에 세워진, 기사의 모형 앞에 선 그가 갑주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클레타 공.”
왕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검의 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길로우 클레타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그 부름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왕이 번개같이 몸을 돌려 그의 목을 내려쳤다.
서걱-!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에스틴의 몸을 흠뻑 적셨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흐아아악! 으, 아악!”
지금껏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다고는 하나, 그녀가 사람의 목이 잘리는 것을 눈앞에서 볼 일은 없었다. 에스틴은 난생처음 겪는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왕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엉덩이를 움직였다.
하지만 왕이 한 걸음을 성큼 움직여 몸을 숙이자 그조차도 이어 가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촌장.”
콱!
왕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에스틴의 손 바로 옆에 내리꽂았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쇠락하지 않은 힘에 대리석 바닥이 그대로 꿰뚫렸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연푸른 눈이 에스틴을 산 채로 씹어먹을 듯 노려보았다.
“당장 가서 밖의 역도들을 몰살시키고, 레이린 아제트리아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자네도 저렇게 만들어 주지.”
“힉, 으, 흐.......”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나의 몰락은 자네의 몰락이기도 하다는 것, 설마 잊지 않았겠지.”
에스틴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 탓에 얼굴에 침과 눈물이 줄줄 흘렀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왕은 그 몸짓을 보고는 검 손잡이를 놓으며 몸을 물렸다. 그가 비틀비틀 옥좌로 가 앉는 사이 에스틴은 힘이 죄 빠진 몸으로 기어가듯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지팡이는 챙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후.......”
왕은 옥좌에 앉아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몇 번 깊게 심호흡한 그가 옥좌의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 자리는 내 것이다. 원래부터 내 것이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 아무에게도.......”
그 뒤로도 왕은 해가 다 질 때까지 옥좌에 앉은 채로 같은 중얼거림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왕궁에서 하루에 시체가 몇 구씩 실려 나온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시민들을 넘어 귀족들마저 불안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한 소문이었다.
* * *
에드윈은 제르쉬 평원 초입에서 힐데트 자매를 만나고, 그들을 따라서 유스티아군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 그를 본 클로비스 기사단은 유령이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주군을...... 뵙습니다.”
그러나 단장인 패트릭이 에드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자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양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주군을 뵙습니다!”
기사들의 묵직한 외침이 허공을 떠돌았다. 에드윈은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후드를 벗지 않은 채 덤덤히 말했다.
“일어나라.”
낮은, 하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꿰뚫듯 귓가를 파고들었다. 패트릭을 포함한 클로비스 기사단이 재빠르게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에드윈은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훑어보고, 잃은 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당분간 책임자는 패트릭 웬델이다. 적어도 이드리스 프리조프와 왕이 어떻게 나올지 파악될 때까지는.”
지금 유스티아군은 에르치니아, 벤투스 연합군과 합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의 둔영까지는 하루 이틀 거리가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윈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마티아스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다. 더불어 왕이 상대적으로 호노라투스에 가까이 있는 연합군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하여 에드윈은 당분간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움직이기로 했다. 적어도 그들이 연합군과 합류할 때까지는.
“꾸물거릴 시간 없다. 움직여라.”
에드윈은 칼 같은 명령을 내뱉고는 곧장 군대를 이동시켰다.
영주를 되찾은 유스티아군은 사기가 올라 지금까지 이동하던 것보다 배는 빠르게 이동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루가 막 지나갈 즈음 연합군의 둔영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들이 둔영의 지척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전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어느덧 땅 위를 새하얗게 뒤덮은 상태였다. 멀리서 유스티아군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릴리트와 유리엔, 라그나르, 엘빈이 가장 앞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웬델 경, 그간 고생 많았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나누지.”
릴리트가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던 패트릭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그를 중앙의 막사로 안내했다. 그들을 뒤따르려던 라그나르는 패트릭의 등 뒤에서 후드로 얼굴을 가린 인영이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웬델 경. 등 뒤에 그자는.”
그가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인영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후드 아래로 새파란 눈 한쪽이 찰나 드러났다.
“......!”
라그나르는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에드윈은 그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고개를 숙였다.
“로드 라그나르? 왜 그러나?”
유리엔이 의아하게 물었다. 라그나르는 그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가까스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들어가시죠.”
라그나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에드윈에게 쏠리기 전에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굳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중앙 막사로 돌아갔다.
바깥과 내부가 완전히 차단되고 나서야 패트릭이 옆으로 한 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에드윈이 턱까지 내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제야 인기척을 인지한 이들이 기함했다.
“무슨......!”
“로드 에드윈? 정말로.......”
에드윈은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을 향해 잠잠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모든 것을 부탁드린 것이 저임에도 이리 늦어진 점, 사죄드립니다.”
충격과 혼란으로 인한 잠깐의 정적을 틈타, 그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에드윈의 입에서 나온 ‘감사하다’라는 말에 릴리트와 유리엔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잠시간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한 채로 침묵하다가, 이내 에드윈에게로 다가와 손수 그의 자세를 바로 해 주었다.
“그런 소리 말게. 자네의 판단은 옳았으니.”
“무사해서 다행이네.”
그 순간이었다.
“레이린은.”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영주들의 말 틈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 내뱉는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목소리를 무게로 달 수 있다면 능히 땅끝까지 파고들 법했다.
에드윈은 풍랑이 일 듯 흔들리는 남색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레이린은 저보다 이틀 먼저 정신을 차리고 호노라투스로 향한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카라스테 상단의 도움을 받아 이례적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곳까지 왔으니, 아직 이 근방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드윈은 군더더기 없이 사실만을 털어놓았다. 새파란 눈은 언뜻 차분하게 보일 정도로 텅 비어 있었고, 고요했다. 그의 말에 라그나르가 입술을 꾹 닫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 주위의 이들도 착잡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때, 막사 밖으로 희미한 소란이 들려왔다.
“......누구......!”
“당장 영주님께......!”
그 소란이 어딘지 얼마 전 에셀이 찾아왔을 때와 비슷했다.
시선을 한 번 주고받은 영주들이 곧장 막사를 나섰다. 에드윈은 막사를 나서며 다시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이거 놓으십시오! 아, 좀 놓으라니까! 아프단 말입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에셀의 것과 달리 경박스럽고 시끄러웠다. 유리엔은 미간을 찌푸린 채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그게.......”
“아! 혹시 벤투스의 영주님이십니까?”
병사가 난처한 얼굴로 대답하려던 차에 높은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사람들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몇 병사들에 의해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는 청년이 퍽 절박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는 클레타 가문의 앨리슨이라고 합니다!”
엘빈은 그 이름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뭐지.’
앨리슨 클레타. 호노라투스 중앙 귀족가 중 하나인 클레타 가문의 후계자. 그의 인적 사항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기시감은 그것과는 달랐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엘빈이 제 머릿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려던 찰나, 앨리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문을 여는 데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그의 머릿속에는 반나절 전, 머리와 목이 분리된 채로 돌아온 아비의 모습이 생생했다. 질끈 감은 두 눈 아래로 눈물이 기다란 자국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것은 짙디짙은 공포와 원망으로 이루어진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