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87)

* * *

“어이, 주인장! 여기 술 좀 더 가져다주게!”

“음식을 시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아이고, 죄송합니다! 지금 올리겠습니다!”

어둑한 밤, 호노라투스의 골목 안에 자리한 한 주점. 그간 연합군의 공세 때문에 숨을 죽이고 집 안에 숨어 있던 이들은, 일주일이 가까워지도록 평화롭기 그지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하나둘 슬그머니 주점으로 모여들었다. 그 덕에 오늘도 주점은 성황이었다. 주인은 함박웃음을 띠며 바쁘게 홀과 주방을 오갔다.

한편, 사람들로 그득한 홀의 안쪽. 몇몇 사람들이 술잔을 손에 쥔 채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바싹 낮추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그 노래 들었나?”

“그...... 요즘 애들이 곧잘 부르고 다니는 노래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노래 말일세.”

며칠 전부터 호노라투스에는 기묘한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광장에서 천진하게 뛰놀던 어린아이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우리는 심장이 없다네. 심장을 뜯기고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네.

거짓 영광 위에 올라앉은 자는 누구인가. 도둑맞은 심장의 주인이 돌아왔다네.

그 기묘한 가락과 가사는 막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호노라투스의 주민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의미심장한 가사를 두고 사람들이 두서없는 추측을 수군거릴 무렵이었다.

‘애초에 헤르기아스 대륙이 신의 노여움을 산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아주 오래전에는, 금빛 머리카락과 눈을 지닌 자들이 살아 있는 신이라고 불렸다지.’

‘하지만 신의 분노 이후에는, 누가 신의 사자라는 이름을 가져갔지?’

‘떠돌이 이야기꾼’이라 자칭하는 자가 흘린 몇 마디가 사람들의 뇌리에 선명히 박혀 들었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그가 내뱉은 말 중에 직접적인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호사가들의 머릿속에서는 정체 모를 노래의 가사, 그 이야기꾼이 흘린 말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설마......?’

왕가가 ‘금빛 인간’에게서 힘을 빼앗은 탓에 헤르기아스 전체가 신의 분노를 샀다. 언뜻 들으면 허무맹랑한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어느 것보다도 충격적인 일이다. 그리고 소문은 충격적이고 자극적일수록 더 빠르게 퍼져 나간다. 뒤늦게 불측한 소문을 접한 근위대원과 경비병들이 사람들의 입을 단속하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저쪽이다!”

“당장 잡아! 놓쳐선 안 된다!”

어둠이 깔린 거리에 다급한 발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그 소란에서 가까스로 비켜선 인영 하나가 골목에 몸을 숨긴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젠장, 사라졌어!”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사소한 곳 하나까지 놓치는 일 없이 전부 뒤져!”

“예!”

우렁차게 대답한 근위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은 후드를 푹 눌러쓴 인영은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지켜보다가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순간 그의 곁에는 그와 똑같은 후드를 쓴 인영이 하나 더 자리하고 있었다. 새롭게 나타난 인영 쪽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떤가?”

“한계야. 이미 ‘이야기꾼’의 목에 현상금까지 붙어 있더군.”

“수장께서도 절대 잡히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라 하셨으니 이제 충분해. 이만 몸을 숨겨라. 나는 수장께 연락을 취할 테니.”

“그래.”

고개를 끄덕여 보인 인영이 소리 없이 골목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자는 품에서 자그마한 주술석을 꺼냈다. 그것을 입가에 바짝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당신의 뜻대로.”

말을 맺으며 손에 힘을 주자 파삭,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주술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속에서 검은색의 새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유유히 허공을 가로질렀다.

밤하늘에 묻혀 수월하게 성벽 바깥까지 날아간 그 새는 흰 은발을 지닌 청년의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다.

[당신의 뜻대로.]

엘빈의 손가락 위에 내려앉은 새를 통해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개를 펼친 새의 그림자가 이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새의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몸을 돌려 둔영 중앙의 막사로 향했다.

“성공했습니다. 길드원들은 모두 철수시켰고요.”

엘빈이 입구의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그러자 늦은 밤임에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모여 앉아 있던 이들이 제각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 벽에 기대어 있던 라그나르가 냉랭한 얼굴로 물었다.

“왕궁 쪽 동태는.”

“최근 바로크 드 루에이리의 심기가 좋지 않아 밑에서 쉬쉬하고 있는 모양이긴 합니다만. 사태가 이 정도까지 커졌으니 더 감추긴 어렵겠죠. 곧 보고가 들어갈 겁니다.”

엘빈은 그리 답하며 약 일주일 전의 일을 회상했다.

‘우선 민심부터 흩트려 놓죠.’

에셀이 켈레마의 기밀 서류들을 쥐고 그들을 찾아온 그 밤. 에셀의 고발을 듣고 한참이나 침묵하던 라그나르가 잠잠히 말을 꺼냈다.

‘유스티아군이 합류한다 한들 공성전이 길어진다면 우리의 필패입니다.’

에드윈이 실종된 후, 패트릭이 남은 유스티아군을 이끌어 연합군 쪽에 합류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나 그것이 확실한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호노라투스군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성벽 위에서 기어오르는 자를 떨어뜨리는 쪽이다. 이런 종류의 공성전에서는 물자만 충분하다면 방어하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거기에 더해 켈레마의 주술사들 대부분이 호노라투스를 지키고 있다. 에셀이 빠져나왔다지만 에스틴 촌장의 경험과 연륜은 무작정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마수화 주술이라는 치명적인 무기마저 손에 쥐고 있다면 더 그렇다.

‘외부에서 뚫어낼 수 없다면, 내부부터 무너트리는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어떻게......?’

‘원래 이런 것은 처음에는 여흥처럼 소비되어야 의심을 사지 않는 법입니다. 괜히 증거를 남겼다가 꼬리를 밟혀도 곤란하니.......’

잠시 고민에 잠겼던 라그나르가 이내 느릿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래는 어떻습니까?’

라그나르는 그 직후 허밍에 가까운 노래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날개가 없다네. 날개를 버리고 너희 곁으로 왔다네.

이 땅의 불행한 자 그 누구인가. 날개 없는 신이 너희를 위해 왔다네.

가사도, 가락도. 무엇 하나 기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상하게 귀를 홀리던 가락이 허공으로 흩어지자, 그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릴리트가 물었다.

‘로드 라그나르. 이런 노래는 어디서......’

‘그냥, 어쩌다 보니. 그보다 이 노래의 가사를 좀 바꾸어서 호노라투스 내에 퍼트리는 것이 어떨지 묻고 싶습니다. 엘빈 경, 호노라투스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적령의 길드원이 몇이나 됩니까?’

릴리트의 물음에 대한 답을 대강 얼버무린 라그나르가 엘빈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호노라투스 내의 길드원들을 움직여 노래를 퍼트리고, 그 노래에 대한 의혹이 싹틀 때쯤 이야기꾼을 풀어 싹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슬슬 열매가 맺힐 즈음이었다.

‘루에이리.......’

라그나르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내리깔며 입꼬리만 슬쩍 들어 올렸다.

만약 루에이리 왕가가 스토이, 그 빌어먹을 새끼의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면 절대로 이 소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그가 퍼트린 소문을 접하고 미쳐 날뛰며 주변 사람들을 해치기까지 한다면 더 좋았다. 왕이 미쳐 날뛸수록 그 휘하에 있는 사람들의 의혹은 깊어지고, 불안감은 가중될 테니까.

‘감히 린을 한 번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도 죽이려 들었다고.’

라그나르는 조용히, 하나 형형하게 이를 갈며 웃었다.

‘눈 감고는 죽지 못하게 해 주지.’

그 웃음에는 차라리 광기에 가까울 만큼 매서운 분노가 담겨 있었다.

* * *

“.......”

에드윈은 눈을 뜨자마자 정신을 잃고 있을 때와 다름없이 보이기 위해 호흡을 골랐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주위의 사물이 차차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제 주위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 짧은 움직임에도 복부에서 희미한 통증이 느껴지는 탓에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레이린은.’

정신이 들자마자 그 생각부터 들었다. 그것은 가히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에드윈은 어두운 오두막 안을 둘러보다가 반대쪽에 놓여 있는 침상을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침상은 텅 비어 있었다.

“.......”

에드윈은 속에서 울컥 치받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지며 손마디가 새하얘졌다.

그가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쯤, 오두막의 문이 열리더니 귀와 꼬리를 지닌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나셨습니까.”

노인은 에드윈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 없이 덤덤히 말할 뿐이었다.

에드윈은 필사적으로 살기를 갈무리했다. 그는 이를 갈지 않도록 노력하며 물었다.

“그녀는, 어디 있습니까?”

“.......”

노인은 그의 물음에 난처한 듯 눈썹을 누그러트렸다가, 이내 잠잠한 목소리를 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으시고 빼앗긴 것을 되찾으러 가셨습니다.”

“언제.”

“이틀 전의 일입니다.”

에드윈은 애먼 사람에게 제 살기를 고스란히 쏟아붓지 않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니 그나마 이성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의식적으로 느리게 호흡하며 속을 다스렸다.

‘매번 이런 식이지.’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손 틈새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품에 가두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팔 아래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레이린은 늘 이런 식이었다. 결정적일 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거절할 수 없는 손길을 뻗어 놓고, 정작 자신이 곁에 있으라 말할 때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모습을 감추곤 했다. 바로 그런 점이 사람을 미쳐 돌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에드윈은 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호노라투스로 간 건가.’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 기이하리만치 레이린을 견제하고, 실제로 그녀를 죽이려 들었던 왕. 그것들만으로 레이린이 향했을 곳을 유추하는 것은 에드윈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파란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 보아야겠습니다.”

에드윈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 몸을 휘감고 있던 붕대를 풀어내어 다시 묶기 시작했다. 절반쯤 나은 상처가 피로 물든 붕대 사이로 비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간 당황한 눈을 하던 노인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에드윈이 붕대를 고쳐 매는 것을 도왔다. 그의 눈은 부상 따위에 말려질 사람의 것이 아니었기에 포기는 빨랐다.

“회복력이 무척 좋은 편이시긴 하지만, 당장 아무렇지 않게 움직여도 될 상처는 아닙니다. 적어도 이삼일은 무리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에드윈은 노인의 나직한 충고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는 노인에게서 검과 갑주를 받아 챙기고, 긴 클로크까지 걸친 후 땅 위로 나왔다.

땅 위는 새까만 어둠이 점령하고 있었다. 에드윈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이는, 쑥대밭이 된 제르쉬 평원의 모습에 미간을 슬쩍 좁혔다.

“.......”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몸을 숙여 땅바닥을 살폈다. 사람의 발자국과 말발굽 자국이 어지럽게 뒤얽혀 호노라투스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패트릭이 잘 수습했나 보군.’

에드윈은 유스티아를 떠나기 전에 패트릭에게 내렸던 명령을 상기하며 주먹을 쥐었다.

‘만약 전투 중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내가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네가 책임자다, 패트릭.’

‘주군. 그런 일은.......’

‘그리고 만일 그런 상황이 찾아온다면, 곧장 남은 이들을 수습해 호노라투스로 가라. 거기서 에르치니아, 벤투스와 합류하도록 해. 그 이후의 문제들은 전적으로 네게 맡기겠다.’

그 말에 패트릭은 놀란 얼굴을 했었다. 그가 아는 에드윈은 절대 누군가에게 쉽사리 ‘맡긴다’라는 말을 건네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 에드윈이, 처음으로 패트릭을 향해 신뢰의 파편이나마 내보인 것이었다.

그런 말에 감히 거역할 수는 없었다. 패트릭은 그 즉시 무릎을 꿇고 에드윈의 발에 입 맞췄다.

‘주군의 뜻,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

에드윈은 일순 미묘한 기분이 되어 땅 위에 남은 발자국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자신이 부재한,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내렸던 명령이, 정확히는 자신의 ‘믿음’이 배반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쩐지 기묘하게 느껴져서.

잠시간 말없이 땅 위에 남은 흔적들을 훑어보던 그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뒤덮은 후드 자락을 정리한 에드윈이 호노라투스 방향으로 발을 떼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저벅거리는 발소리만이 적막하게 울렸다.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던 소음에 낯선 기척들이 섞여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에드윈은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며 몸을 낮췄다. 오른손은 어느새 검 손잡이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희미한 빛줄기가 평야 저편에서 그가 있는 방향으로 쏟아졌다.

“......!”

에드윈은 갑작스럽게 시야를 메우는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몸 여기저기에 자리한 상처가 새삼스레 욱신거렸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생각조차 필요 없었겠으나 지금의 그는 부상자였다. 그리고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은 꽤 다수였다.

에드윈은 긴장으로 몸을 굳힌 채 언제든 검을 빼어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영주님?”

“세상에, 신이시여.”

“정말 영주님이십니까?”

낯선 속삭임들 사이로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서서히 시야에서 빛이 물러나고, 빛이 물러난 자리만큼 저편에 서 있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에드윈은 사람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두 인영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힐데트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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