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87)

* * *

“네가 아직도 그따위 약한 소리를 지껄이고 자빠졌으니 저 무지렁이들이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것 아니야!”

와장창-!

오늘도 왕궁,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공주의 방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복도를 지키는 기사들, 그 주위에 시립해 있는 사용인들은 전부 눈과 귀를 닫은 것처럼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왕은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사방이 엉망인 방 안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곧 성인이 되는 계집이 그리 나약하면 어쩌자는 말이야! 하다못해 제 주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자식새끼라도 낳으라고 했건만!”

바로크는 한쪽 벽에 등을 대고 눈물범벅인 얼굴로 숨을 헐떡대는 아네트를 노려보았다. 핏발 선 연하늘색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등줄기로 한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짙고 짙은 광기가 그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

“그 간단한 일도 모조리, 모조리 그르쳐 놓고, 지금 뭐? 못 하겠다? 네가 감히 내 앞에서 못 하겠다는 말을 지껄였느냐? 응?”

“하지만!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늘 숨을 죽이기 바빴던 아네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어떻게 그런, 그런 짓을 해요......! 어떻게 그런 짓을!”

그녀의 눈은 공포와 경악으로 인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바로크가 갑자기 아네트의 방을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방은 정갈하고 포근했다. 그러나 불쑥 찾아온 왕이 차를 한 모금 머금자마자 내뱉은 말로 인해 그 평온은 깨어졌다.

‘상황이 이러하니, 계승식의 과정에 대해 미리 이야기해 두마.’

왕가의 계승식.

루에이리 왕가의 계승식은, 여타 영주들의 계승식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나뉘었다. 왕가의 후계자는 계승식 3일 전부터 왕궁 중앙의 홀에서 신께 기도를 올리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한다. 그리고 계승식 당일. 호노라투스의 모든 귀족이 모인 자리에서 신성력을 드러내며 본인의 능력을 증명한다. 그것이 문헌에 기록된, 또한 헤르기아스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왕가의 ‘계승식’이다.

하지만 이어 바로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왕가가 지금껏 끌어안고 있던 새카만 밑바닥이었다.

‘스무 살 생일을 맞는 아침이면, 너는 모든 신성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네?’

‘또한 머리카락 색과 눈 색 또한 범인의 그것과 같이 검게 변하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아네트는 당최 알 수 없는 이야기들에 혼란스러워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그러나 바로크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구는 그녀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속삭였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네가 내 심장을 먹고 왕위를 이어야 한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들은 그런 그녀를 비웃듯 칼날보다 섬뜩하게 귓가로 날아와 박혔다.

‘내가 죽으면 켈레마의 촌장을 불러 곧바로 심장을 꺼내 보관해 놓아라. 그리고 계승식 3일 전에 그것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먹어야 한다. 그 여파로 인해 3일 동안은 몸이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 있겠지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네트는 끝내 높은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순 눈앞이 아찔해 현기증마저 난 탓에 여린 몸이 가볍게 비틀거렸다. 전신이 경련이라도 하듯이 벌벌 떨렸다.

지금, 지금 뭐라고?

‘심장?’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먹으라니.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이 다 있단 말인가.

아네트는 바로크의 말에, 그간 제 아비가 자신이 성인이 되는 날을 지나치리만치 의식하던 이유를 눈치채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전보다 더한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설마.......’

지금껏, 모든 왕이 후계자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한 이유가 이것이었나? 후계자가 성인이 되는 순간 신성력을 잃고 범인과 같아지니까?

그런 후계자를 위해서, 왕가를 이어 나가기 위해서. 하나같이 기꺼이 제 심장을 내어 주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미쳤어.’

아네트는 불쑥 치미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목 안으로 욱여넣고는 정신없이 도리질을 쳤다.

‘이건, 이건 아니에요. 저, 저는, 저는 그런 짓 못 해요. 못 합-’

‘지금 무어라 했느냐?’

그나마 사무적이던 바로크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심한 것! 네게 선택지가 있을 것 같으냐! 아니!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쨍그랑-!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아네트의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테이블을 뒤엎고, 의자를 집어 던지기까지 했음에도 말리러 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허억, 헉.......”

바로크는 아네트의 방이 완전히 폐허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서야 패악질을 멈추었다. 거친 숨을 몇 번 몰아쉬던 그가 다기와 가구의 파편들을 짓밟고 아네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불쑥 몸을 낮췄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다.”

그는 흠칫하여 몸을 물리는 그녀의 양어깨를 아프게 틀어쥐고는 고개를 바싹 들이밀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연푸른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득였다.

“알아들었느냐? 네 조부가, 내 조부가, 그 이전의 모든 왕이 했던 일이란 말이다.”

“.......”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나 그것을 누리고 살았으면 의무를 다할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바로크는 말을 맺으며 아네트의 어깨를 홱 팽개쳤다. 그 바람에 찻잔의 파편 위로 쓰러진 그녀의 손과 몸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왕은 몸을 일으켜 그런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아네트는 찻잔의 파편들이 제 몸을 파고드는 아픔조차 잊은 채 몸을 웅크려 말고 숨죽여 흐느꼈다.

‘무서워, 무서워.......’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려 제 머리와 귀를 악착같이 감쌌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팔로 머리를 감싸 쥐는 몸짓이 그리 필사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검고 진득한 말은 끊임없이 귓가에 들러붙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다.’

‘알아들었느냐? 네 조부가, 내 조부가, 그 이전의 모든 왕이 했던 일이란 말이다.’

아네트는 연신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목소리들에 눈을 꾹 감으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아니야.’

이건 정말로, 아무리 나약하고 겁쟁이인 자신이라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것을.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잇새로 자조가 비죽 튀어나왔다. 입꼬리를 엉망으로 일그러트리면서 헛웃음을 삼킨 그녀가 어깨를 옹송그렸다. 어느새 이제는 익숙해진 무력감이 등 뒤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 * *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스승님!”

에셀은 드물게도 웃음을 잃은 모습으로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는 제 스승을 향해 연이어 고함쳤다.

“마수화 주술이라니요! 주술사의 맹약을 떠나서, 그건 도의적으로 말도 안 되는 행동이란 말입니다!”

“그만하거라, 에셀.”

“마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 아시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결국 에스틴이 에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쩌렁쩌렁한 노호를 질렀다. 그에 에셀이 반사적으로 입을 닫은 사이 그녀가 형형한 눈으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이미 다 끝난 일이다. 주술은 이미 시행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병사들이 기백은 될 테지. 그런데 너는 저들이 우리를 가만히 둘 성싶으냐?”

“지금이라도 멈추면......!”

“이제 와 멈춰 봤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야.”

에스틴은 한없이 냉담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 응석은 그만 부리고 가서 네 할 일을 해라. 지금 부촌장 쪽 상황만 해도-”

“-제가.”

에셀이 에스틴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때였다. 하늘색의 눈이 전에 없이 단호한 기색으로 빛났다.

“억지로라도 스승님을 막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뭐?”

에스틴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노기가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지금 나를 거스르겠다는 것이냐? 네가?”

에셀은 습관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바로 했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으니까.

“루비가 왕가의 피로 만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왕가의 후계자가 스무 살 성인이 되는 순간 모든 신성력을 잃는다는 것.”

“뭐.......”

“전부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그 모든 자료의 원본도 제게 있고요.”

에스틴은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에셀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간곡히 호소했다.

“그러니 제발 그만두십시오. 여기서 멈추신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밖에 누구 없느냐! 지금 당장 에셀을 잡아라!”

그러나 에스틴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포에 질린 눈을 하며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 소리 지른 그녀가 주술을 사용하려는 듯 품에서 루비를 꺼내어 삼키려고 했다. 하지만 에셀이 그것을 빼앗아 들고 바깥으로 달아나는 것이 먼저였다.

“당장 잡아! 절대로 빠져나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에셀은 에스틴의 외침을 듣고는 영문모를 얼굴로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기사와 주술사들을 피해 도망쳤다.

호노라투스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내내 사방에서 주술과 검이 날아들었다. 에셀은 치미는 욕지기를 참으며 쉼 없이 루비를 치아 사이로 깨트렸다. 제 안에서 넘실대는 신력을 바깥으로 꺼내어 몸 주위로 경계를 치고 달렸다.

“멈추십...... 커헉!”

에셀은 성벽 위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주술로 기절시킨 뒤 그대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당장 잡......!”

“하지만 이미......!”

등 뒤로 성벽 위에서 소란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에셀은 땅 위에 남아 있는 흔적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구냐!”

“멈추지 않으면 사살하겠다!”

호노라투스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연합군의 둔영이 코앞이었다. 에셀은 사나운 기세로 제게 검과 창을 들이미는 병사들 앞에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에셀, 저는 주술사 에셀입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제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꽉 쥐었다.

“영주님들을 뵙게 해 주십시오. 반드시 전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엘빈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뇌부의 막사에 뛰어 들어온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방금 적령의 길드원이 급하게 전달한 서류 뭉치가 아무렇게나 구겨져 쥐여 있었다.

“다들 계십니까! 상황이...... 급한 일입니다!”

그 목소리에 막사 안에서 전략을 의논하던 영주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엘빈은 성큼성큼 발을 옮기더니 간이 테이블 위에 제가 가져온 서류들을 펼쳐 놓았다.

“유스티아군과 마티아스군의 교전 중 제르쉬 평원에 1급 마물이 여럿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양측 모두 적잖은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는 양군이 짧은 접전을 반복하며 호노라투스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1급 마물이라는 말에 세 영주의 표정이 나란히 굳어졌다.

2급 마물만 해도 마을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궤멸시킬 수 있다. 하지만 1급 마물은 그 크기와 피해의 규모조차 달랐다. 2급 마물이 돌풍이라면 1급 마물은 지진을 동반한 태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숙련된 기사들로 이루어진 무리조차 전멸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해야 하는 존재.

“1급이 여럿.......”

유리엔과 릴리트의 잇새로 채 막지 못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개중에서도 가장 형형한 눈을 하고 있는 것은 라그나르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살기를 가까이 갈무리하며 이를 갈듯 물었다.

“......유스티아의 영주는, 어떻게 되었답니까.”

입으로는 에드윈의 소식을 묻고 있으나, 그가 실제로 묻는 것이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아들은 엘빈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엘빈이 곧장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라그나르가 손등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윽고 굳게 다물려 있던 엘빈의 입술이 어렵사리 벌어졌다.

“유스티아의 영주는.......”

그가 참담한 기색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말끝을 흐렸다.

“실종, 되어...... 현재는 클로비스 기사단장이 군을 이끌고 있-”

쾅!

엘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그나르가 주먹으로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밖으로 달려 나갈 것처럼 구는 그를 막아선 것은 릴리트였다.

“로드 라그나르. 자네의 심정은 알겠으나 지금은 진정.......”

“내 손으로 보냈습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릴리트의 말을 잘라 냈다. 평소보다 짙은 색을 띠는 남색의 눈이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 섬뜩한 기색을 띠었다. 그에 릴리트는 감히 레이린이 무사할 것이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닫았다.

“내가, 내 손으로. 진즉 다 부서져 있던 그 애를 사지로 가라 떠밀었는데.”

라그나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을 흘렸다.

“나보고 진정하라고.”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유리엔이 릴리트와 라그나르의 사이로 끼어들어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거기까지만 하게.”

“비켜.”

“자네까지 흔적도 없이 개죽음당해야 속이 시원하겠나?”

유리엔은 저를 씹어 삼킬 듯 노려보는 라그나르를 내려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만약 아제트리아, 아니, 브리어스 양이 살아 있다면? 그러나 자네가 막무가내로 뛰쳐나가 죽어 버린 바람에 영원히 엇갈리게 된다면?”

“.......”

“브리어스 양이 그것을 원할 것 같은가? 그렇다면 막지 않겠네.”

라그나르는 어느새 핏줄까지 불거진 눈으로 유리엔을 노려보았다. 그의 살기가 마침내 일말의 이성마저 끊어 놓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군!”

솔론 기사단장이 예법조차 잊고 다급하게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와 외쳤다.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그 말에 유리엔이 미간을 슬쩍 좁히더니 기사단장을 따라 막사를 나섰다. 그 뒤를 릴리트와 엘빈, 라그나르가 따랐다.

둔영의 중심을 벗어나 가장자리까지 다다르자, 일부 병사가 긴장된 얼굴로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병사들의 가운데에서 항복을 표하듯 양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이를 본 엘빈이 눈을 크게 떴다.

“에스틴 촌장의 제자......?”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영주들 또한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란의 중심을 돌아보았다. 에셀은 그들을 알아보고는 침착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전해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릴리트가 경계심 어린 눈을 하며 앞으로 한 발 움직였다.

“주술사인 그대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지?”

“병사들을 시켜 제 몸을 수색해 보십시오. 주술사는 루비가 없다면 주술을 쓸 수 없습니다. 만약 루비를 섭취했다 한들 그 효과는 5분 내외로 사라지고, 제가 이곳에 도착한 후 10분은 지났을 테니 그 또한 병사들이 증언해 주겠지요.”

에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막힘 하나 없이 대답을 줄줄 내뱉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던 유리엔이 제 휘하의 기사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이 에셀에게 다가가 몸 곳곳을 수색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이내 손을 거두고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손에 쥔 것은 뭐지.”

라그나르가 에셀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 뭉치를 고갯짓하며 물었다.

에셀이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이곳에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주변을 흘깃 둘러본 그가 작게 숨을 들이쉬더니 뒷말을 뱉었다.

“유스티아 영주의 비서였던...... 레이린 아제트리아 양을 알고 계십니까?”

직후 릴리트, 유리엔, 엘빈의 어깨가 나란히 굳어졌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려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혹여 그가 아까처럼 날뛰며 에셀을 죽이려고 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너.”

그러나 라그나르는 생각보다 침착한 태도였다. 다만 그 눈만은 언제든 상대를 씹어 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듯 살벌했다.

“따라 들어와라.”

그리고 그 이후.

“지금의 왕가는 부정한 방법으로 신력을 갈취하여 이용해 오고 있었습니다. 주술사 또한 마찬가지이고요.”

막사에 들어선 에셀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들을 경악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