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콰과광-!
레나는 천둥이 치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와 해를 가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들을 눈 속에 파묻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질서가 무너졌다.’
그것은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레이린과 칼리고의 죽음. 잘못된 곳에 자리 잡게 된 힘. 무너진 균형. 그에 따라 빠르게 멸망해 가고 있는 헤르기아스. 그 모든 것이.
그사이 마을 반대쪽에서 여러 생물을(이제는 개체 수가 줄어든 고대의 생물) 돌보던 신족들이 당황한 얼굴로 달려왔다.
“촌장님! 동물들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형체 자체가 뒤틀리고 있......!”
“모든 신족을 광장으로 모아라.”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그들의 두서없는 외침을 잘라 냈다. 감정 한 점 드러나지 않는 얼굴의 레나가 황금빛 눈을 번득였다.
“뭣들 하고 있나. 지금 당장, ‘모든’ 신족은 광장으로 집합하라 전해. 알아들었나?”
“예, 예!”
레나의 날 선 모습에 당황하던 그들은 이내 빠르게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개중에서 나이가 지긋한 원로들이 지팡이를 짚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촌장, 이것은.......”
“예. 짐작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레나는 짤막하게 답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불안한 얼굴의 신족들을 향해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 한마디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한 웅성거림이 일던 사람들의 사이로 소름 끼치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레나는 그들 하나하나의 눈을 바라보며 되새기듯 입을 움직였다.
“이는 곧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잠시간 침통한 얼굴로 서 있던 신족들이 이내 하나둘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레나는 몸을 돌려 광장 한가운데에 자리한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를 따라 신족 모두가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모았다.
레나는 제 안의 신력을 모두 끌어모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광휘에 휩싸인 그녀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신의 대리자, 신의 의지를 전하는 자로서 세계에 고하나이다. 여기 ‘이곳’에 있는 이들의 생명과, 시간과, 영혼을 남김없이 바치노니. 정당한 제물을 대가로 세계의 법칙을 뒤틀어. 무너져 가는 이 땅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붙잡아 두려 하나이다. 부디 질서를 수호하는 자, 빛의 수호를 받는 자들의 기도를 저버리지 마소서.
그녀의 기도가 끝나는 순간, 광장에 모인 신족들의 몸이 금빛으로 화하더니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땅이 스멀스멀 검은색으로 썩어들어 갔다. 변해 버린 땅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키이이익-
저 멀리,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생물들이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키익, 키이익!
핏빛 눈의 생물들은 높은 소리로 울며 신족들을 향해 다가오려 했지만 광장 전체를 휘감고 있는 힘이 그들을 막았다.
광장의 중앙에서, 레나는 제 손끝이 바스러지는 것을 내려다보며 아프게 웃었다.
‘미안하다, 아가.’
그녀는 일부러 제물의 조건을 ‘여기, 이곳’에 모인 이들의 영혼으로 한정 지었다. 그러니 레이린의 육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스러질지언정, 제물의 조건에서 벗어난 그녀의 영혼은 세상을 떠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새로이 태어날 것이었다. 어설프게나마 붙들어 놓은 이 땅의 질서를, 생명을 수복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지금의 이 맹약에 묶인 신족의 영혼이, 끝내는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미안하다.’
레나는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닌, 신족의 수장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마지막으로 먼지가 되어 남김없이 사라지는 순간. 미친 듯 몰아치던 바람도, 쉴 틈 없이 쏟아지던 벼락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고요한 하늘에서 나풀나풀 내리는 눈송이만이 썩어 가는 땅 위를 가만히 덮어 주었다.
그리고 이후, ‘신의 분노’라 불리게 된 그다음 해의 첫날. 스토이는 ‘엘피스 드 루에이리’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헤르기아스력 151년, 루에이리력 1년의 일이었다.
9. 왕의 귀환
릴리트와 유리엔은 에드윈의 말대로 왕에게 협조하겠다는 답신을 보낸 뒤 군사를 이끌고 빠르게 호노라투스로 출발했다. 그리고 유스티아군과 마티아스군이 마주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방향을 틀어 호노라투스의 성문을 공격했다.
“전열을 유지해! 물러서지 마라!”
촤악-!
릴리트는 커다랗게 고함치며 손에 쥐고 있던 대검으로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들을 쳐냈다. 반대편 즈음에서 유리엔이 보니파츠 기사단장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술석은! 얼마나 남았나!”
“절반쯤 남아 있습니다만 성문을 뚫는 데는 역부족일 것 같습니다!”
“영주님! 사다리가 다 부서졌습니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유리엔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급박한 목소리들에 이를 으득, 갈았다.
그들이 공격을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에르치니아와 벤투스의 군사들이 성문을 향해 달려든 직후였다.
‘궁병, 앞으로!’
귀에 익은, 중앙 근위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활을 든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성벽 위에 나타났다. 릴리트와 유리엔은 경악하여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뭐.......’
‘쏴라!’
파바밧-!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릴리트와 유리엔은 재빨리 정신을 다잡고서 큰소리로 외쳤다.
‘방패!’
평소 혹독한 훈련을 견뎌온 에르치니아와 벤투스의 군사들은 신속하게 방패를 들어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화살을 막아 냈다.
상대의 대응이 생각보다 빠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예상 범주 안의 일이었다. 금세 평정을 되찾은 릴리트와 유리엔은 병사들을 지휘하며 성문을 뚫는 것에 집중했다. 두 영주의 침착한 지휘하에 병사들이 성벽에 사다리를 대고, 몸이 날랜 기사들이 그 위로 올라가 성벽 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이들의 숨을 끊어 놓았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콰직!
“아아악!”
주술로 인해 일반 화살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힘이 실린 화살이 방패를 그대로 두 동강 내며 병사의 손을 꿰뚫었다. 화살에 손이 꿰인 병사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릴리트는 그 위로 쉼 없이 쏟아지는 화살들을 대검으로 간신히 막아 냈다.
‘무언가 이상하다.’
처음에는 희미하던 불안감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이 상황은 무언가 이상했다.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참전 요구에 응하는 답신을 보내기는 했으나, 왕의 뿌리 깊은 불신은 그런 종이 쪼가리 한 장에 쉽사리 사라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왕이 에르치니아와 벤투스가 선선히 제 앞에 부복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 병력을 준비시켜 놓은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왕이 성벽에 대기시켜 놓은 병력이 ‘일부’여야 성립되는 가정이다.
보랏빛 눈이 성벽 위를 빠르게 오가며 화살과 주술석을 나르는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선발대가 빠진 와중에도 저만큼의 병력이 성벽을 지키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돼.’
거기까지 생각한 릴리트는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가정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설마.......’
선발대가 눈속임이었나?
“로드 유리엔!”
유스티아 쪽도 위험하다. 그러한 판단이 든 순간, 릴리트는 제게로 날아드는 화살 한 대를 더 쳐내고는 유리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가 후퇴하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돌연 붉은 눈을 번뜩이며 유리엔에게로 달려드는 병사였다.
“피하십시오!”
릴리트는 기겁하며 달려가 병사에게 대검을 휘둘렀다. 대검의 칼등에 얻어맞은 병사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안심할 새는 없었다. 릴리트는 곧 그들의 주변에서 하나둘 눈이 붉게 변해 동료를 공격하는 병사를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저게 무슨.......”
“아아악!”
“이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
병사들은 갑자기 제 동료가 마물이라도 된 것처럼 치아를 딱딱거리며 달려드는 것을 보고는 혼비백산했다. 그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사이를 노리고 날아든 화살이 조금 전보다 한층 많은 병사의 목숨을 앗아갔다.
바로 그때, 릴리트의 머릿속에 번뜩 기억 한 조각이 스쳐 갔다.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고 제게 달려오는 병사를 또다시 발로 차 넘어트리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주술이네.”
“뭐? 지금 뭐라 하였나?”
“주술이야. 내가 유스티아에 있을 적에 겪었던 것보다 상태가 조금 더 심하긴 하지만...... 확실해.”
릴리트는 유스티아의 숲속에서 제 손으로 커티스를 벨 뻔했던 기억을 상기하고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그때 주술에 당했던 기사들은 적어도 ‘검’이라는 무기를 다루어 상대를 공격할 정도의 이지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상 증세를 보이는 병사들은 흡사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치아를 까득대며 상대의 목을 물어뜯고, 손톱을 세워 살을 할퀴기를 반복했다.
흡사 완전히 ‘마수화’가 진행된 인간처럼 보이는 모습에서 어렵사리 시선을 떼어 낸 릴리트가 빠르게 말했다.
“후퇴해야 할 듯싶네. 상황이 심상치 않아. 선발대가 빠졌는데도 이 정도의 병력과 주술석을 남겨 뒀다는 것 또한.......”
릴리트가 말끝을 흐리자 참담한 얼굴의 유리엔이 작게 중얼거렸다.
“......함정인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찰나의 침묵 속에서 보랏빛의 눈과 시린 푸른색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고는 말없이 검을 고쳐 쥐었다. 릴리트의 대검과 유리엔의 세검이 매섭게 번뜩였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겠군. 적어도 주술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는 후퇴해야겠어.”
“내가 시선을 끌겠네. 유리엔 자네는 병사들을 이끌고 먼저 빠져나가게나.”
“섭섭한 소리를. 공이란 공은 혼자 독차지할 셈이라면 일찌감치 접어 두시게. 그렇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하여간 고집은.”
릴리트는 끝내 픽,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성벽 위, 병사들에게 분주하게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있는 근위대장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저 새끼의 목은 들고 가야겠군.’
릴리트의 눈이 비장하게 번뜩였다. 그녀가 못해도 팔이나 다리 한쪽,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버릴 각오로 팔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쏴라!”
누군가의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자그마한 갈색의 주머니들이 쐐액-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콰앙-!
주머니들이 하나둘 성벽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폭음과 진동이 연달아 일어났다. 근위대장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날뛰는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당황하지 마라! 전열을 유지해! 다들 자리를 지켜라!”
“아아악!”
“대, 대장님! 계단이 무너졌습니다! 이대로면 위쪽도 무너집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주머니들이 날아들자, 결국 근위대장 또한 평정을 잃고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렸다.
“대체 어떤 새끼가......!”
한편, 소란한 와중에도 청명한 목소리가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목표는 에르치니아군과 벤투스군의 무사 퇴각이다! 쓸데없는 데 한눈팔지 마라!”
“예!”
에르치니아군과 벤투스군의 뒤편에서 나타난 병사들이 일제히 방패와 주술석을 들어 올리며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막았다. 갑작스레 뒤바뀐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릴리트와 유리엔은 영문 모를 병력의 가장 앞에 있는 이를 알아보고는 눈을 홉떴다.
“......로드 라그나르?”
유리엔이 햇빛 아래 반짝이는 회청색의 머리카락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라그나르는 마주 인사하는 대신 전에 없이 다급한 얼굴로 커다랗게 고함쳤다.
“두 분! 오래는 못 버팁니다! 당장 빠져나오십시오!”
“5분! 앞으로 5분이 한계입니다!”
라그나르의 곁에서 적령의 길드원들을 동원해 성벽 너머로 주술석 폭탄을 던져대던 엘빈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릴리트와 유리엔 또한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전군! 퇴각하라! 주술의 범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미 이지를 잃은 병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절시켜라! 여의치 않을 시 정신을 잃지 않은 병사를 우선시해! 퇴각한다!”
뿌우우-
제정신이 아닌 아군으로부터 겨우 벗어난 병사가 필사적으로 뿔피리를 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쏟아지는 화살 비를 피하며 동료를 부축해 성벽 앞에서 몸을 물렸다. 녹스와 적령의 길드원들이 그런 그들을 엄호하며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났다.
에르치니아와 벤투스, 윈프리드의 병력이 뒤섞인 무리가 호노라투스의 성벽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을 때쯤 되자,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곳에 막사를 세워라. 당분간은 이곳에서 중앙의 동태를 살피며 부상을 치료하는 데 전념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라그나르의 명에 브리어스 기사단장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릴리트가 붕대로 동여맨 어깨를 감싸 쥐고 절뚝대며 그에게 다가갔다.
“로드 라그나르.”
“로드 릴리트.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근위대장, 그 빌어먹을 놈의 목을 따지 못해서 속은 터지는데 껍데기는 멀쩡하네. 그보다 어떻게 된 건가? 키스티엘 경은 왜 자네와 함께 있는 것이고?”
릴리트가 진지한 낯으로 물음을 던졌다.
잠시간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그나르는, 이내 저 멀리서 릴리트와 같은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유리엔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삼켰다.
“......우선 들어가시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의 손으로 레이린을 떠나보낸 이후, 두 번째 해가 저물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