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87)

* * *

스무 살이 되어 성인으로 인정받은 신족은 제각기 강을 넘어 순례를 떠난다.

그렇다면 성인이 되지 않은 신족의 일상은 어떠한가. 아침 일찍부터 현 수장인 레나의 아래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

“어휴. 엄마 잔소리 때문에 귀가 다 헐겠네, 헐겠어.”

......아야 했으나, 정작 그 딸인 레이린은 오늘도 어김없이 수업을 땡땡이치고 마을 외곽의 들판으로 도망쳐 나왔다.

“흠.”

레이린은 만족스러운 음성을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소 그녀의 놀이터가 되어 주곤 하는 드넓은 초원이 햇살을 받아 기분 좋게 산들거렸다.

유달리 좋은 날씨에 덩달아 레이린의 의욕 또한 올라갔다. 그녀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의욕으로 불타는 눈을 한 채 초원 한복판을 가로질러 갔다.

“좋아, 오늘은 또 뭘 찾아볼...... 응?”

찾던 약초 대신 무언가 이질적인 형체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의아한 목소리를 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초원의 저편, 이 땅과 바깥을 가르는 경계인 새카만 강물. 그곳에 그 강물보다도 더 새카만 덩어리 같은 것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레이린은 호기심이 강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낯선 것을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을 죽이지 못하고 슬금슬금 강가로 다가갔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레이린은 강가에 얼룩처럼 늘어진 검은 덩어리를 발끝으로 쿡 눌러 보았다. 물컹한 감각에 히익, 하며 발을 물리던 그녀는 강가의 자갈을 물들인 붉은 자국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조심조심 손을 뻗어 검은 덩어리를 뒤집었다.

“읏차.”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퍽 버거운 무게였으나 어떻게 뒤집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자 쥐죽은 듯 감겨 있는 눈, 코, 입이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황금색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사람?”

그것이 레이린과 칼리고의 첫 만남이었다.

* * *

“내가 내 장난감이니까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와장창-!

스토이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등불을 거칠게 내던지며 씩씩거렸다.

“나, 나는 말렸어! 난 말렸다고! 그런데 네 아비라는 작자가 또 일을 친 거란 말이다!”

남편이 또다시 도박판을 찾아 떠난 사이, 홀로 남아 집을 지키고 있던 친모는 악귀 같은 아들의 모습에 덜덜 떨면서도 바락바락 악을 썼다.

스토이는 그런 친모를 경멸스럽게 노려보며 짓씹듯 물었다.

“어디로 갔어.”

“그 망할 작자라면 지금쯤 옆집에-”

“누가 그딴 거 물어봤어? 내 장난감 어디다 갖다 버렸냐고!”

스토이는 미친 사람처럼 발을 쿵쿵 구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 움찔한 친모가 손가락을 들어 북쪽을 가리켰다.

“북쪽으로 도망치다가 강물에 빠져 죽은 건지 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더라. 너, 혹시라도 그걸 다시 찾아오겠다느니 하는 헛소리라도 할라치면 정말 내쫓아 버릴 줄 알아라!”

친모는 ‘내쫓겠다’라는 말을 할 때만큼은 진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노려보던 스토이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집을 박차고 나왔다.

“지긋지긋한 집구석.”

그는 문 앞에 퉤, 침을 뱉고는 뒤뜰로 가 제가 가장 아끼는 사냥개를 불러 왔다. 그리고 간단한 여장을 꾸린 뒤 칼리고를 찾아 북쪽으로 향했다. 그의 어미가 친히 내린 경고는 그에게 사냥개가 짖는 소리만도 못한 것이었다.

칼리고는 하루를 꼬박 이동한 끝에 북쪽 땅에 다다랐다. 밤늦게 작은 마을에 다다른 스토이는 곧장 여관을 찾았다. 술집을 겸하고 있는 것인지, 문틈으로 불빛과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딸랑-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소란스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잠시간 그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그뿐이었다. 후줄근한 옷차림의, 누가 보아도 꾀죄죄해 보이는 소년에게 온정을 베풀 만큼 온화한 자는 이곳에 없었으니까.

스토이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 채 유달리 험상궂고 건장한 사내들만 가득한 1층을 둘러보는 사이, 안쪽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달려와 생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뭐 필요하신 거라도?”

“......식사와 묵을 방이요. 아마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것 같습니다.”

스토이는 말을 맺으며 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여인은 능숙한 태도로 그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우선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곧 식사를 준비해 드릴 테니 간단히 짐을 정리하신 후 내려오세요.”

스토이는 여인이 사라진 후 작지만 깔끔한 방에 대강 짐을 풀어놓고 아래로 내려왔다. 1층은 여전히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적당한 빈자리에 앉아 사냥개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순 그의 흥미를 잡아끄는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나저나 세상에 그렇게 이상한 놈은 또 처음 보네. 온통 까매가지고, 사람은 맞는 건가?”

“사람이건 아니건 무슨 상관이야, 돈은 될 텐데. 며칠째 시체가 안 떠오르는 건 조금 이상하지만, 그래도 좀 기다리다가 건져서 팔아 치우면.......”

스토이는 그제야 숨을 죽이고 주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 온통 새까만 그림자 같은 형체가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 한동안 그 주위를 사람들과 사냥개가 돌아다니다가 사라졌다는 이야기. 알 수 없는 힘을 쓰는 ‘금빛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곳이 이 근처라는 이야기.......

‘금빛 인간이라.......’

고개를 숙인 채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스토이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해맑게 웃으며 잠자리의 날개를 잡아 뜯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기에 더욱 잔악한 미소였다.

* * *

“......으윽.”

칼리고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감각에 흐리게 눈을 떴다. 친부에게 얻어맞은 곳이 아프게 지끈거렸으나 그의 몸을 감싼 포근하고 따뜻한 감촉은 난생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것이었다.

‘따뜻해.’

그는 저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은 채 포근한 천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그러던 중, 그는 무언가 기묘한 기분에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꺄아아악!”

저를 빤히 바라보는 샛노란 눈과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친 그가 기겁해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직후 쾅! 소리가 나며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동시에 높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내 이마!”

“아윽.......”

제 이마를 감싼 채 낮게 신음하던 칼리고는 한발 늦게 낯선 목소리를 인지하고는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씨이, 아파.......”

칼리고가 누워 있던 곳은 침대였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기에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도 당혹스러운 것은, 제가 누워 있는 침대 발치쯤의 바닥에 쭈그려 앉아 끙끙대는 작은 인영이었다.

공처럼 둥글게 말린 등 위로 황금색 곱슬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등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기껏 살려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네. 이런 게 바로 인간인가? 말로만 듣던 인간의 악독함......?”

“벌써부터 헛소리하면 못쓴다고 했지, 린.”

“쳇.”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작고 좁은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이 또렷한 시선으로 칼리고를 응시했다.

“깨어났군.”

“아, 저.......”

칼리고는 어딘지 초조한 마음에 우선 입을 열고 보았으나 당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입술만 달싹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야 할지. 무언가를 판단하고 행동하기엔 현 상황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러나 황금빛 머리카락과 눈의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침상 곁으로 다가와 협탁에 들고 온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고맙다는 인사는 저 애한테 하게. 자넬 살린 건 레이린, 저 아이니까.”

“......예?”

바구니 안에는 물수건과 간단한 요깃거리, 용도를 알 수 없는 풀 무더기 등이 들어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칼리고가 퍼뜩 고개를 돌려 레이린이라고 불린 인영을 바라보았다.

레이린은 발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손으로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연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에 멸시와 혐오가 아닌, 저토록 순수한 호기심만이 깃들어 있는 것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칼리고가 슬그머니 레이린의 시선을 피하자 그의 곁에 서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니 설명부터 하지. 나는 레나라고 하네. 그리고 이곳은 헤르기아스 대륙의 최북단에 자리한 우리의 마을이고.”

“마을......이요?”

“그래. 신족의 마을이지.”

“신.......”

그 말을 들은 직후, 칼리고는 귀동냥으로나마 주워들었던 ‘금빛 인간’에 대한 전설을 기억해 내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신이라고? 정말로?’

그가 멍하니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레나는 무심한 얼굴로 입을 움직였다.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원래는 치료만 해 주고 바깥으로 돌려보내려 했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네에게는 ‘언령’이 듣질 않아 치료할 방법을 찾질 못했지.”

“.......”

“그런 자네를 살린 게 레이린이야. 저 애가 매일 사방팔방으로 쏘다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레나는 저조차 믿기지 않는다는 양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녀의 몸짓을 본 레이린이 곁에서 사납게 눈을 부라렸으나 레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아까도, 기억을 지울 수 있나 시도해 보았는데 먹히질 않더군. 그래서 원로들과 회의를 해 보았는데-”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그 순간, 고저 없는 목소리 사이로 희게 질린 얼굴의 칼리고가 불쑥 끼어들었다.

“.......”

레나가 놀란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놀라울 만큼 선명한 황금색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사이 칼리고는 몸이 멀쩡하기만 했더라면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다급한 애원을 줄줄이 쏟아 냈다.

“하, 하라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누구한테도 이곳에 대해서, 당신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게요. 원하신다면 개처럼 부리셔도 좋아요.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길게요. 그러니까 제발 여기 있게만.......”

“잠깐, 잠깐. 그만하게.”

떨떠름한 목소리가 칼리고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절망해 고개를 푹 떨궜다.

‘역시 안 되려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여기서 울기까지 하면 정말 민폐가 아닌가. 그런 마음으로 겨우겨우 눈물을 참아 내던 중이었다.

“나 원 참. 끝까지 듣지도 않고 울기부터 하려고 하는 애가 여기 또 있었네.”

픽, 가볍게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칼리고는 순간 저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툭-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가 들은 것이 꿈이 아니라는 양 머리 위로 레나의 손이 올라왔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언령이 통하지 않아서 기억을 지우지 못하니 쫓아낼 수도 없어. 그리고 우리가 보내려 한다 한들.......”

레나는 제 옆에서 이빨이라도 드러낼 것처럼 사납게 눈총을 쏘아대는 레이린을 보며 다시금 웃었다.

“저 애가 널 보내 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푹 쉬려무나. 아, 물론 몸이 다 나으면 어느 정도 일은 도와야겠지만 말이다.”

짐짓 엄중한 말투로, 그러나 한없이 다정한 염려를 남긴 레나는 몸을 돌려 집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한구석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레이린이 칼리고의 품으로 돌진하듯 와락 달려들었다.

“신난다! 이제 진짜 우리랑 같이 지내는 거네? 오빠라고 불러도 돼? 응? 오빠는 이름이 뭐야?”

레이린은 진심으로 신이 난 것처럼 아까보다 한층 높은 목소리로 빠르게 조잘거렸다.

칼리고는 제 품에 거리낌 없이 닿아 오는 낯선 온기에 반쯤 넋을 놓았다가, 초롱초롱 빛나며 저를 응시하는 황금빛 눈에 홀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칼리고.”

“칼리고?”

“응.......”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레이린은 그야말로 태양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쁜 이름이네. 나는 레이린이야. 린이라고 불러도 되고. 앞으로 잘 부탁해, 오빠!”

어쩌면 그 순간부터, 칼리고는 제 품 안의 작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칼리고와 레이린은 한 달도 되지 않아 급속도로 친해졌다. 신족의 마을 내에 레이린의 또래라 칭할 만한 아이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두 사람의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사실이 더 컸다.

“이건 즙을 내는 것보다는 말려서 빻는 게 더 효과가 좋아.”

“신기하다. 오빠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

“뭐. 나도 그냥 너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거야.”

칼리고는 제 손에 들려 있던 약초를 레이린에게 넘겨주며 대강 얼버무렸다. 차마 평소 밥 대신 잡초들을 뜯어 먹으며 삶을 연명했다거나, 사람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날이면 치료 약이 없어 들판을 헤집고 다녔다는 비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레이린은 칼리고가 건네준 약초에 금세 정신이 팔려 더 캐묻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못내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삼켰다. 그것은 제 입으로 제 비참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저보다도 더 마음이 상해 길길이 화를 내며 눈물을 글썽일 레이린을 알기 때문이었다.

칼리고가 약 한 달 동안 신족들과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지 신족들은 ‘언령’이라는 능력을 사용하여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바람에, 외려 인간들에게는 당연하리만치 간단한 작업조차 하지 못하고 헤맨다는 점이 신기했다.

칼리고가 처음 강가로 떠밀려 왔을 때도 그랬다. 촌장인 레나는 본디 칼리고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서 언령으로 치료를 끝마치고 그를 돌려보내려 했으나, 왜인지 능력이 먹히질 않아 크게 당황했다.

그런 칼리고를 살린 것이 레이린이었다. 그녀는 신족 중에서도 유달리 바깥으로 쏘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그 덕에 어설프게나마 치료용 약초들을 꿰고 있었기에 칼리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레이린은 자신이 그를 구해 냈다는 사실 때문인지 칼리고를 유달리 잘 따랐고, 칼리고 또한 저를 구해 준 레이린을 살뜰히 보살폈다. 그렇게 약 한 달여 간을 내내 붙어 다니다 보니 마을에서도 칼리고와 레이린을 친남매 취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레이린의 어미인 레나조차도 칼리고를 제 친아들처럼 대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레나 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어느 날, 칼리고는 레나를 찾아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떼었다.

“뭔데 그러니? 말해 보렴.”

레나는 푸근한 미소를 띠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힐끗 그녀의 눈치를 본 칼리고가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그게...... 잠시라도 좋으니 바깥쪽 강가에 다녀올 수는 없는 걸까요?”

레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바깥쪽 강가라면 사냥꾼들이 득시글하게 모여 있는 곳이다.

“......거길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레나의 얼굴을 본 칼리고는 뒤늦게 제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아니, 이곳을 떠나고 싶다거나 뭐 그런 게 아니라! 린한테 화관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저쪽 들판에는 마땅한 꽃이 없어서요. 제 기억상 바깥쪽 강가를 따라 피어 있는 꽃들이 상당히 많았거든요.”

레나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는 고민에 잠겼다. 칼리고는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꾹 닫았다.

‘역시 안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홀로 체념하고 있을 즈음, 레나가 몸을 숙여 그와 시선을 맞추더니 웃었다.

“배를 한 척 만들어 주마. 그 배를 타고 이동하면 안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바깥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단, 바깥에 사냥꾼들이 없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나가야 한다. 알았니?”

“네!”

칼리고는 그 이후로 몇 번 바깥을 오갔다. 주로 야심한 시각, 신족들의 도움을 받아 근처에 사냥꾼들이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다녔기에 그는 늘 품에 꽃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멀리에서 그 모습을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다 하루는 레이린과 칼리고가 처음으로 다툰 날이었다. 사실 거창하게 싸움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레이린이 오늘도 어김없이 레나의 수업을 땡땡이치고 도망가려 하기에, 며칠 전 레나로부터 ‘한 번만 더 봐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엄포를 들은 칼리고가 그녀를 만류했을 뿐이다.

‘이건 배신이야! 배신이라고!’

그러나 레이린은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은 눈을 하고서 그렇게 빽 외치더니 도망쳐 버렸다.

한동안 고민하던 칼리고는 한숨을 쉬며 강가로 가 배를 탔다. 최근 눈여겨보고 있던 흰 꽃으로 화관이라도 만들어 건네주면 화가 조금 풀릴까 싶어서였다.

텅-

배가 바깥쪽 강기슭에 부딪히며 작은 소음을 냈다. 칼리고는 주위를 둘러보고 사냥꾼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한 후에야 배에서 내려왔다. 배를 평소 매어 두던 곳에 잘 숨겨 두고 조금 걸으면 그가 애용하곤 하는 꽃밭이 나온다.

‘다 왔.......’

칼리고가 꽃밭의 초입에 자라난 흰 꽃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순간.

“잡았다, 쥐새끼.”

뒷덜미가 오싹하리만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어딘가에서 날아온 올가미가 칼리고의 목을 팽팽하게 옥죄었다.

“커헉!”

칼리고는 제 몸이 땅 위로 질질 끌려가는 것을 느끼며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의 목을 끊어 버릴 듯 옥죈 밧줄은 끊기지 않고 더 깊이 파고들 뿐이었다.

이윽고 죽어도 다시 보고 싶지 않던 얼굴이 하늘을 배경으로 웃는 것이 보였다. 스토이가 사납게 입매를 늘이며 읊조렸다.

“어디서 주인 허락도 없이 멋대로 도망치고 지랄이야.”

퍽-!

강한 힘이 실린 발이 칼리고의 복부를 걷어찼다.

“......!”

그는 한순간 숨을 쉬지 못할 듯 강렬한 통증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양팔로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서글프도록 익숙한 자세를 취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폭행이 쏟아졌다.

“좋냐? 좋든? 이제 더 맞을 일 없다고 좋아서 그렇게 실실 쪼개고 있었냐?”

퍽, 퍼억!

“사냥꾼이라는 놈들도 멍청이들이라니까. 공짜 술이면 그저 좋다고 죽어라 퍼붓더니 일어나지도 못하고 말이야.”

퍽!

한동안 여러 말을 지껄이며 칼리고를 폭행하던 스토이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발길질을 거두었다. 그의 발아래에 쓰러진 칼리고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가까스로 호흡만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조차도 곧 끊어질 것처럼 미약한 숨이었다.

스토이는 칼리고의 목을 옥죄고 있던 올가미를 잡아당기며 히죽 웃었다.

“자. 이제 저 강 너머의 존재들이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

저들이 과연 다 죽어 가는 너를 구하러 올까, 아니면 버릴까?

‘왜 안 와.’

레이린은 성인의 허리께만큼 자란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말고 심술궂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가 이곳에 몸을 숨긴 지도 벌써 몇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칼리고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또 나 빼고 바깥으로 놀러 갔다거나, 놀러 갔다거나.......”

무의식중에 입술 새로 튀어나온 중얼거림은 놀라울 만큼 신빙성 있는 것이었다. 칼리고는 평소 레나의 허락하에 바깥쪽 강기슭을 곧잘 오갔다. 레이린 또한 그를 따라 바깥을 보고 싶다고 여러 번 주장했으나,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신족이 강을 넘어가는 것은 금기였기에 단호히 거부당했다.

‘그런데 그래도 그렇지, 왜 이렇게 안 와? 설마 또 어디서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한 거 아냐?’

그러나 처음 칼리고를 만났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자 불쑥 걱정이 일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사람처럼 눈을 꼭 감고 강가에 쓰러져 있던 기억.

한 번 시작된 걱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몸집을 부풀리며 속을 짓눌렀다. 끝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레이린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다. 찾으러 가야겠어.”

저를 말리는 칼리고에게 화가 났던 것도 잠시. 어리숙하게 보일 만큼 무르고 선한 그가 바깥에서 길을 잃기라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레이린은 어느덧 심술 기가 다 사라진 얼굴로 종종종 걸음을 옮겼다. 강가에 배가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큼.”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레나가 배를 만들던 날 그랬던 것처럼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상태로 정신을 집중하자 제 속에서 신력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황금색 눈이 조금 더 환한 빛을 띠고 빛났다. 그녀는 제 속에서 물결치는 신력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길을 잃지 않을 배가 필요해.]

그러자 다음 순간, 텅 비어 있던 강가에 작은 조각배 한 척이 유유히 떠 있었다.

‘됐다.’

레나가 하던 것을 보고 따라 해 보았는데 한 번에 성공하다니. 레이린은 뿌듯한 얼굴로 그 배에 올랐다. 그녀가 배 위에 안착하자 배는 노 없이도 스르륵 움직이며 강 위를 나아 갔다.

텅-

오래지 않아, 작은 소음과 함께 배가 강기슭에 닿았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가, 이내 두려움과 경계심조차 잊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저기 있네.”

멀지 않은 곳에 칼리고의 배가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린은 반가운 얼굴로 배에서 내려 그쪽으로 달려갔다.

“오빠?”

그러나 배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뭍에서부터 이어진 발자국이 강기슭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레이린은 강에서부터 번져 온 안개 속을 헤치며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칼리고! 어디 있어?”

레이린은 작게 외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시야에 잡히는 것은 여전히 안개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저 멀리 펼쳐진 꽃밭의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초입에서 아른거리는 익숙한 형체 또한.

“칼리고!”

레이린은 꽃밭의 초입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이는 칼리고를 향해 환히 웃으며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가까워질수록 그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 또한 점차 흐려졌다.

마침내 온전히 걸음을 멈춘 레이린이 믿기지 않는 듯 시선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오빠?”

흰 꽃잎을 물들인 피. 연둣빛 잔디를 물들인 피. 이 순간에조차 땅 위로 스멀스멀 번져 가는 피, 피, 피. 잠시간 제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멍하니 서 있던 레이린이 곧 소스라치듯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피투성이가 된 칼리고는 이미 의식이 없어 보였다. 그의 곁에 꿇어앉은 그녀가 울음기 서린 목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오, 오빠. 칼리고. 정신 좀 차려봐. 제발.......”

황금색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것이 피투성이가 된 칼리고의 얼굴 위로 툭, 툭 떨어졌다. 그 감각에 망각의 강 입구에서 간신히 되돌아온 칼리고가 가물거리는 눈을 떴다.

“오빠!”

레이린은 칼리고가 눈을 뜬 것을 보고는 또다시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조금 전의 눈물이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지금은 안도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린.”

칼리고는 진즉 꺼져 가는 숨을 간신히 붙들며 필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이미 잔뜩 흐려져 사물이 선명해졌다가 흐려졌다가를 반복하는 시야에, 레이린의 등 너머로 점차 가까워지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도망.......”

힘겹게 움직이던 입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가까스로 들어 올리고 있던 눈꺼풀이 그대로 감겼다.

코끝에서, 더는 생명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레이린이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이었다.

그에 절망하며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역시 신이라 이건가?”

푹-!

날카로운 통증이 그녀의 복부를 그대로 관통했다. 레이린은 아직도 칼리고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의 몸 위로 고꾸라졌다.

“커흑.......”

“흠. 신이라도 외부의 공격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닌 것 같고.”

스토이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을 뱉으며 손을 뒤로 물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복부를 관통했던 검이 빠져나가자 환부와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커헉! 쿨럭, 헉......!”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전신이 경련했다. 하지만 레이린은 피 섞인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엉금엉금 기어 칼리고의 시신을 제 몸으로 감쌌다. 그 모습을 본 스토이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대단하네. 이딴 괴물이 뭐라고.”

직후 그의 검이 레이린의 목을 다시금 관통했다.

“뭐, 그 덕에 나야 좋지만.”

한 차례 경련하던 레이린의 몸이 칼리고의 몸 위로 엎어졌다. 더 이상의 숨결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스토이가 레이린의 몸을 끌어당겨 뒤집었다.

“힘의 원천이라고 하면...... 역시 심장이려나?”

스토이의 검은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이내 피 묻은 검으로 레이린의 심장을 도려내어 그것을 세 조각으로 나누었다.

한 조각을 삼키자 검은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했고. 한 조각을 삼키자 검은 눈이 맑은 하늘색으로 변했다.

스토이는 제 안에서 날뛰는 기이한 힘을 만끽하며 마지막 한 조각을 삼켰다.

콰과광-!

그 순간, 천지가 갈라지는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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