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87)

* * *

“곧 눈이 내릴 것 같군요.”

진중한 목소리가 귓가를 잠잠히 울렸다. 그에 평야 저편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에드윈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주군.”

패트릭은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푸른 눈앞에 덤덤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드윈은 평소와는 판이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새까맣게 윤이 나는 갑주를 차려입은 그는 그 자체로 사신 같았다.

가볍게 인사를 마친 패트릭이 고개를 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평원. 그 위로 유유히 흐르는 구름은 어딘지 탁한 회색이었다.

“애들은 오랜만에 신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주군께서 마물 토벌을 나가신 지도 꽤 되지 않았습니까. 몸이 근질거릴 만하죠.”

패트릭은 애써 가벼운 어조로 그리 말했다. 그 역시 옆구리에는 투구를 끼고 있는 묵직한 갑주 차림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그 또한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기에 둘 사이에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지금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은 유스티아와 마티아스의 중간 즈음에 있는 제르쉬 평원이었다.

왕이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에르치니아와 벤투스가 중앙에 합류했다. 왕궁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 덕에, 유스티아의 군사들은 국왕군의 선발대가 유스티아로 진격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여유롭게 출정할 수 있었다.

약 하루 전 새벽. 에드윈은 제르쉬 평원 초입에 도착해 진군을 멈추고 간소한 둔영을 구축하게 했다. 아마도 전투는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었다. 유스티아로 들어가는 길목 중 가장 커다란 통로였으니.

기실 정석대로 하자면 성벽 안에서 버티며 이 전쟁을 공성전의 형태로 끌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에드윈의 방식도, 클로비스 기사단의 방식도 아니었다. 외려 그들에게는 악수다.

유스티아는 본질이 검이다. 물론 그들이 원한다면 완벽한 방패 또한 될 수 있겠지만, 검은 검일 때가 가장 빛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패트릭의 주인은 가장 완벽한 ‘검’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검.

“주군.”

패트릭은 온기 하나 없는 조각상처럼 지평선을 응시하는 그 모습이 어딘지 불안해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새파란 눈동자가 소리 없이 다시금 그를 마주 보았다.

“저.......”

그러나 패트릭은 무어라 더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어 하릴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금방이라도 죽어 없어질 듯한 제 주인을 붙들어 놓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빈 것처럼 느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바로 그때.

“마티아스군이 보입니다!”

보초를 서던 기사가 달려와 외친 말에, 에드윈의 푸른 눈이 오래 숨죽인 맹수처럼 섬뜩하게 번뜩였다.

“전군, 정렬.”

내내 다물려 있던 입술이 마침내 열리며 짤막한 명령을 뱉어냈다. 나름 한가롭게 늘어져 있던 기사와 병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양 굳은 얼굴로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 섰다.

저 멀리, 평야 너머로 천천히 다가오는 군사들의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가장 앞에는 평소의 하늘하늘한 옷차림새와 달리,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밝은 은빛의 갑주를 차려입은 이드리스가 말 위에 올라 있었다. 그는 멀리서도 에드윈과 시선이 마주치자 요요히 눈을 휘어 보였다.

“.......”

뱀 같은 웃음을 마주한 에드윈의 눈가가 미미하게 흔들렸지만 바로 옆에 서 있던 패트릭조차 모를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유스티아군과 마찬가지로 제르쉬 평원의 초임에 도달하자 이드리스가 한 손을 들어 올려 진군을 멈췄다. 지면을 묵직하게 울리던 발소리가 칼로 잘라 내듯 뚝 멎었다.

마티아스군이 잠시 전열을 정비하는 동안의 소란이 지나가자, 이곳에 모인 사람의 수와는 정반대로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마티아스군과 유스티아군 사이에 소리 없는 탐색이 오갔다.

마지막으로 받은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자면 국왕군의 선발대가 도착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했으니, 그들은 아마도 한 시간 이내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르치니아군과 벤투스군은.......

「로드 릴리트, 로드 유리엔.

아마도 지금은 함께 계실 줄 압니다. 일전에 두 분께서 약속하셨던 빚, 이번에 받겠습니다.

국왕에게 합류하겠다는 서신을 보내고 군사를 준비하십시오. 다만, 에르치니아와 벤투스에서 제르쉬 평원까지는 거리가 있으니 국왕군의 일부를 선발대로 보내놓으면, 두 분께서는 호노라투스에서 후발대와 합류해 제르쉬 평원으로 합류하겠다는 말도 덧붙이십시오.

선발대와 마티아스군이 합류하면 저희 군이 발목을 잡아 두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호노라투스를 향해 느리게 진군하시다가, 선발대가 제르쉬 평원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곧장 성문을 뚫고 왕궁으로 향하는 걸 목표로 하십시오. 저 또한 최대한 빠르게 마티아스군과 선발대를 정리하고 그쪽으로 합류토록 하겠습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무운이 함께하시길. -E 」

‘지금쯤 성문 앞에 도달했겠군.’

에드윈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것은, 그래. 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하는 ‘도박’이었다.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는 것. 눈앞에 있지도 않은 누군가의 선의 하나만을 믿고 행동하는 것. 불과 반년 전의 그라면 미쳤다고 여겼을 것이 분명한 짓이었다.

그렇지만 고작 그 반년 사이에.

‘......함께 죽어 줄 수도 있어?’

그가 5년간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끝내 나락에까지 처박은 여자가 있었다.

제 사람이 되겠다는 그 말. 죽어도 죽지 않고,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제 손에 죽겠다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 ‘미친 짓’은 오롯이 그녀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주군! 왕이 벤투스 영주의 제안에 따라 선발대를 먼저 출발시켰답니다!’

그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패트릭. 준비해라.”

에드윈은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한 무리의 인기척에 나직이 말을 뱉으며 투구를 썼다.

스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이 뽑혀 나왔다. 갑주와 대비되는 은빛 검날이 새벽빛을 받아 반짝였다.

“전군, 발검.”

패트릭이 그를 따라 투구를 쓰며 나직이 말했다. 그 말에 기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고, 병사들은 제각기 창과 방패 등을 세게 움켜쥐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쿵쿵, 멀리서부터 묵직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지면이 둥둥 박동할 때마다 심장이 기이하게 뛰는 느낌에 기사들이 저마다 심호흡했다.

에드윈은 말 위에 올라앉은 채 눈만 옆으로 굴려 평야 저편을 바라보았다. 아침 해를 등진 한 무리의 군사가 점차 가까워졌다. 에드윈은 눈을 찌를 듯 환한 햇빛에 잠시 미간을 좁히며 그 형체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국왕의 선발대, 아니, 저건.......

“......!”

무언가를 깨달은 에드윈이 두 눈을 부릅뜨는 것과 동시에.

“와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들려오며 지금껏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던 마티아스군이 무서운 기세로 유스티아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로드 에드윈.”

챙-!

에드윈은 패트릭에게 무어라 명령을 내릴 새도 없이 저를 노리고 쇄도해 오는 검은 창날을 막아 냈다. 일반 창이라고는 볼 수 없이 묵직한 무게감에 에드윈이 투구 안으로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것을 튕겨 냈다.

재빨리 창을 거두어들인 이드리스가 군사들 사이로 거리를 조금 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여유롭게 인사를 나누기에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에드윈은 그 인사에 답하지 않고 검을 고쳐 쥐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은빛 검날이 정확히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것을 검은 창이 아슬아슬하게 막아 냈다.

조금 전보다 한층 묵직한 쇳소리가 나며 그 사이로 낮은 으르렁거림이 섞여들었다.

“당신 짓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 저들 말씀이십니까?”

이드리스는 애써 여유로움을 가장해 에드윈의 검을 쳐내고는 ‘선발대’쪽을 힐긋 일별했다.

“καταστρέφω!”

“Δουλεία!”

중앙의 선발대 쪽에서 간헐적으로 빛과 목소리 터져 나올 때마다 땅이 뒤집히고 방패가 갈라졌다. 에드윈은 이를 으득, 갈고는 또다시 이드리스의 팔을 잘라 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검은 창이 뱀처럼 유려하게 그 공격을 흘려 냈다.

“켈레마의 주술사들이 대체 왜, 이곳에 있나.”

분명 에드윈이 인기척을 감지하고, 처음 시선을 돌려 선발대 무리를 확인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군사’였다. 하지만 아침 햇살이 하얗게 일렁이는 순간,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던 ‘장막’이 걷히고 그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자의 얼굴은, 분명 켈레마의 부촌장이었다.

본래라면 그는 국왕의 후발대와 함께 주술사 무리를 이끌고 왔어야 옳았다. 주술사는 어쨌거나 가장 귀중한 인력이고, 혹여 선발대와 함께 예기치 못한 전투에라도 휘말린다면 그 손실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건, 무언가 일이 어그러졌다는 이야기다.

“글쎄요. 변덕이라고나 할까요.”

이드리스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으며 창을 휘둘렀다. 낭창낭창한 몸과 달리 검은 창은 빠르고도 매섭게 에드윈의 목을 노리며 치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인간의 ‘선의’라는 걸 한 번 믿어 보기로 했는데.”

챙! 검은 창끝이 은빛 검에 막혀 튕겨 나왔다. 이드리스는 별다른 주술 없이도 그 자체로 괴물 같은 사내의 모습을 보며 이를 갈듯 웃었다.

“저는 역시 운이 좋은가 봅니다.”

은빛 투구 안쪽에서 주홍색 눈이 더없이 부드럽게 휘었다.

검은 창끝과 은빛 검날이 다시금 맞닿은 순간이었다.

뿌드득-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음에 이드리스와 에드윈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휙 내렸다. 그들 사이의 땅이 쩌적, 불길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어린아이의 머리만 하던 금이 삽시간에 옆으로, 더 옆으로 몸집을 부풀렸다. 땅이 드드드, 진동했다.

“에벤!”

“패트릭, 피해라!”

이드리스와 에드윈이 동시에 고함치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콰앙!

그들 사이의 땅이 굉음과 함께 박살 나며 그 사이에서 거대한 기둥 같은 것이 솟아났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끝도 없이 솟아나는 ‘물체’를 본 이들이 공포와 경악으로 입을 벌렸다. 그 사이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 일급 마수다!”

“피해...... 아아악!”

키이이익!

“전군, 제르쉬 평원 바깥으로 물러나라! 지금 당장!”

에드윈은 마수가 튀어나온 곳부터 무너져 내리는 땅을 피해 말을 몰며 소리쳤다. 패트릭 또한 땅을 가르고 튀어나온 마수를 목격하자마자 목청껏 후퇴를 외치고 있었다.

이드리스가 등 뒤로 멀어지며 마티아스군과 주술사들에게 무어라 외치는 소리, 주술사들이 마수를 막기 위해 애쓰는 소리 등이 들려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쾅, 콰앙!

캬아아악!

곳곳에서 같은 종류의 마수가 몇 마리 더 튀어나오자 땅이 무너지는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아아악! 내, 내 팔이......!”

“부촌장님! 살려......!”

“비켜라! 비키라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당장 비키래도!”

그나마 빠르게 제정신을 되찾고 몸을 빼고 있는 유스티아군과 달리, 마티아스군 쪽은 혼비백산했다.

그 필두에는 남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저 하나 탈출하기 바쁜 켈레마의 부촌장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저를 쫓는 마수를 따돌리기 위해 어린 병사 하나를 마수의 입 쪽으로 집어 던졌다.

“아악! 살려 주세요!”

이제 열댓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가 거대한 마수 앞에서 필사적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며 울부짖었으나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주변의 땅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갈라져 있었고, 마티아스군은 땅 위를 기어 다니며 게걸스레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마수를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흐흑....... 엄마, 아빠.......”

막 군사들이 모두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패트릭과 빠져나가려던 에드윈이 그 울음소리에 멈칫했다. 그 찰나의 망설임으로 인해 에드윈과 훌쩍 거리를 벌리게 된 패트릭이 경악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주군! 뭐하십니까! 곧 무너집니다!”

새파란 눈에 찰나 갈등이 스쳐 갔다. 그러나 무의미한 갈등이었다.

“유사시에 통솔권은 네게 있다는 걸 잊지 마라, 패트릭.”

“주군!”

패트릭이 기겁했지만 에드윈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갈라진 땅을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으며 마수를 베어 넘긴 그가 찰나의 틈을 두고 어린 병사를 집어삼키려던 마수의 목을 무자비하게 갈랐다.

키이이익!

마수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말에서 뛰어내린 에드윈이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어린 병사를 덥석 안아 올렸다.

“머리를 양팔로 감싸고 몸을 말아. 절대, 머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저, 그, 그게 무슨-”

병사가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몸은 경악할 만한 힘에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둥글게 만 그가 마티아스군의 가장자리를 억, 으억 소리를 내며 굴렀다.

에드윈은 병사의 생사를 확인한 즉시 제 등 뒤에서 다가오던 마수를 베기 위해 검을 들고 몸을 돌렸다.

빠직-

그 순간, 그가 발 디디고 서 있던 땅이 크게 휘청였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그의 앞으로 마수의 커다란 입이 닥쳐 왔다.

바로 그때.

“-에드!”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체향이 그를 와락 끌어안는 것, 시야가 점멸할 정도로 선명한 황금빛이 세상을 가득 물들인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몰랐다.

다만, 그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나락까지 떨어지는 듯한 감각과. 허공에 흩날리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배경으로 흩어지는 흰 눈송이.

‘아.’

에드윈은 그제야 뭍으로 나와 숨을 쉬는 사람처럼 품 안의 사람을 꽉 끌어안았다. 레이린과 에드윈의 몸이 그대로 무저갱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끝끝내 제자리를 찾은 기억들이 하나둘 머릿속에서 맞물리기 시작했다.

8.5. 낙원의 몰락

태초에 신과 일흔둘의 천사가 있었다.

어느 날, 신은 천사들의 보조를 받아 ‘세상’을 만들었다. 기름진 대지와 맑은 물, 그 위를 뛰노는 동물과 인간, 그리고 동물과 인간의 중간 즈음에 있는 몇몇 영물들까지. 그곳은 곧 낙원이었고, 인간들은 그 땅에 낙원을 의미하는 ‘헤르기아스’라는 이름을 붙이며 신을 찬미했다.

수많은 생명 중에서도 신과 천사들이 가장 사랑한 것은 단연 인간이었다. 그것은 단지 인간만이 지성을 가지고 신을 찬양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힘든 일을 겪고 절망해도, 언젠가는 추스르고 일어나 앞을 향해 나아 가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기특해서였다.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고, 그 감정에 보답받지 못했을지언정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이 바보 같으면서도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과 천사들이 세상을 ‘무너트리지’ 않으며 인간에게 무언가를 더 해 줄 수는 없었다. 이미 그들의 품을 떠나 홀로 서게 된 세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세상의 ‘균형’이 어긋나게 된다. 그리고 균형이 맞지 않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하여 이제 헤르기아스에 관여할 힘을 잃은 신과 천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점차 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신의 손을 떠나 자체적으로 존재하게 된 헤르기아스에는 점차 전염병, 혹은 자연재해 등의 재난이 일정한 주기로 닥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인간들은 부르고 불러도 답이 없는 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신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은 흐려졌고, 그 자리를 욕망과 잔혹함이 채우자 이제는 타인을 해치는 짓마저 스스럼없이 행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핍박하고 물건처럼 팔아넘기는 일이 일상처럼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일흔둘의 천사가 신 앞으로 나아 가 눈물로 읍소했다.

[나의 어버이시여, 만물의 창조주이시여. 부디 저희를 내려보내 주십시오. 저희를 내려보내시어 저들을 구원케 하소서. 저토록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이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더는 견딜 수가 없나이다.]

신은 제 앞에 엎드린 일흔둘의 천사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고통’을 알게 될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야만 하는 필멸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정녕 그래도 상관없느냐?]

[저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조차도 기꺼울 것입니다.]

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꿋꿋했다.

결국 느릿이 한숨을 삼킨 신이 후, 긴 숨을 내뱉었다. 온기가 어린 숨이 천사들을 스쳐 지나가자 그들의 등에 돋아나 있던 날개가 새하얀 깃털이 되어 나풀나풀 흩날렸다. 눈 깜짝할 새에 인간의 형상을 갖추게 된 그들의 눈과 머리카락은 선명한 황금색이었다.

[......이제 너희를 나의 대리자로 택하노니.]

신은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갖추게 된 그들에게 제 능력의 일부를 떼어 주었다.

[너희의 의지는 곧 나의 의지가 될 것이며.]

하나는 그들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뜻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언령’이었고.

[내 너희를 질서를 수호하는 자, 빛의 수호를 받는 ‘신족’이라 부를지니.]

다른 하나는 세계에 안배된 미래를 짤막하게나마 엿볼 수 있는 ‘예지’였다.

[나의 뜻이 언제나 너희와 함께할 것이라.]

신이 눈을 두 번 깜박이자, 일흔둘의 천사들에게 자그마한 반딧불이 같은 빛 두 덩이가 제각기 스며들었다. 그러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인이 몸을 낮춰 이마를 바닥에 대며 신에게 절을 올렸다.

“나의 어버이, 세상의 주인 되는 분이시여. 우리는 당신의 의지를 잇는 자, 비틀린 질서를 바로잡는 자.”

신의 빛깔이라 일컬어지는 황금색의 눈으로, 그녀가 경건하게 맹세했다.

“만일 저희가 망각의 강 너머의 이에게 배와 노를 내어 준다면, 그때엔 당신이 내려 주신 이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그렇게 일흔둘의 천사들은 신과의 맹약만을 남겨 두고 ‘신족’이 되어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해 땅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도 오래도록 지켜본 자들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신묘한 황금빛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 거기에 더불어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과 말한 바대로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언령의 능력까지. ‘인간’이 된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얼마나 값나가는 상품이 될 것인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이 고통받는 이를 구원하라 내린 능력을 애먼 이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여 신족들은 대륙의 최북단, 자신들이 자리 잡은 터전 주위로 거대한 강을 두르고 그 주위를 짙은 안개로 덮었다. 그것은 혹시라도 강을 넘어오려는 자가 있다면 안개를 헤매다 본인이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후 신족들은 본격적으로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러 다니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신족은 제각기 강을 넘어가 알게 모르게 인간들을 돕는 ‘순례’를 떠났다.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은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거나(그것이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 아닌 이상), 재해가 닥칠 것을 예상하고 사람들을 미리 대피시키거나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후로 한 해, 두 해를 넘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까진 무릎의 상처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 것을 목격한 한 소녀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러나 소녀의 상처를 손짓 한 번으로 치료해 준, 후줄근한 갈색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이런 노래를 흥얼거릴 뿐이었다.

우리는 날개가 없다네. 날개를 버리고 너희 곁으로 왔다네.

이 땅의 불행한 자 그 누구인가. 날개 없는 신이 너희를 위해 왔다네.

소녀가 귓가에 맴도는 기묘한 노랫소리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을 때 즈음에는, 이미 청년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다.

갈색의 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신족들은 언제나 소리소문없이 나타났다가 딱 그만큼 조용하게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을 타고 흐르는 소문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봐, 자네. 그 얘기 들었나?”

“아, 왜 그 옆 동네 초록 지붕 집의 제나 말일세. 폐렴이 하룻밤 만에 나았다고.......”

“날씨가 귀신같이 들어맞더라니까. 그 정도면 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닐지.......”

“사실 그 머리 색, 눈 색부터가 말이 안 되지 않나. 단체로 유령에 홀린 게 아니라면야.”

사실이 한 조각, 두 조각 쌓이며 ‘금빛 인간’에 대한 소문은 점차 불어났다. 그에 따라 ‘금빛 인간’을 잡아서 비싼 값에 팔아 치우려는 전문 사냥꾼들마저 생겨났으나 신족들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을까. 바람이 차고 하늘이 어두웠던 어느 날. 구석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서 쌍둥이가 태어났다. 한 명은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을 가진 ‘스토이’라는 이름의 사내아이.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꺄아아악!”

눈을 제외하고는 전신이 새까만 그림자 덩어리처럼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괴물 새끼 같으니.”

소년은 나름대로 ‘칼리고’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괴물’이라는 말로 더 자주 불리곤 했다. 기실 소년은 전신이 새까만 덩어리처럼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괴물이라 부르며 구박하고 괴롭히기 일쑤였다.

“야, 짖어 봐.”

개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은 그의 쌍둥이 형제인 스토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혐오스러운 인간’ 취급이라도 해 주었지만, 스토이는 칼리고를 완전히 ‘장난감’처럼 대하며 괴롭혔다.

그들의 부모가 칼리고에게 밥을 주지 않고 굶기는 식으로 그를 괴롭혔다면, 스토이는 사냥개들을 데려와 칼리고의 목을 물어뜯으라 지시하고는 그가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거워하는 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유달리 배가 고팠다. 평소라면 마구간에 틀어박혀 숨을 죽였을 칼리고는 끝끝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주방에 숨어들어 빵 한 덩이를 훔쳐냈다.

“이 도둑놈의 새끼가 은혜도 모르고!”

칼리고가 그날 유달리 배고파했던 것처럼, 그의 아비는 그날따라 유달리 기분이 나빴다. 옆집 할아버지와의 도박에서 돈을 잃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동네 술집에서 외상값부터 내놓으라며 쫓겨난 것인지. 추측은 다양했으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그의 친부가 평소보다도 난폭하고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칼리고에게 한바탕 매질을 퍼붓고서 씩씩거리던 친부가 돌연 몸을 돌렸다. 그는 평소에 곧잘 사용하곤 하던 몽둥이를 내팽개치고는 부엌으로 달려가 아내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들었다. 그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녁을 준비하던 여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머! 뭐하는 거예요, 여보!”

“이리 줘! 내 오늘은 저 괴물 새끼를 죽여 버리고 말 테니까!”

“그랬다가 무슨 저주를 받을 줄 알고요! 그냥 내버려 두라니까!”

“이거 놔!”

그러나 친부는 막무가내였다. 그가 아내의 손을 뿌리치자 주홍빛 촛불로 인해 칼날이 피에 물든 듯 새빨갛게 번뜩였다. 그것을 본 칼리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바깥으로 달아났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당장 이리 안 와! 이봐, 개를 풀어! 저놈을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칼리고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로 컹컹, 사냥개들이 살벌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오직 그 생각만을 하며 한참을 달렸다. 얼마나 오래 달린 것인지 벌써 사방이 새카맣게 변한 채였다.

“헉, 헉.......”

칼리고는 달리다가 말고 발 앞이 훅 꺼지는 듯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반동으로 인해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물.......”

새카만 물이 금방에라도 사람 하나를 거뜬히 먹어 치울 것처럼 음산하게 철썩이고 있었다. 그 위를 뒤덮은 잿빛의 안개는 공포 그 자체였다.

“......기 있......!”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등 뒤에서 그를 쫓는 자들의 목소리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제발.’

칼리고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제발, 제발!

정말로 이 땅에 신이라는 게 있다면.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살려 주세요.......”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 달라고.

그 염원을 끝으로, 칼리고는 제 앞에 펼쳐진 새카만 강물로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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