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87)

* * *

푸르스름한 공기가 서서히 어둠을 밝혀 갈 무렵.

“놓치지 마라!”

윈프리드 내에서는 일찍부터 치열하기 그지없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멈추...... 크아악!”

굵은 손이 회청색 머리카락을 잡아채기 직전,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 손목에 표창을 박아 넣고는 재빨리 달아났다. 남자는 제 손목에 박힌 표창을 뽑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기 바빴다.

그사이, 연한 하늘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미청년이 고개를 슬쩍 틀더니 보란 듯 샐쭉 미소 짓고는 저만치 멀어져 갔다.

녹스의 전(前) 간부, 케르디트 레헬론은 그 뒷모습을 보며 으득 이를 갈고는 소리를 질렀다.

“저놈이 어떻게 돌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잡아 죽여!”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그의 심복들이 그를 앞질러 라그나르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저 새끼......!’

케르디트는 목구멍이 바싹 말라 오는 기분에 입 안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주먹 쥔 손안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주술석 탓에 손바닥이 아프게 짓눌렸다.

지금의 이 상황은 정말로, ‘이상했다.’ 분명, 마티아스 쪽에서 확답이 왔었다. 라그나르 브리어스를 성공적으로 생포했다고. 그렇게 말하며 주술석을 한 무더기나 전달하고 가지 않았던가. 지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주술석도 그것이었다.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전달한 주술석으로, 케르디트는 너무도 손쉽게 브리어스 저택을 장악했다. 키안 에레즈가 남은 식솔들을 이끌고 도망쳐 몸을 숨기기는 했지만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가 내도록, 여태 그렇게나 원했던 윈프리드의 꼭대기까지 단 한 발자국만이 남은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들려온 소식 하나.

‘수, 수장님! 지금 밖에 라, 라그나르 브리어스가......!’

그 하나 때문에 그는 왕좌를 눈앞에 두고도 그대로 아래로 굴러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라그나르 브리어스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케르디트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으나 직접 그를 추격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외려 애써 여유를 가장하며 그를 비웃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한들 결국 한낱 인간. 적진에 홀몸으로 뛰쳐나오는 저 꼴을 보라지. 참으로 오만하고 멍청하지 않은가.

속내야 이미 진창에 가까울 정도로 혼란스러웠지만 케르디트는 현재 ‘수장’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제 동요를 숨기고 부하들에게 라그나르를 잡아 오라 일렀다. 여의치 않는다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내렸다.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록 라그나르는 붙잡히지 않았다. 외려 시간이 지날수록 케르디트가 잃는 수하의 수가 눈덩이 불어나듯 늘어났다.

결국 케르디트 레헬론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직접 거리로 나서게 될 때까지.

“거기 서!”

케르디트의 부하 중 하나가 도망치는 라그나르의 등을 향해 주술석을 집어 던졌다.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간 그것은 라그나르의 발치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바닥에 부딪힌 주술석이 쾅! 소리를 내며 터졌다.

수하들의 뒤쪽에서 제가 가진 주술석을 있는 대로 꺼내 든 케르디트가 고함쳤다.

“죽여도 상관없다! 가진 주술석을 모두 소진해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

“예!”

지금 이곳에서,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라그나르를 처리해야 했다.

인정하기는 싫었으나 지난 세월 라그나르가 윈프리드에서 쌓아온 악명, 혹은 위명은 마냥 무시할 것이 되지 못했다. 케르디트가 무리 없이 윈프리드를 장악한 것은, 어디까지나 ‘라그나르 브리어스’라는 괴물이자 이곳의 왕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다.

‘......녹스의 수장이 살아 돌아왔다던데.’

‘뭐? 분명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혹시 우리가...... 브리어스 저택을 건드리는 데 가담했다는 사실을 그 괴물이 알았다가는.......’

‘지금이라도 발을 빼야 할지도.......’

그에 대한 반증으로, 라그나르가 살아서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그의 수하들이 여실히 동요하지 않았던가.

‘기회는 한 번뿐이다.’

케르디트 레헬론은 제 수하들이 사용하는 주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라그나르의 등을 선뜩하게 노려보았다.

잘그락 소리를 내는 주술석들을 한꺼번에 손에 쥔 그가 그것을 그대로 움켜쥐어 부수는 순간.

콰앙!

“큭......!”

내내 날다람쥐처럼 이리저리 도망치던 라그나르의 뒷덜미를 누군가 잡아채어 찍어 누른 것처럼. 그의 몸이 부자연스럽게 땅에 처박히며 커다란 굉음을 자아냈다.

“커헉, 컥!”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감각에 라그나르가 피를 왈칵 토해 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인지, 여태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긴 채 케르디트와 그 수하들을 방해하던 복면을 쓴 이들이 다급하게 튀어나와 그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무력해진 지금. 주술석을 차고 넘치게 지닌 케르디트의 수하들이 얼마 되지도 않는 복면 쓴 자들을 막아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챙, 날붙이들이 어지럽게 맞부딪히는 소음과 비명 등이 주위를 메웠다. 케르디트는 그 사이에서, 피 웅덩이에 잠긴 개미처럼 바르작거리는 라그나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의 입가에는 승자 특유의 여유 만만하고도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케르디트는 제 밑에서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는 라그나르의 등을 발로 짓밟으며 자못 자비로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얌전히 마티아스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기어 나와서 이 사달을 만드나. 이드리스 프리조프는 적어도 자네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던데.”

케르디트가 등을 발로 지그시 짓누른 탓에 또다시 피를 퉤, 토해 낸 라그나르가 힘겹게 고개를 비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네, 이 멍청한 새끼가.”

“뭐?”

“너는 정말 이드리스 프리조프, 그 작자가 네 손에 뭐라도 들려줄 것 같나?”

라그나르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도 보란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날 선 비웃음이 고운 입매 사이로 튀어나왔다.

“정신 차려, 이 얼빠진 놈아. 그 미친 새끼가 원하는 건 자기 빼고 전부 다 사이좋게 손잡고 뒈져 버리는 거라고. 그걸 아직도-”

“아직도 제 주제를-”

“-몰라서야. 텅 빈 대가리로도 윗대가리 노릇 하겠다고 추하게 설치는 꼴이란.”

라그나르는 분노한 케르디트가 으르렁대는 것을 가뿐히 무시하고 제 할 말을 맺었다. 그에 가느다랗게 남아 있던 케르디트의 이성이 뚝, 끊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냐, 정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여 주지.”

끝내 일말의 이성마저 집어 던진 케르디트가 사납게 웃으며 제 귀에 걸려 있던 주술석을 떼어 냈다.

이것은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건넨 것이 아닌, 그가 비밀리에 공들여 구한 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적을 죽일 수 있다 알려진 주술이 걸려 있다고 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당사자가 끝내 미쳐 거품을 물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되풀이해 보여 준다지.

케르디트는 피와 먼지 등으로 엉망이 된 지금도 여전히 번지르르한 낯을 노려보며 그것을 망설임 없이 부수어 버렸다. 동시에 라그나르의 눈이 먹구름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아...... 린, 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스스로 제 목을 조르는 그의 모습에 케르디트의 입가에 사나운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멈춰!]

쨍, 하고 무언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변이 일어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허공이 기이하게 비틀어지는가 싶더니, 일시에 사방으로 폭발하듯 부풀었다.

“컥!”

“으아악!”

어디선가 파삭, 하고 주술석이 부서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라그나르를 중심으로 돌풍처럼 일어난 바람이 케르디트를 포함해 주위에서 난전을 벌이고 있던 길드원들까지 거칠게 내팽개쳤다.

“......커헉! 콜록!”

그리고, 주술로 인해 이지를 잃고 버둥거리던 라그나르가 막혔던 숨을 한 번에 토해 내듯 옆으로 구르며 거칠게 기침했다.

“아, 제기랄. 더럽게 아프네. 역시 이런 건 키안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는 익숙한 욕지거리를 짓씹어 뱉으며 숨을 골랐다. 목소리에 힘이 없기는 했지만 누가 보아도 이지를 잃은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정신없이 제 몸을 추스르던 케르디트가 그것을 보고 그대로 굳어졌다.

“어떻, 어떻게.......”

주술이, 깨졌다고?

해법이랄 것이 없는 주술이다. 애초에 본인이 그렇게 의뢰했으니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말도 안.......”

케르디트가 유령에 홀린 것처럼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길게 이어진 대로의 끝에서 누군가 푸르스름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영문 모를 일에 어리둥절하게 널브러져 있던 이들의 시선이 홀린 것처럼 한 곳을 향해 못 박혔다.

그 얼굴은 퍽 익숙했다. 라그나르와 닮은 듯 다른, 묘하게 메말라 바스러지는 장미 꽃잎을 닮은 낯. 하지만 햇빛에 빛나는 황금빛 광채만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히, 히익! 괴물!”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색채를 목격해 공포에 질린 길드원 하나가 그녀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주술석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려 했다. 라그나르도, 유사시를 대비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엘빈과 키안조차도 미처 반응하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참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

“흡......!”

묵직한 말이 떨어진 순간, 남자는 주술석을 집어 던지려던 자세 그대로 뻣뻣이 굳어졌다. 그 행동이 명백히 제 의지가 아니었던 듯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이린은 얼음처럼 굳어 있는 남자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도로 발을 틀어 라그나르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아?”

“......다음에는 키안을 시켜도 괜찮을 것 같아. 그보다, 성공한 거야?”

라그나르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레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내 쥐고 있던 왼손을 펴 보였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산산이 조각난 검은 보석의 잔해가 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몇 시간 전, 레이린이 입에 담은 ‘실험’에서부터 비롯된 계획이었다.

‘내가, 그러니까...... 아무래도 신의 분노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인 것 같아.’

레이린이 덤덤히 꺼내 놓은 사실에 라그나르와 키안, 루나, 엘빈은 생각보다 무던한 반응을 내비쳤다. 어쩌면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신묘한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을 보았을 때부터 무의식중에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레이린은 그중에서도 유독 차분한 눈의 라그나르를 힐긋 일별하며 말했다. 그간 제가 마주했던 수많은 상황, 이름 없는 마을과 켈레마, 인어와 켄타우로스 등에게서 얻어낸 모든 정보를 조합해 보자면.......

‘그리고 나는 바로크 드 루에이리가 그렇게나 나를 경계하고 죽이려 드는 이유가, 내게 ‘신성력’에 준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레이린 브리어스, 그녀 자신의 안에도 신성력, 혹은 신력 비슷한 것이 존재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것은 왕이 레이린을 죽이려 드는 현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판을 뒤엎을 변수가 되어 주리라.

‘아.’

그때, 레이린은 스스로조차 자각하지 못한 새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것으로 궁지에 몰려 있는, 현재 유스티아의 상황마저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미친 거지.’

하지만 직후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녀는 삽시간에 머릿속을 물들이는 푸른빛을 강박적으로 지워 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 같아서. 감히 바라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그리 되뇐 주제에, 결국 알량한 욕심을 참지 못해 손을 대고 상처를 줬으면서 이리 생각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속을 온통 물들인 푸른빛을 잡아 뜯을 때마다 제 어딘가도 같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지만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통증은 그녀에게 일말의 감흥조차 되지 못했다.

가까스로 상념을 갈무리한 레이린은 제 소매에 감춰 두었던 검은 보석을 꺼내 들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게 그 열쇠가 되어 줄지도 몰라.’

에벤의 방에서 주술석을 훔쳐 나온 다음 날. 레이린은 어김없이 이드리스 프리조프와 의미 없는 문답을 이어 가는 내내 고민했다. 에벤은 대체 어떻게 켈레마를 벗어났음에도 자유롭게 주술을 쓰는 것일까? 분명 모든 주술사는 루비로 신력을 활성화해야 주술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몇 번이고 곱씹다 보니, 불현듯 알려진 ‘사실’과는 동떨어진 의문 하나가 불쑥 머릿속에 떨어졌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애초에 루비가 신력을 ‘활성화’한다는 것조차 거짓이라면? 루비가 사람의 몸에 내재된 신력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루비 그 자체가 ‘신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레이린은 이드리스의 앞에서 손에 든 찻잔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끝을 감추며 차갑게 굳어 버린 머리를 애써 굴렸다.

만약 이 가정이 진실이라면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진다.

‘주술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지 아닌지는 오직 켈레마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켈레마에서 ‘선택’한 자만이 주술사가 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켈레마에서 ‘루비’를 제공한 자만이 ‘주술’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말이 된다. 에벤은 루비의 대체재인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의 후보로 가장 유력한 것은, 아마도 이것.

레이린은 제 손 위에서 빛을 받아 은은히 반짝이는, 검은 옥 같이도 보이는 보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걸로 실험을 하나 해 보려 해.’

그리하여 벌어진 것이 이 상황이었다. 라그나르가 일부러 케르디트 레헬론의 눈에 띄어서, 쫓기다가 붙잡히고,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황금색 눈과 머리칼의 레이린이 루비 없이도 ‘맨몸으로’ 상대방의 주술을 저지시켜 케르디트 세력의 전의를 꺾는 것.

‘내가 할게.’

본래 쫓기는 역할은 키안으로 분장한 엘빈이 맡기로 했었으나, 라그나르가 미끼를 자처했다.

‘뭐? 오빠, 하지만.......’

‘절실한 것 아냐? 어떻게 해서든 해내야 하는 일 아니었어?’

‘.......’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돌아올 테니까, 그러니까......’

‘.......’

‘내가 할게.’

라그나르는 난색을 내비치는 레이린의 말을 기이하리만치 단호하게 일축하며 싱긋 웃었다.

하여 레이린은 라그나르가 케르디트의 수하들에게 아슬아슬하게 쫓기는 내내 당장에라도 검을 빼어 들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억누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케르디트가 그의 등을 짓밟을 때는 그 발목을 뽑아 버리고 싶었어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았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커다랗게 소리치며 뛰쳐나가는 순간.

[-멈춰!]

속에서 무언가 커다랗게 울렁이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손에 꾹 쥐고 있던 검은색 주술석이 환히 빛나며 파삭, 조각났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지금껏 빈 자리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곳에 무언가 한가득 고여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찰랑이는 기분. 메말라 갈라진 땅에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온 땅을 적시는 기분.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처럼 황홀하고도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그런 감각. 적어도 라그나르의 안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그것을 입 밖으로 뱉어 내는 것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라그나르는 제게 검은 주술석의 잔해를 보여 주는 레이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 눈이 어쩐지 서글퍼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길 바랐는데.”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리던 라그나르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의 목소리가 워낙 작고 낮았던지라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레이린이 눈을 좁히던 때였다.

챙그랑-

칼날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울렸다.

‘혹시 케르디트가 아직도 반항하는 건가?’

놀란 레이린이 추궁을 이어 갈 생각조차 잊은 채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케르디트는 어느새 나타난 엘빈에 의해 팔다리의 힘줄이 모두 잘린 채 바닥에 얌전히 기절해 있었다.

‘그럼 어디서......?’

레이린이 의아함으로 미간을 옅게 찌푸리는 그 순간. 그녀가 보게 된 광경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가씨.......”

챙그랑, 챙-

케르디트의 수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무기를 떨어트리고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을 주시했으나 이변은 없었다.

라그나르, 레이린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무릎을 꿇은 이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저, 저희가 잘못-”

“그만.”

그러나 차갑게 얼굴을 굳힌 레이린이 그것을 대번에 쳐냈다. 그 단호한 태도에 남자를 비롯한 수하들의 얼굴에 절망이 스쳐 갔다. 개중 몇은 체념한 얼굴로 제게 닥칠 일을 예감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라그나르의 손을 한 번 꾹 쥐었다가 놓은 레이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변명은 하지 마라.”

나직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울렸다. 그녀의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황금색 머리칼이 폭포처럼 찰랑였다. 저 멀리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등진 레이린이 두 눈을 형형하게 번득였다. 그녀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가벼운 말 한마디야 누구나 내뱉을 수 있다.”

그 말에 분위기를 틈타 은근슬쩍 무릎을 꿇었던 몇몇 수하들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레이린은 그것을 빠짐없이 눈에 새겼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 말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하들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니 말을 내뱉기 이전에 행동으로 너희의 충성을 보여라. 나는 케르디트 레헬론처럼 허황한 부귀와 영광을 약속하진 않겠다. 하지만!”

마지막 말이 천둥처럼 귓전을 울렸다. 사람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녀의 눈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녀가 등지고 있는 아침 해처럼, 선명하고도 환한 황금빛. 언뜻 보면 수없이 갈라지고 쪼개진 채 굳어 버린 보석처럼 보이지만.......

“떳떳한 삶.”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꺼지지 않은 희망의 색이기도 했다.

“잘못한 자는 벌을 받고,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추위와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는 삶.”

그녀가 힘주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 그 안에 담긴 뼈아픈 고통과, 절망과, 무수한 체념의 순간순간이 그 어떤 때보다 진실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런 당연한 세상으로 너희의 믿음에 보답하겠다.”

레이린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러자 그림자 밖으로 나와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엘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인께 충성을.”

“충성을.”

그 뒤를 이어 나타난 키안마저 무릎을 꿇자, 적령과 녹스의 길드원들이 하나둘 파도처럼 부복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적령 길드원들의 주인은 엘빈이었으나, 정작 그들의 주인인 엘빈이 레이린 앞에 무릎을 꿇은 탓에 그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상체를 반쯤 일으켜 앉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라그나르가 마지막으로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레이린과 시선을 맞춘 그가 천천히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영원한 주인께.”

흡사 절하는 자세로 보일 만큼 바짝 몸을 낮춘 그가 먼지투성이 신발 위에 입술을 내리며 경건히 읊조렸다.

“변하지 않는 충성을.”

“오빠.”

레이린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나무라듯 불렀다. 라그나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서야 몸을 일으켜 외쳤다.

“이제 일어들 나라! 시간은 사람의 목숨으로도 살 수 없다! 움직여!”

“예!”

“예, 수장님!”

평소보다도 훨씬 힘이 들어간 대답이 쩌렁쩌렁 아침 공기를 울렸다. 그것을 기점으로 무릎을 꿇고 있던 적령의 길드원들도 일사불란하게 일어나 움직여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절한 케르디트 레헬론은 상황이 정리된 후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 적령의 본부에 투옥했다. 그의 수하 중 일부는 키안의 선별을 거쳐 윈프리드를 정비하는 데 합류하게 될 것이었다.

레이린과 라그나르, 키안이 임시로 마련된 안가에서 이후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레이린.”

길드원의 부름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엘빈이 굳은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에르치니아와 벤투스가...... 호노라투스 측에 합류하기로 했다는 보고가 왔어.”

“예? 그렇게 되면 유스티아에는 승산이.......”

키안이 저도 모르게 몸을 반쯤 일으키며 목소리를 흐렸다. 호노라투스와 마티아스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유스티아로써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일진대, 여기에 에르치니아와 벤투스까지 합류한다면 필패다.

레이린이 유스티아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꽤 많이 내어 준 것을 알고 있는 그가 그녀의 옆얼굴을 힐긋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레이린은 이내 침착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연막이야.”

“연막이라고?”

“그래. 에르치니아와 벤투스는 에드윈...... 클로비스에게 빚이 있으니까. 아마 호노라투스에 합류하는 척하면서 성문을 뚫으려 할 거야.”

레이린은 에드윈의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목이 꽉 잠기는 듯한 느낌에 겨우 말을 맺었다.

라그나르는 한쪽에서 조금 놀랍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라졌구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데릭의 일 이후로 매번 스스로의 마음을 죽이고 잘라 내며 위태롭게 살아오던 레이린이, 어느새 굳건한 모습으로 서 있었기에.

그 모습이 기특하고 애틋하면서도....... 저렇듯 아픈 표정을 지을 줄 모르던 아이였는데, 하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한편, 가까스로 제 감정을 눌러 죽인 레이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키안을 돌아보았다.

“키안은 최대한 빠르게 이곳 상황을 정리하고, 오빠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에 인원을 추려서 에르치니아와 벤투스 쪽에 합류해 줘.”

“맡겨 주십시오, 아가씨.”

키안이 곧장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때 라그나르가 그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오라버니?”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금방 올 거야. 이야기 나누고 있어.”

라그나르는 그 말과 웃음을 남기고는 안가 밖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레이린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상황이 여유롭지 않아 이내 상념을 잠시 뒤로 미루어 두었다. 그녀가 이어 엘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엘빈, 혹시라도 에르치니아 연합군이 성문을 뚫어야 할 상황이 온다면 호노라투스 내의 길드원들을 움직여서 연합군의 진입을 도와줄 수 있을까? 부탁할게.”

“......너는 어떻게 하려고?”

“나는.......”

엘빈이 굳은 얼굴로 던진 질문에 레이린이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내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견고하던 황금빛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나는.”

그녀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꽉 막힌 목소리를 내고는 이를 악무는 차였다.

“린.”

잠시 어딘가로 사라졌던 라그나르가 불쑥 문을 열고 나타났다. 열린 문 너머로 갈색의 말 한 마리가 푸르르, 고개를 털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말 위에 안장까지 얌전히 얹혀 있는 것을 본 레이린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오빠? 왜.......”

“걱정되잖아.”

“.......”

“그럼 가 봐야지.”

레이린의 곁으로 다가온 라그나르가 더없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레이린은 그에 저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멍하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말의 곁에 다다르자, 라그나르가 그녀의 손에 고삐를 쥐여 주고는 그 위로 제 손을 단단히 겹쳤다.

“린. 내가 늘 말했지?”

레이린의 손을 소중하게 감싸 쥔 그가 또렷이 시선을 맞춰 오며 무겁게 속삭였다.

“전하지 못한 말은 의미가 없어. 잃고 나서 후회하면, 그때는 너무 늦어.”

“.......”

“그러니까 너는.......”

라그나르가 숨소리처럼 작게 말을 내뱉으며 웃었다. 산산이 부서진 추억의 파편 하나하나가 박혀 있듯 아프고 아린 웃음을.

“나처럼 잃고 나서야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응?”

라그나르가 숫제 울 것 같은 웃음과 함께 그리 속삭이자, 내내 멍하던 레이린의 얼굴이 끝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날 것 그대로 무너져 내린 표정의 그녀가 숨을 작게 헐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

“응.”

“내가, 내가 그래도.......”

“그래도 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더 늦지 않으면 돼. 괜찮아.”

라그나르는 언젠가, 시르나티스가 끝난 후 파티에서 마주했던 에드윈의 모습을 떠올리며 달래듯 말했다.

무수한 사람들, 무수한 시선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레이린 하나만을 응시하던 올곧은 푸른색의 눈. 그 눈을 보았기에, 그는 레이린이 어떻게 유스티아를 떠나 왔는지 자세하게 모르는 상황에서도 감히 확언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까지고 레이린 하나만을 기다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으니.

“다녀와, 린. 다치지 말고.”

라그나르가 해사하게 웃음 지으며 레이린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키안과 엘빈을 바라보았다. 키안은 늘 그렇듯 정중하고도 다정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고, 엘빈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린은 그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겨우 발을 뗄 수 있었다. 신중한 몸짓으로 말 위에 올라탄 그녀가 고삐를 단단히 쥐고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짙디짙은, 언제나 제 모든 것을 포용해 줄 것 같은 남빛의 눈.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가 진심 어린 목소리를 냈다.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직후 앞발을 쳐들고 높게 운 말이 주술석을 매단 채 윈프리드의 거리를 빠르게 달려 나갔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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