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87)

* * *

레이린 일행은 동트기 직전, 새벽 끄트머리의 어둠을 틈타 윈프리드 내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성벽을 지키고 선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유령숲을 가로질렀다. 본래라면 미로 같이 얽혀 있는 나뭇가지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튀어나오는 마물들로 인해 반나절은 족히 소요되었을 길. 그러나 엘빈의 명으로 미리 길을 닦아 둔 적령의 길드원들 덕에 순탄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마물을 막아 내지는 못했기에, 간간이 불쑥 튀어나오는 마물을 처리하며 앞장서던 라그나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린?”

남빛 눈동자는 걱정으로 평소보다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데릭이야, 내 이름.’

한때 레이린이 진심으로 아꼈던 자를 처음으로 거두었던 곳이니까.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

푹-!

하지만 그를 뒤따르며 마물의 숨을 확실히 끊어 놓는 역할을 하던 레이린은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그녀는 말끝에 검을 힘주어 꽂았다. 목을 정확히 관통당한 마물은 잠시간 버둥거리다가 이내 절명해 추욱 늘어졌다. 얼굴에 튄 피를 대충 소매로 닦아 낸 그녀가 까딱 고갯짓했다.

“가자. 지체할 시간 없어.”

당사자가 괜찮다고 말하는데, 거기에 대고 무어라 더 말을 얹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러니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그래.”

“이쪽입니다.”

라그나르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적령의 길드원들이 남긴 표식을 따라 길을 안내하던 엘빈이 조용히 손짓했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따라붙어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이 끝나가는 듯 희미한 달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숲의 경계가 끝나는 곳에는 온통 검은 옷 일색인 인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엘빈이 모습을 드러내는 즉시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건물로 일행을 안내했다.

라그나르는 모든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단단히 닫아걸며 물었다.

“이곳인가?”

“그렇습니다. 이 통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칭칭 감은 채 침묵하고 있던 남자가 집 안의 벽면 어딘가를 눌렀다. 그러자 기긱, 작은 소음과 함께 한쪽에 놓여 있던 벽장이 옆으로 물러나며 숨겨져 있던 문이 드러났다.

문 너머로 보이는 토굴은 아래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엘빈이 길드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수고했다. 주위 경계 계속하고, 케르디트 레헬론의 상황은 1시간에 한 번씩 보고하도록 해. 혹시라도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곧장 내려와 알려라.”

“알겠습니다.”

“가시죠.”

엘빈은 그 말을 남기고는 앞장서 통로로 발을 들였다. 그 뒤를 레이린과 리카가 따르고, 마지막으로 라그나르가 어둑한 굴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적령의 길드원이 벽장을 원래대로 돌려놓자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엘빈은 예상했다는 듯 주술석을 꺼내어 불을 밝혔다.

일행은 조용히, 하나 신속히 걸음을 옮겼다.

어둑한 토굴을 따라 얼마나 아래로 내려왔을까. 돌연 주변이 환하게 트이는가 싶더니 빛이 쏟아졌다. 레이린 일행이 갑작스레 밝아진 시야에 적응하지 못하고 멈칫한 사이, 소란과 함께 무기의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어떤...... 수장님?”

“뭐?”

험악하던 목소리들 사이로 얼떨떨한 말이 불쑥 끼어들었다. 빛 탓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던 레이린이 눈그늘을 만들던 손을 내렸다. 이곳은 마치 드넓은 광장 같았다. 벽 곳곳에 박힌 주술석들이 제각기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장의 중앙, 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은 채 무기를 쥐고 있던 이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하나둘 손을 떨어트렸다.

“어떻게......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

“이 새끼는 말을 해도 꼭.......”

“그런데 옆에 저분은...... 아가씨 아니야?”

“아가씨라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도끼, 쇠사슬, 표창, 단검이 차례로 바닥을 굴렀다. 라그나르는 잔뜩 얼빠진 얼굴의 그들을 보고는 보란 듯 혀를 끌끌 찼다.

“넋 빠진 놈들. 당장 안 주워 넣어?”

“수장님! 정말 수장님이시군요!”

“살아 계셨습니까!”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녹스의 길드원들이 무기를 내팽개치고 라그나르에게 달려왔다. 험상궂은 얼굴에 제각기 매달린 눈물이 꽤 볼만 했다.

물론, 그는 질색하며 곧장 그들을 피해 몸을 물리고는 물었다.

“모가지라도 분리되고 싶은 게 아니면 지저분한 면상 저리 치워. 키안은 어디 있나?”

“아, 키안 님께서는 안쪽에 누워 계십니다. 아무래도 부상 때문에 운신이 편치 않으셔서.......”

“......안내해.”

라그나르는 굳은 얼굴로 턱짓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레이린 또한 웅성거리는 길드원들을 지나쳐 광장 안쪽으로 향했다.

내부는 지하에 있는 공간치고는 굉장히 넓었다. 넓은 광장 양쪽에는 부상자들이 줄지어 눕혀져 있었고, 그 사이를 마찬가지로 부상당한 길드원들이 바쁘게 오가며 물과 약초 등을 나르고 있었다.

“저는 일손을 돕겠습니다. 가 보십시오.”

리카는 다급하게 물이 든 대야를 나르는 길드원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들며 레이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는 잠시간 묘한 눈길로 리카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는 허락을 받은 즉시 당황한 길드원을 끌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윽고 라그나르와 레이린, 엘빈은 가장 안쪽에 자리한 방문 앞에 다다랐다. 안내를 맡은 길드원이 옆으로 한 발 물러났다.

“들어가십시오. 루나 님께서도 함께 계십니다.”

라그나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미미하게 떨리는 손끝을 잠시간 내려다보던 그가 이내 결심한 듯 문고리를 벌컥 돌렸다.

“단테? 노크도 없이 무슨 일-”

낮게 잠긴 목소리가 의아한 기색을 담고 날아들었다가 칼로 잘라 낸 듯 뚝 끊겼다.

라그나르는 방으로 몇 발 걸어 들어가다가 말고 저도 모르게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레이린도, 엘빈도 마찬가지였다.

텅-!

“......레이린?”

조금 전에 들렸던 것보다 조금 높은 음성이 연이어 귓가를 간질였다. 레이린은 손에 들린 대야를 놓친 채 얼어붙은 루나를 보고는 설핏 웃었다.

“나 왔어, 루나.”

그 말에, 피로에 절어 있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울 듯, 혹은 화를 내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의 루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 진짜 짜증 나는 거 알지?”

“알아.”

“한 번만 더 이래 봐.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레이린은 자못 뻔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슬쩍 팔을 벌렸다. 그 모습에 끝내 앓는 소리를 흘린 루나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달려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한편, 침상에 앉아 있던 키안은 제 눈앞의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늘 코에 걸려 있던 외알 안경은 금이 간 채 협탁 위에 놓여 있었으며, 제 몸에 상처 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던 그의 몸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흰 붕대 위로 군데군데 배어 나온 핏물이 아프게 시야를 찔렀다.

“.......”

잠시간 말없이 키안과 시선을 맞추던 라그나르가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겨 침상 옆에 섰다. 그는 아직까지도 말없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키안의 머리 위로 툭 손을 올렸다.

라그나르는 어딘지 꽉 잠긴, 먹먹한 목소리를 가까스로 토해 냈다.

“......고생했다.”

“.......”

“살아 줘서, 고맙고.”

키안은 그 말에 무언가 울컥 북받쳐 입술을 깨물었다가,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라그나르는 그런 그의 머리를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 평소와 달리 조심스럽고도 차분한 손길에 연녹색 머리카락이 사락,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규칙적인 손길에 이내 평정을 되찾은 것인지, 울렁이는 감정을 추스른 키안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고마우시다면 생명 수당까지 두 배로 쳐서 챙겨 주십시오.”

“......멀쩡하네. 너 그 붕대 풀면 내 손에 죽는다.”

“주치의 앞에서 환자를 살해하겠다는 발언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루나 님, 좀 말려 주십시오.”

키안은 고저 없는 말을 내뱉으며 양팔을 엑스 자로 겹쳐 붕대로 칭칭 싸맨 가슴을 감쌌다.

레이린에게 안겨 기분 좋게 고르릉대고 있던 루나가 삽시간에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답했다.

“언제 죽일 건지 알려 줘요. 저 입부터 뜯어 버리게.”

“역시 제가 믿을 구석은 아가씨뿐이군요. 서글프게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키안.”

레이린은 결국 픽 웃음을 흘리며 루나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키안 또한 그녀의 무사함을 확인하고는 안도한 얼굴로 엷은 미소를 띠었다.

짤막한 해후를 마치자마자 무거운 현실이 다시금 몸집을 부풀리며 그들 사이를 짓눌렀다. 어느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낸 라그나르가 침상 옆 의자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현재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케르디트 레헬론이 지닌 주술석이 예상을 훨씬 웃돌더군요. 아무래도.......”

라그나르는 한 손을 들어 키안의 말을 막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마티아스겠지. 나와 린이 합류한다면? 그래도 가망이 없나?”

“저도 돕지요. 현재 윈프리드 내에 있는 길드원들의 수가 서른은 됩니다.”

한쪽으로 잠자코 물러나 있던 엘빈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를 힐긋 일별한 키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번뜩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케르디트 레헬론의 목을 딸 틈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연갈색의 눈이 드물게도 형형한 빛을 띠며 빛났다.

라그나르 또한 살기등등한 눈을 한 채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고는 작전을 정리했다.

“좋아. 잔챙이들은 적령에서 막는 것으로 하고, 녹스에서는 케르디트와 그 직속 수하들을.......”

그때, 레이린이 라그나르의 곁으로 다가서며 목소리를 냈다.

“오빠, 잠깐만.”

“......린? 왜 그래?”

라그나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남빛 눈에는 혹시나 어디가 아픈 건가, 하는 본능적인 걱정이 스며 있었다.

레이린은 잠시간 소매 안쪽에 챙겨 둔 검은색의 보석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의아한 기색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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