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꺄아악!”
쨍그랑-!
벽에 부딪힌 찻주전자가 산산이 부서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드리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찻주전자를 내던졌던 손을 내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다시 말해 보렴.”
얼굴 바로 옆을 스쳐 간 찻주전자에 덜덜 떨고 있던 하녀가 필사적으로 턱을 움직였다.
“아, 아, 아가씨와 지하의 포로, 가.......”
“그래.”
“......리, 리카와 함께 탈출을- 아악!”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듯 이어지던 말은, 다음 순간 그녀의 이마로 날아드는 찻잔으로 인해 끊어졌다. 하녀는 본능적으로 양팔로 얼굴을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닥치지 않았다.
“뭐하는 짓이지, 에벤.”
이드리스가 어느덧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해진 얼굴로 건조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하녀를 향해 날아드는 찻잔을 주술로 막고 있던 에벤이 손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저를 벌하십시오. 애초에 제가 주술석 관리를 잘못한 탓에-”
“아니, 아니지. 내가 어떻게 널리고 널린 하녀 계집애가 아닌, 오직 하나뿐인 너를 벌하겠어.”
그러나 이드리스는 대번에 에벤의 말을 끊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사근사근한 미소를 띤 그가 에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보란 듯 눈을 휘었다.
“에벤.”
“......예.”
“또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지?”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랬기에 뱀 같은 속삭임이 귓바퀴를 휘돌아 속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에벤은 티 나지 않게 몸서리를 치고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물론입니다.”
“좋아, 믿어 보지. 그리고 너.”
“예, 예......!”
이드리스가 돌연 표정을 지우며 하녀를 향해 까딱, 손짓했다. 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하녀가 희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이드리스는 다기를 집어 던지느라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금 정리하며 말했다.
“나가서 알려라. 만약 레이린 브리어스를 발견하거든.......”
하나로 묶인 남빛의 긴 생머리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주홍색의 눈이 먹잇감을 잡아채는 뱀의 그것처럼 매섭게 번득였다.
“반드시 ‘살아’ 있는 채로 끌고 오라 전해. 내 눈앞으로.”
* * *
“대체 말년에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릴리트는 제 손에 들린 종이를 차마 구겨 버리지는 못하고 반대쪽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옅은 주름이 새겨진 입가가 미미하게 일그러지며 잇새로 짙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유리엔 또한 그녀와 별다를 것 없는 태도였다. 구태여 다른 점을 찾자면, 테이블 위에 놓인 서신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입을 꾹 닫고는 그것을 노려보고 있다는 점일까.
그들이 마주 앉아 있는 이곳은 에르치니아 저택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밀실이었다.
정확히 20분 전. 릴리트는 아들인 커티스와 함께 집무실에서 제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게 무슨.......’
커티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떨렸다. 그는 한순간 미약한 현기증마저 느끼며 작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릴리트는 그런 아들의 반응을 의식할 여력조차 없이 황망히 시선을 내렸다.
「이 땅의 주인, 신의 사자가 맹약의 일원들에게 전한다.
짐은 감히 맹약을 어기며 정당한 주인을 배신하고 반역을 일으키려 한 죄를 물어 유스티아를 벌할 것이니. 맹약을 함께했던 동료로서 그대들의 검을 뽑을 때가 되었다. 에르치니아의 영주, 릴리트 보니파츠는 즉시 군사들을 준비시켜 호노라투스로 와서 왕궁 앞에 무릎 꿇고 그대의 충성을 보여라.
맹약을 내버리고 그에 복종하지 않는 자에겐 오직 정의의 칼날만이 남았을 뿐일지어다.」
릴리트는 얼마 전부터 정보원들을 통해 전해 듣던 소식들이 끝내 최악의 형태로 제 눈앞에 닥쳤음을 인지하고는 침음을 흘렸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에 눈꺼풀을 내리고 숨을 몰아쉬고 있던 바로 그때.
‘주인님, 벤투스의 영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털 망토를 두른 유리엔이 갑작스레 에르치니아 저택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한 손에는 왕의 서신을 들고서.
에르치니아와 벤투스는 지리상 숲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타 영지들보다도 교류가 잦은 편이었다. 더불어, 혹시라도 왕이 에르치니아나 벤투스 중 하나를 치기로 마음먹기라도 한다면, 언제든 함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로드 릴리트.”
응접실에 발을 들인 이후 내도록 침묵하던 유리엔의 입술이 마침내 움직였다. 벽난로 불빛으로 인해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대는 어찌할 생각인가.”
“.......”
릴리트는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침묵했다. 그녀가 다른 쪽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유스티아냐, 호노라투스냐. 마치 목덜미 양쪽에 제각각 칼날이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어떤 칼날을 쳐내고, 어떤 칼날을 받아 내느냐에 따라 목숨이 오갈 수도 있는 상황. 릴리트의 머리는 전에 없이 치열한 생각들로 인해 미친 듯 굴러갔다.
‘승률은...... 양쪽 모두 절반인가.’
헤르기아스 제일의 무력과, 제일의 부를 지녔다 평가되는 유스티아. 그리고, 켈레마의 주술을 등에 업은 호노라투스.
‘이드리스 프리조프는 호노라투스 쪽에 붙겠군.’
이드리스 프리조프와 왕가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가고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유스티아는 호노라투스와 더불어 마티아스의 병력과, 켈레마의 주술사들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말인데.
‘아무리 유스티아가 군수 물품 조달에 있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한들, 승산이.......’
머릿속의 추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릴리트가 치열한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한숨을 삼키던 순간이었다.
“릴리트, 그대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바로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의 귓가로 믿을 수 없는 말이 파고들었다.
“나는 에드윈 클로비스를 지지하겠네.”
“......예?”
턱을 괴고 고민하던 릴리트가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짙고 깊은 표정의 유리엔이 연한 푸른색의 눈을 들어 그녀를 직시해 왔다. 그녀는 그 눈에 깃들어 있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우리는 그에게 빚이 있지.”
평소 그 누구보다도 차갑고 냉정하던 유리엔이 덤덤히 내뱉은 말에 릴리트는 허, 탄식하듯 숨을 토해 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이 충격적이었던지라 머릿속 저편으로 밀려나 있던 기억이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비 오는 숲의 깊은 곳.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계략에 휘말려, 하나 남은 가족마저 제 손으로 없앨 뻔했던 날. 필사적으로 제 앞을 가로막아 줬던 에드윈 클로비스가, 그 새파란 눈이, 마치 머릿속 저편에서 아직까지도 그녀의 속내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현왕은 즉위 초부터 유독 영주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지.”
유리엔은 내내 노려보고 있던 편지를 손끝으로 툭, 건드려 밀쳐 내며 말했다.
“그리고 유스티아가 꺾이고 나면, 이 땅에서 이드리스 프리조프와 바로크 드 루에이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고.”
“.......”
“그대는 그런 세상에 당신 자식을 내놓을 수 있겠나?”
릴리트는 한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유리엔은 그녀의 눈을 형형하게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으르렁댔다.
“나는, 절대로, 내 딸을 그런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지는 않네.”
주름이 새겨진 얼굴에서는 광기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의 결의와 단단함이 엿보였다.
릴리트는 잠시간 멍하니 그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이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어딘지 후련한 웃음을 한바탕 풀어 놓은 그녀가 손을 내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보랏빛의 눈은 어느새 제빛을 찾아 반짝였다. 릴리트는 언뜻 기분이 좋기까지 해 보이는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그대가 스스로 도박에 손을 대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칭찬으로 듣겠네.”
“이번에만 특별히 해 드리는 겁니다.”
릴리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짓궂게 말했다. 내내 표정을 굳히고 있던 유리엔은 그 말에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그녀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릴리트는 명료해진 머리로 재빨리 현 상황을 더듬었다.
“그러면 현왕에게 참전 명령 거부 서신을 보내고, 군사들을 준비시켜야겠군요. 적어도 저희가 반대편에 버티고 있을 거라는 암시를 주면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테니까.”
“그렇지. 우리와 유스티아 사이에 호노라투스, 마티아스가 자리하고 있는 이상은 이게 최선-”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노크조차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주인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집사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릴리트를 불렀다. 릴리트는 평소 더없이 깍듯하던 그가 이렇게까지 흐트러졌다는 데에 놀라 그를 질책할 생각조차 못 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그게, 지금 밖에 사람이.......”
릴리트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곧장 방을 나섰다. 유리엔 또한 잠자코 입을 닫은 채 테이블 위의 서신들을 벽난로에 던져 넣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빠르게 계단을 달려 내려가 저택의 정문 앞에 도달하니,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엎드린 사내를 보니파츠의 기사들이 검으로 겨누고 있었다. 릴리트의 기척을 인지한 보니파츠 기사단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군,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쿨럭!”
그때,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남자가 또 한 번 피를 토해 냈다. 검붉은 핏덩이가 바닥에 이미 넓게 퍼져 있던 웅덩이 위로 파문을 일으켰다.
“허억, 흐.......”
온몸이 넝마가 된 채 숨을 몰아쉬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온통 피에 절어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언젠가 본 적 있는 듯 낯익은 청록색의 머리칼, 짙은 자색의 눈동자. 릴리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얼굴을 어디서 보았나 고민하다가, 그의 로브 자락 아래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비켜라, 단장.”
“예? 하지만 주군! 성문은 어떻게 통과했는지, 신원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내가! 검을 치우라고 명하지 않았나! 지금 당장!”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택 앞을 뒤흔들었다. 그 기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보니파츠 기사들이 황급히 사내를 겨누고 있던 검을 거두어들였다.
릴리트는 그들 사이를 성큼성큼 지나쳐 몸을 숙였다. 그녀의 손이 남자의 로브 자락 아래에서 덜렁거리던 브로치를 떼어 냈다.
......황금빛 장미 덤불에 휘감긴 검.
“에드윈 클로비스가 보냈나?”
릴리트의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리오넬은 잇새로 주륵, 흘러나오는 핏물을 무시한 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단단히 봉해 놓은 서신을 꺼냈다.
“클로비스 기사단 소속, 리오넬 제스.......”
가물가물한 눈을 한 그가 놀라울 만큼 강한 악력으로 서신을 릴리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임무, 완수했.......”
직후, 리오넬은 제대로 말조차 맺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