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에셀 님! 이것 좀 봐주십시오.”
“아, 예!”
멍하니 서 있던 에셀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서둘러 동료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요새 왜 이렇게 멍하십니까?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냥 조금...... 피곤한가 봅니다.”
“하긴. 지금 에셀 님만큼 바쁜 분을 찾아봐야 촌장님과 부촌장님뿐일 테지요. 그건 그렇고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
여자는 스스럼없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 제 연구 자료를 꺼내 놓으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디 보자.......”
에셀은 어설픈 미소나마 입에 건 채 그녀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었다. 여인은 이윽고 제 의문을 해소했는지 홀가분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에셀은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잠시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전쟁이라니.’
그 단어를 곱씹어 보던 에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평소 명료하게 빛나던 눈 밑으로는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 평소 그는 강박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이만큼이나 피곤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전 켈레마에 내려온 왕의 명령이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뒤엎었다.
「유스티아에 주술석 공급을 중단하고 전쟁을 준비하라. 촌장과 그 제자는 이곳 호노라투스를 지키고, 부촌장은 전장으로 나갈 주술사들을 이끌게 될 것이다.」
에셀은 에스틴에게서 그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 너무도 황망한 나머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전쟁이라니, 유스티아의 주인인 에드윈 클로비스가 왕을 암살하고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니.
아마 헤르기아스 대륙의 사람이라면 지금의 이 상황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당연했다. 유스티아는 명백히 이 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었으며, 그곳을 지키는 주인은 그 누구보다 차갑지만 그만큼 공명정대하다고 알려진 사람이었으니까.
에셀은 아무렇게나 발을 움직이다가 말고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우뚝 멈춰 섰다.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건가.’
에셀은 본인 스스로가 전쟁 같은 일을 견딜 수 없는 유약한 사람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뿐인 후계자라는 이름을 가졌으면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져야 하는 법이다. 정녕 모르겠느냐?’
‘멍청한 놈. 이름도 모르는 남 살리자고 제 심장까지 뜯어 내어놓을 놈 같으니.’
스승인 에스틴도, 떠나간 에벤도 늘 그의 유약함에 혀를 차곤 했다. 하지만 에셀은 정말로, 정말로 이 일이 내키지 않았다. 앞뒤 하나 없이 갑작스럽게 뚝 떨어진 명령은 그에게 생각보다 더한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차마 납득할 수 없는 상황과 증거들. 그는 그 모든 것이 미심쩍은 나머지 며칠째 제대로 잠을 이루고 있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 역시 스승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편이 낫겠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에셀은 끝내 마음을 단단히 굳히고 촌장의 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스승을 만나 제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전쟁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냐 물어볼 작정이었다.
똑똑.
“스승님, 에셀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에셀은 나지막이 말을 내뱉고는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이어 간소하게 꾸며진 집 안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에스틴은 다리가 온전치 않았기에 직접 문을 열러 나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에셀은 밥 먹듯 스승의 집을 드나드는 것이 일상이었으므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스승님?”
잠시 집 안을 두리번거리던 에셀은 어디에서도 스승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음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연구실에 계신 건가?’
그의 스승은 한번 연구에 빠져들면 누군가 바로 옆에서 춤을 춰도 모르는 성정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일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니 납득은 빨랐다.
에셀은 익숙한 동작으로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에스틴의 연구실은 좁디좁은 집 안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저기 계시는군.’
에셀은 닫힌 문 너머로 자그맣게 들려오는 스승의 목소리에 그럼 그렇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문고리에 닿기 직전, 한발 먼저 귓가를 파고든 말로 인해 움찔 멈춰 섰다.
“......폐하! 그건.......”
에스틴의 목소리가 한순간 높게 튀어 올랐다가, 직후 누가 들을까 두려워하듯 급격히 낮아졌다.
‘......폐하?’
에셀은 본디 눈치가 없는 편이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본인이 이곳에 있음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문가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그러자 에스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귓가로 흘러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다. 저희가 할 줄 아는 것은 미약하게나마 신력을 다루는 것뿐이지, 신력 그 자체를 추적하거나 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드물게도 씨근덕대는 숨에 섞인 속삭임이 빠르게 내뱉어졌다.
잠시간의 침묵 후, 먼지가 잔뜩 낀 듯 흐릿한 음성이 문 너머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여자는 신력의 본래 주인이다. 그러니 주술의 근간이 되는 신력에 무언가 감응하는 바가 있지 않겠나?]
“그러니까 저희는 그것까진-”
[변명은 그만둬라. 어떻게 해서든 그 여자를 찾아. 만약 찾게 된다면 그 즉시.......]
말끝이 흐려지며 왕의 목소리 또한 잦아들었다. 에셀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죽여.]
그 말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등줄기에 섬뜩한 벼락이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신력의 본래 주인이라니, 이건, 이게 무슨.......’
짧은 시간 사이에 폭포처럼 몰아닥친 진실 탓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에셀은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을 내뱉으려다가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사이, 조그맣게 앓는 소리를 흘리던 에스틴이 자포자기하듯 물었다.
“차라리 이름으로 찾는 게 빠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레이린 아제트리아. 스물 초반 즈음으로 보이며 얼굴은 꽤 곱상하고, 회갈색 긴 머리카락과 눈을 가졌다.]
에셀은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귓가를 선연히 파고드는 말에 퍼뜩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스물 초반 즈음으로 보이는 고운 외모.
‘떠나시기 전에,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던 긴 회갈색의 머리카락.
‘......레이린.’
후드 그늘 아래에서 묘하게 반짝이던 회갈색의 눈동자.
‘그냥 레이린입니다.’
그 언젠가 제게 주술석 목걸이를 맡기러 찾아왔던 여인과 정확히 일치하는 설명에, 에셀의 뒷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런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듯이 나직한 속삭임이 뱀처럼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대들의 존속이 내게 달렸다는 것을 잊지 마라, 에스틴 촌장.]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중앙에서 보지. 부디 내가 만족할 만한 소식을 들고 오길 바라네.]
“......명심, 하지요.”
에셀은 거기서 더 듣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어 정신없이 촌장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도 기척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은 스스로가 가히 대견할 지경이었다.
쾅!
“헉, 허억.......”
가까스로 집까지 돌아온 에셀은 거칠게 문을 닫아걸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힘이 풀린 다리가 휘청이며 문에 기대어 있던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관자놀이가 아프게 지끈거렸다. 에셀은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두서없는 의문이 빠르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신력의 본래 주인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신력이란 그저...... 우연히 타고나는 게 아니었던가?’
만일 지금까지 신의 선물, 혹은 자비라고 여겨졌던 신력에 ‘주인’이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면. 만약 그렇다면 현존하는 모든 주술사가 사용하는 힘이, 누군가에게서 멋대로 훔쳐 온 힘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만약 찾게 된다면 그 즉시.......]
[-죽여.]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보이는 왕은, 레이린 아제트리아를 찾자마자 죽여 버리라 명했다. 마치 신력에 본래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듯한 그 말.
그건 에셀이 지금껏 스스로 믿고 따라오던 모든 것들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짓이었다.
“.......”
몸을 공처럼 말아 웅크리고 있던 그의 눈이 일순 뜻 모를 빛으로 번득였다.
그리고 그날 밤, 에셀은 24년간 지켜오던 신념을 제 손으로 꺾고는 스승의 집에 몰래 숨어들었다.
‘에벤, 그 미친놈이 기어이......!’
에벤이 켈레마를 뛰쳐나간 날 아침. 에스틴은 엉망이 된 집 안 꼴을 보고는 펄펄 날뛰었다.
에셀은 그때 스승을 도와 사방팔방에 널브러진 자료들을 치울 때, 분명히 보았다. 연구실의 반대편 벽에 처음 보는 문이 존재하는 것을. 하지만 그 문은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아마 주술로 감춰 두신 것이겠지. 형님은 그걸 이미 알고 계셨던 거고.’
당시의 에셀은 그것에 관해 물어볼 생각조차 않은 채 잠자코 입을 닫았다. 누군가 감추려 하는 것을 억지로 캐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에셀은 어둠에 잠긴 집 안 저편, 에스틴이 잠들어 있는 침실의 문을 힐긋 일별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저는 진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스승님.’
그는 어렵사리 침실에서 시선을 돌리며 품에서 루비를 꺼내 들었다. 언뜻 붉은 열매처럼 보이는 그것을 입에 넣고 씹자 아득, 작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직후 그의 몸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신력이 살아난 것처럼 활발히 일렁였다.
[하지만 그 여자는 신력의 본래 주인이다.]
“.......”
일순 머릿속을 스친 기억에 욕지기가 불쑥 치밀었다. 에셀은 작게 숨을 몰아쉬어 애써 토기를 가라앉힌 후 곧장 아무것도 없는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셀. 나는 너를 믿는다.’
에스틴은 에벤이 떠날 그 날, 정리를 끝마치고 빗자루를 내려놓는 에셀을 향해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에셀이 제 비밀 서고의 존재에 대해 눈치챘다는 것은 정리를 맡겼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다.
그러나 에스틴은 바보 같을 정도로 올곧은 에셀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더불어 가장 뛰어난 주술사인 본인이 걸어 놓은 결계를 에셀이 풀 수 없다는 확신 또한 있었다. 하여 그때의 에스틴은 그렇게 한마디 타이른 것으로 입막음을 끝마쳤다.
하지만 에스틴은 두 가지를 간과했다. 첫 번째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닥쳤을 때 에셀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두 번째는.
“Ο κύριος σας άλλαξε.”
몇 년 사이 먹이 사슬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점이었다.
드드득-
작은 소음과 함께 벽 주위를 맴돌던 글자들이 하나둘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장막처럼 벽을 타고 흘러내리던 글자들 사이로 공백이 늘어남에 따라 벽에 자리하고 있던 문의 형태 또한 선명해졌다.
“후.......”
에셀은 숨을 죽인 채 주술이 인식하는 ‘주인’을 자신으로 뒤바꾸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윽고 한차례 비틀렸던 글자들이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확인한 에셀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는 제 손끝이 주술에 닿은 순간 어깨를 잠시 움츠렸지만, 주술로 이루어진 막은 수면 위의 파문처럼 잔잔히 일렁일 뿐이었다.
‘됐다.’
안도의 한숨을 뱉은 에셀은 에스틴의 방에서 별다른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쿵, 작은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에셀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에 예상했다는 듯 미리 챙겨온 주술석 몇 개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이내 주술석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이 사방을 물들였다. 에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안쪽으로 향했다.
‘여긴.......’
용도를 모를 방은 스승의 연구실과 퍽 비슷한 구조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종이와 서적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에셀은 혹여 사물들의 위치를 뒤바꾸지 않도록 조심하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문과 가까운 쪽에 놓인 종이들에는 스승인 에스틴의 필체가 보이는가 싶더니, 안쪽으로 발을 옮길수록 낯선 느낌이 짙어졌다.
에셀은 차분히 서류들을 들추었다가 다시 놓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신력의 원래 주인’과 관련된 내용을 발견하지 못하고 서류 뭉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던 참이었다. 희고 고운 손이 멈칫했다.
“......?”
허공에 황망히 멈춰 선 손 아래, 잔뜩 빛바랜 종이 뭉치에 적힌 글자가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시야에 박혀 들었다.
[루비 제조 연구서]
에셀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손에 들려 있던 서류들을 옆쪽에 내려놓은 후 ‘루비 제조 연구서’라고 적힌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바스락,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낡은 종이가 위태로운 소음을 냈다.
에셀은 처음에는 신중한 손길로 종이를 넘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손이 정신없이 떨리는 탓에 종이가 내는 소음 또한 커졌다. 은테 안경 너머, 맑은 하늘색의 눈이 종이 위의 글자들에 고정된 채로 크게 확장되었다.
「......34번째 실험, 실패. 피가 과도하게 희석된 것이 원인으로 보임. 실험 재개.」
「91번째 실험, 실패. 준비되어 있던 피 샘플이 모두 소진됨. 국왕께 새로 요청할 것.」
「......508번째 실험, 성공. 왕가의 피를 섭취해 그 안에 담긴 힘을 ‘주술진’을 통해 일반인이 다른 방향으로 발현할 수 있도록 함.
다만 효과가 지나치게 일시적이라 개량이 필요해 보임. 이것의 이름은 ‘루비’로 결정됨.」
기어코 에셀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 뭉치의 일부가 후드득 흩어졌다. 그러나 그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이 벌벌 떨려 무언가를 제대로 쥐고 있을 수조차 없었다.
‘이게, 대체, 대체 무슨.......’
충격에 빠진 와중에도 무의식중에 제 손에 남아 있는 종이로 시선이 돌아갔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나머지 내용을 읽어 내렸다. 마치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러나 잇따른 내용은 그의 손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일말의 힘마저 모조리 앗아갔다.
「루에이리력 23년 다섯 번째 달의 33일. 왕자 전하의 신성력이 소멸했다.
오늘 아침, 루비 연구를 하던 중 폐하의 부름을 받고 급히 입궁하자마자 보게 된 것은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의 왕자 전하였다. 왕족의 상징인 백발과 연푸른 눈과 더불어 신성력 또한 사라졌다고 한다. 폐하께서는 이 일을 함구에 부치고 내게 원인을 알아내라 명하셨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왕자 전하의 20살 탄신연이 바로 내일모레였건만. 이 일을 끝마친 후에도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그 이후로 한참이나 끊겨 있던 일기는 몇 달을 건너뛰어 이어져 있었다.
「루에이리력 23년 아홉 번째 달의 2일.
저번 일기를 적은 다음 날부터 왕궁에 끌려가 반쯤 감금되어 연구를 지속했다. 지금은 폐하께서 출타하신 틈을 타 털옷을 챙겨야겠다는 핑계를 대어 잠시 이곳에 들른 참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후대의 주술사에게 전한다.
만일 왕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반드시 심장을 파괴하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왕가의 신성력은 오직 ‘심장’을 통해서만 이전되는 듯싶다. 신성력을 잃은 왕족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지닌,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어진다. 그러니 만에 하나 왕과 척을 지게 된다면 심장을 노려라. 내가 전할 말은 그게 전부-」
마지막 글씨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거기까지 읽은 에셀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종이를 내던졌다가, 제풀에 놀라 다시 집어 들었다가, 또다시 견딜 수 없다는 듯 바닥에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우욱.......”
에셀은 속이 역류하는 느낌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몇 번이고 헛구역질했다. ‘진실’도, 그간 주술사들이 생명처럼 여겼던 ‘루비’가 왕족의 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전부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에셀은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이나 멍하니 눈물을 흘리다가, 이윽고 이성을 갈무리하고는 바닥에 내던졌던 종이 뭉치를 품에 챙겨 넣었다.
‘만약, 만약 폐하나 스승님께서 선을 넘으신다면.......’
에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그 뒤에 이어질 생각을 잘라 냈다. 그것은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미련이었다.
그는 아직도 미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원래 모습대로 정리했다. 직후 밖으로 나가 주술 또한 원래대로 되돌려 놓은 후, 촌장의 집을 빠져나갔다. 어느덧 새벽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