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레이린은 또다시 이드리스 프리조프와의 심문 아닌 심문을 견디고 나온 후 곧장 사용인 하나를 붙들었다.
“에벤이라는 자의 연구실이 어디지?”
이름 모를 사용인은 불쑥 다가와 말을 거는 레이린에 놀라 어깨를 크게 흠칫하며 말을 더듬었다.
“에, 에벤 님의 연구실 말씀이십니까? 거긴 왜.......”
“저택을 벗어나겠다는 것도 아닌데, 내가 그것까지 일일이 알려야 하나?”
“아, 아, 아닙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레이린이 스산하게 눈을 접으며 웃자, 사용인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도리질 치더니 허둥지둥 그녀를 에벤의 연구실로 안내했다.
에벤의 방문 앞까지 그녀를 착실히 데려다준 그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라는 말만을 남긴 채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이드리스한테 한 소리 듣겠군.’
레이린은 멀어지는 등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사용인인 듯한데, 조금 겁을 주었다고 해서 제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이드리스의 명조차 잊고 바로 저리 줄행랑이라니.
‘뭐, 처음부터 그래서 붙잡은 거긴 하지만.’
그녀는 무심히 눈길을 거두고는 곧장 손을 뻗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어떤 새끼냐. 분명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문을 두드리자마자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기척이 문 너머로 날아들었다. 레이린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
“나 다리가 좀 아픈데. 문부터 좀 열지그래?”
“......브리어스 양?”
잠시 침묵하던 에벤은 이내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반쯤만 열린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본 그가 레이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진짜였군.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시죠. 주인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는 건 둘째 치고 제가 지금 좀 바빠서.”
에벤은 그리 말하며 손을 휘적거리고는 곧바로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문고리를 움켜쥔 레이린의 동작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뭡니까.”
에벤이 대번에 미간을 찌푸리며 으르렁댔다.
그는 본인의 말대로 피곤하기 그지없는 낯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퍽 앳되어 보였던 얼굴은 피로에 전 탓에 이드리스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레이린은 그 얼굴을 감상하다가 불현듯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에셀이 하나뿐인 사형을 애타게 찾고 있던데.”
“.......”
“그 사람은 네가 이드리스 프리조프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레이린은 일부러 ‘사형’을 힘주어 발음하며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하.”
핏발 선 분홍색의 눈이 레이린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찰나 돌처럼 굳어졌던 에벤이 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쑤석거리며 사납게 웃었다.
“사람 속 뒤집는 법을 좀 아네. 제기랄, 들어오시죠.”
“칭찬 고맙군.”
짧게 욕지거리를 뱉은 에벤이 문고리에서 손을 떼며 한 발 물러났다. 레이린은 태연한 얼굴로 턱을 까딱이고는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작게 났다. 레이린은 찬찬히 발을 움직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문을 단단히 잠근 에벤이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그 새끼가 그랬습니까? 내가 사형이라고?”
지금의 에벤은 레이린이 이곳에 온 첫날, 지하에서 보았던 권태로운 모습과는 판이한 낯을 하고 있었다. 누적된 피로와 더불어 속을 긁는 레이린의 발언은 에벤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권태로움, 혹은 여유를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레이린은 방 안 이곳저곳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종이들을 차례로 훑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 저번에 켈레마에 들렀을 때 잠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거든. 하나뿐인 사형이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려서 상심이 크다고 하던데.”
“그 미친 새끼.......”
에벤은 저도 모르게 탄식처럼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레이린이 돌연 고개를 돌리며 샐쭉 미소했다.
“이해해. 원래 그런 식으로 순진한 척, 착한 척 남 엿 먹이는 인간들이 제일 꼴 보기 싫은 법이니까.”
“.......”
에벤은 흔들리는 눈으로 레이린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의심을 비롯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레이린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양 평온한 얼굴이었다. 에벤이 말을 잃은 사이 몸을 돌린 그녀는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난치듯 물건들을 툭툭 건드렸다. 그에 에벤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뭐하는 겁니까, 지금.”
“뭐 쓸만한 건 없나 해서.”
“도망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그렇게 당당해도 되는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군.”
“나도 애초에 이 난장판 속에서 뭔가 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 그냥 기분 전환 겸 구경이나 하려는 거지.”
레이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주술석 하나를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았다. 상대가 저리 뻔뻔하게 나오자 되레 말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미친 사람 보듯 레이린을 바라보던 에벤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뒤를 따르며 입을 움직였다.
“......그곳은 여전합니까?”
에벤은 그 말을 내뱉자마자 스스로의 혀를 씹고자 하는 충동에 시달렸다.
‘요 며칠 잠을 못 자다 보니 미쳤나.’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레이린은 한쪽에 장식품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주술석들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등 뒤를 힐긋 일별했다.
“어떤 의미에서?”
에벤은 속으로 멍청한 스스로를 향해 욕을 퍼붓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여전히 저 잘난 맛에 살고 왕가를 광적으로 신봉하는 미치광이들만 그득하냐는 소리였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저 잘난 맛에 취해 너를 따돌리기라도 했나 보지?”
레이린은 일부러 에벤의 신경을 분산시킬 만한 물음을 골라 흘렸다. 그러자 삽시간에 새빨개진 얼굴을 한 에벤이 발끈해 소리쳤다.
“말조심하십시오. 전 그자들의 꽉 막히고 답 없는 태도를 이야기한 겁니다. 어디서 그딴 말을.......”
레이린은 그 틈을 타 손을 옮겨 서랍을 짚었다. 그러자 아래로 늘어트린 에벤의 손이 미미하게 움찔했다.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은 후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두었다.
“그래, 내가 실언했네. 그런데 켈레마가 왕가를 광적으로 신봉한다고? 그런 건 느끼지 못했는데.”
레이린은 에벤에게서 등을 돌린 채 한쪽에 놓인 책상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이번에는 꽤 순전한 궁금증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에벤이 느릿하게 그녀를 따라 발을 옮기며 답했다.
“적어도 스승, 아니, 에스틴 촌장은 그렇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노인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왕에게 잘 보이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에벤의 머릿속에 늘 왕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스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승님은 왜 그렇게 왕가 눈치를 봐요? 사실 유능하기로 치면 우리가 더 유능하지 않아요?’
‘......그런 말 하면 못쓴다, 에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왕가에 감사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야.’
에벤이 천진한 목소리로 그리 물으면, 에스틴은 늘 무섭게 얼굴을 굳히고 그를 다그쳤다. 하지만 그는 에스틴의 눈이 ‘경외’ 혹은 ‘충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눈은 차라리 ‘목숨줄을 붙잡힌 사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조그만 기억의 파편은, 이내 해묵은 기억마저 잇따라 불러일으켰다.
‘어쩌다가 저리 모자란 게 나왔을꼬. 제 동생의 절반만 닮았어도.......’
에벤은 어릴 적, 하나뿐인 동생과 늘 비교당해야 하는 제 삶에 치를 떨며 탈출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래서 우연히 마을을 지나가던 주술사의 옷자락에 다짜고짜 매달렸다.
‘날 데려가요! 어디든 좋으니까! 제발 여기만 나가게 해 달라고......!’
주술사는 난생처음 보는 꼬마가 제 옷자락에 필사적으로 매달리자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이내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다.
에벤은 아직도 그가 왜 마음을 바꾸어 자신을 데려가 준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는 망설임 없이 주술사의 손을 잡고 그 지옥 같던 곳에서 탈출해 켈레마로 왔다.
‘......신력이 있구나.’
켈레마의 촌장이라는 노인은 에벤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렇게 말하며 그를 제자로 들였다. 역시 자신은 그런 시골 마을에서 썩을 존재가 아니었던 거다. 에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에셀을 마주하자마자 산산이 부서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형님! 형님이 오셔서 너무 기뻐요.’
에벤은 제 앞에서 수줍게 볼을 붉히는 에셀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천재라며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아니에요! 저보다는 형님이 더 대단하시죠!”하고 펄쩍 뛰는 것마저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역겨웠다. 이제야 겨우 지옥을 탈출했다 여겼는데,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낙원이 아닌 또 다른 지옥이었다.
‘번복은 없다. 내 후계자는 에셀뿐이야.’
그리고 끝내는 믿었던 스승마저 저를 버렸을 때. 그는 스승의 연구실을 뒤져 정신계 주술에 관련된 자료를 끌어안고 켈레마에서 탈출했다.
켈레마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곳들은 전부 제 손으로 저버렸다. 그는 손에 든 정신계 주술에 관한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며 정처 없이 떠돌던 중 도적단에 납치되어 마티아스로 팔아 넘겨졌다.
‘이 씨발......! 비켜! 비키라고!’
어떻게든 경매장을 탈출하기 위해 발악하던 중, 그는 우연히 손에 쥔 루비의 ‘대체재’로 인해 주술을 사용했고. 그것은 때마침 경매장을 살피러 왔던 이드리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결국 여기도 똑같은 곳이었지만.’
에벤은 짧게 자조했다. 아니, 차라리 이곳에서는 자신이 ‘유일’하니 행동 하나하나를 에셀과 비교당하던 켈레마보다는 나으려나. 모를 일이었다.
그사이, 레이린은 그의 대답을 빠짐없이 귀에 새겨 넣으면서도 방을 둘러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책상 한구석에서 굴러다니던 검고 납작한 보석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주술석인가?’
레이린은 고개를 작게 갸웃하고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묘하게 매끄러운 감촉의 보석이 손에 감겼다. 가까이서 보니 보석이라기보다는 작은 조약돌처럼 보였다.
“뭐하는 거야, 당신! 그거 당장 내려놔!”
그때, 내내 단조로운 목소리를 흘리던 에벤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이며 레이린의 어깨를 쥐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크게 반응하는 에벤에 놀라 한순간 휘청였다.
‘......지금.’
하지만 본능은 머리보다 빨랐다. 레이린은 에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소매 안쪽에 넣어 두었던 주술석을 세게 움켜쥐었다.
파삭!
주술석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를 붙들고 있던 에벤의 눈이 흐릿하게 풀어졌다.
‘됐다.’
레이린은 에벤의 눈이 흐릿해지는 것을 확인한 즉시 그를 밀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반대쪽 소매에 숨겨 두었던, 맨 처음 유스티아로 향했을 때 프랭크가 챙겨 주었던 약을 꺼내 들었다.
‘늘 가지고 다녔던 게 이런 식으로도 도움이 되네.’
작게 자조한 그녀는 잠시간의 기억을 잃게 만드는 약을 에벤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제 입 안에 들어온 것을 꿀꺽 삼켰다. 레이린은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즉시 아까 봐두었던 서랍으로 다가갔다.
‘잠겨 있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이 정도 손장난은 녹스에서 살아남으려거든 기본이었다.
정확하고도 재빠른 동작으로 잠겨 있는 수납장을 열자 그 안에 놓인 종이와 세 개의 주술석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린은 그중 하나를 리카가 챙겨 주었던, 모양이 비슷한 보석과 바꿔치기하며 종이에 휘갈겨진 글씨들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대상자의 신체를 구속....... 맞게 찾았군.’
라그나르의 수갑을 풀 열쇠. 레이린은 그것을 품에 잘 갈무리해 넣었다. 잠금쇠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서랍을 닫는 순간, 레이린은 문득 제 손안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손바닥을 펼쳤다.
‘이건 대체 뭐지? 뭐길래.......’
동그랗고 반질반질한 검은색 보석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미간이 설핏 좁혀졌다. 그러나 지금은 여유롭게 생각에 잠겨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레이린은 손 위에 놓인 검은색 보석을 라그나르의 것과 함께 챙겨 넣고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그녀가 짐짓 놀란 듯 에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봐. 괜찮아?”
내내 멍하던 에벤의 눈동자에 퍼뜩 빛이 돌아왔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앓는 소리를 흘리며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비틀대길래 의자에 앉혔는데. 혹시 기억 안 나나?”
에벤은 레이린의 말을 듣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거기에 자꾸만 제 존재를 주장하듯 강해지는 두통 또한 생각을 방해하는 데 한몫했다.
레이린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에벤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냈다.
“잠깐이긴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면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주치의라도 부르지그래.”
에벤은 그 말에 반사적으로 방을 훑어보았다.
‘일단 없어진 건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연거푸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나 확인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띄게 변한 점은 없었다. 에벤은 레이린이 돌아가고 나면 서랍이 잠겨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움엔 감사드립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다음에 또 와도 되나?”
“소름 끼치는 소리 마시고 나가시죠. 다신 찾아오지 마십시오.”
“매정하기는.”
레이린은 끝내 에벤에게 등을 떠밀려 쫓겨나다시피 방 밖으로 나왔다. 방을 벗어나는 그녀의 소매 안에서는 희뿌연 주술석 하나와, 검고 동그란 보석 하나가 얌전히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후 새벽. 레이린은 라그나르와 리카를 데리고 프리조프 저택을 몰래 빠져나왔다.
“뛰어, 린!”
경비병과 기사들의 눈을 피해 먼저 담을 넘은 라그나르가 레이린을 향해 팔을 벌렸다. 레이린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의 품에 안착하자마자 다시금 땅을 박찼다. 레이린은 빠르게 어둠 속을 내달리며 제 뒤로 바짝 따라붙는 리카를 힐긋 일별했다.
‘생각보다는 제법인걸.’
라그나르와 제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그럴 필요 없겠다는 생각에 미약한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그러던 중 앞서 달려가던 라그나르가 흠칫하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기척을 인지한 레이린이 그를 제지했다.
“엘빈이야.”
그 말을 내뱉자마자 어둠 속에서 엘빈이 불쑥 튀어나왔다.
“저 앞까지만 가면 돼.”
엘빈은 레이린의 옆에서 함께 달리며 앞쪽을 고갯짓했다. 어느새 경비병들을 모두 기절시켜 놓은 적령의 길드원들이 주술석을 매달은 말과 함께 서 있었다.
“고마워.”
레이린은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길드원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아 쥐며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직후 그녀의 말이 앞발을 치켜들고 긴 울음을 뱉더니 나는 듯한 속도로 마티아스의 성벽을 벗어났다. 그 뒤를 라그나르와 리카, 엘빈의 말이 차례로 따랐다.
그리고 레이린 일행이 주술석을 이용하여 가공할 만한 속도로 윈프리드를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 이 땅의 주인, 신의 사자로서 전한다.
감히 왕을 살해하려 한 죄, 나아 가 대륙의 평화를 어지럽히려 한 죄를 물어 유스티아를 중앙에서 영구히 축출할 것이며. 짐은 에드윈 클로비스를 위시로 반역을 꾀한 역도들을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
바로크 드 루에이리가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며 각 도시에 참전 요구 서신을 보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