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 됐습니다, 아가씨.”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하녀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레이린은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는 여타의 귀족 영애들만큼이나 화사하게 꾸며진 여인이 앉아 있었다. 절반을 올려 묶어 세심하게 땋아 놓은 엷은 회갈색의 머리카락이 결 좋게 흘러내렸다. 핏기없이 창백한 입술 위로는 옅은 붉은색이 덧씌워지고, 몸에 걸친 흰 블라우스와 붉은 치마는 우아한 레이스와 자수들로 자잘하게 반짝거렸다.
‘취향하고는.’
레이린은 찰나 말을 잃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보고도 비릿하게 냉소할 뿐이었다.
이내 레이린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준 하녀들이 뒤로 한 발 물러나며 허리를 숙였다.
“이만 출발하시죠.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이린은 하녀의 말에도 거울을 응시하던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미묘한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허리를 굽힌 하녀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레이린의 모습과,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번갈아 흘긋대며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대로라면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말한 시간을 어기게 된다. 그리고 그에 화를 입는 것은 저 정체 모를 ‘아가씨’가 아니라 자신들이 될 것이 자명했다.
결국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하녀 하나가 다시금 그녀를 재촉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아가씨.......”
그러나 그 직후.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에 적나라한 빈정거림이 섞여들었다.
“......그래. 그 이름도 드높으신 마티아스의 영주께서 친히 불러 주신다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거절하겠어. 안내해.”
레이린은 날카로운 말과 대조되게 부드럽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하녀들은 일순 조금 전까지 초조해하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 미소를 응시하다가, 이내 파드득 어깨를 떨며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히 방을 나섰다. 레이린은 언제 미소를 띠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하녀들의 뒤를 따랐다.
마티아스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깊이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감추길 반복했다.
본채의 1층을 지나는 사이, 레이린의 시선이 티 나지 않게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를 향했다가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레이린은 이윽고 기억 속 언젠가와 똑같은 모습의 거대한 나무문 앞에 섰다.
“.......”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문 앞을 지키고 선 경비병들에게 까딱 턱짓했다.
“열어.”
객치고는 꽤, 아니 드러내놓고 오만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녀가 요새 이드리스의 관심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는 이임을 알아본 경비병은 아무런 의문을 덧붙이지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검은 나무문이 열리고, 문과 이어진 비로드 끝에 앉아 있던 이드리스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레이린을 맞이했다.
“제가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드십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그렇지 않은 것도 같지만.”
쿵. 레이린은 제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보다.......”
묘한 눈길로 레이린을 관찰하던 이드리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천 자락이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흐트러지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해도 그렇지.”
레이린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춘 이드리스가 유려히 미소 지으며 몸을 숙였다.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리면 안 되지.”
툭.
긴 손가락이 어깨를 넘어가더니 단단히 매듭지어 있던 목걸이를 풀어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흰 손가락에 목걸이의 줄이 뱀처럼 휘감겼다. 그 끝에 달린 투명한 주술석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하.”
엷은 회갈색을 띠던 머리카락과 눈이 아침 햇살만큼이나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코앞에서 그 변화를 목격한 이드리스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색, 신의 빛깔. 그것을 이렇듯 코앞에서 눈에 담자 등줄기에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이드리스는 제 손에 감겨 있는 목걸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제 얼굴에 닿아 오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넋을 놓을 것 같이 선명한 빛깔의 눈이 그를 물끄러미 직시했다.
일말의 당황도, 놀라움도, 그를 말리려는 시도도 없다.
“......당신.”
이드리스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이보다 기쁠 수는 없다는 듯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
“당신이라면 역시 눈치챌 줄 알았어.”
역시 가져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 * *
‘피곤해.......’
레이린은 프리조프 저택의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오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전전긍긍하며 제 뒤로 따라붙으려는 하녀들을 모조리 쳐낸 탓에 그녀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홀로 있게 되었다.
물론 거리만 떨어져 있을 뿐, 사방에서 감시하는 눈길들은 여전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이 정도면 양호하지’라고 생각하다가 직후 그런 자신의 모습에 흠칫하고는 곧장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며칠이나 됐다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드리스 프리조프는 사람을 혀로 휘두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자였다. 다만 아르망이 상대방의 속을 하나하나 긁어내는 사람이라면, 이드리스는 말을 듣는 당사자가 스스로 제 속을 꺼내어 내보이게 만든다는 것이 두 사람의 차이였다.
‘몇 번이기는 하지만......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어.’
레이린은 창밖으로 벌써 노을이 번져 가는 하늘을 힐긋 일별하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나절부터 이드리스에게 불려간 이후로 내내 그의 질문들을 받아 내야 했다.
‘그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은 분명 인간이 가질 수 없다고 알려진 것인데.’
‘인간이 아닌가, 당신?’
‘혹시 왕가와도 연관이 있나? 아는 걸 말해 봐. 아무리 그래도 라그나르 브리어스가 당신이 태어난 이후로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이드리스는 언뜻 집요하게 느껴질 만큼 레이린에 대해 궁금해하며 파고들었다. 레이린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사소한 정보나마 그에게 넘기지 않도록 애쓰느라 머리가 두 개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레이린 본인조차 명확히 아는 사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드리스는 레이린이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은 답을 내놓을 때마다 그것이 거짓인지 구분하려는 듯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흠.......’
선명한 주홍색의 눈이 마치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뱀 같았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무시하려 애쓰며 꿋꿋이 허리를 폈다.
‘......뭐. 어차피 급할 건 없으니까.’
다행히 이드리스는 빙긋이 웃으며 레이린의 대답을 ‘넘어가 주었다.’ 그녀로서는 퍽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라그나르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는 딱히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윽고 레이린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문 앞에 다다랐다. 슬며시 눈을 굴려 뒤를 살피자 자신이 쳐냈던 하녀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제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라버니가 여기 있는데 대체 내가 어딜 간다고 저러는 건지.’
그녀는 불만스럽게 입매를 뒤틀고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즉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 버렸다.
“아가씨, 잠깐......!”
“주인님께.......”
“......러지 말고 에벤 님을.......”
문 바깥에서 우왕좌왕하는 기척이 언뜻 들렸으나 레이린은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한순간의 심술일 뿐이다. 곧 에벤, 혹은 다른 사용인들이 들이닥칠 테니 그녀는 잠깐이나마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지금을 만끽하기로 했다.
저벅.
메마른 발소리가 회색빛 돌로 이루어진 지하를 울렸다.
널따란 공간에 발을 내리자 보이는 것은, 언제나처럼 사지를 결박당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회청색 머리칼의 청년이었다. 다만 처음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의 손목을 억죄고 있던 주술이 조금 더 느슨해졌다는 것일까.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배열되어 있던 문자들은 이제 사슬이 얽힌 모양새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레이린은 잠시간 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숨처럼 그를 부르며 걸음을 떼었다.
“오라버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직한 부름은 돌로 된 벽 여기저기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며칠 새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레이린은 별다른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가 그 앞에 무릎을 대고 몸을 낮췄다.
“......계속 이렇게 있으면 몸 상할 텐데.”
레이린은 착잡하게 중얼거리며 라그나르의 얼굴을 조심스레 손으로 쓸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패인 볼과, 거칠어진 피부가 마음을 무겁게 내려 앉혔다.
‘왜 아직도 깨어나질 않는 걸까.’
레이린은 며칠 전 라그나르를 보러 왔다가 에벤과 마주쳤을 때, 그가 ‘이상하네’하고 중얼거렸던 것을 듣고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에벤은 놀랍게도 더할 나위 없이 선선히 그녀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제가 걸어 둔 주술은 이미 풀렸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보다 오래 기절해 있는 것 같아 의아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뭐, 그동안 난리 쳐댄 후유증이 이제야 오는 걸 수도 있지만.’
물론 그 말만을 남기고 나서는 일말의 미련조차 없이 곧장 자리를 뜨기는 했지만.
레이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라그나르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얼른 일어나. 이 꼴로는 나한테 잔소리할 처지가-”
그녀는 돌연 손끝을 간질이는 감각에 흠칫하며 말을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숙이자 어느새 선명히 드러난 남빛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라버......!”
놀란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라그나르를 부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하지만 직후 남빛 눈이 깜박이는 모양새를 보고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알리면 안 돼.’
녹스에서 곧잘 사용하곤 하던 신호를 읽어 낸 레이린이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꾀죄죄한 모습으로도 설핏 웃음 지은 라그나르가 조심스럽게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윽.”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어서 그런지 중간중간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삼킬 때마다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윽고 간신히 소리를 내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게 된 라그나르가 미미하게 한숨을 삼키며 이를 갈았다.
‘염병할 새끼들 같으니.’
라그나르는 딱 하루 전 저녁 무렵, 에벤의 주술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프리조프 공은? 어디 계시나?’
‘아직 브리어스 양과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
눈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지독히도 귀에 익은 이름.
라그나르는 정신을 차린 즉시 본능처럼 숨을 죽이며 눈꺼풀을 닫았다. 그것은 이제껏 윈프리드에서 살아남은 자의 본능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라그나르는 본능에 따라 기척과 호흡을 죽이고 가만히 고개를 늘어트렸다. 정신을 잃고 있을 때와 한 점 다를 바 없는 모습에, 그의 곁에 서 있던 두 사람은 그가 깨어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그런데 에벤 님. 주인님께서는 왜 그 여자, 아니, 아가씨......께 그렇게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설마.......’
의미심장하게 늘어지던 말꼬리는 고저 없는 목소리에 의해 칼같이 잘려 나갔다.
‘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는 관심 끄는 게 좋을 텐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혀가 없어진 걸 보기 싫다면 말이야.’
‘힉! 죄, 죄송합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낸 자의 기척이 멀어지고, 그 뒤를 안절부절못하는 기척의 사내가 따랐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돌벽을 타고 웅웅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적막이 찾아들었다.
‘저게 다 무슨 소리야.’
라그나르는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눈을 번쩍 뜨고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주인’이 ‘브리어스 양’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상황에 지나치게 당황한 탓에 뒤죽박죽 엉켜 있던 머릿속이 정리되자마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 개새끼가.’
이드리스 프리조프, 그 망할 새끼가 결국 레이린까지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라그나르는 당장에라도 지하를 빠져나갈 기세로 손목을 움직여 보았으나 주술에 단단히 속박된 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라그나르는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려는 이성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레이린이 정말로 여기, 프리조프 저택에 있다면 섣불리 행패를 부려선 안 됐다. 레이린은 아마도 자신이라는 인질 때문에 이 저택에 발을 들였을 텐데, 만에 하나 그 반대의 상황이 될 가능성도 결코 작지 않았으니.
하여 라그나르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꾹 억누르며 정신을 잃은 척을 지속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한시라도 빨리 레이린과 접촉해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끌려온 뒤 윈프리드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유스티아의 일은 어떻게 하고 이곳에 있는 것인지 등.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만 탈출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숨을 죽인 지 약 하루.
“......!”
라그나르는 눈을 감고도 알아볼 수 있는 기척을 감지하고는 감은 눈을 움찔거렸다.
그가 곧장 고개를 쳐들고 레이린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은, 혹여 그녀의 뒤에 이드리스의 끄나풀이 붙어 있을 것을 대비해서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레이린의 주위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고, 저 멀리 위층과 이어진 문 너머로만 희미하게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지.’
라그나르는 한숨을 삼키며 뻐근한 목과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우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굳어 있던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에 속으로 다시 한번 이드리스에게 욕을 퍼부은 그가 곧장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어깨의 힘을 탁 풀었다. 그녀는 라그나르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뱉은 것이 자신의 걱정이라는 사실에 작게 실소를 내뱉었다.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도 제 걱정부터 하는 것은 우스우리만치 변함이 없지. 그런 생각에 조금 전까지 잔뜩 굳어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그녀는 이내 그를 따라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난 멀쩡해. 오빠는?’
‘나도 마찬가지야. 저 새...... 놈들이 어지간히 살뜰히도 치료해댄 탓에 말이지.’
라그나르는 습관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레이린의 앞이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하며 넘어갔다.
‘그보다 어떻게 여기 있어? 이드리스 프리조프 때문이야? 유스티아는 어쩌고?’
레이린은 라그나르의 질문에 찰나 멈칫했다가, 이내 찬찬히 입술을 움직여 그간의 상황을 전했다. 이드리스 프리조프로부터 서신과 검을 전달받고, 그것으로 에드윈을 배신하고 유스티아를 빠져나왔으며, 이후에 엘빈을 통해 윈프리드에 내전이 벌어졌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라그나르는 레이린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키안이 남은 사람들과 함께 지하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케르디트 레헬론.......’
그는 라그나르가 윈프리드를 중앙에 편입시키겠다고 선언했던 날. 그를 따르지 않고 녹스를 벗어난 간부였다.
‘저놈이 웬일이지?’
라그나르는 평소 사사건건 제게 반대하던 케르디트의 성정을 잘 알기에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키안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꼬리를 붙일까요?’
‘혹시 모르니까 붙여 놔. 특히 마티아스 쪽과 연관은 없는지 확실히 조사하고.’
그때 키안에게 뒷조사를 시켜 놓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내전이 발발한 첫날 모조리 몰살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제때 알아차렸나 보군.’
저도 모르게 잇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역시 키안은 입이 좀 방정일 뿐 유능한 비서였다. 하지만 키안이 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마티아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케르디트를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 자명했다. 더군다나 그 자신이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면 더더욱 어려울 테고.
레이린은 라그나르의 얼굴에서 그러한 걱정을 읽어 내고는 입을 열었다.
‘인질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아직 오라버니한테 별다른 짓을 하지는 않은 것 같아.’
‘아마도 그럴 거야. 손목을 묶어 놓은 것 빼고는 지나치게 느슨하던데. 뭐, 솔직히 이 정도 주술을 어떻게 풀겠느냐마는.’
라그나르는 제 손목을 가볍게 흔들며 조소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주술로 만들어진 수갑이 작게 잘그락, 하는 소리를 냈다.
“......님, 안에.......”
그때, 문밖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기척이 다가들었다. 흠칫 굳어졌던 레이린과 라그나르가 동시에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는 누군가 지하로 내려오기 전 재빨리 입술을 움직였다.
‘프리조프 저택을 빠져나가면 엘빈이 대기하고 있을 거야. 당분간은 기절한 척하고 있어. 주술을 풀 방법을 알아볼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라그나르가 불시에 자그맣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무리하지 마. 알았지?”
레이린은 속에서 울컥 치받는 감정을 가까스로 갈무리하고는 그의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
“......오빠나 몸 잘 챙겨.”
그 말을 마지막으로 생긋 웃어 보인 라그나르가 곧장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처음처럼 감쪽같이 기절한 모양새가 된 그를 보며 레이린 또한 몸을 물리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가씨.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프리조프 저택의 집사가 난감한 목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의 어깨 너머로는 레이린이 가까스로 떨쳐 냈던 하녀들이 줄줄이 뒤따르고 있었다.
레이린은 짐짓 착잡한 얼굴을 한 채 말없이 입술을 당겨 물었다.
라그나르가 깨어난 것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그것이 깨어나지 않는 형제의 모습에 참담함을 애써 억누르는 이의 슬픔으로 비쳐 절로 연민을 자아냈다.
“아가씨.......”
집사는 안타까움 절반, 초조함 절반의 목소리로 레이린을 재촉했다. 그의 얼굴은 미약한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에 레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돌아가지.”
그리 답하는 목소리마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사용인들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깊숙이 수그렸다. 혹시라도 레이린과 시선이 마주친다면, 당장에라도 제 주인의 명을 거부하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만 같아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레이린은 그 이후 방에 다다를 때까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사용인들은 저도 모르게 여린 등에 시선을 주었다가 불에 덴 듯 놀라 시선을 거두기를 반복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집사는 레이린이 방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정중히 묵례했다. 그를 뒤따르던 하녀들 또한 깍듯이 고개를 숙이던 차였다.
“아가씨. 구두에서 보석이 떨어졌습니다.”
여태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하녀가 갑작스레 입을 열며 앞으로 한 발 걸어 나왔다. 레이린은 그 말에 반사적으로 제 발끝을 힐긋 내려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래?”
“예.”
덤덤한 대답을 흘린 여인이 양손으로 쥐고 있던 보석을 앞으로 내밀며 손가락을 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옅은 자수정 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순간, 레이린의 머릿속에 찰나 속삭임 같은 목소리가 스쳐 갔다.
“.......”
잠시 침묵하던 레이린이 하녀를 빤히 응시했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녀가 찰나 힐긋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선명한 자색 눈동자. 그것을 본 레이린은 이내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그런 것 같네. 내가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눕고 나서 다시 붙여 주겠어?”
“제 기쁨입니다.”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고개를 숙였다. 레이린은 지체 않고 표정을 지우며 다른 사용인들을 돌아보았다.
“오늘도 내 뒤를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어. 다들 이만 돌아가 봐도 좋아. 너는 따라오고.”
“예.”
레이린은 집사와 사용인들이 당황을 내비치는 것을 모른 척하고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뒤따른 하녀가 문을 틈 없이 닫아걸자 문 바깥의 기척들이 순식간에 가려졌다.
찰칵, 작게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는 것을 확인한 레이린이 빙글 몸을 돌려 하녀를 마주했다.
“이름.”
“리카 제스라고 합니다, 레이린 님.”
하녀, 리카는 대답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레이린은 짙은 밀 색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아까 제 머릿속을 울렸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아이가 당신을 도울 겁니다.]
시간이 워낙 짧았던 탓에 그리 긴 말은 아니었으나 그 목소리는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리오넬.’
레이린은 리오넬의 것과 똑같은 자색의 눈을 보고는 리카가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임을 곧장 눈치챘다. 그래서 선선히 그녀를 방에 들였다. 혹시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려 한다 한들 제압하면 그만이라는 자신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이린은 제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카의 뒷머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침대에 걸터앉고는 고개를 까딱했다.
“편하게 서.”
“감사합니다.”
“리오넬이 널 보냈나? 내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게 도우라고?”
“예, 그렇습니다.”
“왜?”
지금껏 바로바로 대답을 뱉어내던 리카의 입이 닫혔다.
레이린은 구태여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이 외려 입을 열어 상대를 독촉하는 것보다도 무거운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잠시 말을 고르던 리카가 가볍게 한숨을 삼키며 입술을 움직였다.
“저희 남매는 어렸을 적 이드리스 님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 이후로 쭉 프리조프 가를 위해 일해 왔죠.”
리카는 분명 저와 제 오라비의 목숨을 구명해 주었던 이드리스에게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속내야 어찌 되었건, 그가 리오넬과 리카 남매가 뒷골목에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까.
‘살았어, 리카. 살았어, 우리.......’
리오넬은 이드리스의 뒤를 따라가며 리카의 손을 꼭 잡고 연신 그런 말을 속삭였다. 이제 더는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아도 된다고.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 ‘구원’이었을까? 제 오라비와 달리, 리카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그 일 때문에 고작 열 살 때부터 사지로 내몰렸습니다.”
리오넬과 리카는 이드리스가 그들 남매에게서 어떠한 ‘쓸모’를 발견하고 그들을 데려온 것이라는 것 정도는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라면 왜 그 대단한 영주가 손수 뒷골목의 고아들을 주워와 먹이고 교육했겠는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받은 것에 상응하는 충성 정도는 보이는 것이 맞았다. 리카 또한 그것은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한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검은 땅으로 가라, 리오넬 제스. 가서 어떻게 해서든 에드윈 클로비스의 옆에 파고들어.’
하지만 이드리스가 선의의 대가로 제 오라비의 목숨을 요구했을 때부터, 그 마음가짐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렸다.
“오라버니는 저 하나 때문에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을, 잘못해서 정체라도 들켰다가는 곧장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상태로 지내야 했죠.”
“.......”
“그리고 저는 그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오라버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감정하게 말을 늘어놓던 리카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드리스는 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철저했다. 그는 리오넬의 주변에서 마티아스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그를 철저히 ‘결백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십몇 년간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이드리스가 지워 낸 것 중에는 리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리카.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혹시라도 에드윈 클로비스가 네 존재를 눈치챈다면 네 오라비는 곧장 죽게 될 거란다. 그래도 괜찮다면 만나게 해 주마.’
이드리스는 리카가 리오넬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흘릴 때마다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겠니?’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명한 협박과 경고였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가는 오라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협박.
아마 리오넬 또한 같은 방식으로 협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고작 열 살짜리 소년이 그 지옥 같은 검은 땅 인근에서 살아남아, 끝내 악명 높은 클로비스 기사단에서 부단장 자리까지 꿰차지는 못했으리라.
잠깐 흐트러졌던 감정과 표정을 갈무리한 리카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저는 또다시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누군가의 혈육을 손에 쥐고 흔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
“그리고 제 오라버니는 어딘지 바보 같은 구석이 있어서, 몇 년이나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나든 사람들을 베어 버릴 만큼의 냉철함은 없습니다.”
내내 덤덤하던 리카의 얼굴에 찰나 신기루 같은 미소가 스쳤다.
“이만하면 납득이 가셨는지요.”
레이린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리카는 드물게도 속을 읽어 내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감상을 흘리며 겸허히 고개를 숙였다.
현재 레이린의 입장에서는 누군가를 쉽게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기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 한들, 적진 한복판에서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나는 당신 편이라고 하며 다가오는데. 한 치도 의심하지 않으면 그게 머저리고 미친놈이지.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으므로 리카는 저답지 않게 거듭 강조했다.
“물론 강요나 협박은 결코 아닙니다. 증명이 더 필요하시다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판단은 온전히 레이린 님께-”
“아니, 됐어. 피차 시간 없는 건 마찬가지이니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말하지.”
리카는 돌연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에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겉보기로는 그렇게 안 보였는데, 설마 레이린이라는 저 여자는 머저리였던 것인가?
‘난감한데.......’
하지만 고개를 오롯이 든 순간.
‘아.’
레이린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한 리카는 저도 모르게 입술 새로 작게 탄식을 흘렸다.
“현재 바깥 상황이 어떤지부터 말해 봐. 헤르기아스와 유스티아, 윈프리드를 우선으로.”
레이린은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겹치고는 자못 오만한 태도로 턱을 까딱였다.
리카는 그 눈을 보며 생각했다. 저것은 지금껏 단 한 번의 배신도 당해 보지 못한 자의, 순진하고도 눈먼 맹신이 아니라고.
‘......확신.’
외려 수십, 수백 번 배신 당한 끝에, 눈앞의 상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가려내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눈. 레이린은 바로 그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등줄기를 오소소 타고 올랐다.
“......아, 예.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잠시간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리카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내 매끄럽게 가다듬어진 말들이 그녀의 입을 타고 차분히 흘러나왔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물론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리카의 얼굴만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헤르기아스에?”
“예. 정확히는 호노라투스와 유스티아 사이에서요.”
레이린은 리카의 입에서 유스티아라는 말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물론 그것은 무척이나 희미한 움직임에 불과했던지라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말을 잇는 리카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번 달 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최근 호노라투스의 동태가 그러하고, 무엇보다.......”
“마티아스?”
“예. 에벤 님께서 대대적인 방어용 주술석 생산에 들어가셨습니다. 프리조프 기사단과 경비병들의 훈련 강도도 달라졌고요.”
레이린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제 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마티아스는 당연히 왕의 편에 설 거고, 윈프리드는 그럴 여력이 되질 않으니 관건은 에르치니아와 벤투스가 어떻게 나올 것이냐 하는 건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보랏빛이 번져 가는 하늘을 힐긋 일별했다.
‘바로크 드 루에이리가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지.’
노을에 물든 엷은 회갈색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머릿속으로 시린 푸른빛이 언뜻 스쳐 갔다. 그에 톡, 톡, 팔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때, 조용히 시립 해 있던 리카가 입을 열었다.
“탈출할 기회가 있는 건 전쟁 준비로 어수선한 지금이 유일할 겁니다. 한데 라그나르 님의 수갑을 풀 방법은 에벤 님께서만 알고 계시는 터라.......”
덤덤하던 목소리가 언뜻 자신이 없는 듯 흐려지며 길게 늘어졌다.
그녀의 말을 들은 레이린은 한동안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이윽고 무언가를 떠올린 그녀가 입을 움직였다.
“그럼 이렇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