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레이린은 엘빈, 그리고 적령의 길드원들과 함께 쉼 없이 말을 달렸다.
엘빈이 적령을 통해 구해 준 옷은 단순한 디자인의 흰 셔츠와 검은색 바지, 갈색 가죽 부츠였다. 그 위로 뒤집어쓴 검은색 클로크 자락이 빠르게 달리는 말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렸다.
저 멀리, 작은 점처럼 보이던 마티아스 성벽의 불빛이 점차 가까워졌다. 레이린은 불빛이 닿는 경계의 직전에 워워, 하며 말을 멈춰 세웠다. 그녀가 땅으로 훌쩍 내려서는 사이 엘빈 또한 말을 진정시키며 길드원들에게 손짓했다.
“멈춰.”
엘빈은 길드원들에게 그렇게 말하고서 레이린을 따라 말에서 뛰어내렸다.
레이린은 말을 타고 달리느라 흐트러진 클로크 자락을 정리하며 품에 단검을 비롯한 물건들을 챙겨 넣었다. 엘빈은 당장이라도 마티아스로 들어가려는 듯 구는 레이린의 모습에 당황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로 혼자 들어가려고? 오는 길 내내 말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라그나르 브리어스를 빼 오는 편이-”
“아니. 내가 가야 해.”
레이린은 엘빈의 제안을 단박에 일축하며 클로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이곳까지 오는 길 내내, 엘빈은 레이린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는 곧장 얼굴을 굳혔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엘빈은 레이린 홀로 이드리스 프리조프에게 보낼 수 없다며 강경히 반대했다. 그는 레이린을 통해서 라그나르 브리어스의 위치를 어느 정도 특정 지었으니, 차라리 적령을 이용해 그를 빼 오겠다고 말했으나 레이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라도 샌더슨 경 때와 같은 상황이라면 곤란해.’
그들은 아직 라그나르가 어떠한 상태인지 모른다. 만에 하나 이드리스가 오브리를 살해했을 때와 같은 주술을 걸어 놓았다면 섣불리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래도.......”
엘빈은 그럼에도 선뜻 레이린을 보낼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레이린은 그런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신 너는 언제라도 마티아스를 빠져나갈 수 있게 준비해 줘. 바로 윈프리드로 가야 할 테니까.”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엘빈은 끝내 한숨을 쉬며 말 안장에 매달려 있던 주술석 꾸러미를 풀어내 레이린에게 건넸다. 잠시 망설이던 레이린은 이내 그것을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
돌연 레이린의 팔을 잡아당긴 엘빈이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 빠르게 속삭였다. 그에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던 레이린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별말씀을. 상황이 바뀌면 연락할게.”
“그래.”
“몸조심하고.”
“알았어.”
레이린은 마치 라그나르나 키안처럼 끊임없이 걱정을 늘어놓는 엘빈의 모습에 설핏 웃음을 흘린 뒤 몸을 돌렸다.
한동안 제자리에 선 채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우리도 움직인다.”
“존명.”
이윽고 흰 은발의 사내를 비롯한 이들의 모습이 어둠 너머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레이린은 곧장 마티아스를 향해 발을 뻗었다. 그녀는 구태여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성벽의 경비병들은 처음엔 홀몸으로 걸어오는 인영에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누군가 달려와 귓가에 속삭인 말을 듣고는 다급하게 성문을 열었다. 레이린은 제 걸음에 맞추어 열리는 성문을 그대로 지나쳤다.
영주성까지 이어져 있는 대로는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무런 기척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괴한 분위기의 성 앞에 다다르자.
“생각한 것보다는 늦었군요, 브리어스 양.”
처음부터 레이린의 행동과 생각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는 양, 흐트러짐 없는 면면의 이드리스가 성 앞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레이린은 뒤에 사용인들과 수하들을 대동한 채 서 있는 이드리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멈추......!”
“가만히.”
놀란 사람들이 그녀를 제지하려 했으나 이드리스가 손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레이린은 묘한 미소를 띤 이드리스의 얼굴을 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거칠게 주먹을 내질렀다.
퍽-!
“주인님!”
곱상한 얼굴이 홱 돌아갔다. 그 반동으로 유려한 선을 그리는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경악한 사용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수하들은 금방이라도 검을 빼어 들 것처럼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이드리스는 얼굴을 얻어맞아 놓고도 즐겁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라 했다.”
“어디 있어.”
레이린은 비틀대느라 반쯤 상체를 구부리고 있는 이드리스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을 씹어 뱉었다. 이드리스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빙긋이 웃더니 몸을 바로 세웠다.
“한 대로 끝내게요? 더 때려도 괜찮은데.”
“묻는 말에나 대답해.”
“슬프게도. 나는 당신이 내 기대 이상인 사람이라는 걸 확인해서 기뻤는데 말이야.”
이드리스는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혀로 훑으며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레이린은 그의 웃는 얼굴을 잡아 뜯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지나친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탓에 외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 번은 안 물어. 초대에 응해 주었으면 마땅히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지. 라그나르 브리어스, 어디 있어.”
“......바라시는 대로.”
이드리스는 그런 그녀를 비웃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띠고는 더없이 정중하게 예를 취해 보였다.
그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짙은 남빛의 긴 생머리가 가볍게 한들거렸다. 레이린은 살의로 인해 미미하게 떨리는 손을 꾹 말아 쥐고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드리스가 걸음을 옮겨 향한 곳은 프리조프 저택의 본채였다.
‘역시 저택 안이었나.’
레이린은 이드리스를 따라 적막한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며 그리 생각했다.
엘빈은 윈프리드를 들쑤셔 놓은 것이 이드리스 프리조프라는 것을 확신했으면서도 라그나르의 정확한 위치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티아스의 음지만큼 베일에 싸인 곳이 없었다.
겉보기에는 윈프리드가 가장 곪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 껍질을 벗겨 내어 보면 마티아스의 지하는 윈프리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넓고 깊었다. 그러니 라그나르가 있을 만한 곳이라 예상되는 장소의 수가 미친 듯 늘어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레이린은, 이드리스가 라그나르를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겨 놓았으리라 확신했다. 그녀가 보아온 이드리스 프리조프라는 사람은 수중에 ‘주술’이라는 최고의 패를 두고서 굳이 경매장이나 암시장의 불확실한 경비 체계에 의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끄윽! 컥, 커흑......!’
그때 머릿속에 숨을 헐떡이며 죽어 가던 오브리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던 레이린은 이내 이를 악물고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이드리스의 뒤를 따랐다.
이드리스는 그리 오래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발길이 멈춰 선 곳은, 주술로 겹겹이 둘러싸인 본채 지하였다.
레이린은 이드리스를 따라 돌바닥에 발을 디디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입술을 벌렸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심이 순간적이나마 살의를 짓눌러 꺾었다.
회색빛 돌들로 둘러싸인 공간에는 구역질이 날 만큼 짙은 혈향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언뜻 감옥과도 같이 보였지만 주술로 인해 창살조차 존재하지 않는 드넓은 공간의 한가운데. 정신을 잃은 듯 고개를 푹 숙인 청년이 바닥에 무릎 꿇려진 채 양손을 결박당해 있었다.
옅은 회청색의 머리카락 군데군데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잔뜩 헐어 있는 손목을 둘러싼 기괴한 문자들은 쇠사슬처럼 양 벽에 높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라버니.”
충격이 가시고 나자 막혔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머리로 인지할 새도 없이 몸부터 튀어 나갔다.
레이린은 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쓸 새도 없이 다급하게 몸을 낮췄다. 혹여라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상처를 건드릴까 봐 몸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코끝에 가져다 대었다.
‘아.’
살아 있구나.
미약하게나마 숨결이 느껴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프도록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렸다.
레이린은 주저앉은 채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돌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세게 말아쥐었다. 그녀는 잠시간 눈을 감은 채 호흡하는 데만 집중했다. 안 그러면 당장에라도 이드리스를 목 졸라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레이린은 제 속을 가득 채운 살의가 뒤늦게나마 입을 타고 흘러나올까 봐 입술을 아프도록 사리물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사락사락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다가왔다.
“내가 당신의 소중한 혈육에게 몹쓸 짓을 했을 리가 없잖습니까.”
주홍색 눈이 어둠 속에서 기이하리만치 선연하게 반짝였다. 이드리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인 레이린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저건 그가 깨어나자마자 발악하느라 생긴 상처들입니다. 치료를 해 줘도 다시 정신을 차리자마자 탈출하려 드니 잠시 재워 둔 것뿐-”
-채앵!
그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이린이 부지불식간에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흰빛의 주술석이 라그나르의 손목에 닿는 순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이 조각났다.
“아.”
이드리스는 찰나 놀란 듯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무언가를 흘리며 입을 작게 벌렸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지나쳐 온 계단 위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용없습니다. 그 주술은 제가 아니면 풀 수 없으니.”
무미건조한 남성의 목소리에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레이린은 묘하게 침착한 태도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저는 공께서 이런 위험한 상황을 즐기는 독특한 취향을 가진 분이 아니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괴물이 또 깨어났는데 주술이 풀리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이드리스를 흘겨보며 그렇게 말하는 이는 퍽 앳된 외양의 청년이었다. 복슬복슬한 검은 곱슬머리와 산뜻한 분홍색 눈동자가 그를 더욱 어리게 보이게 했다.
이드리스는 청년의 질책에도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저런. 네가 손수 만들어 낸 주술에 그리도 자신이 없나, 에벤?”
“그럴 리가요. 다만 만일을 대비하자는 말입니다. 저는 가끔 보면 공께서 저 괴물보다 위기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청년은 꿋꿋이 이드리스를 타박했다.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이의 태도라기에는 꽤 방자했으나 고저 없는 목소리 탓인지 그리 기분 나쁘게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은 이드리스가 레이린을 돌아보았다.
“협상 내용은 들어보지도 않고 바로 도망치려 하다니. 이거 참 섭섭한데.”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레이린은 정말로 무언가를 기대하고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답하며 주술석 파편이 남은 손을 털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과는 달리 허리를 꼿꼿이 편 그녀가 이드리스의 눈을 꿰뚫듯 직시했다.
“원하는 게 뭐야.”
“당신.”
아주 잠깐의 틈조차 두지 않고 돌아오는 답에 레이린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헛소리는 그만하지.”
그러나 이드리스는 제 말을 정정할 생각이 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고개를 모로 기울일 뿐이었다.
“그대에게는 무척 애석한 일이겠지만, 나는 지난 스물일곱 해를 통틀어서 지금이 가장 진심이야.”
그는 제 얼굴에 떠오른 흥미, 호기심 따위를 감출 생각조차 않은 채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대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게 아니야.”
뱀 같은 속살거림이 나직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당신은 그저 내 소소한 궁금증을 채워 주고, 나는 그 대신 당신과 당신 오라비를 안전하게 이곳에서 내보내 주는 거래일 뿐이지.”
“.......”
“그렇게까지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드리스는 마치 한 치의 거짓도 내뱉지 않는 사람처럼 무구한 웃음을 내비치며 말을 맺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레이린 브리어스 양.”
어조와 내용은 부드러웠으나 구태여 ‘브리어스’를 강조하는 것은 라그나르를 생각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레이린은 끝내 피식, 짧은 비소를 흘리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좋아. 대신 조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하지.”
그녀는 흥미롭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드리스를 향해 보란 듯 더욱 환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답변 하나에 수갑의 주술, 한 단어씩 지워.”
내내 미소가 떠올라 있던 이드리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조금 찌푸려졌다.
“흠, 그건.......”
“거절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당장 거래고 뭐고 집어치우고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레이린은 고민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손장난 치듯 빙글빙글 돌렸다. 이드리스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조금 더 짙어지자, 레이린은 조금 전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매혹적으로 입매를 늘이며 속살거렸다.
“잘 선택해, 이드리스 프리조프.”
“.......”
“이대로 아무런 의문도 해소하지 못한 채 나를 잃을 것인지, 아니면 이 조잡한 거래나마 받아들여 어떻게 해서든 나를 붙들어 둘 것인지.”
그 말에 주홍빛 눈이 살짝 커졌다. 레이린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그의 답을 기다렸다.
잠시간 알 수 없는 눈으로 레이린을 바라보던 그는 끝내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맹세하지.”
선선히 답한 이드리스는 레이린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대신 그 검과 주술석을 비롯해 그대에게 불필요하다 판단되는 소지품은 잠시 내가 맡아 두어야겠어. 혹시라도 계약자가 달아나거나 자진하기라도 하면 곤란해서 말이야.”
그리 말을 맺은 이드리스는 ‘거래’가 무난히 성사되어 기쁘다는 듯 손바닥을 짝짝, 맞부딪쳤다. 그 소리에 하녀 두 명이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와 이드리스의 옆에서 허리를 굽혔다.
“부르셨습니까.”
“브리어스 양을 이만 방으로 안내해드리도록. 위험한 장난감들은 수거해서 내게 보내고. 아주 귀한 손님이신 만큼 성심껏 모실 것이라 믿어.”
“명 받잡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그저 허리를 깊이 굽혔다. 이어 자세를 바로 한 두 사람이 레이린의 곁으로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방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가씨.”
“......안내해.”
“감사합니다.”
하녀들은 답을 들은 즉시 칼같이 몸을 돌렸다. 그 몸짓에서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한 태도가 언뜻 엿보였다.
레이린은 묘한 미소를 띤 채 저를 응시하는 이드리스와, 그의 곁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에벤을 스쳐 지나가며 등 뒤를 힐긋 일별했다. 그녀를 떠나보낼 때 엘빈이 속삭였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다른 것들은 평범한 방어용 주술석이야. 하지만 흰색 주술석은.......’
‘.......’
‘딱 한 번, 대상자의 몸이 주술에 잠식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
엘빈의 설명에 따르자면, 해당 주술석은 오브리처럼 주술에 ‘잠식당해 있는’ 사람의 몸에 가져다 대면 색이 붉게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얀색.’
레이린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흰 파편들에 잠시 미쳤다가 금세 떨어졌다. 그녀는 소리 없이 술렁이는 마음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레이린은 하녀들의 뒤를 따라가며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우선은 라그나르가 깨어나면 제 안위를 확인시켜 주고, 이후 그의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되었을 때 이곳을 탈출하는 것으로. 더불어, 레이린은 얌전히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호기심만 채워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에벤. 그 남자가 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에벤이라는 주술사에 대해 정확히 파악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루비 없이도 자유롭게 주술을 쓰는, ‘틀’에서 벗어나 있는 유일한 주술사. 그의 비밀을 가까이서 파헤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번 한 번뿐이리라.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돼.’
언뜻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푸른빛을 매몰차게 지워내 버린 레이린은 표정을 굳히며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