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엘빈?”
레이린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엘빈의 모습에 당황으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비병들로도 모자라 기사들까지 가세해 거리를 뒤지고 다니자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설명은 나중에. 뛰어!”
엘빈이 소리 낮춰 속삭이며 다급하게 레이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기사들을 힐긋 일별한 레이린은 당혹스러움을 잠시 접어 둔 채로 그를 따라 땅을 박찼다.
그들은 재빠르게 유스티아의 경계를 향해 움직였다. 에르멧령에 들어섰을 때는 자칫 붙잡힐 뻔했으나,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적령의 길드원들이 기사들을 교란시킨 덕에 가까스로 성벽을 넘을 수 있었다.
레이린과 엘빈이 유스티아의 땅을 벗어나자, 저만치 성벽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몇몇 이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수장님.”
그들은 일제히 엘빈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뒤편에는 안장이 얹어진 말 두 마리가 보였다. 레이린은 기이하리만큼 매끄럽게 진행되는 일들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유스티아를 벗어나고 나서야 약간의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가 엘빈의 팔을 붙잡았다.
“너.”
나직한 목소리에, 엘빈은 길드원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빛을 발하는 연한 회갈색의 눈동자가 그를 꿰뚫듯 직시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엘빈은 그 질문에 무어라 답하려는 것처럼 작게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제 팔을 붙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가벼운 흰 드레스는 이미 피와 먼지로 더럽혀진 채 밑단이 아무렇게나 뜯겨 나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속에 든 피를 모두 빼어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는 레이린의 얼굴이 가장 위태로워 보여서. 엘빈은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차고는 길드원에게서 옷 꾸러미를 받아 그녀에게 건넸다.
“라그나르 브리어스랑 윈프리드의 소식을 듣고는 걱정이 돼서. 그나저나 너는 왜 갑자기 그 난리를 벌인 거야? 라그나르 브리어스 때문에 그래?”
그 말에, 엘빈이 건네는 꾸러미를 받아 들던 레이린이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잠깐. 윈프리드의 소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고운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그 얼굴에서 무지를 읽어낸 엘빈의 낯이 서서히 바뀌어 갔다.
“설마, 아직 못 들었어?”
“그러니까 뭘.......”
“윈프리드에서 내전이 발생해서 브리어스 저택이 전복당했다는 거.”
레이린의 얼굴에서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던 생기가 남김없이 빠져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시.......”
가까스로 비명을 목 안으로 삼킨 그녀는 흐린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짰다.
“제대로 설명해.”
잠시 난감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던 엘빈은 이윽고 자신이 전해 들은 윈프리드의 소식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라그나르 브리어스의 실종, 간부 케르디트 레헬론과 그를 따르는 전(前) 녹스의 길드원 일부가 브리어스 저택을 습격했다는 것. 수나 실력은 브리어스 저택의 식솔들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으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주술석들로 인해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것. 끝내는 중상을 입은 키안이 남은 이들을 이끌고 급하게 지하로 대피했다는 것까지.
고작 하루 남짓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이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아니, 온몸을 갈기갈기 찢듯이 너무도 현실적이라서.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흘렸다.
엘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라그나르 브리어스의 행방은 수소문해 보고 있는데,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 그래도 곧-”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알고 있으니까.”
돌연 웃음을 멈춘 레이린이 무감하게 끼어들었다. 엘빈은 한순간 등줄기를 관통하는 섬찟한 살기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설 뻔했다.
레이린은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사납게 입매를 뒤틀었다.
‘이드리스 프리조프.’
지금껏 누구 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강렬한 살의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데릭이 저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안톤이 녹스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미약한 허탈함만 자리했을 뿐 살의가 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사지를 찢고 혀와 눈을 뽑아 마물의 밥으로 던져 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레이린은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갈무리했다. 아주 가느다랗게 늘어진 이성이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위태로웠다. 엘빈은 그녀가 이성을 차리는 동안 말없이 곁을 지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엘빈.”
레이린이 일순 소름 끼칠 만큼 무감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엘빈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눈을 바라보며 묵묵히 답했다.
“말해.”
“루나를 키안에게 데려다줘.”
현재 키안이 대피시킨 세력에는 쓸만한 치료사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브리어스 저택의 개축이 이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치료사를 구하기에는 무리가 있을뿐더러, 프랭크는 애초에 치료 전문도 아니었으니. 라그나르와 레이린이 자리를 비운 이상, 윈프리드의 내전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키안이 필요했고, 그의 상처를 가장 빠르게 치료해낼 만한 사람은 루나뿐이었다.
레이린은 제 얼굴에 튄 핏방울을 소매로 닦아 내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에드윈을 배신하고 나온 이상 루나를 유스티아에 혼자 남겨 놓을 수도 없고, 이대로 뒀다가 키안의 세력이 전멸이라도 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 위험한 건 알지만 부탁할게.”
“......알았어. 어떻게든 할 테니까 맡겨 둬. 그건 그렇고 빨리 라그나르 브리어스를 찾아야 할 텐데.”
엘빈은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현재 브리어스 저택 전력의 9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라그나르 브리어스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윈프리드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다.
무력을 제외하고서라도 알게 모르게 수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왔던 그의 부재로 인한 타격은 무시할만한 것이 못 되었다. 키안 에레즈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라그나르의 부재를 등에 업고 싸우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라그나르 브리어스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텐데.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짓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라그나르 브리어스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가 그런 걱정을 삼키며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알고 있으니까.”
레이린이 엘빈의 걱정을 일축하며 황야 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엷은 회갈색의 눈이 시리게 번득였다.
“우리는 마티아스로 간다.”
유스티아의 북쪽, 황야 너머의 어둠 속. 새카만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영주님!”
레이린이 사라진 직후, 파티장은 비명과 고함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지금 당장 주치의와 웬델 경을 모셔와라! 당장!”
경악한 게오르크와 펠릭스가 피 웅덩이 가운데 쓰러진 에드윈에게 달려가고, 창백하게 질린 하인트가 하인들을 향해 버럭 고함쳤다.
‘이게 무슨.......’
펠릭스는 에드윈 주위의 피 웅덩이가 심상찮은 속도로 몸집을 불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조금 전 발코니의 문이 열리고, 에드윈이 회장 안으로 밀쳐지는 것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던 레이린이 머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늘 한없이 단정하고 차분한 모습이던 레이린이었다. 외려 그의 머리는 그녀를 타인보다 지극히 표정 변화가 적었던 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핏발 선 눈을 한 채, 에드윈의 것임이 분명한 피가 묻은 검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의 심정이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지라.
‘......아제트리아 양?’
펠릭스는 일순 제 눈을 의심했었다. 그러나 달빛을 등지고 흔들리는 연한 회갈색의 머리카락은 분명 레이린의 것이었다. 핏방울이 점점이 튀어 있는 하얀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또다시 두서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으로 물밀 듯 몰려들었다. 레이린은 왜 에드윈을 공격한 것인지, 아니, 애초에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은 어디서 난 것이며. 충분히 공격을 피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에드윈이 왜 저만한 상처를 달고 있는 것인지.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답을 찾을 수가 없어 그저 당혹스러웠다.
펠릭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에드윈의 상처를 지혈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몸을 숙였다.
“영주님, 상처를-”
“비켜.”
에드윈은 핏기가 모두 사라진 탓에 사람이 아닌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도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은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따라 옆구리의 상처에서 또다시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에드윈은 제 존재를 잊지 말라는 듯 점차 커지는 통증을 억지로 찍어 눌렀다.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두서없는 이명과 장면의 잔재가 휘도는 가운데에도 칼로 새긴 듯 유달리 선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가 막 발코니로 발을 들였을 때, 바람이 스치듯 찰나 시야에 담겼던 얼굴.
‘감히.’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턱에 힘을 주며 사납게 이를 갈았다.
그런 얼굴로.
‘역시 영주님은 못 속이겠네요.’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모든 게 조각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더 다가오면 벨 거야.’
제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스스로가 더 깊이 찔린 것 같은 눈을 하는데.
‘잊어버려, 전부.’
속아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주군!”
그때, 하인트의 다급한 호출에 연회장으로 뛰어 들어온 패트릭이 에드윈의 모습에 기겁하며 달려왔다.
에드윈은 주위의 손길을 무시한 채 또다시 벌어지려는 상처를 장갑 낀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버석한 입술 새로 등줄기가 오싹해질 만큼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패트릭.”
만에 하나. 머리로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말이지 만에 하나 레이린의 말이 진심이었다 한들.
“찾아라.”
그의 선택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에드윈은 이전에도 몇 번이고 레이린을 향해 경고했었다.
‘이번에도 도망치려 한다면.’
‘팔다리를 모조리 잘라 내서라도 막을 겁니다.’
도망치려 하면 양 발목을 자를 것이며, 기어서라도 그의 곁을 벗어나려 한다면 바닥을 짚을 손목마저 잘라 낼 것이라고. 그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기껍다는 듯 웃었던가.
“찾아서.......”
에드윈은 분명히 그녀에게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었다. 그 모든 경고를 무시하고, 끝끝내 그를 붙잡아 함께 죽어 달라 부탁했던 것은 레이린 본인이었다.
“내 앞으로 데려와.”
그러니 그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지킬 뿐이었다.
에드윈은 말을 마치고 연회장을 벗어나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새파란 눈동자는 더없이 형형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에드윈의 부상으로 인해, 한밤중에 유스티아 전역에 때아닌 비상이 걸렸다. 굳은 얼굴의 펠릭스 에르멧이 손수 성문을 단속하러 나섰으며, 클로비스 기사단은 경비병들과 함께 뒷골목 하나하나를 집요하리만치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이린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증발하기라도 한 것인지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춰 버린 탓에 그녀의 행적을 좇는 일은 미궁에 빠졌다.
당시 연회장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제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레이린이 에드윈을 해쳤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처음 비서장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목숨을 걸고 클로비스 가문 내에서 벌어지던 비리를 막아 냈던 모습, 피가 묻은 검을 든 채 에드윈을 밀친 모습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특히나 리브릭과 루비아스, 클라만시아, 힐데트 가문에서의 반발이 거셌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몸이 좋지 않은 탓에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마거릿은 소식을 듣자마자 버럭 역정을 내다가 비틀거렸다. 마찬가지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의 베르디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레이린이 그럴 리가 없어요. 무슨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어.”
아비시카는 하필 정면에서 피투성이가 된 레이린의 모습을 목격했던 탓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미약하게 떨리는 딸의 손을 맞잡아 준 클라만시아 가주 부부 또한 아이의 머리 위로 미심쩍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제가 아는 레이린 님은 결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헤일리의 말에 베아트리스 또한 동의한다는 듯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힐라 또한 소리 내어 동의를 표하지는 않았으나 그들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현재 클로비스의 가신 중에서 입김이 센 축에 속하는 가문들이 먼저 입을 다물어 버리니, 그 밑의 어중간한 귀족들은 자연히 그들의 눈치를 보며 반강제로 침묵했다. 그런 탓에 축제 첫날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은, 이윽고 추락의 계절이 시작되는 날까지도 클로비스령의 바깥으로 퍼져 나가지 않았다.
“리오넬.”
“......아!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리오넬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패트릭은 리오넬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거두며 근심 어린 얼굴을 했다.
요즘 들어 리오넬은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엘빈과 더불어 클로비스 기사단의 활기를 담당했던 그가 조용해지니 유달리 눈에 띄었다. 결 좋던 청록색 머리카락은 눈에 띄게 푸석해졌으며, 선명한 자안은 어딘지 불안한 기색으로 흔들리곤 했으니 걱정을 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패트릭은 리오넬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들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오늘 조사는 내가 나갈 테니 너는 이만 들어가 쉬도록 해라. 얼굴 빼고는 볼 거 없는 놈이 꼴이 그게 뭐냐.”
리오넬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염려가 어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 일인데.......”
“단장의 명령이다. 더 토 달지 말고 들어가. 싫으면 연무장이라도 돌든가.”
패트릭은 리오넬의 항의를 대번에 일축하고는 휘적휘적 멀어졌다. 난감하게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리오넬은 끝내 한숨을 삼키며 숙소의 제 방으로 돌아왔다.
평소 방을 같이 쓰던 기사들이 모두 순찰을 나간 것을 확인한 리오넬이 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문에 털썩 등을 기대어 앉았다.
“하.......”
리오넬이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찌나 심란한 기색이었던지 그의 발치에 있는 땅이 꺼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형편없이 얼굴을 구긴 그가 품에 손을 넣어 자그마한 종잇조각을 꺼냈다. 거기에는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짧은 명령이 적혀 있었다.
「곧 철수하게 될 듯하니 준비하라.」
리오넬은 언뜻 뱀처럼도 보이는 글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본래라면 보자마자 씹어 삼켰어야 옳았다. 하지만 어쩐지 요 며칠 마음이 소란해서, 지금의 평온이 흡사 폭풍 전의 고요처럼 느껴졌던 탓에 차마 그러질 못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여동생과 함께 마티아스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이드리스 프리조프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것? 그 이후 그의 수하로 길러지다가 클로비스 기사단에 잠입하라는 명을 받고 북쪽의 마을로 보내진 것? 거기서 계획했던 대로 에드윈을 만나고, 클로비스 기사단에 섞여들어서,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얼떨떨하고 정신없었지만.......’
‘이젠 이곳이 집이나 다름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까지 착각하게 된 것?
리오넬은 스스로 회고해 보아도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에, 끝내 헛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허물어진 입가를 가렸다.
에드윈은 축제 첫날의 소동 이후로 단 한 번도 침대에 몸을 누인 적이 없었다. 거리를 조사하고, 레이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음을 고하러 집무실에 들를 때마다 에드윈의 얼굴은 한층 사람의 것 같지 않게 변해 가고 있었다. 하인트가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고, 그레타가 잠시라도 쉬시라 눈물로 읍소했지만 에드윈은 집무실에서 영원히 나가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따금 주치의가 처방한 약의 성분 탓에 책상이나 소파에 기대어 선잠을 취하기도 했으나 그조차 한 시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미약하게나마 존재하던 ‘인간다운’ 기색이 죄 사라진 그의 얼굴은 그저 차가운 돌덩이 같았다. 외려 레이린이 오기 전보다도 생기 없는 에드윈의 모습에, 클로비스 저택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리오넬은 산 채로 말라 가는 제 주군을 보며 죄책감으로 속이 썩어 가는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리오넬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분명 이드리스가 그의 신이었고, 주인이었고, 은인이었으며 제 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막상 발을 들인 유스티아가 너무도 따스해서. 함께 검을 쥐는 사람으로서, 저보다 한참이나 앞서간 에드윈의 성취가 더없이 존경스러워서. 매해 돌아오는 봄마다 연무장 곁에 피곤 하는 작은 들꽃이 아름다워서.......
아니, 사실 이 모든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는 단지 유스티아를, 사람들을, 클로비스 저택을.
‘이곳에 남고 싶다.’
마음에 담아버린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젓던 잡념들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더불어 혼란으로 찌푸려져 있던 얼굴 또한 차분함으로 물들었다.
“.......”
리오넬은 조금 전과는 판이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쪽지를 내려다보다가, 불시에 그것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으로 다가간 그는 눈과 손을 바삐 움직이며 종이와 펜을 찾았다.
팔랑-
이윽고 그나마 멀쩡한 종이 한 장을 찾아낸 리오넬이 그것을 책상 위로 펼치며 다른 손으로 펜을 들었다. 잉크병에 담겼다 빠져나온 펜촉이 종이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리카, 나야. ......할 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