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87)

* * *

오래간만에 사람들 앞에 나선 영주의 축사와 함께, 추락의 계절이 오기 전 마지막 축제의 막이 올랐다.

사람들이 거리에서의 축제를 즐기는 사이, 귀족들은 저녁부터 클로비스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했다. 물론 그들이 참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아닌, ‘올 한해를 무사히 보냈음을 축하하는’ 파티였다.

레이린 또한 에드윈과 함께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온 뒤, 루시의 도움을 받아 가볍게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옷의 디자인 자체는 일전에 왕의 탄신 연회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했으나 색이 하얀색으로 저번과 정반대였다.

레이린은 제 팔을 감싸는 새하얀 천을 쓸어내리다가 잠시 자조했다. 저 같은 인간이 이런 순백을 몸에 걸치다니 퍽 우습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내가 어떻든 간에 여리게 보이는 외양에만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옷이었다. 레이린은 루시가 만족 어린 얼굴로 엄지를 치켜들고 나서야 아르망과 함께 파티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간 손님도, 연회도 없었던지라 적막하기 그지없던 서쪽 별채가 오늘만큼은 떠들썩했다. 레이린은 아르망과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서며 소매 안쪽에 넣어 둔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언제 줘야 하나.’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파티장을 둘러보다가 발코니로 이어진 문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유심히 살펴 두었다. 아무래도 오늘이 가기 전에 에드윈에게 선물을 전해 주기 위해서는 저곳이 최선일 것 같아서였다.

이내 생각을 갈무리한 레이린은 완벽한 ‘수행 비서’의 얼굴로 되돌아와 사람들을 상대했다. 이전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을 한 카힐라가 가볍게 안부를 전했다.

“내 자식들이 어째 나보다 나은 것 같더군. 이제 은퇴할 때가 된 게지.”

카힐라는 진정 후련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어리자, 한순간 그녀가 젊었을 시절의 얼굴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도 참.”

“남들이 들으면 욕해요, 어머니.”

힐데트 자매는 어머니의 칭찬이 퍽 민망한 듯 애정 어린 투덜거림을 흘리며 그녀와 함께 멀어졌다. 베르디는 마거릿의 몸이 좋지 않아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며 대신 아쉬움을 전했다.

“의사의 말로는 여자아이일 것 같다더군요. 아내와 상의 끝에 이름은 아제트리아 님의 이름을 따서.......”

“알겠습니다. 더 반대 안 할 테니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레이린은 온몸의 솜털이 일어나는 기분에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베르디는 마거릿을 닮은 짓궂은 웃음을 내비치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아비시카는 클라만시아 부부의 손을 잡고 나타나 활짝 웃음 지었다.

“나 저번보다 키가 더 커졌어요! 얼른 자라서 레이린 만큼 커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제가 안아 들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정말요?”

“앗, 그건 싫은데.......”

아비시카는 레이린의 장난기 어린 말에 세상을 잃은 얼굴로 심각하게 고민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던 레이린은 결국 클라만시아 부부와 함께 나란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사람들과 어울리던 레이린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이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 탓에 기분이 묘해졌다.

‘아, 선물.’

한창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는 뒤늦게 에드윈을 찾았다. 에드윈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를 향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미묘하게 고개를 틀어 레이린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

레이린은 사람들 사이로 에드윈과 잠시간 시선을 맞췄다. 이제는 말로 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생각을 알아챌 수 있었기에 굳이 입술을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그가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서서히 몸을 돌려 발코니로 나갔다.

달칵.

레이린은 발코니의 문을 닫고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커튼을 쳐두었다.

추락의 계절이 훌쩍 다가온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벌써 밤공기가 싸늘했다. 그녀는 생각보다는 널찍한 발코니를 가로질러 난간으로 다가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밤하늘이 유달리 맑았다. 맑고 깨끗한 어둠을 배경으로 별들이 자그마한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반짝였다.

레이린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달이 밝네.”

뒷골목에 사는 이들에게 달이 밝은 날이란 곧 농부들의 비 오는 날과도 같았다. 달빛이 밝으면 그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그늘이 사라지니까.

“후.......”

레이린이 가볍게 숨을 내쉬자 옅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소매에 넣어 두었던 팔찌를 꺼냈다.

‘에드윈은...... 언제쯤 오려나.’

손바닥 위에 놓인 팔찌가 달빛에 은은한 빛을 냈다.

지금의 그녀는 발목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던지라 부득이하게 발찌를 풀어 품에 넣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것이 꼭 제가 차고 있던 것을 풀어 놓은 듯 보인 탓에, 레이린은 설핏 웃음을 머금었다.

‘이러면 서로 구속하는 게 되는 건가.’

서로에게 묶인다는 사실이 퍽 기껍게 느껴질 지경이라는 것에 새삼 웃음이 나왔다.

바로 그때, 돌연 낯선 인기척이 불쑥 다가들었다.

“레이린 브리어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지르다가 말고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에 동작을 멈추었다. 직후 그녀의 앞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분명 제자리로 돌아가라 했을 텐데. 왜 아직도 이곳에 있나.”

레이린은 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어진 그의 물음에 차갑게 조소했다.

이드리스 프리조프. 참으로 끈질긴 악연이 아닌가. 이쯤이면 그와 전생에 무슨 연이 있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이린은 사납게 미소 지으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내 주인은 이드리스 프리조프가 아닌 녹스다. 아직 수장께 답이 돌아오지 않았-”

“기다릴 필요 없다.”

“......뭐?”

심장이 선뜩한 불안감을 매달고 발끝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다. 레이린은 날을 세우던 것도 잊고 멍하니 되물었다.

상대는 그 틈을 타 레이린의 양손에 무언가를 억지로 들려주었다. 레이린은 제 오른손바닥에 닿아 오는 차가운 감촉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은빛 검이 달빛을 받아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묵직한 오른손과 달리, 레이린의 왼손에 들린 것은 깃털 같은 무게의 종이 한 장이었다. 레이린은 스스로 죽으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천천히, 힘겹게 제 왼손에 놓인 종이를 펼쳤다. 언젠가부터 종이를 펼쳐 보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반듯하게 접혀 있는 종이를 활짝 펼치자 곧장 눈에 들어온 것은.

“......라그나르?”

지독히도 익숙한, 그래서 더욱 섬뜩한 회청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레이린은 한순간 제 시야에 들어온 물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이 미친 새끼.

쾅-!

그녀는 가까스로, 정말이지 간신히 정신을 되찾는 것과 동시에 손을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상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던 검이 결계에 막혀 바르르 진동했다. 상대는 레이린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미리 주술석을 꺼내 들고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를 아득, 간 레이린이 검을 거두어들이며 사납게 으르렁댔다.

“어딨어.”

“무엇을 말하는-”

“어디 있냐고, 물었어, 내가.”

지나친 분노 탓에 말이 뚝뚝 끊겨 나왔다. 레이린은 이곳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파티장 바로 옆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노력을 비웃듯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말했다.

“글쎄. 그분께서는.......”

분명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비소 어린 입매만은 선명히 눈에 박혀 들었다.

“시킨 일을 전부 마치고 찾아온다면 혹시 모르겠네, 라고 하시더군.”

레이린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시킨 일.

“부디 그분을 실망하게 만들지 마라.”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발코니의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졌다.

그리고.

“아제트리아 양.”

하필이면.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에, 발코니의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무슨 소리가-”

에드윈은 옅게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발코니의 문을 닫다가, 레이린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던 말을 멈추었다.

“......레이린?”

그 부름에 퍼뜩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났다.

‘안 돼.’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발을 주춤 뒤로 물렸다. 만약 레이린 본인이 첩자였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사람들은 영주인 에드윈의 판단력을 의심하고 비난할 것이다. 왕가와 마티아스가 호시탐탐 유스티아를 노리고 있는 와중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유스티아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노릇.

이 상황에서 기껏 다잡아 놓은 결속력을 흔들지 않고, 이드리스의 ‘악의’ 또한 충족시킬 방법은.

“......역시 영주님은 못 속이겠네요.”

아마도 이것 하나뿐.

레이린은 발코니 아래에 인기척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말끔했다. 외려 이렇다 할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모두 사라진 얼굴은 폭풍이 물러간 후의 수면처럼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를 닮은.

“레이린.”

에드윈은 무언가 기이함을 눈치챘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러나 레이린은 태연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는데.”

“지금 무슨.......”

“어떻게 눈치채고 추궁까지 하러 오신 건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네요.”

레이린은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빙긋이 웃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들어 올린 그녀가 검 끝으로 에드윈을 겨누었다.

그래, 그는 제 정체를 눈치채고 남들의 눈을 피해 그 사실을 추궁하러 온 선(善)이며. 저는 이 평화롭고도 안온한 곳에 스며들어온 불순물이자 악(惡)인 것이다.

레이린은 저 자신을 향해 세뇌하듯 되뇌며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에드윈은 레이린이 제게 검을 겨눈 순간부터 무섭도록 표정을 굳혔다. 어둠 속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저 홀로 존재하듯 형형한 빛을 냈다.

“......당신.”

돌연 빠득, 이를 간 에드윈이 앞으로 한 걸음 움직이며 낮게 으르렁댔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다시 말해 봐.”

섬찟한 살기에 본능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뭐라고 했어, 방금.”

하지만 레이린은 볼 안쪽을 세게 짓씹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더 다가오면 벨 거야.”

레이린은 냉랭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경고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조차 상관없다는 듯 그녀에게로 다가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린은 성큼성큼 제게 다가오는 에드윈의 모습에, 말과는 달리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말고 이를 악물었다.

“......멍청이.”

끝내 나직한 중얼거림을 흘린 레이린이 검을 고쳐 쥐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살이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에드윈의 허리가 핏물로 젖어 들었다. 레이린은 저를 붙잡으려는 에드윈을 피하며 그를 세게 밀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발코니의 문 앞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엉망으로 바닥을 구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처절하게 외쳤다.

제발, 제발. 이제 그만.......

“안 믿어.”

그러나 에드윈은 그 순간에조차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팔꿈치로 바닥을 짚으며 애써 상체를 세웠다. 허리를 깊이 베인 고통 탓인지, 미미하게 미간을 찡그린 그가 애원하듯 입을 움직였다.

“설명해.”

“.......”

“당신 말이라면 뭐든 들어줄 테니까, 나한테...... 설명해.”

“.......”

“제발.”

새파란 눈은 이 순간에조차 올곧게 레이린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린은 그 필사적인 모습에 속으로 울듯이 웃어 버렸다.

아.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도, 이런 나를.

“......지겹네, 이젠.”

하지만 그것은 차마 바깥으로 내보일 수 없는 마음인지라.

“내가.”

레이린은 끝내 광기 어린 웃음을 토해 내며 손에 쥐고 있던 팔찌를 내던졌다.

“이런 감정놀음도 이젠 질렸다는데.”

콰직-!

흰 구두에 짓밟힌 팔찌가 맥없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속에서도 무언가 부서져 내렸다.

“이유가 더 필요한가?”

레이린은 그 말을 내뱉으며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속이야 얼마나 진창이건 간에 그녀의 미소만은 후련하다는 양 깨끗했다. 그에 끝내 평정을 잃은 에드윈이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이제라도 아니라고 말해.”

“그동안 상대해 주느라 고생했어.”

“다 거짓말이었다고, 차라리 도와달라고 말해!”

언뜻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고함이 허공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발코니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대며 웃었다.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는 사실조차, 아주 잘 짜인 연극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며.

“잊어버려, 전부.”

흐리게 중얼거린 그녀는 발코니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발을 움직여 피투성이인 에드윈을 파티장으로 밀어 넣자 순식간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이게 무슨......!”

“아제트리아 양?”

레이린은 사람들이 경악 어린 눈으로 제 얼굴을 확인하게 둔 다음, 곧장 몸을 돌려 발코니의 난간을 뛰어넘었다. 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튀어 있는 흰 옷자락이 밤바람에 휘날렸다.

레이린은 발코니 아래에 내려선 즉시 인기척이 느껴지던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레이린 님?”

밝은 청록색 머리칼, 자색 눈동자. 리오넬은 그녀의 손에 들린 검과, 검날에 묻어 있는 피를 확인하고는 경악한 얼굴을 했다. 레이린은 한순간 상대가 리오넬임을 확인하고는 낭패 어린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내 말없이 검을 고쳐 쥐었다. 자신이 에드윈을 ‘배신’한 것이라는 증인으로 남겨 두기 위해 그가 발코니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긴 했지만, 혹시라도 그녀를 막으려 한다면 벨 요량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가십시오.”

리오넬은 굳어진 얼굴로 그리 말하고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레이린이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외려 초조한 기색으로 발코니를 힐긋 일별하고는 그녀를 독촉했다.

“뭐하십니까! 여기서 빠져나가란 말입니다! 지금 당장!”

레이린은 그 고함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반사적으로 땅을 박찼다. 리오넬이 어째서 저를 보내 주는 것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레이린은 곧장 클로비스 저택을 벗어나 유스티아의 경계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비스 저택에서 기사들을 푼 것인지 빠져나갈 길이 하나둘 막히기 시작했다.

“젠장.......”

레이린은 골목에 몸을 숨긴 채로 바깥을 힐끔 내다보았다. 클로비스 저택에서의 소식을 들은 것인지, 굳은 얼굴의 경비병들이 거리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다.

레이린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골목에 머리를 기댔다. 달이 밝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흰색이었기에 숨어서 이동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레이린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돌연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던 그녀는 제 앞에 선 인영을 보고는 작게 입을 벌렸다.

“......엘빈?”

8. 추락

엘빈은 이른 새벽까지 서류와 씨름하다가 말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상하네.’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엘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손에 쥔 서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천장에 매달린 주술석의 불빛이 종이 너머로 아른아른 비쳤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그의 손에 들린 서류에는 최근 호노라투스의 동태에 대한 정보들이 깨알 같은 암호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엘빈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그것을 해석해 읽어 내렸다. 이미 여러 번 읽은 것이었지만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묘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식량의 흐름, 자금의 흐름, 사람들 사이의 흐름. 그 모든 것들을 나란히 놓고 내려다보자니 영 찜찜함을 버릴 수가 없어서.

‘이거 꼭.......’

엘빈이 한쪽 눈썹을 구긴 채로 서류를 내려다보며 어떤 가정을 떠올리는 순간.

“수장님!”

벌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아, 어떤 새끼야.’

엘빈은 반사적으로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가, 불청객의 정체가 루드위그라는 것을 깨닫고는 곧장 표정을 풀었다.

평소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던 그가 지금은 미묘하게 얼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엘빈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야, 영감. 내가 아무리 보고 싶었어도 그렇지-”

“내전입니다.”

하지만 그 직후, 그는 제 말 중간에 끼어든 목소리에 일순 귀를 의심했다.

“......뭐? 어디? 여기?”

엘빈은 루드위그와 꼭 같은 얼굴이 되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한 번 내저은 루드위그는 애써 당황을 갈무리했다. 이윽고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은 얼굴의 그가 못다 한 말을 이었다.

“큼, 다시 제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라그나르 브리어스의 종적이 끊겼습니다.”

그래, 여기까지는 그저 ‘세상에’ 하고 탄식하며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도 워낙 신출귀몰하던 그이니 또 어딘가 훌쩍 나들이(피가 동반된)라도 다녀오는 중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뒤이어진 말이 없다는 전제하의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간부 케르디트 레헬론이 브리어스 저택을 습격해 장악, 키안 에레즈는 중상을 입었고, 조금 전에는 브리어스 기사단과 식솔들을 이끌고 그들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이상입니다.”

“......뭐라고?”

기겁한 엘빈은 저도 모르게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내 손에 쥐고 있던 기밀 서류가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었으나 의식할 새조차 없었다.

라그나르 브리어스가 실종됐다고? 거기에 윈프리드에서 내전이 벌어져서 브리어스 저택이 전복돼?

“이게 무슨 미친-”

-레이린.

불현듯 그 이름 하나가 뇌리에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동시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찰나 뻣뻣이 경직되었던 엘빈은 이내 한쪽에 걸어 두었던 외투를 낚아채며 고함을 질렀다.

“지금 당장 라그나르 브리어스의 위치를 파악해라! 케르디트 레헬론을 포함해 윈프리드 관련 소식은 10분에 한 번씩, 내게 직접 보고해!”

바깥을 향해 다급히 소리친 엘빈이 외투에 팔을 꾀며 책상을 돌아 나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루드위그가 저도 모르게 그를 뒤따르며 입을 열었다.

“예? 어딜 가시려고.......”

엘빈은 그를 지나쳐 형형한 눈으로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짓씹는 듯한 말이 새어 나왔다.

“유스티아로 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