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축제 첫날 아침, 사람들의 들뜬 마음이 클로비스 저택까지 흘러든 것인지 평소 조용하던 저택 또한 유달리 소란스러웠다.
레이린은 이른 아침 식사를 위해 본채에 들렀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택의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발뒤꿈치를 든 채 뛰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리! 발소리가 너무 크잖니!”
“죄송합니다, 그레타 님! 조심하겠습니다!”
하녀장이 발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하녀 하나를 나무라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혹여나 영주가 눈치챌까 봐 목소리를 죽이고는 거의 입 모양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주방을 오가는 이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영주의 생일이니 식사만이라도 화려하게 챙기려는 듯 보였다.
‘이러나저러나 사랑받는 주인인가 보네.’
레이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푸스스 잔웃음을 흘렸다.
그때, 1층의 입구에 서 있는 레이린을 발견한 하인트가 구세주를 만난 듯한 얼굴로 재빨리 다가왔다.
“레이린 님! 일어나셨습니까.”
“네. 좋은 아침이에요, 하인트 님.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레이린은 평소 여유롭고 정중하던 그의 얼굴이 드물게도 초조하게 보여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하인트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더니 이내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이 영주님의 생일이십니다. 하여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인데, 메인 요리의 재료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새로 조달해 오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레이린은 짐짓 처음 알았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선뜻 웃음 지었다.
“제가 올라가서 시간을 끌고 있겠습니다. 얼마 정도면 될까요?”
“30분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레이린은 면구한 얼굴의 하인트에게 부드럽게 웃어 주고는 계단을 올라 6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우아하게 조각된 문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영주님. 안에 계십니까?”
“......아제트리아 양?”
“계시네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바깥으로 나오려는 듯한 기척에, 레이린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기감이 뛰어나니 방 밖으로 나왔다가는 곧장 사용인들의 부산함을 눈치챌 수도 있었다. 그러니 애초에 방 안에 잡아 두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그녀는 등 뒤로 문을 단단히 닫아걸고는 시선을 들었다. 에드윈은 막 방문을 향해 한 걸음 옮기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가벼운 셔츠 차림에, 머리카락 끝에 물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막 일어나 씻은 것으로 보였다.
“레이린?”
에드윈은 드물게도 당황이 드러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레이린은 평정이 깨진 그의 얼굴을 양껏 감상하고 나서 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와드릴까요?”
그녀가 손짓으로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예복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제야 당혹감을 갈무리한 그가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데 이 시간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레이린은 에드윈을 지나쳐 소파에 걸터앉으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흘렸다.
“이런 시간에 찾아오면 조금은 엉망인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해서요. 소용없는 짓이었던 것 같지만.”
레이린은 상체를 틀어 소파 등받이에 팔을 괴고는 혀를 찼다.
실제로 그녀의 말은 반쯤은 진심이었다. 혹시라도 막 잠에서 깬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찾아왔건만 저리 깔끔한 모습이라니.
“.......”
에드윈은 그 말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레이린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짐짓 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미미하게 한숨을 삼킨 에드윈이 침대 위의 옷가지로 손을 뻗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쉬고 계십시오.”
“......네? 아니, 잠깐만요.”
레이린은 외려 당장에라도 이 방을 나가겠다는 듯이 구는 그의 태도에 당황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방에 들어온 지 아직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지금 에드윈을 바깥으로 내보냈다가는 사용인들이 곤란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제 말을 지키려고 하는 듯 빠른 속도로 매무새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애써 당황을 감추던 레이린은 황급히 에드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어떻게 그를 붙잡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가 재킷을 걸치는 틈을 타 충동적으로 침대 위의 크라바트를 집어 들어 뒤로 숨겼다.
“레이린?”
한발 늦게 크라바트로 손을 뻗던 에드윈이 미간을 설핏 좁히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레이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
“해드리고 싶은데.”
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는데, 막상 내뱉고 보니 썩 말이 되지 않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스에 머물 적 라그나르에게도 해 준 적 없던 행동이라는 것을 자각하니 기분이 조금 묘해지기는 했지만.
레이린은 왠지 평소보다 짙어진 듯 보이는 푸른 눈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안 될까요?”
에드윈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침묵에, 편안하게 흐트러져 있던 분위기가 점차 기묘하게 변해 갔다. 어딘지 숨이 가빠지는 듯한 기분에 레이린은 느리게 호흡을 골랐다.
그때 에드윈이 돌연 성큼 거리를 좁히더니 상체를 숙였다. 그가 코끝이 부딪힐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레이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바라시는 대로.”
레이린은 일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숨을 멈추었다. 별다른 말을, 행동을 내보인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심장이 빠듯하게 죄이고 숨이 가빠지는지.
이렇다 할 감정 하나 떠오르지 않은 얼굴로, 꼭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씹어 삼키고 싶다는 눈을 하는데. 끝내는 그 감정에 저까지 함께 물들어 미칠 것만 같아서.
레이린은 결국 버틸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손에 들고 있던 크라바트로 그의 눈을 가리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갑작스레 시야를 빼앗겨 놀란 듯 주춤하던 에드윈은 이내 이성을 잃은 것처럼 거칠게 호응해 왔다.
“흣.......”
말캉한 살덩이가 치열을 샅샅이 훑다가도 혀를 빠듯하게 감싸 끌어당기기를 반복했다. 온몸을 달구는 열기 탓에 감각이 예민해진 것인지 그 하나하나가 미칠 듯한 자극이 되어 돌아왔다.
그의 목과 머리카락을 휘감은 채 숨을 헐떡이던 레이린은 반쯤 몽롱한 기분으로 등에 푹신한 감각이 닿아 오는 것을 느꼈다. 일전에 왕궁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기시감이 들었지만, 제정신일 때 느끼는 감각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홧홧했다.
에드윈은 분명 눈이 가려져 있음에도 그 사실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레이린은 어느새 제 위로 올라타 입을 맞춰 오는 에드윈의 목을 감싸 안으며 새삼 그와의 체격 차이를 실감했다.
“아, 읏......!”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떨며 고개를 뒤로 휙 젖혔다. 어느새 턱선을 따라 내려온 에드윈의 입술이 드러난 목덜미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레이린은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이 온통 멍해서 그런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두서없이 날뛰었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평생-
‘그대가 할 일은 끝났다.’
그 순간.
‘그러니 이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도 좋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이린은 반쯤 풀어져 있던 눈을 번쩍 뜨며 반사적으로 에드윈을 밀어냈다.
“......린.”
에드윈은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선선히 물러났다. 하지만 낮은 부름은 미처 꺼트리지 못한 정염으로 인해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다.
레이린은 에드윈의 눈이 가려져 있다는 사실에 마음 깊이 안도했다.
“이러다가, 늦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지금 제 얼굴은 엉망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레이린은 필사적으로 평온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조금 후에.......”
그녀는 에드윈이 크라바트를 풀어 내기 전, 미처 말을 맺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흐트러진 매무새를 갈무리한 그녀는 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레이린은 문고리를 잡은 채 방문 아래에 무너져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새끼.’
그녀는 홀로 이드리스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갑작스럽게 방으로 돌아온 탓에 미처 가시지 않은 열기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 작은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똑, 똑.
흠칫 어깨를 떤 레이린은 문고리를 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는 커튼, 그 너머로 창틀에 끼워진 작은 꾸러미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엘빈.’
반색한 레이린은 곧장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꾸러미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치자 작은 쪽지가 떨어졌다.
「이게 네가 원하던 정보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 -E.」
레이린은 곧장 쪽지를 불태우고는 꾸러미 안에 들어 있던 낡은 서적을 펼쳤다.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양, 종이를 한 장 넘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레이린의 눈이 차츰 가라앉았다.
‘이건.......’
「루에이리력 3년 – 이크레스 드 루에이리 탄생.
(중략)
루에이리력 23년 – 엘피스 1세 사망, 사인은 심장 마비. 이크레스 1세 즉위.」
레이린은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연도와 이름들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엘피스 드 루에이리라면.......’
신의 분노로부터 사람들을 지켜 냈다고 일컬어지는 자. 그는 루에이리 왕가의 첫 번째 왕이자, 동화 속에서 종종 ‘하얀 소년’으로 등장하곤 하는 이였다.
‘루에이리 왕가의 출생 기록서인가.’
그 많은 기록 중에서도 왕가의 출생 기록서라. 이런 희귀한 것만 골라 찾아내는 일도 쉽지만은 않을 텐데. 레이린은 새삼스레 표지를 한 번 일별하고는 다시금 책장을 넘겼다.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빨라짐에 따라 레이린의 미간에 파인 골도 깊어졌다.
‘뭔가.......’
이상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레이린은 다시금 책장을 넘겨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이크레스 1세, 스무 살에 즉위. 타르탈로스 1세, 스무 살에 즉위. 엘피스 2세, 스무 살에 즉위. 카이나스 1세, 스무 살에 즉위.......
레이린은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더더욱 미궁에 빠진 기분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우연이라 할지라도, 아니, 이렇게까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칭할 수나 있는 걸까.
‘모든’ 후계자는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왕위에 올랐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왕은 후계자가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뜻이었다. 레이린은 그 사실을 곰곰이 곱씹으며 현왕과 아네트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현왕이 본인이 2년 안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렇다면 미쳤다 싶은 행동까지 서슴지 않으며 에드윈을 아네트의 곁에 붙여 놓으려고 하는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본인이 죽고 나서는 에드윈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고, 아네트는 에드윈은커녕 다른 영주들에게조차 무언가를 강요할 만한 성정이 못 되었으니.
‘하지만 이유가.......’
역대 왕들의 ‘규칙적인’ 죽음은 대관절 무엇 때문인가. 그 물음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것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왕족이 지닌 능력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지금,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했다.
레이린은 결국 방문 밖에서 저를 찾는 아르망의 목소리에 책을 덮고 뒤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