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짝!
“아.”
멍하니 마차 밖을 응시하던 레이린이 퍼뜩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고개 옆에 대고 손바닥을 맞부딪쳤던 아르망이 손을 거두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애가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멍하네.”
“아....... 그냥 잠을 조금 설쳤나 봐요.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보는 에드윈을 힐긋 일별한 그녀가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농부들과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시야에 담았는데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왜 이러지.’
레이린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갑갑함에 손을 들어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이드리스의 전언을 접한 이후로 그녀는 늘 반쯤 멍한 상태였다. 이것은 기실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리라. 그녀 또한 머리로는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마음이 문제였지.
‘......괜찮을 거야.’
지금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레이린은 자꾸만 입술 새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꾸역꾸역 속으로 밀어 넣으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 마부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에드윈이 무릎에 올려놓았던 서류를 챙기며 먼저 바깥으로 나가고, 레이린은 아르망과 함께 그 뒤를 따라 땅으로 내려섰다.
고풍스러운 저택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중년의 사내가 잠잠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게오르크 안토니아가 유스티아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에드윈은 약 반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의 남자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간만입니다, 안토니아 공.”
인사를 마치고 몸을 바로 한 게오르크는 잠시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에드윈을 빤히 바라보았다.
“......실례했습니다. 이만 안으로 드시지요.”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낀 에드윈이 미간을 설핏 좁히고서야 시선을 거둔 그가 일행을 저택으로 안내했다.
에드윈과 레이린, 아르망은 추락의 계절을 앞두고 마지막 시찰을 위해 안토니아 저택을 찾았다. 하지만 마지막 시찰이라는 생각에 어깨에 힘을 주고 온 것이 무색하게도, 안토니아령의 운영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혓바닥으로 남을 털어먹을 생각에 한껏 신이 난 얼굴로 서류를 펼쳤던 아르망이 황망하게 중얼댔다.
“뭐야....... 밥 먹고 일만 했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안타깝군.”
“아, 아닙니다.......”
게오르크가 그 혼잣말에 친절히 답을 돌려주자 아르망은 머쓱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맞은편에서 앉아 있던 레이린은 강박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깔끔한 내용에 연신 감탄하며 종이를 넘겼다.
‘윈프리드로 영입하고 싶을 정도인데.’
레이린은 무심코 든 생각에 저도 모르게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다짐해도 결국에는 이 모양이었다.
한숨을 삼킨 레이린이 착잡한 얼굴로 시선을 내려 서류를 살폈다. 그에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새파란 시선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게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과할 만큼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들 덕에 그들은 점심시간에 맞추어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에드윈이 마지막 장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아르망이 몸을 쭉 늘이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으으. 좀 지루하긴 했지만, 덕분에 밥은 제때 먹을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안토니아 공.”
아르망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던 게오르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점심을 내오라 이르겠습니다. 장소는.......”
똑똑-
그가 고민하듯 턱을 만지작거리던 때, 돌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주인님.”
“음? 들어오게나.”
게오르크는 목소리의 주인이 집사라는 것을 깨닫고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종을 울리기도 전인데 별일이군, 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의 이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그가 입을 열었다.
“아비시카 클라만시아 영애께서 점심을 함께하고 싶으시다며 방문하셨습니다. 어찌할까요?”
“뭐? 지금 말인가?”
“예.”
게오르크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집사 또한 퍽 난처한 기색으로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레이린은 의외의 장소에서 듣게 된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아비시카가 안토니아 공의 조카딸이었던가.’
클라만시아 가의 안주인인 에밀리는 게오르크 안토니아의 조카였다. 그러니 그 딸인 아비시카가 이리 스스럼없이 안토니아 저택을 드나드는 것도 영 생뚱맞은 일은 아니었다. 레이린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편, 게오르크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난처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평소에도 워낙 자유롭게 드나들다 보니....... 금방 돌려보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바로 하며 집사에게 아비시카를 돌려보내라는 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두십시오.”
“......예?”
게오르크는 제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속을 알 수 없이 무감정한 얼굴의 에드윈이 덤덤히 입을 움직였다.
“어차피 급한 일도 마무리되었으니, 시찰을 나가기 전 식사를 함께 드는 것 정도는 무리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혹 곤란하십니까.”
말을 잇는 내내 에드윈은 무료하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었다. 목소리 또한 표정처럼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내뱉은 말과의 괴리가 더욱 선연하게 느껴졌다.
게오르크는 평소답지 않은 그의 태도에 눈을 몇 번 끔벅이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내려가시죠.”
집사에게 몇 가지 말을 건넨 그가 응접실로 안내하겠다며 집무실을 나섰다. 레이린은 게오르크를 따라 집무실을 나서는 에드윈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내 아르망과 함께 걸음을 떼었다.
“레이린!”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자그마한 인영이 레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레이린은 격하게 제 허리를 껴안는 아비시카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런 우연도 다 있네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그러자 그녀의 허리에 볼을 비비며 행복해하던 아비시카가 팔을 풀고는 입을 비죽였다.
“우연 아니거든요. 요즘 하도 얼굴 보기가 힘들길래 내가 직접 왔어요!”
아비시카는 칭찬해 달라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레이린을 올려다보았다.
그에 아비시카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렸던 게오르크가 머쓱하게 팔을 거두어들이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오늘은 날이 선선하니 정원에 식사를 준비해 두라 일렀습니다. 안내하지요.”
“좋아요! 레이린, 얼른 가요!”
아비시카는 게오르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난 얼굴로 레이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황한 레이린이 에드윈을 힐긋 돌아보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표정을 푼 그녀가 어렴풋한 웃음을 머금고 아비시카와 함께 정원을 향해 앞장섰다.
“영애, 저는요! 저도 챙겨 주십시오!”
아르망은 섭섭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더니 벌써 저만치 멀어진 두 사람을 쫓아 발걸음을 빨리했다. 순식간에 에드윈과 둘만 남겨지게 된 게오르크는 잠시간 황망한 얼굴을 했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려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
에드윈은 게오르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복도에 난 창을 향해 있었다.
창문 너머로,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레이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비시카와 아르망이 서로 질색하는 얼굴로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고, 그때마다 레이린은 잔웃음을 터트리며 그들을 만류했다.
에드윈은 그 움직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새겨 넣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숨조차 멈춘 채 서 있었다.
“......달라지셨군요.”
기이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게오르크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에드윈이 눈을 한 번 깜박이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볼 때면 늘 완고한 얼굴을 하던 게오르크가 웃고 있었다. 에드윈은 그 웃음에 본능적인 불안을 느끼고는 미간을 설핏 일그러트렸다.
“......무슨 뜻입니까.”
“좋은 방향으로 달라지셨다는 말입니다.”
게오르크는 창밖에서 환한 얼굴로 재잘대는 아비시카를 부드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간 제가 영주님께 꽤 무례했지요.”
“.......”
“변명에 가까운 말이기는 하지만, 선대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게오르크는 이제는 어렴풋한 추억이 되어 버린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게오르크.’
따사로운 갈색의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처럼 선명한 푸른색의 눈을 지녔던 전 영주.
‘나는 내 아이가, 완벽한 군주보다는 어설픈 사람이었으면 해.’
그의 오랜 친구이자 주군이었던 이는, 명을 달리하기 얼마 전 안토니아 저택을 찾았을 때 그리 말했었다.
‘만약 내가 없다면....... 자네가 에드윈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줬으면 좋겠네.’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는 제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했던 것 같다.
데미안 클로비스는 그 말을 남기고 정확히 사흘 뒤, 가족과 함께한 나들이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작별 인사를 할 시간도 없이 떠나 버렸기 때문일까. 게오르크는 자신이 친우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과할 만큼 에드윈에게 날을 세웠던 것을 겸허히 인정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니 이어지는 행동들은 더없이 쉬웠다.
에드윈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어 보인 게오르크가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저의 이름은 게오르크 안토니아.”
흐르는 시간은 인간의 힘으로 잡을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낙엽이 흩날리고 새순이 돋듯,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추억을 놓아주고 현재를 살아가야 할 때였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께 충성할 것을 맹세하니.”
“.......”
“부디 영원한 영광을 누리소서, 나의 주인이시여.”
비로소 오롯한 신하의 위치로 돌아온 게오르크는 제 앞의 ‘영주’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