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87)

* * *

추락의 계절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사람들은 살을 에는 추위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가게 문을 열고 부산하게 일을 시작했다.

베아트리스 힐데트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레이린의 손을 잡아당겼다.

“저기요! 저쪽도 가 봐요, 레이린 님!”

그에 베아트리스의 곁에 서 있던 헤일리가 제 동생을 나무랐다.

“베스. 우리는 지금 일을 하러 나온 거지 놀러 나온 게 아니야. 본분을 잊지 마라.”

“치. 누가 놀기만 한다고 했어? 일도 제대로 하면서 겸사겸사 기분 전환도 하자는 게 뭐가 어때서? 그렇죠, 레이린 님?”

“레이린 님을 곤란하게 만들면 안 되지.”

“내가 뭘 어쨌다고!”

졸지에 두 자매의 사이에 끼게 된 레이린은 그저 모호한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후드 자락 아래로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한 거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아르망 선배님은 괜찮으시려나.’

레이린은 오늘 아침,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를 배웅하던 아르망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라도, 행복해라.......’

본래는 아르망도 힐데트 자매와 함께 거리 시찰에 나서기로 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처리해야 할 서류가 밀려 들어온 탓에, 그는 부득이하게 에드윈과 함께 저택에 남아야 했다.

‘잘 다녀오고, 잘 챙겨 먹고, 모르는 사람이 뭐 사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내 선물 사 오고.......’

떠나기 직전까지도 미련이 그득한 눈으로 중얼대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잔웃음이 터져 나왔다.

레이린은 이내 차분함을 되찾은 힐데트 자매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업무에 착수했다. 축제에 필요한 물품들의 가격을 확인하고, 물품 조달 일정에 관한 일을 상의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업무를 모두 마무리 짓고 나서야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레이린은 서류를 잘 갈무리해 품에 넣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카라스테 상단주’의 모습에서 본래의 무구한 모습으로 돌아온 두 자매가 싱긋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레이린 님께서도 종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녁은 저희가 대접할게요! 근처에 잘 아는 식당이 있는데, 거기로 가도 괜찮을까요?”

환한 웃음을 머금은 베아트리스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물었다. 레이린은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퍼뜩 아르망의 말을 상기해 내고는 행동을 멈추었다.

“식당 위치를 알려 주시면 뒤따라가겠습니다. 사야 할 선물이 있어서요.”

레이린은 말을 내뱉고서 아르망이 무엇을 좋아할지 고민했다. 과자? 펜? 아니면 의복? 사실 서류만 아니라면 뭐든 쌍수를 들고 반길 것 같긴 한데.

레이린이 수중에 있는 돈을 가늠해 보던 차.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던 베아트리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양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축제 첫날이 영주님의 생일이었네요.”

“......네?”

레이린은 진심으로 놀란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외려 당황한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선물이라고 하시길래....... 저는 영주님의 생일을 준비하신다는 말씀이신 줄 알았어요. 아니었다면 죄송합니다.”

“아.......”

레이린은 그제야 자신이 과한 반응을 내비쳤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습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저택에서는 그런 기미가 없어서 모르고 있었거든요.”

“영주님께서는 5년 전 영주의 자리에 오르셨을 때부터 생일을 챙기지 않고 계십니다. 워낙 강경하시다 보니 클로비스 저택의 사용인들도 포기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레이린은 헤일리의 첨언에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이내 자매를 먼저 식당으로 보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선물....... 챙겨도 되려나.’

연한 회갈색의 눈에 복잡한 기색이 스몄다.

파티를 여는 것도 아니고, 사용인들의 챙김마저 거부한다면 제 선물도 그리 탐탁잖게 여길 가능성이 컸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맞는 생일일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이 든 순간,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발을 우뚝 멈췄다. 무언가 익숙한 형태가 스쳐 지나간 듯해 고개를 돌리자, 가판대 위에서 나란히 빛나고 있는 팔찌들이 눈에 들어왔다.

‘팔찌라.’

레이린은 후드 자락에 가려진 발목께를 힐긋 일별하고는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에드윈이 제게 선물해 주었던 것과 놀랍도록 흡사한 형태의 팔찌.

“.......”

레이린은 애써 시선을 떼어 내고 아르망의 선물을 사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결국, 거리의 끝에 다다른 레이린의 손에는 아르망을 위한 만년필, 루시를 위한 책갈피, 그리고 에드윈을 위한 팔찌가 얌전히 들려 있었다.

‘여차하면 생일이 아닌 날에 전해 주면 되니까.......’

레이린은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팔찌는 품 안 깊숙이 갈무리하고, 아르망과 루시의 선물을 손에 든 그녀가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툭!

“아......!”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이와 레이린의 어깨가 부딪혔다. 옅은 신음을 흘린 여인이 품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떨어트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당황한 기색의 여인이 꽃다발을 주우려는 듯 얼른 몸을 낮추었다. 레이린은 상념에 잠겨 미처 주위를 살피지 못한 자신을 책하며 꽃다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뇨, 이건 제 실수-”

그 순간.

“그대가 할 일은 끝났다.”

부지불식간에 레이린의 소매를 잡아챈 여인이 후드 아래로 음산한 속삭임을 흘렸다. 후드의 그림자 아래로 기이하리만치 선명한 자색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니 이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도 좋아.”

“무슨.......”

“그분의 전언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은 레이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멀어졌다. 바닥에 볼품없이 흩어진 꽃다발만이 조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

레이린은 한동안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 꽃송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어? 생각보다 늦었-”

“선물이요. 루시한테도 좀 전해 주세요.”

저택으로 돌아온 레이린은 저를 보며 반색하는 아르망에게 손에 든 것들을 모조리 떠넘기고는 곧장 방에 틀어박혔다. 가슴이 답답해 창문을 활짝 열자 서늘한 밤바람이 느릿느릿 기어들어 왔다. 몇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레이린이 발을 옮겨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왜? 어째서? 대체 이드리스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전언을 보낸 것인가.

분명 녹스에서 받아 보았던 계약서에는 명확한 기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의뢰인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인정될 시’ 철수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긴 했지만. 그가 저를 통해 이뤄낸 것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쾅!

“젠장.......”

레이린은 주먹을 말아쥐고는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더욱 초조한 심정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술을 거칠게 짓씹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깊게 호흡을 고를 때마다 당혹감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에 따라 생각의 속도와 범위 또한 향상되었다.

레이린은 어느덧 냉정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엷은 회갈색의 눈에 테이블 위로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들이 비쳤다.

‘녹스에 연락을 넣는 것.’

레이린은 녹스 소속의 길드원이었고, 계약의 주체는 이드리스와 ‘녹스’였다. 그러니 현재 상황과 계약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리라.

결정을 마친 레이린은 지체 않고 걸음을 옮겼다. 책상 앞에 선 그녀가 엉망으로 쌓여 있는 종이를 손등으로 아무렇지 않게 밀어 버렸다. 그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종이 무더기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깔끔해진 책상 위로 편지지를 펼친 레이린은 펜을 집어 들고 그 끝에 잉크를 묻혔다. 맨 위에는 라그나르의 이름을, 그 밑으로 이드리스의 전언과 함께 계약서의 사본을 보내 줄 수 있겠느냐는 물음을 빠르게 적어 내렸다.

레이린이 편지를 마무리하기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평소보다도 조금 더 흐트러진 글씨체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편지의 끝에 뒤늦게 라그나르와 키안의 안부를 물은 레이린이 펜을 내려놓았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편지를 넣을 봉투를 찾는데, 문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한차례 크게 불어 닥쳤다.

“아.”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바람으로 인해 편지 봉투가 크게 펄럭이며 예리하게 손끝을 스치고 지나가 상처가 생겼다. 시선을 내리자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던 붉은 핏방울이 편지지 위로 굴러떨어졌다.

톡-

희미한 소음을 자아낸 핏방울이 라그나르의 이름 위로 스멀스멀 번져 갔다. 그 광경이 어딘지 섬뜩했던 탓에, 레이린은 편지를 다시 쓸 생각도 하지도 못한 채 한참이나 그것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 * *

바스락-

“......?”

라그나르는 열린 창 너머로 들려오는 기척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밤하늘을 배경으로 비치는 것이라고는 음산한 나무 그림자뿐인 듯 보였다.

“.......”

라그나르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로 창밖을 내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옆에 놓인 책상에서 기계적으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키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딜 가십니까? 아가씨께 말씀드리기 전에 도로 앉으십시오. 이것들 전부 오늘 안으로 처리해야 하는.......”

“키안.”

라그나르는 드물게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키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있음을 직감한 키안이 반사적으로 품 안의 비수에 손을 가져갔다.

“애들 부를까요?”

연한 갈색의 눈이 싸늘한 빛을 띠었다. 그의 주변 공기가 살기로 인해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라그나르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짧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예?”

키안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라그나르는 그런 그를 돌아보며 심술궂게 미소 지었다.

“그냥 산책이나 하려고 일어났다는 소리야.”

“안 됩......!”

“아, 몰라. 자꾸 그러면 나 진짜 한 일주일 가출해 버린다? 동트기 전에는 돌아올 테니까 넌 일해.”

짜증스럽게 귀를 후빈 라그나르는 키안이 무어라 말을 보태기 전에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대번에 몸을 일으킨 키안이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뒤통수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저 당장 사표 쓸 겁니다!”

“가져오는 족족 찢어 버릴 테니까 괜히 기운 빼지 마라-!”

“아, 진짜, 돌았습니까! 왜 일은 자기가 벌여 놓고 수습은 나한테 시킵니까! 내가 어쩌자고 저 인간 밑에 들어와서!”

키안이 끝끝내 울분에 찬 목소리를 내며 모노클을 벗어 던졌다. 하지만 라그나르는 이미 희미해져 버린 대답처럼 진즉 모습을 감춘 이후였다.

한동안 집무실 문을 발로 차며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던 키안은 이내 모노클을 집어 먼지를 털어 내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여기서 더 붙잡고 있다간 라그나르가 정말 도망쳐 버릴 것을 알기에 체념한 것이었다. 라그나르가 영주의 자리에 오른 뒤로 이런 상황이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 슬슬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래도 언제까지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잘 지키시는 편이니까....... 다음에는 꼭 아가씨께 고발해야지.’

불쌍한 우리 아가씨, 저런 게 형제라니. 속으로 라그나르를 욕한 키안은 울적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펜을 집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키안의 모습을 두고 ‘호구’라고 칭했을 라그나르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현재 키안의 곁에 없었다.

쏴아아-

밤바람에 나무가 몸을 흔드는 소리가 꼭 물살이 이는 소리처럼 들렸다.

브리어스 저택의 후원은 정비를 마치고 새 주인이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을씨년스러웠다. 기실 녹스 정도의 재력이라면 저택의 정원과 후원을 모두 금으로 도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이유는 곧 추락의 계절이 찾아온다는 데에 있었다. 기껏 정성스레 관리해 놓아 봤자, 곧 새하얀 죽음이 들이닥쳐 모든 초록을 앗아갈 것이기 때문에.

“.......”

라그나르는 새까만 어둠에 잠긴 후원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집무실 창문 너머로 보였던 나무 아래까지 다가간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라그나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힌 채 메마른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어둠에 먹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앙상한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검은색의 리본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라그나르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몸을 돌렸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기어들어 왔다는 건, 죽여달라는 뜻인가?”

천진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을 한 그의 손에는 어느새 예리하게 날이 선 단검이 들려 있었다.

후원에 잠시간 정적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이내 나무 그림자에 몸을 감추고 있던 이가 항복 자세를 취한 채 걸어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자락을 두른 탓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밖에 보이지 않는 이가 지독히도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진정하시죠. 그저 전할 말이 있어 찾아온-”

“네가 지금 여기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야.”

하지만 라그나르는 그의 말을 칼같이 끊어 내며 고개를 기울여 웃었다.

“하나. ‘죄송합니다, 다시는 함부로 기어들어 오지 않겠습니다’라고 정중히 사과하고 아는 걸 전부 털어놓거나.”

“.......”

“그게 싫으면 둘. 바로 뒈지거나.”

“.......”

“뭐해? 골라.”

라그나르는 선택지 같지 않은 선택지를 건네고는 자애롭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연한 청회색의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산들거리며 흩날리는 모습이 퍽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눈까지 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던지라,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에서는 일견 광기마저 엿보였다.

상대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남은 것은 침묵이었다.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해 보려던 라그나르는 약 5초도 되지 않아 저답지 않은 짓을 집어치웠다.

속으로 다섯을 세고 저놈의 팔다리를 잘라 내겠다고 결정한 그가 입 모양으로 수를 읊조렸다. 하나, 다섯.

“당신이 그토록 끔찍이 여기는 브리어스 양과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단검을 고쳐 쥐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뭐?”

라그나르를 저도 모르게 반문부터 내뱉고는 제풀에 놀라 흠칫 입을 닫았다. 그사이, 상대는 얄밉게도 침착한 태도로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국왕이 브리어스 양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라그나르는 소리 없이 실소했다.

국왕이, 바로크 드 루에이리가, 레이린을 노린다고. 그 빌어먹을 핏줄이 한 번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도, 레이린의 목숨을, 노린다고.

갈 곳 잃은 분노와 살기가 그의 속을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미친 사람처럼 실소하다가 불시에 표정을 뒤바꾼 라그나르가 빠득, 이를 갈았다.

“왜?”

애초에 답을 기대하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한 박자 느리게 상대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건.”

정말이지 우습게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한순간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여 온몸의 감각이 귀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몰랐다.

단검을 쥔 손에서 힘이 약간 빠져나가는 것도, 등 뒤로 이는 바람에 사람의 발소리가 섞여 있었던 것도.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합니다.”

천연덕스러운 답과 함께, 머리가 아릴 정도로 단 향에 절은 손수건이 그의 입과 코를 틀어막을 때까지도 그랬다.

“......!”

라그나르는 제 코와 입을 거칠게 틀어막는 손길에 본능적으로 단검을 쥔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새 뻗어진 열 개 남짓의 손들이 그의 사지를 단단히 결박하고 있었다.

‘제기랄, 키안......!’

그는 어떻게든 몸부림치며 키안에게 이 상황을 알리려 했으나 주위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그것이 의아해 눈을 굴리니 어느덧 저택과 후원을 분리하고 있는 회색빛 결계가 보였다. 무의식중에 숨을 들이쉬자마자 코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향에 머리가 빙글 돌았다. 라그나르는 그 상황에서조차 천 아래로 사납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대화는.......”

지랄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소리 없이 시야가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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