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레이린은 어둑한 밤, 말 한 필을 이끌고 유스티아를 떠나는 엘빈을 조용히 배웅하러 나왔다.
“하여간 너도 참 너다. 다른 사람들이 유난 떨까 봐 일부러 이 시간에 출발하는 건데 이걸 따라 나오냐.”
엘빈은 성문을 지나쳐 나와 말 위에 훌쩍 올라타며 투덜거렸다. 말의 안장에 연결되어 있는 등불의 빛이 새까만 어둠에 먹힌 황야를 향해 멀리 퍼져 나갔다. 레이린은 말에 올라앉은 엘빈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유난 떨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안심해.”
“그렇다고 그렇게 칼같이 거절하면 나 상처받거든?”
이번에는 퍽 진심이 담긴 음성이었다. 그에 작게 웃던 레이린이 표정을 가라앉히며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부탁이 있어.”
“와. 내가 패를 줄 때는 이런 귀한 걸 어떻게 받냐면서 망설이더니, 받고 나니까 이렇게 바로 부려 먹는다 이거지?”
“신의 분노 이전의 기록을 찾을 수 있을까?”
“뭐?”
레이린의 가라앉은 얼굴을 풀어 주려는 듯 연신 장난스러운 대꾸만 반복하던 엘빈이 놀란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어둑한 회갈색의 눈은 어둠 속에서 또렷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야. 신의 분노 이전에 관한 기록이라면 뭐든 상관없으니 한번 찾아봐 줘.”
엘빈은 레이린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만약 뭔가를 찾아내면 네가 방에 있을 시간에 맞춰서 전달하라고 일러둘게.”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뭔데?”
“이드리스 프리조프 밑에 있는 주술사에 대해서 알아봐 줘.”
“뭐?”
이번에야말로 엘빈을 확실히 놀라게 하는 데 성공한 듯싶었다. 레이린은 경악으로 몸집을 키운 붉은색의 눈을 바라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름은 에벤. 켈레마 촌장의 제자로 있다가 자취를 감췄다고 알고 있어. 지금은 이드리스 프리조프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고.”
“잠깐, 잠깐만.”
빠르게 쏟아지는 말에 엘빈이 혼란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던 혼란이 목소리로 옮겨 간 것처럼, 평소에는 더없이 가볍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켈레마를 떠난 ‘주술사’가 있다고? 루비도 없을 텐데 어떻게......?”
“내가 말하고 싶은 게 그 부분이야. 일전에 에르치니아 사람들과 함께했던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오브리 샌더슨 경의 일도 그렇고. 루비 없이도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레이린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엘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만약 루비가 없더라도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언제고 목을 꿰뚫을지 모른다는 상태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니까.
깊이 가라앉은 눈을 한 엘빈이 레이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돌아가자마자 조사 시작할게.”
만약 레이린의 말처럼 루비 없이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헤르기아스 전체를 들썩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검의 양날처럼, 사람들이 주술사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경배와 두려움으로 나뉘어 있었다. 지금껏 주술사들이 순수한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왕가의 법과 켈레마 내부의 규율로 인해 주술사의 움직임과 활동이 투명하고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주술사들이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주술은 사람들의 삶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만 사용될 것이라는 믿음. 만일 그 믿음이 깨어진다면....... 이것이 얼마만큼의 혼란으로 번질지 차마 예측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통제가 사라진 ‘다름’은 곧 ‘위험’으로 취급되고 마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었으므로.
엘빈은 애써 제가 받은 충격을 수습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레이린은 정신없이 생각에 빠져 있는 엘빈의 얼굴을 찬찬히 눈에 그려 넣다가, 이내 웃었다.
“너한테는 늘 부담만 지우는 것 같아서 미안해, 엘빈.”
“.......”
“그동안 고마웠어.”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머금는 레이린의 얼굴이.
‘그동안 고생 많았다, 엘빈 키스티엘.’
한순간 제 어깨를 두드리던 에드윈과 너무도 겹쳐 보여서. 엘빈은 의식할 새도 없이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예전, 불과 얼마 전과 같았다면 저 미소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겠지만.
“그래.”
태어날 때부터 서로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전의조차 일지 않았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바로 그렇기에 엘빈은 정말로 홀가분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렇듯 티 없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준다는 것도, 어쩌면 꽤 나쁜 기분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꽤 아름다운 이별 아닌가. 자고로 구질구질하게 질척이는 것보다 아련하게 상대방을 보내 주는 모습이 더 마음에 남는 법.
장하다, 엘빈 키스티엘! 엘빈이 속으로 자화자찬하며 뿌듯하게 미소 짓는, 아니, 미소 지으려던 찰나였다.
“참 행복해 보이시네요, 엘빈 경.”
지나치게 다정한 나머지 소름이 돋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결코 이런 순수한 호의를 내보이지 않을 것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루나가 등불보다도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신발을 벗어 손에 쥐었다.
“린이 말 안 해 줬으면 나는 배웅도 못했겠네? 와아, 나는 친구도 아니었나 봐.”
해사하기 그지없는 웃음과 발랄한 어조의 말에 등줄기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망했군. 쯧쯧 혀를 찬 레이린은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창백한 얼굴의 엘빈이 안장 위에서 상체를 뒤로 주춤주춤 물렸다.
“잠깐, 루나. 일단 그거 내려놓고 진정-”
“진정은 무슨 얼어 죽을. 너 거기서 딱 기다려.”
“늦었다! 이만 가 볼게!”
“야! 너 거기 안 서! 이 사랑에 미쳤다는 말로도 포장 안 될 쓰레기야!”
루나는 재빨리 말을 몰아 달아나는 엘빈의 뒤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신발을 내던졌다.
레이린은 그 소란을 지켜보며, 엘빈은 마지막까지도 한결같다는 소소한 감상을 내비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 * *
언제나 말갛게 웃으며 돌아다니던 엘빈이 사라지자, 클로비스 저택의 사람들은 한동안 침울한 분위기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오히려 조용해서 좋다는 말로 애써 그리움을 떨쳐 내고는 일상을 영위하는 데 힘썼다. 지금껏 늘 그래왔듯, 그들은 슬픔과 그리움을 한쪽에 묻어 두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나름 엘빈의 ‘친구’였던 레이린 또한 이따금 묘한 공허함에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현실에 충실했다.
그렇게 며칠 후. 일을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무사히 라이푸르 성에 도착했다는 엘빈의 쪽지를 불에 태우며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한 달.’
추락의 계절이 시작되기까지, 어느덧 한 달에 가까운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꿈속에 등장했던 풍경이 되기까지는 그보다 조금 더 남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개 추락의 계절이 시작되고 2주 안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넉넉하다고 칭할 만한 시간은 되지 못했다. 이미 예상하지 못한, 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여러 번 벌어진 상태였으니, 어쩌면 그보다 빨라질지도 모를 일이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신의 분노 이전의 기록을 찾는 일이다.’
마티아스의 주술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레이린 아제트리아’의 신분으로는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금빛 인간’과 왕가에 관련된 정보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으는 것뿐.
레이린은 그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어디냐는 생각으로 방을 나섰다. 목적지는 본채 4층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일전에 도서관 전체를 뒤엎다시피 뒤졌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긴 했으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모든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겨 넣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자신이 놓친 문장이나 단어가 있을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택 주위를 순찰하던 기사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레이린은 본채에 들어섰다. 빠르게 발을 움직여 이윽고 4층에 다다랐을 무렵.
“......아제트리아 양?”
우연하게도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있던 에드윈과 마주쳤다.
“영주님?”
레이린은 에드윈의 모습을 발견함과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기사단의 훈련이 이루어질 시간도 아니었고, 에드윈은 평소 기사단의 훈련을 제외하고는 집무실과 제 방을 제외한 곳을 나다니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그런 그가 이 시간에 바깥을 나서려는 듯 보였으니 놀랄 수밖에.
레이린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박였다.
“어디 가야 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아뇨. 잠시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 연무장에 가려고 했습니다. 아제트리아 양께서는 무슨 용무이십니까.”
에드윈 또한 이 시간에 본채로 돌아온 레이린이 의아하다는 듯한 눈으로 되물었다. 그 물음에,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레이린은 선뜻 답을 내뱉었다.
“도서관에 가 보려던 참이었어요.”
에드윈은 그녀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하지만 곧이어 낮고도 차분한 목소리가 복도를 잔잔히 울렸다.
“찾아야 할 책이 있는 거라면 제가 돕겠습니다. 무슨 책을 찾는 것인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레이린은 그 말에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는 아, 하며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에드윈 또한 제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이곳의 주인이었다. 외부인인 자신보다는 기록이나 서적 등을 세밀히 파악하고 있을 법한 존재. 레이린은 그 사실을 이제야 상기해낸 스스로의 한심함에 탄식했다.
‘차라리 물어보는 게 빠를 수도 있겠네.’
레이린은 그리 결론 내리자마자 입을 열었다.
“신의 분노 이전의 기록을 찾고 있습니다. 혹시 도서관 내에 관련 기록이나 서적이 없을까요?”
그 말을 들은 에드윈은 잠시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애드윈은 레이린이 그 시선에 의아해할 때쯤이 되고 나서야 천천히 답을 돌려주었다.
“......아마 4층의 도서관에는 없을 겁니다.”
어딘지 평소보다 느릿한 어조의 말이었다.
레이린은 에드윈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답에 내심 실망했다가, 직후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는 설핏 미간을 좁혔다.
‘도서관에는?’
도서관‘에는’ 없다면, 다른 곳에는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4층에 있는 도서관 말고 달리 도서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던데.
‘무슨 뜻이지.’
에드윈은 레이린의 머릿속에서 불어나는 의문들을 읽은 것처럼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영주의 개인 서고에는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 서고요?”
“예.”
레이린은 그리 되물으며 반사적으로 그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지나치게 망설임이 없는 동작이었던지라,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는 레이린을 이끌어 계단을 오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채의 6층에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서고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5년 전, 영주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한 번 들렀던 것이 전부라 확신은 못 하겠지만.”
이윽고 에드윈은 6층의 복도 끝,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지닌 남자의 초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그 초상화에 시선을 빼앗겼다.
초상화 속의 남자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예복을 갖춰 입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모습이었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 때문인지 그림은 전체적으로 유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레이린은 자신이 왜 시선을 빼앗겼는지도 모른 채로 홀린 듯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사이, 에드윈이 액자의 아래쪽 어딘가를 건드리자 액자가 서서히 옆으로 움직이며 서고의 입구가 드러났다. 레이린은 그제야 남자의 눈 색이 에드윈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어가시죠.”
에드윈은 그 모든 것을 모른다는 양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내며 서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레이린이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등 뒤로 액자가 움직이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고 안은 숨겨져 있는 공간치고는 꽤 넓고 높았다. 물론 4층의 도서관에 비해서는 한없이 작은 크기였지만, 몇 개의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서류와 책들은 하나같이 새것처럼 깨끗했다.
레이린은 에드윈의 손을 놓고 주술석들이 내는 빛에 의존해 서고 안을 둘러보았다. 에드윈 또한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 서가에 꽂힌 서류와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레이린은 금박으로 연도와 이름이 적혀 있는 책등을 손끝으로 쓸며 안쪽으로 움직였다.
‘클로비스 가문에 대한 기록인가.......’
레이린은 역대 가주들의 이름을 눈으로 훑다가 말고 문득 걸음을 멈췄다. 가주들의 기록 중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책 위에서 손가락이 멈춰 섰다.
「 데미안 클로비스 」
“.......”
레이린은 서고의 입구를 가리고 있던 초상화를 잠시 떠올렸다가, 이내 표정을 말끔히 지워 내고는 발을 움직였다. 에드윈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구태여 그것을 들추어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 또한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도 않았으니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레이린은 가주들에 관한 기록을 지나, 죄 기밀인 듯 보이는 서류와 책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신의 분노 이전에 대한 기록, 혹은 루에이리 왕가에 대한 기록이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영 쉽지 않았다.
‘......정말 하나씩 다 찾아봐야 하나.’
아무래도 이곳은 클로비스 가주들의 기밀 서류와 자료를 보관해 놓는 공간인 듯 보였다. 사실 유스티아는 애초부터 루에이리 왕가와 동떨어져 홀로 세를 키운 도시였으니 그럴 만하겠다 싶긴 했다.
엘빈의 연락을 기다리는 편이 현명하겠지. 레이린이 그런 생각을 하며 에드윈을 부르기 위해 막 몸을 돌리던 차였다.
“......!”
레이린은 어느새 제 뒤에 다가와 있는 에드윈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드물게도 당황한 그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그가 곧장 손을 뻗어 팔을 붙들었다.
“......놀랐잖아.”
레이린은 당황한 탓에 제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한숨을 삼켰다. 에드윈이 푸른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느릿느릿 손을 떼어 냈다.
“아무래도 이곳에는 당신이 원하는 자료가 없는 듯해 나가자는 말을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레이린은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웃었다.
“반대쪽도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짐작하긴 했어요. 그럼 이만 나갈까요?”
가볍게 웃어 보인 그녀가 비좁은 책장 사이를 벗어나기 위해 발을 떼던 순간.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미안합니다.”
“네?”
레이린은 일순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야에 담긴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미미한 자책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기껏 이곳까지 걸음 하게 했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잖습니까.”
에드윈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레이린은 그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한숨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움직였다.
“에드.”
생소한 부름에 에드윈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를 주시하고 있던 레이린의 눈에는 그 동요가 선명히 비쳤다. 그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레이린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서서 손을 뻗었다.
“정 그렇게 미안하면.”
레이린은 결 좋은 흑발을 손끝으로 흘려보내며 나직이 속살거렸다.
“......다른 방법으로 보답해도 좋아.”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던 손가락이 스치듯 내려와 그의 귓가를 은근하게 만지작거렸다. 레이린은 보란 듯 눈을 휘었고, 새파란 눈이 상대의 눈에 떠오른 감정을 읽어낸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하.......”
곧장 벌어진 두 입 사이로 더운 숨이 흩어졌다. 하지만 이내 입 안을 침범하는 살덩이에 그 좁은 틈새마저 남김없이 집어 삼켜졌다.
레이린은 입술이 닿는 즉시 양팔을 뻗어 에드윈의 목에 둘렀다. 에드윈은 그에 호응해 입을 벌리며 고개를 살짝 틀고는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안아 들었다.
레이린이 반사적으로 에드윈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치맛자락이 쓸려 올라가며 맨다리가 드러났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얇은 천이 한 겹 사라지자 열기가 더욱 선명히 느껴졌다. 에드윈은 홧홧할 만큼 선연한 체온에 목 안쪽으로 긁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한 손으로 레이린의 뒷목을 감싸 끌어당긴 그가 그녀의 입술을 잘근 깨물자 젖은 살덩이가 마찰하며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흣.”
레이린은 어느덧 책장과 에드윈의 사이에 갇힌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몰아치는 열락에 머리가 온통 어떻게 되어 버린 것 같아 그 사실을 미처 인지할 새도 없었다.
그녀는 나름 에드윈이 파고들 때마다 그의 호흡에 맞춰 따라가려고는 했으나 금세 한계가 찾아왔다. 나름대로 녹스 내에서도 체력이 좋은 편이라 평가받곤 했는데. 에드윈과 있을 때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체력은 경악스러웠다.
저 혼자만 힘들어하는 듯해 왠지 억울해진 레이린은 심술처럼 에드윈을 밀어냈다. 기실 호흡이 부족한 탓에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지만 그녀가 합리화하기로는 그랬다.
“에드. 잠깐, 만.......”
레이린은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숨을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신음과도 같은 숨소리에 섞여나온 부름은 그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더욱 자극했다.
새파란 눈에 언뜻 광기와도 같은 빛이 스쳐 지나가는 듯싶더니 불시에 고개를 내린 그가 레이린의 귓불을 잘근 깨물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귓가를 지분대는 소리가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아, 읏.......”
레이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허리를 휘며 에드윈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잡았다. 결 좋은 흑발 사이로 열이 오른 흰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그가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
열에 물든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 짤막한 탄식을 뱉은 에드윈이 낭패 어린 얼굴로 몸을 물리려던 차.
“......어딜 도망가.”
간신히 호흡을 고른 레이린이 제 다리로 에드윈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휘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레이린은 갑갑함에 손을 올려 목걸이를 풀어냈다.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찬란한 황금색으로 변모했다. 에드윈은 제 코앞까지 다가온 눈이 연한 회갈색에서 선명한 황금색으로 변하는 것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레이린은 이내 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코끝을 툭 부딪쳤다.
“괜찮으니까....... 아니, 좋으니까.”
“.......”
“계속해.”
그리 속삭인 그녀가 요사스럽다 칭해도 좋을 만큼 곱게 눈을 휘었다. 그 미소에 얇디얇게 늘어져 있던 이성이 툭 끊기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에드윈의 눈이 순식간에 희번득하게 변모한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몇 시간 후.
‘......내가 또 그러면 사람이 아니다.’
레이린은 입술을 포함해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