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87)

* * *

“어이, 뭐하는 거야! 그건 이쪽으로 치워야지!”

“아.”

적령의 길드원이 기겁하며 외친 말에, 부서진 테이블의 잔해를 들어 올리던 녹스의 길드원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걸음을 틀었다.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적령의 본부 안은 전투의 흔적을 지워 내고 주위를 정리하는 움직임으로 인해 수선스러웠다.

한쪽으로 물러서 있던 레이린은 실내 저편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알제리 베르누아의 눈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해 주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약 반나절 전, 루드위그의 서점에서 제압한 적령의 길드원을 통해 상황을 알게 된 후 얼마간 갈등했다.

녹스는 현재 윈프리드의 정식 수장이 된 라그나르로 인해 ‘브리어스 기사단’이라는 이름의 집단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정식으로 음지에서 벗어나게 된 이상 예전처럼 내키는 대로 법을 넘나드는 ‘길드’의 형태로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엘빈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녹스의 힘을 빌리자니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자칫해서 왕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윈프리드의 중앙 편입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레이린은 제 방으로 돌아와 라그나르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교묘하게 창틀에 끼어 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 아가씨, 키안입니다. 」

레이린은 쪽지를 펼치자마자 보이는 이름에 한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쪽지의 내용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 소식은 들었습니다. 수장님께서 이참에 그쪽에 빚이라도 지워둘 겸 밑에서 청소하던 애들 몇 명 보내드릴 테니 마음대로 부려 먹으라고 하시더군요. 애들은 오랜만에 몸 풀러 간다고 신났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레이린은 그 구절에서 반사적으로 황당한 얼굴을 했다가, 바로 밑에 적혀 있는 익숙한 글씨에 곧장 표정을 가라앉혔다.

「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린. 난 그거면 되니까. 」

영주가 되고 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평소보다 휘갈겨진 글씨였다.

그 짧은 문장에서조차 느껴지는 흔들림 없는 애정, 그리고 믿음에 찰나 목이 메어서. 레이린은 잠시간 쪽지 위로 얼굴을 파묻고 호흡을 골라야 했다.

‘......하여튼 거짓말만 늘어서.’

하지만 시답잖은 감상에 오래도록 젖어 있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을 깨끗하게 갈무리한 그녀는 잠시 외출하겠다는 쪽지를 남겨 놓은 후 곧장 유스티아를 떠났다. 성문을 벗어난 레이린은 자신을 기다리던 녹스의 길드원들과 함께 이곳, 적령의 본거지인 ‘라이푸르’ 성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상황이 모두 정리된 현재. 창 너머로는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어후. 계속 무릎 꿇고 있었더니 다리가 저리네.”

그때, 가벼운 투덜거림이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레이린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몸에 붕대를 휘감고, 얼굴 곳곳에 상처가 남은 얼굴의 엘빈이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에 사정없이 미간을 일그러트린 레이린이 엘빈의 허리를 꼬집자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악! 나 거기 다친 데야!”

“아니까 한 거야.”

“뭐? 네가 나 책임질 거야? 책임져줄 거면 더 만져도 돼.”

“헛소리 시작한 거 보니까 다 나았나 보네.”

픽 웃음을 흘린 레이린이 엘빈을 꼬집던 손을 거두었다.

엘빈은 붕대 위로 제 옆구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무어라 꿍얼거리더니 이내 불만을 갈무리했다. 그는 레이린의 옆에 쌓인 가구의 파편 위로 엉덩이를 붙이더니 그녀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야? 유스티아랑 꽤 거리가 있는 편일 텐데. 이제야 물어보는 것도 좀 웃기긴 한다만.”

레이린은 여전히 부산스럽게 길드 내부를 청소하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짤막하게 답했다.

“노아가 루드위그의 서점에 남겨 둔 길드원.”

“아하. 뒷정리하라고 남겨 둔 놈이었나 보네.”

엘빈은 그 짧은 답만으로도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돌연 팔꿈치로 레이린을 툭 쳤다.

“그런데 데이먼 브론테랑 알제리 베르누아 정도면 너무 거물 아니야? 몸값이 3천 골드가 넘는다고 알고 있는데....... 녹스의 허락은 받은 거지?”

엘빈은 한쪽에서 가구의 잔해를 나르고 있는 두 청년을 힐끔거리며 속닥거렸다. 그가 시선으로 가리킨 곳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두 청년이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데이먼. 이건 의자 다리겠지?”

“보면 모르냐, 멍청아. 아까 네가 부순 거잖아.”

“아하.”

“사실 내가 부쉈어.”

“뭐 이 새끼야?”

그들의 정체를 아는 적령의 길드원들이 상관을 앞에 둔 수하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의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엘빈 또한 ‘설마 네 월급을 다 털었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의심하는 얼굴로 레이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소리를 낸 그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말 안 했던가?”

엘빈은 그 말에 본능적인 불안함을 감지한 듯 수상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레이린은 그를 힐긋 일별하더니,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툭 말을 내뱉었다.

“내가 녹스 수장의 동생이라는 거.”

아주 잠깐의 정적 이후, 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버럭 고함쳤다.

“뭐라고!”

그 바람에 위태롭게 쌓여 있던 가구의 파편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주위를 정리하던 적령의 길드원들은 평소 차가운 태도를 고수하던 엘빈이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그 말을 뱉은 당사자인 레이린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뒤늦게 주위를 의식한 엘빈이 길드원들을 향해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물리친 그가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로 레이린을 보며 다다다 속삭였다.

“너! 너 왜 그걸 지금 말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야?”

“응.”

“너무하네, 진짜.......”

레이린의 단호한 대꾸에 엘빈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는 그 뒤로도 한동안 ‘맙소사’, ‘세상에’, ‘미친 거 아니야?’ 등의 말을 두서없이 내뱉다가 끝내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렇네.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라그나르 브리어스랑 너, 꽤 닮았구나.”

남매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면 모를까, 남매라는 사실을 인지한 후 두 사람의 얼굴을 나란히 놓고 생각하니 레이린과 라그나르는 퍽 닮은꼴의 얼굴이었다.

허탈한 웃음을 흘리던 엘빈이 돌연 몸을 돌려 레이린을 끌어안았다. 그에 그녀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뗐다.

“뭐하는 짓.......”

“레이린 브리어스.”

하지만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댄 엘빈이 푸스스 웃음을 흘리는 것이 먼저였다. 그 부름에 멈칫한 레이린이 말을 잃은 사이,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불러 보네.”

“.......”

그 말을 들은 레이린은 그를 떼어 내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가만히 말아쥐었다.

레이린을 끌어안은 채로, 그녀의 등 뒤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던 엘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난 이제 클로비스 기사단을 떠날 거야.”

비록 시작은 거짓이었지만, 지난 몇 년간 그들과 함께 쌓아온 세월과 감정은 오롯한 진실이었다. 아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늘 되뇌었음에도 마음 한쪽이 뻥 뚫린 듯 짙은 상실감이 찾아왔다.

“이제 적령을 이끌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정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엘빈이 레이린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며 몸을 바로 했다. 그는 옷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불꽃 모양이 음각된 직사각형의 패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받아.”

“......이게 뭔데?”

레이린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제 앞에 들이밀어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엘빈은 라그나르와 남매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의 레이린처럼,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답을 흘렸다.

“적령의 자유 이용권쯤 되려나.”

“뭐?”

레이린은 기겁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주위의 적령 길드원들을 의식해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미쳤냐’는 말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레이린이 물러난 만큼 다가간 엘빈이 그녀의 손에 금색 패를 쥐여 주고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웃었다.

“목숨값에 비하면 싼 거지. 아, 그거 루나한테는 보여 주지 마. 걔는 순금이라고 하면 바로 팔아치우려 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레이린은 여전히 망설였다. 제 손에 들린 자그마한 패가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엘빈이 ‘자유 이용권’이라는 표현을 써서 퍽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수장의 모든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사실상 또 다른 수장의 임명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패.

엘빈은 결국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레이린을 향해 가볍게 덧붙였다.

“친구잖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심장 부근을 묵직하게 죄이고 있던 형체 없는 사슬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엘빈은 전에 없이 홀가분한 기분으로, 레이린의 죄책감을 지워 내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

그 웃음을 본 레이린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결국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린과 엘빈은 동이 트기 전에 클로비스 저택으로 돌아왔다. 클로비스 기사단원들은 며칠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엘빈의 몰골에 한 번, 그의 손에 들린 사직서에 두 번 기겁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떤 미친 새끼야?”

“좋은 말로 할 때 그거 내려놔! 이건 장난이라면서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기사들은 저마다 분노, 혹은 당황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엘빈을 만류했다. 그러나 어딘지 후련해 보이는 미소를 띤 엘빈은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동안 저 같은 놈과 함께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나중에 놀러 오면 술이나 왕창 사 주세요, 선배님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엘빈은 씨익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몸짓에서 결심이 끝났음을 읽어낸 기사들은 저마다 복잡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단장 리오넬은 엘빈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그윽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너, 레이린 님께 차여서-”

“그런 거 아니니까 헛소리하지 마세요.”

“이제는 하극상이라고 화도 못 내겠네. 모른 척해 줄 테니까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아라.”

리오넬은 퍽 자애롭게 미소 지으며 그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엘빈 또한 장난스럽게(하지만 반쯤은 진심을 담아서)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엘빈은 이후 숙소에 두었던 제 짐을 대강 정리하고, 해가 뜨자마자 영주인 에드윈에게 찾아가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군.”

엘빈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사직서를 내려다보는 에드윈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무표정하게 사직서를 읽어내린 에드윈이 입을 열었다.

“사유는.”

그 물음 같지 않은 물음에 엘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답했다.

“연적을 주군으로 따를 만큼 속이 넓은 인간은 아니어서요.”

어차피 마지막이니 도발이나 한번 해 볼까 싶어 그리 내뱉었지만, 에드윈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엘빈은 이내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하며 제 말을 정정했다.

“......방금은 반쯤 농담이었고. 사실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제가 곧장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 물러나지 않았을 텐데, 아쉽군요.”

엘빈은 말을 마치며 일부러 짓궂게 눈을 찡긋거렸다. 이 정도는 심술 축에도 끼지 않았다.

그에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에드윈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 자리는 남겨 두겠다.”

예상치 못한 말에 엘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에드윈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에드윈은 그와 대조되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읊는 듯한 태도였다.

“돌아오고 싶다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

“.......”

“대신 그때는 적령이 아닌, 클로비스의 기사로서 돌아와라.”

그 말에 막을 새도 없이 붉은 눈이 부릅떠졌다.

‘무슨......!’

어떻게? 자신이 적령의 첩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왜? 아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두서없는 물음이 정신없이 머릿속을 휘저으며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하게 방해했다.

엘빈이 말을 잃고 얼어붙은 사이, 에드윈은 하염없이 흔들림 없는 태도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을 돌아 나온 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굳어 있는 엘빈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손을 뻗었다.

툭.

엘빈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린 에드윈이 담담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엘빈 키스티엘.”

그 말이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엘빈은 목 안쪽으로 울컥 치받는 이름 모를 감정에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가.

“......예, 주군.”

끝내는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구나, 그런 생각에 헛웃음을 지으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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