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촤아악-!
“커헉!”
엘빈은 제 얼굴 위로 쏟아지는 찬물에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번쩍 떴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에 물이 닿자 화상을 입은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다. 맞은편에 앉아 그 모습을 보던 노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조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참네?”
“.......”
엘빈은 고통으로 머리가 짓이겨지는 것 같은 감각에도 형형하게 눈을 치켜뜨며 노아를 노려보았다.
노아는 사지가 주술석으로 고정된 채,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넝마가 된 몸으로도 저를 노려보는 붉은 눈에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 제 손으로 죽인 아비,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빛깔의 저 눈. 저것만 아니었다면 적령의 후계자는 저였을 것이다.
‘고작 피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네 가치를 증명해내.’
어릴 적,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다가 적령의 길드장이라는 자가 제 친부임을 깨닫고 환희한 것도 잠시였다. 길드장 휴고는 적령의 본부에 다다르자마자 노아의 손을 차갑게 내치며 그렇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휴고는 애초에 제 피를 이은 누군가를 만들어 낼 생각이 없었다. 핏줄이라는 것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자 발목을 잡는 존재라는 것을, 살벌한 뒷골목을 헤치고 살아남으며 일찌감치 깨달은 덕이었다.
하여 적령의 심부름꾼 중 눈여겨보던 아이를 사생아인 척 양자로 들여 일찌감치 후계자로 세워 교육했다. 영리하고 눈치 빠른, 적령을 물려주어도 손색이 없을 쓸모 있는 아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제가 생겼을 시에는 언제든 갈아치워도 상관없는 아이. 휴고는 엘빈을 그렇게 키웠다. 그러던 중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창부가 뒤늦게 그의 아이라며 노아를 들이민 것이었다.
휴고는 처음에는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갈색인 것을 제외하고서는 자신과 너무도 똑 닮은 노아의 외양에 못 이겨 결국 그를 적령으로 데려왔다. 사실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 아이의 존재가 엘빈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겠거니 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알아서 살아남아. 만약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앞으로도 여기 머물게는 해 주지.’
휴고는 귀찮은 기색이 한가득 담긴 말만을 남기고는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노아는 제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떠나는 아비의 어깨 너머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뒷골목을 구르느라 꾀죄죄한 자신과는 다르게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새하얀 은발에, 휴고의 것과 꼭 같은 적안.
처음부터 어긋난 만남이었다.
엘빈은 길드장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을 버릴까 봐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노아는 휴고가 양자인 엘빈이 아닌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며 사지에 뛰어드는 것도 서슴지 않고 미친 듯 노력했다.
그러나 몇 년 전. 엘빈은 오랜 시간을 공들인 끝에 그리도 악명 높은 클로비스 기사단 내에 위화감 없이 스며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휴고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며 적령과 거래하는 이들 모두에게 엘빈을 다시금 후계자로 못 박았다.
‘하하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눈까지 나를 쏙 빼닮은 것이, 어디서 굴러먹다 왔을지 모를 핏줄보다 훨씬 낫군그래!’
노아는 휴고의 방문 앞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를 엿듣고는 말없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왜? 대체 무엇 때문에 반이나마 피가 이어진 자신은 안 되고, 일말의 관계조차 없는 엘빈은 된다는 말인가. 정작 아랫도리를 잘못 놀려 저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아비인 휴고일진대. 왜 그는 제 책임을 회피하며 모든 걸 ‘태어나버린’ 노아의 잘못인 양 떠넘기는지.
‘......아.’
참으로 역겨운 작자가 아니던가.
그날, 노아는 아버지인 휴고에게 인정받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 대신 휴고의 목숨을 앗아갈 계획을 세우기를 선택하고서 홀가분하게 웃었다.
사실 휴고가 두 사람을 달리 대하는 이유는 혈육이라는 사실이 아닌 ‘쓸모’와 ‘능력’에 기반해 있었지만, 노아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에게 남는 것은 추악한 열등감과 바꿀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무력감뿐이었으므로.
이윽고 광기 어린 웃음으로 상념을 털어 버린 노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짙은 피비린내 속, 한쪽 벽에 걸려 있던 예리한 검을 빼든 그가 칼끝으로 엘빈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루드위그는 나름 살날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라 곱게 보내 주고 싶었는데, 형님이 자꾸 이렇게 굴면 그러기 싫어지잖아.”
루드위그를 언급하자 지금껏 사납게 노아를 노려보던 붉은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노아는 여유로운 태도로 그 동요를 지켜보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날카로운 칼날이 엘빈의 턱 아래를 지그시 파고들었다.
“어차피 죽을 거, 그 영감까지 사지를 찢어 마물한테 던져 주기 전에 말하지 그래? 인장은 어디 있지?”
그래. 마음 같아서는 휴고와 함께 엘빈을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이렇듯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고 있는 이유는 그 하나뿐이었다.
휴고를 죽여 적령의 자금줄이 되는 사업들에 관한 서류는 모조리 빼돌렸지만, 그것의 명의를 노아 앞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적령의 인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인장은 후계자인 엘빈이 관리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그가 클로비스 기사단에 자리 잡는 데 성공해 제 가치를 확실히 증명해낸 이후부터.
“......전에도 말했지만.”
엘빈은 제 목 아래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태연함에 노아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구겨지자 만족스러운 비소를 머금은 그가 보란 듯 입매를 비틀었다.
“넌 늘 눈치가 없어.”
“......뭐?”
노아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지며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날이 목을 더 깊게 파고들며 입으로 핏줄기가 흘러나왔지만 엘빈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곳이 내가 발 뻗고 누워도 될 자리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지. 늘 분수에 맞지 않는 것만 탐하니 결국 마지막에 네 손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다, 노아.”
상황에 맞지 않게 적나라한 조롱에 찰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노아가 굳어졌다. 엘빈은 그 틈을 타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어차피 저 새끼는 인장을 찾을 때까지는 날 못 죽여.’
동시에 노아는, 엘빈을 협박하기 위한 인질인 루드위그 또한 죽이지 못한다. 이미 약간의 고문은 가한 듯해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노아 또한 루드위그에게 일정 정도 이상의 상해를 입혔다가는 엘빈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를 죽이지는 못할 터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엘빈이 달리 손쓰지 않아도 노아의 입지는 자연히 위태로워진다. 인장을 찾지 못한 노아는 그저 적령을 어지럽힌 반역자가 될 뿐이고, 길드의 존속에 불안감을 느낀 길드원들은 자연히 그간 후계자로서 신뢰를 쌓아온 엘빈을 지지하고 노아의 추방을 부르짖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엘빈은 아직 겉보기나마 멀쩡해야 한다.
‘......솔직히 이젠 좀 한계지만.’
엘빈은 진즉 흐릿해진 시야를 무시하며 애써 눈을 치켜떴다. 한시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개죽음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사이, 퍼뜩 정신을 차린 노아가 사납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이 개새끼가. 그러는 너야말로 지금 주제 파악이 안 돼서 이러는-”
욕지거리를 짓씹은 그가 엘빈의 턱에 걸쳐 놓았던 검을 위로 치켜올리려던 순간.
-콰앙!
멀리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엘빈과 노아의 고개가 방문을 향해 홱 돌아갔다.
“......자다!”
“막......!”
길드원들이 놀란 비명을 내지른 직후 다수의 인기척이 본부 안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조용하던 길드 내가 순식간에 비명과 고함, 날붙이가 맞부딪히며 내는 난잡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희미하던 소란이 점차 선명해지는 것을 느낀 엘빈이 가물가물한 시야를 떨쳐 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놈들이지.’
지금 같은 상황에 적령에 쳐들어왔다면, 혼란을 틈타 적령을 삼키려는 여타의 정보 길드일 확률이 가장 높긴 했다.
하지만 소란이 계속해서 가까워지자 그 가정은 점차 희미해졌다. 적령은 헤르기아스의 무수한 정보 길드 중에서도 단연 최상위의 무력을 자랑하는 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의 핵심 전력이 밀집해 있는 본거지에서 저 정도도 막아 내지 못하고 밀리고 있다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엘빈이 혼란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다.
“주군!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노아의 ‘그림자’를 이끄는 길드원이자 노아의 손발과도 같은 역할을 하던 심복이었다. 노아는 피투성이가 된 심복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성을 냈다.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
심복은 평소 같았으면 미친개처럼 구는 노아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말을 아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창백한 얼굴의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녹스입니다.”
그에 붉은 눈 두 쌍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커졌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작게 벌리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뭐?”
“데이먼 브론테, 알제리 베르누아의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녹스가 확실합니다.”
녹스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리던 살수들의 이름에 노아의 안색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비록 암암리에 그림자들의 왕이라 불리는 녹스이지만, 얼마 전 수장이 영주로 봉해진 이후로는 모든 의뢰를 일체 거절하며 칩거한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왜?’
바로 그때.
“하하하.”
녹스라는 이름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엘빈은 이 상황이 이해되자마자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
이제는 정말 포기하려고 했는데. 또다시 습관처럼 가망 없는 희망을 품는 자신이 한없이 우스웠고. 이 습격의 목적이 자신이라는 데에서 느끼는 희열과, 이런 일에조차 기뻐하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동시에 머릿속을 휘저었다.
엘빈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어깨까지 들썩였다.
그런 그를 해괴한 얼굴로 바라보던 노아의 머릿속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같잖은 벌레가 있었구나.’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저를 깔아보던 엷은 회갈색의 눈동자, 만지면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러질 것 같은 미소. 엘빈을 고문해 인장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잠시 잊고 있던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이 물밀 듯 밀려왔다.
‘......설마.’
설마, 설마.
머릿속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칩거를 깨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녹스. 클로비스에 숨어 있던 쥐새끼 같은 여자. 그 여자를 역겨운 눈으로 바라보던 엘빈까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노아가 빠득, 이를 갈며 엘빈을 돌아보았다. 엘빈은 기다렸다는 듯 그와 시선을 맞추며 더욱 화사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에 눈이 돌아간 노아가 아래로 늘어트려 놓았던 검을 세게 쥐었다.
“너 이 새끼......!”
그러나 그가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리기도 전.
푹-!
부지불식간에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에, 심복이 놀라 눈을 부릅뜨며 제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이, 게.......”
소리 없이 가슴을 꿰뚫은 은빛 검. 그 검이 일순 사라진 듯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생명을 잃은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 뒤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기껏해야 유스티아 근방이겠거니 했더니.”
조용한 탄식이 기이한 침묵 위로 내려앉았다.
그녀가 앞으로 뻗고 있던 손을 내렸다. 피가 튄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아래로 늘어트려지며 핏방울이 바닥 위로 똑,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눈가에 튄 핏자국을 닦아 낸 여인이 방 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귀찮게 멀리도 와 있었.......”
레이린은 한숨처럼 핀잔을 내뱉으려다가, 엘빈의 온몸을 뒤덮은 상처를 발견하고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닫았다. 다른 이들을 처리하느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방 안의 풍경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엘빈을 향해 검을 내리칠 듯한 자세로 굳어진 노아. 그리고 그런 노아의 뒤에, 주술석에 팔다리가 묶인 채 굴욕적인 자세로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엘빈.
엘빈의 넝마 같은 꼴을 응시하던 엷은 회갈색의 눈이 차츰 가라앉았다. 끝내 턱에 힘을 준 레이린이 노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레이린은 나직이 입을 열며 핏물이 흥건한 방 안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찰박, 작은 소음과 함께 신발이 핏물로 젖어 들었으나 이미 여러 사람의 피로 점철되어 있던지라 큰 차이는 없었다.
분노로 차게 식은 눈의 레이린이 검을 틀어쥐며 이를 악물었다.
“네가 그랬어?”
애초에 대답을 바란 물음은 아니었다. 단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살기가 얇아진 이성 틈으로 새어 나온 것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노아는 한순간 저를 찢어발기듯 덮치는 살기에 압도되어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에게는 멈췄던 숨을 잇고, 엘빈을 인질로 잡아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물음 끝에 곧장 땅을 박찬 레이린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허공을 반으로 가르는 검이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챙-!
“큭!”
노아는 가까스로 제때 팔을 움직여 공격을 막아 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대로 목이 베였으리라.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차마 여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힘 있는 공격이었다. 일순 손목이 저릿해질 정도로.
‘젠장, 젠장, 젠장......!’
왜! 대체 왜 매번 엘빈에게는 탈출할 구멍이 주어지는 건지. 정작 엘빈보다도 열악한 삶을 살아왔던 제게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노아는 속으로 몇 번이고 같은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정신없이 레이린의 공격을 막아 냈다. 말 그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막아 내는’ 것이 전부였다. 반격할 틈이 보이는가 싶으면 곧장 시야의 사각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할 수가 없었다.
‘너 같은 건 녹스에서 장난감 거리도 못 돼.’
불현듯 과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노아는 부득불 그 사실을 부정하며 팔을 휘둘렀다.
레이린이 몸을 낮추어 노아의 공격을 피하고는 그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가 검을 직각으로 세워 그것을 튕겨내자마자 반대쪽에서 단검이 목을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노아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며 몸을 틀었다. 그에 단검이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갔다. 예리한 날붙이가 남긴 상처에서 이는 따끔한 통증에 불쑥 기시감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노아는 또다시 제 얼굴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막아 내며 묘한 얼굴을 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공격이 같은 패턴인 것 같은데.
레이린은 금방이라도 목을 날릴 것처럼 매섭게 공격을 퍼붓다가도, 노아가 엘빈의 지척까지 밀려나면 공격의 기세를 조금 늦춰 틈을 보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세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차마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차이였지만 그조차도 분명 ‘차이’였다.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레이린을 살피던 노아는 다음 순간, 불현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저 새끼가 다칠까 봐 그러는 것 같은데.’
여유가 없어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악의가 다시금 스멀스멀 몸집을 부풀렸다. 생각을 마친 노아는 일부러 발을 뒤로 끌어당기며 몸을 기울였다. 중심을 잃은 그의 몸이 커다랗게 기울어졌다.
“큭!”
노아가 신음을 내뱉으며 휘청이자 레이린의 검이 반사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에 속으로 환희한 노아가 곧장 검 손잡이에 박혀 있던 주술석을 세게 움켜쥐었다.
파삭!
작게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엘빈과 레이린 사이에 있던 노아의 몸이 순식간에 방 저편으로 옮겨 갔다.
레이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검 끝은 목표물이 사라진 허공을 가로질러 곧장 엘빈을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을 본 노아가 악귀처럼 웃음 짓는 것과 동시에.
“멍청이.”
비릿한 웃음을 지은 레이린이 기다렸다는 듯 검의 방향을 틀었다.
쨍그랑-!
직후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엘빈의 사지를 구속하는 역할을 했던 주술석이 산산이 부서졌다. 노아가 경악성을 흘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
“무슨......!”
그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허공으로 흩어지는 붉은 보석의 파편은 환상이 아닌 실제였다.
레이린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공격을 반복해 노아의 착각을 유도했다. 마치, 자신이 이 싸움에 엘빈이 휘말릴 것을 걱정한다는 것처럼 보이도록. 실제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했다. 다만 레이린은 노아가 가지고 있는 악의를 높게 쳤을 뿐이다. 자신이 엘빈을 보호하려는 기색을 보이면, 노아는 반드시 제 손으로 엘빈을 해할 상황을 만들어 내려 할 것이라는, 그런 믿음. 그리고 노아는 우스우리만치 충실하게 그 믿음에 부응했다.
레이린이 조소를 머금으며 단검을 쥔 손을 아래로 늘어트릴 때였다.
“윽!”
레이린은 머리를 반으로 쪼개는듯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한쪽 귀를 막으며 비틀거렸다. 갑작스럽게 귓가에 이명이 일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찌잉,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한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바랬다. 그 틈을 타 흉악한 얼굴을 한 노아가 새빨간 눈으로 레이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너! 또 네가 다 망쳤-!”
피가 묻은 검이 둥그렇게 말린 등으로 내리쳐지려는 찰나.
푸욱.
살갗이 꿰뚫리며 자아내는 질척한 소음이 귓가에 달라붙었다.
“이 상황을 만들어 낸 건 너다, 노아.”
레이린이 건네주었던 단검으로 노아의 가슴을 꿰뚫은 엘빈이 덤덤히 일갈했다. 그 말에 멍하니 시선을 내린 노아는 제 가슴께에 꽂힌 단검을 눈에 담자마자 왈칵 피를 토해 냈다.
“커헉!”
챙-!
손에 쥔 검을 내던진 노아의 몸이 바람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레이린, 괜찮아?”
엘빈은 겁에 질린 듯 버둥거리며 벽 쪽으로 물러나는 노아를 힐긋 일별하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허리를 굽힌 채 숨을 몰아쉬던 레이린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진 통증에 불편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혔다.
‘......뭐였지, 또.’
주술석이 깨지는 순간. 조각난 파편들이 온통 머리를 찔러대는 것만 같은 감각에 이성이 날아가는 줄만 알았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 아직도 등줄기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수없이 그래왔듯, 이번에도 명확한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한층 저조해졌다.
이윽고 찬찬히 호흡을 고르며 몸을 편 그녀가 엘빈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굴 걱정해.”
레이린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쯧, 차자 엘빈은 대번에 펄쩍 뛰었다.
“뭐? 야, 나는 일부러 시간 끌려고 이러고 있었던 거거든?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는 이미 엉망인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제 억울함을 열변했다. 레이린은 그런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꺽, 커헉.......”
어느새 벽 바로 앞까지 물러난 노아가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는 레이린의 시선이 제게 닿아 오자 파드득 경기하며 발악했다.
“오지 마! 오지 말, 라고!”
레이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노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꿈에서보다 훨씬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울부짖듯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조소할 수가 없었다.
제 선택이 노아를 저렇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지금껏 그토록 끔찍해 마지않았던 운명에 망설임 없이 손을 보탰다. 상대가 노아 키스티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이 지독히도 위선적이어서, 스스로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 다시금 확인받는 듯해 마냥 홀가분해할 수가 없었다.
“보지 마.”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부드러운 손길이 레이린의 볼을 감쌌다. 레이린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린 엘빈이 설핏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네 탓이 아니야.”
“.......”
“네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언제고 이렇게 됐을 거고, 너는 노아를 죽인 게 아니라.......”
레이린과 이마를 툭, 맞댄 엘빈이 서글프게 읊조렸다.
“나를 살린 거야.”
그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왜인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목이 메었다.
레이린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나 엘빈은 빙그레 웃음 짓더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을 넘겨받아 걸음을 옮겼다. 엘빈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본 노아가 다시금 왈칵 피를 토해 냈다.
“오지, 끅, 오지 말......!”
“노아.”
지극히 무덤덤한 부름이 노아의 비명을 끊어 냈다. 엘빈은 필사적으로 제게서 멀어지려는 노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몸을 낮췄다.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인 그가 조용히 검을 고쳐 쥐었다.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서로 닮은 두 쌍의 붉은 눈이 서로를 직시했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어긋나는 인연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 서로를 죽이기 위해 살아왔고, 결국 누구 하나가 죽고 나서야 끝날 악연이었다. 어떻게 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시작부터 망가져 버린 관계의 해법은.......
“부디 미물로라도 다시 태어나지 마라.”
더 엉켜 버리기 전에 끊어 내는 것뿐이다.
엘빈은 말을 맺으며 단숨에, 그리고 확실하게 노아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
검이 심장을 파고드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쉬었던 노아의 머리가 이내 툭, 소리를 내며 벽에 닿았다. 악의와 자괴감, 광기로 번들거리던 붉은 눈은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폭풍이 물러간 후의 수면처럼 잔잔히 가라앉았다.
레이린은 끝끝내 빛 잃은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