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87)

* * *

무겁게 늘어진 커튼 틈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비쳐들었다.

“.......”

어느새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에드윈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가만히 손을 뻗었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레이린의 입술 위를 스치듯 쓸었다.

“으음.......”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레이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그에 손을 거둔 에드윈은 짧게 혀를 찼다.

그는 레이린의 오롯한 의지가 아닌 상황을 틈타 선을 넘고 싶지 않았다. 하여 레이린이 지쳐 잠들 때까지 입술만을 집요히 탐한 탓인지, 부어오르고 거칠어진 입술의 모양새가 꽤 안쓰러웠다.

침대 위로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은 어느새 연한 회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레이린의 목걸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온 에드윈은 지독히도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의 발걸음이 멎은 것은 왕의 궁 앞이었다.

“고하십시오.”

작게 하품하던 경비병들은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사내의 기세에 놀라 숨을 헉, 들이켰다.

“누, 누구......!”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던 그들은, 다음 순간 제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유스티아의 영주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여, 영주님을 뵙-”

“고하라 하였습니다.”

에드윈은 허둥지둥 예를 갖추려는 경비병들의 말을 칼같이 끊어 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경비병 하나가 급하게 궁 안으로 달려갔다.

에드윈은 시종일관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당장에라도 사람 하나를 죽여 없앨 것처럼 흉흉한 그의 기세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 차마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시선을 뗐다가는 눈앞의 맹수에게 목을 물어뜯겨 죽을 것이라는, 그런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 머리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던 경비병은 바깥의 동료들이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기 전에 돌아왔다.

“들어오시랍니다.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에드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비병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궁의 내부는 마치 미로와도 같았다. 그는 곳곳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주술석을 보며 속으로 조소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제 목숨 아끼는 것뿐인 작자 같으니.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기가 질릴 만큼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에 다다르자,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방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유스티아의 영주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들여보내라.”

그러자 조금 피곤하게 들리는 왕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기사가 문을 열어 주자, 에드윈은 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쿵-

등 뒤로 응접실의 문이 틈 없이 닫히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어쩐 일인가, 클로비스 공.”

연회가 끝난 후 막 잠자리에 들려 했던 것인지, 왕은 가벼운 실내복에 두툼한 가운만을 걸친 차림이었다.

소파에 자리를 잡은 왕이 에드윈을 향해 앉으라는 듯 손짓했으나, 그는 문간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폐하.”

에드윈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조용한 부름을 내뱉었다. 그러나 왕은 그 사소한 거절조차도 거슬리는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나. 앉으라고 하지-”

“이번에는 도가 지나치셨습니다.”

지극히 덤덤한 어조로 내뱉어진 말에, 왕은 일순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찰나 멍한 얼굴을 했던 왕은 이윽고 분노로 눈가를 굳히며 으르렁대듯 물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와 대조되게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5년 전, 제가 영주의 자리에 오르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열다섯에 유스티아의 영주로 임명받기 위해 왕궁을 찾았을 때. 그는 분명 제 어깨 위로 검을 내리는 왕을 향해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만을 하자고, 그리하면 유스티아는 영원히 폐하의 검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

“분명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왕은 그날의 불쾌했던 기억을 상기했는지 의자의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감히......! 지금 감히 내게 경고하는 것이냐!”

완고한 인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뭇사람이었다면 당장에라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만큼 사나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보다도, 표정 하나 없는 에드윈의 모습이 더욱 섬뜩했다.

“예. 이것은 경고가 맞습니다.”

에드윈이 끝내 일말의 체면치레마저 내려놓자, 새파란 눈이 짐승의 것처럼 형형하게 번득였다. 무감정한 만큼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연이어 내뱉어졌다.

“지금까지는 신하 된 도리로 아무 말 않았지만.”

“.......”

“참아 넘기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폐하.”

왕은 지나친 분노에 무어라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팔걸이를 쥔 손에 힘만 더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날 선 눈길로 바라보던 에드윈이 이내 차분히 말을 맺었다.

“그러니 부디 이 이상 욕심내지 마십시오.”

어조는 부탁이었지만 실상은 명령이었다. 그리 말한 에드윈이 응접실을 벗어나려는 듯 몸을 돌리자,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왕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후회할 짓 마라. 두 번은 없다.”

왕은 최소한의 이성으로 자비를 베풀 듯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제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면 모른 척 넘어가 주겠다는 소리였다.

“......저는 지금껏 제 선택에 후회해 본 적이 없으며.”

그러나 에드윈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직이 답했다.

“애초에 후회할 일이었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에드윈 클로비스! 네가 정녕 나를 능멸하느냐!”

결국 대노한 왕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지만, 에드윈은 그 길로 응접실을 벗어났다. 망설임 없이 사라지는 뒷모습에, 분노를 이기지 못한 왕이 닫힌 문을 향해 제 옆에 놓인 등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공주를 불러와라! 지금 당장!”

길길이 날뛰던 왕이 커다랗게 고함쳤다. 문밖에서 당황하던 기사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공주의 궁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응접실이 폐허가 될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희게 질린 아네트가 응접실에 도달했다.

“부르셨.......”

“대체 너는! 왜 눈앞에 상을 차려다 줘도 그걸 입에 처넣질 못하는 것이냐!”

“꺄악!”

챙!

왕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잔을 집어 던졌다. 아네트는 제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부딪힌 잔이 산산이 부수어지는 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잘.......”

그녀는 혀를 씹을 것처럼 턱을 덜덜 떨면서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겁에 질려 입을 다무는 것이 더욱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일들로 인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왕은 그 ‘멍청함’에 더욱 속이 뒤집힌다며 테이블을 뒤엎었다.

“다른 곳에서 도움이 되지 못하겠다면 몸뚱이라도 쓸모를 다하란 말이다! 기껏 그 염병할 놈의 방으로까지 밀어 넣어 줬건만! 어떻게 그 간단한 일마저 그르치느냔 말이야!”

와장창!

테이블이 뒤집히며 그 위에 놓여 있던 다기들이 조각나 바닥 위로 흩어졌다.

아네트는 그제야 왕이 어떠한 의도로 저를 에드윈의 방까지 보냈는지 눈치채고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아, 하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왕은 끝내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는 광기 어린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렸다.

“2년, 2년 안에 어떻게 해서든 후사를 봐야 한다. 그래야만 해. 무슨 수를 써서든.......”

아네트는 그런 왕의 모습에 주저앉은 채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왕은 이따금 저렇듯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곤 했다.

‘적어도 스물이 되기 전에는 한 사람 몫을 해내도록 해라.’

‘아직도 그 모양이면 어쩌자는 것이야! 네 나이가 벌써 열여섯이다! 4년 후면 성인이라는 것이 이리 모자라서야.......’

왕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이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집착했다. 그것이 의문스러워 몇 번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늘 설명이나 대답이 아닌 호통이고 고함이었다.

‘무서워.......’

아네트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양손으로 귀를 막고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나 피부 위를 맴도는 한기는 영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어둠이 가시고 희미한 동이 터올 때까지 폐허가 된 응접실에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이렇듯 숨을 죽이고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유스티아 일행은 왕의 탄신 연회가 끝나자마자 호노라투스를 떠났다.

클로비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에드윈과 레이린, 아르망은 밀린 서류에 갇히다시피 했다. 클로비스 기사단 또한 미뤄 두었던 훈련을 재개한 탓에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엘빈은 호노라투스에서 복귀한 후, 약 일주일 만에 연무장을 벗어나 침대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그는 뻐근한 느낌이 드는 오른쪽 어깨를 휘휘 돌리며 혀를 쯧쯧 찼다.

‘다 좋은데 너무 빡세다니까.’

클로비스 저택 가장 가까이에 잠입해 있으니 온갖 소식들을 한발 먼저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이득이었다. 다만 클로비스 기사단은 그 위세에 걸맞게 훈련의 난이도도 극악했다. 영주인 에드윈이 직접 훈련을 지휘하는 날은 기사단 전체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날이었다. 그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 한들 단장인 패트릭 또한 악귀처럼 단원들을 굴리는 것이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현재 기사단 숙소에는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기절해 잠든 단원들이 즐비했다. 엘빈 또한 내심으로는 그들 틈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무리 어렸을 적부터 적령에서 훈련받아 왔다 한들 클로비스 기사단의 훈련 강도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일주일 가까이 혹사당한 몸이 삐걱대며 쉼 없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첩자답게 여유를 부릴 수 없는 몸이었다.

‘영감은 또 울고 있겠네.’

적령 제7지부장인 루드위그는, 엘빈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새롭게 쌓이는 서류들을 대신 처리하며 우는 소리를 내곤 했다. 늙은이를 죽는 날까지 부려 먹으실 생각이냐며 저를 닦달하던 루드위그의 얼굴을 떠올리던 엘빈이 픽 웃음을 흘렸다. 이러나저러나 루드위그는 엘빈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길드장보다도 친부처럼 믿고 아끼는 이였다.

온몸의 근육통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은 엘빈이 읏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오랜만에 루드위그를 볼 생각에 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클로비스 저택의 정문을 나섰다.

정문 밖으로 한 발 나서자마자 제 뒤로 따라붙는 기척만 아니었다면, 그의 기분은 내내 괜찮았을 것이었다.

“뭐야?”

엘빈은 평소와 달리 조심성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들의 기척에 눈살을 찌푸리며 낮게 읊조렸다.

그러나 이어 다급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자그마한 신호.

따닥, 딱. 딱.

길드의 존속이 걸렸을 만큼 긴급한 일을 알리는 신호에, 엘빈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곧장 발길을 돌린 그는 근처의 인기척 없는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골목의 그림자에 그의 모습이 가려지자마자 근처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그림자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아버지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지만 대외적으로 엘빈은 길드장의 ‘아들’이었다.

무섭게 얼굴을 굳힌 그의 모습에 그림자들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본능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엘빈은 당장에라도 그림자들의 멱살을 잡아채 입을 열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노아 키스티엘 님께서 길드장님을 살해하시고 본부를 장악하셨으며.”

“.......”

“루드위그 마리넬리를 살리고 싶다면 소식을 듣는 즉시 본부로 돌아오라는...... 전언입니다.”

종내에는 현실이 되어.

* * *

“휴가요?”

의아한 목소리가 텅 빈 연무장의 허공을 울렸다. 그러자 레이린의 앞에 선 패트릭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예. 그저께 외출하려는 것처럼 보이더니 대뜸 돌아와서는 휴가 신청을 하더군요.”

며칠 전. 고된 훈련 탓에 진즉 기절한 단원들과 달리 바깥으로 나서는 엘빈의 모습에 감탄한 것도 잠시. 고작 10분도 안 되는 시간 사이,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온 엘빈은 다짜고짜 휴가를 신청하고는 사라졌다. 그 당시를 짧게 회상한 패트릭은 퍽 수심에 찬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놈이 여태 휴가를 쓴 적이 없어서 일주일까지는 무리가 없긴 한데....... 그보다는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긴 합니다.”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맺은 패트릭은 이윽고 훈련을 재개할 시간이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사라졌다.

그에 연무장 입구에 홀로 남겨진 레이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말없이 사라질 리가 없는데.’

레이린은 호노라투스에서 복귀한 이후, 약 열흘간 집무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간신히 밀린 일을 끝마친 참이었다. 온몸이 피곤으로 절어 있는데도, 그녀가 이곳까지 구태여 찾아온 이유는.

‘커헉!’

어젯밤, 그녀의 꿈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가던 한 청년의 모습 때문이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엘빈의 것과 꼭 닮은 붉은색의 눈동자. 레이린은 엘빈의 이름뿐인 형제, 노아 키스티엘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꿈에 놀라 튕기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렇게 깨어났던 것이 우습게도, 지금의 레이린은 여태까지 중 가장 차분한 심정으로 예지몽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위선적이네.’

그녀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심장 박동을 인지하고는 쓰디쓴 자조를 머금었다.

노아 키스티엘은 지금껏 그녀의 예지몽에 등장했던 이들과는 달랐다. 데릭의 사건 이후 처음으로 레이린이 ‘알고 있던’ 사람이자.

‘친애하는 ‘차기 길드장’님께서, 웬 같잖은 계집 하나에 홀려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고 할 만큼 머저리가 되어 버렸다는 소문 말이야.’

‘너! 녹스고 뭐고 네가 무사할 줄 알아? 그래 봤자 쥐새끼 주제에......!’

엘빈과 레이린의 존재를 탐탁잖게 여기며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던 애송이. 그날 스스로가 녹스임을 드러내며 겁을 주긴 했지만, 그런 부류의 이들에게는 효과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하여 혹시 모를 사고가 벌어지기 전에,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노아를 적령에서 치워 버릴까 고민한 적이 있기 때문일까. 전처럼 필사적으로 노아의 죽음을 막아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외려 노아가 이대로 죽게 된다면 레이린의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 굳이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서도 불안 요소를 치울 수 있게 되니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절대적인 운명이 눈앞에 디밀어짐으로써 느껴지는 본능적인 불쾌함과 찝찝함은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엘빈을 찾았던 이유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대체 어딜 간, 아.’

미간을 좁힌 채 엘빈의 행방을 고민하던 레이린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작게 입을 벌렸다.

‘혹시 루드위그는 무슨 일인지 알고 있으려나.’

적령의 유스티아 본부를 담당하고 있는 루드위그 마리넬리라면, 어쩌면 엘빈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적령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고 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한 레이린은 곧장 방으로 돌아가 후드를 눌러쓴 채 저택을 나섰다. 벌써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늦은 저녁이었음에도 거리는 아직 소란스러웠다. 곧 다가올 축제의 영향이겠거니 생각한 레이린은 인기척을 죽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루드위그가 운영하던 서점의 지척에 다다른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왜.......’

낯설지 않은, 오히려 이유 모를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풍경. 서점의 유리창 너머로는 은은한 주홍색 불빛이 흘러나와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언뜻 평화롭기까지 한 광경이었지만, 서점의 문이 안쪽으로 조금 열린 채 기이하게 삐걱대고 있다는 점이 그녀의 신경을 거슬렀다.

레이린은 불안감을 감지한 것과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머리 위의 후드를 더욱 깊숙이 끌어당긴 그녀가 품속의 단검에 손을 가져간 채로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불빛의 바로 옆쪽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몸을 숨긴 레이린이 눈동자만 굴려 서점 안을 살폈다. 본디 루드위그가 자리하고 있던 카운터 너머, 뒤쪽의 작은 방 안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자그마한 기척이 들려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던 레이린은 이내 소매에 단검을 감추고 후드를 뒤로 젖혔다. 이윽고 나름 ‘평범한’ 행인의 행색을 갖춘 그녀가 무구한 얼굴로 서점의 문을 밀어 열었다.

딸랑-

“할아버지, 계세요?”

레이린은 일부러 기척과 목소리를 키우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쪽의 방에서 돌아다니던 남자 하나가 놀란 얼굴로 달려 나왔다.

“아, 어서 오십.......”

퍽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던 남자는 레이린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말을 멈추었다. 레이린은 남자의 시선이 찰나 제 외양을 빠르게 훑는 것을 모르는 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주인은 다른 분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누구신지.......”

그녀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가 당혹감을 감추며 답했다.

“아, 그! 저는 그분의 손자입니다. 할아버님께서 몸이 안 좋아지셔서 당분간 대신해 일을 맡았습니다.”

“아, 그랬구나. 저는 혹시나 주인이 바뀐 줄 알았지 뭐예요.”

레이린이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자 남자는 태연히 마주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늘 한 점 없이 미소 짓고 있는 얼굴과 달리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뭐지? 그 여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

연한 회갈색의 머리카락, 연한 회갈색의 눈. 오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미형의 얼굴. 눈앞에 선 여자의 얼굴은 노아에게서 전해 들은 ‘그 여자’의 외모와 분명 비슷했다.

그러나 레이린이 입가에 머금은 미소 탓에, 현재의 그녀는 노아가 설명했던 ‘무덤덤하고 서늘한 인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쯧. 귀찮게.......’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길드원은 속으로 혀를 차고는 한발 물러났다.

“달리 찾는 책이 없으시다면 천천히 둘러보고 계시죠. 저는 안쪽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미소로 말끝을 흐린 그가 카운터 안쪽에 놓아 둔 통신용 주술석 쪽으로 몸을 돌리던 차.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거칠게 그의 입을 틀어막은 것과 동시에 옆구리에 격통이 일었다.

“으으읍!”

찢어지는 듯한 비명은 흰 손에 막혀 바깥으로 흘러나가지도 못한 채 둔탁하게 스러졌다. 그의 옆구리에 꽂힌 단검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레이린은 길드원이 반항하려 하자 단검을 쥔 손을 살짝 비틀며 낮게 속삭였다.

“거기서 더 움직이면 평생 못 걸을 텐데. 알면 닥치고 가만히 있어.”

“읍, 흐.......”

경기를 일으키며 몸부림치던 길드원은 그녀의 살기가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입술을 짓씹으며 억지로 비명을 참아 냈다.

레이린은 몸부림을 멈춘 그의 등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루드위그 마리넬리는 지금 어디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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