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87)

* * *

마음 깊은 곳에 몇 가지 새로운 의문을 품은 채로, 레이린은 유스티아로 돌아왔다.

“혼자 쉬다 오니까 좋든? 나는 영주님까지 켈레마에 볼일이 있다면서 중간에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혼자서, 어?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데.......”

저택 입구까지 나와 레이린을 기다리던 아르망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연신 투덜거렸다. 그의 말을 익숙하게 한 귀로 흘리며 로브를 벗던 레이린은 계단 위쪽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멈칫 고개를 들었다.

“.......”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짙디짙은 흑색의 머리카락과 새파란 눈. 한순간 호흡조차 잊을 정도로 조각 같은 얼굴과 사람의 숨통을 틀어막는 위압감. 그는 유스티아의 머리이자, 이 저택의 주인이었으며 또한.

“......왔습니까.”

그녀의 연인이었다.

1층의 로비에 발을 디딘 에드윈은 무표정한 얼굴로 짤막한 인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레이린은 그의 목소리에 감돌던 불안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것을 눈치채고는 내심 웃어 버렸다.

‘여전하네.’

그래도 유스티아로 돌아오기 전, 선선히 자신과 다른 길로 흩어져 돌아온 것을 보면 완전히 처음과 같은 태도는 아니었다.

“......네.”

그렇게 헤어진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저 목소리가 새삼 반가워 레이린은 한결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였다.

“돌아왔습니다, 영주님.” 

레이린은 클로비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짐을 챙겨 호노라투스를 향해 떠나야 했다. 지난번에는 시르나티스 때문이었다면, 이번에는 국왕 바로크 드 루에이리의 탄신 연회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괜찮으려나.’

레이린은 저 멀리 가까워지는 호노라투스의 성벽을 보고는 자그맣게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흰 손을 들어 올려 목걸이 끝에 매달린 주술석을 만지작거렸다.

‘주술의 유효 기간은 늘 의뢰하셨던 대로 2년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에셀은 레이린에게 새 주술석이 달린 목걸이를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목걸이는 늘 정해 둔 기간보다 일주일, 혹은 이 주일 정도 일찍 수명이 다한다고 했으니 적어도 이번 추락의 계절까지는 안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에셀조차 이런 일이 발생하는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고 하니 괜스레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상태로, 자꾸만 알 수 없는 불쾌함을 자아내는 왕족의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심란했고.

“그 목걸이.”

그때, 돌연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음성에 레이린이 움찔 동작을 멈추었다.

“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레이린의 등 뒤에서 말을 몰던 에드윈이 조용히 입을 움직여 물었다.

“그게 당신의 머리 색과 눈 색을 감춰 주는 겁니까.”

레이린은 그의 질문에 내심 놀라워했다.

그녀는 아직 그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에 관해 설명한 적이 없었다. 켈레마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볼일이 있다’라는 말로 얼버무렸을 뿐, 정확히 어떠한 연유로 켈레마를 방문했는지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목걸이를 풀어낸 채 몇 번 마주했을 때는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고,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차분하게 자신을 살펴볼 시간도 없었을 텐데. 머리 색과 눈 색이 달라지는 기준이 목걸이라는 것을 이렇듯 기민하게 알아챘을 줄이야. 속으로 감탄하던 레이린은 잠시간의 고민 끝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남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특별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이란 본디 다른 것을 경계하는 동물이었고, 하물며 가뜩이나 힘겨운 상황에 놓인 헤르기아스의 사람들은 레이린이 가진 ‘다름’을 반겨줄 이들이 아니었다.

‘특별함이 아니라 약점이지.’

문득 제 결함을 하나 더 깨달은 레이린은 중얼거리듯 답하고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사이, 어느덧 성벽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어서!”

지난번의 경험 때문인지, 대번에 유스티아 일행을 알아본 경비병이 희게 질린 얼굴로 빠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어 거대한 성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일행이 대로를 지나 왕성에 다다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변함없는 위용을 뽐내는 성의 입구에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여자가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클로비스 공.”

어딘지 수척해진 얼굴의 아네트가 희미한 웃음을 띠며 일행을 맞이했다. 실제로 그녀는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던 중 작게 휘청거렸다.

워낙 찰나에 지나지 않았던 일이었고 아네트 스스로가 곧장 자세를 바로잡았기에 그녀 주위의 시녀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레이린만은 그것을 확실히 목격하고는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왕은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마중을 내보낸 것인가, 아니면 알고 내보낸 것인가. 아네트를 마주한 순간 들었던 불쾌감 위로 기이한 위화감이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그러나 그런 속내와는 달리, 이내 땅으로 내려선 레이린은 흠결 하나 없는 태도로 점잖게 예를 갖췄다. 외려 가볍게 묵례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에드윈이 그녀보다도 훨씬 더 방자한 행태였다.

레이린이 인사를 건네자, 아네트는 조금 전보다 한결 밝아진 얼굴로 반가이 화답했다.

“아제트리아 양도 오셨군요. 지난번에는 정말 감사했어요.”

아네트는 얼굴 가득 수줍은 미소를 띤 채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와 대조되게 사무적인 미소를 띤 레이린은 그저 별말씀을, 하고 답하고는 말을 아꼈다.

이윽고 일행은 시르나티스 때 배정받았던 숙소로 흩어졌다. 연회는 저녁 늦은 시각부터 시작될 예정이었기에, 아직은 약간의 여유 시간이 남아 있었다.

“두 시간 후에 준비를 도와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편히 쉬시길.”

레이린이 낯익은 방 앞에 도착하자 그녀를 안내해 준 시녀는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인 뒤 사라졌다. 기다란 복도에 홀로 남은 레이린은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고민했다.

‘방에 있기는 싫은데, 어떻게 할까.’

아네트의 얼굴에 떠올랐던 티끌 한 점 없는 미소 때문인지 조금 심란했다. 저는 명확한 이유조차 없는 불쾌감에 아네트를 피하고 있는데, 정작 그녀는 자신을 은인 보듯 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불편하게 느껴졌다.

‘조금 걷자.’

레이린은 반쯤 충동적으로 몸을 돌려 별궁을 나섰다. 괜히 기분이 갑갑해 바람을 맞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준비를 도와줄 시녀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달리 할 일도 없이 방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왕궁의 구조를 파악하는 편이 나으리라.

‘그러고 보니.......’

바깥으로 나온 레이린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드넓은 정원 저편을 바라보았다.

‘왕궁 도서관은 어디쯤이려나.’

켈레마에서 에셀에게 목걸이를 돌려받은 후, 그녀는 외부인에게도 공개되어 있는 도서관에 방문했다. 바깥으로도 모자라 구석에 있던 자료 보관실에까지 숨어들어 살펴보았지만, 신의 분노 이전에 대한 기록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클로비스 저택의 도서관과 켈레마의 도서관. 그 두 곳을 제외하고서 헤르기아스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왕궁 내의 도서관뿐이었다.

하지만 왕궁 도서관은 왕족만이 드나들 수 있었고, 레이린은 왕족이 아닌 외부인이었다. 해서 반쯤 선택지에서 배제하고 있었는데. 마침 시간도 남으니 어떻게 숨어들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결심을 굳힌 레이린은 본궁 주위부터 살펴보기로 결심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 정점을 찍었던 더위는 어느덧 사그라들고 있었다. 헤르기아스에서 가장 더운 시기에만 잠시 피었다 지는 꽃들이 벌써 고개를 숙인 채 길게 늘어져 있었다. 레이린은 그것이 꼭 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되새김질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비릿하게 입매를 비튼 채 걸음을 재촉했다.

‘경비는 둘째 치고, 결계가 몇 겹이나 있는지가 관건인데.’

왕의 탄신 연회이니만큼, 지난번 시르나티스의 마지막 날 열렸던 파티 때보다도 많은 사람이 본궁 주위를 오가고 있었다. 막 왕궁에 도착해 방으로 안내를 받는 귀족이라든지, 혹은 그들 중에 어떻게 해서든 고위 귀족, 혹은 왕과 영주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주위를 알짱거리는 자들. 사람들의 분위기를 확인한 레이린이 슬슬 주위를 구경하는 척하며 발걸음을 늦추는 순간이었다.

“......럼 그 안건은 공의 의견대로 처리하도록 해라. 최대한 빨리.”

“예, 폐하.”

본궁의 입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가장 앞에 선 백발의 사내를 알아본 레이린이 눈을 크게 떴다.

“폐, 폐하를 뵙습니다!”

“헤르기아스에 영광을.”

본궁의 주변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왕을 향해 예를 취하며 허리를 굽혔다.

탄신 연회가 열리는 날까지 정무에 시달리다가, 더는 준비를 미룰 수 없다는 시종의 말에 제 궁으로 돌아가려던 왕은 본궁 주위에 빼곡한 사람들을 보고 잠시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질린다는 듯 인상을 쓴 그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오늘은 짐이 그대들과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다. 하고픈 말이 있다면 시종장에게 알현 신청을-”

사람들을 돌아보던 그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향한 채 덜컥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목소리 또한 급작스레 끊겼다.

“......!”

갑작스럽게 심장을 잠식하는 살기에 미처 허리를 숙이지 않고 있던 레이린이 뒤늦게 허리를 숙였다.

경악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던 왕의 얼굴이 서서히 놀라움이 아닌, 경계와 적의로 물들었다. 오직 레이린 하나에 시선을 고정한 그가 뒤따르던 이들을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자네.”

허리를 숙이고 있던 레이린은 끝끝내 제 앞에 멈춰 선 왕의 발을 보고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클로비스 공의 보좌라 했던가.”

왕이 친히 말을 건넸음에도 레이린에게서 별다른 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 번 더 말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라.”

레이린은 독촉하듯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목 안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금쯤이면 연회를 준비하러 갔을 줄 알았는데.’

작년보다 일찍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한 탓에 추락의 계절을 대비한 일이 끊이지 않는 듯싶었다.

이윽고 낭패 어린 표정을 능숙히 지워 낸 레이린이 천천히 허리를 펴며 곱게 눈을 휘었다.

“......헤르기아스의 주인을 뵙습니다. 레이린 아제트리아입니다, 폐하.”

왕은 잠시간 엷은 회갈색을 띠는 레이린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지난번 파티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시종들을 통해 전해 들었네. 모자란 딸아이를 도와주어 고맙군.”

모자란 딸아이. 그 단어가 유난히 거슬린 탓에 레이린은 하마터면 왕의 앞이라는 것조차 잊고 미간을 구길 뻔했다.

‘저건 인사치레로라도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닐 텐데. 하물며 왕이라는 자가.’

자고로 왕이란 다른 이들처럼 겸양을 떨며 자신을 낮추는 말조차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일말의 흠조차 없어야 하며 그 어떠한 죄조차 없어야 하는 자. 그것이야말로 ‘왕’이니까. 한데 이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도 않은 자가 어째서 저런 말을 내뱉은 것일까.

‘정말로 멍청하거나, 아니면.......’

......공주를 깎아내리는 것이 이미 습관으로 자리 잡았거나.

레이린은 그의 벽안에 찰나 동요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후자로 생각을 굳혔다.

왕이라는 자가 제 딸을 숨 쉬듯 깎아내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급격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물며 그것이 공주 본인의 잘못도 아닌 이유이니 더더욱.

‘쓸모가 없다면 살아 있을 가치조차 없다.’

저것은 그야말로 그녀의 친부와도 같은 태도가 아닌가.

기실 레이린은 지금 당장 왕의 목을 졸라 그 숨을 끊어 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결국 왕과 시선을 맞춘 채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황공합니다. 당연한 일을 했음에도 이리 높게 평가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레이린은 과할 정도로 예의 바른 대답을 흘리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 날 선 눈으로 레이린을 바라보던 왕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아주 약간 누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레이린이 속으로 비웃음을 삼키는 것도 모르고, 퍽 자애로운 얼굴을 가장한 그는 짐짓 너그러운 척 입을 열었다.

“혹 원하는 포상이 있다면 말하라. 짐은 도움을 받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무뢰한이 아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레이린은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이미 화사하게 만개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볼품없이 시들어 가는 꽃을 손끝으로 톡 건드리며 웃었다.

“이 꽃을 한 다발만 챙겨 가도 괜찮겠습니까.”

왕은 이미 시들어 버린 꽃을 청하며 부드럽게 웃는 레이린을 이상한 사람 보듯이 바라보았다.

“라트로피꽃 말인가? 그 꽃은 이미 가치를 다했으니, 왕궁 정원에 피어 있는 꽃을 원하는 것이라면 다른 것을 주겠다.”

이제나저제나 하루빨리 레이린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꽤 대단한 친절을 베푼 것이었다. 비록 한순간의 변덕에 불과한 친절이었지만 그의 속내를 모르는 자들의 눈에는 자애로움으로 비칠 터였다.

하지만 레이린은 당황한 기색조차 없이 그를 바라보며 잠잠히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째서 저 꽃의 가치가 다했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마치 꽃을 청했을 때 만큼이나 여상한 태도였다. 하지만 왕의 눈에는 그 잔잔함이 기이함으로 비칠 뿐이었다. 해괴한 표정을 짓던 왕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성의 없는 대답이나마 돌려주었다.

“이미 시들어 버린 꽃이 아닌가. 꽃이라는 것은 본디 화사하게 피어 누군가를 장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그러자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린이 손을 뻗어 시들어 버린 꽃송이를 받쳤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폐하.”

허공을 떠도는 목소리는 한없이 무구했다. 그녀는 시든 꽃을 바라보며 다정히 웃었다.

“꽃은 그저 꽃일 뿐입니다.”

순수하기 그지없는 말에 왕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레이린은 표정 관리를 할 여유를 잃은 그의 얼굴을 기꺼이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그저 봉우리일 때도, 만개했을 때도, 볼품없이 시들 때마저도 꽃은 꽃입니다.”

“.......”

“보름달이 아니라고 해서, 달이 달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꽃은 그저 꽃일 뿐이다. 단지 태어나 보니 그것이 벌레나 짐승이 아닌 꽃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태어나길 꽃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신을 모방하듯 멋대로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본인이 정한 가치를 잃으면 쓰레기처럼 내버린다. 마치 왕이 제 자식인 아네트의 가치를 평하고 그녀의 가치가 형편없다 윽박지르는 것처럼 말이다.

정작 그녀를 만들어 낸 것은 왕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얼마나 멍청하고 오만한지.

“선물은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레이린은 제가 건넨 말뜻을 이해하고 완벽히 여유를 잃어버린 왕의 얼굴을 향해 환하게 웃음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저는 폐하께서 친히 치하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연한 회갈색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춤을 추듯 팔랑거렸다.

“아쉽지만 연회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흠잡을 곳 없는 자태로 예를 갖춰 인사한 레이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조금 전 왕의 눈에서 읽어 냈던 핏빛 살기는 그녀가 품고 있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이유까지는 미처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로써 헤르피산에서 그녀를 습격했던 자들은 왕의 끄나풀이었음이 확실해졌다. 이미 그가 그녀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들의 형체 없는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애먼 자의 손에 죽어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지만.

레이린은 스산하게 눈을 빛내며 별궁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등 뒤로 저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퍽 만족스러웠다.

이번 연회는 왕의 탄신 연회라 그런지 저번의 파티보다 몇 배나 더 북적였다. 레이린은 저번 시르나티스 때 고생했던 기억을 발판 삼아, 이번에는 시녀들의 회유에도 한사코 흔들림 없는 태도로 간소한 차림을 고수했다.

그 결과 현재의 그녀는 저번보다 한결 편안해진 차림만큼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춥지는 않아?”

레이린의 곁에서 자그마한 카나페 세 개를 한 번에 씹어 삼킨 아르망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투명한 빛깔의 와인을 홀짝이던 레이린은 어깨만 으쓱했다.

“별로요. 사람이 워낙 많잖아요.”

그녀의 시선이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연회장으로 향하자 아르망은 납득한 듯 몸을 돌리고는 또다시 카나페를 집어 들었다.

레이린은 무릎 아래로 살짝 내려오는 길이의 가벼운 검은색 드레스만을 걸친 채였다. 짤막한 여름을 고려해 만들어진 드레스는 얇고 하늘하늘한 재질이었기에 조금 쌀쌀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만큼 움직이기 편했다.

레이린은 말없이 와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연회장의 입구를 슬쩍 일별했다. 바쁘게 드나드는 시종과 새로이 도착한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던 그녀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오빠는 아직인가.’

연회가 시작된 이후 꽤 시간이 흘렀건만, 라그나르와 키안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오는 길에 작은 문제가 생겼답니다. 다행히 연회가 끝나기 전에는 도착할 모양입니다.’

연회 중간에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시종장이 왕에게 그리 말하는 것을 언뜻 엿듣긴 했으나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상기하자 레이린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새하얀 인영 둘을 눈에 담은 그녀는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는 미간을 작게 좁혔다.

‘......에드윈은 어디 갔지?’

아까까지만 해도 왕과 공주의 옆에 붙들려 있던 에드윈이 보이질 않았다. 왕의 주위를 샅샅이 살펴본 뒤 티 나지 않게 눈동자를 굴려 회장 전체를 훑었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에드윈이 이 자리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가 자신의 감정만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마음대로 자리를 비울 사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안다.

“선배님.”

레이린은 이상하다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나직하게 아르망을 불렀다. 카나페를 네 개씩 입에 욱여넣던 그가 입 안에 있는 음식물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영주님이 안 보여요.”

“뭐?”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아르망이 레이린과 마찬가지로 회장 전체를 둘러보았으나 에드윈의 모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가볍게 혀를 찬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레이린에게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몸이 안 좋으신 걸 수도 있으니까, 레이린 너는 방으로 가 봐. 나는 휴게실부터 살펴보고 정원 쪽을 뒤져볼게.”

“네.”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곧장 흩어졌다. 레이린은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가며 연신 영혼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그녀는 입으로는 양해를 구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회장을 벗어나야 하는데 제 앞을 가로막는 인파가 거슬렸다. 그녀가 유스티아 영주의 수행 비서라는 것을 알아보고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 귀찮게 구는 이들 또한 성가셨다.

“잠시만.......”

레이린이 짜증을 억누르며 또 한 번 사람들의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려던 차였다.

“어어, 갑자기 몸이 왜.......”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불콰해진 귀족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레이린 쪽으로 기울어졌다. 레이린은 빽빽하게 서 있는 사람들 탓에 그를 피해 물러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동시에, 옆쪽에 길게 늘어져 있던 커튼 안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어이쿠!”

우당탕, 커다란 소리가 나며 귀족의 몸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 소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을 때는 레이린이 이미 커튼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 후였다.

커튼 속의 어둠에 강제로 발을 들인 레이린은 저를 붙든 상대의 손목을 비틀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대의 나머지 몸값을 지불하겠다는 서명을 할 수 없겠는걸.”

그러나 직후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에 움찔 동작을 멈춘 찰나. 허공에 작은 빛이 떠오르고, 이어 그 빛을 받은 주홍색의 눈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레이린은 저를 붙든 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찰나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상대의 손에 들려 있는 두 개의 주술석을 확인하고는 적나라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여인 하나 붙들자고 이리 비겁한 수까지 써야 할 만큼 매력이 없으신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프리조프 공.”

그러자 이드리스는 불쑥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요사스럽게 눈을 휘었다.

“기회만 준다면 지금 당장 그게 오해라는 걸 증명해 보일 수도 있는데.”

은근한 속살거림이 뱀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말과 함께 손목을 쓰다듬는 손길에 담긴 의도가 퍽 적나라했다. 그에 코웃음을 친 레이린이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낸 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저는 기회를 드릴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말입니다.”

“저런.”

이드리스가 짐짓 안타까운 어조로 혀를 찼다. 그러나 레이린은 일말의 동정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영주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리도 변명에 급급하셔야. 손에 들고 계신 주술석이라도 내려놓으시고 말씀하시죠.”

차디찬 눈을 한 그녀가 보란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를 비난했다. 애초에 감출 생각도 없었으면서, 이드리스는 그 말에 제 손에 들려 있던 주술석 중 하나를 천연덕스럽게 소매에 집어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대가 술 취한 자의 실수에 다치지 않도록 잡아 주었을 뿐이야. 그리 보았다니 섭섭하군.”

“그러셨습니까. 그렇게까지 저를 신경 써 주셨다니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이드리스를 흉내 내듯 한없이 정중한 태도로 그리 답한 레이린이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이드리스와 단둘이 있어 봐야 좋을 점은 없었다. 그녀는 제 등 뒤로 늘어진 두꺼운 커튼을 향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인사도 드렸으니 제가 이곳에 더 있을 이유는 없을-”

“되게 불안해 보이네. 누굴 잃어버리기라도 했어?”

노래하듯 흘러나온 혼잣말에 레이린의 동작이 우뚝 멎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이드리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맞춰 왔다.

“대체 잃어버린 사람이 누구길래 그런 얼굴이야. 동료? 가족? 아니면.......”

말꼬리를 길게 늘인 그가 고운 손을 뻗어 레이린의 목걸이를 툭 건드렸다.

“연인?”

주위의 어둠과는 하등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허공에 속삭이듯 울려 퍼졌다.

“......이렇게 기억력이 나쁜 분일 줄은 미처 몰랐는데.”

레이린은 이드리스조차 그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그의 손을 밀어냈다.

“지난번에 분명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엷은 회갈색의 눈이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이 상대를 직시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양 그저 무감했다.

“한 번만 더 그런 헛소리를 하시면 저를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요.”

내내 건조하던 그녀의 눈에 찰나 어떠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그것의 이름은 동요나 초조함 따위가 아닌 경멸이었다.

“그러니 의뢰금을 돌려드리고 그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어지기 전에 부디 자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프리조프 공.”

섬뜩한 말을 내뱉은 레이린은 이드리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렸다.

한 손으로 커튼을 걷어 낸 그녀가 바깥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하지만 그대는 그럴 수 없을 테지. 윈프리드가 등 뒤에 있으니 말이야.”

빌어먹게도 동요 한 점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레이린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입만 움직여 답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시죠. 그렇게나 목이 떨어지고 싶다고 애원하는데 더 말려 봐야 무엇 하겠습니까.”

달리 미사여구를 덧붙이지 않아도 그대로 죽어 버리라는 진심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에 이드리스는 작게 웃었다. 그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여린 뒷모습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그대는 결국 내 의뢰로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잊지 마.”

“.......”

“그러니 부디 지금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기기를, 아제트리아 양.”

레이린은 그 말에 말없이 커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아무런 대답 없이 발을 움직여 어둠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본 이드리스는 조금 더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레이린은 불안감에서 도망치듯 복도를 지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드리스의 앞에서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는 하나, 그가 윈프리드나 에드윈을 입에 담을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내내 이드리스에 대한 살의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으로 심란한 얼굴이던 레이린이 에드윈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똑똑.

“영주님.”

손을 들어 방문을 두드린 그녀가 조용한 부름을 내뱉었다. 만약 에드윈이 이곳에 없다면 어디를 찾아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아제트리아 양?”

돌연 문 바로 너머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이어 문이 조금 벌어지며 그 너머로 미미하게 커진 푸른색의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레이린은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라 잠시 눈을 깜박였다. 이내 에드윈이 정말로 방에 돌아와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여기 계실 줄은 몰랐는데.......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신 건가 해서 선배님과 함께 찾고 있었어요.”

그사이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에드윈은 그녀를 안으로 끌어당기고 방문을 닫았다. 방문이 확실하게 잠긴 것을 확인한 그가 뒤늦게 레이린의 말에 답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피곤해 보인다며 조금 쉬고 오라고 권하시더군요.”

“......폐하께서요?”

“예.”

레이린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긍정하는 그조차 무언가 석연찮다는 기색이 선연했다.

“의중은 잘 모르겠지만, 그 곁에 더 머물고 싶지도 않았던 터라 우선 그리하겠다 답하고 돌아와 있던 참입니다.”

잠잠히 이어지는 설명에, 레이린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

‘......왕이 직접 보내 줬다고?’

왕은 분명 왕가의 위세마저 넘보는 유스티아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 점은 이따금 날 선 눈으로 에드윈의 앞에서 제 권위를 세우려는 그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러한 감정과는 별개로, 왕은 에드윈을 제 딸인 아네트와 이어 주려 했다. 왕궁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구태여 에드윈에게 아네트의 파트너를 부탁해 그를 공주의 옆에 붙여 놓기까지 하는 이유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왜?’

그런 그가 어째서, 에드윈을 먼저 놓아준 것일까. 그것도 자기 자신의 의지로.

머리를 굴리던 레이린은 애써 고개를 흔들어 미심쩍은 기분을 털어 내려 애썼다. 왕은 머저리가 아니다. 그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한들 그것은 유스티아가 대놓고 공론화하여 왕을 적대시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일 가능성이 컸다. 불행하게도, 이름뿐이라 한들 왕은 ‘왕’이며 유스티아는 신하의 위치에 있었으니까.

‘이게 이드리스의 계략만 아니면 좋으련만.’

이 일에 더불어 이드리스가 제게 했던 말까지 떠올리자 급격하게 피로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컨디션이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짧은 시간 새에 정신적으로 급격히 피로해져서일까. 에드윈과 아네트가 나란히 서 있던 모습을 상기하자 새삼 기분이 나빠졌다.

에드윈이 내내 굳은 얼굴로 어떠한 여지도 내비치지 않은 것은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유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안이 메우니 괜스레 심사가 뒤틀렸다.

레이린은 불쾌함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병을 발견하고는 물이라도 마셔 속을 진정시켜야겠다 싶어 걸음을 떼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피곤하겠네.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는 거 들어주는 것도 일이었겠어.”

스치듯 에드윈의 곁을 지나친 그녀가 입술을 움직여 작게 빈정거렸다. 찰나 굳어졌던 에드윈이 이내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한 채 몸을 돌렸다.

“아제트리아 양.”

“내가 보기에도 그랬으니 사람들은 오죽했으려나. 아, 이래서 인기 많은 남자를 만나면 피곤하다고들 하는 건가?”

“레이린.”

끝내 단호한 부름을 내뱉은 에드윈이 그녀를 뚫어질 듯 직시했다. 레이린은 그 목소리를 무시한 채 잔에 가득 담긴 물을 한 모금 넘겼다. 목이 많이 말랐던 탓인지 찰나 목구멍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입매를 일그러트렸던 그녀는, 제 옆얼굴에 따갑게 닿아 오는 시선에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미안.”

“.......”

“나도 모르게 안심이 돼서 그랬어. 물론 그게 당신 탓이라는 소리는 아니야.”

이드리스를 만나고 내내 긴장으로 날이 서 있던 속이, 에드윈을 앞에 둔 순간 거짓말처럼 편안해졌다. 아까는 왕이 방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는 말에 놀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로 그러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는 아래로 늘어졌고, 굳어 있던 표정 또한 편안하게 풀어졌다. 이건 아마도, 어느새 그만큼이나 그를 믿게 되었다는 증거겠지.

에드윈 클로비스라는 사람을.

‘......정말 미친 건 나인가.’

속으로 자조를 삼킨 레이린은 고개를 돌려 새파란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안심이 돼서 모난 소리가 튀어 나간 것이라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사실 이것은 그녀의 성격이 꼬인 탓이 맞았기에 구태여 변명을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해.”

레이린은 선선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는 느릿한 걸음으로 에드윈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잘못.......”

에드윈의 앞에 선 그녀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감싸려던 순간.

“읏.”

목 안쪽에서 갑작스럽게 훅 치솟는 열기에 레이린이 반사적으로 제 목을 감싸 쥐며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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