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타액이 뒤엉키고 젖은 살이 맞닿아 비벼지는 소리가 물소리에 뒤섞이며 허공을 어지럽혔다. 더 가까워질 수 없음에 애가 타 서로를 끌어당기는 손은 필사적이고 절박했다. 상대에게 저를 있는 그대로 새겨 넣으며, 한 몸인 양 진득하게 뒤엉켜 있던 두 몸이 차츰 새까만 호수 아래로 잠겨 들었다.
깊이, 더 깊이. 끝내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 죽어 버릴 것만 같은 순간까지도.
7. 불꽃이 가장 밝게 빛나는 때는
“으음.......”
레이린은 눈꺼풀 위를 따갑게 찌르는 햇빛에 옅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목 안쪽과 입술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가, 직후 입술에 닿아 오는 차가운 감촉에 흠칫했다.
“손.”
낮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제 손을 들어 올려 물 잔을 쥐여 주었다. 누워서 물 잔을 쥔 채로 연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레이린이 푸스스 웃었다.
“안녕.”
잠긴 목소리로 건네는 인사에, 마찬가지로 갓 깨어난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드윈이 몸을 낮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안녕.”
마주 답하는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기만 해서.
레이린은 문득 지금이 찰나의 꿈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 * *
“부디 무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레이린은 인어들의 가장 앞에서 허리를 숙여 보이는 에피케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 간단히 매무새를 정리한 레이린은 곧장 인어들을 찾았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난 일이 있어서 이만!’
자그마한 공터 주위에서 다른 인어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네레이다는 황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레이린에게 귀를 붙들리는 바람에 도주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말없이 제 귀를 부여잡고 있는 레이린의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그녀는 끝내 샐쭉 미소 지었다.
‘그래도 우리 덕분에 원하던 건 손에 넣었잖, 아아아파!’
뻔뻔하게 말을 잇던 네레이다는 레이린이 손에 지그시 힘을 주자 금세 사과했다. 기실 레이린은 약간의 심술을 부렸을 뿐, 딱히 인어들에게 별다른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다.
지금껏 무의식중에 부정했을 뿐, 그녀가 가장 ‘원하던 것’은 에드윈 클로비스라는 사람이 맞았으니까. 그 사실을 인정했기에, 레이린은 에피케리스를 앞에 두고도 초연할 수 있었다.
제 곁에 선 에드윈을 힐긋 돌아본 그녀는 인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중에.......”
레이린은 무의식중에 훗날의 만남을 기약하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러자 상체를 바로 한 에피케리스가 모든 사실을 아는 사람처럼 빙그레 웃었다.
“봄이 돌아오거든.”
“.......”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에 황금색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내 레이린은 결국 항복하듯 픽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강을 따라 소니아 숲을 벗어난 레이린은 에드윈과 함께 켈레마로 향했다.
켈레마. 통칭 주술사의 마을. 그곳은 이 땅의 모든 신비가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폐쇄적이고, 꼭 그만큼이나 이름 높은 곳이었다.
물론 폐쇄적이라는 것이 외부인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외려 외부인들의 제작 의뢰, 주술석 거래 등은 활발하다시피 이루어졌다.
다만 ‘모든 주술사’는 의무적으로 켈레마에 적을 두어야 한다는 점, 신력을 가진 이를 판별하는 법이 켈레마의 촌장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점 등이 그들의 비밀스러움을 부각했을 뿐이었다.
“어이, 거기! 밀지 말고 줄을 서시오, 줄을!”
켈레마의 출입구는 마을로 들어가려는 사람, 마을에서 볼일을 끝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뒤얽혀 어수선했다. 제각기 후드를 푹 눌러쓴 레이린과 에드윈은 입구에서 고함을 치는 경비병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선 채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평범한 마을 같았으면 그저 다른 곳으로 숨어들면 되었을 테지만, 이곳은 켈레마. 마물과 침입자를 막아 내기 위한 결계가 항시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었다.
“아, 거기 새치기 좀 하지 말라니까!”
버럭버럭 고함치는 경비병을 바라보던 레이린과 에드윈이 시선을 한 번 교환했다.
두 사람은 이내 조용히,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움직였다. 길게 늘어진 사람들의 끝쪽으로 다가간 그들은 마치 스쳐 지나가는 사람인 양 줄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곁을 지나쳤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잠시 뒤. 마을로 들어가는 줄의 끄트머리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서부터 소란이 번졌다.
“어? 그건 내 지갑인데!”
“이, 이게 무슨!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뭐라고? 이 쥐새끼 같은 게......!”
“잠깐, 당신 뒷주머니에 그건 내 시계 아니야?”
“꺄아악! 도둑이야!”
사람들은 저마다 흥분한 고함을 내지르며 서로의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번진 소란은 줄의 앞쪽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닿았다. 고함을 들은 이들 중 절반은 호기심으로, 절반은 자신도 잃어버린 물건이 없나 확인하느라 잠시 입구에서 시선을 떼고 뒤쪽을 바라보았다.
레이린과 에드윈은 그 찰나를 틈타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부지불식간에 제 앞에 불쑥 솟아난 새카만 인영들에 경비병이 흠칫했다.
“뭐, 뭐.......”
둘 중 경비병이 올려다봐야 할 만큼 키가 큰 쪽의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였다.
“들어가도 되겠나?”
“무슨 말도 안 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지르려던 경비병은, 키가 작은 쪽의 망토 안쪽에서 짤랑거리는 금화 소리를 듣고는 급히 말을 바꾸었다.
“이번 한 번만이다. 빨리 들어가라고.”
레이린은 후드 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며 경비병의 손에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것을 제 주머니에 챙겨 넣은 경비병은 일부러 커다랗게 목소리를 높이며 줄 뒤쪽으로 향했다.
“그만! 이봐요들! 소란 피우지 마시오! 계속 소란 피우면 돌려보낼 테니까!”
“아니, 이 사람이 먼저......!”
“어허! 그만들 하라니까!”
경비병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틈을 타 레이린과 에드윈은 유유히 켈레마로 들어섰다.
마을 중앙의 분수대로 이어지는 긴 거리에는 가판대가 주르륵 늘어져 있었다. 레이린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일별하고는 후드를 더욱 깊숙이 눌러썼다.
“......촌장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셨죠.”
작은 목소리를 기민하게 귀에 담은 에드윈이 덤덤히 답했다.
“예.”
“저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각자 볼일이 끝나면 분수대 앞에서 모이죠.”
레이린은 태연한 어조로 말을 내뱉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에드윈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레이린이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영주님?”
언제부터인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에드윈이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맞춰 왔다. 깊이 눌러쓴 후드 아래로 새파란 눈이 선명하게 번뜩였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레이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자 돌연 상체를 숙인 에드윈이 레이린의 망토 자락을 끌어당기며 거리를 훅 좁혔다.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선 그가 황금빛 눈을 직시하며 또렷이 말을 내뱉었다.
“이번에도 도망치면.”
그 언젠가, 마티아스의 지하를 지나며 들었던 말이 다시금 그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팔다리의 힘줄을 모조리 끊어서라도 방 안에 가둬 둘 겁니다.”
“.......”
레이린은 그 과격한 말에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제 망토 끝자락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푸스스 웃었다. 에드윈과 코끝을 툭 맞부딪친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좀 혹하는데.”
은근한 중얼거림에 에드윈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레이린.”
나무라는 듯한 부름이 들렸다. 한결같이 고저 없던 목소리는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듯 짐승의 그르렁거림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레이린은 그것이 못내 기꺼워 웃으며 그의 손을 떼어 내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걱정 마요. 당신 두고 어디 안 가니까.”
후드 아래로 황금색 눈을 곱게 휜 그녀가 이내 몸을 돌리며 손을 팔랑였다.
“나 없는 사이에 누가 당신 옆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찢어 죽이고 싶어질 것 같거든.”
장난치듯 말을 맺은 그녀는 이윽고 골목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
그 말에 나지막이 헛웃음을 터트렸던 에드윈의 눈이 차츰 가라앉았다. 어느덧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얼굴을 한 그가 레이린의 잔상을 쫓아 골목 안쪽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
시야를 가득 메운 새카만 어둠에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얇고 얇은, 모래로 이루어진 선과도 같은 것이었던지라. 에드윈은 결국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녹색 지붕에 흰색 문...... 여긴가.’
레이린은 일전에 라그나르를 통해 전해 들었던 정보를 상기하며 어느 집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을 힐긋 돌아본 그녀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계십니까?”
목소리를 높인 레이린은 집 안의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저 안쪽에서부터 우당탕탕, 하며 무언가 쓰러지고 엎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가까워졌다.
“네, 네. 잠시만요! 아야!”
쨍그랑,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자그마한 비명이 들려왔다.
‘......뭔가 못 미더운데.’
나름 촌장의 제자라고 하기에 이 자에게 의뢰를 맡기고 있었는데. 정말 저런 사람한테 계속 목걸이를 맡겨도 괜찮은 걸까.
레이린이 미심쩍은 눈을 하던 차에 문이 벌컥 열렸다.
“죄송합니다. 연구 때문에 며칠 정리를 못 했더니 집이 더러워서.......”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약간 마른 체구의 청년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갈색의 생머리와 연푸른 눈, 낡은 티가 나는 외알 안경은 퍽 학자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금 뻗쳐 있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정리한 청년이 미안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혹시 길을 잃으신 거라면.......”
“아뇨. 에셀 님을 찾아온 게 맞습니다.”
에셀은 상대가 제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데 한 번, 말의 내용에 두 번 놀라 양쪽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린은 망토 안쪽에서 주술석 목걸이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제작해 주셨던 목걸이의 재제작을 의뢰하려고 왔습니다.”
“아, 마스카 상단에서 오신 분이셨군요.”
목걸이를 확인한 에셀의 눈에 이해했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레이린은 말없이 웃었다.
마스카 상단은 녹스가 실소유주인 수많은 상단 중 하나였다. 녹스의 이름만으로 활동하기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기에, 녹스는 이렇듯 물 위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를 몇 가지고 있었다. 그중 마스카 상단은 에셀이 목걸이의 의뢰인으로 알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레이린은 그의 오해를 구태여 정정해 주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번에도...... 아, 일단 들어와서 기다리시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에셀에게 목걸이를 건네준 레이린은 머리카락과 눈이 잘 가려져 있는지 주의하며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어디 앉을 수 있을 만한 곳에 앉아 계시면 금방 작업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작업하세요.”
레이린이 기분 나빠 하지 않자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쉰 에셀은 안쪽의 책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책상 위에 엉망으로 쌓여 있는, 알 수 없는 수식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아무렇게나 밀어 놓은 그가 깨끗한 종이 위에 무언가 새로운 수식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레이린은 한쪽에 가로로 놓인 책장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에 불규칙적으로 매달려 있는 주술석 등부터,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오리 모양의 장난감에 박힌 주술석까지. 이곳은 흡사 주술석으로 이루어진 광산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역시 주술사의 마을이라 이건가.’
작게 감탄하는데, 주술석을 들여다보던 에셀이 돌연 고개를 돌리더니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혹시나 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예상보다는 빨리 오셨군요.”
“......네?”
뜻밖의 말에 레이린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에셀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목걸이의 주술석을 끼운 채 말했다.
“매번 목걸이를 새로 제작해드릴 때마다, 제가 염두에 두었던 사용 기한보다 일주일, 혹은 이주일 정도 빨리 효능이 다했다며 찾아오시더라고요.”
“......?”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그저 진실의 호수, 혹은 인어들의 농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이 주기적으로 발생해 왔던 것이라면 그저 한순간의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길 일은 아닐 듯싶었다.
후드로 얼굴이 가려져 입매만이 드러났는데도 그녀의 의문을 알아챈 것인지, 에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도로 몸을 돌렸다.
“하긴, 저도 결국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으니까요. 스승님이랑 형님에게도 물어보았는데...... 아.”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에셀의 목소리가 불현듯 멎었다.
목걸이에 대해 고민하던 레이린은 그 부자연스러움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가 낭패 어린 얼굴로 입술을 말아 무는 것을 보고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형님?’
어조로 미루어 보아 친형제를 일컫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친구, 혹은 동료 주술사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일반 주술사가 그의 ‘스승’인 켈레마의 촌장과 나란히 거론되었다는 점이 미묘하게 거슬렸다. 촌장의 제자인 에셀이 풀어내지 못한 문제의 해답을 스승에게 물어보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스승도 아닌 일반 주술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상대의 실력이 에셀에 준한다는 소리일 텐데. 그런 실력자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조차 퍼져 있지 않았다.
‘한번 알아볼까.’
그리고 대개 이런 경우, 그녀의 머리보다 본능이 정확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미심쩍다고 외치는 제 감을 믿기로 한 레이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주변을 구경하는 척 넌지시 말문을 뗐다.
“이 안에는 신기한 것들이 참 많네요.”
그 말에 잠시 작업을 멈춘 에셀이 머쓱한 웃음을 띠며 제 볼을 긁적였다.
“연구하다가 필요가 없어져서 탈락한 수식들을 조금씩 변형해 적용한 것뿐입니다. 그렇게까지 쓸모 있지는 않더라도 조금 아쉬워서요.”
“그게 뭐 어떻습니까. 소소하게나마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실 레이린은 스스로의 말에 하나도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목소리만큼은 정말로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습니까.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셀은 조금 전보다 한결 경계심을 누그러트린 얼굴로 생긋 웃음 지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레이린의 옆으로 다가와 신이 난 듯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이건 저번에 스승님을 도와 연구하던 광범위 주술을 조금 축소해서 만든 겁니다. 여길 누르면 반경 3m 안쪽으로 비가 내리죠. 가끔 폭발 사고가 일어나서 화재 예방용으로 만들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이걸 전부 혼자 작업하신 겁니까?”
“아, 그건.”
잠시 들뜬 기색을 띠었던 에셀의 얼굴이 또다시 가라앉았다. 후드 아래로 눈을 빛낸 레이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난처한 목소리를 흘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아닙니다. 이건 그냥 제 죄책감 때문이니까요.”
씁쓸한 미소를 삼킨 에셀이 천장에 매달린 주술석 하나를 툭 건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실은 저와 같이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던 분이 한 분 더 계셨습니다.”
레이린은 바닥에 놓인 장식품을 살펴보는 척하며 기민하게 귀를 기울였다.
“야망이 조금 있는 분이시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셨는데. 스승님께서 후계자를 바꿀 생각이 없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그녀의 기척이 사라지다시피 하자 에셀은 혼잣말에 가까워진 중얼거림을 흘리며 주술석을 툭, 툭 치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아예 가 버리지는 마시지.......”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우울한 얼굴을 하던 에셀은 제가 지나치게 많은 말을 꺼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허둥댔다.
“아, 죄송합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에셀은 일부러 부산을 떨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창밖으로는 옅은 노을이 깔려 있었다. 레이린은 그제야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 양 몸을 일으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신기한 게 많아 구경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그 말에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의 에셀이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작업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마주 웃으며 대답한 레이린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에셀의 펜이 사각거리며 종이 위에서 움직이는 소리,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그녀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형님이라.......’
‘모든 주술사’는 켈레마에 머무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은 주술에 관련한 지식 등을 습득할 수 있는 곳이 켈레마뿐이라는 이유, 그리고 ‘주술사’들의 서약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루비’라는 보석 때문이었다.
루비는 주술사에게는 물, 공기와도 같은 보석을 일컫는 말이었다. 평범한 보석이 아닌, 켈레마만의 기술로 극비리에 정제되는 붉고 동그란 보석.
헤르기아스의 사람 중에는 이따금 ‘신력’이라는 신비한 힘을 내재하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신력은 본인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 안의 신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력을 ‘활성화’해야 했고, 그 활성화를 담당하는 것이 ‘루비’라는 보석이었다. 루비를 먹지 않는다면 신력이 있다고 해도 주술을 쓸 수 없다.
그리고 이 루비의 제조 방법과 재료는 촌장만이 알고 있으며, 루비는 오로지 켈레마에 정식으로 적을 올린 주술사들에게만 일정 수량 지급된다. 이것이 주술사가 ‘반드시’ 켈레마에 속해야 하는 이유이며, 켈레마의 촌장들이 루비의 생산과 공급을 철저히 통제하는 이유였다. 주술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특권 다발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레이린은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의문들에 잠잠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드리스가 금지된 주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의 밑에 상당한 실력의 주술사가 있을 거라는 추측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에셀이 이야기한 ‘형님’이라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이 의심이 ‘확신’까지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다. 그가 켈레마의 촌장과 후계자 문제로 다투었고, 그것으로 인해 켈레마를 떠났다고 치면. 그 말은 곧 더는 루비를 공급받을 수 없고, 주술사로서의 수명 또한 끝났다는 의미였다.
‘켈레마에 머무는 동안 받은 루비를 따로 챙겨 뒀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
루비의 효과는 일시적이다. 루비를 섭취하면 주술사는 일정 시간 주술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러니 형님이라는 사람이 켈레마를 떠난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그만한 양의 루비가 남아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린은 후드 자락 아래로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후드에 가려진 황금색 눈이 깊이 침잠했다.
‘......루비 없이도 주술을 쓸 방법이 있다는 건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무릎 위에 올라가 있던 주먹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똑똑.
켈레마의 촌장, 에스틴은 예정에 없었던 노크 소리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뉘시오?”
그녀는 막 들어 올렸던 쿠키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문밖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에드윈 클로비스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예?”
에스틴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들려온 이름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한창 짓궂을 나이인 아이들이 장난을 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문밖에 선 이의 목소리와 기척에서는 차마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당황한 에스틴은 의자에 기대어 두었던 지팡이를 짚고 다급히 문가로 다가갔다. 언제든 주술을 쓸 수 있게 속으로 시동언을 중얼거린 그녀가 긴장한 손길로 문을 열었다.
“누구시라고......?”
그리 말했지만, 사실 에스틴은 문 너머로 드러난 인영을 보자마자 질문은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후드를 뒤로 조금 젖혀 얼굴을 드러낸 청년이 담담히 묵례했다.
“이리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인 듯싶습니다만.”
짙은 흑색 머리카락에, 당장에라도 상대를 목 졸라 죽일 듯 위압적인 푸른색의 눈.
“에드윈 클로비스입니다, 에스틴 촌장.”
에스틴의 눈앞에 선 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유스티아의 영주 본인이었다.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군요.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단정한 자태로 소파에 자리를 잡은 에드윈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테이블 위에 급한 대로 다과상을 차려 놓은 에스틴이 불안한 얼굴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쩐 일이시기에 이리 직접 찾아오셨습니까?”
에스틴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태연함을 가장해 물었다. 매번 서류상으로 거래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이리 코앞에서 에드윈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는 정말이지 무섭도록 위압적인 사람이었다.
어조 자체는 공손했으나 감정을 표백한 듯 고저 없는 목소리. 그리고 목소리보다도 두려운, 무심하게 사람을 찍어 내리는 듯한 푸른 시선. 그를 앞에 두고 두려움을 티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에스틴에게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
에드윈이 말없이 품에 손을 집어넣자, 에스틴은 반사적으로 주술진을 그려 내려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에드윈이 품에서 꺼낸 것은 그저 평범한 서류였다.
“어차피 지나던 길이었기에 들렀습니다. 주술석의 거래량을 늘리고자 합니다. 최대한 많이.”
테이블 위에 서류를 내려놓은 에드윈은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그것을 에스틴에게 밀어 주었다. 속으로 깊이 안도한 에스틴은 그가 내민 서류를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사이, 에드윈은 내심 새삼스럽게 집 안을 둘러보았다. 온갖 부와 신비를 끌어안고 있다는 켈레마의 촌장이 사는 집이라기에는, 유스티아의 평범한 주민이 사는 곳보다도 낡아 보였다.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던 에드윈의 시선이 소파 옆쪽에 놓여 있는 책 무더기에서 멈칫 정지했다.
[하얀 소년]
책의 제목을 확인한 에드윈은 반사적으로 왕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하얀 소년’이라는 동화는 왕실의 신화를 담은 내용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기분은 나빴다.
“오래전.”
“신께서 이 땅과 인간을 버리신 것보다도 아주 오래전에.......”
“이 땅에는 온통 금빛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이름 없는 마을의 촌장이 레이린에게 건넸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촌장과 레이린이 마을 외곽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기사들을 감독하던 에드윈은 레이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녀를 찾아 나섰고, 우연히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순간 촌장의 등 너머로 보였던 레이린의 얼굴이.
“.......”
그 언젠가처럼, 당장에라도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것만 같이 보여서.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왕가의 신화를 담은 동화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드윈의 귓가로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는 맞춰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다음부터는 여기 적혀 있는 수량대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에스틴은 서류 하단의 공백에 제 서명을 적어 넣은 뒤 에드윈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서류를 받아 든 에드윈은 그것을 잘 갈무리해 품에 넣다가 문득 물었다.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만.”
에스틴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제게 말씀이십니까? 무엇이시기에......?”
그리 말하는 에스틴의 목소리는 조금 떨떠름했다. 무려 한 도시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어쩌면 왕족보다도 더한 위상을 지닌 유스티아의 주인이 제게 물을 것이 있다는 사실이 퍽 의아하게 느껴져서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신의 분노 이전에 대한 기록이나 책은 없습니까?”
지극히 단조로운 어조로 던져진 물음에, 에스틴은 찰나 눈에 띌 정도로 튀어 오르려는 어깨에 급히 힘을 주었다.
그래도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고, 켈레마의 수장직을 맡아 오며 쌓은 연륜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는지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동요를 지우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짐승의 것과 같이 선뜩한 푸른색의 눈에는 그 파란이 고스란히 비쳤다.
‘......?’
짙은 흑색 머리카락에 가려진 에드윈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신의 분노는 대륙의 부흥과 멸망을 갈라놓은 사건이긴 했으나, 입에 담는 것마저 조심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에스틴은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당황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눈에 익어 에드윈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저 모습은 꼭.......
‘지은 죄가 있는 사람.’
그들의 반응을 무척 닮아 있었다.
한편 에스틴은 질문을 듣기 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여상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요. 신의 분노 이전의 기록은 대부분 전소되어 사라진 것으로 압니다만. 왕실 도서관의 사정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습니까.”
에드윈은 의심의 기색을 거둬 내고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긍했다.
에스틴은 그가 이 문제를 더 붙들고 늘어지지 않음에 마음 깊이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사내와 오래 말을 섞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본능이 전하는 경고였다.
사람 좋은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에스틴이 지팡이를 쥐며 암묵적인 축객령을 내렸다.
“해가 지는군요. 부디 가시는 길이 불편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분수대에 걸터앉은 레이린은 노을에 물든 켈레마의 풍경을 말없이 눈에 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눈은 어느덧 엷은 회갈색을 띠고 있었다. 노을을 머금고 불어온 바람에 주술석 목걸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후드에 가려진 얼굴은 일견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녀의 머릿속만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상태였다.
‘위험하다.’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제약 없이 주술을, 그것도 정신 계열 주술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면 승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해도 좋았다.
‘안 되는데.......’
머릿속에 라그나르와 키안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녀는 한층 더 가라앉은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이드리스는 이미 한 번 윈프리드와 녹스를 노린 적이 있다. 다행히도, 일전에는 라그나르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며 선수를 쳤기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드리스의 성정 상 그가 이대로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빠른 시간 내에, 어떻게 해서든 이드리스 프리조프의 계획을 알아내고 대비를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금빛 인간’에 대한 일까지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시간도 얼마 없는데.’
레이린이 또다시 무의식중에 입술을 짓이기기 직전. 누군가의 손길이 그녀가 제 입술을 혹사하려는 동작을 막았다.
“그러다 피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어느샌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에드윈이 후드 아래로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린은 제 입술을 엄지로 누르고 있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돌연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겨우 이 정도로는 피 안 나요. 이것보다 더한 짓도 하신 분이 새삼스럽게 왜 그러실까.”
진실의 호수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말에 짙푸른 색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작 레이린은 그의 동요가 기껍다는 듯 엷은 미소를 띤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드윈의 눈이 차츰 깊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이윽고 레이린과 비슷한 웃음을 입가에 건 그가 낮게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그럴 때를 위해서라도 이런 곳에 상처를 만들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
“입 맞출 수가 없으니까.”
담담하게 말을 맺은 그가 레이린의 입술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 냈다. 그녀의 속이 예기치 못하게 한순간 크게 덜컥였다.
이 감정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애초에 말로 설명할 수나 있는 감정인가.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어떨 때는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은, 그런 심정.
“.......”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도발을 던졌던 레이린은 드물게도 당황한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곧 헛웃음을 흘린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큰일 났네. 이제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러나.”
레이린은 장난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에드윈이 은은한 분노가 배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라질 겁니까?”
“그러면 가둘 거라며.”
레이린은 입 안에서 떠도는 여러 말들을 삼킨 채 듣기에 좋은 답만을 내어 주었다.
“괜찮아.”
“.......”
툭 내뱉은 레이린이 말 없는 그를 또렷이 응시하며 흐리게 웃었다.
“당신 두고 어디 안 가.”
그녀는 에드윈의 손을 끌어당겨 조금 거친 손바닥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 이 얼마나 위선적인 평온인가.
그들이 어떤 감정으로 서로를 대하건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레이린이 첩자라는 것, 그녀가 올해 추락의 계절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그 두 가지 만큼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워서, 레이린은 차라리 이대로 세상이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잠시만.”
에드윈은 얼마간 레이린을 바라보다가 짤막한 말을 흘리며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레이린이 의아하게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몸을 낮춘 그가 예고 없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 쥐었다.
“읏.”
바지 아래로 언뜻 드러난 발목에 선연한 열기가 와 닿았다. 레이린은 여린 살을 스치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삼켰다.
덤덤한 얼굴의 에드윈이 손을 움직이자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차가운 것이 발목에 감기는 느낌이 났다.
이윽고 커다란 손이 느릿느릿 떨어져 나가자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쉰 레이린이 시선을 내렸다.
“......뭐야, 이게?”
엷은 회갈색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투명한 보석들이 촘촘히 얽혀 있는 얇은 발찌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찬란하게 반짝였다. 에드윈은 여전히 몸을 낮춘 채로 고개만 들어 레이린과 시선을 맞추었다.
“이제 곧 중앙에 다녀와야 하니까.”
이곳까지 오던 길. 거리에 길게 늘어선 가판대 위에 유달리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세요. 착용자를 보호하는 기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쪽지 아래에는 여러 종류의 발찌와 팔찌가 놓여 있었다.
일반적인 주술과 달리, ‘기원’은 그저 주술사들이 가볍게 축복하는 행위를 일컬었다. 실질적인 효능은 없지만, 주술석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주술의 대체재 차원에서 기원이 깃든 물건을 사용하곤 했다.
에드윈은 평소라면 저런 것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지나쳤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시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고,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손에 발찌를 쥐고 있는 채였다.
“원래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텐데.......”
에드윈의 손이 천천히 레이린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등을 대신해서 먼지투성이인 신발 위로 입술을 내린 그가 나직이 입을 달싹였다.
“이제는 이런 것에라도 기대고 싶어졌어.”
오직 레이린, 그녀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