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87)

* * *

초조함 때문인지 오늘의 해는 유독 느릿느릿하게 저무는 듯 느껴졌다. 길고도 길었던 노을이 저물고, 어느덧 보랏빛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을 무렵. 도망치듯 사라졌던 인어들이 강 저편에서 헤엄쳐 오며 경쾌하게 외쳤다.

“우리가 뭘 가져왔게!”

“짜잔!”

“선물이야!”

수면 위로 팔을 높게 쳐들고 있던 인어가 들고 있던 것을 레이린의 품에 안겼다. 레이린은 일견 천 뭉치처럼 보이는 흰색의 원피스를 슬쩍 들추어 보고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 옷은 어디서......?”

“예전에 우리가 여기로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짐들에 섞여 있더라고.”

“몇 벌 더 있어!”

인어들은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레이린을 바라보았다. 그 순수한 호의에, 레이린은 결국 낮의 일을 잊은 듯 엷은 웃음을 띠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마워요. 잘 받을게요.”

젖었던 옷은 진즉 다 마르긴 했지만, 습격으로 인해 이리저리 움직였던 탓인지 군데군데가 망가져 있었다.

‘나중에 갈아입고 외투라도 걸치면 되겠지.’

레이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원피스를 옆에 내려놓으려고 했으나 인어들이 저지했다.

“왜? 지금 입어!”

“맞아! 같이 목욕하러 가자!”

“......네?”

레이린은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인어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꿋꿋했다.

“진실의 호수와 대화하려면 그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지!”

“씻고 나면 거기로 데려다줄게!”

레이린은 난감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옷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에드윈을 눕혀 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인어들의 기세를 보아하니 형식상으로나마 저 말에 따르지 않으면 진실의 호수는 그림자도 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곧 인어들의 손에 이끌려 근처의 작은 호수로 향했다. 물론 호수까지 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 남자랑은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인데?”

짓궂은 질문에 잠시 멈칫했던 레이린은 이내 담담한 답을 흘렸다.

“그냥...... 잠깐 스쳐 지나갈 사람이에요.”

그래. 에드윈과 자신의 관계는 딱 그 정도여야 옳았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었고.

“거짓말! 거짓말!”

“맞아! 거짓말이야!”

“우우. 재미없어!”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던 인어들은 실망한 듯 귀를 파닥거리며 칭얼거렸다. 레이린은 반나절 만에 퍽 익숙해진 그들의 투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둑한 남색의 하늘에는 어느덧 흰빛을 띠는 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신이 나서 물에 뛰어든 인어들은 언제 투덜댔냐는 듯 레이린을 재촉했다.

“얼른! 여기 물은 그렇게 안 차가워!”

생각보다 제 몸에 잘 맞는 크기의 옷에 조금 놀란 눈을 하던 레이린은 이윽고 호수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인어들의 말대로 호수는 퍽 따뜻했다. 따스한 물에 몸을 맡기자 절로 노곤함이 찾아들며 긴장으로 굳어 있던 눈가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레이린은 한쪽에서 물장구를 치는 인어들을 피해 호수 중앙 쪽으로 걸어갔다. 수면이 가슴께쯤에 다다랐을 무렵 걸음을 멈춘 그녀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름답네.’

생경한 감상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별이 쏟아질 듯 박혀 있는 밤하늘과, 은색의 달빛이 잔잔히 부서지는 고요한 호수. 사뭇 아름다운 풍경에 레이린은 잠시 말을 잃고 달을 바라보았다.

홀린 듯 제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한쪽에서 시끄럽게 물장구를 치던 인어들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일이에요?”

갑작스러운 변화를 감지한 레이린이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세운 그녀가 한 발을 떼려던 차. 생긋 웃음 지은 인어들이 레이린을 향해 헤엄쳐 오더니 그녀를 둥글게 둘러쌌다.

“네레이다?”

레이린은 제 앞에 있는 네레이다를 보며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러나 네레이다는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레이린의 이마에 제 이마를 툭 갖다 대었다.

“우리가 제멋대로 굴었는데도 친절하게 대해 줘서 고마워.”

“.......”

“부디 당신이 걸어야 하는 길이 너무 괴롭지는 않기를 바랄게.”

“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던 레이린은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기분에 아무렇게나 입술을 뗐다.

하지만 그때, 뒤로 조금 물러난 인어들이 천천히 원을 그리며 레이린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푸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허밍이 겹겹이 합쳐지며 호수에 메아리쳤다.

그 가락이 이름 없는 마을에서 들었던 것과 같음을 깨달았을 무렵. 차츰 더 커다란 원을 그리며 멀어지던 인어들이 호수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붙잡으려던 레이린은, 수면 위로 언뜻 일렁이는 황금빛에 그대로 굳어졌다.

“......무슨.”

경악한 레이린이 어깨 아래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다급히 쥐어 올렸다. 선명한 황금색으로 물든 머리카락을 확인한 그녀가 당황하며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

‘왜?’

목걸이는 분명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주술석의 수명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아직 일주일 정도는-’

바스락.

“......!”

기민하게 기척을 감지한 레이린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

소름 끼치는 정적이 폐부를 아프게 짓눌렀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조금 커졌던 새파란 눈은, 이내 더없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그 속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던 에드윈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첨벙-!

에드윈은 거리낌 없는 태도로 호수에 발을 들였다. 인어들이 선물한 것으로 보이는 흰 셔츠가 속절없이 젖어 드는 것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레이린은 커다란 보폭으로 호수를 가르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당황해 뒤로 주춤 물러섰다. 도망치듯 뒤로 한 발자국을 더 움직이는 순간. 갑자기 그녀가 발을 디딘 바닥이 푹 꺼지며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아......!”

반사적인 탄식이 미처 새어 나오기도 전이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에드윈이 그녀의 무릎 아래와 등을 감싸 그대로 들어 올렸다.

“.......”

숨이. 차마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레이린은 코앞에서 마주한 푸른 눈에 그대로 시선을 빼앗겼다. 아니, 시선 하나뿐일까. 호흡, 자잘하게 떨리는 손끝의 감각, 피부 위로 맞닿은 열기 한 올마저.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 사로잡히는 느낌이란....... 정말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감각.

“.......”

레이린은 숨결의 끝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짙푸른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제 속처럼 요동치는 호수의 수면과 달리, 한 번의 일렁임조차 없이 잔잔하고도 깊은 푸른빛. 그녀는 그 눈에서 본능 같은 깨달음은 얻고는 잇새로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당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가면까지 모두 집어 던진 ‘레이린 브리어스’가, 날 것의 얼굴 그대로 입술을 달싹였다.

“알고.......”

“.......”

“......있었구나.”

에드윈은 갑작스럽게 뒤바뀐 레이린의 말투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태도에서 또 한 번 대답을 읽어낸 레이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아니, 그랬으면.”

언제부터, 어떻게. 이미 전부 드러난 마당에 그런 질문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정확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 가지.

“왜 나를 죽이지 않았어?”

레이린이 속삭이듯 흘린 물음이 더운 숨에 섞여 흩어졌다.

“.......”

어둠 아래서도 한낮의 태양 같은 빛을 띠는 눈. 에드윈은 그 어떤 가림막도 없이 온전히 드러난 그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질문이 틀린 것 같은데.”

낮고 낮아 금방이라도 수면 아래로 꺼질 듯한 목소리가 선명히 귓가를 파고들었다.

“죽이지 않은 게 아니야.”

“.......”

“못한 거지.”

아.

레이린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외면하고 외면해 오던 사실이 끝끝내 눈앞에 들이밀어지자 울듯이 웃었다.

이런 감정,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한평생 아무 기쁨도 모른 채로,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로 죽음을 맞고 싶었는데.

언젠가부터....... 저 마음이, 저 사람이 욕심이 나서. 내 미련이 온통 당신이라서. 그래서 당신만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다.

레이린은 이 순간, 저 대신 대답이라도 하듯 속도를 높여 뛰는 심장이 경멸스러웠다. 그것이 저를 끌어안고 있는 이 남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사실 또한.

“멍청하긴.”

돌연 입매를 일그러트린 레이린이 발악하듯 적나라한 비웃음을 머금고 속삭였다.

“나라면 당신을 죽였을 거야.”

스스로도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말들이 뱀의 속살거림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혀를 뽑든, 심장을 파내든 어떻게 하든 간에 가장 처참하고 비참한 방법으로 숨통을 끊었겠지.”

“.......”

“그게 나야.”

안타깝지만, 이런 음습하고 역겹기 짝이 없는 인간이야말로 그녀 자체였다.

모진 말이 쉼 없이 쏟아졌으나 에드윈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드러나지 않은 채였다. 그것을 본 레이린은 사납게 웃으며 속으로 기원하듯이 생각했다.

감당할 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면 이제라도 도망가길. 낮과 밤, 빛과 그림자, 불과 물처럼. 이 세상에는 결코 섞일 수도, 섞여서도 안 되는 것들이 존재했고 그것은 그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상관없어.”

그 순간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에 심장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레이린은 흡사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뭐?”

에드윈은 끝내 도망칠 구석조차 잃은 듯 보이는 얼굴을 기껍게 눈에 담으며 덤덤히 말을 건넸다.

“애석하게도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서.”

꿰뚫듯 상대를 직시하는 푸른 시선.

“지금의 내 선택으로 인해 수천, 수만 명이 죽는다고 한들 나는.”

“.......”

“후회하지 않아.”

그 시선에 숨이 막혀, 레이린은 차마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한 채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반쯤 내리깔린 속눈썹이 처연하게 팔랑였다.

시선으로 에드윈의 입술을 더듬던 레이린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내킬 땐 당신을 붙잡을 거고,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버릴 거야.”

“그래.”

“다른 사람한테 눈 돌리기라도 하면 눈을 파버릴 거야.”

“응.”

“난 내 것에 누군가 눈독 들이는 것도 싫어. 평생 나만 볼 수 있는 방 안에 가둬 둔다고 해도 괜찮겠어?”

“그래.”

“그러면.”

끝내 울음 같은 웃음을 삼킨 레이린이 오른손을 들어 올려 에드윈의 얼굴을 감쌌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 그 거리에서 움직임을 멈춘 레이린이 눈만 들어 올려 에드윈과 시선을 맞췄다.

“......함께 죽어줄 수도 있어?”

나라는 인간은 욕심이 많아서. 내가 죽어 없어진 세상에 당신이 홀로 남는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선택해. 함께 나락에 처박힐 것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등 돌려 모른 척 모든 것을 잊을 것인지.

“.......”

푸르른 어둠 속에서, 레이린의 눈이 형형히 빛났다. 한밤중에 떠오른 태양처럼 찬연한 황금빛. 기묘한, 혹은 오싹한 그 눈을 마주 보던 에드윈이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

“언제든, 몇 번이든 죽어줄 수 있어.”

“하.”

레이린은 끝내 시린 비소를 흘렸다. 저도 모르게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 사람은 정말, 제 생각보다도 훨씬 미친 사람이었다. 미쳤다는 말 이외에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먹잇감을 놓아줄 만큼 선하지 않았다. 흡사 인간을 나락에 빠뜨리고 환희하는 악마와도 같은 심정으로, 레이린이 낮게 중얼거렸다.

“......안 물러줄 거야, 이거.”

직후 두 입술이 격렬하게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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