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87)

* * *

“이런 멍청한!”

쾅!

바로크는 사지가 떨릴 만큼 커다랗게 고함을 내지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선 검은 옷의 사내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바로크는 이내 테이블 위의 다기들을 모조리 쓸어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간단한 일 하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연락이 끊겨? 고작 계집 하나다! 고작! 계집 하나란 말이야!”

와장창!

값비싼 다기들이 산산이 조각나 대리석 위를 나뒹굴었다. 하지만 바로크는 테이블 위로 떨어진 조각마저 사내에게 내던지며 길길이 날뛰었다.

“개 같은 것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내가 너희를 기르느라 들인 돈이 얼마인데 고작 이런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바로크는 씨근덕거리다가 말고 머리가 아찔해지는 느낌에 이마를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지난번 시르나티스 파티 때 우연히 목격했던 광경. 모자란 딸아이를 도와주던 여인의 머리카락과 눈이 한순간 찬연한 황금빛으로 물드는 순간을 목도했을 때. 그는 차마 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나의 피를 이은 자들아, 명심하거라.」

그의 부친이자 전왕이었던 사내가 죽기 직전에 보여 주었던 진실들. 개중에서는 모든 왕에게 주어지는, 경고와도 같은 초대 왕의 유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순백의 눈송이라면, 그들은 눈을 녹이고 봄을 되찾아올 황금빛 태양일지니.」

「만일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자를 마주하게 된다면.......」

「죽임당하기 전에 죽여라.」

「그는 저주받은 땅의 주인,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죽음에서 돌아온 자일 테니.」

「유리 왕좌 위에서 춤추는 왕들이여,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바로크는 왕위에 오르는 날부터 그 구절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잊으려 했으나 잊혀지지 않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왕좌는 제 것이었으나 제 것이 아니었으며, 대륙의 정점에 선 자신이 손에 쥔 모든 것들 또한 제 것이었으나 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누군가 되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평생을 갉아 먹히느라 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루에이리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는 그의 앞에, 보란 듯 예언 속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어떻게 해서든.......’

거칠게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렸다.

“명하십시오.”

곳곳에 생채기를 매달고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백색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 바로크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 보니 탄신연이 얼마 남지 않았군.”

연하늘색 눈이 어둠 속에서 무섭도록 선명한 빛을 띤 채 번뜩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빠르게 손에 넣어야겠지.”

머릿속으로 에드윈, 그리고 아네트의 모습을 나란히 떠올린 그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랫것들에게 초대장을 배포하라고 일러라.”

비록 제 자식은 실패작이라지만, 그 실패작의 몸뚱이만큼은 아직 쓸모가 남아 있지 않은가.

“자고로 연회란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 아니겠나.”

바로크는 망각의 강에서 기어오른 악귀 같은 웃음을 띠며 몸을 일으켰다.

* * *

“커헉!”

레이린은 눈을 뜨자마자 밀려드는 고통에 왈칵 기침을 토해 냈다.

“콜록! 욱.......”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목구멍까지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쓰라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며 구역질하던 레이린은 제 허리께를 감싸고 있는 묵직한 무게감을 인지하자마자 흠칫 숨을 멈추었다.

“......!”

놀란 레이린이 눈을 번쩍 떴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제 뒷덜미를 간질이는 숨결에 그대로 굳어졌다.

지독하리만치 익숙해진 누군가의 인기척, 그리고 숨결. 젖은 옷 너머로 바싹 맞붙어 있는 이의 온기.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사람이 에드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폭포에 처박히기 전, 허공으로 추락하는 제 손을 잡아채던 그의 얼굴이 빌어먹게도 선명했다.

‘레이린!’

그리고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마저도.

‘어떡하지.’

레이린은 차마 눈을 뜰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대체 왜. 왜 에드윈은 여기에 있는 걸까.

레이린은 유스티아를 벗어나자마자 교묘히 제 행적을 감추면서 이동했다. 그런데도 이렇듯 정확히 위치를 발각당했다면, 그는 레이린이 유스티아를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뒤를 밟았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애초에 자신이 첩자임을 의심, 혹은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일진대. 그렇다면 어째서.......

‘의심이 들자마자 곧장 죽이지 않은 거지?’

바로 그때, 귀가 아플 만큼 높은 음성과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혼란을 잘라 냈다.

“아, 일어나셨나 보네!”

레이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명료해진 시야에 비친 광경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뭐.......”

저를 감싸고 있는 에드윈에 놀라 미처 눈에 담지 못했던 광경이 뒤늦게 시야에 비쳤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발붙이고 있던 헤르피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깊은 숲. 레이린과 에드윈이 쓰러져 있던 곳 바로 옆쪽으로 이어지는 짙은 푸른빛의 강. 그리고 그 강에서 솟아오른,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물갈퀴를 달고 있는 한 여자의 얼굴. 피부마저 푸르스름한 그녀는 흰자가 보이지 않는 푸른색의 눈을 휘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생각보다 일찍 정신을 차리셔서 다행이에요! 저 남자야 원체 회복력이 괴물 같은 사람인 것 같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아 보여서 걱정했답니다.”

레이린이 잠시 말을 잃은 사이, 첨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물가로 다가온 여인이 팔을 뻗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짙은 녹색의 수초 뭉치가 놓여 있었다.

“받으세요. 씹으면 체온을 유지하기가 한결 수월하실 거예요. 숲을 벗어날 때까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테니 안 먹는 것보다는 나을 거랍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레이린은 여인의 모습을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말에 제약이 없는 이들이 하나 있지.’

인간 같지 않은 외양.

‘혹 진실의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가?’

고대 생물인 켄타우로스가 언급했던 ‘그들’이라는 존재.

레이린은 제 무릎 위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에드윈을 힐긋 일별하고는 설핏 웃었다.

“사양할게요. 내가 이곳까지 찾아온 목적은 당신이니까.”

“네?”

여인은 그 말에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게 무슨-”

의아함을 담아 내뱉어지던 목소리가 돌연 뚝 끊어졌다. 여인의 푸른 눈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크게 부릅떠졌다.

“당신.......”

레이린은 어느새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내려 손에 쥐고 있었다. 이내 엷은 회갈색을 띠던 머리카락과 눈이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켄타우로스 알렉시스의 소개를 받아 찾아왔습니다.”

레이린은 여인, 아니. 상체는 인간의 모습, 하체는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인어’를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진실의 호수에 답을 구하고 싶습니다.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레이다는 얼마간 정신없이 수면 아래를 들락거리더니 곧 레이린을 어딘가로 안내했다.

“진실의 호수에서 원하는 답을 얻으려면 달이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일단은 일행분부터 치료하러 가죠.”

레이린은 네레이다의 말에 에드윈을 부축해 일으키다 말고 뒤늦게 기겁했다. 그의 등은 아까 절벽 위에서 일어났던 폭발 탓인지 온통 피범벅이었다.

‘멍청이.’

이를 악문 레이린은 에드윈을 업은 채 네레이다를 따라 뛰듯이 걸었고, 이내 가는 지류에 둘러싸인 동그란 공터에 다다랐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네레이다는 공터에 에드윈을 눕히라 말하고는 물속으로 풍덩, 잠겨 들었다.

레이린은 에드윈의 상처를 조심하며 그를 바닥에 엎드려 눕혔다. 새빨갛게 물들어 넝마가 된 등이 시야를 가득 채우자 또다시 무언가가 목구멍 안쪽에서 울컥 치받았다. 눈을 감은 레이린은 필사적으로 호흡을 고르며 분노를 갈무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터 주변의 수면이 일렁거리더니 인어들의 머리가 차례로 튀어나왔다. 레이린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자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인어들이 하나같이 웅성거렸다.

“진짜, 진짜다.”

“그런데 느낌이 좀.......”

“응.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인어들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속닥거리며 바쁘게 입술을 움직였다.

레이린은 평소라면 저들에게서 호수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가식적인 웃음이나마 지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에드윈으로 인해 퍽 초조한 상태였기에 여유랄 것이 없었다.

레이린은 불쑥 날카로운 말을 토해 내려 들썩이는 입술을 힘겹게 말아 물며 숨을 골랐다. 다행히도 레이린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 수면 위로 머리를 쑥 내민 네레이다가 등 뒤를 돌아보며 마구 손짓했다.

“에피케리스! 얼른, 얼른!”

“약초는 챙겨야 할 것 아니냐, 네레이다.”

한숨 같은 목소리와 함께, 중후한 인상의 인어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린과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했던 그녀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는 공터 가까이 헤엄쳐 왔다.

“그분을 이쪽으로 조금만 옮겨 주시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저희는 뭍 위로 올라설 수 없는지라.”

에피케리스는 다른 인어들보다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를 내며 땅 위로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린은 물가에 걸터앉아 에드윈의 머리를 제 무릎에 기대게 하며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부탁드립니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속삭였다. 에드윈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러자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에피케리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죠.”

선선히 답한 에피케리스는 바구니 안의 약초를 꺼내어 에드윈의 등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어느새 레이린의 주위로 모여든 인어들이 땅 위로 팔을 괴며 종알거렸다.

“걱정하지 마. 우리 할멈 솜씨만큼은 최고니까.”

“맞아. 아마 밤쯤이면 멀쩡하게 일어나지 않을까? 애초에 골격부터 심상치 않은데.”

“그럼, 그럼.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짐승 놈들보다야 우리 할멈이 훨씬 낫지.”

“시끄럽다. 정신 사납게 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시끄럽게 종알대던 인어들은 에피케리스의 형형한 시선을 받고 나서야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호시탐탐 말을 시작할 기회를 노리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를 반복했다.

한편 레이린은 에피케리스가 허튼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굳어 있던 어깨를 늘어트릴 여유가 생겼다. 가볍게 한숨을 삼키던 그녀는 제 옆얼굴로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음 지은 인어들이 합창하는 것처럼 조잘거렸다.

“왜? 왜?”

“우리한테 할 말 있어?”

“무슨 일 있어? 왜?”

켄타우로스는 지나치게 입을 다물어서 문제더니, 인어들은 정반대였다. 레이린은 절로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느낌에 한숨을 내쉬려다가 말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진실의 호수에서 알아낼 수 있는 답은 한정적일 것이다. 아직 겪어본 적은 없으나 전설은 대체로 ‘전설’로 취급되는 이유가 있기 마련.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자신이 알아내고자 하는 진실의 발끝조차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니 조금 더 확실한 건 이쪽.’

레이린은 인어들과 시선을 맞추며 그린 듯이 눈을 휘었다.

켄타우로스들만큼 오래 살았으며,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과 기억을 가진 존재들. 그들의 입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 더 많을지도 모르니 한번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그럼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응, 응! 물어봐!”

“많이 물어봐도 돼!”

“우리가 뭘 먹고 사는지도 다 알려 줄 수 있어!”

인어들이 흥분해 외치는 소리를 반쯤 흘려넘긴 레이린은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선은 가장 무난하게 들리는 질문부터.

“여기는 소니아숲 안쪽인가요?”

무구한 물음에, 인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소니아숲, 음....... 인간들은 여기를 그렇게 부르나?”

“우리가 여기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후로 그렇게 불렀나 보지.”

“아하.”

‘여기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후’라는 말을 기민하게 귀에 담은 레이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왜 여기서 살기 시작하신 건데요?”

“음, 그건.......”

잠시 뜸을 들이던 인어 하나가 짓궂은 미소를 띠며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안 알려 줄 건데?”

레이린의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에 순간 쩌적, 금 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네?”

찰나 얼굴을 일그러트릴 뻔한 레이린은 아래로 떨어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하지만 하나같이 장난스러운 얼굴의 인어들이 서로 꼬리로 물을 튀기며 쫑알대자 그조차도 사라졌다.

“응! 안 알려 줘야지!”

“맞아! 할멈이 지나간 일은 돌아보지 않는 거랬어!”

“뒤돌아볼 시간에 앞이나 조심하라고 했지. 잘못 헤엄치다가는 머리 박는다고!”

저들끼리 물장구를 치며 낄낄거리던 인어들은 이내 하나둘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레이린은 잔잔한 파문이 이는 수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이마를 짚었다.

켄타우로스의 이명이 지식의 정수라면, 인어의 이명은.......

‘악동.’

켄타우로스들은 원체 인간을 꺼려서 그런지 그들의 특성이나 성격 등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다시피 했다. 그러나 인어들은 달랐다. 수많은 고서와 동화 등에 묘사되어 있는 인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육십 먹은 노인마저 거리낌 없이 울리곤 한다는 장난기.

‘안이했어.’

레이린은 이제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스스로를 질책하며 한숨을 삼켰다. 인어들의 성정은 마치 청개구리와 같은지라, 무언가를 원하는 티를 내면 오히려 그것을 손에 쥐고 상대를 놀려 먹기 바쁜 종족이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레이린이 재차 한숨을 삼키는 순간. 치료를 마친 듯 에드윈의 등에서 손을 뗀 에피케리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희는 자유로운 입을 가졌으나, 단지 그뿐입니다.”

“......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에피케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약초를 하나둘 정성스레 주워 담으며 덤덤히 말했다.

“인간이건 아니건, 큰 흐름에 관여하는 자는 반드시 화를 입게 됩니다.”

“.......”

“하여 저희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물 흐르듯, 바람 따라가듯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을 택했지요.”

레이린은 그제야 제가 어떠한 실수를 했는지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말에 제약이 없는 이들이 하나 있지.’

켄타우로스 알렉시스의 그 말. 그는 인어들의 말에 ‘제약이 없다’고 했을 뿐, 인어들이 그것을 ‘말’의 형태로 꺼내 놓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돌 위로 물 한 방울 흘려보낸다고 해서 돌이 파이지는 않습니다.”

손에 담겨 있는 약초 부스러기를 바구니에 넣은 에피케리스가 또렷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매일 매일 돌 위로 물을 떨어트린다면 돌은 결국 파이고 깎여 반으로 갈라지지요.”

레이린의 눈이 조금 더 짙은 빛을 띠며 가라앉았다. 그녀는 언뜻 서늘하게도 느껴지는 시선으로 제 앞의 존재를 빤히 바라보았다.

에피케리스는 이내 땅 위에 올려 두었던 바구니를 챙겨 들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냈다.

“긴 세월, 여러 사람이 얽혀 쌓인 업보는 저희의 가벼운 말 한마디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말에 흰 눈밭 위로 흩뿌리듯 떨어지던 핏방울들이 또다시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레이린은 저도 모르게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해가 지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러나 에피케리스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부디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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